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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위인 이은찬
vine5028 조회수 1,917 작성일2008.04.22

위인 이은찬이 남긴 교훈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성장 과정좀 알려주세요 !!!

오늘(화요일)까지 꼭꼭꼭 알려주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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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신

이은찬 [李殷瓚]

1878(고종 15)∼1909. 조선 말기의 의병장.

강원도 원주 출신.

1907년 고종의 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각지에서 의병이 다시 일어나자,

그 해 9월 이구재(李九載)와 더불어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문경의 이인영(李麟榮)을 찾아가 총대장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인영을 대장으로 추대한 뒤,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 의병모집에 진력하였는데,

원근에서 응모자가 날로 늘어갔다.

그 뒤 원주를 떠나 횡성·지평(砥平)·춘천 등지를 전전하며, 의병규합에 진력하는 한편,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 각지에 격문을 띄워 양주로 집결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양주로 집결한 의병들로 13도의병연합부대를 편성,

이인영을 원수부십삼도총대장(元帥府十三道總大將)으로 추대하고 중군이 되었다.

의병연합부대는 곧 진격을 개시하여 일거에 서울을 공략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때마침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여 문경으로 돌아가면서,

작전계획에 차질이 초래되어 서울 침공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같은 해 12월 소속부대를 거느리고 양근·포천 방면으로 이동하여

임진강유역에서 허위(許蔿)와 손을 잡고 재차 임진강의병연합부대를 편성한 뒤,

허위를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이 방면에서 크게 위세를 떨쳤다.

1908년 말 허위와 김수민(金秀敏)이 일본군에게 잡혀 순국하자,

의병부대는 수가 적은 곳은 수 십명, 많은 곳은 200명 내외 규모로 나뉘어져,

양주·포천·영평·연천·삭녕·금천·배천·연안을 잇는 선내 및 해상도서에서 유격전술을 펼쳐 전과를 거뒀다.

또한 민폐를 없애는 데 힘써 주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1909년 1월 초순에 일본군의 압력이 심해지자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남방의 연안 도서지방으로 이동하였다.

1월 19일 야음을 틈 타 2척의 배에 분승하여,

연평도 일본군파견대를 기습공격하고 증산도(甑山島)로 후퇴하였다.

같은 해 2월 27일 30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양주군 석우리

북방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큰 타격을 입혔으나 의병 또한 수 십명의 희생자를 냈다.

그래서 간도로 들어가 정병을 양성한 뒤 보다 적극적인 항전을 계속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서울에 있던 박노천(朴魯天)과 신좌균(申左均) 등이 이와 같은 계획을 탐지하고

군자금을 제공하겠다는 미끼로 서울로 유인하였다.

그들의 말을 믿고 3월 31일 서울에 잠입하여 용산역에 나타났다가,

잠복하고 있던 일본경찰에 잡혀 1909년 경성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교훈>

1. 자신을 낮출줄을 알아야한다

이은찬은 자신이 대장이 되어 의병군을 이끌수도 있었지만,

이인영을 대장으로 추대하여 활약을 하기 때문이다.

 

2. 갖은 수난을 겪지만 꺽이지 않는 그의 애국심을 본받아야한다.

 

3. 사람을 쉽게 믿으면 않된다.

이은찬도 쉽게 믿어 결국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2013.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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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이은찬
이은찬(1877∼1909) 의병장은 본관이 전주(全州)로 고종 14년 9월 21일에 지금의 봉산2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지략(智略)이 뛰어났으며, 불의(不義)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나이 29세 때인 광무 9년(1905)에 일본이 강압으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자, 관동 지방에서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융희 1년(1907)에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으로 합세하여 오고, 특무정교 민긍호(閔肯鎬)가 300여명을 이끌고 합류하여 군세가 2000여명으로 늘어났다.

