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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이설

대일결전론을 목숨으로 실천한 홍주의병장, 건국훈장 독립장 1963

[ 李偰 ]

출생 - 사망 1850.1.24. ~ 1906.4.29.(음력)

이설은 을미사변 발생하자 관찰사에게 창의할 것을 권하였으나 끝내 거절당하고, 의병을 이끌고 홍주에 집결하였으나 창의소를 차린지 하루만에 체포된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목숨을 건 상소 투쟁을 전개하고 제2차 홍주의병을 독려했지만, 국권회복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출처: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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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 하였으나 힘이 모자라 도적을 치지 못하였다. 차마 君父가 당한 욕을 말한다면 의리상 살아 있을 수 없어서 춘추필법에 따라 붓으로라도 주륙하려는 뜻을 품고 바야흐로 항의하는 장계를 올리고자 하였는데 그 명분이 의거의 당에서 나왔기에 마침내 체포되었다. 죽음이 있을 따름이요. 다른 할 말은 없소이다.”

가계와 관료 생활

복암(復菴) 이설(李偰)은 철종 원년(1850) 1월 결성군 화산면(현, 충남 홍성군 구항면 오봉리)에서 부친 조익(祖益)의 장자로 태어났다. 모친 광산김씨는 김재미(金在美)의 딸로 ‘온화정숙’한 분이다. 자는 순명(舜命) 또는 순도(舜徒), 호는 복암(復庵)이다. ‘복암’은 옛집에 돌아간다는 뜻으로 그가 과거에 급제한 이후에 사용하였다.

본관은 연안이니 판소부감공파(判小府監公派)의 제1대조 현려(賢呂)의 24세손에 해당한다. 연평부원군 이귀(李貴, 호는 묵재(黙齋), 1557~1633)는 그의 10대조이다. 이귀는 성혼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광해군의 폐정에 아들 시백(時白), 시방(時昉) 등과 함께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물이다. 이설의 직계 선대에는 문과 출신자가 여러 명이며, 호조판서, 목사, 군수 등 고관을 역임한 이가 있는 등 누대에 걸친 문신가문 출신이다. 화산면에 선대가 세거하기 시작한 것은 호조판서를 역임한 9대조 시방(時昉, 1594~1660)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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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설 선생 생가 터 ⓒ독립기념관

이설의 집안은 홍주지역의 명문가였다. 그러나 증조부터는 벼슬을 않고 더욱이 그의 생부 조익(祖益)은 그가 13살 때, 양부인 조겸(祖謙)마저 19살 때 작고하여 가세는 기울었다. 이에 따라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7살부터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읽고 9살 때부터는 족조인 이훈(李壎, 1804~1868, 자는 치화(穉和), 호는 계암(溪菴))에게 소학을 배웠다. 이때부터 남당 한원진의 학문을 잇고 있는 이돈필의 문하에도 나아가 수학하였다. 이설은 이돈필 제문에서 그를 ‘맑고 총명하며(淸敏) 바르고 강직하다(耿介)’라고 추모하면서 자기를 아껴 주던 스승 이돈필의 죽음을 애석해 하고 있다.

(전략) 내가 어려서부터 공(이돈필)을 쫓아다녔으며 공이 나를 동생으로 나는 공을 형처럼 공경하였습니다. 이제 흰머리가 되어 여생 동안 어디에서 서로 찾겠습니까. 송애(松崖)에서 독서할 때 연사(蓮寺)에서 시를 짓던 일이 어제와 같이 역력합니다. 공이 이제 나를 버리고 갔습니까. 아! 정말 슬프옵니다. 청민(淸敏)한 식견을 어디서 다시 보리오. 개경(介耿)한 지조를 어디서 다시 보리오. 나를 알아주고 나를 아껴주던 사람을 어디서 다시 보리오. 아! 슬프다. - 이설, 「代人祭農隱李公文 壬寅」, 『復菴私集』(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서관 소장).

15살 때인 1864년 양부가 관직을 받고 상경하게 되어 족형인 이위(李偉, 1830~1872, 자는 유문(幼文), 호는 양소재(養素齋))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1866년 병인양요에 조정에서 방책을 널리 구하자 ‘응상동뢰차(凝上冬雷箚)’를 지었으며, 1878년에는 ‘의상척양왜소(擬上斥洋倭疏)’를 올렸다. 관직이 없어 올려지지는 못하였으나, 이 상소에서 그는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점차 득세하고 척화하는 자들은 도리어 화를 입게 됨을 지적하였다. 이어서 왜는 서양의 앞잡이(‘전도(前導)’)임을 밝히고 이러한 왜와의 화친을 주장함은 곧 매국행위임을 천명하였다.

