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학교숙제인데요.국내성,평양(고구려)
비공개 조회수 4,004 작성일2006.09.06

4학년2학기 15쪽 숙제인데요~~

국내성,평양(고구려)와 금성(신라)를 맡았거든요~

이것좀알려주세용

아주아주빨리용

 

프로필 사진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6 개 답변
1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wooa****
시민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저도 4학년이라서.. 조금 대충알려드림..

금성(지금의 경주 초기엔 서라벌이라 불렀음)

금성은 기원전 57년 ~935년입니다.

성덕대왕 신종(국보 29호)

불국사,석굴암,첨성대,문무 대왕릉등등.. 있습니다.

많은 도움 되시길...

2006.09.06.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8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codm****
초수
본인 입력 포함 정보

 

고구려

고구려의 수도는 졸본성 국내성 평양성입니다.

졸본성→국내성→평양성

졸본성은 기원전37년~기원후 3년

국내성은 3년~427년입니다.

평양성은  427년~668년입니다.

 

신라

금성(지금의 경주 초기엔 서라벌이라 불렸음)

금성은 기원전 57년~935년입니다.

 

저두 4학년인데... 도움 조금이라도 되셨으면.

2006.09.13.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3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탈퇴한 사용자 답변

고사()에 “주몽()이 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졸본은 고구려의 첫번째 수도인 흘승골성()과 같은 곳이다. AD 3년(유리왕 22)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겼는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대체로 만주 안둥성[] 지안[]과 그 배후의 산성()을 포함한 지역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고구려는 3∼427년 국내성을 수도로 삼았다가 427년(장수왕 15) 평양으로 세번째 천도를 행하였다. 고구려가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서울을 옮기기 전에 환도성()으로 천도()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는 환도성과 국내성이 이름만 다른 동일 지역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국내성의 위치는 평북 의주()라는 설도 있고, 또는 같은 도()의 초산군 북쪽 압록강 건너편 땅이라는 설도 있다. 또 산양보() 서북 격수지지()라는 설, 강계부() 만포진(滿)에서 압록강을 건너 그 대안()지방에 있었다는 설 등도 있다.

2006.09.07.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5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sky1****
평민
본인 입력 포함 정보

네, 저도 4학년입니다. 그리고 요번 숙제를 통해서 이 사이트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국내성, 평양성은 지금 강 북쪽에 위치하고 있고요, 국내성과 평양성은 옛날 고구려의 수도였습니다. 지금 평양은 북한쪽에 있지만, 아직 우리나라에 역사가 가지런히 담겨있다는 것만 알고 계셔요. 나중 6학년때 평양성의 중요에 대하여 배우니까요. 그리고 국내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멋진 성이라고 하네요. 어떻게 보면 평양은 북한의 수도, 우리 고구려의 수도라고 볼수 있뇨. 고구려가 거의 북한이거든요. 남, 북이 갈라진 후 부터 고구려라고 부르던 위쪽 땅이 북한이래요. 옛날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 국내성은 지금도 있는데, 평양은 아직 수도를 맡고 있답니다.

-제 답변이 알맞지 않으셔도 조금은 해결 해 주셨죠?-

2006.09.09.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7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sp****
중수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저도 4학년이라 답변이 조금 후져여 ..ㅈㅅ

 

1.평양,국내성에 있는 문화재

 

1.국내성의 문화재

 


1)장군총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석릉

 


3세기 초부터 427년까지 고구려가 도읍한 지안현 퉁거우평야에는 광개토왕릉비와 고구려 최대형 무덤인 태왕릉·사신총 등 석릉과 토분 1만 기가 있으나 외형이 거의 완존한 석릉은 이것뿐이다.

 


화강암 표면을 정성들여 가공한 절석(切石)을 7단의 스텝 피라미드형으로 쌓았는데, 기단의 한 변 길이 33m, 높이 약 13m 이다. 기단의 둘레에는 너비 4m로 돌을 깔았으며, 그 바깥둘레에 너비 30m 의 역석을 깔아 능역을 표시하였다. 널방은 화강암의 절석을 쌓아 지었는데, 천장석이 있는 굴식이며, 2개의 널받침이 있다.

