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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덕을 쌓고 악업을 없애고 보시를 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4,449 작성일2015.11.12

덕을 쌓는것은 남에게 따뜻하고 듣기 좋은 말을 많이하고 남에게 나누고 베풀고 배려하고 그런 행동을 하고 마음씨를 가지면 그게 덕을 쌓는것 인가요?

악업을 없애는건 남을 미워하지않고 원망하지않고 욕하지않고 그렇게 살며 그러기위해 수행을 하고

 

이러면 되는건가요?

 

근데 보시를 한다는건 뭘 말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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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덕을 쌓는 것은 세상을 진정으로 축복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따뜻하고 듣기 좋은 말을 많이한다고 해서 그 상대방이 진정으로 좋아지지 않는다면,
그 행동은 진정으로 덕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과거에 자신이 게을러서 거지가 된 이에게 무조건적으로 돈을 주거나 이러한 행동은 
그의 일하기 싫어하고 남에게 의존적인 성격을 계속해서 반복하게 하므로 진정한 덕이 아닙니다.

진정한 덕은 진정으로 축복해주는 것을 말하는데, 이 사례에서 진정한 축복은 거지에게 자신이 게을러서
거지가 됬음을 깨닫게 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일자리를 가지도록 독려하며, 그 일자리를 통해서
이 태어난 삶의 의미를 찾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은 일을 안하면 삶을 통해서 어떠한 결실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을 깨우쳐줌으로 해서 그 거지가 일하기 싫어하고 남에게 의존적인 성격을 바꾸고
사회속에서 일자리를 얻음으로써 당당하게 서 자신이 태어난 삶의 보람을 찾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덕입니다.

그리고 악업을 없애려면 선업을 쌓아야 합니다.
이 선업은 공덕행을 통해서 쌓아야 합니다.
여기서 공덕행이란 상대방과 세상을 진정으로 축복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이 공덕행은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상대방과 세상을 진정으로 축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도움이 되실 것 같아 제가 아는 사이트의 "선업과 악업의 진실"에 관한 글을 올려봅니다.



지금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불교이론은 이 세상이 무상한 고통의 바다이니
나고 죽음을 끝없는 되풀이 하는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 영원한 평안인 열반을 얻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불교인들이 다음 생에 다시는 윤회의 고리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악업도 선업도 지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악업을 지으면 당연히 지옥과 같은 고통의 굴레를 돌고
선업을 지어도 천상에서 일시적인 안락한 생활을 누리지만 곧 다시 생노병사의 한계에 부딪혀 윤회의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악업도 선업도 짓지 말아야 하며
남을 도울 때도 지은 것도 지은 마음도 없는 무주상보시를 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부처님의 말씀이며 현실적으로 이러한 삶이 가능한 일일까?

초기에 부처님의 원음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는 숫타니파타나 이띠붓타까를 보면
거의 대부분이 인간이 가야할 진실과 도리와 선업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를 실천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후기 대승불교에 와서는 이러한 말은 하근기에 대한 방편적인 가르침이고
실제 부처님 가르침의 정수는 상근기에 대한 것으로  세상이 공하니 선업악업과 모든 인과를 버리고 선정으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어느 것이 옳은 말인가?
인간에게 주어진 도리를 양심에 따라 충실하게 실천하며 사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세상이 허망하니 모든 것을 버리고 선정으로 공함으로 깨치는 것에 매진하는 것이 옳은가?

과연 이 두 개의 상반되는 가르침 중 실상에 부합되는 부처님의 참 가르침은 무엇일까?
답은 두 개 모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완전한 눈을 가진 자로 사실을 사실대로 바로 보는 분으로
그런 분이 세상이 윤회하는 모습과 해탈에 이르는 길을 보시고 두 가지 말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탈에 이르는 참된 길은 과연 무엇인가?

