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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천문대 견학보고서 양식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25,121 작성일2004.02.08
경남 김해천문대 견학보고서를 쓰려고 하는데요, 양식좀 '자세히' 알려주세요.
탐구보고서가 아니구요, 견학보고서입니다.
제일 자세히 답변해주신 분께 내공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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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는 특별한 양식은 없지만..

기본적으로..


도입, 서두, 본론, 결말 이 필요합니다.

도입 - 경남 김해천문대에 왜 가게 되었는가.. 하는 동기

서두 - 경남 김해천문대 가기 전 느낌이나, 그곳에서 얻고자 하는 것 등을 간단히 서술

본론 - 길게는 출발해서 다시 집에 올 때 까지 내용 요약과 감상, 짧게는 그냥 김해천문대 자체 관련 내용과 자신의 느낌.

결말 - 경남 김해천문대를 겪어본 소감이나, 이를 토대로한 자신의 의견, 미래상 등을 기록하면 마무리 됩니다.


어떤 보고서이건..

사실 + 자신의 의견 이 기본 골자입니다.

너무 길게 쓰려 하지 말고..

우선 뼈대를 잡고..

살을 붙여 나간다고 생각을 하세요..

2004.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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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ksd****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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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지면 시대

 

1. 면 명(面名)의 개칭

  사진설명 ( 웃개 )

   우리 고장이 오래 전부터 남곡면과 도사면으로 나뉘어져 있다가 1914년 4월 1일 합하여져
   남곡면으로 되어진지 22년 후인 1936년 4월 1일 면의 이름이 남지로 바뀌어 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남곡면 시대는 일제(日帝)가 우리 나라 침탈을 시작한 때부터 시작되어
   그 절정기에 끝나게 된 것이다.

   남지면 시대는 1936년에 시작되어 해방을 맞은 후 지속되면서 6 25동란 즉 한국전쟁을 겪게 되었으며,
   1963년 3월 1일 읍으로 승격되기까지 27년간으로 이때는 일제 침탈의 극치를 이룬 태평양 전쟁에 따른
   가난과 고통의 시대였으며, 해방, 6 25전쟁, 5 16혁명 등 격동의 시대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이 시대는 가치의 혼란과 사상적인 대립으로 인한 골육상잔의 뼈아픈 고통이 계속된 극도로 참기 어려운
   시대였으며 따라서 기존의 도덕과 질서가 무너지는 시대라 할 수 있어 우리 고장에도 많은 피해자가 생기고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또 새로운 문물이 밀려 들어와 우리 사회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시대이기도 하였다.

본 항에서는 광복전의 일과 광복후의 일을 구분하여 다루면서, 이 시대 사건중 가장 비극적인 동족 상잔, 민족 분단이란 쓰라린 참상이었던 한국전쟁은 우리 지역이 전장(戰場)이 되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많은 인명 재산상 피해가 났으므로 {五. 韓國戰爭과 鄕土}로 항을 달리하여 자세하게 다루고자 한다.
우리 면의 이름이 남곡(南谷)에서 남지(南旨)로 바뀐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우리 고장이 한일합방 이후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면세가 날로 커졌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에는 일본인들이 우리 지방에 많이 몰려와 살게 되었다.
그것은 아마 창녕이나 영산에는 현청이나 군청이 있어 기존 토착민들과 옛 관리나 양반 등 수구세력들이 많아 신흥세력인 일본인들이 발을 붙이기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을 기피하고 작은 강마을로서 인구도 얼마 안되고 그렇게 큰 토착 양반이나 관리 등 큰 세력이 없었던 남지가 그들이 정착하기에 용이하였다고 생각된다.

또 개간 여지가 많은 임자 없는 땅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인근 영남들이 늪지로 방치되고 있어 개간하기만 하면 옥답으로 대규모의 농장을 만들기에 적합한 지리적 여건이 감안된 듯하다.
또 낙동강변 일대가 밤밭, 솔밭이거나 버려진 황무지로 있었으므로 역시 개간하기에 적합하였으므로 일본인의 대거 정착이 가능하였으리라 판단된다.
그래서 그들은 이 고장을 그들의 정착지로 삼고 집중적으로 개간과 개발을 하였으니 영남들을 개간하여 영남수리조합을 만들었고, 칠원에서 칠북-길곡면 멸포나루-오호리-도천 논리-영산으로 이어질 마구선 국도개설 계획도 고쳐 칠원-칠서면 계내리-남지-도천 일리-영산으로 도로를 개설하였고 따라서 낙동강 위에 놓을 철교도 길곡면 오호리 멸포나루가 아니라 남지리에 설치 남지철교가 되었으니 남지는 바로 교통의 요지가 되게 되었다.
대구 통영간 2등 국도인 신작로와 남지철교의 개통, 영남 수리조합구역의 개간 완료 등으로 우리 고장은 바야흐로 벼와 보리 등 곡물의 주요 생산지로 또 교통의 요지로 급부상하게 되니 자연히 인구도 급격히 늘어 나게 되었으며 남지리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게 되었다.

또 다른 이유는 육상 운수의 발달과 함께 1919년 9월에 문을 연 남지우편소의 편지 전신 전화의 소통에 큰 지장을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신식 문물인 통신 수단은 식민지 통치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였는데 통신의 혼란은 일본인들에게 심각한 문제로 받아 들여 진 것이다.
본래 남곡이란 지명은 아지리를 지칭하였는데 조선조 말에 본남곡촌이 아지리로 개칭되면서 남곡이란 지명은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또 새로운 면 체제가 되면서 면사무소 소재지의 지명을 따르지 않고 남곡면으로 불리어 졌으나 면내에 남곡이란 동리는 없이 면 이름만 있고 보니 외지에서 편지를 보내거나 면사무소를 찾아오려면 혼란과 지연이 극심하였다고 한다.
특히 통신상 어려운 점이 많아 고장 발전에 큰 지장을 가져오니 면의 이름을 면사무소 소재지의 지명과 일치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면민 사이에 높아졌던 것이다.

이러한 형편에 이르러 당시 면에 조직되어 있던 면의회에서 면 이름을 개칭하자는 결의를 하고 면명 개칭을 상부 관청에 건의하게 되었다.
지방 유지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1936년(丙子) 4월 1일에 면의 이름을 남지면으로 개칭하게 되었던 것이다.
남지면으로 개칭된 그 해 큰 홍수가 있어 면민의 피해가 심했다고 한다.
병자년 물난리에 수많은 가재 도구와 인명을 잃었다 하니 해마다 겪는 수해는 여러 명목으로 수탈하던 일제의 착취와 함께 우리 면민을 더욱 곤경에 처하게 하였다.


2. 광복 전의 우리 고장

1) 일본인의 이주(移住)와 지고의 세월

한일합방 이후 우리 나라에 일본인이 밀물같이 밀려들어오면서 함께 갖가지 새로운 문물들을 들여와 자연히 상권과 부를 축척 하는 수단으로 쓰여졌는데 어떠한 것들은 우리를 수탈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일본인들은 주로 조선에 나오기만 하면 단번에 일확천금을 잡을 수가 있다는 허황한 꿈을 안고 왔고, 대다수가 권력과 엄포로 위협하며 면민을 괴롭히고 임자 없는 땅이 우리 나라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적도 작성을 위한 토지측량이란 핑계로 마구잡이 측량으로 높은 세금을 매기거나 갖가지 기이한 방법들을 동원하여 넓은 토지를 강제로 빼앗아 동양척식회사 등 거대한 농장을 만들었다.
남지면에 살았던 일인들은 창녕군내 일인의 중심세력으로 그 수도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 당시 우리 군내 인구가 17,195호에 90,714명이었을 때 이중 일인은 154호에 597명이었다.
자세하게 살펴보면 1930년 군내 일본인이 604명일 때 창녕면에 186명 남곡면에 203명이 거주했으며, 1935년에는 일인이 741명인데 그중 창녕면에는 228명 남곡면에는 283명이 거주한다고 조사되어 있음을 보아 남지는 일인의 거주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영남수리공사로 몰려들어 이 공사의 완공과 더불어 대규모의 논과 낙동강변을 개간해 얻은 밭을 소유한 농장 지주로 자리잡기 시작했는데 그들의 농장 이름들이나 대지주들을 살펴보면 대충 다음과 같았다.
조선신탁주식회사, 동양척식주식회사, 삼각흥업주식회사 등과 같은 회사 형태와 식량영단 같이 공출을 받아 도정하는 공장을 운영하는 형식도 갖추고 있었다.
일본인의 농장으로 대규모였던 것은 신호천기(神戶川崎)의 개성사(開成社) - 흔히 천기농장이라 불렸다.
신호관구(神戶關口)의 관구농장, 강산남견(岡山楠見)의 남견농장 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인 대지주로는 남지리 주변에는 해방되기 직전 면장을 지낸 롱천철지조(瀧川鐵之助)를 비롯하여 마산리에는 남견동삼랑, 신전리(상대포) 근방에는 천상황지랑, 성사리에는 천기아가, 천기무지조, 칠현리 등지에 천상황태량 등으로 많은 일인 지주들이 소작농을 거느리고 수탈했으며, 인근 도천면 송진리 일대에 송하육이, 영산면 봉산 봉암, 장마면 유리 일대의 영남수리조합 구역내 농장들은 천기아가, 천기무지조 일가가 중심 세력으로 행세를 하였다.
조선 사람들은 이들의 성을 붙여 천기 농장이니 송하 농장이니 부르기도 하였다.

