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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국사
Ll 조회수 1,075 작성일2007.11.20

국사 역사 신문을 만드는 중2생 입니다!

 

국사p105~p1133쪽 까지 구여

광고를 해야하는데

무신정권 하구 몽골과의 전쟁

뭐 이런부분인데.. 무슨 광고를 어떻게 내야할지 잘 모르겠어요..

수행들어가는거고 모둠에서 하는거라

저만 안할수도 없거든요.. 좀 도와주세요!

이왕이면 빨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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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문벌 귀족 사회는 무신정변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문신 중심의 정치에 불만을 품은 무신들이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잡은 것이다. 그러나 무신끼리 권력 다툼이 매우 심하여 나라가 안정되지 못하였다. 이윽고 권력을 잡은 최씨 집안은 4대 60여 년에 걸쳐 권세를 휘둘렀다.


  칼로 잡은 권력

1170년, 고려 역사를 뒤흔든 사건이 일어났다. 의종 24년 8월 그믐날 밤, 보현원에서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 무신들은 하룻밤 사이에 수많은 문신귀족들을 죽이고 권력을 움켜쥐었다. ‘문관의 관을 쓴 자는 비록 벼슬이 낮더라도 모조리 죽여라!’ 이 명령에 따라 9월 초하루까지 계속된 정변은 의종을 쫓아내고 무신들이 최고 권력자가 되면서 마무리되었다. 그 이후로 꼭 100년 동안 무신들이 주름잡는 세상이 되었다.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을 겪으면서 왕권은 더욱 약해졌다. 의종 임금은 왕위에 오르면서 나름대로 개혁을 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형편없이 약해진 왕권으로 세상을 바꾸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그저 날마다 문벌귀족(문신)과 함께 잔치를 벌이며 흥청망청 거리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무신들의 불만이 커져갔다. 같은 지배층이지만 문벌귀족과 차별이 매우 심했던 것이다. 문신은 시를 읊조리며 즐기는데 무신은 그들을 호위해야만 했다. 대개 문신보다 신분이 낮았던 이들은 같은 벼슬이라도 문신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더욱이 군사 지휘권도 없어 문신의 지시를 받아야 했다. 서희, 강감찬 등은 모두 문신 출신이었다. 게다가 못된 문신들이 무신들의 수염을 태우거나 뺨을 때리는 등 자존심을 건드리니, 무신들의 쌓였던 불만이 터져 나올 만도 했다.


  흔들리는 무신정권

무신 정변은 순식간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세력을 되찾으려는 문벌귀족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지방에서 군사를 장악하고 있던 귀족 집안 출신들이 군사를 일으켜 무신정권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귀족들과 가까웠던 사원에서도 승병을 꾸려 무신들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문벌 귀족들을 물리친 다음에도 정권은 안정되지 못하였다. 무신들은 정권을 독차지하기 위해 경쟁자들을 제거하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무신들 사이에는 치열한 대결이 이뤄졌고, 결국 많은 군사를 거느린 힘있는 장수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무신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은 최충헌이었다. 그는 무신 가운데는 꽤 알아주는 높은 집안 출신으로, 상장군인 아버지 덕에 음서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그는 천민 출신인 이의민이 권세를 누리는 것을 늘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남몰래 세력을 길렀다가 이의민을 죽이고 권력을 잡았다.

그는 강력한 군대를 길러 왕을 넘어서는 권세를 누렸는데, 2명의 왕을 자기 손으로 내쫓고, 4명의 왕을 자신의 손으로 추대하기도 하였다. 이후 아들인 최우가 그의 자리를 이어 60여 년 동안 최씨 무신정권이 이어졌다.



   간추린 얘기


  1) 무신정변의 배경

① 왕권 약화와 문벌 귀족들의 부패

② 문신들로부터 심한 차별 대우를 받던 무신들의 불만 고조

  2) 무신정변의 전개 과정

․정중부 → 경대승 → 이의민 → 최충헌 → 최우 → …

  3) 최충헌의 권력

① 정치기구 - 교정도감, 경제기반 - 농장, 군사기반 - 삼별초

② 4대 60여 년 간 최씨 무신 정권이 지속되는 발판 마련

  4) 무신정변의 성격

․여러 가지 개혁을 발표했으나 문벌 귀족과 마찬가지로 부패해짐

 

그게 뭐꼬?


