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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일본 시대연호 뜻좀 알려주세요
비공개 조회수 5,075 작성일2010.10.08

승문(조몬)

미생(야요이)

고분(고훈)

비조(아스카)

나양(나라)

평안(헤이안)

경창(가마쿠라)

실정(무로마치)

안토(아즈치)

도신(오모야마)

강호(에도)

명치(메이지)

대정(다이쇼)

소와(쇼와)

평성(헤이세이)

 

연호들의 뜻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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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hn****
수호신
세계사 24위, 한국사 69위, 사회학 14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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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 덴노에서 30대 덴노까지의 연호
 
※ 덴노의 시호와 연호가 같은 경우가 있는데 그 덴노가 살아서 선포한 연호가 죽은 후 시호로 다시 올려진 경우와 살아서는 연호를 선포하지 않았지만 죽은 후에 받은 시호로 연호를 대신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초대부터 현재 125대까지 연호의 음과 덴노의 이름이 같은 경우는 은 후의 시호로 연호를 만든 것이 대부분입니다만 22대 메이지덴노부터 현재까지는 덴노가 살아 생전에 반포했던 연호가 시호로 올려졌음 (헤이세이덴노 제외)을 미리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진무(神武) 기원전 660년(신유) 2월 11일 - 기원전 581년(경진) 1월 7일 1대 덴노 진무덴노 즉위일부터 진무덴노 사후
(기원전 585년 3월 11일) 3년 11개월 후까지 사용됨.
 

스이제이(綏靖)기원전 581년(경진) 1월 8일 - 기원전 548년(계축) 7월 2일2대 덴노 스이제이덴노 즉위일부터 스이제이덴노 사후
(기원전 549년 5월 19일) 1년 2개월 후까지 사용됨.

 
안네이(安寧)기원전 548년(계축) 7월 3일 - 기원전 510년(신묘) 2월 3일3대 덴노 안네이덴노 즉위일부터 안네이덴노 사후
(기원전 511년 12월 6일) 약 2개월 정도 후까지 사용됨.


이토쿠(懿德)기원전 510년(신묘) 2월 4일 -  기원전 475년(병인) 1월 8일4대 덴노 이토쿠덴노 즉위일부터 이토쿠덴노 사후
(기원전 477년 9월 8일) 1년 4개월 정도 후까지 사용됨.

 
코쇼(孝昭)기원전 475년(병인) 1월 9일 - 기원전 392년(기축) 1월 6일5대 덴노 코쇼덴노 즉위일부터 코쇼덴노 사후
(기원전 393년 8월 5일) 약 5개월여정도 후까지 사용됨.

 
코안(孝安)기원전 392년(기축) 1월 7일 - 기원전 290년(신미) 1월 11일6대 덴노인 코안덴노의 즉위일부터 코안덴노 사후
(기원전 291년 1월 9일) 약 1년여정도 후까지 사용됨.

 
코레이(孝靈)기원전 290년(신미) 1월 12일 - 기원전 214년(정해) 1월 13일7대 덴노인 코레이덴노의 즉위일부터 코레이덴노 사후
(기원전 215년 2월 8일) 약 11개월여정도 후까지 사용됨.

 
코겐(孝元)기원전 214년(정해) 1월 14일 - 기원전 158년(계미) 11월 11일 8대 덴노인 코겐덴노의 즉위일부터 코겐덴노 사후
(기원전 158년 9월 2일) 약 2개월여정도 후까지 사용됨.

 
카이카(開化)기원전 158년(계미) 11월 12일 - 기원전 97년(갑신) 1월 12일 9대 덴노인 카이카덴노의 즉위일부터 카이카덴노 사후
(기원전 98년 4월 9일) 약 8개월여정도 후까지 사용됨.

 
스진(崇神)기원전 97년(갑신) 1월 13일 - 기원전 29년(임진) 1월 1일 10대 덴노인 스진덴노의 즉위일부터 스진덴노 사후
(기원전 30년 12월 5일) 약 1개월여정도 후까지 사용됨.

 
스이닌(垂仁)기원전 29년(임진) 1월 2일 - 서기 71년(신미) 7월 10일11대 덴노인 스이닌덴노의 즉위일부터 스이닌덴노 사후
(서기 70년 7월 14일) 약 1년정도 후까지 사용됨.

 
케이코(景行)서기 71년(신미) 7월 11일 - 서기 131년(신미) 1월 4일12대 덴노인 케이코덴노의 즉위일부터 케이코덴노 사후
(서기 130년 11월 7일) 7개월여정도 후까지 사용됨.

 
세이무(成務)서기 131년(신미) 1월 5일 - 서기 192년(임신) 1월 10일13대 덴노인 세이무덴노의 즉위일부터 세이무덴노 사후
(서기 190년 6월 11일) 2개월여정도 후까지 사용됨.

 
츄아이(仲哀)서기 192년(임신) 1월 11일 - 서기 201년(신사) 1월 1일* 14대 덴노로 즉위한 츄아이덴노는 즉위한 지 8년 만인 200년(경진) 2월 8일에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 이듬해 1월에 츄아이덴노의 황후인 신코코고(神功皇后)가 직접 섭정을 맡게 된다. 어쨌든 츄아이라는 연호는 츄아이덴노의 즉위일부터 츄아이덴노 사후(서기 200년 2월 8일) 10개월정도 후까지 사용되었다.

 
신코코고셋쇼(신공황후섭정/神功皇后攝政)서기 201년(신사) 1월 1일 - 서기 269년(기축) 12월 30일* 이 부분은 현재 <니혼쇼키日本書記>의 연대가 120년 정도 올라갔다는 의문을 낳고 있으며,  실제로는 서기 321년에서 서기 389년 12월로, 백제 아신왕의 즉위원년이라는 학설이 제기되어 있다.  어쨌든 신코코고의 섭정은 69년만에 신코코고 자신이 죽음으로서 아들 오진덴노에게 황위가 넘어가면서  종결되었다는 것만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오진(應神)서기 270년(경인) 1월 1일 - 서기 313년(계유) 1월 2일* 오진덴노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던 14대 츄아이덴노와 신코코고의 제 4황자이며,   어머니가 섭정 69년만에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오진이라는 연호는 15대 오진덴노의 즉위일부터 오진덴노 사후(서기 310년 2월 15일) 2년 11개월여정도 후까지 사용되었다.
 

