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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 역사적 사실, 왜곡
lott**** 조회수 22,051 작성일2008.09.30

얼마 전 세계사 보고서를 쓰기 위해 라스트 사무라이를 봤습니다.

근데 이 영화에 대해 여기저기서 역사 왜곡이 되었다는 소리가 있더군요.

 

보고서 쓰려고 하니 도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영화에서 역사적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다면 최대한 자세히 알려주세요.

2. 역사왜곡이 된 부분이 있다면 또한 자세히 알려주세요.

 

이번 보고서 주제가 "영화에서 나타난 역사적 허구와 실제 역사의 차이" 거든요...

A4 용지 4~6페이지는 써야하니 자료가 많으면 좋겠습니다.

 

세계사에 자신있으신분들의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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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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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기로 '라스트 사무라이'의 배경은 세이난 전쟁(서남전쟁 西南戰爭)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는 1877년에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하여 가고시마의 사족들이 일으킨 대규모 반란입니다.

아시다시피 사이고 다카모리는 유신삼걸 중의 한명으로 메이지 유신에 큰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만 1873년 정한론을 주장하다 오쿠보 도시미츠에 의해 실각하여 정계를 떠나가 됩니다.

그는 가고시마에 사학교를 세우고 규슈 각지의 사족 자제를 양성하며 메이지 정부의 정책에 불만(국민개병제, 폐도령 등)을 품고 있던 사족들에게서 큰 명성을 얻고 있었습니다.

사이고는 조선을 침략할 것과 사족에 대한 특권을 주장하며 메이지 정부와 대립했는데 사이고와 함께 했던 기리노 도시아키, 무라타 신파치 등의 학교 간부들과 학생들의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여기에 당시 가고시마 현령이었던 오야마 쓰나요시도 사이고를 지지했기 때문에 가고시마는 반정부 운동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이에 메이지 정부는 가고시마의 동향을 불안하게 생각하고 가고시마에 있던 정부의 무기와 탄약을 오사카로 옮기기로 하는데 이것이 사학교측을 자극하게 됩니다.

사학교측은 정부가 사이고 암살을 추진하고 사학교를 탄압하려 한다는 것으로 단정하고 군사를 일으킵니다.

사이고도 이를 제지하지 못하자 결국 스스로 1만 3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구마모토 성을 공격합니다.

메이지 정부는 다루히토 친왕을 토벌대 대총독으로 삼아 전국에서 모집한 평민을 주체로 한 진대병을 1877년 4월에 구마모토 성으로 파견했고 결국 전투에서 패배하여 퇴각한 사이고는 9월 시로야마에서 간부들과 함께 자결합니다.

라스트 사무라이는 이 세이난 전쟁을 모티브로 하여 제작된 영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세이난 전쟁은 메이지 유신의 주역인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당시 사이고 다카모리는 사무라이 계층을 대표하고 있었고 유신의 또 다른 주역인 오쿠보 도시미츠는 정부를 대표하고 있었습니다.

영화에서는 관료인 오무라와 사무라이인 카츠모토의 대립으로 묘사되던데 실제 그런 인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이난 전쟁의 양대 주요 인물은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츠입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당시 사무라이 계층을 대표하고 있었고 메이지 유신의 또 다른 주역인 오쿠보 도시미츠는 정부를 대표하고 있었습니다.
영화에서는 관료인 오무라와 사무라이인 카츠모토의 대립으로 그려지고 있더군요.
실제 그런 인물이 있었는지 어떤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주요 인물은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츠입니다.

 

 

 

톰 크루즈가 연기했던 네이든 알그렌 대위의 모델은 에도 막부의 프랑스 군사 고문단으로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인솔하는 막부군에 참가하여 보신 전쟁에서 싸웠던 쥘 브뤼네(프랑스인. 영화에서는 미국인)라고 합니다.

