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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폴세잔의 업적들 부탁합니다 연도별로ㅠ...
비공개 조회수 4,231 작성일2018.05.15
폴세잔의 업적들 부탁합니다 연도별로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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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
Paul Cézanne
1839. 1. 19 프랑스 엑상프로방스~1906. 10. 22 엑상프로방스.

프랑스의 화가.
후기인상파 중 가장 뛰어난 인물로 꼽힌다. 그의 작품과 미술개념은 20세기의 많은 미술가들과 미술운동들, 특히 입체파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부분의 생애를 거의 대중의 오해와 불신으로 일관했던 세잔의 미술은 인상주의에서 시작하여 개성적 표현과 그림 자체의 완결성을 강조함으로써 결국 19세기의 틀에 박힌 모든 가치들을 부정했다. 그는 현대 회화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작품의 주제는 주로 풍경과 정물이지만 초상도 더러 있으며 색채는 강렬하면서도 차분하다. 그는 반사광에 의해 나타나는 대상들의 객관적인 모습보다는 그 밑에 깔려 있는 구조를 강조했다. 작품 가운데는 〈카드 놀이하는 사람들 Card Players〉(1890~92)과 프로방스의 생트빅투아르 산(山)을 주제로 한 수많은 작품들(예를 들면 1885~87년의 〈큰 소나무들이 있는 생트빅투아르 산 Mont Sainte-Victoire with Large Pine Trees〉)이 있다.
부유한 중산계층에서 태어난 세잔은 엑상프로방스에 있는 부르봉 중학교에서 훌륭한 인문교육을 받았다. 1858년 그는 아들이 자기와 같은 직업에 종사하길 원하는 성공한 은행가인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엑상프로방스대학교의 법학과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찍부터 미술가가 되려고 결심한 그는 법학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고 2년 동안 방황하다가 마침내 어머니의 간청에 힘입어 파리에서 회화를 공부할 수 있도록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냈다.

파리에서 보낸 초기시절(1861~70)
세잔이 처음 파리에 머물렀던 기간은 겨우 5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불안정한 성격을 지녔던 그는 미술공부를 시작한 '스위스 아틀리에'의 몇몇 학생들만큼 기교가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자 곧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다만 부르봉 중학교에서 친한 친구가 된 에밀 졸라의 격려 덕분에 5개월을 버텼던 것이다. 엑상프로방스로 돌아가자 세잔은 아버지의 은행에서 일하는 데에 만족하려고 새로운 노력을 기울여 보지만, 1년 뒤 굳은 결심으로 파리에 돌아갔다. 1858~72년의 입문 기간에 세잔은 파리에 살면서 자주 엑스를 방문했다.
1860년대초는 파리의 문학·예술 활동이 매우 활발한 시기였다. 귀스타브 쿠르베가 이끄는 사실주의 화가들과 공식적인 미술 아카데미 사이의 대립은 이미 절정에 다다랐으며, 미술 아카데미는 해마다 열린 전람회에서 전통적인 신고전주의나 낭만주의 양식에 따르지 않는 그림들을 거절했기 때문에 그러한 작품들은 거의 대중에게 알려지지 못했다. 1863년 황제 나폴레옹 3세는 미술계에서 점점 커지는 동요를 막기 위하여 아카데미의 미술전람회에서 거절당한 화가들을 중심으로 ' 낙선전'을 개최하도록 지시했다. 비평가들은 낙선전에 출품된 작품들을 대체로 비난했는데, 이런 반응 때문에 이 화가들은 혁명적인 정신으로 더욱 굳건히 뭉쳤다. 전통적인 양식에 곧 실망해버린 세잔은 에두아르 마네, 카미유 피사로, 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에드가르 드가 등 이 그룹의 가장 진보적인 화가들과 사귀었다. 이 미술가들은 세잔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겨우 20대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제 막 그들의 양식을 형성해가고 있었는데, 마네를 제외하고는 그 뒤 모두 인상파에 참여했다. 세잔의 친구인 졸라는 그들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지만 세잔은 수줍음을 타는 데다가 그들의 지나치게 들뜬 분위기에 기분이 불쾌해져서 처음에는 화를 잘 내고 일부러 무례하게 구는 바람에 이 젊은이들과 쉽게 친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혁명적인 착상에 도움을 받은 세잔은 평범한 주제들을 사실적으로 다루는 데 앞장선 쿠르베와 함께, 선(線)보다는 색(色)을 사용한 작품으로 그에게 깊은 인상을 준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영향을 종합하려고 노력했다. 이 시기에 세잔은 성숙기의 작품들과는 거의 정반대되는 양식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격정적이고 어두웠다. 그는 지나치게 극단적인 명암을 구사하며 자유분방하고 힘이 넘치는 화법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이러한 화법은 당시로서는 색다른 것이었으나 그 영향은 들라크루아의 소용돌이 구도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청년기의 민감한 활력은 그것이 나타내는 내적인 흥분과 더불어 야수파와 표현주의의 대담한 신적 작품들, 특히 모리스 드 블라맹크와 조르주 루오의 작품들을 예고하고 있다.

