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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여흥민씨 어느파 몇대손인지 알고싶습니다.도와주세요
멍티켓 OIO29739855 조회수 1,157 작성일2015.02.23
현재84년생 이고 민승기
아버님은 51년생 민종만
할아버지 성함은 민학균입니다.
어느파 몇대손인지 알고싶어서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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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ul****
수호신
전통 예절, 의식 1위, 사회문화 1위, 폭행 15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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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질문에 답변을 합니다.

 

현재84년생 이고 민승기
아버님은 51년생 민종만
할아버지 성함은 민학균입니다.
어느파 몇대손인지 알고싶어서 남깁니다.

 

답변 : 님의 글을 읽어보고 여흥 민씨 항렬표에서 찾아 보았습니다.

 

항렬표에서 찾아본 결과로는,

 

조부님 : 학자 균자 두자 중에 한자가 돌림자라 하셨으며,

부친님 : 종자 만자 두자 중에 한자가 돌림자라 하셨고,

님은 : 승자 기자 두자 중에 한자가 돌림자라 하셨습니다.

 

하나 !!! 조부님 학자 균자 → 부친님 종자 만자 → 님은 승자 기자 이렇게 이어지는 자가 없으므로 아마도 항렬표 돌림자에 의해 존함이 지으시신 것이 아닌듯 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증조부님 고조부님의 존함도 한번 같이 대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존함을 잘 모르실 경우에는 관할 동, 읍, 면사무소에 가셔서 제적등본을 발부 받아 보시면 다 아실 수가 있습니다.

 

님은 여흥 민씨 후손이시니 자긍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한글과 한문을 병용합니다. 이유는 한문에는 그 만큼 깊은 뜻이 있기 때문이지요. 이점 양해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해당 항렬표에는 녹색글씨로 표기합니다.

  

아래는 여흥 민씨에 대한 정보입니다.

 

 

여흥 민씨(驪興 閔氏)에 대()하여

 

1. 여흥 민씨(驪興 閔氏) 시조(始祖) : 민칭도(閔稱道)

2. 여흥 민씨(驪興 閔氏) 유래(由來) :

 

여흥 민씨(驪興 閔氏)에 대()한 족보(族譜)는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어머니이시고, 태종(太宗) 왕비(王妃)인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지시로 1417년 정유보(丁酉譜)가 발간(發刊)된 것이 시초(始初)입니다. 그러므로 12세인 원경왕후(元敬王后) 보다 훨씬 이전(以前)의 세대(世代)는 불완전(不完全)하다고 할 수 있지만, 당시(當時)의 고려(高麗) 시대(時代)의 문헌(文獻)이 많이 있었을 것이므로 큰 차이(差異)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흥 민씨(驪興 閔氏)는 민칭도(閔稱道)('' ''자 조부(祖父)라고 하여야 하나, 지면상 생략(省略) )를 시조(始祖)로 삼고 있으며, 민칭도(閔稱道)는 고려(高麗) 중엽때 중국(中國)에서 우리나라로 온 사신(使臣)이라고 한다.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에서 민칭도(閔稱道) 이전(以前)에 여러 민씨(閔氏)가 등장(等狀)하나 현 여흥민씨(驪興閔氏)와 동향(同鄕)인지 다른 민씨(閔氏)인지는 확실(確實)치 않으며, 민칭도(閔稱道)를 시조(始祖)로 삼고 있는 것이다(여흥민씨 시조 참고). 그러나 4세조(世祖) 민영모(閔令謨) 이후(以後)의 기록(記錄)은 보첩(譜牒)이 자세(仔細)하므로 정확(正確)하다고 할 수 있다. 민칭도(閔稱道)의 고향(故鄕)은 여흥(驪興 : 현 여주)이므로, 현재(現在) 모든 민씨(閔氏)는 단일(單一) 시조(始祖)로서 여흥민씨(驪興閔氏) 단일(單一) ()이다.