영화에서는 사이고 다카모리가 메이지 정부에 대하여 봉기한 세이난 전쟁에 참여한 것으로 나옵니다.

물론 실제 세이난 전쟁에 사이고 측으로 참여한 서양인은 없습니다.

 

영화에 시대 고증과 맞지 않는 닌자가 등장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에 대하여 일본인 스탭이 난색을 나타냈지만 미국측 스탭들이 '잘못된 것을 알지만 닌자를 찍고 싶다'는 이유로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전투 씬은 뉴질랜드에서 촬영되었기 때문에 배경에 나오는 식물들의 대부분은 일본에 자생하지 않는 식물이라고 합니다.

 

영화중에 인용된 테르모필레 싸움은 나중에 300으로 영화화 되었다고 합니다.

 

스티븐 시갈은 톰 크루즈를 미스 캐스팅이라고 비판했는데 '나는 일본에서 자랐고 격투기를 배워 사범의 직함을 얻었다. 그들은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도 모르는 157cm의 꼬마를 캐스팅하여 라스트 사무라이를 찍었다. 녀석은 일본에 간 적도 없고 일본어를 말할 수도 없으며 칼을 뽑은 적도 없다. 그런데도 그가 라스트 사무라이가 되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감독은 사이고 다카모리전(원문은 영어)를 보고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하며 인터뷰에서 '메이지 유신의 실현에 큰 공을 세웠으면서도 결국 신정부에 반기를 들었던 사이고 다카모리의 아름다우면서도 비극적인 생애가 우리의 가공의 이야기의 출발점이 되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래의 에피소드는 일본 위키를 참고 했습니다.

2008.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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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

일본에서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이 직접 통치하는 체제로 전환된 사건이며, 근대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된 개혁을 말한다. 일본의 정치, 사회 구조를 크게 바꾼 일련의 사건들이다. 미 해군의 제독 매튜 페리가 이끌고 온 흑선에 대한 일본의 직접적인 대응이라고 볼 수 있다.

 

배경

19세기 일본은 영토확장을 진행상중이던 미국의 개항 요구로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결국 미·일 수호 통상조약(1858년)을 체결하게 되었다. 막부와 천황파는 대립하게 되었다. 그 후 왕정복고 세력과 개항압력에 대해 마땅한 대책을 세우지 못할 정도로 무능한 막부 타도 세력 등이 결합하여 막부를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

1866년 사쓰마 번의 지도자 사이고 다카모리 조슈 번 기도 다카요시 사이의 사쓰마-초슈 동맹으로 메이지 유신이 이뤄졌다. 이 두 지도자는 고메이 천황을 지지하였다. 이들은 사카모토 료마에 의해 천거되었는데 도쿠가와 쇼군의 지배에 도전하여 천황의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1867년 고메이 천황이 세상을 떠나자 메이지 천황이 뒤를 이었다

 

개혁의 내용

이 개혁은 중앙관제/법제/신분제/경제/지방행정/산업/교육/종교/외교 제도 등이 개편되었다.

메이지 유신으로 인하여 천황 친정 정치로 개정되었고, 관청 명칭도 형부성(刑部省)이 사법성(司法省) 등으로 되었다. 1885년에는 내각제도가 발족되었으나 정작 언론의 자유가 없고, 여전히 상전과 하인이 있을 정도로 지극히 형식적인 민주주의여서 자유주의 정당언론들은 탄압을 받았다.