닌토쿠(仁德)서기 313년(계유) 1월 3일 - 서기 400년(경자) 1월 30일16대 닌토쿠덴노의 즉위일부터 닌토쿠덴노 사후(서기 399년 1월 16일)
약 1년정도 후까지 사용됨.

 
리츄(履中)서기 400년(경자) 2월 1일 - 서기 406년(병오) 1월 1일17대 덴노 리츄덴노의 즉위일부터 리츄덴노 사후
(서기 305년 3월 15일) 약 8개월여정도 후까지 사용됨.
 

한세이(反正)서기 406년(병오) 1월 2일 - 서기 412년(임자) 11월 31일* 18대 덴노 한세이덴노의 즉위일부터 한세이덴노 사후(서기 410년 1월 13일) 약 1년 11개월여정도 후까지 사용되었다.18대 덴노 한세이덴노는 시호처럼 한세이(反正/반정)를 일으키지는 않았으며, 그의 사후 즉위한 19대 인쿄덴노의 즉위일은 412년 12월이라는 것만 기록되었을 뿐 날짜는 정확히 전하지 않는다.

 
인쿄(允恭)서기 412년(임자) 12월 ?일 - 서기 453년(계사) 12월 13일19대 덴노인 인쿄덴노의 즉위일부터 인쿄덴노 사후
(서기 453년 1월 14일) 11개월 1일후까지 사용되었다.
 

안코(安康)서기 453년(계사) 12월 14일 - 서기 456년(병신) 11월 12일* 20대 덴노인 안코덴노의 즉위일부터 안코덴노 사후(서기 456년 8월 9일) 약 3개월정도 후까지 사용되었다.  기록에 따라서는 이듬해인 454년(갑오) 1월 1일로 쓴 것도 있다.  황족이었던 오히시모오(大日下王)를 죽이고 그의 부인을 뺏어 황후로 삼았으나,  침소에서 자던 중 오히시모오의 아들인 마유와(眉輪王)에게 칼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유랴쿠(雄略)서기 456년(병신) 11월 13일 - 서기 480년(경신) 1월 14일* 21대 덴노인 유랴쿠덴노의 즉위일부터 유랴쿠덴노 사후(서기 479년 8월 7일) 5개월정도 후까지 사용되었다.  기록에 따라서 동복형 안코덴노와 똑같이 즉위년이 1년 후인 457년(정유)으로 써져 있기도 하다.  유랴쿠덴노 또한 황위다툼과 권력쟁탈의 회오리에 딸려들어 흉폭해진 후 황족이자 증조부뻘이었던 이와사카노이치베오이와오지(磐坂市邊押磐皇子)를 화살로 쏘아 죽이는 등 폭행을 일삼다 세상을 떠났다.
 

세이네이(淸寧)서기 480년(경신) 1월 15일 - 서기 484년(갑자) 12월 31일* 22대 덴노인 세이네이덴노의 즉위일부터 세이네이덴노 사후(서기 484년 1월 16일) 11개월여정도 후까지 사용되었다.  세이네이덴노는 태어날 때부터 백발이었다고 전하며, 아버지 유랴쿠덴노의 만행을 사죄하려고 평생 애를 썼다.  아버지가 쏘아 죽였던 이와사카노이치베오이와오지의 두 아들인 오케(弘計)와 오케미코토(億計尊)를 궁으로 데려와  복위시키고 왕으로 작위를 올렸고, 이들을 후계자로 삼았다.
 

켄조(顯宗)서기 485년(을축) 1월 1일 - 서기 488년(무진) 1월 4일* 23대 덴노인 켄조덴노의 즉위일부터 켄조덴노 사후(서기 487년 4월 25일) 약 7개월여정도 후까지 사용되었다.  켄조덴노는 유랴쿠덴노가 쏘아 죽였던 이와사카노이치베오이와오지의 두 아들 중 동생이었던 오케(弘計)이다.  아버지가 젊은 나이로 촌수가 낮은 유랴쿠덴노에게 사살당한 뒤에, 형과 함께 하리마치지미타무로쿠라(播磨縮見屯倉)에  숨어 살다가 세이네이덴노가 보낸 사신에게 발견되어 궁궐로 돌아가 복위된 뒤에 형과 함께 왕에 책봉되어 세이네이덴노의 후계자가 되었다. 이후 세이네이덴노가 세상을 떠난 후에 형과 함께 황위계승을 놓고 토론하다가,  켄조덴노 자신이 세이네이덴노가 보낸 사신에게 찾고 있는 황자들이 자신들임을 알린 공이 있음을 형에게 설득하여 즉위하였다.

 
닌켄(仁賢)서기 488년(무진) 1월 5일 - 서기 498년(갑인) 11월 31일* 24대 덴노인 닌켄덴노는 동생에게 황위를 양보했던 켄조덴노의 형 오케미코토(億計尊)이다.  동생에게 황위를 양보한 이후, 동생이 덧없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뒤를 이어 슬퍼하며 덴노에 올랐다고 전한다.  닌켄이라는 연호는 닌켄덴노의 즉위일부터 닌켄덴노 사후(서기 498년 8월 8일) 약 3개월정도 후까지 쓰였다.
 

부레츠(武烈)서기 498년(갑인) 12월 ?일 - 서기 507년(정해) 2월 3일* 25대 부레츠덴노의 즉위일부터 부레츠덴노 사후(서기 506년 12월 8일) 약 2개월정도 후까지 쓰였다.  부레츠덴노는 그 이전의 덴노와 그 이후의 덴노에게서도 찾아보지 못할 정도로 참혹한 폭군이었다고 전한다.  궁의 수많은 궁녀와 신하들을 죽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일반 백성들을 학살하기도 하였다.  결국 18세의 나이에 주색을 밝힌 결과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것은 후사가 없던 부레츠덴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케이타이덴노가 자신의 즉위배경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조작된 기록이라고도 한다.
 

케이타이(繼体)서기 507년(정해) 2월 4일 - 서기 533년(계축) 12월 30일* 다른 기록들에 의하면 니혼쇼키에 기록된 부레츠덴노의 폭행들에 대한 것은 케이타이덴노가 자신이 후사가 없었던 부레츠덴노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것을 정당화하려는 수단이었다고도 한다. 시호 자체가 황통(体)을 이었다는(継) 의미인 것은 이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최초로 그의 사후, 공백기간을 거치지 않고 즉위한 덴노가 나타났다. 어찌되었든 케이타이라는 연호는 26대 케이타이덴노의 즉위일부터 그의 사망일까지 쓰여졌다.
 