1) 문무 차별


무신정변의 가장 큰 원인은 문신과 무신의 차별 대우였다. 문벌 귀족보다 무신들은 신분이 낮고, 높은 지배층에 나아가지 못한 까닭에 출세도 늦었으며, 토지 지급도 적게 받고, 같은 벼슬이어도 업신여김을 당했다.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이자겸의 난 및 묘청의 난을 진압한 능력과 공로에 비해 푸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2) 이의민


천민 출신의 무신 권력자. 아버지는 이름 없는 소금 장수, 어머니는 어느 절의 종이었다. 어릴 때부터 힘이 좋고 싸움을 잘해 고을 군수의 눈에 띠어 무신으로 성장하였다. 집안 좋은 문벌 귀족이 주름잡던 고려 사회에 천민 출신 이의민의 등장은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며, 신분 해방 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무신정권은 잘 했을까?

(무신정변의 성공으로) 정권을 잡은 정중부, 이의방, 이고는 의종이 사적으로 축적한 재산을 모두 나누어 가졌다. 정중부는 본래 욕심 많고 천박하여 고리대업을 거리낌없이 하였다. 시중이 되자 여러 곳에 큰 농장을 가졌다. 집안 하인들과 문객들도 권세를 빙자하여 횡포를 부려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다.

<고려사>

최충헌이 자택을 지을 때 민가 1백여 채를 허물고 되도록 크고 화려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집 둘레가 몇 리나 되었으며, 규모는 대궐과 비슷하였다. 북쪽으로는 십자각이라는 별당도 지었는데, 이 공사에서 부역이 아주 심해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였다.

<고려사>

 

최충헌 崔忠獻 1149∼1219(의종 3∼고종 6)
고려 무신정권기의 집권자. 본관은 우봉(牛峰). 초명은 난(鸞). 1174년(명종 4) 조위총(趙位寵)의 난에서 공을 세워 별초도령(別抄都令)이 되었다. 96년 아우 충수(忠粹), 생질 박진재(朴晉材) 등과 함께 이의민(李義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 폐정의 개혁을 요구하는 봉사십조(封事十條)를 명종에게 올려 집권의 명분으로 삼았다. 97년 충성좌리공신(忠誠佐理功臣)에 봉해졌으나, 왕이 봉사십조를 이행하지 않자 평량공(平凉公) 민(旼;신종)을 왕에 추대, 최씨무신정권을 확립하였다. 같은해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는 동생 충수와 대립, 충수를 죽였다. 98년(신종 1) 만적(萬積)의 난을 평정하고 문무관의 인사권을 장악하였으며, 도방(都房)을 설치하여 신변보호를 강화하였다. 1204년(신종 7) 신종을 폐하고 태자(희종)를 옹립하여 벽상삼한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상장군 상주국 판병부어사대사 태자태사(壁上三韓三重大匡開府儀同三司守太師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上將軍上柱國判兵部御史臺事太子太師)가 되고, 왕은 그를 특별한 예로 대우하여 은문상국(恩門相國)이라 불렀다. 또한 편복(便服)에 일산(日傘)을 받고 궁궐에 출입하였는데, 시종하는 문객이 3000여 명이나 되었다. 1209년(희종 5) 이규보(李奎報)를 발탁, 피폐해진 무신정권의 문운(文運)을 진흥하려 하였고,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설치하여 국정 전반을 장악하는 최씨정권의 최고기관으로 삼았다. 11년 왕준명 등의 음모를 겪고 난 뒤 왕을 폐하고 한남공(漢南公) 정(貞;강종)을 즉위시켰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반란이 있었으나 강경책과 회유책으로 진압하고, 기강확립과 풍속의 순화에 노력하였다. 시호는 경성(景成).

최우 (崔瑀 ; ?~1249)

  고려시대의 권신으로 본관은 우봉(牛峰)이며 후에 이(怡)로 개명하였다. 시호는 광렬(匡烈)이다. 1219년(고종 6)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아버지 충(忠)의 뒤를 이어 집권, 민심수습에 나섰다. 아버지가 축재한 금은보화 등을 왕에게 바치고 부당하게 탈취했던 공사(公私)의 전민(田民)을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며, 가난한 선비를 등용하고 아버지에게 아부, 백성을 괴롭히던 관리와 아우 향(珦)을 유배 또는 파면했다.

  1222년 참지정사(參知政事) ·이병부상서(吏兵部尙書)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가 되어 명실공히 집정자(執政者)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자주 금품을 요구하는 몽골 사신을 냉대하고, 1223년 황라성(隍羅城)을 수축하면서 가병(家兵)을 동원하고 은병 300여 개와 쌀 2,000여 석을 내어 그 비용으로 사용했으며, 황금 200근으로 13층탑과 화병을 만들어서 흥왕사(興王寺)에 두었다.