1925년에 착공하여 이듬해 수리시설이 완성된 영남수리조합의 면적은 1,032정보인데 이 몽리면적의 7할이 6명의 일인 농장의 수중에 있었으며 여섯 지주 가운데서 천기농장 소유가 전면적의 절반인 500정보이었다.
이 농장의 소작료는 8∼9할에 가까웠다.
이에 농장 소작인 200여 명이 1927년 12월 5일 천기 소작인 동맹을 조직하고 6할 이상 지불을 거절하며 쟁의를 일으켰다.
그때 영산 3 1운동의 주동자였던 24인 결사대 대원들은 일제 경찰에 구속되었다가 2∼3년의 징역을 살고 출옥한 후 천도교 포교 같은 종교운동, 문화 향상, 체육활동, 문맹퇴치, 야학 등 청년 계몽운동과 함께 농민운동으로 영산소작인회를 조직 한인 지주들과 소작인간의 쟁의 해결에 노력해오고 있었다.
이 영산소작인회가 관여를 하였는지 나타나지 않지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 시기에 이 지역 농민운동은 그 방향이 한인 지주에 대한 투쟁에서 일제 식민지 수탈제에 대한 투쟁의 양상으로 나아갔다고 한다.
1927년 12월의 소작인 쟁의는 결국 소작료를 8∼9할이던 것을 6할로 끌어내렸다.
{월간 독립기념관}에 우리 지역 농민운동과 관련된 부분이 수록되어 있는데 {경남 창녕군 영산 3 1운동}이란 연구 논문은 다음과 같이 당시의 우리 지역의 농민운동을 기술하고 있어 그 원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영산소작인회가 이에 따라 사회주의 계열의 농민운동이 분화되면서 투쟁의 중심도 영산에서 일인농업침투 거점지역인 낙동강변 남지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남지정진단은 조선농민총동맹의 산하 단체로 창녕군 남곡면(지금의 남지읍) 마산정에 본부를 두고 경남도 경찰서로부터 1934년 강제 해체됨으로써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위 기록을 보면 영산3 1운동의 영향으로 현실적 모순을 타개하기 위한 농민운동으로 나아가게 되었는데,
[ 이러한 자각은 1927년도의 천기농장과 같은 수리조합을 통한 대규모 일제 농업침투 수탈에 대항하여 일어난 소작인들의 단결에 밑거름이 되어 농장측을 굴복시켰으며, 이 지역의 일제 농업 수탈 중심지의 하나였던 남지를 중심으로 창녕농민조합연맹 결성 운동으로 나아감으로써 일제식민지 농업 수탈에 정면 도전하기에 이르렀다.]
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의 남지 농민운동이 학계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알게 한다.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외치며 창씨개명, 황국신민화가 극치를 치닫고 대동아전쟁을 일으킬 무렵인 1940년대에는 면장마저 조선인 면장(정정수)을 부면장으로 강등시키고 면장 자리에 일본인(瀧川鐵之助: 다께가와 데스노스께)이 앉아 보국대(징용)도 보내고 공출도 엄청나게 거두고, 집안의 놋그릇이란 놋그릇은 간장 종지까지 강제로 다 빼앗고, 학생들은 공부는 뒷전이고 관솔을 따러 산야를 헤매게 하는 등 전쟁 물자 수탈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 외 일인들은 관공서 관리, 상공업에 종사하거나 기술자들로 한밑천 잡아 본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인물들이라 우리 고장으로 보아서는 백해무익한 사람들이었다.
단지 남지에서 개업하고 있었던 일인 의사 한사람은 면민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하는데 하야(河野; 고오노)의사는 병마에 시달리는 농민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현대 의학에 기초한 서양의술을 베풀어 효험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현재 남지리 남포 621-4번지 남지의원 자리에 그 병원이 있었다.

 

2) 수해와 수리시설

해마다 우리 고장은 낙동강에 인접한 지역이므로 강물의 범람, 홍수로 물난리를 연례 행사처럼 겪어 왔다.
강변 주위에 사는 사람들은 해마다 홍수 걱정을 하고 농사는 큰비가 있고 없고 에 따라 흉년과 풍년이 좌우되는 실정이었다.
농사를 지어놓아도 하루아침에 황토 물이 휩쓸어 가버리곤 하니 수확할 때까지 하늘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야 했다.
따라서 수리안전시설이 절실하게 필요하였다.

 

(1) 영남수리제방 ( 靈 南 水 利 堤 防 )
 

남지 영산 장마면의 옥야 2,000여 정보를 보호하는 영남수리제방은 계성천을 따라 장마면 강리에서 시작하여 본 읍 성사리와 신전리를 거쳐 낙동강 연안 도천면 송진리에 도달하는 총 연장 5,400m의 제방이다. {취산군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水利組合事務所 在南谷面南旨里

靈南水利組合 在縣西二十里 總坪數 一千三十二町 工費 一百五十六萬一百五圓四十五錢 防水堤 長三十里 揚水機 在喜樂橋邊

唐浦水利組合 南谷面所屬

南谷面唐浦水利農場

우리 고장의 주변은 쓸모 없이 개간을 하지 못한 작은 늪과 저습지가 많았다.
메기가 하품만 해도 물이 든다는 비유처럼 논에 벼를 심어도 물이 드는 논이 많았다.
따라서 고생스레 품과 농비를 들여놓고도 수확을 한 톨도 못 거두니 수리안전답(水利安全沓)의 확보가 무엇보다도 절실하였다.
또 새우 붕어 미꾸라지나 잡아먹을 수 있는 늪이 논이 되기에는 막대한 경비가 투입되지 않고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영남들의 개간은 비록 왜인의 자금과 기술이 투입되었으나 수리안전시설을 하여 안전한 논농사를 짓게 되었다는 의미 또한 크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농민에게는 그 땅을 차지할 수 없었고 대부분이 일본인 소유가 되었으며 우리 농민은 소작인으로 전락되어 수탈 당하게 되었다.
 


   사진 ( 상대포 양수장 )

   이 영남수리시설(제방)은 을축년(1925년) 여름 대홍수를 겪는 해에 착공되어 이듬해 완공되었다.
   양 배수장이 상대포에 설치되었으며 영남수리를 보호하는 제방이 당시 새로운 기술의 도입과
   대규모의 토목공사로 기록될만한 것으로 장마면에서 계성천을 따라 남쪽 도천면 송진리 낙동강에 이르는
   둑을 막는 공사였다.
   궤도(軌道)로 흙을 운반하는 [뺑차]{坑車}라 불리는 화차{土運車}를 운행하여 흙을 실어 축조하였다.
   많은 토목 기술자와 돌 쌓는 기술자들과 인부들이 모여들어 이 일대는 한때 흥청거리기도 하였다.
   특히 만주인들이 많이 와서 일을 했는데 1925년 당시 인구수를 보면 외국인중 지나(만주)인이
   263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이 공사를 맡은 회사는 대림조(大林組: 오바야시구미)라는 회사였으며 영남수리조합을 구성하게 되어
   최초의 수리조합장은 일인 식월(植月平一; 우에쯔끼 히라잇찌)이었다.
   이때 후에 만석 지기 부자로 소문이 난 권인수가 일인들과 함께 일을 하였다.

   {경상남도지}에 축조 당시의 기록이 있는데 제방을 처음 설계할 때 1925년 8월의 최대 홍수량을 기준 하여
   제방의 높이와 폭을 결정하였다 한다.

1925년 7월 13일 홍수 때 남지 도선장에 유입된 최대 홍수량은 14,957m/sec였다고 한다.
을축년 대홍수는 7월 13일 전후와 8월, 두 차례 있었는데 이때의 홍수량을 기준으로 하여 제방 높이와 폭을 결정하였다 하는데 지금까지 큰 홍수가 여러 번 있었으나 영남수리제방이 무너지거나 물이 넘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사진설 ( 양수장내 기계시설 )

   양수장에는 개설 처음에 독일제 300마력짜리 배 엔진(양수기 포함) 4대를 설치 운행하였는데
   이 엔진은 중유를 사용하였으므로 기름이 많이 들어 그 후에(2차대전 때) 전기를 가설하고
   전동기 2대를 배 엔진 2대와 교체하여 4대를 교대로 운행했다고 한다.

   안달은 배 엔진을 가동시킬 수 있는 해군 기술자여서 상대포 양수장에 근무하게 된
   현역 해군 병조장(지금의 소위급)이었다.(제11장 이동사 상대포 마을 참조)

   영남수리 제방 축조와 함께 영남수리구역으로 가는 다리를 1925년 5월(대정 15년)에 2곳
   건설하였는데 상대포 양수장으로 가는 다리는 희락교(喜樂橋)라 하였고
   성사리 대성에서 학암쪽으로 건너가는 다리는 공영교(共榮橋)라 명명하였다.
   희락교나 공영교 모두 [같이 번영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자]는 구호이니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을
   교묘히 위장한 것이라 하겠다.
   또 상대포교가 있는 곳은 전에는 구현산 자락이 내리 뻗어있었고 계성천은 양수장 쪽으로 돌아 흘렀다고 한다.
   그런데 암반을 파내기 위하여 폭파하여 직강공사를 시행,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 상대포 맞은 편 제방 아래편에 중국인 인부들의 막사가 있어 공사를 했다 한다.

제방을 쌓은 후 작답(作畓)을 위해 구획정리 공사를 하였으며 지금과 같은 농로와 도수로가 바둑판 같이 짜여진 네모 반듯한 구획정리는 그후 수년간에 걸쳐 이루어 졌다고 한다. 1937년 하천 보강공사를 시공하고 수리구역내 경지구획 정리도 하였던 것이다.

이때 이 공사를 위하여 많은 기술자와 인부들이 우리 고장으로 유입되었는데 완공 후에도 눌러 살게되어 정착 인구가 크게 불어나기도 하였다고 한다.
신전리 상대포, 성사리 학암마을은 수리공사의 영향으로 크게 발전한 마을이기도 하다.
현재 영남수리조합 사무실은 대신동에 있었지만 최초 사무실 소재지는 남지리 동포동 534-10(흥국주유소앞 삼거리, 지금의 김 외과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후에 이 건물은 남지(3구)연맹 사무실로 사용되어 구장이 주재하며 남지리(백암(현재 서동 대신동 일대) 제외)의 마을일을 보았다.
1994년에 경지정리를 다시 시행하여 기존 600평 - 900평의 논배미를 3,000평 단위 큰 구역에 2차선 포장된 농로를 확보하는 등 새로운 형태의 영농을 할 수 있게 되었다.

 

(2) 남지 피수대 ( 避 水 臺 )

영남수리제방과 함께 새로 등장한 명물로는 남지리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제방인 피수대(避水臺)이다.
피수대는 글자 그대로 홍수 때 마을이 물에 잠기면 주민들이 물 피난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제방이었다.
남지리 시가지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본동 동쪽 굴강과 마구선 국도와 만나는 본동 입구(남지리 195)에서부터 서쪽으로 남포동과 상남동(남지리 773-2, 이곳에 활터가 있었음)까지 축조되어 있었던 제방이다.
일제시대인 1939년 5월 1일 착공하여 1940년에 완공된 특수 목적의 둑으로 홍수 때 인근 침수지역 남지리 마을 주민의 물 피난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낙동강 홍수 때면 남지리 일대는 시뻘건 황톳물에 전답은 물론 가옥이 잠기게 되는데 이때 물 피난을 마산정 도초산 기슭까지 가야 했다.
갑자기 물 피난을 하게 되니 배도 없고 급조한 뗏목으로 전 가족이 옮겨가자면 몸만 빠져나가지 가재도구는 침수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매년 홍수피해가 막심하였고 또 주민들이 물 피난으로 겪는 고생도 컸던 것이다.
 