안칸(安閑)서기 534년(갑인) 1월 1일 - 서기 535년(을묘) 12월 17일* 27대 안칸덴노는 케이타이덴노의 제 1황자로 노령으로 즉위한 탓에 아버지 케이타이덴노가 사망하자마자  황위를 떠안게 되었고, 정식 즉위일은 아버지가 사망한 531년 2월 7일이었으나 즉위한 지 거의 3년여정도가 지나서야 자신의 연호를 선포하는데 이 연호가 바로 안칸(安閑)이다.  그러나 너무 노령에 즉위한 탓인지 안칸덴노는 정식 즉위를 선포한지 2년이 채 못찬 535년 12월 17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안칸이라는 연호는 안칸덴노의 정식 즉위일부터 그의 사망일까지 쓰였다.
 

센카(宣化)서기 536(병신) 1월 1일 - 서기 539년(기미) 12월 30일* 28대 센카덴노는 안칸덴노의 동생으로 케이타이덴노의 제 2황자였다.  형인 안칸덴노가 후사없이 사망하자 군신들의 추대로 형이 사망한 그 달에 즉위하였다.  그러나 형과는 달리 후사들이 있었던 센카덴노 역시 그의 직계를 황통에 올리지 못한 채로 사망했다.  센카덴노의 즉위일은 535년(을묘) 12월로만 알려져 있다. 일설에는 센카덴노가 안칸덴노와  함께 덴노에 올라 조정을 다스렸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 센카라는 연호는 그가 즉위한 이듬해  1월 1일부터 재위 4년째이던 539년 2월 10일에 그가 사망한 이후 킨메이덴노가 즉위한 다음해인 540년에 연호를 교체하기까지 약 4년간 쓰였다.
 

킨메이(欽明)서기 540년(병진) 1월 1일 - 서기 572년(임진) 4월 2일* 29대 킨메이덴노는 안칸덴노와 센카덴노의 동생으로 케이타이덴노의 제 3황자였다.  그도 역시 형들과 함께 덴노에 올라 조정을 다스렸던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을 받고 있기도 하다. 형이 사망한 539년 12월 5일에 즉위하였으나, 이듬해 1월에 연호를 정식으로 바꾸기 전까지  센카라는 연호는 그대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킨메이라는 연호는 540년 1월 1일부터  그가 사망한 571년 4월 이후 약 1년간 더 쓰였다.
 

비타츠(敏達)서기 572년(임진) 4월 3일 - 서기 586년(병오) 1월 3일* 30대 덴노인 비타츠덴노는 킨메이덴노의 제 2황자로, 먼저 태자로 책봉되었던 형이 사망하면서   그 태자의 자리를 넘겨받아 황위를 이어받았다. 아버지 킨메이덴노가 사망한 이후 1년여가 지난  이듬해 4월 3일에 즉위하여 바로 연호를 비타츠로 바꾸었다. 이후 비타츠덴노가 585년 8월 15일에  사망한 후에도 비타츠라는 연호는 동생 요메이덴노가 이듬해 1월에 연호를 바꾸기 전까지 약 4개월여정도 후까지 쓰였다.

31대 덴노에서 40대 덴노까지의 연호

※ 덴노의 시호와 연호가 같은 경우가 있는데 그 덴노가 살아서 선포한 연호가 죽은 후 시호로 다시 올려진 경우와,  살아서는 연호를 선포하지 않았지만 죽은 후에 받은 시호로 연호를 대신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초대부터 현재 125대까지 연호의 음과 덴노의 이름이 같은 경우는 죽은 후의 시호로 연호를 만든 것이 대부분입니다만, 122대 메이지덴노부터 현재까지는 덴노가 살아 생전에 반포했던 연호가 시호로 올려졌음(헤이세이덴노 제외)을 미리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요메이(用明)서기 586년(병오) 1월 4일 - 서기 587년(정미) 4월 9일* 31대 덴노인 요메이덴노는 비타츠덴노의 동생으로 킨메이덴노의 제 4황자이다.  그의 장자가 바로 후의 쇼토쿠태자인 우마야토였으나, 그의 직계를 잇지 못하고 사망했다.  정식 즉위일은 585년 1월 4일이었으나 이 새 연호는 이듬해에서야 쓰였으며,  요메이라는 연호는 그가 사망한 587년 4월 9일까지 쓰였다.
 
스슌(崇峻)서기 588년(무신) 1월 1일 - 서기 592년(임자) 11월 3일* 32대 덴노인 스슌덴노(587년 8월 2일에 정식 즉위)의 연호로 그가 살해당한 592년 11월 3일까지 쓰였다.  당시 조정은 불교를 옹호하는 스슌덴노의 세력과 그의 외조부로 신토를 옹호하는 소가노 우마코의 세력이  서로 싸우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스슌덴노가 소가노 우마코에 의해 제거되면서 소가노 우마코에 의해 비타츠덴노의 황후이자 자신의 조카였던 메카타베를 황위에 앉히니 이가 스이코덴노이다.
 
스이코(推古)서기 593년(계축) 1월 1일 - 서기 628년(무자) 3월 7일* 33대 덴노인 스이코덴노(592년 12월 8일에 정식 즉위)의 연호로, 그가 사망한 628년 3월 7일까지 쓰였다. 그는 비타츠덴노의 황후였으므로 정치에 대해 문외한이었던지라 자신의 조카이자 숙부 소가노 우마코의 외손자이기도 한 쇼토쿠태자에게 정치를 맡긴다.
이로서 쇼토쿠태자는 일본 역사 최초의 셋쇼(摂政)가 되었으며, 불교와 신토로 대립했던 소가가문과 덴노가문이 서로 손을 잡도록 하는 유불습합정책을 성공시키면서 이후 수나라에 켄즈이시(遣隋使)를 보내었다.훌륭한 선진문물을 들여와 그것들 중 일본풍토에 맞는 것들을 골라내어 일본식으로 만드는 이이토코토리(良いとこ取り)정책을 쓰는 등 정치와 문화발전 양면에 힘을 썼다.이로써 아스카쿄를 수도로 한 스이코시대는 아스카시대(飛鳥時代)로 불리게 되었다.
 
