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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세종대왕의 업적 5가지만 알려주세요
danc**** 조회수 3,984 작성일2018.08.10

세종대왕의 업적은 분야별로 5가지 나눠서 알려주실수 있을까요?

간단하게 정리된 내용이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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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s****
지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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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종대왕의 업적


-훈민정음창제-


우선 정음청이라는 것을 설치합니다. 여기에서 바로 지금 우리가 쓰고있는 한글이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훈민정음이 이곳에서 간행되니깐요. 물론 이 한글을 만들기 위하여 많은 반대가 있었으나, 결국 훈민정음을 반포합니다. 이로서 세계가 인정하는 한글이 탄생하게 된 것이지요.


-천문학의 발전-


천문학을 주과하던 곳은 서운관이었다. 서운관에는 조선 초에 이미 천문을 관측하기 위해 두 곳의 간의대가 설치된 바 있었지만 미흡한 점이 많아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431년부터 시작된 대규모 천문의상 제작과 2년 뒤에 이루어진 석축간의대 준공에 의해 본격적인 천문 연구에 돌입할 수 있었다.

석축간의대: 경복궁의 경회루 북쪽에 설치되었으며 높이 6.3미터, 길이 9.1미터, 넓이 6.6제곱미터 규모의 천문관측대 였다. 이 간의대에는 혼천의, 혼상 그리고 규표와 방위지정표인 정방안 등이 설치되었다. 이 간의대와 주변 시설 물들은 중국과 이슬람 양식에다 조선의 전통 양식을 혼합한 것이었는데, 1438년(세종20년) 3월부터 이 간의대에서 서운관 관원들이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혼천의: 천체 관측 기계로, 문헌에는 1432년 6월에 최초로 만들어졌으며 두 달 뒤에 또 하나가 만들어졌다고 기 록되어 있다. 이는 장영실을 중심으로 한 기술 제작진이 정초 등의 고서 연구를 바탕으로 고안한 것이다. 이 혼천의는 천구의와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된 것으로서 일종의 천문시계 기능을 하고 있었다.

-시계의 발명-


해시계: 해시계를 일구라고 한 것은 이것이 모두 해그림자로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 일구들은 모양과 기 능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우리 나라 최초의 공중시계인 혜정교와 종묘 남쪽 거리에 설치됐던 앙부일구는 그 모양이 '솔을 받쳐놓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는 규모가 작은 일종의 휴대용 시계였고 정남일구는 시계바늘 끝이 항상 '남쪽을 가리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릉이다. 장영실 등이 만든 앙부일구는 단순히 해시계를 발명했다는 측면 외에 더 중요한 과학적 사실들이 내포되어 있다. 다른 나라의 해시계가 단순히 시간만을 알 수 있게 해준 데 반해 앙부일구는 바늘의 그림자 끝만 따라가면 시간 과 절기를 동시에 알게 해주는 다기능 시계였다. 또한 앙부일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반구로 된 해시계였다. 앙부 일구가 반구로 된 점에 착안해서 그 제작 과정을 연구해보면 놀라운 사실 하나가 발견되는데, 그것은 당시 사람들 이 해의 움직임 뿐만 아니라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시계: 물시계로는 자격루와 옥루가 있었다. 자동으로 시간을 알리게 하는 자동시보장치가 달린 이 물시계는 일종의 자 명종이다. 1434년 세종의 명을 받아 장영실, 이천,김조 등이 고안한 자격루는 시, 경, 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종, 북, 징을 쳐서 시간을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1437년에는 장영실이 독자적으로 천상시계인 옥루를 발명 해 경복궁 천추전 서쪽에 흠경각을 지어 설치했다. 옥루는 중국 송, 원 시대의 모든 자동시계와, 중국에 전해진 아 라비아 물시계에 관한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한 끝에 고안한 독창적인 것으로서 당시의 중국이나 아라비아의 것보다도 뛰어났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측우기: 측우기는 1441년에 발명되어 조선시대의 관상감과 각 도의 감영 등에서 강우량 측정용으로 쓰인 관측장비로, 현대적인 강우량 계측기 에 해당된다. 이는 갈릴레오의 온도계 발명이나, 토리첼리의 수은기압계 발명보다 200년이나 앞선 세계 최초의 기 상 관측 장비였다. 측우기의 발명으로 조선은 새로운 강우량 측정 제도를 마련할 수 있었고, 이를 농업에 응용하게 되어 농업 기상학에서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룩하였다. 이 측우기의 발명으로 정확한 강우량을 파악할 수 있게 되어 홍수 예방에도 도움이 되었다.