 
  사진 ( 피수대 )

   공사 당시 투입된 공사비는 39,800원(당시 금액)으로 1,108m가 축조되었다고 한다.
   보통 남지둘이라 하는데 둘은 본동 끝에서 남포동까지 이어졌지만 남지리 531번지 인접인,
   마구선 국도를 지나게 되어있어 국도 위에는 제방을 쌓지 못하고 그 위를 가로지르는 육교를 가설하였다.
   이 육교는 목조로 교각과 상판은 굵은 목재를 사용했으며 상판 위에는 시멘트포장을 하지 않고
   모래와 자갈을 깐 형태였다.
   이것은 6 25동란이후 철거되었다.

   그후 보강 축조되었는데 동쪽은 본동 동편 입구에서 마구선 국도와 병행하여 안쪽은 도로, 바깥은
   제방으로 연장 축조되어서 남송교에 이르렀는데 연장은 950m이고,
   그후 다시 연장 축조하여 계성천을 따라 북상하며 동갯들을 보호하며 상대포 못미처 당포수리 제방과
   연결되었는데 길이는 2,000m이다.
   서쪽 끝자락은 남포동 활터에서 명지들 앞을 지나 옥산앞 까지 연장되고 거기서부터 용산리까지 제방겸
   도로로 3,500m가 축조되어 낙동강 홍수를 막아내게 되었다.
   이 제방의 총 연장은 당포수리 제방의 연결 지점에서 피수대를 지나 용산 앞까지 7.5km이다.

최근 홍수 피해가 없어지고 새로운 낙동강 제방 축조계획에 의하여 본동 쪽 피수대 일부를 헐어내고 남지대교가 시작되는 국도에서 시가지와 곧바로 연결하는 도로를 개설하게 되었다.

 

3) 남지철교와 신작로 ( 新 作 路 )
 

   사진 설명  ( 남지 철교 )

   우리 고장은 남쪽 마산에서 북쪽 대구를 거쳐 서울로 가는 큰길의 길목으로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내왕하고 있었다.
   짐과 사람을 실은 목선이 강물을 따라 오르내리고, 육로는 욱개나루를 건너 마산으로 대구로 다녔다.
   자동차가 이 땅에 다니기 시작하자 점점 육로를 이용하는 일이 잦아졌고, 오래지 않아 자동차 교통이
   일반화되면서 낙동강은 육상 교통의 큰 장애물로 치부되고 교량을 가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가 왔던 것이다.

   그래서 1930년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철교 가설공사가 시작되었다.
   철교 가설 지점은 욱개나루의 상류로 칠서면 계내리 홍포서원의 유허지가 있는 절벽에서
   남지리 욱개둑이라 불리는 들판과 연결되었다.
  
   이 철교 가설 공사 때 교각을 세우기 위하여 암반이 나올 때까지 파들어 갔으나 그곳까지 이르지 못하여
   교각의 기초가 특수한 방법으로 시공되었다고 하며, 철제의 트러스는 당시 용접 기술이 발달되지 못하여

빔을 연결할 때는 철제빔에 구멍을 뚫고 고정쇠를 넣어 연결시키는 방법으로 제작이 되었는데 현대에는 볼 수 없는 기술로서 파리의 그 유명한 에펠탑도 이러한 방법으로 설치되었다고 한다.
또 다리 전체가 흔들리는 유동적인 설계로 동절기와 하절기에 따른 철제의 신축과 교각의 힘을 보완토록 되어 있어 차가 지나가면 다리 전체가 흔들거려 특이한 느낌을 준다.
그 당시에는 가장 최신 기술로 시공되었으므로 남지철교는 압록강철교와 함께 우리 나라에서 유명한 다리로 인정받고 있다.

공사 때 많은 인부들이 돌을 지게에 져 나르고 땅을 파 나르는 땅떼기를 했는데 인근 마을 장정들이 다 동원되어 적은 삯을 받고 일했다 하며, 북쪽 철교와 연결되는 도로의 축조를 위하여 취토지로 동편의 밭 흙을 사용했는데 반강제적 매수였다고 한다.
강 건너 함안군 칠서면 계내리와 이어지도록 도로가 개설되었는데 이 길이 바로 우마차나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새로난 길] 신작로(新作路)인 것이었다.
이 신작로는 대구-통영 2등 국도로 폭이 6m∼8m 이었다.

착공한 이듬해 겨울 늦게 준공이 되어 개통식은 1933년 2월에 가지게 되었다.
개통식 당시 우리 고장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면서도 오복(五福)을 갖춘 노인을 앞장세우게 되었는데 수개리 이경운(벽진 이씨)이 의식이 풍족하고 증손까지 실패 없이 유자생녀(有子生女)하여 오복을 갖추었으므로 선임되어 갓을 썼는데 구슬갓끈을 늘어뜨리고서 군수와 군내 기관장 유지들과 함께 앞장서서 철교를 걸어서 건너갔다고 한다.
이때 사상 초유의 철교 다리를 구경하기 위하여 나온 사람들이 강 좌우에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며칠간 큰 잔치가 벌어졌다고 한다.

1920년 경 우리 고장에 처음 차가 등장하였으나 정기적 노선의 버스나 화물차가 다니기는 남지철교가 개통된 이후였다.
마산을 시발지로 하는 시외버스는 마산에 있었던 대야자동차부(大野自動車部)와 창녕에 있었던 창녕자동차회사(昌寧自動車會社) 등으로 남지를 통과하여 마산 - 창녕간을 운행했던 적도 있는데 경남자동차가 1932년 이후 정기적으로 운행되었다.
구포까지 낙동강을 오르내리던 큰 고배를 부리던 회사는 가와나미(川波)운송회사였으며 화물차 회사는 마루보시(丸星)운송회사도 있었다.

강 건너 계내리, 도로와 철교가 개설된 지점에는 홍포서원이 있었던 곳으로 이를 알리는 유허비가 있었는데 강제로 서편으로 옮겼으며, 동편에는 우리 고장의 선비 조간송 선생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있다.
산을 잘라 신작로를 냈는데 바위를 자르자 이곳 잘라진 바위틈에서 붉은 피가 몇 날 며칠을 흘러 내렸다는 소문이 그때 널리 유포되어 지금도 전설처럼 전해 온다.
철교 서쪽 절벽 위를 넓게 정지하여 공원을 조성하고 철교와 어울리게 벚꽃나무를 심고 철책과 간이의자 시설을 하였는데 이 근대적 풍경이 아름다워 남지 사람이라면 명절이나 봄 가을철 단풍놀이의 장소로 오랫동안 애용되어 왔으며, 남지둘(피수대)과 함께 청춘 남녀들의 산책길로 사랑을 받아 왔다.

철교의 길이는 340m이며 폭은 6m이고 철제 트러스의 높이는 6m이며, 계절의 변화에 따라 철제의 늘고 주는 것을 조절하는 이음 장치가 연결 부위마다 있어 눈길을 끈다. 허공 높이 있는 트러스의 상단 너비가 제법 넓어 간담이 큰 아이들이나 젊은이가 그 위에 올라가 뛰어 다니기도 하는데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서늘하게 하기도 한다.

 


  사진 ( 나룻배 전복으로 26명의 처녀들이 익사한 청송 )

    남지철교 상류쪽에 도흥나루가 있고 나루터 조금 위에 용화산 절벽이 웅장하게
    펼쳐져 있는 강변에  바위가 비스듬히 청석이 깔려 있는 청송이라 불리는 데가 있다.
    이곳에는 밤나무가 많아서 가을이  되면 밤을 따러 사람들이 많이 놀러 가는 곳이기도 하였다.
    1942년 이곳에서 남지 처녀 26명이 죽는  크나 큰 참사가 발생하였다.
    흔히 여름이면 강에 멱을 감다가 아이들이 익사하는 사고가 흔히 발생하였지만
    이러한 대형 사고는 우리 고장에서 처음 있었던 일이었다.

   이 도흥 나루터 일대는 용화산, 청송 일대로 통하여 경치가 좋아 가을이면 놀이꾼들이 많이 모여드는데
   1942년 가을, 추석 이튿날 인근 마을에 잘살며 내노라 하는 가문의 처녀들이 강 건너 청송으로 놀이를 갔다.
   밤을 따 삶아먹는 등 하루 종일 잘 놀고 오후 늦게 돌아가는 길에 사고가 난 것이었다.
   배가 낡아 평소 물이 새는 것에 솜뭉치를 막아 두었는데 작은 배에 사람이 많이 탔기 때문이
   배가 강 복판쯤에서 솜뭉치가 빠져버리고 뱃바닥에 물이 새 들어왔다.
   그러자 처녀들이 기겁을 하고 당황하여 배 한 쪽으로 쏠려 아우성을 쳤다.
   조금만 침착하였더라면 될 것을 처녀들이 우왕좌왕 하는 바람에 나룻배가 전복되면서 침몰해 버렸다.
   배에 탔던 처녀들이 물에 빠져 서로 붙들고 엉키니 26명이 한꺼번에 죽는 익사해 버리는
   대 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단지 한 명이 세퍼드 개꼬리를 잡고 살아났다고 한다.
그때 사고 소식을 들은 오덕수, 공또찬 등 남지 청년들이 달려가 구조에 나섰으나 아무도 살려내지 못했다고 한다.

 

 4) 달라지는 농사
 

이 시대의 농업은 새로운 영농기술과 품종의 개량 도입, 특히 다수확 되는 씨앗들이 보급되는 것으로 출발되어 재래식 영농에서 탈피하여 근대 영농의 시대가 열렸다.
특히 일인들이 우리 고장에 도입한 여러 가지 물건이나 작물을 우리 사람들은 "왜"라는 접두사를 붙여 불렀다.
왜인(倭人)이 들여 온 것이라 하는 뜻으로도 생각되지만, "왜"는 왜소하다 작다는 [倭]이기보다는 외래(外來) 외국(外國)의 [外]인데 이곳 사람들의 토박이 발음으로 [외]가 흔히 [왜]로 발음된 것으로 보인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왜콩과 왜밀이다.

송지들(松旨坪)이라 불리었던 낙동강변의 모래사장은 일부만 경작지로 활용하고 그 외는 쓸모 없이 버려져 있었다.
욱개둑(지금의 남포동 서편 남지철교 근처 들판)에서부터 용산리 앞까지, 또 창아지 마을 앞 칠현리 반포들, 월하리에 이르는 이 일대의 모래밭은 잡초나 소나무가 우거져 있었거나 마을 공동묘지이기도 하였다.
이 지대를 강제적으로 빼앗아 개간하고 심었던 것이 바로 왜콩과 왜밀이라 불리었던 땅콩(落花生)과 호밀(胡麥 ; 長麥이라 불리기도 했다)이었다.
소나무를 뽑고 땅을 갈기 위해 일인들은 우리 사람들에게 소나무를 뽑으면 그 나무를 그냥 공짜로 준다고 하자 땔나무가 궁했던 사람들이 다투어 나무를 베고 뿌리를 캐 갔다고 한다.
사람들이 다투어 소나무 뿌리까지 뽑아가기 위해 땅을 깊게 파게되니 자연히 개간이 되었던 것이다.
남지리 남포동일대에 있었던 남지공동묘지도 그렇게 개간되었으며 이곳에 있던 공동묘지는 학계리 덕동으로 옮겼다.
큰 힘들이지 않고 개간을 하게 된 일인들은 그 땅에 가을에는 왜밀을 심었고 봄에는 밀이랑 사이에 왜콩을 심었는데 여기에 얽힌 재미나는 이야기도 전한다.