쇼메이(舒明)서기 629년(기축) 1월 4일 - 서기 641년(신축) 10월 9일* 34대 덴노인 쇼메이덴노는 비타츠덴노의 손자로, 쇼토쿠태자의 아들이자 요메이덴노의 손자였던   야마노세오오에노키미와 황위다툼을 벌여 이긴 후 629년 1월 4일에 즉위함과 동시에 연호를 반포한다.이후 쇼메이덴노가 사망하는 641년 10월 9일까지 쓰였다.
 
코쿄쿠(皇極)서기 642년(임인) 1월 15일 - 서기 645년(을사) 6월 14일* 일본 역사 두번째의 여자 덴노인 35대 코쿄쿠덴노의 연호로, 그의 즉위일부터 퇴위일까지 쓰였다.   코쿄쿠덴노는 오래 전부터 조정의 외가로 세력을 잡고 전횡하던 소가씨를 물리치기 위해 아들 나카노오에오지(中大兄皇子)와 나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鎌足)와 손을 잡고 거사를 준비했다. 그를 위하여 동생인 코토쿠덴노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물러나 있으면서
거사를 준비하다가, 코토쿠덴노가 세상을 떠나버리자 다시 즉위하여 사이메이덴노가 된다.
 
타이카(大化)서기 645년(을사) 6월 14일 - 서기 650년(경술) 2월 15일* 36대 덴노로 일본 역사 세번째 여자 덴노인 코쿄쿠덴노의 동생인 코토쿠덴노의 첫번째 연호이자 일본 역사사상 최초로 조정에서 만들어져 쓰여진 공식 연호이다. 이때에 타이카카이신이 일어났으므로 연호를 이렇게 정한 것이다. 그 이전의 연호들은 전부 덴노가 사망한 이후 그덴노의 재위기간을 덴노의 시호로 매겨 세던 것에 지나지 않았는데,이 때에 이르러서 최초의 공식연호로 타이카가 채택된 것은 나카노오에오지와 언니의 의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쿠치(白雉)서기 650년(경술) 2월 15일 - 서기 655년(을묘) 1월 ?일* 36대 덴노인 코토쿠덴노 재위기간의 두번째 연호로, 코쿄쿠덴노의 마지막 연호이기도 하다.  코쿄쿠덴노는 타이카카이신이 성공한 이후 언니와 나카노오에오지 일행과 마찰을 일으키며 대립했다. 그러다가 언니 코쿄쿠덴노일행이 아스카쿄로 돌아가버리자 새 도읍지였던 나니와쿄(나라)에 혼자  남은 채로 654년 10월 10일에 고독하게 세상을 떠났다. 향년 59세였다.
 
사이메이(斉明)서기 655년(을묘) 1월 3일 - 서기 661년(신유) 7월 24일* 37대 덴노이자 35대 덴노인 사이메이덴노의 연호로, 이 또한 죽은 후에 그에게 올린 시호에서 비롯되었다.654년 10월에 나니와에서 동생이 죽자 다시 덴노로 추대되어 아스카쿄를 다스렸다. 이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하자 부모의 나라로 받들던 백제를 돕기 위해 군대를 모아 치쿠시(筑紫)지방으로 향하던 중에 그곳에서 급사했다.
 
텐지(天智)서기 662년(임술) 1월 ?일 - 서기 671년(신미) 12월 3일* 38대 덴노이자 사이메이덴노의 아들인 텐지덴노의 재위기간연호로, 텐지덴노가 바로 나카노오에오지이다. 그가 즉위한 날은 661년 7월 24일로 어머니가 치쿠시에서 급사했다는 소식을 듣고부터였다. 이듬해에서야 새 덴노로 즉위하니 이 기간을 사후 그의 시호를 따서 텐지라고 부른다. 텐지라는 연호는 그가 671년 12월 3일에 사망하면서 끝났다.
 
텐무(天武)서기 672년(임신) 12월 - 서기 686년(병술) 7월 20일* 40대 덴노인 텐무덴노는 텐지덴노의 동생인 오아마(大海人)로, 조선왕조의 세조에 비견되는 덴노이다. 텐지덴노가 죽자 즉위한 자신의 조카인 39대 코분덴노(弘文天皇/ 재위 : 671년 12월 5일 - 672년 7월 23일)를 진신의 난(壬申の乱)을 일으켜 자살하게 한 뒤에 즉위하였다. 실제 재위기간은 673년 2월 27일부터인 것으로 전하나 기록에서는 672년부터 연호를 정했다. 숙부에게 쫓겨나 자살한 코분덴노는 이후 재위가 인정되지 않다가   메이지시대에 가서야 시호를 받았다. 텐무라는 연호는 진신의 난이 끝나던 12월경에 시작되어   텐무덴노가 사망하기 직전인 686년 7월 20일에 끝났다.
 
슈쵸(朱鳥)서기 686년(병술) 7월 20일 - 서기 686년(병술) 9월 9일* 40대 텐무덴노가 만년에 제정한 연호, 그러나 개원 2개월만에 텐무덴노가 사망하면서 끝났다.다른 이름으로 아카미토리라고도 한다.

 

 

41대 덴노에서 50대 덴노까지의 연호

※ 덴노의 시호와 연호가 같은 경우가 있는데,
그 덴노가 살아서 선포한 연호가 죽은 후 시호로 다시 올려진 경우와,
살아서는 연호를 선포하지 않았지만 죽은 후에 받은 시호로 연호를

대신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초대부터 현재 125대까지 연호의 음과 덴노의 이름이 같은 경우는
죽은 후의 시호로 연호를 만든 것이 대부분입니다만,

122대 메이지덴노부터 현재까지는 덴노가 살아 생전에 반포했던 연호가

시호로 올려졌음(헤이세이덴노 제외)을 미리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지토(持統)
서기 687년(정해) 1월 1일 - 697년(정유) 8월 1일
* 일본 역사 네번째 여자덴노인 41대 지토덴노의 재위기간연호로,

지토덴노는 텐지덴노의 제 2황녀이자 텐무덴노의 황후이며,

코분덴노와 43대 겐메이덴노의 이복누나이다.