인상파 시기(1870~78)
1870년 7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터지자 세잔은 징병을 피하기 위해서 파리를 떠나 프로방스로 갔다. 이때 그는 1년 전부터 사귄 젊은 여인 마리 오르탕스 피케를 데리고 갔으며 1886년 마침내 그녀와 결혼했다. 세잔 부부는 마르세유에서 멀지 않은 프랑스 남부 해안의 작은 마을인 에스타크에 정착했다. 거기에서 그는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으며 자연을 있는 그대로 충실히 묘사하는 동시에 자연에서 받는 느낌을 표현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는 인상파 친구들이 하는 방식으로 주제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그린 2점의 풍경화 〈눈 내린 에스타크 Snow at Estaque〉(1870~71)와 〈포도주 시장 The Wine Market〉(1872)을 보면, 초기 양식의 구도로 되어 있으나 이미 더 세련되어 있고 빛의 사실적 표현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1872년 1월 세잔과 마리 오르탕스 사이에 아들 폴이 태어났다. 그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잔은 카미유 피사로의 초대를 받아 식구들을 데리고 우아즈 강 유역에 있는 퐁투아즈로 가서 살았다. 그곳과 그 근처의 오베르라는 도시에서 그는 피사로에게 인상주의 기법 및 이론을 진지하게 배우기 시작했는데, 피사로는 그의 까다로운 성격을 참아가며 끈기있게 가르친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은 1874년에 함께 그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그 기법은 여전히 급진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 때부터 세잔은 거의 전적으로 풍경화와 정물화에 몰두했으며 얼마 뒤에는 초상화에 몰두했다. 피사로는 세잔에게 밝은 색을 사용할 것을 권유했으며 인상파의 특징인 단편적인 색채와 짧은 붓질을 사용할 때의 장점들을 가르쳤는데, 세잔은 인상파와는 약간 다른 효과이긴 했지만 후기 작품에서 본격적으로 그러한 기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피사로의 지도를 받는 동안에도 세잔의 작품은 인상파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독특한 시각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그는 인상파의 기법을 쓰기는 했지만 인상파가 주로 관심을 기울였던, 대상에서 발산되는 빛이 나타내는 실재의 모습보다는 대상들에 내재해 있는 구조를 강조했다. 그는 이미 입체적인 양감과 건축적인 선으로 작품을 구성하고 있었으며, 그의 붓놀림은 인상파와는 달리 색점들을 흩뿌려놓지 않고 색의 조화를 이루며 서로를 보완해주었다. 이 시기의 가장 유명한 그림인 〈목맨 사람의 집 The Suicide's House〉(1872~73)은 이러한 특징들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1874년 인상파 화가들의 첫 전람회가 열리자 세잔은 파리로 돌아갔다. 인상파의 첫 전람회와 1877년의 3번째 전람회에서 세잔이 전시한 그림들은 그 전람회에 전시된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혹평을 받았지만, 그는 주기적으로 프로방스에 가서 그곳의 햇빛을 쬐면서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1876년에는 에스타크에 있다가 1878년에는 엑상프로방스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아버지에게 가혹한 모욕을 받으며 지내야 했다. 아직 그의 그림을 사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재정 지원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무렵 유일하게 그를 후원한 사람은 1877년 그가 초상화를 그려준 미술품 감정가인 빅토르 쇼케였다.