처음 왜콩을 수확하여 놓고는 사람들에게 땅콩 까는 일을 시키면서,
"이것은 귀한 약재로 독이 있어서 만약 날로 먹기만 하면 죽어 버린다."고 엄포를 놓아 땅콩을 까는 도중 허실이 없도록 약은꾀를 썼다고 한다.
그러나 일인집 식모로 일했던 여자가 하루는 가만히 보니 주인 내외가 자기 몰래 땅콩을 볶아 저희들끼리 먹는 것을 보고서,
"아하! 저것도 먹는 것인데 왜놈들이 거짓말을 했구나!"
깨닫고서 자기도 몰래 조금 꺼내 볶아 먹어보니 죽지도 않았고 그렇게 맛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 후 땅콩이 어떻게 쓰이는지 알게 되고 수 년 후 너도나도 심게 되었다고 한다.

또 왜밀이라 불리는 호밀은 당시 간장이나 된장, 누룩을 만드는데 다량 소비되는 맥류로서 척박한 모래땅에서도 잘 자라고 봄철 가뭄에도 끄떡없이 자라서 수확할 수 있는 작물이었다.
모래밭에는 대체적으로 땅이 메말라 보리가 잘 자라지 않는데 호밀은 잘 자라고 키도 커서 호밀 짚은 초가 지붕을 잇는 이엉이나 울타리용으로 크게 각광을 받게 되었다.
또 특히 인기가 높은 것은 밀대로 만든 밀짚모자였다.
그때 값비싼 갓이나 중절모자가 있기도 했으나 햇빛을 가리며 일을 하는데는 신식 밀짚모자가 최상이었다.
밀대 큰 줄기를 잘라 모아 쪼갠 후 물에 축여 다듬은 후 머리를 땋듯 길게 땋아 모은 것을 기워서 밀짚모자를 만들었다.
이 일은 농가 부업으로 겨울 한 철 온 식구가 모여 앉아 밀짚을 땋아 팔면 귀한 용돈을 만질 수 있어 새로운 부업으로 각광 받았다.
또 새로운 문물로 들어 온 것이 곡식을 넣을 때는 섬 대신에 가마니였다.
손으로 새끼를 꼬던 것이 기계로 바뀌기도 하였고, 가마니틀이 보급되면서 농가 소득을 올리는 종목으로 가마니 짜기와 새끼 꼬기가 성행하게 되어 소 사료로만 쓰이던 볏짚이 가마니 짜는데 많이 사용되었다.

새끼는 오래 전부터 손으로 꼬아 사용해 왔으나 가마니는 전에는 없었다.
짚으로 엮어 만든 섬이나 둥우리가 곡식 담는 용구로 쓰였으나 엉성한 상태였으므로 낱알의 허실이 많았으며, 섬은 대체적으로 용량이 컸으므로 힘이 센 일꾼이 아니고서는 다루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결점을 보완한 가마니와 기계로 꼰 새끼는 질기고 여러 해 사용할 수 있어 농민들이 크게 환영하였고, 공출을 받을 때도 가마니를 썼으므로 농가의 필수품이 되었던 것이다.
그 외 개량품종들도 많이 보급되었는데 외래품이거나 신품종은 재래종과 구별되어 왜호박, 왜우엉, 왜상치 등 [왜]{外}짜가 붙어 구별되었다. 물론 여러 가지 농기구들도 개량 보급되자 왜낫, 왜쟁기 왜삽 등 "왜"짜가 든 새로운 기구들도 생겨났다.

 

5) 신설 기관들

새로운 문물들 중 빠트릴 수 없는 것들은 아무래도 우는 아이에게 "저게 순사가 온다"하면 울음을 뚝 그쳤다는 순사가 있는 순사주재소와 우표가 붙은 편지가 오고 가고 수 백리 밖의 목소리가 전선을 타고 와서 들려준다는 전화가 있는 우편소일 것이며, 개인 교습과 다름없는 서당식 수업이 아닌 신식 교육기관인 보통학교와 신작로 변에 있는 박래품을 파는 점방과 자장면과 우동, 밀가루로 만든 커다란 빵을 파는 중국인의 음식점이 아닐 수 없다.
또 담뱃불을 붙이려 들었다는 전기불도 빼놓을 수 없으며 종이로 말아 만든 [마꾸]라 불리는 권련식 담배도 귀한 신식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우리 고장에 맨 처음 순사 주재소가 들어선 때가 1911년 10월이다.
그전에는 남지순사주재소는 없었고 당시 영산군주재소에서 이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창녕군 관할이었던 남곡면도 따로 주재소가 없었고 1910년 7월 우리 군에 주재소가 처음으로 생길 때 창녕, 영산, 동산 등 3곳에 주재소가 생겼는데, 남곡면은 창녕주재소에서 도사면은 영산주재소에서 맡다가 1911년 도사면 남지리에 주재소를 분리 배치하고 도사 장가 마고 계성 등 4개 면을 관할하게 하였던 것이다.
1920년 6월 1일에는 구 남곡면의 일원이 남지주재소 관할로 들어오게 되었다.

주재소 위치나 건물 소재지는 맨 처음에는 남지리 본동 어물전 골목인 629-1번지에 있었다가 그 후 동포동 KTC가 있었던 모퉁이인 남지리 533-7로 옮겼다가 다시 남곡면사무소가 있었던 곳 맞은 편 북쪽으로 남지리 본동 지금 남지파출소 자리(남지리 616-7번지)로 올 때까지 두 번을 옮겼다.
건물은 1978년 옛 건물을 헐고 신축하였다.
주재소 설치와 함께 최신 소방마차가 딸린 의용소방대가 창설하게 되었는데 높다란 망대가 설치되고 그 망대에는 사이렌이 놓여져 통행금지시간 해제시간, 또는 정오(正午)를 알려주거나 불이 났을 때나 긴급 사태가 발생하였을 때 "왱- 왱-" 경보를 울려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군 했다.
청년들이 의용소방대에서 활동하였으며 초대 소방대장은 우에쓰게(植月)이었으며 부장은 정대수였다고 한다.
그 후 해방 후까지 이어져 정대수 서봉술 신성백 이태봉 등 여러 명이 의용소방대장을 지냈다.
대동아전쟁이 한창이던 때는 지금의 대신동 남지농협 공판장 입구에 방공감시소가 있어 적기의 내습을 알리는 공습경보 사이렌을 울리고 주민들로 하여금 공습피난 훈련이나 야간 등화관제 훈련을 시키기도 하였다.

남지우편소는 주재소의 서쪽 신작로 변으로 남지리 남포동 남지의원 터 모퉁이인 남지리 621-4에 1919년 9월 21일 개소되었다.
1906년 군내 유일의 창녕우편소가 개소된지 13년 후였는데 해방될 때까지 창녕군내에 겨우 4개의 우편국이 있었으니 상당히 일찍이 혜택과 편리를 본 듯하다.
최초의 우편소는 사설로 일본인 다게야먀(竹山)가 세우고 국장을 맡았다고 한다.
후에 우편소가 조금 서쪽인 남지리 남포 647-5(성모병원 터)로 옮겼는데 이때 우편국장은 오호자와(寶澤)란 일본인이었다고 한다.
1968년에 우체국이 대신동으로 이전 신축해감에 따라 그때의 건물은 헐리고 말았다.

남지금융조합도 바로 주재소 길 건너에 세워져 이 땅의 돈을 긁어모아 일본으로 가는 창구 역할을 맡아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1920년대에 남지 금융조합소가 있게된 이전 1912년에는 창녕금융조합이 예수금과 대부 업무 외에 총독부의 대행업무를 수행하는 등 농민을 위하기보다는 몇몇 지주나 부호들에게 혜택이 가는 일들이 많았다.
이 건물은 최근까지 존속되면서 농협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농협 구판장 등으로 사용되다가 헐리고 상가 아파트가 들어섰다.
또 남지금융합자회사도 본동쪽에 있었다고 한다.

전기의 가설은 1930년대였으며 변전소는 동리의 외각지대인 남지리 북쪽 현재 동포동(무지개아파트 길 건너편) 들 복판에 세워지고 전지회사 출장소 건물은 남포동 우편소 옆에 자리잡았다.
전기선은 특선과 일반선이 있어 특선은 공공 기관이나 왜인과 부자들에게 전기를 공급하는 선로였고, 일반 농민이나 면 소재지외곽이나 작은 마을들은 전기불의 혜택을 볼 수조차 없었다.
최초의 정미공장은 정대수가 시작한 동포동(현 흥국주유소 자리)정미소였으며 그후 박수문, 최원출 등의 정미소가 생겼는데 어느 해 큰 홍수 때 정대수가 규휼미를 정미소에서 내놓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 지금은 흔해 빠진 게 자동차이었지만 그때 그 시절은 자동차가 아니라 자전거가 아주 귀한 시절이었는데 최초의 자전거방은 본동 어물전 근처에 있었던 김영조 자전거방이었으며 그 후 동포동 김철주, 남포동 김조섭 자전거방 등이었다고 한다.
또 새로운 문물중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기독교 예배당의 등장인데 우리 군내 최초의 교회가 길곡면 오호리의 장로교회라면 1900년 같은 시기에 호주인 선교사 맹 목사와 전도사 김옥출이 선교하여 학계리 홍정 마을에 세워진 교회가 우리 읍의 최초 장로교회라 한다.
오호리가 마산-칠원-영산을 통하는 나루터 마을이었다면 홍정도 마산-함안-창녕으로 통하는 도흥나루가 있었던 마을이라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외국 종교의 첫 선교지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기록상 최초의 교회는 1926년에 세워진 남지장로교회이다.

 

6) 광복 전의 산업
 


   사진 ( 영남 수리조합 )

   영남수리, 당포수리 등 일인에 의해 개간된 수많은 농토가 일인 소유의 개인 농장으로
   들어가 버리고 그나마 남은 농토는 대지주들의 것이었으니 농민 대다수는 소작농으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비록 자영농가 일지라도 [대동아전쟁]이라는 세계2차대전의 수행을 위한 공출바람에
   쌀 한 톨 제대로 구경 못하고 사는 가난과 착취가 연속되는 생활이었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강 건너 함안군 칠서면 이룡리에 일본인이 1943년 농업속성전수학교를
   개교하고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인근 청년들에게 각종 시설채소의 재배법을 가르치고 직접 키워
   전국 주요 도시에 공급하기도하여 우리 고장의 영농 기술을 선도하기도 하였다 한다.
   또 일본인 거주자중 몇 명에 의해 오이 토마토 메론 같은 채소가 재배되었고 이것이 인근 지역민들에게
   확산 보급되게 이르렀다.
   이 영향으로 우리 고장이 수박 참외 오이 호박 무 배추 고추 등 채소재배에 상당한 기술을 축적할 수
   있었고 지금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온실재배에 크게 성과를 올리게 된 계기가 된 것이라 한다.

