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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ssian Aug 09. 2015

특별편 : 검은 도베르만 핀셔

'버디 이야기'


 어렸을 적, 지금처럼 인터넷이 각 가정마다 원활하게 보급되어 있지 않던 시절에 우리 집에서는 검은 도베르만 핀셔 한 마리를 길렀다. 천리안, 나우누리, 하이텔, 유니텔   투박한 28.8k 전화 모뎀 연결음이 가상 현의 전부 . 그만큼 양질의 정보를 얻기가 여간해서는 쉽지 않았던 다. 산 아래 단독 주택에 살던 우리는 그리 크지는 않 담벼락 안쪽으로 개  마 기를   정도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었다. 


 부모과 함께 어떤 개를 기르면 좋을지 두꺼운 애견 애견 대사전을 뒤져가며 꿈에 부풀었었다. 아버지는 복서나 롯트와일러(경비견으로서의 목적도 있었다), 어머니는 달마티안이나 래브라     특별한 논의는 없 모두가 마당에서 기를 견종으 중대형견을 선택해야 한다는  암묵적으로 동의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당시    도베르만과 살루키에 꽂혔다. 기본적으로 아버지는 묵직하고 투박하지만 듬직한 개를, 어머니는 사랑스러운 외모와 활달함을 지닌 개를, 나는 미끈하고 잘 빠진 카리스마견을 선호했다.

당시의 후보군이었던 견종들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롯트와일러 / 복서 / 래브라도 / 살루키 / 도베르만 / 달마티안)

  모두 직장일로 바쁜 . 결국 반려견과   교류할 것으로 보이는 아들의 손을 들어주셨다. 살루키는 예나 지금이나 한국에서 참으로 보기 힘들고 구하기도 어려운 견종이다. 넷츠고도 등장하지 않았던 시절, 이집 황실견인 살루키를 국내에서 구    찾 부모님들이 너무 바쁘셨고, 또 도베르만의 매력이 살루키보다 못하다는 생 전혀 들지 않았다.


꼬마 버디는 이 정도 사이즈였다

 선택은 도베르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생후 1개월 된 도베르만 핀셔 종 남아를 데려왔다. 이름은 '버디(Buddy)'라고 붙였다. 당시의 미국 대통령인 빌 클린턴의 반려견 이름과 같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난다. 디지털 카메라나 핸드폰 카메라와       기기가 전무 시절이어서 지금 꼬마 버디의 사진은 남아 있지 않지만 녀석이 처음 집에 도착했을 때는 바로  사진 정도의 몸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 보는 환경, 집, 마당.    꼬마 버디 녀석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장독 차 덤불 속 마구 헤집고 다녔다. 왕! 하고 짖기에도 힘이 부쳐 보이는 자그마한 녀석이 장차 거대하고 늠름한 경비견이      믿어지지 않았다. 꼬마 버디가 우리 가족이 된 지 3주쯤  우리는 가족 여행을 떠나게 되었, 꼬마 버디는 잠시 동물 병원에서 돌보기로 했다.


 이쯤 되면 눈치가 빠른 분들은 내가 계속해 버디를 두고 '꼬마 버디'라고 지칭하는 이유에 대해 궁금증을 품으셨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나중에 성장해서 '버디'가 되었을 텐데 왜 자꾸 꼬마 버디라고 지칭하는 거지?'라고.

 이유는 간단하다. '꼬마 버디'와 '버디'는 서로 다른 녀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한시라도 빨리 꼬마 버디를 데려와 달라고 부모님을 졸랐다. 알겠다고 대답하셨지만 부모은 병원으로 출발하지 않으셨다. 대신 전화기만 붙들고 계셨다. 무언가 이상했다. 짐을 정리하겠다고 방에 들어갔던 나는 심상찮은 상황에 몰래 숨어 아버지가 수화기 너머로 나누시던 대화를 엿들었다. 우리가 잠시 여행을 다녀온 사이에, 꼬마 버디는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엿들은 직후  일들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울면서 달려나가 어머니 품에 안겼고 아버지는 나를 보시고는 수화기를 쥔 채 당황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일이 여기까지 온 이상 다른 주인에게 갔다느니, 좋은 농장으로 보냈다느니   거짓말 하지 않으셨다. 3주  잘 지내고 밥도 잘 먹고  뛰놀던 녀석 정보   시대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꼬마 버디를 데려왔던 개 농장에서도, 그 누구도, 요즘 강아지들이라면 필수적으로 거치는 1~5차 접종, 광견병 주사, 심장사상충 접종에 대해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뒤져보거나 참고할 만한 인터넷도 존재하지 않았다. 꼬마 버디는 수많은 어린 강아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파보 바이러스성 장염'을 피해가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 가족들 중 누구도 몰랐다. 개를 여러 마리 기르는 동네 분들도 심장 사상충과 광견병 백신 정도만 알았지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요즘 견주들처럼 박식하지 못했다.


