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문화·역사·철학 등을 연구하는 인문학이 변방에서 주류 문화콘텐츠로 떠올랐다. 각종 강연에서 인문학은 인기만점 주제가 됐고 관련도서는 줄줄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갈증에 허덕이는 사람들, 그들의 갈등이 충돌하며 각박해진 세상…. 이런 세상에 지친 이들은 그동안 잊고 지냈던 자아와 실존을 찾아 나선다. 이런 분위기 속에 인문학은 우리 사회의 새로운 길잡이가 돼가는 분위기다. <머니S>는 창간 11주년을 맞아 우리 사회의 신선한 수맥을 뚫고 있는 인문학을 조명해봤다. 인문학이 왜 각광받는지, 그에 따른 부작용은 없는지 살펴봤다. 또 인문학을 실생활에서 즐기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어봤다. <편집자 주>

예술이랑 친해지기 비정기 모임./사진=서대웅 기자
예술이랑 친해지기 비정기 모임./사진=서대웅 기자

[인문학이 주목 받는다] ④ 르포-'예술이랑 친해지기'와 '오독'

여기, 자신만의 삶의 모델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인문정신’으로 똘똘 뭉친, ‘일상 인문학’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문사철’(文史哲) 연구자거나 전공자가 아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등 르네상스식의 고리타분한 질문을 던지지도 않는다. 단지 일터와 일상에서 자기 삶의 방향성에 어떤 의미가 담겼는지를 고민하고 그런 과정을 타인과 주고받는다.
◆“인문정신, 불완전한 모습도 이해하는 것”

지난달 26일 저녁 서울 압구정동. 15명이 둘러앉았다. 이들은 각자의 과거를 소환했다. 빛보단 그늘에 가까운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A씨(49)는 잘나가던 회사 대표였지만 우울증에 걸렸다. 160㎝의 키에 몸무게가 100㎏ 이상으로 불어났다. 공황장애까지 찾아왔다. 그는 “살고 싶어 사업을 접고 한국을 떠났다”고 말했다. B씨(43)는 연기를 하고 싶어 상경했다. 데뷔 10여년 만에 드라마 배우로 발탁됐다. 하지만 첫 촬영장에서 그는 평생 얻을 욕을 한번에 다 먹고 잘렸다고 한다. 이후 한달 동안 집 밖에도 못나왔다. C씨(49)는 수채화를 그리는 작가다. 자유롭게 작품활동을 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했다. 사업을 시작했고 돈은 벌었지만 정작 작품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사업이 망했고 모든 걸 잃었다.


15명의 자기소개가 끝나자 4시간이 흘렀다. 감추고 싶은 걸 드러내는 순간 눈물과 미소가 뒤섞였다.

‘예술이랑 친해지기’(예친)가 주최한 비정기 모임이다. 2007년 ‘삶이 곧 예술’이라는 모토로 만든 싸이월드 클럽이 시초다. 이곳에선 내 삶도, 다른 사람의 일상도 예술이 된다. 예술을 대하듯 모두의 삶을 감상한다. 이는 ‘인문정신’으로 연결된다. 인문학이 ‘무엇이 인간다운가’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면 인문정신은 ‘이것이 인간이구나’라며 포용하는 마음이다. 이들이 과거를 가감없이 드러낼 수 있는 것도 인문정신에서 비롯된다.

자신을 서울 중소기업의 흔한 사무직 여성이라고 소개한 ‘테리’(이지우씨)는 이 모임을 “영혼의 연대”라고 표현했다. ‘IMF의 불우한 시대를 사는 변두리 여성이라는 결핍’을 이곳에서 채웠다고 한다. 그는 “예술은 인문학적 관점을 기르는 최상의 도구다. 예술은 루틴한 일상에서 벗어나게 하고 삶의 긍정적인 태도에 큰 영향을 준다”며 “완전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해주는 것, 조금 모자라도 나를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것. 이게 인문정신의 모태”라고 말했다.



◆‘나다운 삶’ 꾸리는 체험과 나눔의 장

밥벌이에 바쁜 생활인에게 이런 모임이 의미가 있을까. 이 같은 질문에 예친 모임장이자 작가 겸 아트 디렉터인 최현아씨는 “생활인이기에 더더욱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예친 활동을 하며 밥벌이에만 얽매이지 않고 한단계 나아가게 됐다. ‘나다운 삶’을 꾸리게 된 것이다. 마주한 각각의 문제를 털어내고 서로 공유하며 성장할 수 있는 창구가 있으면 된다. 나의 경우 예술이 그 창구였고 일상이 풍만해졌다고 믿는다.”

예친 초기 회원인 ‘다솜’(손경애씨)은 “직장에서 무기력한 상황이 지속될 때 이 모임에서 활기를 찾았다”고 말했다. 한때 간호사였던 황유진씨도 “존엄하게 살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예친엔 국내외를 무대로 활동하는 예술가까지 합류했다. 재미컴퍼니 대표 ‘대니얼 안’(안신영씨), 무예작가 ‘탄정’(이진혁씨), 친환경설치 작가 ‘로리킴’(김수진씨), 요가 테라피스트 ‘아타’(박유미씨), 다큐감독 ‘우감독’(우광훈씨), 우컴퍼니 대표 ‘우연출’(우상욱씨), 툴뮤직 대표 정은현씨, CF감독 한윤종씨 등이 이날 자리했다.