   모래밭에 땅콩과 호밀의 재배 확대로 이것들이 우리 고장의 특산물로 부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양잠도 장려되어 뽕나무밭 조성이 면행정 당국에서 강력하게 추진하여 홍포를 중심으로 밭과 야산, 심지어 밭 경계 언덕 울타리 등에까지 심겨지고 누에를 키우는 등 잠업이 성해졌다.
밭이 많았던 고곡지구와 성사 신전 등 우리 고장의 중부지역에는 목화를 대대적으로 심기도 하였다.
그 수확량이 굉장하게 많아 인근 면의 생산량까지 집하 처리하는 대규모 타면공장(打綿工場)인 남지면화공장이 남지리 남포동에 들어서기도 했다.
이 공장은 해방 후 까지 운영되었으나 그 후 면화의 생산량 감소와 함께 퇴조되어 수십 년간 공장이 그대로 방치되어 건물의 퇴락이 말할 수 없었으나 1989년 낡은 건물을 철거하고 상가와 아파트 건물 3동을 신축 개발되었다.
또 콩이 많이 생산되었으므로 남지리 동포동에 장유공장(醬油工場)이 있었는데 이 역시 해방후 문을 닫았다.
이 건물에는 남지고등학교가 1952년 개교 때 교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쌀의 생산량은 김해평야에 이어 경남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평야인 영남수리조합 구역이 있어 동포들과 마산수리 등의 개간이 계속돼 쌀 생산이 해마다 증산되었다.
따라서 벼를 도정하고 보관하는 대규모의 도정공장이 설립되었는데 남지리 동포동에 있었던 것은 천기(川崎) 식량영단(사장:일본인 川崎: 가와가미)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후에 남포동에도 설립되었는데 산업회사 또는 산업조합(사장 심흥섭)이라 불렸다.
지금 남포동의 도정공장은 존속되고 있으나 동포동의 공장은 해방 후 수년간 존속되었으나 끝내 문을 닫았다.
1948년 동쪽편 창고에 남지중학교가 들어선 후 점차 중학교 교사로 일부 활용되었으며 중년에는 남지고등학교 교사로 사용되었다.
최근 다 철거되고 주택과 상가가 들어섰다.

벼 품종의 개량과 함께 볏짚을 이용한 농가의 농한기 부업으로 급부상한 것이 가마니 짜기와 기계 새끼 꼬기 등 고공품 생산으로 가마니틀과 새끼틀이 대량 보급되어 우리 고장의 생산량이 경상남도 내에서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공업 부문으로는 학계와 시남 이이목에 옹기를 생산하는 옹기굴이 있었고, 홍정에 기와를 생산하는 기와공장이 있었으며 남지리 남포와 신전리에 놋그릇을 생산하는 공장이 있었다.


 3. 광복 후( 後 )의 우리 고장

1) 광복과 혼란

1945년 8월 어두운 역사는 끝났다.
해방이 된 것이다.
며칠간 우리 고장은 곳곳에 만세 소리가 들리고 감격과 흥분에 들뜬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면내를 휩쓸었다.
일본인들이 황급히 달아나려고 할 때 우리 고장 사람들은 옛날 그들에게 당했던 갖가지 수모를 잊고 너그럽게 아량을 베풀어 보복이나 폭행이 없도록 하여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고 한다.
권경수(權炅洙 : 1934년 취임)면장의 후임이었던 정정수(鄭丁守: 1940년 면장 취임 후에 일본인 면장 취임으로 부면장으로 됨)면장이 조난(遭難)당하는 불상사가 일어난 외에 우리 고장에는 큰 사건은 없이 해방 후의 혼란상은 적었다.
해방 당시 일본인 면장 농천(瀧川鐵之助)는 남지에 살았던 동족을 이끌고 진작 달아나 버렸으나 면사무소 [사령원부]에 의하면 [원에 의하여 사직]한 것처럼 그것도 뒤늦게 1945년 12월 31일에야 사후정리가 되어 있으니 이것을 보면 그때 지방 행정의 혼란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 고장 청년들의 자치적인 조직과 활동이 두드러졌는데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산하의 조직이 생겨 남지의 건준위원장은 최영수가, 치안대장은 김 모씨가 맡아 해방 직후의 혼란을 막고자 노력하였다 한다.
또 해방의 기쁨을 면민들에게 전하고 축하하기 위한 행사가 있었는데 김장학, 남재희, 남상익, 김해권 등 청년들이 미군과 한국인, 일인 경찰과 사무라이, 여러 나라 사람들로 분장을 한 가장 행렬을 꾸며 농악대와 함께 남지 시가지를 행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남지계몽청년회의 조직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박대근(본동 거주) 최장수를 비롯하여 많은 청년들이 참여하였다.
남지계몽청년회가 1946년도에 주로 활동한 분야는 남지읍 일원에 야간학교를 통해 한글을 가르치는 계몽운동과 교사를 양성하는 것을 6개월간 실시하였으며, 미군 진주를 환영하는 플랜카드를 영문으로 제작하여 거리에 게시하는 등 여러 가지 행사를 하였다.

 


  사진 <해방의 기쁨을 널리 알린 남지청년들의 가장행렬>

   또 청년들이 주도하여 치안을 자치적으로 유지하였는데 그것이 곧 오덕수, 공또찬, 심술섭 등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대한청년단의 활동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후에 6 25때는 경찰과 협조하는 남지의용경찰대가 되어 치안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한다.

   해방이 되어 일본인이 버리고 간 집들을 적산가옥이라 하여 사람들이 들어가 살게 되었고,
   수년 후 토지 개혁이 실시되면서 일인들의 토지는 경작하던 농민들에게 분배되기도 하였으나
   해방 후 이내 불어닥친 좌우익 이념대립 편가르기는 이곳을 혼란과 분란의 도가니로 몰아 넣기도
   하였으나 다른 지방에 비하여 그 기간이나 피해는 적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일본으로 건너가 살았거나 군대나 강제 징용 등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돌아오는 이들이 바로 귀환동포들이었다.
   귀환동포가 갑자기 많이 몰려드니 의식주 문제가 어렵게 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해주 오씨 선산 근처인 송지평(지금의 남지리 서동) 남지둘 북쪽에 임시 수용소를
   마련하여 집단적으로 거주하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칠칸 나래비집] 동리라는 말이 남아 있다.
   미군의 원조 물자가 상당하게 나와 이들에게 도움을 주었으나 어려움을 이겨내고 자립하게 되기에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2) 불붙는 교육열과 학교 신설

우리 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급속하게 성장 발달하게 된 원인이나 힘은 뜨거운 교육열 때문이었다고 한 것처럼 우리 고장에도 해방이 되자 제일 먼저 불붙은 것이 다름 아닌 향학열이었고, 부모들의 뜨거운 교육열이었다. 한글을 깨우치겠다는 운동이 자발적으로 마을마다 일어나 한글을 가르치는 야학당이 골골마다 생겼으며, 글을 배우겠다는 사람들이 남녀노유를 막론하고 학교나 야학을 찾았다.

우리 고장은 해방되기까지 지금의 남지초등학교인 남지공립보통학교가 1921년 개교하여 있었고, 지금의 남곡초등학교인 남곡간이학교가 1933년 4월에, 반포간이학교와 월상간이학교가 각각 1941년 7월에 개교하여 있었고, 일인을 위한 소학교로 지금의 동포초등학교 자리에 남지심상소학교가 학생 교육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학교나 고등학교는 없었기 때문에 이곳 학생들은 진학을 하자면 1926년에 개교한 영산면의 영산중학교나 외지 도시로 유학을 나가야만 했다.

해방이 되자 일인 자녀만을 위한 학교였던 남지심상소학교는 폐교되고 그 자리에 남지국민학교의 분교로, 잠시 후 동포국민학교가 1945년 9월에 개교되고 반포간이학교도 국민학교로 승격되니 우리 고장에는 국민학교가 남지, 동포, 남곡, 반포, 등 4개교로 늘어났다.

중학교의 개교도 2년 후에 이루어 졌는데 지방 유지들의 큰 호응과 출연으로 2학급 규모로 남지중등공민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아 당시 남지공회당(현재 남지읍사무소 자리)에서 1947년 4월에 개교, 첫 수업을 시작하였는데 초대 교장으로는 김해권(金海權)이 취임하였다. 그 후 식량영단의 건물(곡물 창고)로 이전하여 학급수를 늘이는 등 중학교는 이 지방의 중등교육기관으로 날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남지학원은 군내 사립교육재단으로서는 가장 처음 설립된 것으로 크게 평가되고 있다. 또 중등학교가 개교됨에 따라 남지읍 발전의 원동력이 된 많은 졸업생을 배출해 냈다.

이제는 학교법인 남지학원 산하에는 남지중학교 뿐만 아니라 남지여중, 남곡중, 남지고등학교 등 여러 학교를 개교하여 경남도내에서도 유수한 교육재단으로 성장하였다.

 

3) 처음 치른 국회의원 선거

1948년 5월 10일 실시한 제헌 국회의원 선거는 우리 고장 사람들에게는 생전 처음 가져보는 민주 시민으로서의 국민 주권 행사였으며 당당한 유권자의 한 표는 소중하고도 귀한 것이었다.

사상 초유의 국회의원 선거에 우리 군에서는 5명의 후보자가 입후보하였는데 그 중 19,430표를 득표한 구중회(具中會)후보가 당선되었다. 이때 우리 고장 출신 입후보자는 당시 32세였던 남지중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던 김해권으로 대한 독립촉성국민회의 공천을 받아 출마했는데 많은 면민들의 열렬한 성원과 운동이 있었으나 7,436표를 얻고 낙선하였다. 이때 전국적으로 선거를 방해하려는 세력의 공작이 치열하여 밤이면 횃불과 구호를 외치는 함성이 곳곳에서 들리기도 하여 국내에서는 여러 불상사가 발생하였으나 우리 고장은 별 탈없이 투표를 마쳤던 것이다.

두 번째의 국회의원(민의원) 선거는 6 25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바로 전인 1950년 5월 30일에 있었다.

