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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강화도 유적지가 언제 세워줬는지 알려주세요 정말 급해용 빨리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비공개 조회수 1,124 작성일2018.04.01
강화도에 유적지가 언제 세워줬는지 알려주세요. 예를 들면 숙종11년, 세종13년 이렇게용 될 수 있으면 무슨시대인지도 일려주세요 제가 역사는 알긴 알지만 잘 모르거든요. 부탁드립니다.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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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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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의 유적지 40곳을 알려드려요.


(강화도의 유적지)

 

1.강화 삼랑성

 

종 목 사적 제130호

지 정 일 1964.06.10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1

시 대 삼국시대

 

 정족산성이라고도 하며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어 삼랑성이라 부른다.

 

이 성이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려가 1259년 삼랑성 안에 궁궐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전에 이미 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곽이 쌓여져 있는 모습을 보면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경주의 명활산성처럼 삼국시대 성의 구조를 찾을 수 있으므로,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성으로 추측된다.

 

고려 때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영조 15년(1739)에 성을 다시 쌓으면서 남문에 문루를 만들고 ‘종해루’라고 하였다. 조선 현종 1년(1660) 마니산의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성 안에 있는 정족산사고로 옮기고,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을 함께 지었다. 그러나 지금은 둘 다 없어지고 전등사만 남아있다.

 

이곳은 고종 3년(1866)의 병인양요 때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을 해오던 160여 명의 프랑스군을 무찌른 곳으로도 유명하다.

 

 

2.강화산성


종 목  사적  제132호 
지 정 일 1964.06.10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3번지 일원 
시 대 고려시대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왕궁과 성·관아 시설은 1234년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지었다.


성은 흙으로 쌓았고,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으며,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해안을 따라 쌓았다. 이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자, 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면서 몽골과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성을 모두 헐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여 다시 지었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당하였고, 숙종 3년(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 지었다.


남문인 안파루·북문인 진송루·서문인 첨화루와 동문인 망한루가 남아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 그리고 수문이 2개 남아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북쪽 산자락은 잘 보존되어 있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신미양요와 일본 침략에 의한 강화조약을 체결한 수많은 외세침략의 역사적인 현장이다.

  

 

3.강화 고려궁지

 

종 목 사적 제133호

지 정 일 1964.06.10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2 (관청리 743-1)

시 대 고려시대 (고종 21년)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1234년에 세운 궁궐과 관아건물이다.

 

정궁 이외에도 행궁·이궁·가궐을 비롯하여 많은 궁궐이 있었다. 정문은 승평문이었고 양쪽에 삼층루의 문이 두 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이 있었다. 39년동안 사용되었고 1270년 강화조약이 맺어져 다시 수도를 옮기면서 허물어졌다. 조선시대에도 전쟁이 일어나면 강화도를 피난지로 정했다. 조선 인조 9년에 옛 고려 궁터에 행궁을 지었으나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함락되었다. 그후 다시 강화유수부의 건물을 지었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거의 불타 없어져 지금은 동헌과 이방청만이 남아있다.

 

이 곳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 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곳이다.

 

 

4.강화 참성단

 

종 목 사적 제136호

지 정 일 1964.07.11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화도면 흥왕리 산42-1

시 대  선사시대

 

 마니산에 있으며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이라고 전한다. 고려 원종 11년(1270)에 보수했으며, 조선 인조 17년(1639)과 숙종 26년(1700)에도 고쳐 쌓았다. 여러 번 고쳐서 쌓았기 때문에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제단은 자연석으로 둥글게 쌓은 하단과 네모반듯하게 쌓은 상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둥근 하단은 하늘, 네모난 상단은 땅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경주의 첨성대와 비슷하다.

