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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7대 불가사의에 대해서 ...
khg0**** 조회수 1,981 작성일2003.10.19
지금 현재 7대 불가사의인...
1.쿠푸왕의 피라미드 2.원형극장(콜로세움)3.스톤헨지(영국의 거석기념물)4.피사의사탑
5.만리장성 6.성 소피아 성당 7.알렉산드리아-파로스 등대
이것들의 역사적 배경,건물의 축조 방법에대한 설 을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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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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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쿠푸왕의 피라미드(Pyramid)

BC 2550년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7대 불가사의 가운데 가장 크며 유일하게 현존하는 것이다


피라미드란 일반적으로 고대 이집트의 국왕,왕비,왕족 무덤의 한 형식으로 어원은 그리스어인 피라미스(pyramis)이며, 이집트인은 메르라 불렀다. 현재 80기(基)가 알려져 있으나, 대부분은 카이로 서쪽 아부 라와슈에서 일라훈에 이르는 남북 약 90 km인 나일강 서안 사막 연변에 점재해 있다. 그러나 와력(瓦礫)의 산으로 변한 것과 흔적만 남아 있는 것도 있어, 옛날의 모습을 남기고 있는 것은 의외로 적다.

피라미드에 대해 현재 남아 있는 최고(最古)의 기록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BC 5세기)의 <역사> 권2에 있다. 그는 기자의 대(大)피라미드에 관하여 10만 명이 3개월 교대로 20년에 걸쳐 건조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쿠푸는 카이로 남서쪽 15 km에 위치한 기자에 최대의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이것은 대피라미드 또는 제1피라미드라 일컬어지며, 높이 146.5 m(현재 137 m), 저변 230 m, 사면각도는 51 °52 '이다. 각 능선은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오차는 최대의 것이라도 5 °30 '에 지나지 않은 만큼 극히 정교한 것으로, 피트리에 의하면 평균 2.5 t의 돌을 230만개나 쌓아올렸다. 진정 세계 최대의 석조건물로서 그 장대한 규모와 간결한 미는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다. 내부구조는 복잡해서 독일의 보르하르트에 의하면 계획이 2번 변경되었다고 한다. 북측의 지면에서 약간 위에 있는 입구로 들어가 그대로 하강하면 암반 밑에 설치된 방에 도달한다. 이곳이 제1차 계획의 매장실이고, 그 위에 있는 통칭‘왕비의 방’이 제2차 계획의 매장실이다. 그리고 제3차 계획에 의해 피라미드는 완성되었다.
제1피라미드 남서쪽에 카프라왕의 제2피라미드가 있다. 높이 136 m, 밑변 216 m, 동쪽에 있는 장제신전에 450 m의 참배로가 뻗어 하곡신전에 이른다. 유명한 스핑크스는 하곡신전에 가까운 참배로 북쪽에 엎드려 있다. 기자에는 그 밖에 멘카우레왕의 제3피라미드와 왕족들의 소(小)피라미드 6기가 있다.

[건조법]
피라미드를 건조함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무거운 석재를 필요한 높이까지 운반하는 점이었다. 쿠푸왕의 피라미드 건설 사업은 돌을 케내어 뗏목으로 운반하고 공사를 하기 위한 도로를 만들고 피라미드의 지하공사를 하는데만 적어도 10만명의 노예가 석 달씩 교대로 해서 10년이 걸렸고 돌을 높게 쌓아 올리는데도 20년 이상 걸렸다고 한다. 피라미드 건설당시 이집트인은 수레나 말을 이용한 운반법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지레나 굴림대를 제외하면 오로지 인력에만 의지하여 작업이 이루어 졌다. 즉 수백명의 사람이 채석장에서 운반해온 무거운 석재를 땟목에 올려 강을 건넜고 역시 강기슭에 도착한 석재를 건설현장 까지 운반하였다. 그래서 피라미드 측면에 직각으로 경사로를 만들고 석재는 썰매로 운반하였다. 일정한 높이마다 핵재(核材),내장재,전재(塡材),외장재의 순으로 쌓아놓고, 피라미드가 높아짐에 따라 경사로도 높아졌다. 이 경우 경사로의 기울기는 일정해야 하므로 길이는 점차 길어진다. 정상까지 다 쌓고나면 위에서부터 외장을 완공시켜가면서 서서히 경사로를 낮게 하여 완성시키는 방법을 취하였다.
외장은 정성들여 시공되고, 석재는 종이 한 장 끼워지지 않은 정도로 정밀하게 쌓아졌다. 완성에 걸린 연대에 대하여 헤로도투스는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20년이라 적었으나, 실제로는 더 짧은 기간으로 생각된다.