공은 을미사변 때 의병장으로 명망이 높았던 문경(聞慶)의 이인영(李麟榮) 선생을 찾아가 총대장으로 모셔오고, 자신은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군무를 총괄하였다. 각처에 격문을 보내면서 강원도의 홍천·춘천과 경기도의 지평·양주 등지에서 일본군을 연속 격파하였다.

관동창의군(關東昌義軍) 6천여 명이 들어오면서 군세(軍勢)가 1만명으로 늘어났다. 이에 충청도와 경기도 및 황해·함경·평안도의 의병들까지 호응을 하게 되자, 부대를 경기도 양주(楊州)로 이동시켰다. 24진으로 새롭게 조직한 의병들은 통감부를 쳐부수고 보호조약을 폐기시키고자 서울을 공격하였다.

30여회의 전투로 서울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출한 공은 후속 부대가 미처 도착하기 전에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일당백의 의병으로도 대부대의 왜병들을 격파할 수는 없었다.

양주로 퇴각한 공은 2년 동안 경기도와 황해도 등지에서 전공을 올렸다. 1908년 7월 7일의 계평리 싸움, 1909년 1월 19일 연 평도의 일본군파견대 기습, 1909년 3월 27일의 양주 북방 석우리 싸움 등은 전과가 큰 전투였다.

공은 군사 양성을 계획하고 북간도로 가서 친구 김모에게 협조를 구하였다. 그는 군자금 마련을 약속하고 서울의 용산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친구는 일본 당국에 밀고하였고, 공은 약속대로 갔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1909년 3월 31일이었다. 언제 어느 나라나 배신자와 매국노는 있게 마련인가?

재판정에서의 공의 태도는 당당하였다. 전향(轉向)을 권하는 판사에게 호통을 쳤다.

"내가 너희 왜적과 40여회의 접전을 하여 470여명을 죽였으니 속히 나를 죽여라."

국가와 동포들에게는 이렇게 말하였다.

"국가의 위기를 구하려다가 뜻을 못 이루고 잡히니 동포를 대할 면목이 없다."

죽을 처지에서도 적에게 대한 당당함과 호통치는 기백, 큰공을 세우고도 민족과 국가 앞에는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겸손과 충성심, 이 모두가 지도자나 민족의 선각자들이 깊이 되새겨 보아야 할 태도이다.

공은 1909년 5월 8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6월 27일 순국하였다. 부하 박찬문(朴贊文)이 시신을 거두어 지금 천주교 묘지인 원주 봉산동 선산에 안장했다. 1962년 3월 1일에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받았다.

"오얏나무 한 가지로 배를 만들어 / 만백성 건지고자 바다에 띄웠으나 / 아무 공도 못 이루고 몸이 먼저 빠지니 / 뉘라서 동양의 평화를 계획할 것인가."

一枝李樹作爲船 欲濟蒼生泊海邊 未得寸功身先溺 誰算 東洋樂萬年

공이 처형 직전에 남긴 이 시(詩)는 그대로 공의 삶과 정신을 담고 있다.

공은 33년의 짧은 생애를 보냈다. 그러나 비록 짧은 생애이지만, 공의 정신과 업적은 뛰어나고 길이 빛난다. 그것이 국가 존망의 위기 상황 아래서의 것이었기에 더욱 찬란하다.

출처 : 없음

2008.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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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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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찬 [, 1878~1909.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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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한말의 의병장.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홍천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고종의 퇴위와 군대해산 이후 이인영의 중군으로 서울진격을 결행했다. 간도에서 군대를 양성할 계획을 세우다 군자금을 제공하겠다는 밀정의 모략으로 순국했다.
본관전주
별칭일명 언찬·헌찬
활동분야독립운동
출생지강원 원주
주요수상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본문

본관 전주(). 일명 언찬()·헌찬().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하였다. 유생()으로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홍천()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1907년 일제의 강압에 의한 고종의 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원수() 이인영()의 중군()이 되어 양주()에서 이구재() 등과 함께 해산군인 80명을 포함, 각지의 의병 500여 명을 규합, 24진을 편성하여 서울진격을 결행하였다. 12월 서울 동대문 밖에 이르러 일본군과 맞서 싸웠으나 완강한 저항을 받고 패퇴, 양주에 머물렀다.