 

고려와 조선왕조는 때때로 이곳에서 도교식 제사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단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참성단을 단군시대의 종교와 관련시켜 이해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일제시대에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가 생기고 난 이후에는 민족의 성지로서 주목받게 되었다. 지금도 해마다 개천절에 제천행사가 거행되며, 전국체전의 성화는 이곳에서 태양열을 이용하여 붙이고 있다.

 

참성단이 과연 단군의 제천단인지는 단정할 수 없으나, 강화도에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있고, 단군과 연관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상고시대에 무시못할 정치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5.강화 부근리 지석묘


종 목  사적  제137호 
지 정 일 1964.07.11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317 
시 대 청동시대


지석묘란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만든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하는데,지상에 책상처럼 세운 탁자식(북방식)과 큰 돌을 조그만 받침돌로 고이거나 판석만을 놓은 바둑판식(남방식)이 있다.


강화군 하점면 부근에는 40여 기의 고인돌이 있는데, 이 중 부근리 고인돌이라 부르는 규모가 큰 탁자식 고인돌이 1964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전체높이는 2.6m이며, 덮개돌은 길이 6.5m, 너비 5.2m, 두께 1.2m의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이 고인돌에 대한 발굴조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인근 삼거리에 있는 고인돌에서 무문토기조각과 간돌검(마제석검), 돌가락바퀴(방추차)를 비롯한 유물들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삼거리 유적과 비슷한 유물들이 들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2000년 12월 고창, 화순 고인돌 유적과 함께 강화 고인돌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6.강화 초지진

 

종 목 사적 제225호  

지 정 일 1971.12.28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길상면 해안동로 58 (초지리 624)

시 대 조선시대 (효종 7년)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1656)에 구축한 요새이다.

 

안산의 초지량에 수군의 만호영이 있었던 것에서 처음 비롯되었는데 1666년에 초지량영을 이곳으로 옮긴 뒤 ‘진’으로 승격되었다. 1870년대에 미국과 일본이 침략하였을 때 이들과 맞서 싸운 곳으로 1871년에 미국 해병이 초지진에 침략해 왔을 때 전력의 열세로 패하여 점령당하였다. 이 때 군기고, 화약창고 등의 군사시설물이 모두 파괴되었다.

 

일본이 조선을 힘으로 개항시키기 위해서 파견했던 운양호의 침공은 고종 13년(1876)의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으로 이어져 일본침략의 문호가 개방되었다. 그 뒤 허물어져 돈대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으나 1973년 초지돈을 복원하였다.

 

민족시련의 역사적 현장이었던 이곳은 호국정신의 교육장이 되도록 성곽을 보수하고 당시의 대포를 진열하였다.

 

 

7.강화 덕진진

 

종 목 사적 제226호

지 정 일 1971.12.28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진로 34 (덕성리 846)

시 대 조선시대 (숙종 5년)

 

고려시대에 강화해협을 지키던 외성의 요충지이다. 병자호란 뒤 강화도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내성·외성·돈대·진보 등의 12진보를 만들었는데 그 중의 하나이다.

 

효종 7년(1666) 국방력 강화를 위해 해군주둔지(수영)에 속해 있던 덕진진을 덕포로 옮겼으며, 숙종 5년(1679)에 용두돈대와 덕진돈대를 거느리고 덕진포대와 남장포대를 관할함으로써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로 알려져 있었고, 강화 12진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을 지키고 있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의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을 벌인 곳이다. 그러나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군대에 의하여 점령당하였다. 이 때 건물에 몸을 숨겨서 적과 싸울수 있도록 쌓았던 낮은 담은 모두 파괴되었다.

 

1976년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남장포대도 고쳐 쌓았으며, 앞면 3칸·옆면 2칸의 문의 누각도 다시 세웠고, 당시의 대포를 복원하여 설치하였다.

 

 

8.강화 광성보

 

종 목 사적 제227호  

지 정 일 1971.12.28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불은면 해안동로466번길 27  (덕성리 833)

시 대 조선시대 (효종 9년)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외성을 쌓았는데, 이 성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성으로 바다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졌다.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은 후 효종 9년(1658)에 광성보가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숙종 때 일부를 돌로 고쳐서 쌓았으며,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 돈대가 만들어 졌다.