텐무덴노가 죽자 아들인 쿠사카베노오지 (草壁皇子/662-689)를 바로 즉위시키지 않고,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오츠오지(大津皇子)를 역모죄로 몰아 죽임으로서
쿠사카베노오지의 즉위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것을 없앴다.

그러나 쿠사카베노오지가 갑자기 죽음으로서 그의 아들이자 지토덴노의 손자인

카루오지(軽皇子 : 후의 42대 몬무덴노)가 장성할 때까지 그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가 덴노로 즉위하였다. 그녀는 타이카카이신 이후의 율령국가제도를

완성하였으며, 그동안 오키미(大王) 또는 미카도(御門)로 불리던 황제의 칭호를

덴노(天皇)로 고쳤다. 이후 카루오지가 장성하자 그에게 덴노자리를 양위한 뒤

(697년 8월 1일)에 오카미노덴노(太上天皇)로 있으면서 몬무덴노의 초기 치세를

도와주었다. 이후 타이호大宝 2년(702) 12월 22일에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몬무(文武)
서기 697년(정유) 8월 1일 - 서기 701년(신축) 3월 21일
* 42대 덴노인 몬무덴노의 재위기간연호이자, 몬무덴노의 첫번째 연호이다.



타이호(大宝 / 한국식 표기로 大寶)
서기 701년(신축) 3월 21일 - 서기 704년(갑진) 5월 10일
* 42대 덴노인 몬무덴노의 두번째 연호이다.
몬무덴노는 지토덴노의 손자이자, 쿠사카베오지의 아들로 지토덴노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으나, 이후 25세의 나이로 707년에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케이운(慶雲)
서기 704년(갑진) 5월 10일 - 서기 708년(무신) 1월 11일
* 42대 덴노인 몬무덴노의 마지막 연호이자, 43대 덴노인 겐메이덴노의 첫번째 연호.
707년 6월 15일에 25세의 나이로 몬무덴노가 요절하자, 텐지덴노의 제 4황녀이자

몬무덴노의 어머니인 아베(阿閇)가 43대 겐메이덴노(元明天皇)로 즉위하였다.

시어머니이자 언니인 지토덴노처럼 그녀도 몬무덴노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쿠비오지(首皇子 : 뒤의 45대 쇼무덴노)의 보호자로서 즉위하였다.

이때 일본 고대의 역사서인 <코지키古事記>가 편찬되었으며 수도가

나라(奈良)의 헤이조쿄(平城京)로 옮겨졌다.



와도(和銅)
서기 708년(무신) 1월 11일 - 서기 715년(을묘) 9월 2일
* 43대 겐메이덴노의 두번째 연호. 715년 9월 2일에 겐메이덴노가 아들

히다카나이신노(氷高內親王)에게 덴노자리를 물려줌으로서 끝났다.



레이키(霊亀 / 한국식표기로 靈龜)
서기 715년(을묘) 9월 2일 - 서기 717년(정사) 1월 17일
* 44대 겐쇼덴노의 첫번째 연호. 히다카나이신노로 있다가 어머니

겐메이덴노에게 황위를 물려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요로(養老)
서기 717년(정사) 1월 17일 - 서기 724년(갑자) 2월 4일
* 44대 겐쇼덴노의 두번째이자 마지막 연호. 724년 2월 4일에 겐쇼덴노가 조카

쿠비오지에게 황위를 물려줌으로서 끝났다.
요로연간 중인 요로 5년(721) 12월 7일에 61세로 43대 겐메이덴노가 세상을 떠났다.



진키(神亀 / 한국식 표기로 神龜)
서기 724년(갑자) 2월 4일 - 서기 729년(기사) 8월 5일
* 45대 쇼무덴노의 첫번째 연호. 쇼무덴노는 불심이 매우 깊었던 덴노로 유명하다.

토다이지(東大寺)의 대불을 조성할 것을 명하였으며, 최초로 황녀 아베노나이신노

(阿部内親王)를 황태자로 삼아 46대 코켄덴노(孝謙天皇/또는 쇼토쿠덴노称徳天皇)로
즉위시킨 덴노이기도 하다. 양위받은 때의 나이는 24세로, 이후 텐표쇼호 8년(756)

5월 2일에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텐표(天平)
서기 729년(기사) 8월 5일 - 749년(기축) 4월 14일
* 45대 쇼무덴노의 두번째 연호. 이 연간인 텐표 20년(748) 4월 21일에 44대

겐쇼덴노가 세상을 떠났다.



텐표칸포(天平感宝 / 한국식 표기로 天平感寶)
서기 749년(기축) 4월 14일 - 서기 749년(기축) 7월 2일
* 45대 쇼무덴노의 세번째 연호. 같은 해 7월 2일에 쇼무덴노가 딸이자 황태자인

아베노나이신노에게 덴노자리를 양위하면서 끝났다.



텐표쇼호(天平勝宝 / 한국식 표기로 天平勝寶)
서기 749년(기축) 7월 2일 - 서기 757년(정유) 8월 18일
* 46대 코켄덴노의 첫번째 연호. 이 연간인 텐표쇼호 8년(756) 5월 2일에

56세로 45대 쇼무덴노가 세상을 떠났다.
코켄덴노에게는 배우자가 없었으며, 자녀도 따라서 없었다.

맨처음에는 아버지 쇼무덴노의 유언에 따라 황족이었던 토조오(道祖王)를
황태자로 삼았으나, 그의 언동이 거칠고 험하여 그를 황태자에서 폐하고

후지와라노 나카마로(藤原仲麻呂)의 진언에 따라 토네리신노(舍人親王)의 아들인

오슈오(大炊王)를 황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757년 8월 1일에

오슈오에게 덴노자리를 양보하였다. 이가 곧 47대 준닌덴노(淳仁天皇)이며,

텐표쇼호라는 연호는 양위 17일 후에 끝났다.
그러나 나중에 준닌덴노가 간신 유게노 토쿄(弓削道鏡)를 총애하여

정사를 어지럽히자 준닌덴노와 심각하게 대립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정치의 실권을 준닌덴노에게서 뺏어간 후에 준닌덴노를 쫓아내고

다시 즉위하니 이가 48대 쇼토쿠덴노(称徳天皇 / 한국식 한자로는 稱德天皇)이다.
쫓겨난 준닌덴노는 아와지시마(淡路島)에 유폐되었다가 이후 765년 10월 23일에

33세로 죽었다. 한편 다시 즉위하여 칭호가 바뀌어 쇼토쿠덴노가 된 코켄덴노는

연호를 텐표호지(天平宝字)로 바꾸었다.
이후 코켄덴노도 770년 8월 4일에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텐표호지(天平宝字 / 한국식 표기로는 天平寶字)
서기 757년(정유) 8월 18일 - 서기 765년(정유) 1월 7일
* 46대 코겐덴노의 두번째 연호, 47대 준닌덴노의 첫번째이자 마지막 연호,

48대 쇼토쿠덴노의 첫번째 연호.