 빌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이었던 시,  초등학생이었다. 국민학교 재학 중간에 초등학교로 바뀌었으니      어쩌면 국민학생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린 내가 꼬마 버디의 상실로 인한 마음의 충격을 어떤 방식으로 메워나갔는 잘 모르겠다. 기억이 나는 건 꼬마 버디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그날, 어머니가 끝없이 눈물을 흘리는 나를 목욕시켜주셨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든 다시   데려와 달라고 떼를 쓰는 아이는 아니었다. 목욕을 마치고 어머니와 잠시 바깥 바람을 쐬기 위해 발코니로 나갔다. 여행에서 돌아온 그날은 유난히 날이 맑았다. 그때 하늘을 올려다보던 어린 내가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기 떠 있는 흰 구름이 우리 버디 같아 보여요."


 순간 어머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셨고, 이후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그 이야기를 하시곤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은 또 다른 도베르만 핀셔를 데려오셨다. 반려견을 기르고자 함도 있었지만 내가 받은 마음의 충격을 조금이나마 덜어 .  꼬마 버디가 죽었다는 사실을 접한 그 순간부터 반려 동물에 대한 내 마음은  닫혀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접종   건강한 녀석   보니 생후 6~7개월 된 거대한 도베르만  수밖에 없었다. 내가 꿈꿨던 멋진 도베르만 핀셔 종의 모습과 닮아 있었지만, 같은 '버디'라는 이 정을 붙이기에는 괴리감이 너무 컸다. 내가  사랑했던, 꼬마 버디와는 너무나 .


도베르만은 6개월이면 이렇게 커 버린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작았다. 새로운 버디를 감당할 힘도 경험도 없었다. 마당에 버디를 풀어놓을 때면 항상 어른들이 잡아주셔야만 외출을   고, 따로 산책을 시키거나 놀아줄 용기를 내기도 어려울 만큼 새로  버디는 위협적인 인상과 풍채, 그리고 힘을 지니고 있었다. 반려견에 대해 닫혀버린 내 마음과는 별개로, 버디는 참 매력적이고  인상적인 녀석이었다. 경비견에 적합한 견종답게 짖는 소리도 우렁차서 등산으로 1시간쯤 거리에 있는 약수터에 도착해도 녀석이 짖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에서 '무서운 개가 있는 집'으로 소문이 날 정도로 버디의 인상이나 경계심은 대단했다.




  , 정보화가 부족한 시대였다. 바쁜 부모님과 반려견에 마음이 닫힌 아들 버디에게 좋은 사료를 찾아 먹여주지 못했고, 교배를 시켜주지도 못했으며, 그렇다고 중성화 수술을 시켜주지도 않았. 간식을 주거나 산책을 자주 시켜주지도 못했다. 가끔 물을 끼얹어 흙을 털어내 주는 것이 목욕의 전부였고 변변한 장난감 하나 챙겨주지 못했다. 추운 겨울에 가져다 준 담요는   전부 물어뜯어버려 그 짧은 로 부들부들 떨면서 혹한을 견뎠고, 한여름에는 산모기에 시달렸다. 소위 말하는 '옛날에 밖에서 기르던 개'의  삶이었다.


항상 일찍 일어나 온 세상을 향해 짖어대던 버디


 버디는 총 12년을 살았다. 항상 밝았다. 무관심하 때로는    괴롭히기도 했던 나를 좋아해주었다. 더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버디를 향해 마음을 열지 못했던 것은 나였다. 지금은  순간들이 큰 후회로 남아 있다. 알지 못해서 꼬마 버디를 잃었고, 그 마음의 상처로  버디를 사랑하고 돌보아주지 못했다.