이설의 홍패 ⓒ유족

그 후 과거공부에 치중하였다. 그러나 이설의 관계진출은 학문에 비하여 늦은 편이었다. 33살 때인 1882년에 생원시 복시에 합격하였으며, 1888년 겨울에 알성과 응제시에 합격하고 다음 해인 1889년 12월 비로소 식년시 전시에 합격하였으니 이때 그의 나이 40이었다. 비록 과거에는 늦게 합격하였으나 발표 당일 홍문관 부수찬(종6품)에 특제되었으며, 다음해 수찬(정6품), 사간원 정언(정6품)에 제수되었다. 이어서 1891년 정월 홍문관 수찬에, 6월에는 서학교수가 되었다. 1893년 9월에 수찬․중학교수․장령이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11월에는 교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였다.1)

1894년 봄에는 응교에 제수되었으며, 얼마 후에 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일본이 내정개혁을 강요하자 상소를 올려 이를 거부할 것을 주청하면서 사임하였다. 그러한 이설에게 정부에서는 오히려 동부승지․우부승지를 제수하여 임금을 보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 상소를 올려 ‘소중화’의 맥이 끊어지게 될 것을 염려하고 이를 지키기 위하여 일본과의 전쟁을 결행할 것을 주청하였다. 이상소를 올린 다음날인 6월 21일 갑오변란이 일어나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점령되고 친일 내각이 조직되는 등 반식민지상태에 빠짐에 그는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낙향한 이설은 곧 이어 홍주부 일대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전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홍주목사 이승우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어 동학을 배척할 대책으로 병사를 보충할 것과 산성을 수축할 것 등의 대비책을 건의하였다.

사상

이설은 문신이자 의병장으로 많이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는 기호지역의 유학자로서도 뛰어남을 그의 글을 통하여 살필 수 있다. 조선조 성리학은 퇴계 이황의 사칠이기론(四七理氣論)과 율곡 이이의 인심도심론(人心道心論)으로 성리학 이론의 바탕이 구축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들어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과 외암(巍菴) 이간(李柬)의 인물성동이론을 중심으로 한 호락시비가 전개되는 등 학문적으로 발전을 보았다. 이설은 그중에서 율곡에서 송시열을 거쳐 한원진으로 내려오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한 유학자라 할 것이다.

이설은 율곡 이이를 기호학파의 종장으로서, 나아가 자신의 학문의 선사(先師)로서 추존하였다. 이에 따라 이이의 학설을 추종하였으며, 그에 대한 비판을 묵과하지 않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가 장성의 유학자 기정진(奇正鎭, 1798~1879, 호는 노사(盧沙))을 비판함은 이러한 그의 학문적 입장을 대변하는 구체적인 사실이 된다. 즉 기정진이 「납량사의(納凉私議)」와 「외필(猥筆)」을 지어 자신의 학문이 ‘주리지학(主理之學)’임을 자처하며, 이이의 ‘주기지학(主氣之學)’을 이단이라 하여 비판하자, 이를 ‘가련하고, 슬프고, 위태롭다’고 비판하며 김복한 등과 함께 통문을 작성하여 인근의 유림들에게 돌려 이를 통박하였다.2) 더욱이 최익현이 기정진을 이이보다 더 현명하다고 기정진의 설을 옹호하자 ‘우리의 입으로 최모(崔某)라는 이름 석 자를 다시는 올려서는 안된다.’라며 그를 성토하였다.3) 정산(定山)에 거주하던 최익현이 1906년 홍주의병에 참여하지 못하고 전라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은 이와 같은 홍주지역 유생들과의 학문적인 견해차가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설은 한원진의 주요 사상인 인물성이론에 영향 받은 바가 크다. 이에 따라서 그의 학문적 성격은 ‘척이단적(斥異端的) 화이론(華夷論)’과 절의론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설과 한원진은 동시대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같은 홍주 출신으로 한원진의 학문적 위치로 보아 홍주문화권 내에서 한원진이 끼친 학문적 영향은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4) 더욱이 이설의 족증조(族曾祖)인 신재(新齋) 이도중(李度中, 1763~1830)은 한원진의 문인이었으니,5) 이설은 개인적으로 한원진의 사숙문인임을 자처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한원진과 이도중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율곡은 주자의 충신이요, 남당(南塘)은 율곡의 충신이다.
우리 족조(族祖) 신재(新齋) 선생은 곧 남당(南塘)의 충신이다.
한간(寒澗, 필자주: 김한록(金漢祿))은 당문(塘門)의 만진(晩進)으로 증자가 득종(得宗)한 것과 같고
신재(新齋)가 당문(塘門)의 사숙임은 맹자가 위도(衛道)함과 같다.
그리하여 이 두 선생을 남당(南塘)의 영당에 철향하였다.
- 이설, 「謾錄」, 『복암집』 권14, 275~279쪽.

