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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의 미술이야기]피카소의 천재성 그리고 감수성

 

파블로 피카소가 관객들에게 남긴 인상은 그의 크고 부리부리한 눈동자만큼이나 강렬한 것이었다. 그는 재능이 넘쳤고, 정력도 넘쳤다. 위대한 사조와 양식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던 역동적인 시기에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던 가능한 모든 실험들을 모조리 빨아들였고, 그 성과를 무수한 작품으로 남길 수 있었다. 그가 생전에 완성한 작품 수만 해도 5만점에 달한다. 그 양식에 있어서도 우울한 청색 계열의 초기 작품들, 원시주의 작품들, 초현실주의 경향을 띤 작품들, 입체주의 작품들, 판화, 조각, 콜라주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여러 분야를 횡단하고 있으며, 전쟁의 발발로 미술가로서의 활동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는 시작(詩作)에 전념에 무려 300편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이 정도면 거의 만능인의 수준이다.

자연스럽게 피카소에게는 천재 신화가 따라다닌다. 피카소는 또한 달변가이기도 했는데, 덕분에 자신의 천재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어떤 멘트를 쳐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는 그의 아버지의 영향이기도 했는데, 화가이자 미술 교수였던 파블로 루이즈 피카소는 어렸을 때부터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남들보다 일찍 전문 미술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그를 이끌었으며 아들의 존재를 알리는데 자신의 인맥을 최대한 활용했다.

아버지의 전폭적인지지 덕분에 그는 남들보다 일찍 바르셀로나 미술학교와 마드리드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했지만 막상 대학에서는 외국의 전위적인 화가들에게서 더 많은 영감을 받기 시작했고 아버지의 영향으로부터도 결별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한 몸에 받아온 부모의 지지와 전략은 그의 일생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며, 실제로 그는 천재화가라는 신화에 둘러싸여 매우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그런데 진정 그가 천재였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가 스스로 양식을 고안한 경우보다는 다른 사람의 것을 적용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했던 다양한 양식들 역시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이 오랜 시간 공들여 연구한 것을 재빠르게 흡수해 적용했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피카소 자신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는 이렇게 받아친다. “진정한 천재란 단순한 모방자가 아니라 훔치는 자다.”

하지만 1907년 발표한 ‘아비뇽의 처녀들’은 그의 천재성 논란을 일소시킨다. 신체가 여러 개의 면으로 조각나 버린 처녀들의 모습은 뭔가 기이하고 광적이어서 이전의 경향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역시 마티스로부터 힌트를 얻어 완성한 작품이었다. 마티스는 피카소에게 세잔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전수해주었고, 분할된 시선에 대한 아이디어와 아프리카인 전통 가면의 아이디어도 주었다.

다시 한 번 영감을 얻은 피카소는 꽤나 심혈을 기울여 이 작품을 완성했다. 남자들을 유혹하는 듯 한 포즈를 취한 여인들의 눈빛은 뻥 뚫려 있고, 오른쪽에 위치한 두 여인은 아프리카 가면을 쓰고 희한한 몸짓을 하고 있다. 광란의 축제가 벌어질 듯 흥분되기도 하면서 불길하다.

이 작품을 위한 습작에서 한 명의 남자를 여러 지점에 위치해보았던 흔적이 나타났지만, 결국 다섯 명의 처녀의 모습만 작품에 남겨졌다. 본의 아니게 관객은 홍등 속으로 초대받은 단 한명의 남자가 되어 미지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 발표 즉시 작품은 많은 관심과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입체파 화가로서의 피카소의 노선을 구축시킨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작품에 담긴 파격성과 폭발적인 에너지는 피카소가 천재 화가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예술가의 천재성은 그 자체만으로는 감동을 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에, 필자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두 여인의 뻥 뚫린 시선만큼이나 석연치 않은 점을 작품에서 느끼곤 한다.

오히려 다음해에 완성된 ‘세 여인’이라는 작품에 좀 더 호감이 더 가는데, 이 작품에서는 주술적이고 충격적인 느낌이 가셨고, 대신 깊은 맛이 난다. 바야흐로 입체주의의 경향이 무르익으려 하고 있었고, 형태를 분할하는 실험도 고도화 되었다. 피카소는 입체주의를 함께 연구할 동료, 브라크를 만나는 행운까지도 잡았다. 작품 속 여인은 탄탄하게 매만져 졌고, 좀 더 정갈하게 다듬어졌으며, 표정도 채워졌다. 작가가 어느 한 지점에 정착해 정성을 들이고 있음이 작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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