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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일본의 역사 시대순 (내공 50)
비공개 조회수 2,166 작성일2006.08.26
일본역사 고대부터 근대 까지 시대순으로 설명까지 참고해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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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원시사회
일본열도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열도 최초의 문화는 조몬식토기[繩紋式土器(승문식토기)]의 문화 즉 조몬문화(BC 4500∼BC 2세기)로 이때까지 어렵상태(漁獵狀態)가 이어졌고 금속기의 발명은 없었다. 이는 BC 2세기 무렵 한반도로부터 조몬토기와는 계통이 다르고 그보다 높은 기술로 만들어진 토기문화 및 도작(稻作)과 금속기문화가 전해짐으로써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는데 이를 야요이문화[彌生文化(미생문화)]라 한다. 야요이문화는 한국·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각지에 취락이 형성되었다. 중국기록에 의하면 1세기 후반 100여 개의 작은 나라가 있었고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고 한다.

고대사회
일본열도를 통일한 야마토국가[大和國家(대화국가)]의 모체가 형성된 것은 5세기, 일본이라는 국호가 생긴 것은 고대국가가 성립된 6세기 말이고 고대국가체제가 정비된 것은 7세기 중반이다. 세습제를 확립한 오키미[大君(대군);王(왕)]가 군림하고 농구와 무구(武具)를 독점함으로써 세력을 가지게 된 족장이 토지와 백성을 지배하였다. 족장은 조정으로부터 성(姓)을 하사받고 귀족이 되어, 씨족민과 예속민을 거느리고 조정에 봉사하였다. 미야케[屯倉(둔창)]·다도코로[田莊(전장)]라고 하는 대토지를 소유한 대군은 베민[部民(부민);私有民(사유민)]이라는 경작민을 소유하였다.

백제(百濟)로부터 4세기 말에는 한자와 유교가, 6세기에는 불교가 전래되어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는데, 쇼토쿠태자[聖德太子(성덕태자)]는 불교를 바탕으로 한 정치를 하고 각지에 많은 사찰을 건립하였다. 7세기에 지배계급은 당(唐)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율령제도를 지배의 기본체제로 하는 정치개혁을 통하여 왕실을 중심으로 집결하고자 하였고, 국민을 공민(公民;양민)과 노비(천민)로 나누었다. 반전수수법(班田收授法)에 따라 일정한 토지를 부여받은 공민은 조(租)·용(庸)·조(調) 외에 병역·잡역(강제노동)을 부담하였다. 8세기 말부터 9세기에 걸쳐서 율령국가의 기반이었던 반전제가 무너지고 귀족·사찰의 사적(私的) 토지소유인 장원이 발달하였다.

10세기 이후에는 장원·공령(公領)의 경작을 도급받은 농민상층(農民上層)이 차츰 토지경작권을 가지게 되어 자립적으로 경영하게 되었다. 그리고 경작과 경영을 유지하기 위하여 무장한 지주농민과 관리 가운데 무사(武士;사무라이)가 생겨났다. 그들은 이웃에 있는 무사, 중앙귀족, 사찰세력과의 대립 항쟁을 통하여 세력을 신장하였다. 무사들은 정치적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는데, 12세기 중반 이래 다이라[平(평)]·미나모토[源(원)]의 두 무가(武家)가 각축하다가 미나모토 요리모토[源賴朝(원뢰조)]가 가마쿠라바쿠후[鎌倉幕府(겸창막부)]를 열어 이른바 무가정치가 시작되었다. 794년의 교토[京都(경도)] 천도 이후 가마쿠라바쿠후 성립까지의 기간을 헤이안시대[平安時代(평안시대)]라고 한다.

중세사회
1192년 가마쿠라바쿠후가 성립된 뒤에도 중앙귀족과 사찰세력이 여전히 세력을 유지하여 장원영주·무사영주의 2원지배체제가 지속되었다. 1274년과 1281년의 2회에 걸친 몽골의 침입 때는 태풍에 힘입어 이를 물리쳤으나, 막대한 군비지출 등으로 지배체제가 점차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 틈을 타서 1333년 반(反)바쿠후세력을 결집한 고다이고왕이 독재에 의한 관료국가의 수립을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지방세력의 불만을 고조시켜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를 초래하였다. 남북조시대는 1336년 아시카와 다카우지[足利尊氏(족리존씨)]가 무로마치[室町(실정)]에 바쿠후를 세운 뒤에도 약 60년간 지속되다가 1392년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족리의만)]가 무력세력의 통합을 주창하면서 남조를 소멸시킴으로써 막을 내렸다.