이도중은 죽은 후에 남당영당에 배향되었다. 이 사실은 한원진의 문인 중에서 차지하는 이도중의 위치를 알게 해 준다. 아울러 이설이 한원진의 사숙문인이 됨을 계통적으로 알려준다. 또한 한원진을 존숭한 이설은 사숙문인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홍주의병에 참여하여 1개월 이상의 옥고를 치르고 1896년 2월 석방되어 고향에 돌아온 그는 먼저 한원진의 묘소를 참배하고 제문을 바치고 있다. 그리고 이 제문에서 한원진이 말한 유석(儒釋)과 화이(華夷)의 분별이 없어졌음을 통탄하고 있다.6) 이설은 또한 1901년 김복한ㆍ유호근ㆍ조구원(趙龜元)ㆍ김용제(金龍濟) 등과 함께 「남당연보」를 간행하여, 사숙문인임을 자처하며 문인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7)

이와 같이 특히 한원진의 사상은 이설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김복한이 「복암선생묘지명」에서 자신의 내종형이며 동시에 동지이기도 하였던 이설을 “율곡과 남당의 충신”이라고 함은 적절한 평이라 하겠다. 이설과 같이 한원진을 추종했던 인물은 김복한 이외에 임한주ㆍ임승주 형제 등이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당문(塘門)’이라 하였다. 이들이 홍주의병을 일으킨 주도자들이니 홍주의병의 사상적 원류로써 척사론이 한원진의 인물성이론에까지 올라감을 알 수 있겠다.8)

이설 선생의 묘소 ⓒ유족

남당 한원진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이설은 서세동점의 민족적 위기에 위정척사론을 확립 발전시켰다. 일반적으로 위정척사론은 정학(正學, 주자학(朱子學))을 지키고 사학(邪學)을 배척함을 의미한다. 이설은 주자학을 철저히 신봉하였으며, 천주교를 사학으로 보았으며, 불교에 대하여는 ‘위정척사’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까지 이를 비판하였다.9)

이설의 위정척사론은 시기에 따라 약간의 변화를 보이면서 전개됨을 볼 수 있다. 그가 1866년 작성한 「병인소」는 초기단계의 위정척사론의 내용을 알려준다. 아직 어린 나이였으며 관직도 없었기 때문에 상소가 전달될 수는 없었으나 당대 최고의 유학자인 이항로와 기정진이 앞 다투어 척사 상소를 올리던 이때에 그 역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요점을 들어 상소를 지은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1)복황묘(復皇廟), 득인심(得人心), 2)금사학(禁邪學), 3)정토본(停土本), 4)개언로(開言路), 5)계일락(戒逸樂), 6)면성학(勉聖學)과 같은 내수외양책을 논리적으로 제시하였다. 첫째 조목이 ‘황묘를 복원하고 인심을 얻을 것’이다. 이는 바로 대원군이 철폐한 만동묘를 복원시켜 송시열 이후 유생들의 강력한 지도이념의 하나인 소중화론을 수호하자는 것으로 이는 그의 ‘위정론(衛正論)’의 요체라 하겠다. 또한 제2조에서 ‘사학을 금할 것’이라 하여 서양학문과 사상을 금지시켜야 한다는 외양책인 ‘척사론’을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바로 그의 “위정척사론”의 기조는 ‘위소중화(衛小中華), 척사학(斥邪學)’임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그는 일찍부터 위정척사론을 그의 사상체계로 확립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의식은 그의 평생의 지도이념이 되었다.