 

영조 21년(1745)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었는데 ‘안해루’라 하였다. 이곳은 1871년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용감히 싸우다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으며 문의 누각과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파괴되었다.

 

1976년 다시 복원하였으며, 광성보 경내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와 신미순의총 및 전적지를 수리하고 세운 강화전적지, 수리한 것을 기록한 비석 등이 건립되었다.

 

9.강화 갑곶돈

 

종 목 사적 제306호

지 정 일 1984.08.13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 1020외

시 대 조선시대 (숙종 5년)

 

 돈대는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이다.

 

갑곶돈은 고려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다.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甲比古次)라 부른데서 갑곶이라 이름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고려 때 몽고군이 이곳을 건너려고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 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전설도 있다.

 

조선 1644년 강화의 요충지마다 군대 주둔지를 설치할 때,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로서 1679년에 완성되었다. 고종 3년(1866) 9월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6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0월에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은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게 패하여 달아났다.

 

1977년에 옛터에 새로이 옛모습을 되살려 보수, 복원이 이루어졌다. 지금 돈대 안에 전시된 대포는 조선시대 것으로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것이다.

 

10.강화외성

 

종 목 사적 제452호

지 정 일 2003.10.25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강화읍, 선원면, 불은면, 길상면 일원(강화도)

시 대 고려시대

 

 강화외성은 고려 23대 고종이 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뒤 고종 20년(1233) 해안 방어를 위해 적북돈대로부터 초지진까지 23km에 걸쳐 쌓은 성이다.

 

강화성은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읍성이다. 외성은 동쪽 해안을 따라 쌓았는데 몽고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고종 24년(1237)에 강화외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도 비상시에 국왕의 피난처인 도성의 외성으로 광해군 10년(1618)에 보수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숙종때 병자호란기(1636)에 허물어진 외성을 돌을 이용하여 다시 쌓았고 돈대(墩臺)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영조때 강화유수 김시혁이 비가 오면 성의 흙이 흘러내려 나라에 건의하여 영조 19년(1743)에서 이듬해에 걸쳐 벽돌을 이용하여 다시 쌓았다고 한다.

 

2001년 동양고고학연구소에서 실시한 오두돈 주변의 전축성 구간에 대한 지표조사 결과에 의하면, 뻘층을 기초로 머리돌을 올리고 그 위에 대형석재로 석벽의 중심을 삼고 그 위에 머리돌을 올리고 다시 전돌을 여러 단 쌓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성은 높이 20척, 폭 5척이며, 6개의 문루(조해루·복파루·진해루·참경루·공조루·안해루)와 암문 6개소, 수문 17개소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강화외성은 고려 후기∼17세기 후반 도성의 구조와 축성기법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특히, 이 성은 벽돌로 개축한 전축성이 오두돈 주변(남측)에 남아 있어 수원 화성(사적 제3호)과 더불어 전축성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11.용흥궁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 
지 정 일 1995.03.01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강화읍 동문안길21번길 16-1 (관청리 44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 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기세가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이름을 붙였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용흥궁은 청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어져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 든다.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 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12.충렬사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1호 
지 정 일 1995.03.02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선원면 충렬사로 232 (선행리 371) 
시 대 조선시대 (인조 19년)

 
선원 김상용과 공조판서 이상길 외 26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사당이다. 김상용은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인천이 청나라 군사에게 함락되자 순절한 충신이다.


인조 19년(1641)에 지어 현충사라 불렀으나, 효종 9년(1658)에 나라에서 충렬사라는 이름을 다시 받았다. 1977년 보수하여 현재에 이른다.


교육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는 없어지고, 사당과 책을 보관하는 전사청· 출입문인 외삼문 등이 남아있다. 