한편 무로마치바쿠후는 처음부터 그 기반이 취약하여 1467년 이후에는 전국시대(戰國時代)라는 혼란기에 접어 들었다. 바쿠후에서 임명한 슈고[守護(수호)]가 다이묘[大名(대명);領主(영주)], 즉 슈고다이묘가 되고 그들이 완전히 독립하여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성장, 센코쿠다이묘[戰國大名(전국대명)]라고 불리게 되었다. 하극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그들은 독자적인 법을 가지고 강대한 군사집단(家臣團)을 편성하고, 영내(領內)의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는 다이묘료고쿠[大名領國(대명령국)]를 형성하였다.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직전신장)]는 다이묘 가운데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중앙에 진출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풍신수길)]가 1590년 전국을 통일하였고 1592~1593년, 1597~1598년의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략하여 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문화적·경제적 약탈을 자행하였다. 결국 전쟁은 실패로 끝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덕천가강)]가 경쟁자를 물리치고 1603년 에도[江戶(강호);지금의 東京(동경)]에 새 바쿠후를 개설하였다.

바쿠후는 가신단의 영지를 재편성하고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삼근교대(參勤交代)의 제도화로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외국무역의 관리와 통제를 위하여 쇄국정책을 실시하였다. 바쿠후체제에 한[藩(번);大名(대명)의 영지]을 결합시킨 바쿠한체제[幕藩體制(막번체제)]의 경제적 기초는 자급자족적 경제의 농촌이었다. 농업생산에서 이탈한 무사계급은 농업생산담당자인 소농으로부터 생산물의 절반 이상을 연공(年貢)으로 수탈하였다. 농민은 전답영대매매금지령(田畓永代賣買禁止令)·분지제한령(分地制限令) 등에 의하여 전답의 매매·저당을 원칙적으로 금지당하였다. 무사계급은 3도(三都;京都·東京·大阪) 또는 성(城) 부근에 살면서 연공미(年貢米)와 그 환금(換金)으로 생활하였다.

17세기 후반 이후가 되자 농촌사회는 화폐 및 상품이 유통되는 사회로 차츰 변질하였다. 농민층의 분해가 진행되고 농촌공업이 전개되는 가운데 화폐경제의 발전은 영주계급에도 영향을 주어, 지출의 증대로 재정이 궁핍해진 바쿠한영주는 연공의 증징(增徵)을 꾀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혹한 연공수탈에 반대하는 농민봉기와 도시 시민들의 폭동이 계속 일어나게 되자 19세기에 바쿠후나 한에서 경제개혁 정책이 추진되었으나 효과는 거의 없었다. 에도바쿠후말기에는 구미열강의 개국요구가 거듭되었다. 처음에는 이를 거절했으나 미국 M.C. 페리 제독의 압력에 굴하여 1854년 쇄국정책을 포기하였다. 바쿠후에 의한 개국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바쿠후타도운동이 격화된 내란상황 속에서 1867년 에도바쿠후는 무너졌다.

근대사회
1869년의 판적봉환(版籍奉還;영주들이 영지와 백성을 조정에 반환한 일) 등에 의해 조정은 왕정복고를 선언하고 이른바 메이지유신[明治維新(명치유신)]을 추진하였다. 젊은 반(反)바쿠후세력이 중심이 되이 다이묘체제를 중앙집권체제로 전환하고 서양의 기술·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정부의 부국강병과 식산흥업(殖産興業) 등 여러 정책으로 1890년대부터 1910년대에 걸쳐서 자본주의가 급속히 발달하였고 이 과정에서 기계제공장생산이 확립되었다.

급속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제국주의정책을 추진하였다. 1894~1895년의 청·일전쟁, 1904~1905년의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한국·사할린남부·타이완을 식민지로 삼았다.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는 등 계속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1940년 독일·이탈리아와 3국동맹을 맺었고, 1941년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미국의 원자폭탄투하를 계기로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현대사회
항복문에 따라 일본은 1895년 이후에 획득한 영토는 모두 포기하였다. 일본을 점령한 연합국은 일본의 비무장화·민주화를 추진하였고 1947년에는 정치·사회·교육 개혁안을 포함시킨 새 헌법이 통과되도록 하였다. 장기간에 걸친 보수적인 자민당정권 아래에서 일본의 경제는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비무장화에 따라 국방비의 부담이 없어졌고 한국의 6·25에 따른 특수(特需) 등을 발판으로 삼아 성장을 거듭하여 20세기 후반에는 세계 대부분 나라의 가장 큰 무역상대국이 됨과 동시에 가장 큰 무역흑자국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막강한 경제력에도 불구하고 과거 주변국들을 침략한 역사를 왜곡하고 무역에 있어서 불공정한 행위를 함으로써 각국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20세기말에 들어와 일본은 경제력에 걸맞게 세계평화를 위해 기여하는 나라가 되기를 요청받고 있다
 
야후 백과사전

200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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