그러나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고 민씨 정권 주도하에 개화정책이 전개되자 이설의 척사론은 약간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즉 유생들이 척사상소를 올려 화의(和議)를 배척하였으나 오히려 정부에 의해 이들이 배척되어 유배에 처해지는 형세에 그는 척사의 대상을 일본에 집중시켜 ‘척왜론’을 주창하였다. 그는 1878년 작성한 「의상척양왜소(擬上斥洋倭疏)」에서 강화조약은 수호조약이 아니라 일본에 대한 ‘항복 조약’이라고 이를 통박하였다.10) 이어서 일본군을 마땅히 물리쳐야 하며 그 이유로써 첫째 적이 우리를 무고히 억압하고 있으며, 둘째 한 두 명의 신하를 제외하고 저자의 부녀자와 아이들 까지도 분노를 하고 있음을 들었다. 또한 그는 일본을 격퇴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로 다음과 같이 5조목을 들었다.

우리는 정(正)이요 저들은 사(邪)이며 (아정피아-我正彼邪)
우리는 순(順)하고 저들은 역(逆)하며 (아순피역-我順彼逆)
우리는 주인이고 저들은 객이며 (아주피객-我主彼客)
우리는 많고 저들은 소수이며 (아중피과-我衆彼寡)
우리는 편하고 저들은 지쳐있다 (아일피로-我逸彼勞)

1876년 이후에는 이와 같이 그의 위정척사론은 척사의 대상이 ‘금사학(禁邪學)’에서 ‘척왜(斥倭)’로 전환한 것을 볼 수 있다. 동시에 단순한 반대의 뜻만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위와 같은 구체적인 이유들을 들면서 일본군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척왜론’은 1894년 이후 급속하게 침략해 오는 일본세력에 직면하여 더욱 강화되어 갔다. 그의 ‘척왜론’은 이제는 일본과의 전쟁을 감행하자는 주장으로 발전한 것이다. 1894년 6월 20일 올린 「청물배중국척절왜구소(請勿背中國斥絶倭寇疏)」에서 그러한 면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에서 그는 우리나라가 소중화의 맥을 지키기 위해서는 군신상하가 맹세하여 일본과의 전쟁을 감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후 그는 고향인 홍주군 결성으로 내려와 척사 상소를 올리는 일 외에도 척사운동의 발전적 형태인 의병투쟁에 참여하여 1896년과 1905년 두 차례의 옥고를 치렀으니 그의 사상을 실천에 옮긴 유학자라 할 것이다.

이설의 두 번째 사상적 특성은 충군애국사상이라 할 것이다. 이설의 이러한 의식은 그가 남긴 시에서도 잘 나타난다. 모두 330여 편에 달하는 시에서 그의 화이론(華夷論)과 절의론(節義論)에 입각한 충군애국사상을 알 수 있다. 이 중에 「과충무이공묘하(過忠武李公墓下)」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성(姓)을 일컫고 이름을 부르지 않으니 곽광(藿光)과 같고
충성은 제갈량(諸葛亮)과 같고 무예는 곽분양(郭汾陽)과 같도다
한 몸으로 세 어진 이의 일을 겸비하였으니
만인이 입으로 비를 세워 백세에 길이 전하리
- 이설, 「過忠武李公墓下」, 『복암집』 권3, 시, 66쪽

이 시는 그가 홍주의병 후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가던 중인 1896년 1월 15일에 아산의 충무공 묘소를 지나며 지은 것이다. 그는 충무공의 위국충정을 전한(前漢)의 곽광(藿光), 촉의 제갈량(諸葛亮),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진 당의 명장 곽분양(郭汾陽, 곽자의(郭子儀))에 비유하며 찬양하였음을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두견음(杜鵑吟)」, 「두견(杜鵑)」과 같이 망국으로 치닫는 조선의 앞날을 촉에 비유하여 뼈아픈 망국의 심정을 두견새를 소재로 하여 시를 읊었다.