  1225년 자택에 정방(政房)을 설치하여 인사권을 장악했고, 1227년 서방(書房)을 설치하여 문객 중 명유(名儒)를 포섭했으며, 도방(都房) 등을 확장하여 내도방(內都房)·외도방(外都房)으로 편성하여 내도방은 자신의 호위를 맡게 하고, 외도방은 친척과 외부에 대한 경비를 담당하게 했다. 1228년 오대진국공신(鼇戴鎭國功臣)이 되고, 1229년 격구장(擊毬場)을 만들어 격구를 장려하였다. 또한 야간순찰이나 도둑단속을 담당하는 야별초(夜別抄)를 새로이 조직함으로써 최씨정권의 무력기반을 확충했다.

  북변의 몽골 대군이 침공하리라는 소식에 1232년 강화천도(江華遷都)를 단행하여 성을 쌓아 대비했으며, 그 공으로 1234년 진양후(晉陽侯)에 책봉되었다. 이듬해에는 각 주와 군에서 일품군(一品軍)을 징발하여 강화도 연안의 제방을 더 높이 쌓았다. 1243년 국자감(國子監)을 수축하고, 쌀 300곡(斛)을 양현고(養賢庫)에 시납(施納), 장학(奬學)에 힘쓰는 한편, 사재를 희사, 대장경판(大藏經版) 재조(再雕)를 완성케 했다.

  이 후 차차 전횡을 자행, 백성들에게 원성을 샀다. 1262년 천도공신(遷都功臣)으로 공신당(功臣堂) 벽상(壁上)에 도형(圖形)되었다. 일찍이 기생첩 소생인 아들 만전(萬全)을 중이 되게 했는데 1248년 병으로 눕게 되자 만전을 환속시켜 항(沆)으로 개명하게 하고 좌우위상호군·호부상서로 임명했다. 이어 추밀원지주사로 승직시키고 가병(家兵) 500명을 주어 권력을 세습하게 했다. 글씨는 해행초서(楷行草書)를 모두 잘 썼다. 강종 묘종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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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별초의 항쟁

   1270∼1273년까지 강화도 중심의 삼별초군이 몽고에 대항해 일으킨 의거. 삼별초는 좌ㆍ우별초와 신의군을 합쳐 부른 이름이다. 송도 방범대인 야별초로 시작, 소속인원이 늘어나자 좌ㆍ우별초로 편성되었다. 신의군은 몽고군과의 전쟁 중에 포로가 되었다 탈출한 이들로 조직, 강화도로 옮긴 고려 조정에 대해 몽고가 항복을 종용, 원종 임금과 문신들은 항복하고 1270. 5. 27에 개경으로 갔다.

   무신은 반대, 삼별초는 반대세력에 가담, 무신과 삼별초는 6월 1일 몽고에 항쟁하기로 결의, 지휘자인 배중손은 왕족인 승화후 온을 추대하여 진용을 갖추고 1,000여 척의 배로 진도로 옮겨가 용장산성을 근거지로 항몽 투쟁 벌였다.

   고려와 몽고연합군이 진도를 점령하자 김통정이 잔여 세력 이끌고 제주도로 옮겨 항파두리 성 쌓고 항거, 1273. 4. 28 여ㆍ몽 연합군 1만여 명이 제주도에 상륙하고 삼별초는 패배, 김통정과 70여명만 남은 삼별초군은 한라산에 들어가 스스로 목매 죽었다.


  강화도의 삼별초가 몽골 세력에 반항하여 일으킨 싸움(1270∼73). 최씨(崔氏) 일파의 무인정권(武人政權)이 무너지자, 강화도의 고려조정에서는 출륙문제(出陸問題), 즉 개경환도(開京還都)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원종(元宗)을 중심한 문신(文臣)들은 대개 출륙을 찬성하고, 삼별초에 속한 무신(武臣)들은 출륙은 곧 몽골에 대한 굴복이라 하여 완강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강화도의 중신회의(重臣會議)에서 개경환도를 결의하고 환도기일을 공고하기에 이르자 삼별초의 태도는 더욱 경화(硬化)되었다. 당시 원종은 몽골에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중이었는데, 삼별초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설득하려 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270년(원종 11) 5월 27일 원종이 개경에 귀환했을 때 비빈(妃嬪)과 조정의 백관(百官)들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돌아와 왕을 맞이하였다.