이때도 이 고장의 출신 인사로는 김해권이 입후보하였다. 이번 선거는 전보다 더 조직적이고 유권자들의 관심도 높아 선거 운동 열기가 대단했다. 선거 연설은 찬조 연설과 출마자의 연설회 등으로 장날마다 막걸리 국수 파티 등 선심공세도 펼쳐져 후한 촌 인심을 유감없이 발휘되기도 하는 등 선거 유세와 함께 그 열풍이 대단했다. 확성기를 매단 자동차가 동리동리 마다 다니며 한 표를 달라고 외쳐 댔다. 자가용 승용차가 없거나 택시를 대절할 형편이 안 되는 후보자는 지게, 손수레에다 스피커를 매달고 다니며 가두 연설을 했다. 매일 성찬을 베풀거나 동성 동향 동년배 동창 일가 친척에 사돈 팔촌, 연줄이란 연줄은 다 찾아다니며 득표 활동을 벌렸다. 따라서 유권자의 귀한 한 표를 얻기 위하여 읍소를 하는 등 기묘한 방법도 다 동원되어 정견이나 경력, 정당보다는 학연 지연, 인정과 문중 문벌 등에 호소하였다. 하여간 민주화의 과정은 서툴었지만 그런 대로 착실히 진행된 셈이라 할 것이다.

군내 10명의 후보자가 나섰는데 유권자 56,194명, 투표자 54,271명으로 그 중 9,779표를 얻은 신용훈(辛容勳)후보가 당선되었고, 우리 면 출신 김해권후보는 1,293표 차인 8,486표를 얻어 아깝게도 차점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4) 지방자치제의 실시

1952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됨에 따라 면의회와 도의회 구성을 위하여 면의회의원 선거, 도의회의원 선거 등이 실시되었다. 이 선거는 국회의원 선거와는 또 다른 선거 열풍이 전국 어디서나 심심 산골 작은 마을까지 휘몰아쳐 인심을 갈라놓거나 선거 때문에 재산을 날리는 일도 속출하게 되었다. 우리 고장도 예외는 아니어서 선거 열기가 상당히 달아올라서 뜨거운 선거 운동이 전개되었다.

선거 결과 14명이 면의원 선거에서 당선, 면의회를 구성하게 되어 처음으로 지방 자치가 그 막을 열게 되었다.

곧이어 그 해 5월 10일에 도의회의원 선거가 시행되었는데 우리 고장은 창녕군 제3선거구였으며 용산리 출신 조찬규후보가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9,230표를 얻어 당선되었으며, 마산리 홍포 출신 권연수는 창녕군 북부지역인 제1선거구에서 출마하여 당선, 우리 고장에는 2명의 도의원을 배출되는 경사를 맞기도 하였다.

그 이후 1956년에는 면의회의원, 면장, 도의회의원 선거가 연달아 있었으며, 1960년 4 19혁명 후에도 지방자치단체 선거가 시행되었는데 이때는 면의회의원, 도의회의원 선거와 함께 면장 선거뿐만 아니라 도지사 선거, 국회의원 선거도 있어 혁명의 열기와 함께 선거 바람이 불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방자치제는 처음 시작된 제도였으므로 시행 착오도 있었지만 지역민의 자치적인 정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과 향토

1. 개황


사진설명  ( 이이목 나루 )

한국전쟁은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우리 고장에도 크나 큰 손실을 가져왔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勃發)된 전쟁이 1953년 7월 휴전으로 끝날 때까지 전 국토뿐만 아니라 우리 남지읍내에서도 많은 인명이 희생되고 엄청난 재산이 회진되었으며, 하루아침에 전 재산이 불에 타 사라지게 되었으며 고생이 극심했던 피난생활로 거지꼴이 안된 이가 없었으니 그 피해를 열거하려면 무한할 것이다.

우리 고장은 낙동강의 교두보(橋頭堡)로 또 반격의 기회를 포착, 승전으로 이끌게 했던 격전지여서 [낙동강 돌출부(突出部)]라 명명되어 전사(戰史)에 기록되었던 곳이다.

1950년 그해 여름은 대체적으로 큰비가 없어 낙동강에 큰 홍수가 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먼저 말해 두고 싶다. 만약 큰물이 들어 모든 농작물이 물 아래로 들어가 버렸다면 농사를 지어 놓고 피란(避亂)을 떠나야 하였던 면민들이 피란살이에서 돌아와 수확할 아무 건덕지도 없었을 것이니 더욱 큰 곤경에 빠졌을 것인데 천행으로 그 해에는 홍수다운 홍수가 없었다. 그래서 8월에 피란을 떠났던 면민들이 돌아와 보니 논의 벼는 알알이 여물어 있었고, 강가 모래밭에 심은 땅콩과 고구마도 홍수 피해를 입지 않아서 수확하여보니 다른 해보다 량이 더 많은 풍년이었다. 단지 배추 무 등 채소가 없어 반찬 걱정은 있었겠지만 뒤늦게 심은 것으로 김치를 담을 수는 있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의 경과나 종말에 대하여 전국적인 사실 부분보다는 우리 고장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 부분만을 기술하여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따라서 1950년 8월에서 9월, 2개월에 걸쳐 이 지역 일대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므로 이 시기를 중심으로 하여 남지읍 지역의 전투 상황을 {향토수호사}와 {창녕군지}의 기록을 참고하여 집중적으로 다루어 보고자 한다.

1950년 8월 공세와 9월의 전투 상황과 전후 생활상 등으로 구분 기술코자 한다.

 

2. 최후의 방어선 남지

 1) 낙동강 교두보

1950년 6월 25일 발발된 한국전쟁은 인민군의 공격으로 초장에는 밀리기만 했다. 시일이 갈수록 후퇴하는 국군과 뒤늦게 참전하였던 유엔군은 지연작전을 펴면서 퇴각하여 시간적 여유를 얻게 되면서도 낙동강까지 와서야 전열을 가다듬게 되었다.

1950년 7월 31일경에는 유엔군은 낙동강이라는 장애물을 사이에 두고 인민군과 포진하는 형세로 반격의 발판을 굳혔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창녕군은 부산의 서부 방어선으로서 미(美) 제24사단이 주둔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우리 고장은 치열한 전투가 3개월간 계속되는 전장(戰場)이 되었고 전략상으로 중요한 낙동강 교두보로 돌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창녕에는 의령과 합천 경찰서에서 철수했던 경찰 등과 함께 창녕경찰서에는 경찰대 2개 병력이 있었고, 대한청년단과 의용경찰 등 지방의 애국청년들로 구성 편성된 지방 자치 병력이 500여명 있었다. 이들의 주임무는 치안 유지와 경계근무였다.

미 24사단은 창녕에 와서 창녕읍에 사단 본부와 제19연대를 주둔시켰으며, 전방으로 나아가 유어면 현창리 적포교 일대와 낙동강 동쪽편 강안에 포진하였다. 이때 우리 고장 북부 고곡지구에는 24사단 34연대 제3대대가 강을 건너려는 인민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또 월하리에서 낙동강을 따라 용산리까지 강변지역에는 미 34연대 병력이 주둔하여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창녕을 넘보던 인민군은 제4사단으로 전쟁 개시 후 선봉에 서서 서울을 점령하고 남하한 사단으로 거창 합천을 거쳐 강 건너 의령지방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2) 주민 소개(疏開)

이때 북쪽 지방과 합천 의령등지의 피란민들이 창녕군 관내로 밀려들어 우왕좌왕 하였으며, 또 50년 8월 3일경 인민군의 공격이 임박해지자 당국에서는 낙동강 일대에서 민간인을 멀리 격리시키고자 위험지역을 떠나라는 소개령을 내리게 되었다. 즉 마구선 국도를 기준해서 그 서쪽편 주민들은 모두 동쪽으로 퇴거하도록 명령을 했던 것이다.

이 바람에 우리 고장 사람들도 집을 떠날 수밖에 없어 고곡지구는 영산 쪽으로, 성사 신전지구는 도천 쪽으로, 그 외의 남지 사람들은 마구선 동쪽인 본동 남포동으로 남부여대(男負女戴) 짐을 꾸려 산야로 친척집으로 옮겨야 했다.

인민군이 강을 도하하여 영산-밀양-부산으로 향하여 나가려면 먼저 남지지역에서 격전이 벌어질 것이 예견되었으므로 소개령은 불가피한 조치였으나 당국은 자세한 상황을 주민에게 홍보하지 않은 채 긴급 소개령만 내렸던 것이다. 그래서 민심도 흉흉해 지고 불안에 떨게 되었다. 긴박한 소개령은 일시적인 것일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변변한 준비 없이 맨몸에 식량이나 가사도구도 변변히 준비하지도 못하고 집을 떠났다가 며칠 후 인민군의 도하로 전쟁상황이 급박해지자 때 그냥 피란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피란생활 중 심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미군은 8월 2일 창녕군내에 부대 배치를 완료하고 또 군민에 대해서 강변으로부터 8km 이내 지역의 빠른 확보를 위하여 전단을 뿌리고 확성기로 방송을 하며 주민 소개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병자나 노인이 있는 가정에서는 피란을 떠나지 못하고 있기도 하였다. 그래서 명령지역안에서 퇴거를 하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 사살하겠다는 포고를 내리기도 하였다.

인민군의 공격이 곧 있을 것이라 예상되던 때, 의령군 쪽에서 10만 여명의 피란민들이 뒤늦게 밀려들자 아예 강을 건너오지 못하도록 미군은 그들 바로 앞에 포격을 가하는 등 위협해서 흩어지게 만들어 강을 건너오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적 게릴라들이 민간인 복장으로 위장을 하고서 주민들과 뒤섞여 침투해 올 것을 예상하여 피란민들을 막아 버린 것이다.

불안과 공포 속에서 가재 도구와 집을 내버려두고 간단한 취사 도구와 침구 그리고 이고 지고 운반할 수 있을 만큼의 식량만을 지니고 나선 사람들은 영산이나 송진 도천 등지에서 친척집이나 야산 들판에서 솥을 걸고 끝이 언제일지 모를 피란생활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 당시 창녕 영산 부근에 모인 피란민들이 30여만이나 되었는데 전투가 치열해지자 부산방면, 밀양과 김해지방으로 가도록 유도하기도 하였다. 차를 얻어 타고 가기에는 차량이 태부족이었으므로 대부분 도보로 먼길을 떠나야 했다.

인민군은 8월 15일까지 "부산 해방"이란 시한부 임무 수행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위해 이른바 "8월공세"를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3. 남지 지구 제 일차 전투

1) 이이목나루의 기습 도하 (1950. 8. 6)

(1) 기습 도하 공격

1950년 8월, 고곡리 남곡국민학교에는 미 제3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8월 6일 새벽 1시, 불시에 이들 미군은 인민군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4.2인치 박격포대가 습격을 받아 순식간에 분산되어 버렸다.