한편 이설의 사상적 특성은 현실 비판적이었다. 그의 비판 대상은 심지어는 고종에까지 미쳤다. 1891년 그는 동궁이 남쪽을 바라보고 하례를 받는다는 명에 대하여 전 참판 이용원(李容元)이 상소를 올려 그 명령의 불가함을 주달하고 절도(絶島)에 유배된 일이 있었다. 이설은 이때 사헌부 수찬의 직에 있었는데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이용원을 극형에 처하도록 연명상소 하였으나 그는 병을 핑계로 불참하였다. 오히려 그는 이용원을 변명하여 그의 유배의 명을 환수하여 줄 것을 주청하였다.11) 그는 이 일로 인하여 관직을 박탈당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그는 1894년 동학농민군의 봉기로 전라도 충청도 일대가 대혼란에 빠짐에 상소를 올려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 안핵사 이용태(李容泰),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 영흥군수 민영수(閔泳壽), 균전관 김창석(金昌錫), 전운사 조필영(趙弼永) 등이 지방민들에게 부당한 부역을 시키는 등 탐학을 일삼고, 성을 버리고 도망한 죄를 열거하며 그들을 탄핵하였다.12) 당시 정부 관리들이 탐학을 일삼는 이가 많고, 동학을 ‘비도(匪徒)’라고 인식, 무력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것과 비교하여 그의 주장은 파격적인 면이 있다. 물론 그 역시 유생적 입장에서 동학을 파악하고 있음이 사실이나 동학군이 일어나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책임이 정부 측에도 있음을 지적, 서민의 입장에서 이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이 상소문에서 정부의 대처방안을 제시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애통조를 내려 후회함을 보이고 여정(輿情)을 위무할 것
2) 진휼책을 조속히 베풀어 산망자(散亡者)를 편안케 할 것
3) 궁실을 엄히 지켜 득민(得民)에 힘쓰고 간세배(奸細輩)를 물리칠 것
4) 의견을 널리 구하여 군책(群策)을 모을 것
5) 원병의 도움에 기대지 말고 무비(武備)를 갖출 것
- 이설, 「論南擾陳所懷疏」, 『복암집』 권4, 소, 69~73쪽.

여기에서도 이설은 제일 먼저 애통조를 내릴 것과 진휼책을 강구하여 민심을 얻을 것을 임금에게 주청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현실비판적인 태도의 극치는 그가 1906년 죽기 직전에 작성한 「유소(遺疏)」에서 볼 수 있다.

성상의 자질이 총명하지 못한 것이 아니며, 성덕이 슬기롭지 않음이 아니나, 재물에 마음을 쓰시고 학문에는 마음을 쓰시지 않은 결과, 재위 40년간 한 가지라도 칭송할 만한 것이 없고 한 가지 정사도 기록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미루어 나가다가 퇴폐하여 시들어 버리고, 어둡고 막히어 조종(祖宗)께서 이루어 놓으신 제도를 땅에 떨어져 없어지게 하고, 느즈막에 금일에 이르러 망국(亡國)의 임금에 불과하니 한탄스럽습니다. - 이설, 「遺疏」, 『복암집』 권4, 소, 80~81쪽.

이설은 이 「유소」에서 고종(高宗)이 재위한지 40년이 지났으나 칭송할 만한 정사가 한 가지도 없으며, 이로 인해 결국은 망국의 임금(망국주, 亡國主)에 불과하다고 망국의 책임을 묻는 등 매우 과격한 언사를 동원하여 고종의 실정과 부덕을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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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암집』 ⓒ유족

『복암집』 ⓒ독립기념관

항일민족운동의 전개

1895년 8월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이설은 상소를 올려 이를 ‘역적의 변란’으로 규정하고 성토하였다. 더욱이 단발령이 내리자 그는 김복한 등과 함께 관찰사 이승우를 찾아가 창의할 것을 권하였다. 이설은 이승우에게 창의할 것을 밤새 권하였으나 듣지 않자 술잔을 던지고 나와 김복한을 만난 자리에서 “이승우가 죽음을 무서워하니 더불어 일을 할 수 없다. 우리는 상소하여 역적을 토벌할 따름이다”라고 상소의 방법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11월 29일 전 영장 홍건과 함께 다시 홍주부로 들어가 이승우에게 거의를 종용하였다. 이승우가 끝내 반대하자 결성의 집으로 돌아와 의병을 준비하였다.

다음날인 12월 1일 드디어 내종제인 김복한을 중심으로 청양의 유생 안창식․안병찬 부자와 채광묵, 부여의 이상린․이상천 형제, 홍주의 이근주, 홍산의 송병직, 정산의 이창서․정제기, 대흥의 박창로 등이 군사를 이끌고 홍주부 관내에 집결하였다. 김복한 등은 참서관 함인학과 경무사 강호선을 체포하여 구타하면서 이승우의 참여를 요구하였다. 결국 이승우는 창의할 것을 결정하고 관내에 창의소를 차렸다.