이상이 전통적인 학계의 의견이다.
그러나 위 학설에 대한 많은 부정과 비판이 있다.
예를 들어 위의 건조법으로 피라미드 건설을 설명할 때 다른 피라미드는 대개 설명이 가능하나 그레이트 피라미드(쿠푸왕)의 경우에는 도저히 불가하다. 그레이엄 햄콕은 그의 저서 '신의 지문'에서 위의 전통적 학설에 이의를 가하며 많은 부분을 부정한다.
사실, '그레이트 피라미드가 쿠푸왕의 무덤이 맞는가?'라는 의문부터 시작한다.
즉, 그레이트 피라미드에서는 그 누구의 미이라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어느 문헌에도 쿠푸왕의 무덤이라는 이야기가 없다.
증축 및 보수에 관한 기록이 있으나 연대적으로 볼 때 다른 피라미드는 그레이트 피라미드의 모방작에 불과하다는 설 또한 있다. 그리고 흔히 알려진 미이라의 저주나 계단의 수가 세계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다는 식의 많은 이야기들은 결코 간과할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문들 속에서 피라미드는 영화의 가장 좋은 소재가 되기도 한다.
최근 개봉작 '머미'나 '스타게이트'등은 이러한 심사를 많이 반영하는 것이다.


어쨌든 역사상 최고의 미스테리, 미스테리 하면 떠오르는 것이 이집트의 피라미드라는 사실은 부정할수 없을 것이다.
그 크기, 설계의 치밀함, 주변환경과 조화되어 있고 천문학적 지식을 집대성하고 있는 피라미드는 심오한 우주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건설되어졌고,
평균 2.5톤의 돌을 230만개나 250만개 쌓아올린 엄청난 무게를 4,800년의 기간동안 견디며 장엄함을 드러내며 우뚝 서있다.

로마 원형극장
원형경기장 〔라틴어〕 Colosseum


로마의 포로로마노(고대명은 포룸로마눔) 동쪽 저지에 있는 원형투기장. 긴지름 188m, 짧은지름 150m. 이탈리아어로는 콜로세오라고 한다. 이 저지는 네로황제가 황금궁전의 일부인 인공못을 만들었던 장소로, 근처에 거대한 헬리오스상(콜로수스)이 있었기 때문에, 중세와 혼동되어 원형투기장을 콜로세움이라 통칭하게 되었다. 고대의 정식명칭은 <플라비우스 투기장>이었다. 72년 베스파시아누스황제가 착공하여 80년 티투스황제가 헌당식을 올렸다. 이때, 기념흥행으로 100일에 가까운 투기(鬪技)가 열렸다고 한다. 그러나 공사는 도미티아누스황제시대에도 계속 이어졌고 네르바황제와 트라야누스황제 때에도 개축 또는 증축공사를 하였다. 또한 여러 차례의 벼락을 맞아, 그때마다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6세기 전반까지 행해졌다. 장대한 타원형 플랜이 있는 투기장은 아치와 볼트를 구사한 로마 건축기술의 결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건조물로서 약 5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로마제국 최대의 투기장이었다. 외관(外觀)은 4층으로 되어 있고, 밑에서부터 도리스식·이오니아식·코린트식·콤포지트식의 둥근기둥으로 각각의 층이 장식되어 있다. 또한 4층을 제외하고 원기둥과 원기둥사이에는 아치가 있고, 2층과 3층에는 조상(彫像)이 놓여 있다. 내부는 긴지름 86m, 짧은지름 54m의 아레나(투기장)를 중심으로 카베아(관객석)가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있고, 아레나지하에는 맹수우리와 기구보관실이 있다.

