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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악티움해전
navy**** 조회수 5,379 작성일2005.10.29

악티움해전에대해 알고싶은데요.

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 조금 허접하더라구요.

레판토해전에 대해 잘 아시는 분 부탁드립니다.

백과사전에 나오는 그런 단순한 거 말고요.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부탁드립니다.

내공 많이드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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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s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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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티움 해전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우스와의 싸움을 말하는건 아닌가요?

 

맞다면 제 허접한 답변을 들어주세요 ㅠ

 

악티움 해전을 애기하기 전에 카이사르가 죽은 후 로마는 안토니우스, 옥타비우스, 레피우

 

스가 3두정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레피우스가 반란을 일으키게 돼는데 (나

 

이도 많고 지지세력도 제일 적어서 반란으로 선수치려고함), 옥타비우스가 반란군을 진압

 

하게 됩니다. 자~! 이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우스와의 대결~ 하지만 설령 어느 한 사람이

 

이긴다고해도 희생이 커지기 때문에 둘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우스의 여동생의 결혼으로

 

잠시 휴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원정을 갔습니다.(아마도

 

로마시민의 인기를 받기  위해서 일듯) 그러나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에게 반해 거기서 

 

클레오파트라랑  이집트에 머물고 이집트 관리에게 로마의 영토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안토니우스가 한 짓은 로마시민에게는 치욕였습니다.  게다가 자기 여동생을 버려서

 

격분한 옥타비우스는 안토니우스를 치러가는데, 안토니우스와 이집트 연합군과  악티움에

 

서 만납니다. 전쟁끝에 옥타비우스의 승리로 돌아가고 안토니우스는 자살합니다. 클레오

 

파트라는 이번에는 옥타비우스를 유혹하러 했으나 옥타비우스가 거절하자 클레오파트라

 

는 자기 스스로 자살을 했습니다.......

 

 

 

 

2005.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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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티움 해전

 

그 당시의 세계 

 

카이사르는 기원전 44년(?) 반대파인 브루투스 등에 의해 암살당합니다. 그가 죽기 전에 써놓았던 유서(물론 자기 죽음은 예상하지 못했고 혹시 죽으면, 이라는 생각에 미리 써둔 것이죠)에는 옥타비아누스가 후계자라고 씌여져있었습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당시 힘이 없었고, 결국 카이사르의 부관이였던 안토니우스, 카이사르의 기병대장이였던 레피두스와 함께 제 2차 삼두정치를 시작합니다. (참고:제 1차 삼두정치는 카이사르-폼페이우스-크라수스간에 성립되었었습니다.)

 

 그 즈음 카이사르를 암살한 자들은 필리피 회전에서 패하여 브루투스는 자결하고 나머지도 제거당합니다. 하지만 레피두스가 실각한 이후 안 그래도 마찰이 있던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관계는 점점 틀어져만 갔고,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와의 사랑에 빠집니다. 그는 클레오파트라가 원하는 건 거의 다 줬었는데, 예루살렘만은 주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죠. 아무튼 파르티아 원정을 나갔다가 돌아온 안토니우스는 드디어 옥타비아누스와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게 됩니다. 바로 악티움 해전이죠. 이 해전에서 크게 패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결하고,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라는 호칭을 원로원에게서 받은 뒤 황제가 됩니다...

 

 

전투 내용

 

 이 전투에서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 해군은 갤리선(당시 배)크기가 컸고, 느렸으며, 로마 해군보다 전력이 우세했다고 합니다. 반대로 옥타비아누스의 로마 해군 갤리선은 작고 빨랐습니다. 좁은 곳에서 빠져나오려는 이집트 해군을 로마 해군은 잽싸게 반포위했으며, 겁을 먹은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기함을 몰아 전장에서 이탈합니다. 그것을 따라 안토니우스가 전장에서 이탈하며 악티움 해전은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로 끝납니다.