 

 

13. 연미정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 
지 정 일 1995.03.02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242 
시 대 고려시대


자연경관을 보며 풍류를 즐기거나 학문을 공부하던 정자이다. 한강과 임진강의 합해진 물줄기가 하나는 서해로, 또 하나는 강화해협으로 흐르는데, 이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고 해서 정자 이름을 연미정이라 지었다고 한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나 고려 고종(재위 1213∼1259)이 사립교육기관인 구재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공부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 중종 5년(1510) 삼포왜란 때 큰 공을 세운 황형에게 이 정자를 주었다고 한다.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곳이기도 하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연미정은 강화십경의 하나로서 뛰어난 경치를 이루고 있으나, 현재 민간인통제구역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14.강화유수부 동헌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5호  
지 정 일 1995.03.01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2 (관청리 743-1) 
시 대 조선시대 (영조 45년)


조선시대 관아의 하나로 강화지방의 중심업무를 보던 동헌이다.


영조 45년(1769)에 유수 황경원이 현윤관이라 이름을 붙였으며, 여러 차례 보수해서 본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앞면 8칸·옆면 3칸의 규모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명위헌’과 ‘이관당’이라는 현판은 당시의 명필이자 학자인 백하 윤순(1680∼1714)이 썼다.

 

 

15.교동향교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8호 
지 정 일 1995.03.01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교동면 교동남로 229-49 (읍내리 148) 
시 대 조선시대 (영조 17년)

 
향교는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지방 백성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서 국가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고려 인종 5년(1127)에 화개산 북쪽에 지었으나, 조선 영조 17년(1741)에 조호신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1966년에 수리하였다.


고려 충렬왕 12년(1286)에 안향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자상을 들여와 모셨다고 전하며, 이후 서울의 각 읍에 조상이나 성현의 위패를 모시는 문묘를 설치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교육공간인 명륜당과 동재·서재가 있고, 제사공간을 형성하는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다. 이외에도 내삼문·외삼문과 제기고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노비·책 등을 지급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의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다.

 

 

16.택지돈대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3호

지 정 일 1995.11.14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 954

시 대  조선시대 (숙종 5년)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두는 초소로, 밖은 성곽으로 높게 쌓고 그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둔다.

 

강화 53돈대 중의 하나인 이 돈대는 화강암을 이용해 정사각모양으로 쌓아올렸으며, 대포를 올려놓는 받침대를 4개 설치하였는데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 있다. 성 위로 낮게 쌓은 담의 일부가 유일하게 남아있어, 1998년에 완전 복원해 놓았다. 인근 마을에는 이 돈대를 훼손하면 재앙이 온다는 전설이 내려오는데, 이 때문에 돈대를 제단처럼 여기고 보호하여 지금까지 그 본모습이 잘 남아있다.

 

조선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것으로, 어영군 2천명과 경기 ·충청 ·전라 3도의 승군 8천명이 동원되었다.

   

 

17.삼암돈대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5호

지 정 일 1999.03.29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산223-1

시 대  조선시대 (숙종 5년)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두는 초소이다. 대개 평지가 높은 곳에 마련해두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둔다.

 

강화도 외포리 마을에 축조된 이 돈대는 다른 것과는 달리 둥글게 쌓여 있으며, 대포를 올려놓는 받침대가 4곳 설치되었다. 성위로 낮게 쌓은 담이 55개 있었다 하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아있다.

 

조선 숙종 5년(1679) 강화유수 윤이제가 병조판서 김석주의 명을 받아 쌓은 것으로, 경상도 군위어영군 8천여명이 동원되었다 한다.

 

 

18.분오리돈대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6호

지 정 일 1999.03.29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산185-1

시 대  조선시대 (숙종 5년)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두는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둔다.