 가족 중한 환자가 생겨 모두가 그 병치레에 몰두해야 했던 어느 해 가을, 버디는 다소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마치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라고 유언을 남기는 듯한  골라서. 사인은 심장사상충이었다. 모  하루가 멀다 하고 병원에 뛰어다니느라 정신이 없어 정기적으로 관리하던 버디의 심장사상충 예방약     . 


 나는 수험생이었고, 버디의 임종을 지킬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는 표현은 쓰지 않을 셈이다. 나는 가지 않았다. 크게 정을 주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다시금 이별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내 을 충분히 이해한 부모님은 동물병원에서 버디와 마지막 인사를 따로 나누셨다. 버디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마지막 인사를 하러 부모님이 동물병원에 들어 , 버디는 늠름하고 꼿꼿한 자세로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수의사의 말에 따르면, 통증과 무기력함으로 계속해 엎드려 누워만 있던 녀석이 마치 자신이 떠난다는 것을 직감이나 한 듯 마지막 인사를 전하기 위해 똑바로 앉은  주인을 기다리더라고.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나눈 버디는, 다음 날 아침 깨어나지 않았다.


병원에서, 버디와 나눈 마지막 인사

 


 간소한 장례식을 마치고 화장 다. 유골은 버디가 뛰놀고, 평생을 살았던 마당에 뿌렸다. 항상 함께 있어달라고. 더 잘 돌보아주지 못해 미안했다고. 이젠 묶여있지 않아도 된다고. 마지막으로, 정말 사랑한다고.


 나는 아직까지도 버디의 장례식 사진이나 사후 처리 때 촬영한 사진들을 보지 않았다. 사실, 앞으로도 보지 않을 생각이다. 이미 마지막 모  사진만으로도 충분히 눈물을 쏟은 까닭일까. 내 기억  어떤 존재에 마침표가 찍힌 부분은 굳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다.




 아빠 품에 안겨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제노의 눈빛을 맞이하고 있자면, 마치 여러 마리의 개들이  바라 느낌이 든다. 꼬마 버디와, 버디와, 제노가 함께 나를 바라보는 듯한 착각이다. 함께했던 녀석들, 함께하는 녀석의 눈빛은 그토록 순수하고, 맑고, 사랑스럽다. 또한 한결같다. 꼬마 버디의 눈빛과 제노의 눈빛을, 버디와 제노의 눈빛을 나는 도저히 구분 지을 수가 없다.


 제노에게   애정을 표현하고, 엄하게 다그치면서도 안아주고, 항상 가장 좋은 길을 찾아주려는 노력과 마음의 이면에는 우리 '버디들'에게 잘 해주지 못한 회한과 죄책감, 그리고 보상 심리가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점 이 들에서 나는 모두 후회와 상처를 안았다는 사실이다. 지금 눈앞의 제노를 품는 마음은 어쩌면, '이번 만큼은 후회하지 않겠다'는 다짐의 증표인지도 모른다.


무쇠처럼 건강하고 꿀벌처럼 활달했던 버디


 반려견으로  그토록 큰 상처를 받았던 어린 마음 그 문을 걸어 잠그는 것으로는 전혀 치유되지 않았다. 또다시 관계에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고통 것을 두려워하여 피 다. 동시에 '나는 개를 좋아하지 않는다' 거짓 주문을  최면처럼 자신에게 걸다. 하지만 우연과도 같은 필연 속에서 만난 제노와의 인연이 어린 시절부터 지금껏 깊어져 온 흉터를 서서히 아물게 하고 있음을, 하루하루 절감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반려견과의 관계란  인간 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인연으로 인한 상처는 인연으로 풀어야 하며, 마음의 닫힌 문을 다시금 용기 내어 열어야만 깊은 흉터에 대한 치유가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처럼.




 부디, 말썽꾸러기 제노가, 앞으로의 시간에 있어 후회를 남기지 않고자 애쓰는 아빠의 노력으로 이 삶이 '행복했다'고 기억할 수 있기를. 그리고 그런 우리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꼬마 버디와 버디가 함께 "저 녀석 많이 철 들었군!"하고 함께 웃을 수 있기 .



안녕, 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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