텐표진고(天平神護)
서기 765년(정유) 1월 7일 - 서기 767년(을사) 8월 16일
* 48대 쇼토쿠덴노의 두번째 연호. 이 연간인 텐표진고 원년 10월 23일에 폐위된

47대 준닌덴노가 죽었다.

진고케이운(神護景雲)
서기 767년(을사) 8월 16일 - 서기 770년(경술) 10월 1일
* 48대 쇼토쿠덴노의 세번째이자 마지막 연호. 49대 코닌덴노의 첫번째 연호.
770년 8월 4일에 쇼토쿠덴노가 53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텐지덴노의 손자인

시라카베(白璧)가 49대 코닌덴노(光仁天皇)로 즉위하였다.



호키(宝亀 / 한국식 표기로는 寶龜)
서기 770년(경술) 10월 1일 - 서기 781년(신유) 1월 1일
* 49대 코닌덴노의 두번째 연호. 코닌덴노는 당시 책봉되어 있었던 왕(王)들 중에서

가장 연상이었는데, 쇼토쿠덴노가 후사를 정하지 않은 채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쇼산미 다이나곤(正三位 大納言)에 있었던 시라카베노오지가 770년 10월 1일에

49대 코닌덴노로 등극하게 되었다. 쇼토쿠덴노의 동복동생인 이노헤나이신노

(井上內親王)를 황후로 하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타베신노(他戶親王)를 황태자로

앉혔으나, 황후 이노헤신노가 자신을 저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황후와 태자를 모두 폐위시켰다.
새 황후로 맞아들인 백제인 타카노노 니이카사(고야신립/高野新笠)의 사이에서

태어난 야마베신노(山部親王 : 후의 50대 칸무덴노)를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노령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자
황태자에게 양위하고 조고(上皇)로 올라간 뒤, 이듬해인 텐오天応 원년(781)

12월 23일에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텐오(天応 / 한국식 표기로는 天應)
서기 781년(신유) 1월 1일 - 서기 782년(임술) 8월 19일
* 49대 코닌덴노의 마지막 연호이자 50대 칸무덴노의 첫번째 연호.
49대 코닌덴노가 선포한 연호였으나, 그 자신이 그 연호를 벗어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781년 4월 3일에 황태자 야마베신노에게 양위하여 50대 칸무덴노가 등극한 후,
조고로 물러나 있던 코닌덴노는 78세로 12월 23일에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에 칸무덴노는 연호 텐오를 엔랴쿠(延暦)로 바꾸었다.



엔랴쿠(延暦 / 한국식 표기로는 延曆)
서기 782년(임술) 8월 19일 - 서기 806년(병술) 5월 18일
* 50대 칸무덴노의 두번째 연호이자 마지막 연호이면서 51대 헤이제이덴노의

첫번째 연호.
이 연호를 채택하고 2년 후인 엔랴쿠 3년(784)에 나가오카쿄(長岡京)로

도읍을 옮겼으나, 먼저 황태자로 책봉했었다가 역모죄의 누명을 쓰고

굶어죽은 동복동생 사와라신노(早良親王)의 원혼에 의해 흉사가 연이어 일어나자,

794년, 천도 10년만에 다시 수도를 지금의 쿄토(京都)인 헤이안쿄(平安京)로 옮기면서

일본 고대문화의 황금기, 헤이안시대(平安時代)가 시작되었다.
칸무덴노가 806년 3월 17일에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태자가 자리를 물려받아
51대 헤이제이덴노(平城天皇)에 오른 뒤에도 약 2개월동안 더 사용되었다.


51대 덴노에서 60대 덴노까지의 연호

※ 덴노의 시호와 연호가 같은 경우가 있는데,
그 덴노가 살아서 선포한 연호가 죽은 후 시호로 다시 올려진 경우와,
살아서는 연호를 선포하지 않았지만 죽은 후에 받은 시호로 연호를 대신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초대부터 현재 125대까지 연호의 음과 덴노의

이름이 같은 경우는 죽은 후의 시호로 연호를 만든 것이 대부분입니다만,

122대 메이지덴노부터 현재까지는 덴노가 살아 생전에 반포했던 연호가 시호로

올려졌음(헤이세이덴노 제외)을 미리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타이도(大同)
서기 806년(병술) 5월 18일 - 서기 810년(경인) 9월 19일
* 51대 헤이제이덴노의 두번째 연호이자 52대 사가덴노(嵯峨天皇)의 첫번째 연호.
51대 헤이제이덴노는 칸무덴노의 제 1황자로, 역모죄로 누명을 쓰고 죽은

사와라신노의 뒤를 이어 황태자에 책봉되었고, 칸무덴노가 세상을 떠나자

그 뒤를 이어 덴노로 즉위하였으나 자신이 병약한 몸이었기 때문에 동생인

카미노신노(神野親王)를 황태제로 책봉하고, 이 연간인 타이도 4년(809) 4월 1일에

35세의 나이로 황태제에게 덴노자리를 양위했다.
이후 조고로 올라갔으나, 몸이 다 낫자 다시 즉위할 요량으로 정치에 간섭하기

시작했고, 이어 거병을 꾀했다.
이때 거병을 눈치챈 사가덴노에 의해 거병계획은 저지당했고,

조고 헤이제이는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이후 사가덴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준나덴노의 두번째 연호 텐쵸(天長) 원년(824)

7월 7일에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코닌(弘仁)
서기 810년(경인) 9월 19일 - 서기 824년(갑진) 1월 5일
* 52대 사가덴노의 두번째 연호이자 53대 준나덴노의 첫번째 연호.
형에게서 양위를 받은 사가덴노가 정치에 다시 눈을 돌린 형을 저지하고
덴노자리 수성에 성공한 연간으로, 이 연간인 코닌 14년(823) 4월 16일에
아우인 오토모신노(大伴親王)에게 양위하여 53대 준나덴노(淳和天皇)로 즉위했다.