이설은 각국 공사관에 보내는 장계와 격문을 작성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그의 각오는 비장하였다. 일의 추세에 대하여 염려하는 안병찬에게 “이 일은 천지가 다하고 귀신에게 질정을 하여 만고에 뻗치고 백세를 기다려도 큰 의리임이 틀림없다”라고 확고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창의소를 차린 지 하루 만인 12월 4일 관찰사 이승우가 배반하고 말았다. 12월 4일 낮 그는 김복한과 함께 장교 유복길의 집에서 의병의 일을 논의하던 중 순검 김영준이 관찰사의 편지를 전함에 관찰부로 갔다가 곧 바로 구속되고 말았다. 이어 안병찬, 홍건, 송병직 등 모두 23명이 구금되었다.13)

이설은 구금된 후 죽게 될 것을 예상하여 병중인 모친에게 편지를 쓰기를 “대종가에 양자로 들어갔으니 우리 어머니 아들이 아니오, 국가에 몸을 허락하였으니 우리 어머니 아들이 아닙니다. 지금 당한 경우는 조온의 죄를 면할지 모르겠습니다.”라 하여 후한의 ‘조온웅비(趙溫雄飛)’의 고사를 인용하며 자책하였다. 그는 이어 옥사의 벽에 “5백년 예의의 나라와 수십 대 양반의 집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원통하고 원통하다. 천운이니 어찌하랴”라고 썼다.

이설은 김복한 등과 함께 12월 30일 서울로 압송되기 위해 홍주를 출발하였다. 1896년 1월 1일 신례원에 도착하였을 때 이승우는 아관파천과 김홍집의 처형소식을 듣고 이설 등을 다시 홍주로 불러들이고 이설을 비롯한 김복한 홍건 안병찬 송병직 이상린 (이상, 홍주6의사) 이외의 17명은 석방시켰다. 그는 1월 13일 홍주 일대의 사민들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서울을 향해 출발하였다. 1월 17일 서울에 도착하여 한성재판소의 옥사에 구금되었다. 이후 2월 13일 고등재판소로 옮겨 취조를 받기까지 한 달여 옥고를 치렀다. 이 사이에 김복한의 근친인 김종한이 면회하여 주육과 떡을 보내는 등 면회자와 음식을 넣어주는 이가 이어졌다. 이설은 면회 온 아들을 통하여 밖의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이천의진이 남한산성에서 기세를 올리는 일, 나주의병에게 나주참서관 안종수가 처형당한 일, 그리고 천안군수 김병숙이 제천의병에게 죽은 일 등을 알게 되었다. 드디어 2월 25일 고등재판소에서 재판장 이범진의 공초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나는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 하였으나 힘이 모자라 도적을 치지 못하였다. 차마 군부(君父)가 당한 욕을 말한다면 의리상 살아 있을 수 없어서 춘추필법에 따라 붓으로라도 주륙하려는 뜻을 품고 바야흐로 항의하는 장계를 올리고자 하였는데 그 명분이 의거의 당에서 나왔기에 마침내 체포되었다. 죽음이 있을 따름이요. 다른 할 말은 없소이다. - 이설, 「高等裁判所供辭」, 『復菴集』 권4.

이설은 이른바 “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한 자의 무거운 죄”라는 명목으로 곤장 80을 선고받았다. 고종의 특사로 2월 28일 풀려나 3월 2일 집에 도착하였다. 며칠 후 그는 9대조인 시방(時昉)에게 ‘고묘문’을 올려 ‘홍주거의지당(洪州擧義之黨)’으로 체포된 후 특지로 석방되어 3월 2일 집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을 날짜별로 보고하였으며, 4월 4일에는 한원진의 묘에도 고했다.

을사늑약 삽화 ⓒ독립기념관

1905년 11월 27일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5조약이 맺어졌다. 이설은 식사마저 못할 정도의 중병을 앓고 있던 중 이 소식을 들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의연한 마음으로 목숨을 건 상소 투쟁을 전개하였다.

신하 된 자 죽음만이 남을 뿐이다. 그러나 죽음도 의리가 아니다. 필주설전(筆誅舌戰)이 무익함을 모르는 바 아니나,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 필(筆)과 설(舌) 밖에 없으니 어찌하리오. 중봉(重峯)선생이 도끼를 잡고, 청음(淸陰)선생이 화의서(和議書)를 찢을 때 어찌 일이 성사될 것을 알았으며, 어찌 이름을 세우고자 했는가. - 이설, 「與外弟金元五書」, 『復菴集』 권5.

