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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을사조약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비공개 조회수 848 작성일2009.06.29

학교 선생님이 을사조약에 대해 조사하라는데... 찾아봐도 정확한 건지 몰르겟고 해서 ...

을사조약에 대해서 알려주세요ㅠㅠ 6시 까지요ㅠㅠ제다데로 알려주지 않으면

정확하게 안알려주면 여기있는 상어가 잡아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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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

을사조약의 체결

ㆍ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음.

1905년, 일본은 고종 황제와 일부 대신들의 반대를 누르고 일본에 협조적인 을사 5적을 앞세워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였음.

을사조약의 체결로 일본은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 나라 내정 전반에 관해 간섭을 하였음.

을사조약의 내용

1. 일본 정부는 한국의 외교에 관한 모든 사무를 지휘, 감독하고 일본의 외교 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있는 한국인을 보호한다.

2.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를 통하지 않고는 외국과 조약을 맺지 못한다.

3. 일본 정부는 외교에 관한 일을 관리하는 1명의 통감을 한국 황제 밑에 두는데, 언제든지 황제를 만날 권리가 있다.

4. 일본과 한국 사이에 이미 맺은 조약은 이 조약과 다르지 않은 한 효력이 있다.

 

2009.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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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사조약

을사조약(乙巳條約)은 1905년 11월 17일 한국정부의 박제순과 일본정부의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체결된 불평등 조약입니다. 제2차 한일협약, 을사오조약, 을사보호조약이라 부르기도 하며 일본에 의해 강제로 맺은 조약이라 해서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체결 당시 정식 명칭은 ''''한일 협상 조약''''입니다.

이 조약은 1965년 한일국교를 정상화하는 한일기본조약의 제2조에서 무효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배경*

일본은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기에 앞서 1903년 12월에 이미 한국을 일본의 권세 아래에 둘 것을 각의에서 결정하였습니다. 그에 따라 1904년 일본은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인천에 병력을 투입하여 황성을 점령함과 함게 러일전쟁을 일으켰으며, 조선에 한일협약을 강요하여 이른바 공수동맹을 맺고 전쟁에 대한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강화조약에 의해 러시아는 조선에서 손을 뗐습니다.

이 이후 고종황제가 제1차 한일 협약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는 밀사를 파견한 사건이 나자 이를 구실로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 박탈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제2차 한일협약을 강요하여 체결합니다. 조약이 체결된 해의 간지가 을사년이므로 흔히 ''''을사늑약''''이라 부릅니다.

을사조약의 체결로 조선은 명목상으로는 보호국이나 사실상 일본제국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조약의 내용*

조약은 전문과 5개 조항, 결문, 외무대신 박제순과 일본특명전권공사 하야시의 서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문에는 ''''한국정부와 일본국정부의 공통의 이해를 위해 한국이 부강해질 때까지''''라는 형식상의 명목과 조건이 붙어 있으며, ''''1) 일본국 정부는 재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대표자 및 영사가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인과 이익을 보호하고 2)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하고 한국정부는 일본국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국제적 성질을 가진 조약이나 약속을 할 수 없으며 3) 일본국정부는 한국 황제의 궐하에 1명의 통감을 두어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고 한국 황제를 친히 내알할 권리를 갖고, 일본국정부는 한국의 각 개항장과 필요한 지역에 이사관을 둘 권리를 갖고,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하에 종래 재한국일본영사에게 속하던 일체의 직권을 집행하고 협약의 실행에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맡으며, 4) 일본국과 한국 사이의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그 효력이 계속되고, 5) 일본국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합니다.


*결과*

을사늑약의 체결로 한국 내의 공사관들은 모두 철수하였다. 한국에는 통감부가 설치되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취임하였다

2009.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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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성실하게 답변드리겟습니다. 미흡하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을사조약

을사조약의 체결

ㆍ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음.

1905년, 일본은 고종 황제와 일부 대신들의 반대를 누르고 일본에 협조적인 을사 5적을 앞세워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였음.

을사조약의 체결로 일본은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 나라 내정 전반에 관해 간섭을 하였음.