 

 

3. 여흥 민씨(驪興 閔氏) 본관(本貫) 연혁(沿革)

 

여흥(驪興)는 경기도(京畿道) 여주시의 옛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때에는 골내근현(骨乃斤縣)과 술천성(述川城)이 있었다. 757(신라 경덕왕 16)에 황효현(黃驍縣)으로 바뀌었고 기천군(沂川郡: 川寧縣, 述川城)의 관할에 들었다. 940(고려 태조 23)에 황려현(黃驪縣: 黃利縣)으로 바뀌었다가 1018(현종 9)에 원주에 영속되었다. 1257(고종 44)에 영의현(永義縣)으로 개편되었고, 1305(충렬왕 31)에 여흥군(驪興郡)으로 승격하였다. 이후 1388(우왕 14)에 황려부(黃驪府)로 다시 승격하였다가 1389(공양왕 1) 여흥군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1401(태종 1)에 음죽현(陰竹縣)의 북부를 편입하여 여흥부(驪興府)로 승격되면서 관할이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변경되었다. 1413(태종 13)에는 도호부(都護府)가 설치되었고 1469(예종 1)에 세종대왕 능인 영릉(英陵)을 왕대리(旺垈里)로 옮기면서 천령현(川寧縣)을 병합하여 여주목(驪州牧)으로 승격하였다. 1501(연산군 7)에 여주목을 폐하고 충주부(忠州府)의 관할하에 두었다. 1895(고종 32)에 충주부 여주군이 되었고, 1896년에 경기도 여주군이 되었다. 여성(驪城)이라는 별호가 있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관할 15개 면을 9개로 통합하였고, 1941년에 여주면이 여주읍으로 승격하였다.

 

 

4. 여흥 민씨(驪興 閔氏) 족보(族譜)

 

족보(族譜)는 동일(同一) 성씨(본관이 같은 성씨)에 대하여 혈연(血緣)관계(關係)를 나타낸 것으로, 족보(族譜)에 대()한 일반적(一般的)인 상식으로서, 족보(族譜)의 의의 및 관리, 족보의 기원, 족보 보는 방법, 족보의 종류와 명칭, 항렬, 족보 편찬 방법, 세와 대의 정의, 본관(관향)의 정의, 유적의 명칭(, , 영당, 재실 등), 종중의 기본 조직, 혈연단체 명칭의 정의와 어원 등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또한 족보를 보는데 친족 간의 멀고 가까운 정도를 알기 위한 촌수를 설명하였다. 내가 처갓집을 갈 때 어머니께서 "아빠는 처갓집, 엄마는 친정, 너희들은 외갓집 가는구나" 하셨다. 남자와 여자쪽에서 호칭은 물론이고, 자기를 지칭할 때, 다른 사람의 집안사람을 호칭할 때, 생전이나 사후가 다르며, 글에서 호칭 또한 다르니 유교 사상이 아닌 국가에서는 세상에 이렇게 다양하게 부르리라고 꿈에나 생각할까. 친척간의 호칭법이 까다로우므로 친척간 호칭법에 대하여 나타냈다.

 

 

5. 여흥 민씨(驪興 閔氏) 관직(官職)

 

족보(族譜)를 보는데 대()하여 수() 많은 관직(官職)이 있으며, 이를 이해(理解)하기 위하여 조선시대(朝鮮時代)의 품계표를 나타냈다. 관직은 적당히 왕이 알아서 내리는 것이 아니라 엄격한 심사에 의해 왕의 최종결재로 발령이 나며, 관직의 임기도 정해져 있다. 이를 위해서는 관직의 명칭 외에도 관직의 명칭을 정하는 순서(행수법), 호당, 휘호, 기로소, 배향 같은 것들에 대하여 알아야 얼마나 귀중하고, 얼마나 큰 명예인지 이해할 것이다.

