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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청동기와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성립된 일본의 선사문화는???
tnwj**** 조회수 1,617 작성일2004.12.22
청동기와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성립된 일본의 선사문화 뭡니까요??


숙젬데 빨리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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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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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와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성립된 일본의 선사 문화는 야요이 문화 [彌生文化] 입니다. 이 문화에 관해 사전에 실려 있는 내용을 정리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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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요이 문화 [彌生文化(미생문화)]

 

일본 선사시대에 수도작(水稻作)을 기초로 한 최초의 문화(BC 200년~AD 300년).

 

식량채집을 기초로 한 전단계의 조몬 문화[繩文文化]와는 근본적으로 격차가 있고, 뒤이어지는 고분 시대(古墳時代) 이후의 문화와는 경제적 기초 위에서 질적인 차이를 갖지 않는다. 수도작의 개시와 더불어 이 문화를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은 금속(철 ·청동)기의 사용 ·제작의 개시이다. 철기가 주로 공구(工具) ·이기(利器) ·무기 등으로 발전한 것이라면, 청동기는 보기(寶器) ·제기(祭器) ·장신구 면에서 현저한 발달을 보였다. 그러나 야요이시대 전 ·중기에는 아직도 석기가 대량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야요이 문화의 분포와 야요이인 

 

야요이 문화가 끼친 북쪽 한계선에 관해서 혼슈[本州] 북단까지로 보는 설과, 혼슈 북단부(秋田縣 북반과 靑森縣)를 홋카이도[北海道]와 함께 식량채집을 기반으로 하는 속(續)조몬 문화의 영역으로 보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 한편, 사쓰난 제도[薩南諸島]를 야요이 문화의 남쪽 한계선으로 하는 데 대해서는 이론이 없다. 다만 야요이식 토기 그 자체는 오키나와 본토까지 진출해 있다. 야요이 시대 초기의 인골자료(人骨資料)는 없으나, 야요이 시대 전기 말의 인골에는 새로운 종족의 도래와 혼혈을 상정하게 하는 특징이 보인다. 또한 동일본(東日本)의 야요이 시대 인골에 대해서는 새로운 생활양식의 채용으로 형질적으로 영향을 입었다고 상정되는 요소가 있다. 즉, 서일본에서는 신종족과 조몬인[繩文人]과의 사이에 혼혈이 행해졌고, 동일본에서는 조몬인과 그 후예가 그대로 야요이인이 되었다.

 

야요이문화의 신래요소와 전래요소

 

야요이 시대에는 중국 ·한국에서 새로운 기술 ·지식 ·사상 등이 많이 건너왔다. 그 중 주목할 만한 것은 벼 중심의 농작물 재배(벼 외에 보리 ·조 ·콩 ·삼도 있었다), 금속기의 주조와 단조(鍛造), 유리구슬의 가공, 방추차(紡錘車)로 실을 뽑고, 기계로 옷감을 짜는 것 등이다. 또한 돌식칼 ·간돌도끼[磨製石斧]와 새로운 신앙 ·의례 ·풍속도 건너왔다.

 

그 중에서도 도작의례(稻作儀禮)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구체적인 유물로, 열을 가해서 생긴 잔금으로 길흉을 판정하는 복골(卜骨)은 중국계이며, 뼈 ·뿔에 많은 줄을 새겨넣은 각골(刻骨) ·각각(刻角), 악령을 쫓는 목조(木鳥)는 한국계이다. 또한 기타규슈[北九州]의 무덤 중 무덤 주위에 몇 개의 돌을 늘어놓고 큰돌을 얹은 고인돌은 한국계이다. 발치(拔齒) 풍속, 돌화살을 비롯한 뗀석기, 토기기술, 무늬 등은 조몬 문화로부터 이어받은 것들이며, 또한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도 있는데 처음부터 있던 돌창[石槍] ·투탄(投彈)이 그 실례이다.

 

야요이 문화는 대륙문화의 영향과 조몬문화의 전통에 의해 기타규슈에서 성립되었고, 먼저 이세만[伊勢灣] 연안지방에 이르는 서일본에 퍼졌으며(前期), 조금 늦게 동일본에 전해졌다. 기타규슈 야요이 문화에는 대륙적 색채가, 동일본 야요이 문화에는 조몬적 색채가 짙게 각각 나타나며 그런 속에서도 긴키[近畿]지방의 야요이 문화에서는 독자적인 발달이 인정된다.

 

야요이 문화의 공구와 무기 
 
야요이 문화의 공구에는 전기 이래 철도끼가 있었고, 중기에는 나무 표면을 깎는 철제 대패도 등장하였다. 전 ·중기에는 돌도끼에 의존하는 바가 많았으나 후기에는 철기로 바뀌었다. 무기로는 한국에서 건너간 청동기로 된 것이 있었는데 실용적인 목적보다 소유하는 데에 더 큰 뜻이 있었으며, 소유자의 권위를 높여주었고 무덤에 함께 묻었다. 보편적인 무기는 활이었으며, 특히 긴키지방에서는 중기에 돌화살이 깊이 꿰뚫어 나가도록 만들어졌고 또한 대형화하였으며, 동시에 돌창 ·간돌검도 발달하였다.
 
 
야요이 문화의 생업과 주거 

 

야요이 문화의 주요 농작물은 벼이다. 끝부분까지 나무로 된 괭이와 가래를 사용하여 논을 갈았다. 그러나 중기의 끝 무렵에는 끝부분에 쇠를 단 농기구가 제법 보급되었다. 의복은 그 실체가 파악되지 않고 있으나, 머리 장식에는 빗과 머리핀을 사용하였는데 목걸이로 유리 ·벽옥 등을 사용하였고, 조개껍데기로 만든 반지도 등장한다.

 

팔찌에는 칠을 한 나무제품도 있는데, 교역을 통해 들어온 남양산(南陽産) 소라팔찌는 소라껍데기를 세로로 잘라서 남성용을, 실조개를 가로로 잘라 여성용을 만들었다. 특히 남성용 팔찌는 특별한 지위의 사람과 주술사(呪術師)의 오른팔을 장식한 것으로, 이를 원형으로 한 동제(銅製)의 팔찌도 만들어졌다.

 

주거(住居)는 조몬 문화에 있어서와 같이 구덩식[竪穴式]을 주류로 한다. 저지대에서는 지면을 바닥으로 하였고 주위에 담을 둘러쳤으므로 상부구조는 구덩식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가장 오래 된 부락으로서 이미 넓은 범위(110×80 m)의 땅을 차지하고, 둘레에 도랑을 판 것이 주목할 만하며, 인구 증가에 따라서 부락의 수와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지는 것은 중기에 들어서서이다.

 

그리고 그 부락에서 중심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 대형주거(지름 10 m 이상)도 출현하였다. 죽은 사람은 거주지와 별도로 집단묘지에 주로 굽혀묻기[屈葬]하였다. 널[棺]은 널빤지 ·석재를 짜맞춘 나무널[木棺]과 돌널[石棺] 등이 쓰였으며, 독으로 만든 널[甕棺]도 있다. 일상용 토기를 어린아이를 매장하는 데 전용한 예는 여러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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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vin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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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좀 더하세요.. 일본의 철기문화는 AD 6세기에 시작됩니다. 왜구들은 이때까지 철을 생산하고 가공할 이술이 없었어요.. 모두 가야에서 철기문화와 철생산을 가르쳐준거죠... 따라서 일본의 선사시대와 철기문화는 거짓입니다..

2020.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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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