1909년 간도()에 들어가 군대를 양성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중 군자금을 제공하겠다는 밀정() 박노천()·신좌균() 등의 모략에 빠져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그해 경성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하였다. 그는 우국시조(調) 한 수를 읊고 형장으로 향했다고 한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을사조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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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05년(광무 9)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한국 정부를 강압하여 체결한 조약.
일시1905년
목적일본이 한국의 외교권 박탈
해당국가조선, 일본
본문

제2차 한일협약·을사오조약()·을사늑약() 등으로 불린다. 제3차 러일협약() 체결을 계기로 러시아와 일본이 타협하여 일제의 한국 진출은 경제적인 면에 주력하게 되었다.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이 청국으로부터 받은 배상금은, 한국의 철도부설권을 점차 획득하고 광산·삼림·어업·항시()·온천 등에서 얻은 갖가지 이권과 함께 한국의 금수출·상무역(貿)까지 장악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이 무렵 만주를 점령하던 러시아에 대해 영일동맹()을 체결한 영국과 일본이 철수요구를 하는 등 만주를 둘러싼 국제적인 관계는 더욱 미묘하게 진행되었다.

1903년 4월 러시아군이 만주의 마적과 함께 한만국경(滿)을 넘어서 용암포()를 강제 점령하자 일본은 즉각 러시아의 철수를 요구하게 되었고, 이에 대해 러시아는 오히려 한반도를 북위 39도선을 중심으로 분할점령할 것을 제안하였으며, 일본측에서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국제적인 상황 아래서 1904년 1월 23일 한국정부는 엄정 중립국임을 해외에 선포하였다. 2월 6일 39도선 문제와 만주문제로 대립하던 러시아와 일본이 국교를 단절하여 8일 뤼순[]에서 첫 포성이 울렸고 이튿날 새벽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 서울로 입성하고 10일 대러시아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러시아와 일본은 전쟁상태에 들어갔다.

러·일전쟁의 개시와 함께 23일 일본의 강요로 공수동맹()을 전제로 한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었다. 의정서는 6개조로서 제2,3조에 한국 황실의 안전과 독립 및 영토보전을 보증한다고 되어 있으나 기타 조항은 모두가 주권국가의 주권을 무시한 것이었다.

러일전쟁이 일본측의 승리로 기울어지자 한국정부는 5월 18일자의 조칙()으로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되었던 일체의 조약과 협정을 폐기한다고 선포하는 동시에 러시아인이나 러시아 회사에 할애하였던 이권도 전부 취소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을 심화시켜 8월 외부대신 서리 윤치호()와 하야시 곤스케[] 공사 사이에 〈외국인용빙협정()〉을 체결하게 되었는데 이는 곧 일제의 한국재정에 대한 직접적인 간섭이었다.

한편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조정으로 러·일 양국의 강화회담이 포츠머스에서 열려 전문 15조, 추가 약관() 2개조의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포츠머스회담). 한국에서의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한 조약은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에 따라 독립국가의 주권을 무시한 것이었고 열강이 일본의 한국침략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이 되었다.

포츠머스회담의 내용상 전승()의 대가로 부족한 것을 한국에서 보충하자는 일본 자체 내의 여론은 곧 1905년 11월 9일 일본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를 파견하여 하야시공사와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앞세우고 ‘보호’를 강행하려 하였다.

외교권 박탈을 내용으로 하는 신협약안()은 이토와 하야시를 거쳐 외부대신 박제순()에게로 전달되었다. 이토는 하세가와와 함께 전후 3차례에 걸쳐 고종을 알현하였으며 11월 16일 정동()의 손탁호텔에서 참정대신 한규설() 이하 8대신을 위협하여 협약안의 가결을 강요하였다. 이어서 그들의 강요 아래 5시간이나 계속된 17일의 어전회의()에서도 결론이 내려지지 않자 이토와 하야시는 일본 헌병 수십 명의 옹위 아래 회의장에 들어가 대신 각각에게 가부의 결정을 강요하였다.

