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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질문 내용에 있는 조선시대 과학자 및 기술자들 업적 부탁드립니다.
비공개 조회수 2,058 작성일2018.04.18
이천 / 장영실 / 이순지 / 서유구 / 성주덕

이 다섯분의 업적들을 간략하게 요약 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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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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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천 (1376 ~ 1451)


세종 때에는 왜구의 침입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워 충청도 병마 도절제사로 임명되어 병선을 만드는 일에도 힘쓰게 되었다.


이 때부터 그는 물리학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무예를 닦으면서도 틈틈이 여러 기계장치의 원리를 생각하고 연구하였다. 특히 금속공예와 그 주조법에 조예가 있어 세종은 그를 공조참판으로 임명하여 새로운 청동활자인 경자자를 만드는 일에 힘쓰게 하였다.


경자자의 주조로 인쇄 능률은 많이 좋아졌으나, 좀더 아름다운 자체와 인쇄 능률을 높이기 위한 주조사업이 다시 시행되어, 마침내 1434년(세종 16)에 갑인자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20여만 개의 대소활자로 주조된 이 갑인자는 자체가 훌륭하고 선명할 뿐만 아니라, 큰 활자와 작은 활자를 필요에 따라 섞어서 조판할 수 있는 발전적인 것이었다. 갑인자의 인쇄로 조선의 활판인쇄기술은 일단 완성되었다.


그는 또한 서운관에서 정초·장영실·김빈 등과 수년 동안 노력한 끝에 1437년에 대간의·소간의·앙부일구·현주일구·천평일구·정남일구·규표 등의 해시계를 만들었고, 선기옥형이라고도 불리는 혼천의를 제작하였다.


또한 그는 평안도 도절제사가 되어 평안도와 함경도 변방에 나타나는 야인(만주족)들의 침략을 막고, 그들을 토벌할 때 여진족에게서 얻은 중국의 제철기술을 바탕으로 수철(무쇠)을 연철로 만드는 기술을 익혀 부족한 구리 대신에 쇠로써 대포를 만드는 등 화포의 개량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밖에 병선 만드는 일에도 관심이 있어 갑조법, 즉 판자와 판자를 이중으로 붙이는 방법의 시행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2.장영실 (? ~ ?)


1423년(세종 5) 상의원별좌에 임명되어 궁중기술자로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등용된 그 다음해인 1424년에 물시계를 완성하였다. 『세종실록』에는 중국의 것을 참고하여 청동으로 경점의 기를 부어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공로로 정5품의 행사직으로 승진하였다.


1432년에 경복궁과 서운관 두 곳에 설치할 많은 천문관측의기를 만드는 계획이 착수되었는데, 이때부터 이천과 함께 천문기기를 설계하고 제작을 지휘하였다. 먼저 간의와 혼천의의 두 기본 관측기계를 완성하였고, 1437년에 완성된 천문관측의기에는 대간의·소간의를 비롯하여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천평일구·정남일구·앙부일구·일성정시의·규표 등이 있다.


그가 이룩한 가장 훌륭한 업적은 1434년에 완성된 자격루의 제작이었다. 세종의 명을 받아 김빈과 함께 제작한 이 자동 시보장치의 물시계는 중국과 아라비아의 자동 물시계를 비교, 연구하여 새로운 형태의 물시계를 만든 것이었다. 그 공로로 대호군에까지 승진하였고, 그 은총에 보답하려고 다시 천상시계와 자동 물시계 옥루를 만들어냈다.


1438년에 만들어져 흠경각에 설치된 이 옥루는 그가 심혈을 기울여 중국과 아라비아의 물시계에 관한 모든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하여 이룩한 독창적인 천상시계였다. 또, 이천 등과 함께 금속활자의 주조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여 조선시대의 활판인쇄기술을 대표하는 갑인자와 그 인쇄기를 완성하였다.


3.이순지 (? ~ 1465)


그는 세종의 명으로 역법을 연구한 뒤 정인지·정초·정흠지·김담 등과 같이 『칠정산내외편』을 저술하였다. 이 『칠정산내외편』의 완성으로 조선의 역법은 완전히 정비되었다.


그 뒤 역법의 계산은 주로 이순지와 김담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또, 이천·장영실과 함께 천문의상들을 교정, 제작하였으며, 1445년에는 그때까지 조사, 정리된 모든 천문관계 문헌과 이론을 체계화하여 『제가역상집』 4권 3책을 펴내었다.


또, 1457년에는 세종대에 정리되었던 일월식 계산법을 알기 쉽게 편찬하라는 왕명을 받고 김석제와 함께 그 법칙을 외우기 쉽게 산법가시를 짓고 사용법 등을 덧붙여, 『교식추보법』 2권 1책을 완성하였다.


이 『교식추보법』은 뒤에 천문분야 관리채용의 1차 시험인 음양과 초시의 시험교재로 쓰일 만큼 일반화되었다. 산학·천문·음양·풍수분야에 조예가 깊었다.


4.서유구 (1764년 ~ 1845)


35세에 순창군수로 있을 때 농서를 구하는 정조의 윤음에 접하고, 도 단위로 농학자를 한 사람씩 두어 각기 그 지방의 농업 기술을 조사, 연구하여 보고하게 한 다음, 그것을 토대로 내각에서 전국적인 농서로 정리, 편찬하도록 하자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 제안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정조의 윤음으로 가학이기도 한 농학을 체계화시킬 필요성을 느끼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서유구의 농학은 『임원경제지』로 집대성되지만, 그 이전에도 기초적 연구로서 농업 기술과 농지 경영을 주로 다룬 『행포지』, 농업 경영과 유통 경제의 관련에 초점을 둔 『금화경독기』, 농업 정책에 관한 『경계책』 등을 저술하였다.


이러한 연구를 토대로 아버지의 『해동농서』, 할아버지의 『고사신서』의 농포문, 그리고 『증보산림경제』·『과농소초』·『북학의』·『농가집성』·『색경』 등 여러 국내 농서와 중국 문헌 등 800여 종을 참조하여 만년에 『임원경제지』를 완성하였다.


1834년에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때마침 흉년을 당한 이 고장 농민의 구황을 위해 구황 식물인 고구마 보급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도록 강필리의 『감저보』, 김장순의 『감저신보』 등과 중국·일본의 관계 농서를 참고하여 『종저보』를 써서 보급하였다.


저술로는 이 밖에도 『난호어목지』·『경솔지』·『옹치지』·『누판고』 등이 있다.


5.성주덕 (1759 ~ ?)


조선후기의 천문학자이다. 1795년(정조 19)에 당시의 관상감관인 서호수와 함께 『국조역상고』를 편찬하였고 1818년(순조 18)에는 단독으로 『서운관지』를 편찬한 것을 들 수 있다.


이 두 책은 당시의 천문학과 그에 관련된 제도·기술 등을 포괄적으로 서술한 것으로, 한국의 천문학사 연구를 위하여 가장 중요한 자료에 속하는 것으로 꼽히고 있으며, 이 책들을 편집한 그는 한국 천문학사상 귀중한 업적을 남긴 수준 높은 천문학자였음을 알 수 있다.


2018.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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