 

 

 

 

 

 

레판토 해전 

 

그 당시의 세계

 

 당시 오스만 투르크는 엄청난 속도로 팽창했습니다. 북아프리카를 정복하고, 서아시아를 장악했으며,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킴과 동시에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 및 점령하여 지중해와 흑해를 이음과 동시에 발칸반도와 서아시아 사이의 최단거리 해협을 손에 넣어 동방무역(동지중해 무역 포함)을 장악했습니다. 당연 동방(중국, 인도 등)으로 향신료등을 사기 위해 여행을 하던 유럽 상인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세금과 불이익, 게다가 자신들이 손해보지 않기 위한 투르크 상인들의 방해공작까지 더해져 매우 큰 불만이 생겨나고있었으며, 그것은 상인들의 문제만이 아닌 국가 무역, 즉 유럽 국가들의 불만이기도 했습니다. 십자군 원정을 몇 번 격퇴했을 때부터 이미 유럽과 오스만 제국은 사이가 좋기는 글렀죠.

 그 때, 키프로스 섬을 점령한 오스만 제국이 이제는 동쪽 지중해 무역에 만족하지 못하고 서쪽 지중해무역까지 손에 넣기위해 진출을 시작합니다. 이에 카스티야와 아라곤 황실의 결혼으로 탄생한 에스파냐와 제노바, 베네치아 등을 포함한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신성동맹을 창설, 연합함대를 결성하여 오스만 제국의 함대와 격전을 치루게 됩니다. 이 해전에서 패배한 오스만 제국은 서지중해를 포기하게 되었고, 서유럽은 오스만의 더 큰 팽창을 막게되었습니다.

 

전투 내용

 

 이 전투에는 오스만 제국과 신성동맹 양측이 각각 약 200여 척의 배를 투입, 총 400여 척의 함선이 격전을 벌이게 됩니다. 당시 베네치아의 조선술은 세계 최고에 가까웠다고 하는데요, 베네치아를 포함한 이탈리아의 배는 로마, 그리스 등의 시대로 거슬러올라가는 오랜 시간동안 사용해온 지중해용 함선 갤리선(주요 이동 동력원은 노이며 부수적으로 돛이 있음. 지중해 항해에 적합)이였고, 오스만 제국의 함선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갤리선을 이용한 전투는 말 그대로 '적 배에 들이박고 선상에서의 보병 전투'를 벌이는 것이였습니다. 하지만 에스파냐에서는 당시에는 신형이였던 갤리어스, 캐랙 등의 범선(주요 이동 동력원은 돛이며 노 없음. 대양항해에 적합)을 투입했는데요, 이 범선들은 포를 장착했기 때문에 남들은 서로 치고박고 싸우는 가운데 멀리에서 사격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외 몇가지 요인으로 신성동맹의 함대가 승리하였고, 이 전투에 참전했던 에스파냐의 함대는 후에 무적함대'아르마다'의 원형이 됩니다.

 

즐거운 하루 되시길

2005.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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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의 세계 

 

카이사르는 기원전 44년(?) 반대파인 브루투스 등에 의해 암살당합니다. 그가 죽기 전에 써놓았던 유서(물론 자기 죽음은 예상하지 못했고 혹시 죽으면, 이라는 생각에 미리 써둔 것이죠)에는 옥타비아누스가 후계자라고 씌여져있었습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당시 힘이 없었고, 결국 카이사르의 부관이였던 안토니우스, 카이사르의 기병대장이였던 레피두스와 함께 제 2차 삼두정치를 시작합니다. (참고:제 1차 삼두정치는 카이사르-폼페이우스-크라수스간에 성립되었었습니다.)