 


1905년 일본인 학자 도리이가 처음으로 현지조사하고, 프랑스 학자 E.샤반과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 등이 조사하여 《남만주조사보고》 등에 발표한 뒤부터 학계에 알려졌다.

 


돌무지돌방무덤은 대체로 3세기 말∼4세기 초로부터 5세기에 나타나며, 기와를 통해서는 4세기 중엽 이후 5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므로 이 장군총의 연대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일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이 무덤의 주인공으로는 광개토대왕과 그 아들인 장수왕의 것이라는 두 설이 있는데, 현지 중국 학자들은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보고 있다.

 


 

2)태왕릉

 


중국 지린성 지안현 여산 남쪽 기슭에 있는 고구려의 기단식 돌무지무덤.

 


현재는 분구의 대부분이 무너져내린 기단부와 그 위층의 방단부 일부만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1990년 이래 중국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어 복원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그 결과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무덤 기단의 한 변은 약 63m이며, 너비 약 1.75m, 높이 6m가량의 대형 석재 5개가 받치고 있다. 기단 위의 각 방단 내부는 막돌과 장돌로 채워졌다. 분구 정상부 가까이에 설치된 매장부는 굴식 돌방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돌방의 방향은 서향이며 널길은 널방 서벽 한가운데에서 시작된다. 널방의 천장부는 3단의 평행굄으로 짜여졌으며, 천장은 지름 4.55m, 두께 0.8m의 대형 화강암 판석으로 덮여 있다. 널방의 동서길이는 2.82m, 남북너비는 3.16m이며 지면에서 분구 정상부까지의 높이는 16m 정도이다. 분구 정상부에서 명문전과 와당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원래의 분구 위에 작은 사당이 지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명문전 중에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이라는 돋을새김된 문장이 있어 '태왕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무덤 주위에는 자갈이 깔리고 그 바깥으로는 무덤구역을 알리는 흙담이 둘러져 있다. 무덤의 남방 180m 지점에서 기와·전돌과 함께 건물의 초석이 발견되어 무덤의 피장자를 위해 제사지내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의 동북 500m 거리에는 유명한 광개토왕릉비가 있다. 명문전의 내용, 무덤의 규모, 근처의 건물터, 광개토왕릉비 등을 근거로 광개토왕의 능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3)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제19대왕으로서 재위 391∼412동안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므로 재위 시에는 영락대왕이라 일컬어졌으며, 사후의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다. 재위기간 동안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켜 서로는 요하, 북으로는 개원∼영안, 동으로는 훈춘, 남으로는 임진강 유역에 이르렀다. 대왕은 내정의 정비에도 노력하여, 중앙 관직을 신설했는가 하면, 역대 왕릉의 보호를 위해 수묘인 제도를 재정비하였으며, 393년에는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는 한편, 아들 장수왕 때 단행되는 평양 천도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러한 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비석이 광개토대왕비이다. 이 비석은 사면석 비로서 높이가 약 6.39m인데,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 동쪽 국강상에 대왕의 능과 함께 세워졌다.

 


비는 집안시의 시청소재지인 통구성으로부터 동북쪽 약 4.5km 지점인 태왕촌 대비가에 서 있으며, 비의 서남쪽 약 300m 지점에 대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태왕릉이 있다. 현재는 1982년에 중국 당국에 의하여 새로 건립된 단층의 대형 비각 속에 있으며, 비 주위에는 철책으로 된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

 

너비 1.35m∼2.0m, 높이 6.39m에 달하는 한국 최대의 크기로 개석이 없는 고구려 석비 특유의 형태다. 비신의 사면에는 한예의 팔분서에 가까운 고구려 특유의 웅혼한 필체로 14∼15cm 정도 크기의 문자가 음각되어 있으며, 현재에는 5mm 깊이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비신의 4면에는 모두 44행 1,775자의 문자가 새겨져 있다.

 


 

4)각저총

 


중국 지린성 지안현 여산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벽화고분.