   이로써 출륙문제는 사실상 해결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고려조정에서는 출륙환도에 불응하는 삼별초의 폐지를 결의하고 그 해 5월 29일 장군 김지저(金之底)를 강화도에 파송(派送)하여 이를 통고하는 동시에 삼별초의 명부를 압수하였다. 삼별초는 그 명단이 몽골군에게 넘겨져 자신들을 공격할 것으로 판단하여 6월 1일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의 지휘자인 배중손(裵仲孫)은 왕족인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은 후 관부(官府)를 설치하고 관리를 임명하는 한편 연안 경비를 철저히 하였다. 그러나 도내(島內)의 인심은 동요되고, 문무관 중에서 강화도를 탈출하는 자가 속출하였으므로, 배중손은 1,000여 척의 배에 공사(公私) 재물과 도내의 자녀들을 싣고 전라도 진도(珍島)에 들어가 그 곳을 대몽항쟁(對蒙抗爭)의 근거지로 삼았다. 남해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한 삼별초는 한때 거제(巨濟)ㆍ탐라(耽羅) 등의 30여 도서(島嶼)를 지배하여 하나의 해상(海上) 왕국을 이루었다.

   그러나 김방경(金方慶) 등이 거느린 고려의 관군과 몽골군으로 형성된 연합군에 의해 그 세력이 많이 꺾였다. 이렇게 되자 김통정(金通精)은 삼별초의 잔여세력을 이끌고 탐라, 즉 지금의 제주도에 들어가 대몽항전을 계속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로 회유책(懷柔策)을 썼으나 삼별초가 끝까지 이에 불응하므로, 73년(원종 14) 고려ㆍ몽골 연합군에 의한 탐라 공격으로 삼별초는 패망(敗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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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 정부, 일본과 외교관계 있었다> - [동아일보](1979. 4. 17)

   몽고족의 침입에 대항, 철저한 항몽정신으로 끝까지 한민족의 기개를 지켜 싸웠던 삼별초의 유일한 기록이 최근 입수된 일본측 사료에 의해 확인됨으로써 고려사 연구가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동경대 사료편찬소에서 발견된 이 기록의 제목은 <고려첩장불심조조(高麗牒狀不審條條)>. 성균관대 이우성(李佑成) 교수가 지난해 연구차 도일, 복사해 입수한 것이다.

   현재까지 국내학계가 갖고 있는 자료로는 <고려사>에 수록된 삼별초 관계기록이 유일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교수가 입수한 자료는 직접 삼별초가 남긴 기록문서는 아니나 삼별초가 보낸 외교문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점에서 당시의 사정을 말해 주는 유일한 기록으로서 높이 평가되는 것이다.

   가로 49cm, 세로 33cm의 ‘카마쿠라’ 막부 정부 문서 더미에서 발견된 이 자료는 12개 조항으로 나눠 몽고에 항복한 고려 정부가 보낸 문서와 끝까지 저항한 삼별초의 문서를 비교, 차이점을 기록한 것이다. 이 문서를 분석한 국내학자들도 내용 중 ‘카마쿠라’ 막부의 연호인 文永8년 등의 기록이 삼별초가 진도(珍島)에서 고려 왕족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정식 국가를 선포한 원종 12년(1271)과 동일한 해임을 확인했다.

   먼저 이 문서를 검토한 국사학자 이기백(李基白) 교수에 따르면 첫째 항목에서 “文永 5년의 문서에는 몽고의 덕을 찬양했으나 이번에 온 문서(文永 8년)는 몽고를 위치(韋毳: 가죽과 털이 무성한 모습으로 몽고인을 비속하게 말한 것)로 표현하고 사려 깊지 못하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웬일인가”고 일인들이 의심했다는 것이다. 즉 몽고에 투항한 고려 원종 정부가 보낸 문서와 삼별초가 보낸 외교문서가 똑같이 고려의 정통성을 주장했기 때문에 일본 관리들이 혼선을 일으켰던 것이다.

   두 번째 항목에서도 일인들은 투항한 고려 정부가 몽고 연호(至元)를 사용한 데 반해 삼별초가 보낸 문서에는 연호가 사용되지 않았음을 의심하고 있다. 그러나 삼별초의 저항 정신과 민족 의식이 가장 강하게 엿보이는 것은 세 번째 항목이다. 즉 이전의 문서(투항한 고려 정부의 것)에는 몽고의 덕으로 돌아가 군신의 예를 이뤘다고 기록했으나 삼별초는 일본 정부에 보낸 문서를 통해 몽고를 ‘피발좌임(被髮左袵)의 국가’로 성인(聖人)이 혐오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피발좌임(被髮左袵)이란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민다는 뜻으로 오랑케를 표시하는 대표적인 말이다.