인상파의 2번째 전람회가 끝난 뒤 세잔은 인상파와 공공연히 절연했으나, 그의 표현대로 "겸손하고 위대한" 피사로와 "우리들 가운데 가장 대단한 화가"인 모네 및 그가 역시 찬사를 보낸 르누아르와는 계속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작품들에 대한 대중의 반응에 낙담해 파리와 엑상프로방스에서 더욱더 고립된 채로 지냈다. 더구나 그의 반사회적인 외곬정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졸라의 '통속적인' 글에 실망했을 뿐 아니라 신경증적인 불신과 질투로 말미암아 에밀 졸라와의 오랜 우정에 금이 가고 말았다.

성숙한 양식의 발전(1878~90)
1870년대 후반부터 1890년대초까지 계속된 이 고립 기간에 세잔은 성숙한 양식을 발전시켰다. 〈에스타크 L'Estaque〉(1888경, 파리 루브르 박물관)는 전형적인 세잔 양식을 대표하는 첫번째 걸작일 것이다. 웅장하고 고요한 수평선들로 이루어진 이 그림에서 고르게 깎아지른 듯한 붓놀림은 깨끗하고 선명한 효과를 자아내며 깊고 푸른 바다는 널리 펼쳐져 있다. 원숙기의 다른 모든 풍경화와 마찬가지로, 이 그림에도 깊은 공간과 평면적인 구도를 동시에 표현한, 전혀 새롭고 흥미 있는 특징이 나타나 있다. 세잔은 부피와 깊이를 묘사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방법은 인상파 화가들이 형태를 나타내는 데 사용한 방법으로,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오직 색채를 통해서 원근감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 그의 지성과 눈은 어떤 물체를 볼 때 그것의 구성요소들을 분석하기 위하여 산만하게 덧붙여진 것들을 벗겨낼 수 있었다. 그는 외양의 희미한 베일에 가려져 있는 단순한 형태들의 좀더 본질적인 실체를 재발견하려고 했는데, 그것은 지중해 문화의 플라톤적인 사용에 가까웠다. 그는 자주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다. "자연의 모든 것은 구(球)와 원추 및 원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이 단순한 도형들로 그림 그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동시에 그의 그림은 깊이가 없이 완전히 평면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어른거리는 색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시기에 그린 그밖의 주요풍경화로는 가르단의 풍경을 그린 〈가르단의 방앗간 The Mills of Gardanne〉(1886, 펜실베이니아 메리온 반스 재단 컬렉션)과 엑상프로방스 근처의 생트빅투아르 산을 신화적인 느낌이 들게 그린 〈큰 소나무들이 있는 생트빅투아르 산〉(1887 런던 국립미술관, 1885~87 워싱턴 D. C.필립스 컬렉션)과 같은 일련의 대작들이 있다.
세잔은 그뒤 초상화를 그리는 데 본질적으로 그와 똑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가장 유명한 초상화로는 워싱턴 국립미술관에 있는 그의 아들의 초상화(1885)와 〈노란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세잔 부인〉(1890~94)· 〈커피포트를 들고 있는 여인〉(1890~94)· 〈카드놀이하는 사람들〉(1890~92) 등이 있다. 세잔은 이 마지막 그림과 같은 주제를 5점이나 그렸다. 남자 인물들의 묵직함이 차분하게 잘 표현되어 있는 이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세잔의 초상화에서 모델의 개별적 특성을 암시하려는 시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대체로 배경도 주제와 마찬가지로 주의깊게 다루고 있으며, 그림 전체와 일치시키기 위하여 종종 얼굴의 색을 심하게 왜곡시키기도 한다. 그는 또한 200점이 넘게 그린 뛰어난 정물화들에서도 그의 표현 원칙을 적용했다. 그는 정물화를 마치 건축의 도면처럼 구성했으며 강렬한 색채와 단순한 형태를 사용하여 가장 평범한 물체들에 의미와 힘을 부여했다.
