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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민영환에 대해서,,,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3,685 작성일2004.10.29
안녕하세요,

학교 숙제 때문에 그런는데요,

민영환에 대해서 알고싶어서요!

그러니까, 민영환의 좋은 점과 나쁜점 ,

잘한 짓과 못한짓 등을 나누어서 알려주셨으면 해요,

그리구, 민영환에 대한 증거자료도 함께 알려주시면

더 좋겠네요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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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7월 2일 출생한 민영환의 본관은 여흥이고, 자는 文若이며, 호는 桂庭으로 謙鎬의 아들로 명성황후 민씨의 조카였는데, 伯父인 驪城府院君 泰鎬에게 입양되었습니다. 1877년(고종 14) 童蒙敎官에 임명되고, 이듬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그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뒤 正字 ·수찬 등을 거쳐 1881년 同副承旨, 1882년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가 당년 생부 겸호가 임오군란으로 살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3년간 居喪하였습니다.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는데,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사직상소를 올렸지만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일단 官界로 돌아와, 약관의 나이로 도승지·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漢城右尹 등을 지냈고, 1887년 商理局總辦·親軍前營使를 거쳐 예조판서가 되었습니다. 1888년, 1889년 두 차례에 걸쳐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1893년 형조판서·한성부윤을 지냈으며, 1894년 내무부督辦事 및 형조판서를 다시 역임하였습니다.

1895년 駐美全權公使에 임명되었으나,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부임하지 못하고 사직하였습니다. 이듬해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戴冠式)에 참석하였는데, 이 때 일본 ·미국 ·영국 등지를 두루 거치면서 서구문명을 처음으로 접하였습니다. 귀국 후 의정부贊政 ·군부대신을 지낸 다음, 1897년(광무 1) 또다시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전권공사로 겸직 발령을 받고 외유하였습니다.

이 때 영국 여왕 빅토리아의 즉위 60주년 축하식에도 참석하였습니다. 잦은 해외여행으로 새 문물에 일찍 눈을 떠, 개화사상을 실천하고자 유럽제도를 모방하여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民權伸張을 꾀할 것을 상주하였습니다. 軍制의 개편만이 채택되어 元帥府를 설치하여, 육군을 통할하게 하였습니다. 1896년 독립협회를 적극 후원하여 時政의 개혁을 시도하다가 당시 국정을 농단하던 민씨일파에게 미움을 사 파직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 다시 기용되어 參政大臣 등을 지내고, 勳一等과 太極章을 받았습니다.

친일적인 대신들과 대립, 일본의 내정간섭을 성토하다가 侍從武官長의 閑職으로 밀려났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趙秉世와 함께, 百官을 인솔하여 대궐에 나아가 이를 반대하였습니다. 일본 헌병들의 강제 해산으로 실패하자, 다시 종로 白木廛都家에 疏廳을 열고, 상소를 논의하던 중 이미 대세가 기울어짐을 보고 집에 돌아가 가족들을 만나본 뒤 국민에게 보내는 유서를 명함 앞뒤에 연필로 5통을 작성하고, 典洞 李完植의 집에 가서 1905년 11월 4일 새벽,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고하는 유서 3통을 남기고 단도로 자결하니 그 때 향년 45세였습니다. 당대 제일의 권문세가 출신으로서, 顯職의 명예를 던지고 亡國의 슬픔을 죽음으로써 달랬습니다. 議政大臣에 추증되어, 고종의 묘소에 배향되었습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중장(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충정공이 자결을 하실 때 입으셨던 혈의에서 후일 청죽이 자라난 것은 유명한 고사입니다. 현재 고려대박물관에 소장하고 있으며 1906년 7월 15일 한 일본인이 찍은 사진과 함께 소장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 호주대사 민충식 씨는 "죽음으로써 영원한 生을 누리겠다는 충정공의 기개는 곧 여흥민씨 門中魂"이라고 말하였지만, 어찌 한 가문의 혼만 깃들었겠습니까! 여흥민씨의 문중혼이 아니라 죽음으로 국가와 명운을 같이 하겠다는 한민족 전체의 혼이 담긴 것이라고 해야겠지요.

단점도 꼽아달라고 하셨는데, 참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굳이 꼽으라면 당시 조선말기에 명성황후 일가에 의해 국정이 어지러워졌는데, 이를 시정하기 위해서라면 능력도 없이 여흥 민씨라고 하여 벼슬을 차지하던 이들에게 벼슬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요구조차 시도하지 못한 점과 당시 포악무도한 이로 소문났던 생부 민겸호가 임오군란 때 죽임을 당하자 벼슬을 그만두어 임금에 대한 충성보다 만인의 지탄을 받았던 생부에 대한 효를 앞세운 점 정도라고 해야겠지요.

2004.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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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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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의 좋은점과 나쁜점이라니...

민영환은 을사오적에 의해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자살을 한사람으로 알고있습니다만....

2004.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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