   이 같은 사실은 최근 국내에 입수된 일본의 ‘이시이’씨가 이 문서를 바탕으로 쓴 <삼별초의 일본 통교자료(通交資料)>라는 논문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한편, 이 자료를 살펴본 변태섭 교수는 나머지 항목 중에 ▲비록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 진도로 도읍을 옮기기는 했으나 ▲우리(삼별초)가 삼한을 통합한 고려국의 정통이며 ▲사직의 안녕을 도모하기 위해 천시를 기다리고 있음을 표명하기도 했다고 보충 설명했다.

   또 변 교수는 이번 자료 발굴의 의의에 대해,

   ① 삼별초가 진도에서 독립정부의 입장으로 사신과 외교문서를 보낸 것이 확인됐다는 점

   ② 몽고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침략 몽고에 대해 모욕적인 표현을 했다는 점

   ③ 일본에도 몽고의 미개함을 알려 악감정을 일으키려 했다는 점 등이 드러난 점

이라고 말했다. 비록 삼별초는 김방경(金方慶)이 이끈 고려군에 의해 진도에서 멸망했지만 오랑캐의 유린에서 고려를 지키려던 의지는 당시의 새 사료 발견으로 더욱 명확히 판명된 셈이다.


<삼별초의 항몽(抗蒙) 격전지 용장산성> - [소년동아](1980. 10. 27)

   넓은 바다를 천천히 흐르던 해류가 갑자기 숨막힐 듯 좁은 곳으로 빠져나가는 길목. 그래서 오늘도 이곳 벽파나루에는 거센 파도가 일고 있다.

   이곳이 바로 몽고에 항복한 고려와 뼈에 사무치는 원수 몽고의 연합함대를 맞아 용맹스러운 해전을 벌여 몽고의 장수 아해를 쫓아내고 이로 인해 뒤에 아해가 해임당하게 된 격전장이다.

   일곱 차례에 걸친 몽고의 침입으로 나라 전체가 잿더미가 되다시피 했다. 이들의 야만적 약탈과 말발굽 아래 짓밟힌 한반도는 굶어 죽은 사람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갔다. 또한 몽고는 성곽을 허물고 왕이 직접 몽고에 항복의 뜻을 전하러 들어올 것을 요구했다.

   이에 견디다 못한 고려의 왕 원종은 왕 10년 몽고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돌아와서 임시 수도로 쓰던 강화로부터 나와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때까지 뜻을 꺾지 않고 몽고에 대항할 것을 원했던 삼별초군은 원종 11년 6월 1일 배중손이 중심이 되어 의거했다. 원래 배중손은 몽고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피살된 임연의 부하였던 사람이다. 고려 정부가 삼별초의 명단을 몽고에 넘겨주고 삼별초를 해체하려고 하자 이에 분노한 배중손ㆍ노영희ㆍ김통정 등은 은밀히 의논한 후 강화성 안에 ‘몽고병이 몰려 와서 백성들을 무차별 학살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강화성은 발칵 뒤집혔다.

   이 틈을 이용하여 삼별초는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빼앗고 왕족 ‘승화후 온’을 왕으로 모셨다. 그리고 강화도의 모든 배를 거두어들인 후 도민과 재물을 싣고 강화를 떠나 진도로 향했다. 이들의 크고 작은 배는 모두 1천 척이나 되었고, 이동하는 이들의 행렬은 100리나 뻗쳤었다고 한다. 이들이 진도를 택한 것은 해전에 약한 몽고군에 대항하기 쉽고 그 동안 힘을 기르기 위함이었다.

   여러 섬을 들르면서 70여 일에 걸친 긴 항해 끝에 8월 19일 진도의 벽파진에 도착한 이들은 가까운 용장성에 도읍을 정했다. 진도에 자리한 삼별초는 이웃 섬들과 가까운 육지의 성들에 호령하여 세금을 거둬들였고 그 세력은 날로 커졌다.

   삼별초가 제주, 거제, 남해를 비롯한 30여개의 섬과 육지에서는 전주까지 세력을 뻗치는 해상왕국을 건설하자 진도에 이주해 오려는 사람이 계속 나왔으며 온 왕을 진짜 왕으로 우러러보는 백성들도 많아졌다.

