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 이은찬이 남긴 교훈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성장 과정좀 알려주세요 !!!
오늘(화요일)까지 꼭꼭꼭 알려주세여~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이은찬 [李殷瓚]
1878(고종 15)∼1909. 조선 말기의 의병장.
강원도 원주 출신.
1907년 고종의 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각지에서 의병이 다시 일어나자,
그 해 9월 이구재(李九載)와 더불어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문경의 이인영(李麟榮)을 찾아가 총대장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인영을 대장으로 추대한 뒤,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 의병모집에 진력하였는데,
원근에서 응모자가 날로 늘어갔다.
그 뒤 원주를 떠나 횡성·지평(砥平)·춘천 등지를 전전하며, 의병규합에 진력하는 한편,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 각지에 격문을 띄워 양주로 집결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양주로 집결한 의병들로 13도의병연합부대를 편성,
이인영을 원수부십삼도총대장(元帥府十三道總大將)으로 추대하고 중군이 되었다.
의병연합부대는 곧 진격을 개시하여 일거에 서울을 공략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때마침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여 문경으로 돌아가면서,
작전계획에 차질이 초래되어 서울 침공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같은 해 12월 소속부대를 거느리고 양근·포천 방면으로 이동하여
임진강유역에서 허위(許蔿)와 손을 잡고 재차 임진강의병연합부대를 편성한 뒤,
허위를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이 방면에서 크게 위세를 떨쳤다.
1908년 말 허위와 김수민(金秀敏)이 일본군에게 잡혀 순국하자,
의병부대는 수가 적은 곳은 수 십명, 많은 곳은 200명 내외 규모로 나뉘어져,
양주·포천·영평·연천·삭녕·금천·배천·연안을 잇는 선내 및 해상도서에서 유격전술을 펼쳐 전과를 거뒀다.
또한 민폐를 없애는 데 힘써 주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1909년 1월 초순에 일본군의 압력이 심해지자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남방의 연안 도서지방으로 이동하였다.
1월 19일 야음을 틈 타 2척의 배에 분승하여,
연평도 일본군파견대를 기습공격하고 증산도(甑山島)로 후퇴하였다.
같은 해 2월 27일 30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양주군 석우리
북방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큰 타격을 입혔으나 의병 또한 수 십명의 희생자를 냈다.
그래서 간도로 들어가 정병을 양성한 뒤 보다 적극적인 항전을 계속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서울에 있던 박노천(朴魯天)과 신좌균(申左均) 등이 이와 같은 계획을 탐지하고
군자금을 제공하겠다는 미끼로 서울로 유인하였다.
그들의 말을 믿고 3월 31일 서울에 잠입하여 용산역에 나타났다가,
잠복하고 있던 일본경찰에 잡혀 1909년 경성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교훈>
1. 자신을 낮출줄을 알아야한다
이은찬은 자신이 대장이 되어 의병군을 이끌수도 있었지만,
이인영을 대장으로 추대하여 활약을 하기 때문이다.
2. 갖은 수난을 겪지만 꺽이지 않는 그의 애국심을 본받아야한다.
3. 사람을 쉽게 믿으면 않된다.
이은찬도 쉽게 믿어 결국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2013.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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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찬(1877∼1909) 의병장은 본관이 전주(全州)로 고종 14년 9월 21일에 지금의 봉산2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지략(智略)이 뛰어났으며, 불의(不義)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나이 29세 때인 광무 9년(1905)에 일본이 강압으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자, 관동 지방에서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융희 1년(1907)에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으로 합세하여 오고, 특무정교 민긍호(閔肯鎬)가 300여명을 이끌고 합류하여 군세가 2000여명으로 늘어났다.
공은 을미사변 때 의병장으로 명망이 높았던 문경(聞慶)의 이인영(李麟榮) 선생을 찾아가 총대장으로 모셔오고, 자신은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군무를 총괄하였다. 각처에 격문을 보내면서 강원도의 홍천·춘천과 경기도의 지평·양주 등지에서 일본군을 연속 격파하였다.
관동창의군(關東昌義軍) 6천여 명이 들어오면서 군세(軍勢)가 1만명으로 늘어났다. 이에 충청도와 경기도 및 황해·함경·평안도의 의병들까지 호응을 하게 되자, 부대를 경기도 양주(楊州)로 이동시켰다. 24진으로 새롭게 조직한 의병들은 통감부를 쳐부수고 보호조약을 폐기시키고자 서울을 공격하였다.
30여회의 전투로 서울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출한 공은 후속 부대가 미처 도착하기 전에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일당백의 의병으로도 대부대의 왜병들을 격파할 수는 없었다.
양주로 퇴각한 공은 2년 동안 경기도와 황해도 등지에서 전공을 올렸다. 1908년 7월 7일의 계평리 싸움, 1909년 1월 19일 연 평도의 일본군파견대 기습, 1909년 3월 27일의 양주 북방 석우리 싸움 등은 전과가 큰 전투였다.
공은 군사 양성을 계획하고 북간도로 가서 친구 김모에게 협조를 구하였다. 그는 군자금 마련을 약속하고 서울의 용산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친구는 일본 당국에 밀고하였고, 공은 약속대로 갔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1909년 3월 31일이었다. 언제 어느 나라나 배신자와 매국노는 있게 마련인가?
재판정에서의 공의 태도는 당당하였다. 전향(轉向)을 권하는 판사에게 호통을 쳤다.
"내가 너희 왜적과 40여회의 접전을 하여 470여명을 죽였으니 속히 나를 죽여라."
국가와 동포들에게는 이렇게 말하였다.
"국가의 위기를 구하려다가 뜻을 못 이루고 잡히니 동포를 대할 면목이 없다."
죽을 처지에서도 적에게 대한 당당함과 호통치는 기백, 큰공을 세우고도 민족과 국가 앞에는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겸손과 충성심, 이 모두가 지도자나 민족의 선각자들이 깊이 되새겨 보아야 할 태도이다.
공은 1909년 5월 8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6월 27일 순국하였다. 부하 박찬문(朴贊文)이 시신을 거두어 지금 천주교 묘지인 원주 봉산동 선산에 안장했다. 1962년 3월 1일에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받았다.
"오얏나무 한 가지로 배를 만들어 / 만백성 건지고자 바다에 띄웠으나 / 아무 공도 못 이루고 몸이 먼저 빠지니 / 뉘라서 동양의 평화를 계획할 것인가."
一枝李樹作爲船 欲濟蒼生泊海邊 未得寸功身先溺 誰算 東洋樂萬年
공이 처형 직전에 남긴 이 시(詩)는 그대로 공의 삶과 정신을 담고 있다.
공은 33년의 짧은 생애를 보냈다. 그러나 비록 짧은 생애이지만, 공의 정신과 업적은 뛰어나고 길이 빛난다. 그것이 국가 존망의 위기 상황 아래서의 것이었기에 더욱 찬란하다.
출처 : 없음
2008.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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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 [乙巳條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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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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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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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배신하지말자!!!!!!!!!!!!!!!!~입니다
2008.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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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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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원초??
2008.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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