먼저 두가지 주장의 논리를 정리해보자.
선업을 지으면 안된다는 논리는 선업을 지으면 좋지만 그것 또한 업이므로 
선이라는 먼지가 쌓임으로써 맑은 해탈심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며
모든 것을 버리고 공만 깨치면 된다는 논리는
생각으로 아무리 공을 깨치고 집착을 버린다고 해도 자신 속에 켜켜히 쌓여 저혼자 날뛰고 있는 업을 버릴 수 없다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선업이 업이라는 문제가 대두된다.
만약 선업이 업이 아니라 업을 지우는 요소라면 이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다.

결론을 내리기전에 먼저 업이 무엇인지,  
부처님의 선업과 악업에 대한 입장이 무엇인지, 선업과 악업의 실체는 무엇인지?
선업과 악업이 과연 실재하지 않은 허상이며 분별에 불과한 것인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어느 것이 옳은지 정확히 결론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부처님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인 해탈에 이르는 길이 정반대의 두가지가 되는 우스운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먼저 업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업이란 과거 생에 자신 속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태어나 되풀이하는 것을 말한다.
노란 콩이 노란 콩을 낳고 검정콩이 검정 콩을 낳듯이
과거 생에 해탈에 이르는 좋은 원인을 지으면 그 근본 속에 좋은 자질이나 습이 남아 있어 밝은 지혜와 좋은 마음으로 좋은 운명을 지니게 되고 세상에 좋은 원인을 지어 해탈로 나아가게 된다.


따라서 무명으로 어리석은 원인과 악한 원인을 지은 이는 그 나쁜 습이 남아 계속 무지한 일을 하게 되며 나쁜 원인을 지어 불행한 운명을 받게 되고 한을 짓게 되어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한번 지은 것은 영원히 그 결과를 남기는 것이니 그래서 인과의 무서움은 예로부터 강조되었던 것이다.

부처님은 선업과 악업에 대해 뭐라고 하신 것일까?

초기 아함경의 정법 사법경을 보면
부처님은 선과 악, 가까이 해야 할 것과 멀리해야 할 것,
정법(正法)과 사법(邪法), 연기법(緣起法)과 외도의 법(非緣起法)등을
옳고 바르게 사실대로 아는 것을 正知라 하여 옳고 그름을 분명히 구분하여 선업을 지으라고 했다.

초기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고 평가받고 있는 숫타니파타와 법구경을 보면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고 돌아가실 때까지 제자들에게 세상의 실상과 인간이 행복해지는 길, 해탈에 이르는 길에 대해 밝히셨고 육친 제자들은 평생 부처님을 곁에서 시봉하며 수많은 사례 속에서 그러한 가르침을 듣고 세상을 바로 보는 눈을 얻고 세상의 인과가 이루어지는 이치를 깨쳐 부처님으로부터 다음 생에는 부처가 된다는 수기를 받았다.

그래서 부처님도 과거 아라한의 경지에 들어 천상에 났다가 다시 이땅에 와서 해탈에 이르렀으니 이와 같이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행하여 선과의 고리를 돌아 인간계와 천상에 나는 것은 인간완성의 경지인 해탈에 이르는 필수 코스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해탈에 이르는 길에 대해 여러 말이 많지만 가장 올바른 길은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행하신 가르침인 것이다.
제자들이 부처님 곁에 평생 머물며 받은 가르침은 크게 몇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눈 먼 제자들과 찾아오는 중생들을 위해 세상의 실상과 이치에 대해 가르쳤던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가르침을 듣고 세상을 이해하게 되고 정법을 알게 되고 세상을 보는 인과법을 깨쳐 중생들을 구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으로 세상을 위해 전법을 함으로써 선업을 쌓으라 했던 것이다. 배운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공덕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상의 이치와 깨달음에 이르는 이치를 깨치고 열심히 실천하여 선업과 공덕을 쌓았으면 자신의 삿됨과 무명을 버리고 맑은 마음을 얻어 부처에 이를 근본을 쌓았으니 그 후에야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 생에 부처가 될 것이라고 수기를 주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정법이니 
이것이 후대에 와서 체계화된 것이 팔정도인 것이다.