텐쵸(天長)
서기 824년(갑진) 1월 5일 - 서기 834년(갑인) 1월 3일
* 53대 준나덴노의 두번째 연호이자, 54대 닌묘덴노(仁明天皇)의 첫번째 연호.
이 연간인 텐쵸 원년 7월 7일에 51대 헤이제이덴노가 세상을 떠났다.
53대 준나덴노는 칸무덴노의 제 3황자로, 자신에게 양위하고 물러난 형 조고

사가덴노와 함께 서로 충돌하지 않는 안정적인 치세를 보여준 군주였다.

자신의 조카인 사가덴노의 제 2황자 마사라신노(正良親王)를
황태자에 책봉하고, 이 연간인 텐쵸 10년(833) 2월 28일에 황태자에게

황위를 양위하고 자신도 조고(上皇)로 물러났다.



쇼와(承和)
서기 834년(갑인) 1월 3일 - 서기 848년(무진) 6월 13일
* 54대 닌묘덴노의 두번째 연호. 이 연간인 쇼와 7년(840) 5월 8일에 조고로 물러나 있던

준나덴노가 55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얼마 후인 쇼와 9년(842) 7월 15일에

타이조고(太上皇)로 물러나 있던 사가덴노도 뒤를 따라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두 조고가 이어서 세상을 떠나버리자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정치 일선이 흔들리면서
쇼와 9년(842) 9월에 문신 토모노 코와미네(伴 健岑)와 타치바나노 하야미네

(橘 逸勢)가 쇼와의 변(承和の変)을 일으켜, 주모자들이 처형당하고

여기에 개입했다고 의심받던 황태자 츠네사다신노(恒貞親王)가 폐태자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의 권력가로 보다 확고한 권세를 잡기를 원했고,

코와미네와 하야미네와도 충돌이 있었던 후지와라노 요시후사(藤原良房)가 조작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 사건이 끝나자 요시후사의 조카인 미치야스신노

(道康親王)가 황태자로 올라, 요시후사가 바라는 대로 권력이 확고해지게 되었다.

카쇼(嘉祥)
서기 848년(무진) 6월 13일 - 서기 851년(신미) 4월 28일
* 54대 닌묘덴노의 두번째 연호이자 55대 몬토쿠덴노

(文徳天皇 / 한국식 한자표기로는文德天皇)의 첫번째 연호.
이 연간인 카쇼 3년(850) 3월 19일에 닌묘덴노는 자신의 제 1황자인 태자

미치야스신노에게 양위하고 그로부터 3일 뒤인 같은 해 3월 21일에 41세로

세상을 떠났다. 텐쵸 연간부터 카쇼 연간까지 54대 닌묘덴노의 통치기는 그 전까지의

칸푸분카주의(漢風文化主意 : 중국의 문물만을 문화로 생각하는 주의.)에서

코쿠후분카주의(国風文化主意 : 일본 고유의 문화를 중시하는 주의.)로의
전환기이며, 우아함( : 미야비'雅')를 중시하는 큐테이분카(宮廷文化/궁정문화)의

성립기에 놓여있었다.
아버지에게서 갑작스레 황위를 이어받은 미치야스신노는 55대 몬토쿠덴노로 즉위한다.



닌쥬(仁寿 / 한국식 표기로는 仁壽)
서기 851년(신미) 4월 28일 - 서기 854년(갑술) 11월 30일
* 55대 몬토쿠덴노의 두번째 연호.





사이코(斉衡)
서기 854년(갑술) 11월 30일 - 서기 857년(정축) 2월 27일
* 55대 몬토쿠덴노의 세번째 연호. 몬토쿠덴노는 자신의 후계자,

즉 황태자로 자신의 장남인 코레타카신노(惟喬親王)를 생각하고 있었으나,

정치의 실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던 후지와라노 요시후사의 의지에 의해

생후 9개월밖에 되지 않은 (제 4황자이자 요시후사의 외손자인) 코레히토신노

(惟仁親王)를 황태자로 삼는 수 밖에 없었다.



텐안(天安)
서기 857년(정축) 2월 27일 - 서기 859년(기묘) 4월 15일
* 55대 몬토쿠덴노의 마지막 연호이자 56대 세이와덴노(淸化天皇)의 첫번째 연호.
재위 9년만인 텐안 2년(858) 8월 27일에 32세로 몬토쿠덴노가 급서하자,

9살밖에 안된 황태자 코레히토신노가 즉위하니 이가 56대 세이와덴노이다.

덴노의 외조부이자 전 덴노의 장인인 후지와라노 요시후사가
황족이 아닌 일반신하 최초의 셋쇼(섭정)가 되어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넣게 되었다.
후지와라노 요시후사는 텐지덴노와 힘을 합쳐 소가씨를 물리쳤던 후지와라노

카마타리(원래 이름은 나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鎌足)의 후손으로,
지난 200여년간 쌓아왔던 가문의 재력과 위세를 이용하여 마침내 헤이안 제일의

명문세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쇼칸(貞観 / 한국식 한자표기로는 貞觀)
서기 859년(기묘) 4월 15일 - 서기 877년(정유) 4월 16일
* 56대 세이와덴노의 두번째 연호이자 마지막 연호이며

57대 요제이덴노(陽成天皇)의 첫번째 연호.
56대 덴노인 세이와덴노는 후지와라노 요시후사의 손자이며,

외조부에게 셋쇼를 맡겨 초기에는 정치에 손도 대지 못했다.
이후 요시후사가 죽자 그의 양자 후지와라노 모토츠네(藤原基經)에게

다시 정치의 실권을 빼앗겼으며 그의 누이로 황후로 맞아들였던 타카이코(高子)

에게서 낳은 제 1황자 사다아키라신노(貞明親王)를 황태자에 앉힌 후
이어 이 연간인 쇼칸 19년(877) 1월 3일에 태자에게 양위하고 자신은 불문으로

들어가 버린다. 이것은 전부 후지와라 일가의 전횡에서 벗어나려던

덴노의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찌되었던 태자 사다아키라신노가 아버지와

똑같은 9세의 나이로 즉위하니 이가 57대 요제이덴노이다.