 

 그 즈음 카이사르를 암살한 자들은 필리피 회전에서 패하여 브루투스는 자결하고 나머지도 제거당합니다. 하지만 레피두스가 실각한 이후 안 그래도 마찰이 있던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관계는 점점 틀어져만 갔고,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와의 사랑에 빠집니다. 그는 클레오파트라가 원하는 건 거의 다 줬었는데, 예루살렘만은 주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죠. 아무튼 파르티아 원정을 나갔다가 돌아온 안토니우스는 드디어 옥타비아누스와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게 됩니다. 바로 악티움 해전이죠. 이 해전에서 크게 패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결하고,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라는 호칭을 원로원에게서 받은 뒤 황제가 됩니다...

 

 

전투 내용

 

 이 전투에서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 해군은 갤리선(당시 배)크기가 컸고, 느렸으며, 로마 해군보다 전력이 우세했다고 합니다. 반대로 옥타비아누스의 로마 해군 갤리선은 작고 빨랐습니다. 좁은 곳에서 빠져나오려는 이집트 해군을 로마 해군은 잽싸게 반포위했으며, 겁을 먹은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기함을 몰아 전장에서 이탈합니다. 그것을 따라 안토니우스가 전장에서 이탈하며 악티움 해전은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로 끝납니다.

 

 

 

 

 

 

레판토 해전 

 

그 당시의 세계

 

 당시 오스만 투르크는 엄청난 속도로 팽창했습니다. 북아프리카를 정복하고, 서아시아를 장악했으며,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킴과 동시에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 및 점령하여 지중해와 흑해를 이음과 동시에 발칸반도와 서아시아 사이의 최단거리 해협을 손에 넣어 동방무역(동지중해 무역 포함)을 장악했습니다. 당연 동방(중국, 인도 등)으로 향신료등을 사기 위해 여행을 하던 유럽 상인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세금과 불이익, 게다가 자신들이 손해보지 않기 위한 투르크 상인들의 방해공작까지 더해져 매우 큰 불만이 생겨나고있었으며, 그것은 상인들의 문제만이 아닌 국가 무역, 즉 유럽 국가들의 불만이기도 했습니다. 십자군 원정을 몇 번 격퇴했을 때부터 이미 유럽과 오스만 제국은 사이가 좋기는 글렀죠.

 그 때, 키프로스 섬을 점령한 오스만 제국이 이제는 동쪽 지중해 무역에 만족하지 못하고 서쪽 지중해무역까지 손에 넣기위해 진출을 시작합니다. 이에 카스티야와 아라곤 황실의 결혼으로 탄생한 에스파냐와 제노바, 베네치아 등을 포함한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신성동맹을 창설, 연합함대를 결성하여 오스만 제국의 함대와 격전을 치루게 됩니다. 이 해전에서 패배한 오스만 제국은 서지중해를 포기하게 되었고, 서유럽은 오스만의 더 큰 팽창을 막게되었습니다.

 

전투 내용

 

 이 전투에는 오스만 제국과 신성동맹 양측이 각각 약 200여 척의 배를 투입, 총 400여 척의 함선이 격전을 벌이게 됩니다. 당시 베네치아의 조선술은 세계 최고에 가까웠다고 하는데요, 베네치아를 포함한 이탈리아의 배는 로마, 그리스 등의 시대로 거슬러올라가는 오랜 시간동안 사용해온 지중해용 함선 갤리선(주요 이동 동력원은 노이며 부수적으로 돛이 있음. 지중해 항해에 적합)이였고, 오스만 제국의 함선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갤리선을 이용한 전투는 말 그대로 '적 배에 들이박고 선상에서의 보병 전투'를 벌이는 것이였습니다. 하지만 에스파냐에서는 당시에는 신형이였던 갤리어스, 캐랙 등의 범선(주요 이동 동력원은 돛이며 노 없음. 대양항해에 적합)을 투입했는데요, 이 범선들은 포를 장착했기 때문에 남들은 서로 치고박고 싸우는 가운데 멀리에서 사격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외 몇가지 요인으로 신성동맹의 함대가 승리하였고, 이 전투에 참전했던 에스파냐의 함대는 후에 무적함대'아르마다'의 원형이 됩니다.

 

2008.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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