을사조약의 내용

1. 일본 정부는 한국의 외교에 관한 모든 사무를 지휘, 감독하고 일본의 외교 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있는 한국인을 보호한다.

2.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를 통하지 않고는 외국과 조약을 맺지 못한다.

3. 일본 정부는 외교에 관한 일을 관리하는 1명의 통감을 한국 황제 밑에 두는데, 언제든지 황제를 만날 권리가 있다.

4. 일본과 한국 사이에 이미 맺은 조약은 이 조약과 다르지 않은 한 효력이 있다.

 

 

 

헤이그 특사 사건
을사조약의 체결로 한국은 외교권을 상실하여 자주 국가로서 국제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마침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26개국의 대표가 참석하는 제 2회 만국 평화 회의가 열리게 되자, 1906년 4월 고종은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과 전 평리원 검사 이준을 이 회의에 파견하였다.
이준은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지적한 고종의 신임장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친서를 휴대하고, 4월 22일 서울을 출발하였다.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을 만나 러시아로 가서 이위종과 합류하였다. 일행은 주한 러시아 공사를 지냈던 베베르(Veber, K. I.)를 통해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전하고,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27일 회의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nelidorf)를 만나, 고종의 신임장을 제시하고 호소문을 전달한 다음 한국 대표의 회의 참석과 을사조약의 파기를 의제에 포함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반대로 회의 참석이 제지되자, 만국 평화 회의 참석이 제지되자, 만국 평화 회의를 계기로 개최된 국제 협회 회의에서 이위종이 만국 평화 회의가 고난에 처해있는 한국을 도와주지 않음을 지적하고, 구체적인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이 사건이 전해지자 통감 이토는 특사 파견은 일본에 대한 적의를 표시한 것이며, 그 책임이 고종 황제에게 있다면서, 퇴위를 강요하였다. 7월 18일에는 일본 외무대신 하야시와 함께 고종을 협박하였다. 끝내 고종은 ‘황태자 섭정’ 의 조칙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 통감부와 이완용, 송병준 등 매국 대신들은 이 조칙을 ‘양위(讓位)’로 왜곡 발표하고, 20일 양위식을 강행하였다. 이어서 24일에는 한일 신 협약(정미 7조약)이 체결되어 이른바 ‘차관 정치’가 시행되었고, 27일에는 언론 탄압을 위한 신문지법이, 29일에는 집회 결사를 금지 하는 보안법이 공포되었고, 31일에는 한국 군대 해산 명령이 내려졌다.

 

 

을사 조약후 의병활동

 

 

을사 조약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의병 활동들이 일어났어요...

 

의병 활동은.......

 

을사 조약 체결 후 전국적으로 의병 운동이 확대 되었고,

 

군대 해산 이후에는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참가 하면서 전투력이 향상 되었습니다.

 

일본의 강제 합병 이후에는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으로 국내의 의병은 점차 약해지고

 

국외로 망명한 의병들이 독립군으로 재정비가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를 지키기 위한 의병 활동은 장소와 때를 구분 하지 않고,

 

활발히 진행이 되었습니다.

 

 

 

 

 

 

 

 

 

 

 

 

 

 

 

 

 

 

 

 

 

 

 

 

 

 

 

 

 

 

 

 

 

을사조약... 참으로 나쁜 거죠. 제가 짧은 걸 좋아하니 짧게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1. 을사조약 체결(1905년)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 대하여 본견적인 침략을 시도하기 위해 고종 황제와 일부 대신들의 반대를 누르고 강제로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조선은 외교권을 박탈 당해 주권 국가로서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2. 을사조약의 체결 결과

*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었습니다. (1906년 2월)

* 외국에 있던 한국 외교 기관이 모두 폐지 되었습니다.

* 우리 나라에 있던 주한 외국 공사관들도 철수하였습니다.

