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오는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사람이다. 아마도 뉴턴, 아인슈타인, 다윈에 이어 현대에 가장 많이 회자되는 과학자일 것이다. 대중이 받아들이는 전형적인 갈릴레오의 이미지는 지동설을 주장했고, 이로 인해 교회에 의해 재판을 받았으며, 그 결과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과학자로 압축해볼 수 있다. 하지만 갈릴레오의 이런 이미지들은 틀렸다고까지는 할 수 없을지라도 심하게 유형화되어 너무나 많은 이야깃거리를 감춰버리게 된다. 실제 갈릴레오만큼 극적인 인생을 살다간 과학자를 찾기도 쉽지 않다.
갈릴레오는 케플러보다 여섯 살 연상이었고 케플러보다 12년을 더 살았다. 두 사람은 완전한 동시대인이다. 그러나 둘의 사고법은 많이 달랐다. 케플러에게서 고결한 중세적 신비주의자의 모습이 보인다면, 갈릴레오에게서는 약삭빠른 현대인에 훨씬 가까운 모습이 느껴진다.
갈릴레오는 개인사적 고난도 많았다. 수시로 경제적 도움을 요청하는 철없는 남동생과 여동생의 결혼지참금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던 그는 가문의 장남으로서 너무나 많은 일상의 문제들에 노출되어 있었다. 거기다 젊은 시절의 사고로 평생 자주 앓아야 했고 결코 완전히 회복된 듯이 보이진 않는다. 너무나 유명해진 재판은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렸고, 죽기 전 5년은 완전한 장님으로 보냈음까지 고려해본다면 안정적인 인생을 살면서 뛰어난 학문적 업적을 이뤄낸 경우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또 하나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에도 지금도 그의 천문학적 관찰을 통한 지동설 논증은 상당히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다는 점이다. 사실 갈릴레오의 연구내용을 볼 때 더 탁월한 것은 역학적 업적이며 굳이 현대적으로 분류하자면 그는 천문학자보다는 물리학자에 가깝다. 그럼에도 그는 재판으로 인해 천문학자의 이미지로 더 많이 각인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지동설 혁명의 궤적을 따라 갈릴레오의 천문관찰을 주로 언급했지만 그의 실제 업적은 수학과 물리학에서 훨씬 탁월했다. 그의 시기는 방정식이나 소수를 쓰지 않았다. 데카르트, 뉴턴, 라이프니츠를 기다려야 하는 좌표계, 극한, 미적분의 개념은 당연히 없었다.
그런데도 갈릴레오는 현대과학으로 가는 수많은 돌파구를 만들었다. 투사체가 그리는 포물선을 연구하고, 진자운동에 대한 탁월한 실험들을 수행했다. 가속도와 관성 개념의 정립에 기여했고, 심지어 벡터 개념에 접근했다. 사실상 문장과 고대적 기하학만 사용해서 이룬 업적들이었다.
갈릴레오의 인생을 살펴보다 보면 재기발랄하면서도 냉소적이고, 건방지지만 순수하며, 마냥 칭찬할 순 없지만 결코 미워할 수도 없는, 팽팽한 기운으로 충전된 반항기 어린 10대 남학생의 이미지가 겹쳐 보인다. 이 매력적인 인물을 이해해 보기 위해서는 ‘망원경’, ‘메디치’, ‘재판’이라는 키워드를 따라 16~17세기의 이탈리아 상황에 감정이입 해볼 때 훨씬 흥미진진할 수 있다.
갈릴레오가 지동설이 틀렸다고 고백한 뒤 재판정을 나오면서 남몰래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을 남겼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하지만 이 신화가 사실일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재판받고 나온 사람이 한 혼잣말이 기록될 이유는 없다. 재판 결과에 반하는 말을 남에게 들릴 만큼 중얼거릴 갈릴레오도 아니며, 그런 이야기를 놓칠 교회도 아니다. 하지만 그의 성격과 신념을 놓고 볼 때 그의 마음속에는 그 말이 수천 번 울렸을 수는 있다. 갈릴레오의 성향을 알려주는 일정 수준의 진실이 첨가된 일화겠지만 구체적 사실로 받아들일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갈릴레오 사후 그의 명예회복과 관련한 다른 상황들은 조금씩 바뀌어갔지만 놀랍도록 느렸다. 피렌체에서 『대화』나 『크리스티나 대공부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재발행된 것은 뉴턴역학이 승리하고도 한참이 지난 1715년이었고, 재판 자체에 대한 비판은 20세기까지도 허락되지 않았다. 『대화』가 교황청 금서목록에서 풀린 것은 1835년으로 나폴레옹 시대도 끝난 다음이었으며, 교황청이 갈릴레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준 것은 1992년이 되어서였다.
하지만 갈릴레오의 지동설에 대한 신념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보다 훨씬 빨랐다. 갈릴레오가 죽던 해에 영국에서는 아이작 뉴턴이 태어났다. 뉴턴은 자신의 생애 내에 지동설의 최종적 승리를 확정한다. 이 모든 변화의 흐름 속에서 갈릴레오에게 가장 기쁘고 중요한 사건은 아마도 뉴턴이 자신의 작업을 완성해준 것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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