그는 김복한과 함께 상경하여 괴화정동의 김소사 집에서 기거하면서 상소문을 작성하여 12월 2일 올렸다. 이 상소에서 그는 매국적을 벨 것과, 애통의 조서를 내리고 각도 관찰사에게 명령을 내려 군량을 준비케 하고 백만의 충의군을 모집하여 끝까지 무력 항전할 것을 주청하였다. 한편 이날 전 참판 민종식이 하인 김완규를 대동하고 이설이 묵고 있는 집을 방문하였다. 민종식은 이설을 방문하여 상소문 작성을 의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설은 민종식이 부탁한 상소문을 작성하여 12월 4일 그에게 건네주기 직전 김복한과 함께 체포되어, 경무청 감옥에 구금되고 말았다.

경무청에 구금된 다음날인 12월 5일 이설은 고문관 와타나베의 공초를 받았으며 30일에는 경무국장 박승조의 공초를 받았다. 이설은 이 자리에서도 중봉과 청음의 고사를 들어 역신을 토벌할 것을 역설하였다. 박승조가 “비록 그러하나 시국은 그러하지 않다. 관중과 제갈량이 다시 나와도 효력이 없을 것이다. 그대는 돌아가 후학을 계발함만 못하다.”고 훈계조로 말하였다. 이에 대해 이설은 의리정신에 입각하여 의병을 일으켜 매국적을 토벌하고자 함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2월 1일(음력 1월 8일) 석방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갑오년의 의리가 금일의 의리요, 금일의 의리가 갑오년의 의리이다. 의병을 일으켜 매국적을 토벌함이 불가함을 알지 못하며, 상소를 올려 토적(討賊)함이 불가하다는 것을 또한 알지 못하겠다. - 이설, 「答警務局長朴承祖招問」, 『復菴集』 권4.

이설의 상소운동은 와병 중에 군사를 일으켜 왜적을 토벌할 형편이 못 되는 상황에서 취할 수 있었던 최상의 방편으로서 ‘거의토적(擧義討賊)’에 버금가는 구국의 결단이었다. 더욱이 그는 귀향한 후 안병찬 등과 협의를 하여 민종식을 영수로 한 제2차 홍주의병을 일으키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의병에 대해 묻는 안병찬의 편지에 다음과 같은 답신을 하여 독려하였다.

형(필자주: 안병찬)도 그렇고 그렇단 말인가. 목의 피가 이미 빠지고 다시 뿌릴 만한 피가 없어서 그러는가. (중략) 천하에 혼자 싸우는 장군은 없으니 내가 비록 뜻이 있지만 누구와 더불어 일을 한단 말인가. - 이설, 「與安稚珪書」, 『復菴集』 권6.

홍주성 수복 기록화 ⓒ독립기념관

또한 이설은 민종식에게도 편지를 보내 안병찬과 임승주 등이 민종식을 영수로 하여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니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책임을 맡을 것을 권하였다. 아울러 1895년 거사 때에 미리 통고하지 못함은 후회하고 있다는 뜻도 전하였다. 이와 같이 건강상 직접 거병할 수 없었던 그는 홍주의병의 재기를 기대하고, 동지들의 거의를 권하였던 것이다.

이설은 병이 악화되자 마지막 상소인 ‘유소(遺疏)’를 작성하여 문인인 이병량(李秉良)에게 올리게 하고 홍주의진이 홍주성을 점령하여 기세를 올리고 있던 1906년 5월 일제를 축출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국하고 말았다.

맺는말

홍주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이설은 남당 한원진의 학통을 잇고 있는 이돈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문과에 급제하고 사간원 정언과 교리를 비롯하여 동부승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건강상 이유로 관직을 사임하였으며 그때마다 상소를 올려 정국의 문제점과 방향을 비판적으로 지적하였다. 그러한 이설의 혜안을 높이 사 정부에서 계속하여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상소를 올려 이를 거절하였다.

신분은 양반이었으나 서민의 처지를 이해하고자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비록 유생적 입장을 벗어날 수는 없었으나, 농민군이 봉기하지 않을 수 없게 한 실정의 책임을 조정의 고관에게 묻고 있다. 그러한 현실비판은 죽기 직전에 올린 유소에서 임금의 부덕과 실정이 국망을 초래하였다며 고종마저 원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설의 사상은 위정척사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의 사상의 연원은 호론 주창자인 남당 한원진의 ‘인물성이론’에서 찾을 수 있겠다. 인물성이론 즉, 호론은 사람과 동물의 구별을 엄격하게 하여 ‘척이단’ 의식이 강한 것으로 알려진다. 김복한과 임한주 등이 스스로를 당문(塘門)이라 할 정도로 호론의 영향을 받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이설을 비롯한 홍주지역의 유생들이 철저히 척사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나아가 강력한 의병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던 사상적 연원의 한 측면을 볼 수 있다.

