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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한일협약·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을사늑약(乙巳勒約) 등으로 불린다. 제3차 러일협약(露日協約) 체결을 계기로 러시아와 일본이 타협하여 일제의 한국 진출은 경제적인 면에 주력하게 되었다.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이 청국으로부터 받은 배상금은, 한국의 철도부설권을 점차 획득하고 광산·삼림·어업·항시(港市)·온천 등에서 얻은 갖가지 이권과 함께 한국의 금수출·상무역(商貿易)까지 장악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이 무렵 만주를 점령하던 러시아에 대해 영일동맹(英日同盟)을 체결한 영국과 일본이 철수요구를 하는 등 만주를 둘러싼 국제적인 관계는 더욱 미묘하게 진행되었다. 한편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조정으로 러·일 양국의 강화회담이 포츠머스에서 열려 전문 15조, 추가 약관(約款) 2개조의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포츠머스회담). 한국에서의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한 조약은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에 따라 독립국가의 주권을 무시한 것이었고 열강이 일본의 한국침략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이 되었다. 포츠머스회담의 내용상 전승(戰勝)의 대가로 부족한 것을 한국에서 보충하자는 일본 자체 내의 여론은 곧 1905년 11월 9일 일본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파견하여 하야시공사와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앞세우고 ‘보호’를 강행하려 하였다. 이 조약의 체결 소식이 1905년 11월 20일자의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신문사 사장 장지연(張志淵)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게재함에 따라 전국에 알려져 국민들의 조약 체결에 대한 거부와 일제에 대한 항쟁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한편 민영환은 상소로도 조약체결이 원점으로 되돌아가지 않자 유서로써 전국민에게 경고하면서 자결 순국하였고, 뒤이어 조병세, 전참판 홍만식(洪萬植), 학부주사(學部主事) 이상철(李相哲), 평양대(平壤隊) 일등병(一等兵) 김봉학(金奉學), 주영공사(駐英公使) 이한응(李漢應) 등도 죽음으로써 일본에 항거하였다. |
2007.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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