부처님으로부터 실상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듣고 바른 견해를 갖게 되었으니 정견(正見)이며 실상에 대한 인과의 이치를 듣고 깨달아 세상을 바로 생각하게 되었으니 정사유(正思惟)이며 이를 바르게 말하고(정어:正語), 바른 생각을 갖고(정념:正念), 
계율을 지키며 바르게 살고(정명:正命), 열심히 정진하고(정정진:正精進)
그리하여 선업을 쌓고(정업:正業), 쉬는 날에는 그동안 선업을 쌓은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선정(정정:正定)을 하였으니 바로 이것이 해탈에 이르는 가장 올바른 방법인 것이다.

여기서 정이란 것은 모두 선업을 말하는 것이니
진실하고 부지런하게 살며 계율을 어기지 말고 인간의 도리를 지켜  열심히 공덕을 짓는 것이 모두 선업을 가르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과거 부처님들이 말씀하신 칠불통게와 일치하는 것이다.

諸惡莫作(제악막작)   모든 악을 짓지 말고
衆善奉行(중선봉행)   온갖 선을 행하라
自淨其意(자정기의)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하는 것
是諸佛敎(시제불교)   이것이 곧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일관된 가르침이니 후기 공관을 바탕으로 모든 분별과 이치를 무시하며  선정 만을 중시한 대승불교 사상과의 차이점인 것이다.

오늘날 대승불교는 부처님이 설한 수많은 세상의 이치와 선업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세상 속에 존재하는 모든 실상의 일들마저 공이며 환이라 하여 관념적으로 무시하고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지고 있는 불변의 법칙인 인과법마저 부정한다.

따라서 세상을 보는 눈이 어둡고 세상을 위해 적극적으로 선업을 짓지 못하니 무기력한 종교가 되고 해탈에 이르는 원인을 지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정법이 500년 밖에 가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삼계의 이치를 모두 다 보신 부처님이 쉰 소리를 했을 이유가 없다. 부처님은 힌두교의 미신과 우상이 성행하는 인도에서 당신이 떠나시면 곧 그 영향으로 당신의 가르침이 변질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신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학자들이 이미 종교의 변천과정을 연구한 결과로 증빙된 사실인 것이다.

그럼 선업은 무엇이고 악업은 무엇인가?

선업은 세상의 일을 밝혀 이치대로 실천함으로써 세상에 공덕을 짓고 정신을 맑게 하는 것이며 악업은 세상 일을 모르고 자기 욕심대로 함부로 살아 정신을 흐리게 하고 세상에 죄를 짓는 것이다.

즉 선업은 불성을 맑게 하는 흔적을 말하며 악업은 불성을 흐리게 하는 흔적을 말하는 것이니 악업을 지으면 업이 두터워지지만 선업을 지으면 업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처럼 선업과 악업은 서로 다른 정반대의 업이 아니라 빛과 어둠의 관계와 같아서 
밝음이 오면 어둠이 사라지고 어둠이 짙으면 밝음이 사라지는 것과 같이 서로 반대의 성질인 것이다.

이러한 이치는 아함경의 원인경에 잘 나타나 있는데, 어떤 업은 다른 업을 일어나게 하고 어떤 업은 다른 업을 소멸하게 한다는 이치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있다.
“탐욕없음과 성냄없음과 어리석음이 없게 되면 그로부터 일어난 업은 유익한 것이고, 그 업은 즐거운 과보를 가져오며, 그 업은 다른 업을 소멸하게 하고, 그 업은 다른 업을 일어나게 하지 않는다.”