-음악-


모든 음체계의 바탕이 되는 기본율관(음관)을 제정하고, 앙상블에 필요한 미비된 악기들을 새로 만들어내고,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 음악을 기록하는 악보를 처음으로 창안해낸 사실들이 곧 그의 중요한 업적의 내용들이다.


 

-김종서의 6진개척과 이종무의 쓰시마 정벌-


김종서의 6진개척은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들을 쫒아냄으로서 오늘날의 우리나라와 비슷한 영토를 확보해놓습니다. 그리고 최윤덕, 이천에게 시켜 압록강유역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을 설치합니다.(이천은 자세히 보면 안빠지는 곳이 없습니다. 금속활자자를 간행한것도, 측우기를 만든 것도, 압록강을 개척한 것도 모두 이천이 들어가있지요.)


사실 이 북방개척에서는 세종대왕의 가장 악독한 업적이 포함되기도 합니다. 바로 사민정책입니다. 남방에 사는 주민들에게 강제로 북쪽으로 이주시킨 것이지요. 물론 세금혜택이나 정부지원 등 상당한 대가가 있었지만, 실제로 이로 인하여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만약에 다른 임금들이 이러한 업적을 행했다면 두고두고 이걸로 씹어댔을 것이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정책을 펼쳤기에 그 확보해놓은 북쪽땅이 완전히 우리땅으로 편입되게 된 것이죠. 현재는 욕을 먹더라도 미래를 건너다본 세종대왕다운 지혜로운 모습입니다

 

[세종대왕의 생애]


세종대왕은 1397년 4월 10일(양력 5월 15일)경복궁 서쪽 인왕산 기슭 준수방에서 태종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1418년 8월 22세의 나이로, 태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왕조 제 4대 임금이 되셨다.

고려사를 개수시키다.

1420년 3월에는 집현전(지혜의 집)을 설치하고, 학문을 연구하도록 하였으며, 군사제도를 개편하였다.

1423년에는 조선 통보를 주조하게 하였으며, 1429년 정초로 하여금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농업에 관한책 <농사직설>를 편찬하게 하였다.

1432년 왕명으로 윤희, 신색, 맹사성 등이 우리나라 최초의 지리책 <팔도지지리>를 편찬

1433년 '혼천의'를 만들었으며, '향약집성방'을 펴냈다.

1434년에는 박연에게 아악을 정리하게 하였으며, 악기를 개조하였고, 이천, 김돈, 장영실로 하여금 구리로 된 '『갑인자』란 활자를 주조하게 하여, 많은 책이 쏟아져 나왔다.

최초의 공중 해시계 앙부일구(보물 제 845호)를 만들도록 하였으며, 물시계(자격루)를 만들도록 하였다. 자격루는 자동으로 시보를 알려주는 장치가 되어있는 물시계 이며, 장영실, 김조, 이천 등이 제작하였다.

1435년 경복궁 안에 주자소를 옮겼다.

1437년 김종서에 명하여 두만강 방면에 있던 여진족을 토벌하여 6진을 설치하고,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의 땅을 확보하였다.

1441년 '치평요람'을 편찬하게 하였다.

1442년, 이천과 장영실이 측우기를 발명하였다. 비의 양을 재는 기구이며, 세계 최초의 우량계 였다.

1443년 훈민정음(28자)를 창제하였으며, 전제상정소를 두었다.

1445년 <치평요람>완성하였으며, 권제, 안지, 정인지 등이 훈민정음으로 된<용비어천가>를 지었다.

1446년 9월 3일(양력 10월 9일)훈민정음(한글)을 반포하였다.

공문서에 한글을 쓰게 하였다.

1447년 숭례문(남대문)을 개축하였으며,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을 만들었다.

1449년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을 간행하였다.