이설의 위정척사론은 급변하는 정세 따라 척사의 대상과 방향이 변함을 볼 수 있다. 그는 17세 때인 1866년 우암 송시열 이래 지켜온 소중화를 지키고 사학을 물리쳐야 한다는 “위소중화(衛小中華) 척사학(斥邪學)”의 이론을 형성하였다. 병자수호조약의 체결에 미쳐 이를 ‘수호조약’이 아닌 ‘항복조약’이라고 통박하면서 ‘척왜론’을 주장하였다. 1894년 갑오변란에 즈음하여 이러한 척왜론은 일본과의 ‘결전(決戰)’을 감행하자는 ‘대일항전론’으로 확대되었으니,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이러한 그의 위정척사론은 의병투쟁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할 수 있었다.

이설의 민족운동은 홍주의병 투쟁과 1905년 을사늑약 반대 상소 투쟁으로 대별된다. 1894년 갑오변란에 사직하고 낙향한 다음 해 을미사변과 단발령의 공포에 항거하여 홍주의병에 참여하였다. 그는 대장소에서 장계를 작성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이승우의 배반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김복한과 함께 상경하여 매국적을 처단하고 일본과의 전쟁을 감행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고 또 다시 옥고를 치렀다. 그는 석방된 후 민종식과 안병찬 등에게 의병 봉기를 권하였으며, 홍주의병의 봉기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옥고의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건국공로훈장증 ⓒ유족

이와 같이 호론의 학통을 계승한 이설은 위정척사론에 철저했으며, 척왜론(斥倭論)과 대일결전론을 실천에 옮긴 관료이면서 현실비판적인 유학자였다. 동시에 민족의 위기에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항일구국투쟁에 헌신한 민족운동가였다.

참고문헌
  • 이설, 『복암집』.
  • 이설, 『국역 복암집』, 복암선생기념사업회, 2006.
  • 이설 등, 『복당창수록』, 향지, 1992.
  • 김상기, 「복암 이설의 항일민족운동에 대한 고찰」, 『우강권태원교수정년기념논총』, 태원교수정년기념논총 간행위원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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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이설, 「辭校理仍陳實病乞退歸疏」, 『복당창수록』 부록, 37~41쪽.
2
이설, 「斥奇正鎭通文」, 『복암집』 권10, 잡저, 197~198쪽.
3
이설, 「答長兒書 別紙」, 『복암집』 권7, 서, 138~139쪽.
4
南塘 한원진은 홍성군 서부면 출신이다. 서부면 양곡리에 暘谷祀란 南塘을 모신 사당이 현존한다. 이설이 서부면에 인접한 결성면 출신이며, 김복한은 서부면 이호리에 거주하였다.
5
李度中의 자는 時中, 호는 新齋이며, 문집 12권이 있다.
6
이설, 「告南塘韓先生墓文」(1), 『복암집』, 권11, 告文, 212~213쪽.
7
이설, 「告南塘韓先生墓文」, 『복암집』, 권11, 告文, 214~215쪽.
8
이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은 김상기의 「조선말 홍주을미의병의 문화적 기반과 전개」(《한국민족운동사연구》, 1991,124~127쪽, 189~201쪽) 참조.
9
이설, 「釋氏眞贓說」, 『복암집』 권10, 잡저, 199~200쪽.
10
이설, 「擬上斥洋倭疏」, 『福堂唱酬錄』-復菴續集-(향지문화사, 1992), 부록, 22~37쪽.
11
이설, 「擬請還收李容元安置之命疏」, 『복암집』 권4, 소, 68~69쪽.
『고종실록』 권28, 고종 28년 신묘 2월 14일조.
황현, 『매천야록』 권1, 112~113쪽.
12
이설, 「論南擾陳所懷疏」, 『복암집』 권4, 소, 69~73쪽.
13
김상기, 「1895-1896년 홍주의병의 사상적 연원과 전개」, 『윤병석교수화갑기념 한국근대사논총』, 지식산업사, 1990.

발행일

발행일 : 2015.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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