 


그 서남쪽에는 무용총이 있다. 압록강 유역의 다른 고분들과 같이, 남서향인 봉토분으로 돌을 다듬어 쌓아올린 위에 흙을 덮어 만들었다. 널방은 정사각형이며, 직사각형인 앞방이 있고, 그 앞을 널길이 연결하고 있다. 앞뒤로는 좁고 좌우로 긴 직사각형 앞방 천장의 좁은 부분이 궁륭형(아치형)으로 되어 있어 마치 널방 앞을 좌우로 터널을 뚫어 놓은 것 같다. 널방 천장은 모줄임천장으로 되어 있다.

 


이 벽화고분은 다른 고분과는 달리 청룡 ·백호 ·주작 ·현무와 같은 사신그림이 없지만, 앞방에 들어가면 왼쪽과 오른쪽 벽에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그려져 있고, 앞쪽 벽에는 눈동자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한 사나운 개가 그려져 있다. 널방의 동쪽 벽에는 이 이름이 붙여지게 된 씨름그림이 나무를 중심으로 그려져 있고, 북쪽 벽에는 묻힌 사람의 생전의 실내모습을 연출한 듯 지붕과 커튼을 친 집안에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서쪽 벽에는 소가 끄는 수레와 안장을 얹은 말이 그려져 있으며, 천장은 화려한 불꽃문양과 인동당초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무늬 사이로 삼족오가 있는 해와 두꺼비가 있는 달이 있다. 벽의 네 모서리에는 두 팔을 치켜 들고 천장을 떠받치는 형상의 역사상을 배치하였다. 축조방식이나 시기 ·벽화의 내용 등이 무용총과 비슷하다.

 


 

5)무용총

 


광개토왕릉비의 북서쪽 약 1km 지점에 있으며 각저총과 나란히 있다. 기저의 한 면이 약 15m인 방추형 분구이며 높이는 3m 내외이다. 널방은 약 3m 사방의 널방과 가로로 긴 앞방, 이것들을 연결하는 통로 및 널길로 되어 있는데, 널방의 바닥면에는 오른쪽 벽에 치우쳐서 4장의 판석을 배열한 널받침시설이 있다.

 


널방은 괴석을 쌓았고, 모줄임천장이며 회반죽을 두껍게 칠한 벽면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주실 정벽의 접객도는 이 무덤의 주인공인 듯한 인물이 상궤에 앉아 있고 그와 대화하듯 두 사람의 삭발한 승려가 역시 상궤에 앉아 있으며, 이밖에 시동) 세 사람이 그려져 있다.

 


오른쪽 벽은 수렵도가 대부분의 면적을 차지하고, 왼쪽 벽에는 주인을 표현한 인물의 기마도와 주방 등의 가옥 2동 외에 5명의 남녀 군무상, 9명의 합창대상이 그려져 있다. 이 장면의 특이함에서 무용총이라고 명명되었는데, 천장에는 연화문 등의 장식문, 사신도·일월상도를 포함한 그림이 있다. 앞방의 벽화는 박락되어 가고 있다.

 


 

2.평양성의 문화재

 


1)을밀대

 


평양특별시 중구역 금수산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누정.

 


사허정이라고도 한다. 북한문화재 사적 제7호이다. 을밀대라는 이름은 옛날에 을밀선녀가 이곳에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에서 생겼다고도 하고, 고구려 때 이곳을 지킨 을밀장군의 이름에서 따왔다고도 한다. 6세기 중엽 고구려가 평양성의 내성을 쌓으면서 그 북장대로 세운 것으로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1714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모란대와 맞선 석루 위에 있어서 평양시내를 바라볼 수 있으며 동쪽은 낭떠러지로 대동강에 면하고 북쪽으로 현무문이 내려다보인다. 을밀대의 축대는 고구려의 축성술이 남아있는 대로서 높이는 약 11m이다. 축대 위에 건립한 누정은 앞면 3칸(7.46m), 옆면 2칸(5.29m)에 2익공바깥도리식두공을 얹고 겹처마의 합각지붕을 이었다.

 


 

2)보통문

 

평양특별시 중구역 보통문동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성문.

 


지정번호 북한 국보 제2호

소재지 평양 중구역 보통문동

시대 고구려시대

크기 홍예문 높이 4.55m, 너비 4.4m, 문루 정면 3칸(14.8m), 측면 3칸(9.15m)

종류 성문

 

북한 국보 2호이다. 6세기 중엽 고구려가 평양성을 쌓을 때 성의 서문으로 세웠으며, 현재 건물은 조선시대인 1473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이 문은 평양성 서북쪽 방향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국방상·교통상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시대부터 고려·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중요시되었다.