1450년 2월 17일 영응대군(세종의 여덟째 아들)의 집 별채에서 승하하셨다.

 

[세종대왕의 업적]


한글, 훌륭한 책의 편찬, 과학기가의 연구, 음악의 진흥, 육진개척, 일본과의 외교, 불교의 진흥 등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우리글을 갖게 해준 것은 우리에게 주체 의식을 강하게 심어 주었다는 데서 큰 가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말은 있되 우리 글이 없어 청음청을 두어 한글을 만들게 한 업적과, 측우기, 해시계, 물시계 등등 훌륭한 과학기기를 만들어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하였으며, 김종서 장군에게 명하여 육진을 개척케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이 함경도는 오랑캐의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갑인자 라는 활자를 주조하게 하여 훌륭한 책을 많이 만들어 역사와 학문 연구에 이바지 하였으며, 용비어천가, 고려사, 농사직설, 삼강행실도, 치평요람, 석보상절, 의방유희 등입니다.


이러한 업적 외에도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준 정신의 유산이 무엇보다도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종대왕 업적]


1. 훈민정음(한글) 1446년 9월 3일(양력 10월 9일)반포되었음

2. 최초의 공중 해시계 앙부일구(보물 845호)

3. 측우기 (세계 최초의 우량계)

4. 물시계 (자격루, 옥루 등)

5. 일성정시의(별이 자리를 옮기는데 따라서 밤 시각도 알게 만든 시계)

6. 4군6진 개척,

7. 군사제도 개편,

8. 조선통보 주조

9. 박연에게 아악을 정리하게 하였으며, 악기를 개조하였고, 음악을 발달시켰음

10. 구리로 된 『 갑인자 』라는 활자를 주조하게 하여, 많은 책을 남겼음

11.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농업에 관한책 '농사직설' 편찬

12. 우리 나라 최초의 지리책 '팔도지리지' 편찬

13. 1445년 '치평요람'완성

14. 훈민정음으로 '용비어천가'를 지었음

15.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이 밖에도 수많은 업적을 남겼음.

2018.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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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훈민정음을 창제해 글을 모르는 백성들의 지식을
일깨움.
2.장영실을 중용해 조선의 과학 기술 발전시킴.
3.여진을 토벌해 4군6진을 개척해서 조선의 북쪽 경계를 지킴
4.이종무를 시켜 대마도를 정벌.
5.집현전을 만들어 인재 등용

2018.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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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종대왕의 업적


-훈민정음창제-


우선 정음청이라는 것을 설치합니다. 여기에서 바로 지금 우리가 쓰고있는 한글이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훈민정음이 이곳에서 간행되니깐요. 물론 이 한글을 만들기 위하여 많은 반대가 있었으나, 결국 훈민정음을 반포합니다. 이로서 세계가 인정하는 한글이 탄생하게 된 것이지요.


-천문학의 발전-


천문학을 주과하던 곳은 서운관이었다. 서운관에는 조선 초에 이미 천문을 관측하기 위해 두 곳의 간의대가 설치된 바 있었지만 미흡한 점이 많아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431년부터 시작된 대규모 천문의상 제작과 2년 뒤에 이루어진 석축간의대 준공에 의해 본격적인 천문 연구에 돌입할 수 있었다.

석축간의대: 경복궁의 경회루 북쪽에 설치되었으며 높이 6.3미터, 길이 9.1미터, 넓이 6.6제곱미터 규모의 천문관측대 였다. 이 간의대에는 혼천의, 혼상 그리고 규표와 방위지정표인 정방안 등이 설치되었다. 이 간의대와 주변 시설 물들은 중국과 이슬람 양식에다 조선의 전통 양식을 혼합한 것이었는데, 1438년(세종20년) 3월부터 이 간의대에서 서운관 관원들이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혼천의: 천체 관측 기계로, 문헌에는 1432년 6월에 최초로 만들어졌으며 두 달 뒤에 또 하나가 만들어졌다고 기 록되어 있다. 이는 장영실을 중심으로 한 기술 제작진이 정초 등의 고서 연구를 바탕으로 고안한 것이다. 이 혼천의는 천구의와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된 것으로서 일종의 천문시계 기능을 하고 있었다.