유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티투스제(Titus帝;79~81) 재위시에 완성된 로마의 원형 극장(콜로세움, Colosseum)인데 타원형의 긴 지름 188m, 짧은 지름 156m, 높이 48.5m로 아레나(arena;짐승을 가두어 두는 방과 지하에 통로를 설치한 것)는 긴 지름 156m, 짧은 지름 54m였으며 약 5만 명이나 되는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다.


영국 거석 기념물 (Stonehenge)
영국 남부 솔즈베리평야 중앙에 있는 거석기념물


영국 남부 솔즈베리평야(소설 '테스'의 무대^^)중앙에 있는 거석기념물.
세계 여러 곳에 있는 환상열석(環狀列石)중 가장 유명한 유적이며 20세기에 들어와 수차에 걸친 조사 결과 그 연대와 구축상황이 밝혀졌다. 스톤헨지는 중심에서부터 트릴리손,사센서클,Z형 굴,Y형 굴,오브레이 굴, 주위 도랑이 동심원모양으로 배열되어 있고, 북동부에 힐스톤이 세워졌으며 그곳에 이르는 통로가 만들어져 있다. 이들은 한 시기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1∼3기에 단계적으로 건설, 사용되었음이 밝혀졌으며, 그 연대는 BC 2800∼BC110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1기에는 주로 외주부(外周部)가 만들어졌고, 2기에는 블루스톤이라는 돌이 반입되어 사센서클과 트릴리손 중간에 이중고리모양으로 세워졌다. 3기는 다시 a∼c기로 세분되는데, 스톤헨지 최대의 구축물인 트릴리손,사센서클이 만들어졌다. 사센돌 가운데 가장 큰 돌은 50t이 넘는다. 또 이 시기에 블루스톤이 다른 것으로 바뀌어 세워졌다. G.S.호킨스는 이들 돌을 여러 각도에서 고찰하여 <천문대>설을 제창했으나 스톤헨지의 중심힐스톤을 잇는 선이 하지 때 일출방향을 가리킨다는 것 이외에는 일반적으로 인정되어 있지 않다. 또 무덤구덩이〔墓壙〕로 보아 매장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Silbury Hill는 영국 잉글랜드 남부, 윌트미어에 있는 유럽 최대의 인공언덕. 원뿔대모양이며, 기저부 면적 210㎡, 높이 40m, 꼭대기 부분은 지름이 30.5m로 평탄하게 되어 있다. 언덕 주위에는 나비 40m, 깊이 5.6m의 해자(垓字)가 둘러싸고 있으며, 일부는 나비가 150m나 되는 넓은 것도 있다. 해자는 남쪽에 두 군데가 막혀 있는데 그것이 진입로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18세기 이래 여러 차례 발굴조사를 했으나, 널방〔墓室〕이나 널길〔羨道〕은 발견하지 못했다. 1968~70년에 영국방송협회의 지원에 따른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그 결과 언덕 하부 중심에, 지름 20m에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고 그 중앙에 지름 5m, 높이 0.8m의 작은 언덕이 먼저 축조되고, 다시 이 작은 언덕을 2차례에 걸쳐 덮어 쌓아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매장이나 그 밖의 시설의 흔적도 역시 없었다. 최초의 작은 언덕의 자료를 근거로 탄소 14법에 따라 측정(BC 2145±95)한 결과 북동쪽 1.5㎞의 에이브베리의 스톤 서클이나 남쪽 25㎞ 지점에 있는 스톤헨지 등의 거석기념물(巨石記念物)보다 연대적으로는 조금 앞선 축조물로 추정되고 있으나 축조목적은 분명하지 않다.