 


2층 누각을 갖춘 성문으로 축대는 화강암을 다듬어 쌓았고, 축대에는 높이 4.55m, 너비 4.4m의 홍예문(무지개문)이 있다. 문루는 2층으로 정면 3칸(14.8m), 측면 3칸(9.15 m)이다. 바깥기둥은 모두 1층 지붕에 이어지고 안쪽의 네 기둥은 1층에서 2층까지 관통하여 세웠다.

 


바깥기둥과 안기둥 사이에 연결된 툇보 위에는 짧은 2층 기둥이 놓여 있다. 두공은 1·2층 안팎이 모두 3포로 되어 있고, 두공첨차의 간격은 바깥쪽보다 안쪽이 더 크다. 다른 성문들에 비하여 전체 높이가 조금 낮고 1층 면적에 비하여 2층 면적이 상대적으로 좁다.

 


또한 측면에서 1층 양쪽 바깥기둥의 밑둥과 마룻도리를 연결하는 3각형, 그리고 정면에서 축대바닥 양쪽 끝과 문루의 용마루 중심을 연결하는 3각형은 거의 정3각형에 가깝게 되어 있어 더욱 장중하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현존하는 한국 성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며, 고구려의 건축양식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3)평양성

 

평양특별시 중구역과 평천구역에 있는 고구려 후기의 도성.

 


지정번호 북한 사적급 문화재 제1호

소재지 북한 평양 중구역과 평천구역

시대 고구려 후기

종류 도성

 


북한의 사적급 문화재 제1호이다. 평지성의 장점과 산성의 장점을 종합하여 축성하였다. 내성·외성·북성·중성으로 이루어졌으며, 성벽의 길이는 23km이다. 내성은 대동문 아래에서 서북쪽으로 남산고개를 지나 만수대까지이고, 외성은 대동강과 보통강을 둘러싼 평지성이며, 북성은 만수대 북쪽으로 모란봉을 둘러싼 부분이고, 내성 남쪽으로 대동교에서 안산까지 연장된 성이 중성이다.

 


이중 평지성인 나성 부분은 시가지를 형성하였던 곳이다. 성벽은 돌로 쌓거나 돌과 흙을 섞어 쌓기도 하였는데, 능선에서는 외면 축조방법을, 평지에서는 양면 축조방법을 사용하였다.

 


성문은 내성과 중성 및 외성에서는 각 4개의 문을 냈으며, 북성에는 남쪽과 북쪽에만 냈고, 외부와 통하는 중요한 성문들에는 옹성을 쌓았다. 성안에는 7개의 장대가 있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은 내성의 을밀대와 북성의 최승대이다. 이 내성의 성벽에서는 명문이 있는 성석편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축성연대와 축성에 5부 사람들이 동원된 사실 및 공사의 담당 구간, 담당자의 이름과 관직이 알려졌다.

 

 

2.지리 등의 아주 자세한 사항

 

1) 큰 강을 끼고 있다.

이것은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도읍지를 보호하고, 외부와의 왕래를 편리하게

하며, 식수 및 농업용수 등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된다.


 

2)산을 등지고 있다.

이것은 외적의 침략을 방어하기에 좋고, 겨울철에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3)넓은 공간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백성들이 살 수 있는 터전이 되며, 들에서 생산물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된다.

 

 3. 그 밖에 많은 사항들

 

1)도읍지란 '한 나라의 수도를 삼은 곳'을 말하는데 백성들이 모여 살기에 알맞고, 나라를 다스리는 여러가지 일을 하기에 편리하며, 외적의 침입을 쉽게 막을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2)옛도읍지에는 유물과 유적들이 많이 있다.그 유물들을 통해 우리는 조상들의 문화와 생각 등을 알 수 있고,그 속에 있는 숨은 지혜를 배울 수 있다.

 

3)고구려 문화재는 주로 불교와 관련이 있는 문화재가 많고,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사진은 없어여 ..ㅈㅅ

2006.09.11.

  • 출처

    다른님 의견...............;;;;;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