-시계의 발명-


해시계: 해시계를 일구라고 한 것은 이것이 모두 해그림자로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 일구들은 모양과 기 능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우리 나라 최초의 공중시계인 혜정교와 종묘 남쪽 거리에 설치됐던 앙부일구는 그 모양이 '솔을 받쳐놓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는 규모가 작은 일종의 휴대용 시계였고 정남일구는 시계바늘 끝이 항상 '남쪽을 가리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릉이다. 장영실 등이 만든 앙부일구는 단순히 해시계를 발명했다는 측면 외에 더 중요한 과학적 사실들이 내포되어 있다. 다른 나라의 해시계가 단순히 시간만을 알 수 있게 해준 데 반해 앙부일구는 바늘의 그림자 끝만 따라가면 시간 과 절기를 동시에 알게 해주는 다기능 시계였다. 또한 앙부일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반구로 된 해시계였다. 앙부 일구가 반구로 된 점에 착안해서 그 제작 과정을 연구해보면 놀라운 사실 하나가 발견되는데, 그것은 당시 사람들 이 해의 움직임 뿐만 아니라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시계: 물시계로는 자격루와 옥루가 있었다. 자동으로 시간을 알리게 하는 자동시보장치가 달린 이 물시계는 일종의 자 명종이다. 1434년 세종의 명을 받아 장영실, 이천,김조 등이 고안한 자격루는 시, 경, 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종, 북, 징을 쳐서 시간을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1437년에는 장영실이 독자적으로 천상시계인 옥루를 발명 해 경복궁 천추전 서쪽에 흠경각을 지어 설치했다. 옥루는 중국 송, 원 시대의 모든 자동시계와, 중국에 전해진 아 라비아 물시계에 관한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한 끝에 고안한 독창적인 것으로서 당시의 중국이나 아라비아의 것보다도 뛰어났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측우기: 측우기는 1441년에 발명되어 조선시대의 관상감과 각 도의 감영 등에서 강우량 측정용으로 쓰인 관측장비로, 현대적인 강우량 계측기 에 해당된다. 이는 갈릴레오의 온도계 발명이나, 토리첼리의 수은기압계 발명보다 200년이나 앞선 세계 최초의 기 상 관측 장비였다. 측우기의 발명으로 조선은 새로운 강우량 측정 제도를 마련할 수 있었고, 이를 농업에 응용하게 되어 농업 기상학에서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룩하였다. 이 측우기의 발명으로 정확한 강우량을 파악할 수 있게 되어 홍수 예방에도 도움이 되었다.

-음악-


모든 음체계의 바탕이 되는 기본율관(음관)을 제정하고, 앙상블에 필요한 미비된 악기들을 새로 만들어내고,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 음악을 기록하는 악보를 처음으로 창안해낸 사실들이 곧 그의 중요한 업적의 내용들이다.


 

-김종서의 6진개척과 이종무의 쓰시마 정벌-


김종서의 6진개척은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들을 쫒아냄으로서 오늘날의 우리나라와 비슷한 영토를 확보해놓습니다. 그리고 최윤덕, 이천에게 시켜 압록강유역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을 설치합니다.(이천은 자세히 보면 안빠지는 곳이 없습니다. 금속활자자를 간행한것도, 측우기를 만든 것도, 압록강을 개척한 것도 모두 이천이 들어가있지요.)


사실 이 북방개척에서는 세종대왕의 가장 악독한 업적이 포함되기도 합니다. 바로 사민정책입니다. 남방에 사는 주민들에게 강제로 북쪽으로 이주시킨 것이지요. 물론 세금혜택이나 정부지원 등 상당한 대가가 있었지만, 실제로 이로 인하여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만약에 다른 임금들이 이러한 업적을 행했다면 두고두고 이걸로 씹어댔을 것이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정책을 펼쳤기에 그 확보해놓은 북쪽땅이 완전히 우리땅으로 편입되게 된 것이죠. 현재는 욕을 먹더라도 미래를 건너다본 세종대왕다운 지혜로운 모습입니다

 

[세종대왕의 생애]


세종대왕은 1397년 4월 10일(양력 5월 15일)경복궁 서쪽 인왕산 기슭 준수방에서 태종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1418년 8월 22세의 나이로, 태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왕조 제 4대 임금이 되셨다.