"박격포대와 대대본부가 병력 미상의 기습을 받고 분산되었다."

습격 사실을 제3대대장 진즈 페레즈 중령이 미 34연대장 찰즈 E. 뷰참포 대령에게 새벽 2시에 보고했는데 그때까지도 인민군이 낙동강을 건넜다는 도하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연대장은 습격 사실을 보고 받고는 일선 중대에 연락했으나 별 이상 없다는 보고를 받고서 적당한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이것을 보면 이이목나루의 도하는 칠흑 같은 한밤중에 일어났으므로 어느 중대에서도 적의 침투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군은 이이목 도하를 상당한 시간동안 몰랐던 것 같다.

L중대로부터 "중대 좌익에 적의 공격이 있어 일부가 밀렸다." 하는 보고가 들어오자, 연대장은 박진나루로 인민군이 도하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월하리 박진나루는 자동차를 건네줄 수 있는 큰 나루로 인민군이 가장 먼저 도하하리라 예상하고서 미군이 굳게 지키고 있었던 곳이었다. 연대장은 아침에 제1대대로 하여금 반격하게 했다. 그러나 인민군은 이이목나루를 도하한 다음 시남 수개 고곡 등 산야에 은신하고 있었으므로 고곡을 거쳐 대곡까지 진출하려는 미군에게 맹렬한 사격으로 공격을 가하였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미군은 많은 사상자만 내고 월하까지의 진출은 좌절되고 말았다.

 

(2) 도하 방법


 사진설명  ( 이이목 고개 )

당시 기록을 보면 인민군은 8월 6일 새벽 0시에 시남리 이이목나루{烏項津}로 도하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 인민군은 창녕을 향해 두 곳에서 낙동강 도하를 시도하였는데 이곳만 성공했던 것이다. 인민군 주력부대가 도하하리라 예상했던 유어면 쪽은 경계가 철저하여 유어면 부곡리 마수원 여눕나루로 도하를 시작하자마자 백사장의 지뢰밭에 걸려 100여명이 죽었으며 곧 미군에게 발견되고 말았다. 조명탄이 터지고 미군의 기관총 사격과 포격으로 도하는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이목의 도하는 미군에게 발각되지 않고 순조롭게 진행 성공하였던 것이다.

강을 건넌 방법은 근처에 배가 있었을 리 만무했으므로 뗏목을 만들어 강을 건너기도 했으나 대부분 옷과 신발을 벗어 무기와 함께 똘똘 말아 머리위로 높이 이고 어깨까지 차는 강물을 건넜던 것이다. 이때 인민군 제4사단 제 16연대 주력 800여명이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시남리 고개를 넘어 안쪽으로 들어 왔는데 미 34연대 1대대가 시남리 청단고지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몰랐던 것이다. 아마 미군은 이이목나루나 시남고개에 감시병을 배치하지 않았던 것 같으며, 지형지물을 이용도 못했고, 현지 지형에 관한 지식도 없었던 것 같다.

인민군은 강을 건넌 후 옷을 입고 소대 단위로 정적에 잠긴 수개리 쪽으로 남하하였다. 그들의 목표는 영산이었다. 공용 화기는 없이 개인 화기만 가지고 있어 미군이 지키고 있는 고지를 공격하지 않고 피하면서 3km나 골짜기를 내려와 남곡국민학교에 있던 박격포대를 공격했던 것이다.

 

(3) 첫 도하지점

처음 도하지점이 시남리 이이목이란 전사의 기록과는 달리 미처 피란을 못나가고 있었던 주민들의 증언을 들으면 이이목 뿐만 아니라 월하리 마을앞 모래사장으로도 많은 병력이 도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낙서면 전화리에서 월하리 조금 북쪽 모래사장 사이에는 그 당시 가물어서 강물이 줄어 그 강폭이 좁아져 있었으며 강물도 그리 깊지 않고 얕았다고 한다.

당시의 상황도를 보면 도하 지점이 두 곳으로 표시되어 있어 주민들의 증언이 사실임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또 주민들이 목격하였다는 인민군의 도하는 어쩌면 새벽 0시에 감행된 최초의 도하라기보다 그 후인 새벽의 도하를 본 것이 아닌가 한다.

(4) 도하 성공 이유

북쪽에서 흘러오던 낙동강이 이이목에서 서쪽으로 굽어 흐르며 우리 읍을 감싸 돌아 흐르는 지형을 당시 작전 군인들은 [낙동강 돌출지역]이라 하였고 전투 참가 장병들은 [낙동강 시절]이라 불렀다고 한다.

붉고 노란 신호탄이 심야에 공중으로 오르고 인민군 4사단 16연대 병력의 도하가 시작되고서 우리 고장 지역 일대의 전투는 40여 일 간(1950. 8. 6∼9. 15) 지속되어 마을이 불타고 가산은 풍비 박산 되면서 수많은 피란민과 함께 인명 피해가 엄청났던 포격과 폭격이 시작되었다.

미군의 경계가 철저했는데 왜 도하가 가능했는가?

첫째는 적의 주공(主攻) 지점을 잘못 예상했던 것이다.

인민군의 공격이 창녕의 정면과 연결되는 유어면 쪽일 것이라고 미 24사단(사단장 존 H. 처치준장)이 판단했던 것이다. 유어에는 도하할 만한 지점도 많았고, 지형도 보병 공격에 적합한 곳이었지만 방어하는 쪽에서는 도로가 적어 반격이나 증원이 어렵다는 약점이 있어 인민군이 이 약점을 노려 공격지점으로 선택할 것이라고 미군은 판단하고 있었다.

둘째로 공격 시기의 오판이었다.

인민군은 하루 빨리 공격하고 싶겠지만 도하 자재가 부족하므로 8월 10일 전후가 되어야 도하 준비가 완료되고 공격하리라는 예상이었다.

셋째로는 아군의 방어 진지가 미흡하였다. 8월 2일 배치를 마치고 개인호를 파는 등 방어진지를 구축하기는 하였지만 시남리 이이목나루에는 한 명의 척후병도 내 보내지 않는 등 지형 지세를 너무나 몰랐던 것 같다.

 

2) 낙동강 시절의 시작 (1950. 8. 6 - )

[낙동강 시절]이란 1950년 8월 6일부터 8월 19일까지 14일간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제1차 남지지구 전투의 또 다른 이름이다. 미군 병사들이 힘을 다해 남강과의 합류지점(용산리 기강나루)에서부터 상류 유어면 경계까지 이르는 넒은 반원형의 고리{環}를 형성하고 있는 낙동강 돌출지역에서 인민군을 격퇴할 때까지 14일간에 걸쳐 치열했던 격전기간을 [낙동강 시절]이라 불렀다고 한다.

따라서 8월 6일, 맨 첫 날의 전투 상황을 {향토수호사}의 기록을 그대로 전재(轉載)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전투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계속 계곡 통로를 따라 전진하던 적은 도하지점에서 약 3km 거리에 위치한 제3대대 지휘소와 4.2인치 박격포 진지를 유린했다. 적의 공격을 받자 대부분의 미군 병사들은 무질서하게 분산되었으며 박격포 진지 부근에 위치했던 제3대대장이 약 5km 철수하여 제1대대 지휘소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제1대대장은 적의 도하를 알게 되었다. 또한 사단이 적의 도하를 최초로 보고 받은 시간은 적이 도하를 개시한 2시간 후인 8월 6일 02:00시였다.

제34연대 우전방 정면의 강변(낙동강 돌출지역)에 배치된 3개 중대 중 제9, 11중대는 전혀 적의 공격을 받지 않았지만 제10중대만은 적 도하 얼마 후 적의 공격을 받아 약 3km 후방으로 철수했다. 제10중대의 철수로 적에게 노출된 제13야포대대 포대 역시 4문의 곡사포와 9대의 차량을 버려 둔 채 철수했다.

제3대대 방어 진지를 돌파 당했다는 보고를 받은 제34연대장(비오챔프 대령)은 제1대대장에게 역습을 명령했다. 제1대대는 바로 전날 187명의 보충병을 받아 아직 제대로 재편성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역습 명령을 받은 대대장은 우선 제3중대를 차량화 하여 인솔하고 전방으로 떠나면서 부(副)대대장에게 지체없이 잔여 대대 병력을 도보로 인솔하여 후속 하도록 지시했다. 대대장이 참모들과 함께 짚차로 텅 빈 제3대대 지휘소에 도착했을 때 적은 보이지 않았으나 대대장 일행이 주변의 지형을 분석하면서 후속하고 있는 중대의 투입 계획을 구상하고 있을 무렵 돌연 전방 어봉리 서편 고지로부터 적의 사격을 받았다. 때마침 트럭에서 하차 중에 있던 제3중대 병사들이 적의 사격을 받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대대장은 재3중대장 앨릿쥐 대위(며칠전 부임)에게 지체없이 전방 고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앨릿쥐 대위는 중대를 이끌고 치열한 사격이 가해져 오고 있는 전방고지를 향해 공격을 했다. 적의 사격이 너무나 치열하여 공격은 곧 돈좌(頓挫)되고 말았다. 대대장은 도로변의 배수구에 엎드려 전황을 관망하고 있었고 그의 곁에서는 화기 소대장이 60mm 박격포의 사격을 지휘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박격포탄이 떨어질 때까지 어봉리 능선 정상에 포탄을 퍼붓듯이 사격하고 있었다.

얼마 후 포탄의 소진으로 박격포의 지원 사격마저 멎자 제3중대의 공격은 벽에 부딪치는 듯했다. 양호한 관측과 사계를 이용한 엄폐된 진지로부터 적의 소화기 및 자동화기의 집중 사격으로 많은 부상자를 낸 제3중대의 공격 대열은 분산되기 시작했다.

한편 적의 사격이 주변에 지향되자 대대장 아이레스 중령은 배수구를 뛰쳐나와 논바닥을 가로지른 후 약간 떨어진 도로 남쪽의 외딴 방앗간으로 뛰어 들었다. 공격간 제3중대장은 두 차례나 부상을 입고도 부대 지휘를 계속했으나 세 번째의 부상으로 끝내 후송되고 말았다. 중대장 마저 후송되자 공격 대열은 분산되기 시작했고 이들 중 대부분의 병사들은 대대장이 피신한 방앗간으로 몰려들었다. 제1대대 지휘소에서 위급한 전황을 보고 받은 연대장은 제3대대 부대대장 지휘하에 도보 행군으로 막 도착한 제1, 2중대를 직접 지휘하여 신속히 전방으로 투입했다.

0.5인치 기관총 4대가 탑재된 2대의 대공화기 차량을 앞세우고 전진하던 제1, 2중대가 이날 오후 늦게 방앗간에 도착하여 수 십 미터 거리에 포진하고 있던 적을 격퇴함으로써 방앗간을 거점으로 적의 포위망 속에서 장시간 악전고투하고 있던 대대장 이하 제3중대 병사들이 구출되었다.

