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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동대문구에 자랑거리
너울 조회수 6,058 작성일2015.10.11

안녕하세요 저 동대문구에

자랑거리를 알아오는 건데

착한님들아 빨리 알려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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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홍릉수목원    

 
위 치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2동 207번지 

 

홍릉수목원은 1922년 서울 홍릉에 임업 시험장이 설립되면서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제1세대 수목원이다. 이곳은 조선왕조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의 능(1897년)인 「홍릉」이 있었던 곳으로 「홍릉수목원」이라 이름 붙여졌으며 지금은 이장되어 터만 표시되어 있다.

 

홍릉수목원은 국립산림과학연구원의 부속 전문 수목원으로서, 국내외의 다양한 식물 유전자원을 체계적으로 수집·관리하여, 기초 식물 학문분야 발전은 물론, 식물 유전자원 확보를 위해 조성한 시험 연구림이다.

홍릉수목원과 산림과학관은 매주 일요일은 일반인에게, 평일에는 학생 단체관람객에게 무료로 개방하여, 자연 및 환경학습, 산림의 소중한 가치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2.세종대왕기념관    

 
위 치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산 1-157 


대지 13,200㎡, 연건축면적 2,475㎡에 소장 유물은 627점이다. 조선시대 세종대왕의 성덕과 위업을 추모하고 이를 길이 보존하기 위해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1970년 11월 준공하고 1973년 10월 개관하였다.

 

유물이 진열되어 있는 세종문화진열실은 총면적 716㎡으로 세종대왕 일대기실, 한글실, 과학실, 국악실 등 4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세종대왕 일대기실에는 화가 김학수가 재위 32년간의 업적을 담아 그린 14폭의 그림이 있고, 한글실에는 세종 당시와 이후의 보물급 한글 관계 문헌 100여 종을 비롯하여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참고문헌과 외국문자의 탁본, 한글기계화 관련자료가 진열되어 있다.

 

과학실에는 세종 때의 조판·인쇄 과정을 재현한 활자 유물을 비롯하여, 보물급의 천문·기상 기구와 도량형·지도·약재 등이 진열되어 있다. 또 국악실에는 세종 때 정비된 각종 국악기 70여 점과 악보·악서, 악사 복식, 무용 복식 등이 진열되어 있어 당시의 국악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이밖에 기념관 밖에 보물 제838호인 수표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호 세종대왕 신도비, 구 영릉 석물 37점이 있다. 주요 사업으로 세종학 연구학술지와 세종문화문고, 세종대왕 관계문헌 등을 펴내고 한글날과 세종의 날 기념행사 및 글짓기대회를 열고 있다.


3.영휘원(홍릉)     

 
위 치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2동 205번지 

 

영휘원 안에는 조선왕조 제 26대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귀비 엄씨의 원인 영휘원과 영친왕의 첫째 아들의 원인 숭인원이 있다. 엄씨의 위패는 현재 종로 구 궁정동에 있는 칠궁에 모셔져 있다. 영휘원이 있는 이 지역은 원래 고종 황제의 비인 명성왕후 민씨의 홍릉이었으나, 19 19년 고종의 장례 때 함께 묻기 위해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소재현 홍유릉에 이장 하였다.


4.청량사    

 
위 치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1동 61 

 

청량사는 천장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비구니 도량이다. 예부터 4대 비구니 도량으로 유명한 돌꽂이 승방이 바로 이 곳이다. 원래 청량사와 돌꽂이 승방은 별개의 절이었으나, 1895년 일제의 조선강점흉계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후 황후의 능인 홍릉이 조성케 되자 홍릉자리에 있던 청량사를 현재의 위치로 옮게 되었고, 때마침 돌꽂이 승방도 사세가 기울어 두 절이 병합되었다고 한다.

 

청량사는 한말에는 도성 사람들이 자주 몰려와 쉬던 휴양지였고, 일제 치하로 나라가 어려웠을 때는 많은 애국지사, 고승들의 발길이 잦았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과 불교운동에 앞장선 만해 한용운 선생이 한때 청량사에 머물렀다고 하며, 1939년 7월 12일에 한용운 선생의 회갑연이 이곳에서 조촐하게 열렸다고 한다. 같은 시기에 불교계 학자인 박한영도 이 절에서 기거했으며 대방에 걸린 청량사 현판 글씨는 박한영의 글씨로 전해진다. 청량사는 회한의 역사 속에서 위법망구의 불심으로 도량을 가꾸어온 비구니대중스님들을 보듬어 안고 오늘도 대자대비의 원행으로 도심 속에 회향하고 있다.