 

 

6. 여흥 민씨(驪興 閔氏) 파명(派名)

 

여흥 민씨(驪興 閔氏)는 시조(始祖) 민칭도에서 4세 민영모까지는 독자이며, 민영모는 두 아들을 두었다. 따라서 여흥 민씨(驪興 閔氏) 5세부터 양대 산맥으로 크게 나누어진다(파계보 참고). 맏아들 민식은 형부상서에 올라 상서공파(尙書公派)라고 하며 상서공파에서는 25개의 파로 분류되었다. 민영모의 둘째 아들 민공규는 시호를 따서 정의공파(定懿公派)라고 하며 20개의 파로 분류되었다. 따라서 여흥민씨는 총 45개의 파로 분류된다. 이에 대한 파계보는 여흥 민씨(驪興 閔氏) 파명(派名)을 참고 바란다. 이와 별도로 상서공 민식의 후손에서 수정승을 지낸 학자인 8세 민지(閔漬)를 중시조로 하는 문인공(文仁公)파와, 정의공 민공규의 후손으로 같은 시기에 대제학을 지낸 9세 민적(閔釣)의 문순공(文順公)파로 2개로 분류하기도 한다. 따라서 상서공파와 문인공파, 정의공파와 문순공파는 같은 줄기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7. 여흥 민씨(驪興 閔氏) 명문(名門)

 

 여흥민씨(驪興閔氏)는 고려(高麗)와 조선시대(朝鮮時代)를 걸쳐서 많은 인재(人才)를 배출(輩出)한 명문가(名文家)로서 알려졌습니다. 고려(高麗)와 조선시대(朝鮮時代) 4대 명문가(名文家)로 알려졌지만, 선정기준을 어느 곳에 두고 배점을 많이 하냐에 달린 것도 사실(事實)입니다. 명문(名文) 선정 기준이 문제점이 많지만 이의 문제점의 요약과 함께 대략적인 결과만 알기 위하여 고려와 조선조의 명문을 참고하여도 8대 명벌에 속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고려조와 조선조의 명문 참고). 문과 급제자 수는 9순위이지만 인구대비로서는 연안이씨 501:1, 여흥민씨 508:1로서 2번째로 많은 알찬 명문입니다. 1순위인 전주이씨는 인구 대비 문과급제자 수가 2,819 : 1로 매우 낮음을 알 수 있습니다.

 

 

8. 여흥 민씨(驪興 閔氏) 계파(系派) 및 분파(分派)

 

- 입압공파와 삼방파

파는 입암공파(立岩公派)로서 입암파의 파조이신 16세 민제인(閔齊仁 14931549)은 임진왜란도 일어나기 전인 성종에서 명종시대의 분으로서 2000년 기준으로 약 550600년 전이된다.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 무릅에 앉혀 "너 어느 자손이지?" 하고 물으면, 하도 물어봐서 달달 외었던 "이밤 자손이요" 하면, "어이, 그놈 기특하다"고 칭찬하셨던 기억이 새롭다. 입암으로 정확히 안 것은 아마 20여년 후의 일일 것이다. 

 

입암공은 4분의 아들(민사용, 민사관, 민사안, 민사선)을 두셨으며, 맏아들 민사용은 8 3녀를 두었다(입압공파 파보 참고). 큰 아들은 민여건(汝健)으로서 아들이 없으므로 둘째 아들인 민여준(汝俊)으로부터 민기()를 양자로 들인다. 이 민기의 아들이 민광훈으로 삼방파의 파조로서, 숙종시대부터 조선말(朝鮮末)까지 권력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예로서 민시중 형제들, 인현왕후(仁顯王后),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영익, 민영환 등).