이탈리아 피사의 사탑.
大聖堂 Duomodi Pisa


이탈리아 중서부 피사의 로마네스크건축을 대표하는 주교좌성당.
부속건물로는 <피사의 사탑(斜塔)>으로 알려진 종루(鐘樓), 세례당, 묘지 칼포산토(성스러운 땅이라는 뜻)가 있다.
대성당은 팔레르모해전의 승리를 기념하여 1064년에 기공, 13세기에 파사드가 완성되어 준공하였다. 신랑(身廊) 5랑과 익랑(翼廊, 트랜셉트) 3랑이 라틴십자형을 이루며, 교차부를 타원식 첨두형단각(尖頭形單殼)돔, 신랑을 목조천정, 측랑을 석조볼트로 덮었다. 파사드와 서쪽 뒤 정면은 롬바르드 로마네스크양식에서 유래한 열주장식보랑(列柱裝飾步廊)이다. 양식의 혼재(混在)는 부드러운 색조의 칼라대리석으로 통일되고, 세례당,종루에도 공통된 벽아치와 열주대에 의한 장식구성으로 되어 있다.
피사 태생의 G.갈릴레이는 대성당 안의 흔들리는 램프를 보고 진자(振子)의 등시성(等時性)을 직관했다고 전해진다. 종루는 지반(地盤)의 부동침하(不同沈下)로 건설중에 기울어져 그대로 완성되었다. 경사는 해마다 조금씩 더하고 있으며, 보존수복에 관한 국제설계콘테스트가 열렸으나 구체적인 방책은 취해지지 않고 있다. 세례당내의 설교단(니콜라 피사노 작)과 대성당내의 설교단(조반니 피사노작)은 고딕조각의 대표작으로 유명하다. 회랑식(回廊式)의 묘지 캄포산토라는 이름은 1203년 골고다언덕의 흙을 이곳으로 운반해왔다고 하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신앙생활의 상징으로서 번잡을 피한 시의 북쪽 변두리에 세워져 있으며, 오늘날에도 아직 지난날의 분위기가 남아 있다.


중국의 만리장성
중국 본토 북쪽에 축조된 방어용 성벽


중국 본토 북쪽에 축조된 방어용 성벽.
현재 그 연장은 지도상 약 2700㎞이지만 중복된 부분을 합치면 그 2배 가까이 된다. 지구밖에서도 보이는 건축물로 유명하다.
춘추시대 제(齊)가 영토방위를 위하여 국경에 쌓은 것이 장성의 기원이며 전국시대의 여러 나라도 이에 따랐다. 진(秦) 시황제(始皇帝)는 중국 통일(BC 221) 후 흉노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간쑤성〔甘肅省〕 남부로부터 북으로, 황허 강〔黃河〕의 대굴곡부(大屈曲部)의 북쪽을 따라 동으로 뻗어나가, 둥베이〔東北〕 지구의 랴오허강〔遼河〕 하류에 이르는 장성을 쌓았는데, 절반 이상은 전국시대의 연(燕)·조(趙) 등이 쌓은 장성을 이용한 것이었다. 근년에 이 장성의 동부 유지(遺址)가 둥베이지구에서 발견되고 있다.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 허시후이랑〔河西回廊〕을 흉노로부터 지키려고 장성을 란저우〔蘭州〕 북방에서 서쪽으로 둔황〔敦煌〕 서편의 위먼관〔玉門關〕까지 연장하였다. 남북조시대에는 북방민족의 활동으로 장성 위치는 남하하여, 6세기 중엽 북제(北齊)는 다퉁〔大同〕 북서에서 쥐융관〔居庸關〕을 거쳐 산하이관〔山海關〕에 이르는 장성을 축성하였으며, 수(隋)는 돌궐·거란 방비를 위하여 오르도스(내몽골자치구의 중남부) 남쪽에 장성을 쌓았다. 장성이 현재의 규모로 된 것은 명(明)나라시대로,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관광 대상이 되고 있는 바다링〔八達嶺〕 근처의 장성은 높이 8.5m, 두께는 밑부분 6.5m, 윗부분 5.7m이며, 위에는 높이 1.7m의 연속된 철자형(凸字形) 담인 성가퀴〔城堞〕를 만들고 총안(銃眼)을 냈고, 120m 간격으로 돈대(墩臺)를 만들어 군사의 주둔과 감시에 이용하였다. 청나라 때에는 군사적 의미를 상실하고 몽골과의 정치적 경계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스탄불 소피아 성당
Hagia Sophia(The Basilica of St. Sophia) : 터키의 이스탄불에 있는 성당건축