   이렇게 삼별초의 세력이 삼남 일대에 떨치자 고려 정부에서는 우왕좌왕하다가 드디어 몽고의 장수 아해와 고려의 장수 김방경을 우두머리로 하는 여․몽 연합군을 일으켰다. 연합군이 진도의 건너편에 있는 해남의 삼견원에 이르자 삼별초군의 한 병사가 몽고군에 거짓 투항하여 ‘김방경이 삼별초와 내통하고 있다’고 하여 김방경은 곧 개경으로 잡혀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삼별초의 계락이었음이 곧 밝혀져 김방경은 다시 삼견원에 돌아와 바다를 건너는 작전을 폈다.

   연합군의 함대가 벽파진 앞 바다에 이르자 때를 기다리던 삼별초의 배들은 형형색색의 깃발을 휘날리며 몽고의 함대 속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징을 치며 쏜살같이 내닫는 배를 보며 바닷가에 늘어서 있던 삼별초의 보병들은 북을 치며 응원했다. 꿈에도 잊지 못할 몽고군을 바다 위에서 만난 삼별초군은 좌충우돌하며 성난 이리떼처럼 덤벼들었다. 목숨을 앆지 않는 삼별초군의 기세에 놀란 몽고군 총사령관 아해는 뱃머리를 돌려 달아나고 말았다. 이를 보고 화가 난 고려군의 김방경은 끝까지 싸웠으나 사방에서 병사들은 죽어가고 준비했던 화살과 돌도 떨어져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이때 삼별초군이 칼을 휘두르며 벌떼처럼 김방경의 배로 달려들자 김방경은 바다로 뛰어들려 했으나 허송연이 틀어잡아 말렸다. 이를 고려군의 부장 양동무가 구출하여 가까스로 해남으로 달아났다. 1차전은 삼별초의 승리로 돌아간 것이다. 이것으로 몽고 장수 아해는 사령관직에서 쫓겨났다. ‘싸움을 피한 죄’를 물은 것이다. 몽고 진영에 아해 대신 혼도가 사령관으로 부임하자 연합군쪽에서는 삼별초를 달래는 작전으로 바꾸었다.

   즉, 배중손에게 원종 임금의 뜻과 몽고 황제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삼별초는 벽파진에서 몽고의 사절을 대접하고 답장을 보내는 척하면서 병선 20척을 몽고군이 있는 삼견원에 보냈다. 이들은 무방비 상태에 있는 몽고군 진영을 습격하여 몽고 군사 90여 명의 목을 베고 많은 배를 빼앗아 왔다. 다시 원종 12년 5월 15일, 여몽 연합군에 증원군이 도착하자 연합군은 대반격 작전을 폈다.

   김방경과 혼도는 새로운 계락을 짰다. 전군을 셋으로 나누어 진격함으로써 숫자가 적은 삼별초군의 전력을 세 갈래로 분산시켜 놓고 먼저 상륙하는 쪽이 삼별초의 뒤를 치는 전략을 세워 놓았다. 삼별초군은 수가 적었기 때문에 벽파진에 총집결하여 중군을 막는 데만 허덕이고 있을 때, 홍다구의 좌군이 먼저 노루목에 상륙했다. 홍다구는 상륙하는 즉시 삼별초군의 옆구리를 불로 공격했다. 허점을 찔린 삼별초군은 전열이 흩어지고 완전히 패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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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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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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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ts****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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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들어서

무신정권은 

그동안 문인들의 차별대우 받아온 무인들의난

(이런식??)

무시받아온 무인들 드디어 분노폭발

↑이거받에 생각 안나서 ㅈㅅ

몽골과의전쟁은

고려 몽골과 한판 붙다

고려 몽골과전쟁을 하여서 자주권을 되찾는다

고려 몽골한테 더이상 당할수만없다

기억이 더안나네요 ㅈㅅ;;

그럼 수행평가 점수 많이 받으세요

2007.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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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qkrd****
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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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전 중2가 아니라서 잘모르겠습니다만;

삼국시대쯤 사건을 괜찮을까요?

아니면고려나 조선?

다른거라면 모르겟습니다만;

요런것들이라면 제가 조금 도와드리죠

★바보온달이 공주와 결혼,

★주몽이 태어난것,

★삼국통일,

★광개토대왕 땅넗히다,

★발해건국,

★바다의 왕 장보고,

★당나라vs신라

★김유신,

★선덕여왕의추리,

★주몽의 아들 유리찾아오다.......등등

도움이 안되엇겠지만 그냥봐주세요^^

 

 

2007.11.20.

  • 출처

    내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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