 

강화도의 가장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이 돈대는 조망할 수 있는 시야가 매우 넓으며, 자연의 지형을 이용하여 쌓았기 때문에 평면이 반달모양을 이루고 있다. 4곳에 문을 설치한 외곽 포대로, 관아에서 돈장을 따로 두어 관리하게 할 정도로 그 중요성을 띠었다 한다.

 

조선 숙종 5년(1679)에 축조한 것으로, 당시의 강화유수 윤이제가 병조판서 김석주의 명을 받아 경상도 군위어영군 8천명이 동원하여 쌓았다.

 

 

19.강화 내가 오상리 고인돌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6호 
지 정 일 1995.03.01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내가면 오상리 산125 
시 대 청동시대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지석묘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지상에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인천시 강화군 내가면에 있는 이 지석묘는 탁자식으로 돌칼·돌화살촉·민무늬토기 등이 출토되어 당시의 생활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20.봉천대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8호  
지 정 일 1995.03.01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하점면 신봉리 산63 
시 대 고려시대


봉천산 꼭대기에 설치하여 하늘에 나라의 태평과 백성들의 평안을 빌었던 곳으로, 벽돌을 쌓아올려 위로 갈수록 좁아드는 사다리꼴 형식을 하고 있다.


『강도지』에 의하면, 고려 때에는 나라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의식을 거행하였던 곳이었으나, 조선시대 중기에 와서는 봉화를 켜두는 봉화대로 사용하였다 한다.

 

 

21.장곶돈대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9호 
지 정 일 1995.03.01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화도면 장화리 113외 2필지 
시 대 조선시대 (숙종 5년)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영토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둔다. 이 돈대는 자연적인 지형을 이용하여 그 위에 작은 요새를 만든 것이다.


장곶돈대는 40∼120㎝의 네모난 돌을 3m 높이의 둥근 형태로 쌓은 후, 해안을 향해 4개의 포좌(포를 놓는 자리)를 설치해 놓았다. 포좌는 지름이 45㎝, 안의 너비가 18㎝, 길이가 24㎝의 크기이다. 그 위로는 낮은 담을 설치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 숙종 5년(1679)에 건립한 것으로, 미곶돈대, 북일곶돈대, 검암돈대과 함께 장곶보에 소속되어 있었다.

 

 

22. 계룡돈대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2호 
지 정 일 1995.03.01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내가면 황청리 282 
시 대 조선시대 (숙종 5년)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영토내 접경지역이나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한 초소로,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두는 시설물이다.


망월평야 남서방향의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는 이 돈대는 바깥벽 측면에 기록이 남아 있으며, 망월돈대와 함께 관아에서 관리하던 돈대이다.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해 조선 숙종 5년(1679)에 설치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처럼 돈대의 제작년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보기드문 예이다. 

 

 

23.교동읍성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3호 
지 정 일 1995.03.01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577외 8필지 
시 대 조선시대 (인조 7년)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의 교동읍성은 한 도읍 전체를 둘러싸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았으며, 군데군데 문을 내어 바깥과 통하도록 만들었다.


성의 둘레는 약 430m, 높이는 약 6m로, 동·남·북쪽 3곳에 성문을 두었고, 각 문에는 망을 보기 위해 문루를 세웠는데, 동문은 통삼루, 남문은 유량루, 북문은 공북루라고 하였다.


조선 인조 7년(1629)에 처음 쌓았으며, 영조 29년(1753) 고쳐 쌓았고, 고종 21년(1884)에는 성문을 다시 세웠다고 전한다. 고종 27년(1890) 동문과 북문을 다시 세웠다고 하나, 현재는 3문이 모두 남아있지 않다. 동문과 북문은 언제 없어졌는지 확실하지 않으며, 남문인 유량루는 1921년 폭풍으로 무너져 반원 형태의 홍예문이 남아 있다.