이스탄불이 비잔틴제국의 수도로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렸던 6세기에 건조되었다. 1453년 이후 터키의 지배 아래 들어가 이슬람교의 모스크가 되고, 4기(基)의 미너렛(첨탑)이 추가되어 아야 소피아로 부르게 되었으나 본래는 하기아소피아대성당이라 부르던 비잔틴건축의 걸작이다.
<하기아소피아>란 <신성한 예지(叡智)>, 즉 성삼위일체의 제 2 의 페르소나인 로고스,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으로 여겨진다. 4세기의 콘스탄티누스제와 후계자의 시대에 건조된 성당(36년 헌당식)이 532년의 반란으로 파손된 뒤, 유스티니아누스제(재위 527∼565)는 전연 새로운 설계에 근거하여 재건을 시작하였다. 설계는 트랄레스의 안테미우스와 밀레투스의 이시도로스가 담당하고, 100명의 감독 밑에서 1만 명의 공인이 작업을 하여 5년 10개월만에 완성하였다.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속도이며, 537년 12월 7일에 헌당식을 거행하였다. 기본적으로는 라틴십자형플랜의 삼랑식(三廊式) 바실리카에 대원개를 씌운 원개식 바실리카형 성당인데, 중앙에 대원개를 둔다고 하는 당시의 건축가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안깊이 77m, 나비 71.7m로 하였으므로 거의 정사각형의 그리스십자형플랜에 가깝다. 지름 33m, 바닥면으로부터 56m 높이인 대원개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하여 4개의 큰 지주와 대아치, 삼각궁우(穹隅)를 채용, 동서로 원개와 같은 나비를 가진 2개의 반원개를 설치하는 등, 독창적인 구조이다. 헌당식에 임한 황제는 깊이 감동하여, <오오 솔로몬이여, 나는 그대에게 이겼도다!>라고 외치며 경건한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현재는 무종교의 박물관이 되어 있으나, 20세기에 들어와서 미국고고학단원의 청소작업으로, 이슬람교 지배 아래 오랜동안 석회칠로 덮여 있던 모자이크벽화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헌당 당시의 것은 장식모티프 등의 사소한 것에 불과하고, 거의가 이코노클라슴(성화상파괴운동) 종결 후인 9세기 이후의 것이다.
비잔틴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는 성 소피아 성당은 그리스도교를 처음으로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325년에 지어졌고, 이후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재건되었다. 이 사원에 있어 무엇보다도 놀라운 점은 높이 55미터,폭 33미터에 달하는 장대한 규모의 이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기둥이 아닌 15층 높이의 거대한 돔이라는 사실이다. 15세기에 이 사원은 개조되어 터키 공화국 때부터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 곳에서는 그리스도교의 특징이 뛰어난 성모마리아의 모자이크화와 이슬람교의 코란의 금문자, 미나레트 등이 동거하는 신비로운 세계를 맛볼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 - 파로스(Pharos) 등대
BC 250년 무렵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에 의해 알렉산드리아항구 부근의 작은섬 파로스에 세워진 등대로,
높이 솟아 있는 석조건조물의 정상부분에 불을 태우는 장치가 있으며, 렌즈나 거울이 쓰였다고도 한다.


1994년 가을에 프랑스 해저 고고학 발굴팀이 깊이 7m 정도의 바다 속에서 등대의 잔해 수백점을 건지는데 성공을 하였다. 이로써 오랫동안 수수께끼에 싸여 있던 파로스 등대의 신비가 조금이나나 벗겨졌다. 발굴팀은 화강암으로 된 높이 4.55m, 무게 12톤의 여신상을 기중기로 끌어 올리는데 성공하였다. 발굴팀은 아직도 바다 속에 스핑크스와 오벨리스크 등이 잠겨져 있어 그 규모가 생각보다 크다고 밝혔다. 여기에서 발굴된 잔해 또는 조형물마다 고대 이집트의 상형 문자가 새겨져 있어서 사람들은 파로스 등대의 비밀이 밝혀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고대 알렉산드리아는 파로스 섬과 헵타스타디온이라고 불리던 1㎞정도의 제방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곳의 동쪽 끝에 세계의 모든 등대의 원조격인 파로스 등대가 서 있었다. 대부분이 대리석 돌로된 등대의 높이가 135m로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명령으로 소스트라투스가 만들었다. 등대는 3개의 층계로 만들어졌다. 맨 아래층이 4각형, 가운데층이 8각형, 꼭대기 층은 원통형이었다. 각 층은 모두 약간 안쪽으로 기울게 지어졌다(기울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음). 등대 안쪽에는 나선형의 길이 있어서 등대 꼭대기의 옥탑까지 이어져 있었다. 옥탑 위에는 거대한 동상(여신상)이 우뚝 솟아 있었는데 아마도 알렉산드 대왕이나 태양신 헬리오스의 모양을 본떴을 것으로 여기지고 있다.