 

민사용의 6째 아들은 18세 민여검(汝儉)으로서 운촌공(雲村公)이고, 파보에는 나타내지 않았지만 세분하여 운촌공파라고도 하며, 제가 이분의 직계손인 것이다(입암공파 파보 참고). 입암공파에서 삼방파는 18세조에서 분리되어 나갔지만, 숙종부터 조선말 이후까지 크게 역사에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 많으며, 조선말(朝鮮末)로 보면 분리 시기가 8대조 정도뿐이 차이가 나지 않으므로, 삼방파에 대하여 파보를 만들었다(삼방파 파보 참고). 이들에 대하여서는 인물 소개에서 보다 자세히 요약하여 설명할 것이다

 

 

9. 운촌공파(雲村公派) - 민여검(閔汝儉)

 

운촌공(雲村公) 민여검(閔汝儉)의 후손은 '민씨삼세칠효'로 일컬 듯이 효자가 많이 나왔다. 민여검의 첫째 아들이 19세 민평, 둘째 아들이 민환()을 비롯하여 21세조까지 3세대에 걸쳐 7명의 효자가 나온 것이다.

삼계공 민환은 현재 도룡동(호동, 범골)의 롯데 호텔 뒷편에 산소를 잡고 계신다. 도룡동과 대덕밸리와 이 산소와의 얽힌 사연은 도룡동 전설을 참고 바란다. 민환의 맏 아들이 21세 민덕중(德重)이고, 손자가 22세 애일당 민진강(鎭綱)으로 옥천군 서대리에서 시제를 지내시는 분이다. 민진강-23세 민종수(宗洙) 24 백희(百禧) 25 시현(時顯) 26 치기(致驥) 27 근호(近鎬) 28 영덕(泳悳) 29세 민우식(優植) 30세 민병태(丙泰) 31세 민웅기(雄基)로 이어져서 내 아들까지 연결되는 것이다. 한편 민덕중의 둘째 아들은 민행중이고, 셋째는 민휘중, 넷째는 민득중으로서 이분들은 29 "()"자 항렬까지만 나타냈다. 입암파 전체 족보를 나타내기는 너무 분량이 많으므로, 운촌공부터 인명을 실은 것이다. 가능하면 쉽게 알아보도록 하려고 하였지만 헷갈리기 쉬우므로 연결되는 부분을 차례로 눌러가면서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10. 상서공파(尙書公派) - 민식

 

1)전의감사공파(典醫監事公派)2)감찰공파(監察公派)3)사용공파(司勇公派)4)현감공파(縣監公派)5)공목공파(恭穆公派). 6) 지애공파(芝崖公派). 7)감사공파(監司公派)8)역암공파(櫟菴公派)9)직장공파(直長公派)10)소경공파(少卿公派)11)평의사공파(評議事公派)12)교위공파(校尉公派) 13)이판공파(吏判公派)14)장령공파(掌令公派)15)첨지공파(僉知公派)16)돈령공파(敦寧公派)17)의암공파(義菴公派)18)우후공파(虞候公派). 19) 참봉공파(參奉公派). 20) 졸수공파(拙叟公派). 21)창주공파(滄州公派). 22)야와공파(野窩公派). 23)갈전공파(葛田公派). 24) 위양공파(威襄公派). 25)이정공파(梨亭公派). 

 

 

11. 정의공파(定懿公派) - 민공규 

 

26)전서공파(典書公派), 27) 참봉공파(參奉公派)28) 해관지후공파(解官祗候公派) 29)한성공파(漢城公派) 30)이참공파(吏參公派)31)상의정공파(尙衣正公派)32)공안부윤공파(恭安府尹公派)33)호참공파(戶參公派)34) 삼방파(三房派)35) 입암공파(立岩公派)36)당진공파(唐津公派). 37)석봉공파(石峰公派). 38)단양공파(丹陽公派). 39)사과공파(司果公派). 40)문도공파(文度公派). 41)부윤공파(府尹公派). 42)충정공파(忠貞公派). 43)청백리공파(淸白吏公派). 44)지둔령공파(知敦寧公派). 45)합문지후공파(閤門祗候公派).

  

 

12. 명성황후(明成皇后)에 대()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인물(人物)됨이 어떠했는지는 자료(資料)마다 조금씩 차이(差異)가 있어 일률적(一律的)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친견(親見)했던 사람들의 기록(記錄)을 중심(中心)으로 그 됨됨이를 가늠해 보고자 한다.