고려사를 개수시키다.

1420년 3월에는 집현전(지혜의 집)을 설치하고, 학문을 연구하도록 하였으며, 군사제도를 개편하였다.

1423년에는 조선 통보를 주조하게 하였으며, 1429년 정초로 하여금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농업에 관한책 <농사직설>를 편찬하게 하였다.

1432년 왕명으로 윤희, 신색, 맹사성 등이 우리나라 최초의 지리책 <팔도지지리>를 편찬

1433년 '혼천의'를 만들었으며, '향약집성방'을 펴냈다.

1434년에는 박연에게 아악을 정리하게 하였으며, 악기를 개조하였고, 이천, 김돈, 장영실로 하여금 구리로 된 '『갑인자』란 활자를 주조하게 하여, 많은 책이 쏟아져 나왔다.

최초의 공중 해시계 앙부일구(보물 제 845호)를 만들도록 하였으며, 물시계(자격루)를 만들도록 하였다. 자격루는 자동으로 시보를 알려주는 장치가 되어있는 물시계 이며, 장영실, 김조, 이천 등이 제작하였다.

1435년 경복궁 안에 주자소를 옮겼다.

1437년 김종서에 명하여 두만강 방면에 있던 여진족을 토벌하여 6진을 설치하고,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의 땅을 확보하였다.

1441년 '치평요람'을 편찬하게 하였다.

1442년, 이천과 장영실이 측우기를 발명하였다. 비의 양을 재는 기구이며, 세계 최초의 우량계 였다.

1443년 훈민정음(28자)를 창제하였으며, 전제상정소를 두었다.

1445년 <치평요람>완성하였으며, 권제, 안지, 정인지 등이 훈민정음으로 된<용비어천가>를 지었다.

1446년 9월 3일(양력 10월 9일)훈민정음(한글)을 반포하였다.

공문서에 한글을 쓰게 하였다.

1447년 숭례문(남대문)을 개축하였으며,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을 만들었다.

1449년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을 간행하였다.

1450년 2월 17일 영응대군(세종의 여덟째 아들)의 집 별채에서 승하하셨다.

 

[세종대왕의 업적]


한글, 훌륭한 책의 편찬, 과학기가의 연구, 음악의 진흥, 육진개척, 일본과의 외교, 불교의 진흥 등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우리글을 갖게 해준 것은 우리에게 주체 의식을 강하게 심어 주었다는 데서 큰 가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말은 있되 우리 글이 없어 청음청을 두어 한글을 만들게 한 업적과, 측우기, 해시계, 물시계 등등 훌륭한 과학기기를 만들어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하였으며, 김종서 장군에게 명하여 육진을 개척케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이 함경도는 오랑캐의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갑인자 라는 활자를 주조하게 하여 훌륭한 책을 많이 만들어 역사와 학문 연구에 이바지 하였으며, 용비어천가, 고려사, 농사직설, 삼강행실도, 치평요람, 석보상절, 의방유희 등입니다.


이러한 업적 외에도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준 정신의 유산이 무엇보다도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종대왕 업적]


1. 훈민정음(한글) 1446년 9월 3일(양력 10월 9일)반포되었음

2. 최초의 공중 해시계 앙부일구(보물 845호)

3. 측우기 (세계 최초의 우량계)

4. 물시계 (자격루, 옥루 등)

5. 일성정시의(별이 자리를 옮기는데 따라서 밤 시각도 알게 만든 시계)

6. 4군6진 개척,

7. 군사제도 개편,

8. 조선통보 주조

9. 박연에게 아악을 정리하게 하였으며, 악기를 개조하였고, 음악을 발달시켰음

10. 구리로 된 『 갑인자 』라는 활자를 주조하게 하여, 많은 책을 남겼음

11.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농업에 관한책 '농사직설' 편찬

12. 우리 나라 최초의 지리책 '팔도지리지' 편찬

13. 1445년 '치평요람'완성

14. 훈민정음으로 '용비어천가'를 지었음

15.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이 밖에도 수많은 업적을 남겼음.

2018.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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