군사적으로는 무사계급을 견제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군복무를 하도록 하는 징병제를 도입되었다. 경제적으로는 관영공장이 만들어지고 정부가 주도하는 산업의 육성이 시작되어 서양식 공업기술이 도입되어 자본가노동자라는 두 개의 계급이 생겼다. 직업도 이전에는 무사, 농민, 공업인, 상인으로 분류되었고, 무사계급이 농업에 종사하지 못하게 하는 등 직업이동이 불가능했으나 메이지 유신이후 직업선택이 자유롭게 되었다. 이러한 직업선택자유 인정은 메이지유신 이전에는 하층계급이었던 상인들이 중요한 계급으로 성장하게 했다. 또한 화폐제도를 개편하여 통화 단위을 도입하고, 국립은행을 설치했다. 종교적으로는 천황을 신으로 숭배하는 신토를 부활시키고, 불교기독교는 탄압했다. 이 개혁으로 일본은 농업국가에서 근대 산업국가로 변모하는 산업혁명을 진행되었고 주요 산업인력이었던 여성들의 사회에서의 위치가 높아졌다. 하지만, 1920년대까지 열악한 노동환경이 개선되지 않았고[1],사회주의가 20세기초 들어오면서 자본가노동자간의 대립이라는 새로운 계급갈등이 벌어졌다. 메이지유신당시 일본 산업혁명은 노동자들의 희생이 뿌리가 된 것이다

 

주요 내용

19세기 후반의 바쿠후 사회는 도시에서 진행된 상업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쇄국령에 맞선 페리 제독의 내항을 전후로 진행된 개국으로 혼란에 접어들었다. 특히 존황양이를 바탕으로 한 조슈 번 등의 움직임을 배후에 받은 조정의 정치적 발언권은 커지게 되었고, 바쿠후는 점차 조정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이 때문에 바쿠후 내에서는 여러 세력간의 대립과 함께 그 기반이 서서히 붕괴하게 되었다. 1867년(게이오 3년)에는 사쓰마 번조슈 번이 토막 동맹을 맺게 되면서 약체화된 바쿠후의 고민은 커졌고, 결국 바쿠후가 붕괴하기 전에 정치권력을 조정에 봉환하겠다고 조정에 제의하였다. 조정이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약 300여 년에 걸친 에도 시대는 종언을 고하게 되었고, 이후 정권을 넘겨받은 조정에 저항하던 세력들은 1868년(게이오 4년)부터 1869년(메이지 2년)에 걸쳐 대규모의 내란을 일으켰지만 조슈 번사쓰마 번을 주축으로 한 조정군에 의해 토벌되면서 새 시대가 개막하게 되었다.

 

메이지 시대의 개막과 일본의 근대화

메이지 천황은 1868년부터 일세일원(一世一元)을 결정하고,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정했다. 이어 1869년(메이지 2년)에는 도쿄로 이어해 도쿄 성(구 에도 성)을 궁성으로 정하고, 판적봉환을 허락했다. 1871년(메이지 4년)에는 폐번치현을 단행해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다른 한편 1870년(메이지 3년)에는 신토를 국교로 정하고, 제정일치를 선포하는 조서를 발표하고 신토의 국교화와 천황의 신격화를 추진해 나갔다.

1873년(메이지 6년)을 즈음하여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신정부를 지배하게 된 정한론을 둘러싸고, 귀국한 이와쿠라 사절단과의 대립이 벌어지자 메이지 천황은 칙서를 내려 사이고의 조선파견을 중지시켜 이를 제한했다. 이에 정한론을 주장하던 사이고를 포함한 일부 인사가 사직하면서 유력 인사를 잃게되었지만, 이후 신정부는 국내 개혁에 힘을 기울여 근대화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또한 1874년(메이지 7년)부터 이어진 자유민권운동에서는 1881년(메이지 14년)에 국회개설의 칙유를 내려 의회 창설의 시기를 명시하는 등 운동의 침정화를 도모했다. 1882년(메이지 15년)에는 군대를 천황의 군대로 규정한 군인칙유를 내리고, 군비의 증강에 노력했다.

1884년(메이지 17년) 이후에는 머지않은 의회 창설에 대비해 입헌국가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내각제도, 시정촌제, 부현제, 군제 등의 제정과 함께 전국에 걸친 관료지배체제를 정비하고 막대한 황실재산을 마련했다. 1889년(메이지 22년)에는 흠정헌법의 성격을 가진 대일본제국 헌법을 마련하여 천황제 입헌국가로 한걸음 더 나아가게 되었다. 1890년(메이지 23년)에는 교육칙어를 내려 천황제 국가를 지탱하는 신민의 배양을 도모하였다.