 

 이사벨라 비숍 (지리학자, 여행가) 윤기나는 새카만 머리와 흰 피부를 가졌고 몸매가 호리호리한 잘 생긴 부인이었다.」「눈은 차갑고 날카로 왔으며 재기가 뛰어난 지성적인 인상을 주었다.

 

 언더우드 (선교사) 부인 중국 고전에 조예가 깊었고 세계 여러 나라에 관해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폭 넓고 진보적인 정책과 국민복지를 추구했다.」「따뜻한 온정과 어린이들에게 부드러운 사랑을 주었다.」「재치있는 외교관 같았으며, 늘 반대자들을 이겼다.

 

위리암 샌드 (미국서기관) 개성이 강하고 굽힐 줄 모르는 의지의 여성이었으며, 시대를 앞섰고 여성을 초월한 정치가였다.」「무조건 외국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자기나라가 살아남아서 서방제국과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서는 일부 서양문물에 대한 적응의 필요성과 정부의 필요성을 이해했던 분이라고 생각한다.

 

벙커 (감리교 선교사) 친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굳센 의지와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노우에 (일본공사) 아름다운 성품과 탁월한 능력을 가진 귀부인이었다.

알렌 (선교사, 의사) 개성이 강한 분이었으며, 아시아의 위대한 인물 중의 한 분이었다.

매켄지 (런던, 데일리 특파원) 친구들에게는 친절하나 적에게는 타협을 모르는 분이었다.」「일본인들과 때로는 반대하면서 자기 권력을 증가시켜 나갔다.

원세개 (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 원비는 자신이 약한 것을 뉘우치지 않고서 매우 강퍅한 성질을 부린다.

 

미우라(을미사변 당시 일본공사) 왕비는 매우 재능이 풍부한 분 같았다. 내가 국왕을 알현할 때 뒤의 발을 살짝 열고는 국왕에게 무엇인가 조언을 하고 계셨다. 좀처럼 빈틈이 없는 왕비로 여겨졌다.

고비야카와 (한성신보 편집장) 국왕은 하나의 꼭두각시에 불과하였고, 조선의 정치가들 중에도 지략이나 수완이 명성황후(明成皇后)보다 더한 자는 하나도 없었으니 명성황후야말로 당대 제 1의 준물(俊物) 이었다. 왕실의 중심인물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제거함으로써, 러시아와 조선의 결탁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수밖에 다른 좋은 방법이 없었다.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인품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료가 하나 더 있다.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죽은 뒤에 쓰여진 것이라 미화된 부분이 있을 수 있으나 없는 것을 지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1897 (光武 원년 고종34) 10월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시신을 경운궁의 경효전(景孝殿)에서 홍릉으로 옮기면서 궁내부 특진관 김병시(金丙始)가 고종의 명을 받아 제술한 명성태황후 애책(哀冊)에 보면 저 울창하고 누런 명마의 땅 여주에서 일찍이 사록(沙麓)의 상서가 저축되더니 우리 인현왕후로부터 6세에 이르러 거듭 빛을 발하여 왕도가 거기에 터를 잡은 바되고 중궁의 교화가 도탑게 펼쳐졌습니다. 부드러워 온화하고 공손하시며 은혜로운 학문은 가득차고도 심오하시었으며, 종묘 사직을 받드는 제수에 정성과 경건을 다하시고, 가르침에는 동륙을 먼저 하시고, 아랫사람을 거느림에는 몸소 하심을 우선 하시니 열어(列御)가 모두 흠복하였습니다. 역대의 사승(史乘)과 국조의 헌장(憲章)을 한번 편람하시면 문득 암송하시었으며, 영특한 인재를 가려내고 조잡한 자를 쓸어내시면서 한결같이 사교(四敎 : 婦德, 婦言, 婦容, 婦功)를 준수하여 움직임과 금슬이 종고(鐘鼓)와 같으시니 나라의 풍교가 거기에서 비롯되었고, 반려(伴侶)에게서 어진 바를 구하시니 경계하는 바로서 올바름을 도모하여 도우신 것이 깊었고, 커서 밝고 큰 천명을 맞이하여 이으시게 하였습니다. 현익(임오군란이 났던 1882년을 이름)의 해를 만나 어둡고 가난한 운수를 당하셔서는 험조한 경로를 거듭 겪으셨으나 지극하신 덕이 투체되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국모(國母)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앞날이 순탄치만은 않으리라는 예고이기나 한 것처럼 1866(丙寅 고종3)은 벽두부터 술렁이고 있었다. 북경조약으로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까지 진출한 러시아가 수차례 통상을 요구하자 이미 청나라가 구미열강에게 곤욕을 치루고 있음을 알고 있던 조정에서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수단으로 프랑스 세력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방어책이 대두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프랑스인 주교 베르뇌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대왕대비 조씨와 유림으로부터 천주교를 비호한다는 비난을 들으면서까지 천주교에 호감을 보였던 대원군도 조선천주교인을 통해 프랑스세력을 끌어들일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종삼(南鐘三)을 통한 베르뇌 천주교와의 접촉이 실패하자 대원군은 태도를 돌변하여 1866 1 9일 베르뇌 주교와 홍봉주, 남종삼 등을 체포하고 1 21일 효수형에 처했다. 이것이 1801(辛酉迫害), 1839(己亥迫害)에 이어 전국을 핏빛으로 물들이면서 8천여명의 순교자를 낸 병인박해(丙寅迫害)의 시작이었다.