이때 고종은 다만 ‘정부에서 협상 조처하라’고 하여 책임을 회피했을 뿐이며 한규설만 무조건 불가하다고 하였다. 한규설에 동조한 사람은 탁지부대신() 민영기()와 법부대신 이하영()이었고, 학부대신 이완용()을 비롯하여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은 모두 책임을 고종황제에게 전가하면서 찬성을 표시하였는데, 이들을 을사오적()이라 한다.

이토는 강제 통과된 협약안을 궁내대신 이재극()을 통해 황제의 칙재()를 강요한 뒤 동일자로 한국 외교권의 접수, 일본 통감부()의 설치 등을 중요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사이에 체결 조인하고 18일에 이를 발표하였다.

이 조약의 체결 소식이 1905년 11월 20일자의 《황성신문()》에 신문사 사장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게재함에 따라 전국에 알려져 국민들의 조약 체결에 대한 거부와 일제에 대한 항쟁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의정부참찬() 이상설()의 상소를 비롯하여 종1품 이유승(), 법부주사() 안병찬(), 원임의정대신() 조병세(), 시종무관장() 민영환(), 전참찬() 최익현(), 특진관() 이근명(), 종묘제조(調) 윤태흥(), 승지() 이석종(), 유림() 이건석() 등이 강경하게 상소하였다.

한편 민영환은 상소로도 조약체결이 원점으로 되돌아가지 않자 유서로써 전국민에게 경고하면서 자결 순국하였고, 뒤이어 조병세, 전참판 홍만식(), 학부주사() 이상철(), 평양대() 일등병() 김봉학(), 주영공사(使) 이한응() 등도 죽음으로써 일본에 항거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전개되어 전참판 민종식()이 홍주()에서 거병한 것을 비롯하여 전라도에서 최익현이, 경상도에서는 신돌석()이, 강원도와 충청도에서는 유인석()이 각각 의병을 일으켰다. 그 외 이근택·이완용·이지용 등을 암살하기 위해 개별적인 거사를 하기도 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일본은 주한일본공사관을 철폐하여 신설한 통감부로 이양하고 각지에 있던 영사관이사청()으로 개편하는 <통감부 및 이사청관제>를 1905년 12월 20일에 공포함으로써 서울에는 통감부가 개설되고 개항장과 주요 도시 13개소에는 이사청이, 기타 도시 11개소에는 지청이 설치되었다.

통감부는 종래 공사관에서 맡았던 정무() 이외에도 조선보호의 대권, 관헌의 감독권, 그리고 병력동원권도 보유하였다. 또한 조선의 시정을 감독하거나, 어떠한 정책의 시행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됨으로써 통감부는 명실공히 조선보호의 최고감독기관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1906년 프랑스 파리법과대학의 교수인 F.레이는 을사조약이 협상대표에 대한 고종의 위임장과 조약체결에 대한 비준서 등의 국제조약에 필요한 형식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지 못한데다가 한글과 일본글로 된 조약문의 첫머리에도 조약의 명칭조차 없이 그대로 비어 있어 국제조약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지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그 법적 유효성을 주장하고 있어 그 후에도 계속 논란의 여지가 되고 있다.



혹시나 을사조약이라는 말을 모르실까봐 ㅋㅋㅋㅋㅋ 한번 너봤어여    님 잘활용하세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모르는것있으면  네이버 ㄱㄱ싱 백과사전 ㄱㄱ싱  것다 치면 나와옄ㅋㅋㅋㅋㅋㅋ

2008.04.22.

  • 출처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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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배신하지말자!!!!!!!!!!!!!!!!~입니다

2008.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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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원초??

 

2008.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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