등대 꼭대기의 전망대에서는 수십킬로미터나 떨어진 지중해를 바라볼 수 있고 또 먼 본토까지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7c이후 이집트를 정복했던 아랍인들에 따르면 램프 뒤쪽의 반사경으로 비치는 타오르는 불길은 43㎞정도 떨어진 바다에서도 볼 수 있었고, 맑은 날에는 콘스탄티노플까지도 반사경이 비쳤으며 또 햇빛을 반사시키면 160㎞ 정도 떨어져 있는 배도 태울 수 있었다고 한다.

B.C280년경에 만들어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어떻게 등대에 불을 지폈을까?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파로스 등대는 상당히 오랜 기간 존속하면서 등대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단단한 돌로된 등대가 무너진 것은 12c경으로 짐작하고 있다. 아마도 1100년과 1307년의 두차례의 큰 지진으로 그 모습을 감추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잊혀져 있다가 20세기 초반 독일의 고고학자들이 등대의 흔적을 발견함으로써 그 모습을 처음으로 알게되었다.

이 등대에 대해서는 많은 전설이 존재하고 있다. 기원후 7세기에 이집트를 정복한 아라비아인들은 이 등대에 달린 거울로 빛을 한 방향으로 모으면 해상의 배를 태울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었다고 말을 전한다.

이 거대한 건축물이 파괴된 이야기도 대단히 신기하다. 등대가 파괴될 당시에 이것이 있던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와 같이 아라비아인에 의해 정복되어 있었는데 그 적대국으로는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한 비잔틴 제국이었다. 이 제국의 황제는 간계에 대단히 능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어느날 황제는 칼리프(회교의 교권과 왕권을 통합한 지위) 알와리드의 궁정에 비밀 지령을 내린 사자를 보냈다. 황제의 사자는 칼리프의 궁전에 도착하자마자 앞잡이들을 풀어 등대밑에는 이집트국왕이 지녔던 금은 보화가 가득하다고 거짓 소문울 내게 했다. 이 소문을 들은 이집트 고관들은 이 사실을 칼리프에게 알렸고 칼리프는 망설이다가 등대의 철거 명령을 내렸다. 등대의 철거가 한창 진행되어 거의 반을 허물었을 때 칼리프는 자신이 어리석음을 깨닫고 중지 명령을 내렸으나 때는 늦었다. 복구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작업이었다. 왜냐하면 이 등대를 건축할 수 있는 건축술이 당시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거대한 구면 거울도 파괴되어 산산히 파괴되어 버리고 말았다.

반쯤 남은 등대도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해 알렉산드리아에는 배의 길잡이가 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한다.
이 등대는 14세기까지 반 정도 부서진 상태로 계속 서 있다가 대지진으로 완파되었다. 그후 여러번 등대를 재건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나 이를 축조할 기술이 없었다. 이 기술이 가능한 때는 20세기 들어와 강철 구조의 사용 등 건축술이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서야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대인들에게는 가능한 건축술이 그 후손들에게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은 묘한 느낌을 준다. 왜냐하면 우리의 상식으로는 역사가 발전한다는 발전사관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증거들을 살펴보면 고대인들이 우수한 과학 기술 문명을 보여주고 있는 예는 상당히 많다. 예컨데 이집트나 마야의 피라미드가 그러한 경우이다. 이것은 고대의 문명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게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잃어버린 과거, 밝혀야할 역사가 상당히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인간은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퇴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최근 게놈 프로젝트가 거의 완료됨으로 인해 만들어질 유전자 지도에서 유추해보건데...
태초의 인간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인간이 아니었을까...

2003.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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