 

 

24.강화 대산리 지석묘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1호 
지 정 일 1995.03.01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강화읍 대산리 1189-1 
시 대 청동시대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강화 고려산 동쪽 봉우리인 북산의 해발 약 20m 능선에 있는 이 고인돌은 탁자식이다. 약간의 흙과 자갈로 지면을 높이고 그 위에 받침돌을 세운 뒤 덮개돌을 올렸으나 현재는 무너져 내려 앉았다.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3.68m, 너비 2.6m이다.
 

 

25.강화 부근리 점골 고인돌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2호 
지 정 일 1995.03.01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743-6외 1필지 
시 대 청동시대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지석묘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강화군 하점면 고려산 북쪽에서 흘러내린 능선 끝자락 해발 약 15m 지점에 있는 이 고인돌은 탁자식으로, 덮개돌 무게에 의해 약간 기울어진 상태이다.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4.28m, 너비 3.7m이다.

 

26.망양돈대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7호  
지 정 일 1999.03.29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680 
시 대 조선시대 (숙종 5년)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둔다.


망양돈대는 남쪽으로 건평돈대까지 3,200m, 서쪽의 삼암돈대까지 1,300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포보의 관리하에 있었다. 높이 3m, 폭 2.5m, 둘레 120m의 원형돈대로 포좌(대포를 설치하는 곳) 4곳, 치첩 40개소가 설치되어 있다.


조선 숙종 5년(1679)에 쌓아놓은 것으로, 경상도군위어영군사 4,300여명과 함경도·황해도·강원도 승군 등 모두 8,000여 명이 참여하였다. 

 

 

27.건평돈대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8호 
지 정 일 1999.03.29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산39 
시 대 조선시대 (숙종 5년)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영토내 접경지역 이나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을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두는 시설물이다.


이 돈대는 정포보 소속의 돈대로서, 6조(六朝)에 올리는 조운의 감시소 역할과 국토방위의 임무를 겸하였다고 한다.


조선 숙종 5년(1679) 윤이제가 강화유수로 있을 때, 병조판서 김석주의 명을 받아 이 돈대를 설치하였다고 전한다.

 

 

28.굴암돈대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9호 
지 정 일 1999.03.29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487번지외 1필지 
시 대 조선시대 (숙종 5년)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영토 내 접경지역 이나,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을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두는 시설물이다.


정포보 소속의 이 돈대는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포를 설치해 두기 위한 포좌를 4곳에 설치하였다.


조선 숙종 5년(1679) 윤이제가 강화유수로 재임해 있을 때, 병조판서 김석주의 명을 받아 쌓아놓은 것이라고 전한다. 

 

 

29. 미루지돈대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0호 
지 정 일 1999.03.29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화도면 여차리 170-2 
시 대 조선시대 (숙종 5년)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한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두는 시설물이다.


이 돈대는 높이 2.2m, 둘레 128m의 규모로, 성곽은 돌을 이용해 직사각형으로 쌓고, 해안쪽을 향해 4개소의 포좌(포놓는 자리)를 설치해 놓았다. 성곽 위에는 몸을 숨길 수 있도록 낮게 쌓았던 담의 흔적만 남아 있다. 출입구는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을 이루고 있어 다른 돈대와는 다른 독특한 모습이다.


조선 숙종 5년(1679) 윤이제가 강화유수로 있을 때 설치한 것으로, 장곶보의 관리하에 있었다 한다.

 

 

30.북일곶돈대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1호 
지 정 일 1999.03.29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화도면 장화리 산361 
시 대 조선시대 (숙종 5년)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영토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한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두는 시설물이다.


장곶보의 관리하에 있었던 이 돈대는 높이 2.5m, 둘레 120m 의 규모를 지닌 직사각형으로, 포좌(포를 놓는 자리) 4곳과, 치첩 32개소를 두었다. 성곽 위에는 몸을 숨길수 있도록 낮게 쌓았던 담의 흔적만 남아 있다.