그러나 예친 회원들이 공유하는 예술 행위가 거창한 건 아니다. 매달 영화, 도서, 공연, 전시 등 추천 예술을 선정하고 체험하는 식이다. 이후 감상을 나누며 자연스레 일상의 얘기로 넘어간다. 이 과정에서 다른 이의 의견을 듣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체화한다.

황유진씨는 “처음엔 이곳에 모이는 몇몇 예술가를 부러워만 했다. 하지만 모임에서 ‘철학이 있는 사람은 모두가 예술가’라는 생각을 얻었다”며 “직업적인 아티스트만 아티스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예친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듯 이러한 모임은 누구나 만들 수 있다. 예친 모임장 최현아씨도 광고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이었다. “예술적 기교를 배우기 위한 모임이 아니다. 모두가 지닌 순수성을 되찾자는 의도다. 모든 사람은 예술가적 기질을 갖고 태어난다. 어린아이의 순수한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성장하며 각자의 순수성은 사회의 제도적 힘에 퇴색된다. 이를 한꺼풀씩 벗겨내며 인간성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마음 하나면 또 다른 예친을 만들 수 있다.”

◆“인문학은 몰라도 ‘책맛’은 알아요”

예친 회원들은 사실 대개가 산전수전을 겪은 사람들이다.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 나서기 전 사회의 잣대를 체득한 이들이다.

반대로 젊은 인문학도들도 있다. 상대적으로 얕은 삶의 주름을 책으로 보완하려는 모임이다. 지난 1일 오후 서울 신촌의 한 스터디 카페. 사회에 갓 진출했거나 학생 신분인 13명이 책 한권씩 들고 왔다. 독서모임 ‘오독’(오직 독서뿐) 회원들이다.

오독은 여타 독서모임과 달리 독서시간을 한시간 갖는다. 이곳에서만큼은 강제로 책을 읽자는 취지에서다. 달리 말하면 독서가 몸에 배지 않은 이들이 모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오독 모임장 홍아영씨는 “나부터가 독서하기 힘들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모임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성요한씨도 “독서법을 몰라서 들어왔다”고 했다.

독서 습관을 들이기 위해 모였다지만 묵독 이후 두시간 동안 이어진 이들의 대화는 예사롭지 않았다.

권순범씨는 김훈의 <칼의 노래>를 소개하며 “용맹하다고만 알았던 이순신 장군의 인간다움을 엿볼 수 있었다. 소설에서 묘사된 이순신은 내적으론 심신미약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자 안영준씨는 “김탁한의 소설 <불멸의 이순신>이 이순신 장군이 놓인 정치적 상황을 중심으로 묘사된 반면 <칼의 노래>는 서민적 느낌이 짙다”고 말했다. 한 회원이 기억에 남는 구절을 묻자 권씨가 답했고 이어 윤기범씨도 본인의 공책에 적어놓은 <칼의 노래>의 한 구절을 읽었다. 구절에 대한 나름의 해석에 회원들은 집중했다.

오독 모임./사진=서대웅 기자
오독 모임./사진=서대웅 기자

인문학이란 뭐라고 생각하는지 묻는 질문에도 거침없이 답했다. 김동영씨는 “자기계발서, 인문학 서적 등은 프레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며 “<레미제라블>이 현재는 인문고전이지만 19세기 당시엔 자신을 깨우는 자기계발서였다”고 말했다. 인문학의 기준은 없으며 각성할 수 있다면 인문학이든 자기계발서든 상관없이 사람들이 찾는다는 설명이다.
윤기범씨 역시 “자기계발서와 인문학 서적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났다”며 “자신만의 입맛에 맞는 책이 있다고 본다. 모두가 입맛이 다르듯 ‘책맛’도 다르다”고 말했다.

안형준씨는 “인문학은 해석하기 나름”이라며 “중요한 건 효용성이다. (독서 이후) 행동거지가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인문학을 접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책이든 자신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해석이다. 수준 높은 교양이나 지식을 쌓아도 언행이 퇴보한다면 독서한 시간은 낭비일 뿐이라는 시각이기도 하다.

◆인문학이 열풍, ‘새로운 삶’에 대한 갈구

대학 등 제도권에선 인문학이 위기에 처했다고 우려하지만 현실은 인문학 열풍이다. 비단 출판계나 강연계의 호황을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예친과 오독처럼 일상에서 인문정신을 발휘하기 위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서다.

“인문학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새로운 삶의 가치와 모델을 고민하는 사람이다.”

문예 계간지 <창작과 비평> 2009년 여름호(144호)에 실린 특집 ‘이 시대는 어떤 인문학을 요구하는가’에서 고봉준 문학평론가가 한 말이다. 고 평론가에 따르면 경쟁에서 이기거나 살아남으려는 자, 즉 삶에 대한 기존 모델을 신뢰하는 사람은 실용적인 서적에서 돌파구를 찾는다. 반면 경쟁에서의 승리, 물질적 풍요가 삶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사람은 인문학에 눈을 돌린다.

그는 “지금의 인문학 열풍은 새로운 삶에 대한 대중의 욕망이 끓어오르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9년 전 했던 말이지만 지금도, 앞으로도 유효할 듯하다.

☞ 본 기사는 <머니S> 추석합본호(제558호·제55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