 

3. 헤이그 특사 파견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 평화 회의에 이준, 이위종, 이상설 세 사람을 특사로 파견하여 일제의 침략을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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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은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고 러일 전쟁에선 일본이 승리를 했습니다. 명성 황후를 죽인 사건 을미사변으로 인데 을사 조약 즉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 박탈을 위하여 조약을 맺었습니다. 첫번째 강화도 조약 이후 우리나라의 조약 을사 조약입니다.
을사조약의 내용은
을사보호조약·제2차한일협약·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을사늑약이라고도 한다. 제3차 러·일협약(露日協約) 체결을 계기로 러시아와 일본이 타협하여 일제의 한국 진출은 경제적인 면에 주력하게 되었다.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이 청국으로부터 받은 배상금은, 한국 전체의 철도부설권을 점차 획득하고 광산·삼림·어업·항시(港市)·온천 등에서 얻은 갖가지 이권과 함께 한국의 금수출·상무역(商貿易)까지 장악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이 무렵 만주를 점령하던 러시아에 대해 영일동맹(英日同盟)을 체결한 영국과 일본이 철수요구를 하는 등 만주를 둘러싼 국제적인 관계는 더욱 미묘하게 진행되었다.

1903년 4월 러시아군이 만주의 마적과 함께 한만국경(韓滿國境)을 넘어서 용암포(龍岩浦)를 강제 점령하자 일본은 즉각 러시아의 철수를 요구하게 되었고, 이에 대해 러시아는 오히려 한반도를 북위 39도선을 중심으로 분할점령할 것을 제안하였으며, 일본측에서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국제적인 상황 아래서 1904년 1월 23일 한국정부는 엄정 중립국임을 해외에 선포하였다. 2월 6일 39도선 문제와 만주문제로 대립하던 러시아와 일본이 국교를 단절하여 8일 뤼순[旅順]에서 첫 포성이 울렸고 이튿날 새벽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 서울로 입성하고 10일 대러시아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러시아와 일본은 전쟁상태에 들어갔다. 러·일전쟁의 개시와 함께 23일 일본의 강요로 공수동맹(攻守同盟)을 전제로 한 한일의정서(韓日議政書)가 체결되었다. 의정서는 6개조로서 제2,3조에 한국 황실의 안전과 독립 및 영토보전을 보증한다고 되어 있으나 기타 조항은 모두가 주권국가의 주권을 무시한 것이었다. 러일전쟁이 일본측의 승리로 기울어지자 한국정부는 5월 18일자의 조칙(詔勅)으로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되었던 일체의 조약과 협정을 폐기한다고 선포하는 동시에 러시아인이나 러시아 회사에 할애하였던 이권도 전부 취소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을 심화시켜 8월 외부대신 서리 윤치호(尹致昊)와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공사 사이에 〈외국인용빙협정(外國人傭聘協定)〉을 체결하게 되었는데 이는 곧 일제의 한국재정에 대한 직접적인 간섭이었다.

한편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조정으로 러·일 양국의 강화회담이 포츠머스에서 열려 전문 15조, 추가 약관(約款) 2개조의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포츠머스회담). 한국에서의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한 조약은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에 따라 독립국가의 주권을 무시한 것이었고 열강이 일본의 한국침략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이 되었다. 포츠머스회담의 내용상 전승(戰勝)의 대가로 부족한 것을 한국에서 보충하자는 일본 자체 내의 여론은 곧 1905년 11월 9일 일본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파견하여 하야시공사와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앞세우고 ‘보호’를 강행하려 하였다. 외교권 박탈을 내용으로 하는 신협약안(新協約案)은 이토와 하야시를 거쳐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에게로 전달되었다. 이토는 하세가와와 함께 전후 3차례에 걸쳐 고종을 알현하였으며 11월 16일 정동(貞洞)의 손탁호텔에서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이하 8대신을 위협하여 협약안의 가결을 강요하였다. 이어서 그들의 강요 아래 5시간이나 계속된 17일의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도 결론이 내려지지 않자 이토와 하야시는 일본 헌병 수십 명의 옹위 아래 회의장에 들어가 대신 각각에게 가부의 결정을 강요하였다. 이때 고종은 다만 ‘정부에서 협상 조처하라’고 하여 책임을 회피했을 뿐이며 한규설만 무조건 불가하다고 하였다. 한규설에 동조한 사람은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민영기(閑泳綺)와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이었고,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하여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은 모두 책임을 고종황제에게 전가하면서 찬성을 표시하였는데, 이들을 을사오적(乙巳五賦)이라 한다. 이토는 강제 통과된 협약안을 궁내대신 이재극(李載克)을 통해 황제의 칙재(勅裁)를 강요한 뒤 동일자로 한국 외교권의 접수, 일본 통감부(統監府)의 설치 등을 중요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사이에 체결 조인하고 18일에 이를 발표하였다.