조선 숙종 5년(1679) 윤이제가 강화유수로 있을 때 설치한 것으로, 함경도·황해도·강원도의 승군 8,000명과 경상도군위어영군사 4,300명이 동원되어 40일만에 지었다고 한다.   

 

 

31.용진진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2호 
지 정 일 1999.03.29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선원면 연리 215외 9필지 
시 대 조선시대 (효종 7년)


진이란 군인이 머물러 있던 무장 성곽도시를 이른다. 용진진은 조선시대 각 진에 배치되었던 병마만호의 관리하에 있었던 곳으로, 101명의 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한다.


포좌(포를 놓는 자리) 4개소, 총좌(총을 놓는 자리) 26개소의 시설물이 있었으나 석축 대부분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을 이루고 있는 출입문 2곳만이 남아 있었는데, 1999년 그 위로 누각을 새로이 복원해 놓았다.


조선 효종 7년(1656)에 축조되었으며, 가리산돈대·좌강돈대·용당돈대 등 3개의 돈대를 관리하였다고 한다.

  

 

32.부근리 고인돌군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4호 
지 정 일 1999.04.26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317외 79필지 
시 대 청동시대


부근리 고인돌군에는 해발 50m 내외의 낮은 구릉과 평지에 모두 16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평지에는 사적 제 137호인 강화지석묘와 북방식 고인돌의 지석으로 추저되는 석재 하나가 세워져 있다. 여기서 북동쪽으로 약 300m 떨어진 솔밭에 개석식 고인돌 3기가 축조되어 있으며, 사적 제 137호의 동쪽 낮은 구릉에는 북방식 4기와 개석식 고인돌 4기가 분포하고 있다.

 

 

33.삼거리 고인돌군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5호 
지 정 일 1999.04.26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하점면 삼거리 산188외 15필지 
시 대 청동시대


삼거리 진촌마을 앞산인 고려산 서쪽 능선 상에 북방식 고인돌무덤 9기가 일렬로 분포되어 있다.


어떤 고인돌무덤은 덮개돌 위에 작은 구멍이 여러 개 패여 있는데 이러한 모양을 남한에서는 성혈이라고 하고 북한에서는 별자리와 연관 짓고 있다.


작은 구멍이 고인돌무덤의 크기는 굄돌을 높이 2.80m, 너비 0.90m, 두께 0.38m이다. 고인돌무덤 가까이에는 돌을 떼낸 흔적이 남아 있는 채석장이 있다.
 

 

34.고천리 고인돌군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6호  
지 정 일 1999.04.26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내가면 고천리 산 96외 8필지 
시 대 청동시대


고려산(해발 436m)의 서쪽 능선을 따라 해발 350∼250m 지점에 18기의 고인돌무덤이 흩어져 있다.


우리나라 고인돌무덤이 분포하는 평균 고도보다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대부분의 고인돌모덤들은 무너져 원형이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그 중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북방식 고인돌무덤은 덮개돌의 크기가 가로 3.35m, 세로 2.47m, 두께 0.65m이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암석에는 고인돌무덤을 만들기 위하여 돌을 떼낸 흔적이 남아 있다.
 

 

35.오상리 고인돌군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7호 
지 정 일 1999.04.26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내가면 오상리 산124번지외 15필지 
시 대 청동시대


오상리 고인돌군에서는 모두 12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데, 2000년 실시된 발굴조사에 의하면 모두 북방식 고인돌이라 한다.


고인돌의 묘실구조는 'ㅍ'자 형태이고, 크기는 대·중·소형으로 구분된다. 무문토기와 대롱옥, 반달돌칼, 화살촉 등 매우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36.교산리 고인돌군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8호 
지 정 일 1999.04.26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양사면 교산리 산108외 33필지 
시 대 청동시대


별립산(해발 340m) 북쪽 구릉에 11기의 고인돌무덤이 분포하고 있다.