 

경복궁 중건이 한창이던 1866 3 6일 밤 (왕비간택이 발표되기 하루 전) 광화문 동쪽에 있는 동십자각(東十字閣) 근처 훈국화사(訓局畵師)의 가가(假家)에서 불이나 인접한 가옥 8백여간이 타고 공사에 쓰일 목재가 모두 소실되었다. 대원군은 입직 당상관 임태영(任泰瑛)을 파면시키고 수직군사들을 유배형에 처하면서 한편으로는 공사를 강행시켰다. 그러나 가까운 곳의 목재는 거의 베어다 썼으므로 목재와 석재의 운반거리가 점차 멀어지게 되어 그만큼 인력과 재정이 과다하게 소모되었다. 더구나 마을의 성황당 거목과 양반묘지의 보호림까지 벌채해 차츰 민심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궁궐에 들어온 명성황후(明成皇后)는 신정왕후(神貞王后, 익종비) 조씨, 효정왕후(孝定王后, 헌종비) 홍씨, 철인왕후(哲仁王后, 철종비) 김씨 등 3명의 대비와 왕실의 어른은 물론 대원군과 부대부인에게도 효성을 다하고 수많은 궁녀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기품을 잃지 않아 궁중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모았다. 친정쪽 집안의 제삿날이나 생신 일을 기록하였다가 일일이 제수와 반찬 등을 챙겨보내는 자상함도 잃지 않았다. 명성황후보다 3년 먼저 궁중생활을 시작한 고종은 이때 궁인 이씨를 총애하고 있었다. 자연 고종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명성황후는 주위의 연민속에 독서에 심취하게 되는데 사서삼경, 춘추좌씨 등의 고전과 대원군이 비상한 열의를 가지고 편찬케 한 대전회통(大典會通), 종실의 종보인 선원보략(璿源譜略), 주요 양반가문의 족보를 간추린 동국세보(東國世譜) 등 고금의 명서들을 탐독 통달하여 후일 고종을 도와 국정에 참여할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13. 여흥 민씨(驪興 閔氏) 항렬표(行列表대동(大同) 항렬표(行列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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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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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목·지애공파(恭穆·芝崖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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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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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 항렬표와 동일


역암공파(櫟菴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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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行列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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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 항렬표와 동일


돈령공파(敦寧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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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行列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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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 항렬표와 동일



           

14. 여흥 민씨(驪興 閔氏) 인구수(人口數)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여흥민씨는 43,887가구 총 142,572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끝으로 님의 건강과 행복이 충만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2015.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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