5.연화사     

 
위 치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109-1 

 

연화사는 서울시 동대문구 회기동 109-1번지 천장산 자락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직할 말사이다.서울 동부의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회기동은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묘소인 회릉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그 터에는 그녀의 원찰로 지어진 조그마한 절이있다.

 

이 곳은 일체중생의 근본자성이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청정한 연꽃과 같다는 의미에서 연화사라 불려 졌는데, 이후 묘련이라 불려지기도 하였다. 이는 모두 연꽃의 청정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연산군이 생모 윤씨의 명복을 빌고 비명에 간 원혼을 천도하기 위한 도량으로서, 연꽃의 기능 중 화생의 의미로 붙인 이름인 듯하다. 현재는 회릉이 서삼릉으로 이전되고, 그 자리에 경희여중ㆍ고등학교가 설립되면서 옛 모습은 찾을 수 없지만, 그 터 아래 조그마한 사찰이 있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은 울창한 수풀에 둘러싸인 전형적인 사찰의 모습이 아닌 빌딩숲에 인공적으로 뭍힌 도심속 사찰로 그 모습이 변모했지만, 사찰에는 폐비 윤씨는 물론 선의왕후의 원찰로서 많은 상궁들이 조성한 불화들이 남아 있어 왕실 원찰로서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시냇가를 건너 가파른 고개를 지나 당도하는 옛 가람의 모습은 없지만, 도심 속 골목길을 따라 약간의 나무가 있는 곳에서 만날 수 있는 공원같은 곳 - 연화사에서 세속에 찌든 근심을 잠시라도 떨쳐 버릴 수 있으면 좋을 듯하다.

 

6.답십리 고미술상가              

 
위 치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동 

 

답십리 고미술상가는 고서화, 고가구, 도자기 등의 고미술품과 독특하고 다양한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상점이 밀집한 곳이다. 답십리 고미술상가는 청계천 8가, 이태원, 아현동 등지에 흩어져 있던 고미술상점들이 1980년대 중반부터 답십리 일대에 모여들기 시작하여 형성되었으며 현재 약 140개의 점포가 밀집해 있다.

 

고미술품은 물론 나무촛대, 괘종시계, 오래된 액자 등과 같은 오래되고 독특한 소품들이 많아 볼거리가 풍성하다. 일반 상점에서는 보기 힘든 특이한 물건들이 많아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들도 자주 찾는다. 일반적으로 인사동이 질 좋고 값 비싼 고미술품들을 주로 판매한다면 답십리 고미술상가는 몇 천원부터 시작되는 작은 소품들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7.서울약령시


위 치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 용두동  
 
국내 한약재 거래량의 약 70%를 점유하는 한약재 전문시장으로,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1동·2동과 용두동 일대 약 23만 5,500㎡에 걸쳐 형성되어 있다. 1960년대부터 한약재를 취급하는 상인들이 전국 각지에서 청량리역을 이용해 모여 들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

 

경동시장 한약거리(상가)로 불리다가 1995년 서울특별시로부터 서울약령시(전통 한약시장 지역)로 지정되고, 2005년 7월 25일 재정경제부로부터 한방산업특구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른다. 한의원·한약방·한약국·한약재도소매점·한약재수출업체·탕제원 등 1,000여 개의 한약 관련업체와 노점상들이 운집하여 영업하고 있으며, 취급되는 한약재는 약 250종으로 시중 시세보다 20~40% 저렴한 가격으로 거래된다.

 

영업시간은 평일과 토요일 오전 9시~오후 7시이고, 일요일과 공휴일은 노점상과 일부 점포를 제외하고 휴업한다. 서울약령시에는 한의약관련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는 전시실과 문화공간을 갖춘 한의약박물관(2006년 9월 개관, 면적 2,335.37㎡)이 있으며, 해마다 가을 약령시 일원에서 한의약문화축제(1995년부터 개최)를 연다. 

2015.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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