간교(元慶)
서기 877년(정유) 4월 16일 - 서기 885년(을사) 2월 21일
* 57대 요제이덴노의 마지막 연호이자 58대 코코덴노(光孝天皇)의 첫번째 연호.
57대 요제이덴노는 아버지 세이와덴노와 같은 나이에 덴노에 즉위하였지만,

아버지와는 달리 외가인 후지와라가문과 충돌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는 그의 성격이 난폭하고 잔인했다고 쓰여져 있지만,
어디까지나 후지와라가문의 농간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결국 덴노 스스로가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이 연간이던 간교 8년(884) 2월 4일에

19세의 나이로 살인을 저지르자, 셋쇼 모토츠네(덴노의 외숙부)에 의해
강제로 양위되어 이후 65년동안이나 조고(上皇)로 물러나 있다가 텐랴쿠天曆 3년

(949) 9월 29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82세였다. 한편 요제이덴노를 조고로 쫓아낸

모토츠네는 54대 닌묘덴노의 제 3황자로 몬토쿠덴노의 이복동생이자 요제이덴노의

숙부인 토키야스신노(時康親王)를 황위에 앉히니 이가 58대 코코덴노이다.

한편 이 연간인 간교 4년(880) 12월 4일에 불문으로 귀의했던 조고 세이와덴노가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닌나(仁和)
서기 885년(을사) 2월 21일 - 서기 889년(기유) 4월 27일
* 58대 코코덴노의 마지막 연호이자 59대 우다덴노(宇多天皇)의 첫번째 연호.
흉폭한 요제이덴노의 뒤를 이어 즉위한 58대 코코덴노도 결국엔 셋쇼 모토츠네에게

모든 정치의 실권을 넘기기에 이르렀다. 이후 제 7황자인 사다미신노(定省親王)를

후계로 세우고, 재위 4년만인 닌나 3년(887) 8월 26일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 58세였다.

사다미신노는 처음에 황위를 포기하고 신적으로 내려가 미나모토(源)의 성을

받았지만, 모토츠네의 추천에 의해서 신노에 오르고, 다음날에 양위받아 즉위하였다.

덴노로는 최초로 미나모토라는 성씨를 가진 채로 즉위한 것이다.
이후에 그의 후손들 중 일부가 미나모토가문으로 내려와 우다겐지(宇多源氏)라는

일가를 이루게 된다. 이후 모토츠네가 죽자, 모토츠네의 아들인 토키히라(時平)와

희대의 대학자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를 등용하여 지방행정의 재건과

행정구역의 통폐합등의 민생안정정책을 펼쳤다.

칸표(寛平 / 한국식 한자표기로는 寬平)
서기 889년(기유) 4월 27일 - 서기 898년(무오) 4월 26일
* 59대 우다덴노의 마지막 연호이자 60대 다이고덴노(醍醐天皇)의 첫번째 연호.
헤이안시대 초기의 정치에 혁신을 꾀했던 우다덴노는 제 1황자 아츠기미신노

(敦仁親王)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태자가 13세가 되자 정무와 생활에 대한 훈계를

담은 《칸표노고유이카이寬平御遺戒》를 남겨주고 양위하였다.
이가 60대 다이고덴노였다. 한편 양위한 우다덴노는 불문에 귀의하여 이후

호오(法皇)가 되었다. 다이고덴노는 음악을 좋아하는 낙관적인 성격의 군주였으나

아버지 우다덴노가 신임하던 우다이진(右大臣)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와 대립하다가

사다이진(左大臣) 후지와라노 토키히라의 탄핵을 받아들여 그를 나라(奈良)의

다자이후(太宰府)의 수장인 다자이곤노소치(太宰權帥)로 좌천시키기에 이르렀다.
이후 미치자네는 그곳에서 좌절을 이기지 못하고 화병을 얻어 불우하게 사망하니,
이후 연호가 바뀐 엔키延喜 3년(서기 903년)의 일이었으며 당시 나이 59세였다.



쇼타이(正泰)
서기 898년(무오) 4월 26일 - 서기 901년(신유) 7월 15일
* 60대 다이고덴노의 두번째 연호. 이 연간이 미처 끝나기 전인 쇼타이 4년(901) 1월 7일,
다이고덴노는 슈니이 우다이진(從二位 右大臣)이었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좌천시키기에 이른다. 이때 미치자네를 탄핵했던 후지와라노 토키히라와

미나모토노 아키라(源 光)일파들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



엔키(延喜)
서기 901년(신유) 7월 15일 - 서기 923년(계미) 윤달 4월 11일
* 60대 다이고덴노의 세번째 연호. 이 연간을 겐키라고도 읽기도 한다.
이 연간인 엔키 3년(903)에 좌천되었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화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직후에 권력을 잡았던 토키히라와 미나모토노 아키라일파들이

잇따라 급사하고 황태자로 세웠던 야스아키라신노(保明親王)가 대낮에 토혈을 하고

급작스레 세상을 떠났으며,
(야스아키라신노는 차남이었으며, 장남 요시아키라신노[克明親王]는 이전에 요절했다.)
수도에 전염병이 돌고 벼락이 내리치는 등의 기이한 변괴가 계속되었다.



엔쵸(延長)
서기 923년(계미) 윤달 4월 11일 - 서기 931년(신묘) 4월 26일
* 60대 다이고덴노의 마지막 연호이자 61대 스자쿠덴노(朱雀天皇)의 첫번째 연호.
903년에 화병으로 죽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원령으로 인해 헤이안시대 사상

최고의 변괴들이 잇따르자, 이에 덴노가 직접 좌천교지를 파기해 버리고,

그의 관직을 복작시켜 주었으나 그 후에도 새 황태자 요시요리신노(慶賴親王)가

급사하고, 곳곳에서 변괴가 잇따랐다.
게다가 수도 헤이안쿄의 궁궐에 벼락이 떨어져 많은 신하와 황족들,

궁녀와 관인들이 사상당했다.
이에 크게 충격을 받은 다이고덴노는 와병하다가 황태자 유타아키라신노
(寬明親王)에게 양위하고 7일 후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 46세였으며 때는 엔쵸 8년

(930) 9월 29일이었다. 황태자 유타아키라신노도 61대 스자쿠덴노로 즉위한 이후

미치자네의 횡액을 피하지 못했다.

 

2010.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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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michinn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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