세잔의 미술은 그를 둘러싼 환경에서 받은 강렬한 느낌으로 가득 차 있을 뿐 아니라 매우 지적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표현방법을 의식적으로 연구한 결과였다. 그는 많은 다른 화가들을 높이 평가했지만 그들의 목표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낭만파 화가들과 과거의 대가들처럼 사건을 서술적으로 묘사하는 화가들이나, 인상파 화가들처럼 아무리 완전하다 할지라도 자연을 그저 묘사할 뿐인 화가들은 그가 볼 때 그 자신의 미술만이 가지고 있는 목적의 순수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나타내고자 한 구조에 대한 개념이 상상이 아닌 실재와 관련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 그는 엄격한 의미에서의 추상화가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조르주 브라크, 파블로 피카소, 후안 그리스 등의 입체파 화가들은 그에게서 중요한 영감을 얻었다. 1886년 아버지가 죽은 뒤 세잔은 재정적으로 독립할 수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죽기 6개월 전에 결혼한 마리 오르탕스와 1888년 파리에서 1년을 보낸 뒤 아내와 아들은 파리에서 살게 하고 자신은 대부분 엑스에서 살았다. 1895년 미술상인인 앙브루아즈 볼라르가 세잔의 첫 개인전(100점 이상의 작품 전시)에서 젊은 미술가들과 일부 미술애호가들은 그의 그림에 열광하기 시작했지만 일반대중은 여전히 냉담했다.

말년
세잔의 미술은 그 깊이와 농축되어 있으면서도 풍부한 색채, 구성의 기교 등에서 더욱 발전해갔다. 그는 새로운 비전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1890~1905년에는 10점의 〈생트빅투아르 산〉 연작과 3점의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 및 〈수욕도 Bathers〉 연작 등 뛰어난 걸작들이 차례로 그려졌는데, 세잔은 특히 〈수욕도〉에서 인체 누드의 고전적 전통으로 돌아가 풍경 속에서 조각적 효과를 나타내려 했으며, 완전히 작업에만 전념했다. 그는 그림을 천천히 그렸으므로 그림을 그리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세잔은 언제나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는 데 극도로 어려움을 느꼈는데, 1897년 어머니가 죽2자 크게 낙담한 나머지 점차 아내와 젊은시절의 친구들마저도 멀리했다. 19세기가 끝날 무렵 그의 명성은 이미 널리 퍼졌지만 어떤 사람도 그를 거의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마치 전설적인 인물처럼 되었다. 그는 많은 미술가들이 참가한 1899년의 '앵데팡당전'과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작품을 전시했으며, 마침내 여러 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인 카유보트 컬렉션은 파리의 뤽상부르 미술관에서 세잔의 작품 2점으로 출발했다. 1900년에 베를린의 국립미술관은 일찍이 세잔의 풍경화 1점을 구입했다. 젊은 미술가들은 그를 존경했으며, 젊은 상징파 화가인 모리스 드니는 1901년에 세잔의 정물화를 보면서 감탄하고 있는 미술가들을 주제로 한 〈세잔에게 바치는 경의 Homage à Cézanne〉를 그렸다.
말년에 세잔은 사람들과 떨어져 깊은 명상에 잠긴 결과 가장 위대한 예술가만이 생전에 도달할 수 있는 지고한 감정에 이르렀다. 그는 "풍경은 나의 마음 속에서 인간적인 것이 되고, 생각하며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 나는 나의 그림과 일체가 된다.……우리는 무지개빛의 혼돈 속에서 하나가 된다"고 말했다. 프로방스 지방의 변하지 않는 겉모습 속에서 그는 지질학적인 힘이 바위마다 내재되어 있다는 것과 세찬 수액(樹液)이 나무 안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염세주의에 빠진 병들고 늙은 세잔은 자신의 작업실에 틀어박혀 가벼운 붓놀림 몇 번만으로 생트빅투아르 산을 주제로 한 마지막 그림들(1898~1902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 미술관, 1904 필라델피아 미술관)과 샤토누아를 주제로 한 풍경화들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대상을 구조적으로 관찰하여 풍경과 거대한 누드들을 성공적으로 결합한 뛰어난 연작 〈수욕도〉 가운데 마지막 작품(1900~05,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20세기의 주요한 화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피카소는 이 작품을 본떠서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렸다. 세잔은 오랫동안 당뇨병에 시달려 병이 더욱 악화된 데다 1906년 10월에 야외에서 작업하다가 걸린 심한 독감으로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그로부터 며칠 뒤에 죽었고 엑상프로방스에 묻혔다. 그 다음해에 그의 작품들을 회고하는 대규모 전람회가 파리의 가을 살롱전(56점 전시)에서 열려 많은 찬사를 받았다.

2018.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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