이 조약의 체결 소식이 1905년 11월 20일자의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신문사 사장 장지연(張志淵)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게재함에 따라 전국에 알려져 국민들의 조약 체결에 대한 거부와 일제에 대한 항쟁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이상설(李相卨)의 상소를 비롯하여 종1품 이유승(李裕承), 법부주사(法部主事) 안병찬(安秉瓚), 원임의정대신(原任議政大臣) 조병세(趙秉世),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閉泳煥), 전참찬(參贊) 최익현(崔益鉉), 특진관(特進官) 이근명(李根命), 종묘제조(宗廟提調) 윤태흥(尹泰興), 승지(承旨) 이석종(李奭鍾), 유림(儒林) 이건석(李建奭) 등이 강경하게 상소하였다.

한편 민영환은 상소로도 조약체결이 원점으로 되돌아가지 않자 유서로써 전국민에게 경고하면서 자결 순국하였고, 뒤이어 조병세, 전참판 홍만식(洪萬植), 학부주사(學部主事) 이상철(李相哲), 평양대(平壤隊) 일등병(一等兵) 김봉학(金奉學), 주영공사(駐英公使) 이한응(李漢應) 등도 죽음으로써 일본에 항거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전개되어 전참판 민종식(閔宗植)이 홍주(洪州)에서 거병한 것을 비롯하여 전라도에서 최익현이, 충청도에서는 신돌석(申乭石)이, 경상도에서는 유인석(柳麟錫)이 각각 의병을 일으켰다. 그 외 이근택·이완용·이지용 등을 암살하기 위해 개별적인 거사를 하기도 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일본은 주한일본공사관을 철폐하여 신설한 통감부로 이양하고 각지에 있던 영사관은 이사청(理事廳)으로 개편하는 <통감부 및 이사청관제>를 1905년 12월 20일에 공포함으로써 서울에는 통감부가 개설되고 개항장과 주요 도시 13개소에는 이사청이, 기타 도시 11개소에는 지청이 설치되었다. 통감부는 종래 공사관에서 맡았던 정무(政務) 이외에도 조선보호의 대권, 관헌의 감독권, 그리고 병력동원권도 보유하였다. 또한 조선의 시정을 감독하거나, 어떠한 정책의 시행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됨으로써 통감부는 명실공히 조선보호의 최고감독기관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1906년 프랑스 파리법과대학의 교수인 F.레이는 을사조약이 협상대표에 대한 고종의 위임장과 조약체결에 대한 비준서 등의 국제조약에 필요한 형식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지 못한데다가 한글과 일본글로 된 조약문의 첫머리에도 조약의 명칭조차 없이 그대로 비어 있어 국제조약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지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그 법적 유효성을 주장하고 있어 그 후에도 계속 논란의 여지가 되고 있습니다.
을사조약에 맞서 우리나라의 ㅇㅣㄹ제의 침략에 맞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ㅂㅗ내어 그 부당서을 알리려고 했으나 그렇게는 되지가 않고 그 것을 삼아 을미의병과 고종을 그 이유때문에 퇴위를 시켰습니다.
을사조약의 내용은
1. 일본정부는 한국의 외교권에 관한 모든 사무를 지휘, 감독하고 일본의 외교 대표자 밎 영사는 외국에 있는 한국인을 보호한다.
2.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를 통하지 않고는 외국과 조약을 맺지 못한다.
3. 일본 정부는 외교에 관한 일을 관리하는 1명의 통감을 한국 황제 밑에 두는데, 언제든지 황제를 만날 권리가 있다.
4. 일본과 한국사이에 이미 맺은 조약은 이 조약과 다르지 않은 한 효력이 있다.
입니다. 또 헤이그 특사를 보낸 사람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 입니다.
그로 인해 의병 운동 즉 을미의병이 일어난 것입니다. 

2009.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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