일본이 처음으로 맞닥뜨린 근대 전쟁인 청일 전쟁러일 전쟁에서 천황은 대본영에서 직접 전쟁을 살폈다. 또한 외교적으로는 영일 동맹을 체결하고, 군사적·경제적인 성장을 도모하였다. 러일 전쟁 이후에는 대한제국을 병합하고, 만주로 진출하는 등 일본을 제국주의적 식민국가로 팽창시키는 정책을 채용했다. 1911년(메이지 44년)에는 개항 이래의 목표였던 불평등조약의 개정을 통해 명실공히 열강의 하나로 성장해 나갔다.

 

위 내용이 당시 중요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한  픽션일뿐입니다 

영화의 전투배경은  보신 전쟁을 배경으로한것입니다

 

보신 전쟁(戊辰戦争, 무진 전쟁)

 

날짜 :1868년 1월 1869년 5월
장소 :일본
결과 :막부의 종말과 메이지 유신의 시작
교전국
존왕파:
사쓰마 번,
조슈 번,
도사 번
도쿠가와 막부
에조 공화국
지휘관
존왕파:
통치자: 메이지 천황,
지휘관: 사이고 다카모리,
군: 구로다 기요타카
막부:
통치자: 도쿠가와 요시노부,
군: 가쓰 가이슈,
해군: 에노모토 다케아키,
에조 공화국:
통령:에노모토 다케아키,
지휘관: 오토리 게이스케,
해군: 아라이 이쿠노스케
피해 상황
~1,000여명~3,000여명

 

 

보신전쟁은 1868년부터 1869년 사이에 일본에서 일어난 일련의 내란이다

왕정복고로 성립한 메이지 천황메이지 정권(明治政權)이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에 권력의 반환을 요구하자, 범(汎) 친(親) 에도 막부 세력(에조 공화국, 도쿠가와 막부, 오우에쓰 열번 동맹)은 이에 불복하였다. 그 결과로, 무진년게이오 5년(1868년)에 일본 전토에서 전쟁이 발발한다.

 

무쓰히토(睦仁)의 신정부군은 아리스가와노미야 타루히토 친왕(有棲川宮熾仁親王)을 주축으로, 사이고 다카모리,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가 지휘관이 되어 큐슈(九州)사쓰마 번에서 봉기했다. 이들은 북동방으로 공략하여, 에도까지 손쉽게 행군한다.

막부장군(將軍)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중심이 되어 대항했으나, 패퇴하였다. 한편,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北白川宮能久親王)이 핵심 인물인, 호쿠리쿠(北陸)와 도호쿠(東北) 지방의 오우에쓰 열번 동맹(奧羽越列藩同盟)이 막부군에 가담하여, 정부군의 북침(北侵)을 저지하다가 실패하게 된다.

하코다테 전쟁

패잔병들은 홋카이도 하코다테까지 유입되고, 이들은 현지의 아이누 족과 연대하여 에조 공화국을 졸속적으로 수립하게 된다.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실질적인 권력자가 되는데, 일본군은 이들을 격파하여 일본 내의 국론 통합을 이끌어낸다.

 

결과

전쟁에서 존왕파(尊王派)가 승리하여, 전후(戰後)에 사쓰마 번 조슈 번(長州藩) 출신의 번사(藩士)들이 주체가 되어 메이지 유신을 성공적으로 주도했으며, 일본 제국이 중앙 집권 국가가 되고 제국주의의 패권국가가 되어 대한 제국 청나라를 비롯한 제국(諸國)이 존재하는 아시아 대륙을 침범해 나가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2008.09.30.

  • 출처

    메이지 유신 자료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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