즉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악업이지만 거짓이 없이 진실하게 사는 것은 선업이며 욕심을 부리는 것은 악업이지만 이치에 맞게 바르게 사는 것은 선업인 것이다.
따라서 정직하게 살게 되면 거짓말하는 어두운 업이 사라져 마음이 맑아지고 근심이 없어서 모든 일을 당당하고 밝고 지혜롭게 헤쳐 나갈 수 있게 되어 운명이 좋아지고 선근이 커지는 것이며 해탈문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로 선업을 지으면 기존 논리대로 윤회의 고해를 헤매는 것이 아니라
밝고 강한 선근을 얻어 악업에 물들지 않고 모든 일을 사실과 이치에 맞게 행하는 관계로
공덕이 쌓여 선과의 고리를 돌아 해탈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실상 속에 이루어지고 있는 해탈의 이치를 모르니 모든 업을 버려야 한다는 관념적 논리에 빠져 선업마저 버리라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지나치게 철학화, 논리화된 불교가 상식적인 인과법과 착하게 살라고 하는 기본적인 가르침마저 경시하니 현 불교가 비현실적 종교이며 관념적인 말법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201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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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www.ginc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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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만두친구
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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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가 양나라의 황제인 양무제를 만났을 때 양무제는 물었다. "내가 불교를 위하

여 수많은 절을 짓고 많은 스님들에게 공양을 했는데 그 공덕이 얼마나 되는가?"

그러자 달마는 "공덕이 되지 못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공덕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공덕을 잘 지을 수 있는가?
 

한마디로 공덕이란 세상을 이치에 따라 이루어지도록 축복해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남을 축복한다는 것과 무조건 남을 돕는다는 것은 매우 다른 것이다. 자칫

남을 잘못 도우면 그것은 상대와 자신에게 모두 해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세상사람들이 모두 좋은 일을 한다고 말하는데도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은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이 나쁜 결과가 나타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좋은 예로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지나친 집착으로 자식을 망치는 경우와 거

지를 돕는다고 하면서 독립성을 상실시켜 영원한 거지로 만드는 경우가 있다.


진정한 공덕이란 각자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것이며 그 사람을 인간적 가치를 가

진 주체적 인간으로 서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축복하기 위해서는 생

명의 길과 올바른 이치를 알아야 제대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공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남에게 무조건 베풀어주는 자선이 있는가 하면 부의

축적과 고용의 창출로 세상사람들이 먹고 살수 있도록 해주는 공덕도 있다. 범죄

를 타파하여 악을 억제하는 공덕도 있으며, 인간으로서의 의미와 가치를 다하도

록 밝은 삶의 길을 가르쳐 주는 진리의 공덕도 있다.


하지만 말은 쉽지만 실제 올바른 공덕을 행하기는 매우 힘이 든다. 무조건 베푸는

자선은 받는 사람의 자립능력을 약화시키고 인간으로서 자질을 저하시켜 공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악덕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혜는 받은 자에게는 불행이 되

며 세상에는 부담이 되는 것이다.


자선은 베풀되 받는 사람이 고마움을 알도록 하여 세상에 보답하려는 양심을 일

깨워 주는 것이어야 하며 받는 것을 부끄러이 여겨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각성

시켜 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경전에도 고기를 주지 말고 그물 던지는 법을 가르쳐주라고 하신 것이다.

이 말은 곧, 진정한 축복이란 인간으로 태어난 가치와 의미를 키울 수 있도록 주

체적인 능력을 향상시켜 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삶은 단순한 생존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성장시키기 위해 태어

난 것이기에 남의 도움으로 생명만 연장하는 것은 오히려 그의 인간적 가치를 약

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남의 도움이 육신을 살리고 그 영혼을 망친다면 그러

한 도움은 아니 받느니 만도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축복은 한사람의 삶을 주체적으로 성장시켜 나갈 수 있도록 스

스로 자존할 능력과 바른 삶의 길을 가르쳐 영혼이 성장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www.gincil.com에서 발췌 및 수정해서 올려봅니다.

201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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