고인돌무덤은 굄돌과 덮개돌의 일부만 훼손되었을 뿐 대체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굄돌과 마감돌 및 덮개돌을 갖춘 북방식 고인돌무덤이 있으며 간혹 크기가 3∼4m나 되는 덮개돌을 갖춘 남방식 계통의 고인돌무덤도 있는데 이들은 굄돌 없이 땅위에 덮개돌만 놓은 이른바 개석식 고인돌무덤이다.

 

37.선수돈대

 

종 목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0호 
지 정 일 1995.03.01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화도면 내리 1831외 1필지 
시 대 조선시대 (숙종 5년)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보통 높은 평지에 쌓아두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둔다. 특히 강화도에 있는 돈대들은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이에 놀란 조정에서 해안 경비를 튼튼히 하기 곳곳에 쌓아두도록 한 것이다.


이 돈대는 당시 병조판서를 지내던 김석주의 명을 받아 쌓은 49돈대 중 하나로, ‘송강돈대’라고도 불리운다. 일부는 둥글게, 일부는 각이 지게 쌓아 위에서 내려다 볼 때 반달모양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남쪽으로는 검암돈대가 있고, 북쪽으로는 굴암돈대가 있는데, 이 돈대와 굴암돈대는 관아에서 직접 관할하였다.


조선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것으로, 강화유수 윤이제가 어영군을 동원하여 쌓았다.

  

 

38.망월돈대


종 목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1호 
지 정 일 1995.03.01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하점면 망월리 2107외 1필지 
시 대 조선시대 (숙종 5년)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보통 높은 평지에 쌓아두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둔다. 특히 강화도에 있는 돈대들은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이에 놀란 조정에서 해안 경비를 튼튼히 하기 위해 곳곳에 쌓아두도록 한 것이다.


망월리에 있는 이 돈대는 40∼120㎝의 돌을 직사각형으로 쌓아 올린 것으로, 성곽 위로는 흙벽돌로 낮게 쌓은 담장이 둘러져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관리는 관아에서 따로 돈장을 두어 관할하도록 하였다. 조선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것으로, 병조판서 김석주의 명으로 유수 민진원이 어영군을 동원하여 쌓아올렸다.


돈대와 함께 있는 이 장성은 고려 고종이 이곳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면서 해안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해 쌓아 올린 것으로, 누각을 설치한 출입문이 6곳, 물길이 드나드는 문이 7곳 마련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광해군 10년(1618) 안찰사 심돈이 수리를 하였고, 영조 21년(1745) 강화유수 김시환이 다시 고쳐지었다. ‘만리장성’으로도 불리웠으며, 지금은 홍수를 막거나 물을 저장해 두는 제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39.화도돈대


종 목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7호 
지 정 일 1999.03.29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선원면 연리 54 
시 대 조선시대 (숙종 5년)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하고 안은 낮게하여 포를 설치해둔다.


이 돈대는 강화유수를 지내던 윤이제가 해안지역의 방어를 튼튼히 하고자 조선 숙종 5년(1679)에 쌓아놓은 것이다.

 

 

40.무태돈대


종 목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8호 
지 정 일 1999.03.29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화도면 창후리 산151-4외 1필지 
시 대 조선시대 (숙종 5년)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보통 높은 평지에 쌓아 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둔다. 특히 강화도에 있는 돈대들은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이에 놀란 조정에서 해안 경비를 튼튼히 하기 곳곳에 쌓아두도록 한 것이다.


창후리 선착장에서 북쪽으로 난 비포장길을 따라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 돈대는 해안을 따라 직사각형으로 길게 쌓았다. 강화유수를 지내던 윤이제가 해안 방어를 튼튼이 하기 위하여 쌓은 여러 돈대들 중 하나로, 대포를 올려놓는 포좌를 해안을 향해 4곳 설치해 두었다.


조선 숙종 5년(1679) 어영군 2천명과 경기·충청·전라 3도 승병 8천명을 동원하여 쌓았다. 

2018.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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