이들은 전우의 시체를 방앗간의 외부에 쌓아 올려 적탄을 막았으며 제1, 2중대에 의거 구출되었을 때 제3중대의 생존 병력은 35명에 불과했다. 제1중대와 제2중대를 동시에 병진 투입한 제1대대의 역습은 비교적 순조롭게 실시되어 그날(8월 6일) 20:00시경에는 적의 주력을 강 건너로 격퇴하고 제9중대(적 도하 후 무단 철수)와 제10중대가 원진지로 복귀하였다.}

 

3) 두곡(頭谷)지구의 전투(1950. 8. 7 - 8. 14)


 사진설명  ( 두곡 고지 )

(1) 클로버리프 고지의 전황

고곡리 두곡지구를 전사에서는 [클로버리프(clover leafer : 클로버잎) 고지]라 불렀는데 두곡리 일대 고지들의 총칭이다.

이 고지는 두곡 뒷산에서 수개리 접곡 미곡과 장마면 동정리 하이곡과 상이곡에 걸쳐 있는 산줄기로 산의 능선이 마치 클로버 잎같이 세 개의 봉우리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클로버 잎의 자루격인 아지리 동쪽의 산인 대봉리의 산줄기를 [어봉리 능선]이라 불렀는데 두곡마을 앞 엄나무진고개에서 성사리 대성마을까지 뻗은 4km에 걸친 능선으로 이 두곡 고지와 능선에서 여러 차례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일진일퇴를 거듭하게 된다.

전황(戰況)은 극히 아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됐으며 당시의 전투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2) 엄나무진고개의 전투

{또한 사단의 가용한 전 포병(105mm 7문, 155mm 12문)은 도하 예상 지역에 포격을 계속함으로써 북괴군의 도하 기도를 완전히 근절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날밤 자정이 지나자 적은 다시 4개 지점에서 일제히 도하를 개시하여 다음날(8월 7일) 새벽에는 최초 도하시와는 달리 <낙동강 돌출지역>내의 요지인 어봉리 능선과 두곡리 서편에서 북으로 뻗은 클로버잎 고지(△165)를 신속히 장악하고 말았다.

고지의 모양이 클로버 잎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으며 남북으로 4km나 뻗은 양지고개는 적이 이를 장악할 경우 9km 동쪽의 영산지역은 물론 하남(영산 동남 20km )에 이르는 미제24사단의 주보급로를 깊숙이 감제 관측할 수 있는 중요지형으로써 <낙동강 돌출지역>전투의 승패를 좌우하는 전술적 요충지였다.

8월 7일 아침, 제1대대는 이토록 중요한 양지(兩地) 고개를 탈환하기 위하여 다시 역습을 시도했으나 우세한 적의 병력과 지형적인 불리 그리고 혹심한 더위와 식수 부족 등으로 피해만 증대되어 갈 뿐 아무런 작전의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제1대대의 공격이 난관에 봉착되자 처치장군은 창녕에서 재편성중에 있는 제19연대를 투입하여 양개 고지의 탈환을 다시 시도해 보았으나 점차 증강일로에 있는 적을 격퇴할 수는 없었으며 아군의 피해는 증대되어 갔다. 8월 8일 제34연대의 병력은 1,000명선으로 제19연대는 1,700명선으로 감소되었고 사단의 전투력은 40%로 평가되고 있었다.}

 

(3) 힐 특수임무부대의 공격

{미8군사령관 워커장군은 서부지역의 심각한 전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온전한 전투력을 갖춘 미제2사단 제9연대를 제24사단에 배속시켰다.

제24사단장 처치장군은 제9연대가 증원됨에 따라 [돌출지역]내에서 적과 교전중인 모든 전투 부대를 제9연대장 힐(Hill)대령에게 배속시켜 [힐]특수임무부대를 구성, 적이 장악하고 있는 고지(어봉리능선, 클로버잎고지)의 탈취를 재 시도했으나 일진일퇴의 치열한 격전만 되풀이 될 뿐 전세는 점차 우군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갔다.

이때 창녕, 의령, 합천경찰서 둥 치안국 소속 합동경찰대 2개대대와 대한 청년단 의용 경찰, 특공대 등 애국청년들로 편성된 지방 자치 병력 50여명이 작전을 도와 피난민 처리와 보급품 수송에 앞장섰다. 8월 10일 밤, 적은 그 동안 은밀리에 가설한 수중교(물 속에 모래주머니를 쌓아서 만든 다리)를 이용, 12문의 야포를 위시한 각종 중화기와 수대의 전차까지도 도강시켜 방어력을 증가시켰으며 남지교(좌 인접 미제25사단과 유일한 통로)마저도 적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4일간의 격전을 치른 힐대령의 제9연대는 이미 병력이 2/3로 줄어들었다. 심지어 제5중대 선임하사관 졸단(Jordan)상사는 8월 10일부터 7일간 중대장과 소대장의 잇따른 손실로 다섯 번이나 중대장직을 대행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전투 양상은 극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기대를 걸었던 [힐 특수임무부대]마저도 거듭된 공격의 실패로 전투력이 현저히 감소되어 갔으며 반면 적은 영산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 다른 지역의 전투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8월 13일에는 27연대의 주력도 질서 있게 북상하여 2대대와 합류, 도천면과 영산면 구출작전을 개시, 영산 동쪽과 도천면의 적 침투를 좌절시켰다.

미켈리스연대는 14일까지 이 공격에서 포(砲) 4문을 노획하는 등 전과를 올리면서 남지 주변의 적 소탕을 끝내고 다시 8군 예비대로 복귀했다.}



4. 피난과 후기 제 일차 전투

1) 피난과 혼란

낙동강 동편 8km 이내의 퇴거 명령으로 마구선 국도 동쪽으로 소개되어 있었던 남지 사람들은 전투가 본격적으로 우리 지역에서 시작되자 피란을 떠나야 했다. 당시의 상황과 혼란을 {창녕군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남지읍의 상황은, 8월 11일 영남수리제방의 남쪽 편을 타고 공산군이 상대포 쪽에서부터 계성천을 끼고 남송교(마구선 국도 송진-남지 사이의 경계점)로 내려 왔다. 이에 남지지서에서는 이들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정탐키 위해 순경과 의용 경찰이 뾼을 타고 갔다가 남송교에서 총격 당해 전사했다.

공산군이 목전에 왔음을 판단한 남지(당시 마구선 서쪽편의 주민은 동쪽으로 피난 와 있었다) 읍내 주민은 남지철교를 건너 허둥지둥 피난길에 나섰다. 송진은 길곡면 쪽으로, 도천면민들도 피난을 나섰으나 벌써 적에 싸여 있었다.

남지를 떠난 피난민들은 곧 바로 남쪽인 마산을 가지 못했다. 미군이 차량으로 출동했기 때문에 이에 방해되지 않도록 이룡-덕촌나루-손골-북면의 코스로 유도 김해군으로 피난시켰다.

당시 미25사단 27연대 2대대는 출동 명령을 받고 차량종대로 남지철교를 향했는데 일부 피난민은 칠원-마산 쪽으로 빠지고 있었으므로 칠원과 남지 사이의 길은 피난민이 충만하여 헤치며 전진해야 했다.

그러나 비극적인 일이 발생했다. 전사(戰史)에는 이 일을,

[8월중에 전선 후방지역에서 대치시킨 12만 피난민의 일부 피난민 속에는 소수의 적 게릴라가 섞여 침투하려고 했으나 도중에 적발 체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체포 또는 사살된 사람은 적 게릴라가 아니라 남지를 지키고 있었던 애국청년들인 의용 경찰이었다.

남지의 치안 경계와 철교 경비 등을 맡고 있었던 남지 의용경찰대는 이날 남송교에서 적의 공격을 받은 후 우왕좌왕하는 읍내 주민을 남지철교를 통해 안전하게 피난하도록 유도하고 마지막으로 남지에서 철수하여 칠원으로 향해 가던 중에 칠서면 대치에서 미군과 마주친 것이었다.

미군은 경찰도 아닌 청년들이 구구식 총을 메고 있는 것이 수상했으므로 검문했다. 그러나 영어 회화 실력이 없는지라 서로 말이 통할 수 없었으므로 결국 사세 불리한 것으로 판단한 의용 경찰들이 산으로 도망치자 사격을 가했다. 여기서 남지의 두 김씨 청년이 사살되고 나머지는 칠원으로 탈출했다.

12일밤 자정에 27연대 2대대는 낙동강을 건너 남지철교 북단에 교두보를 설치했다.}

 

2) 남지리 부근의 피난과 전투

위 {창녕군지}의 기록 중 남지방위대로 임무를 수행하고 철수하던 중 미군의 총격으로 희생된 청년은 남지리에 살던 청년들로 김진기, 박계목, 김봉용, 박영태 등 4명으로 한국전쟁 발발이후 유엔군으로 참전한 미군들이 언어 소통의 장애와 지리의 미이해 등과 함께 미군의 작전 이행의 강력한 처리 등과 겹쳐 도처에서 볼 수 있었던 민족적 비극의 하나이었다.

당시 남지읍사무소(면장 정대수)에서는 전쟁 발발로 인하여 행정을 전시체제로 전환하여 만약 유사시를 대비하여 호적부 등 중요한 서류는 읍사무소에서 남포동 당시 남지소방대 사무실(구연택 집: 뒤에 제대장병보도회 사무실로도 사용)로 옮겼다고 한다. 이 때가 바로 마구선 서편의 주민은 동편으로 옮기라는 소개령이 떨어진 후이었다. 남지 마을을 지키고자 경찰을 돕는 방위대가 창설되어 향토를 지키고 있었는데 당시 남지방위대 대장은 함안 사람인 이삼률(계급이 방위 대위)로 대원은 4, 50여명이었고 남포동 산업회사 근처에 부대가 있었다.

남지지서에서 인민군들이 송진 영남수리제방에 나타난 것을 알게 된 시각은 8월 11일 12시경이었다고 한다. 인민군의 사격이 개시된 후 경찰은 인민군임을 확인 상부와 연락하여 남지 사람들을 피란시키기로 결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8월 11일 오후, 인민군이 송진리 영남수리제방을 타고 남하하는 것을 목격한 남지지서의 경찰과 방위대(의용경찰대)는 망루에서 망원경으로 정찰하였으나 적인지 아군인지 판단이 되지 않아 미군이 운전하는 뾼에 의용경찰로 미군 통역을 맡고 있던 김귀우(金貴佑, 김정곤의 아들)등 2명이 타고 남송교까지 진출하였다가 인민군의 집중 사격하며 수류탄을 던져 차가 계성천으로 추락하고 미군과 김귀우는 행방불명되었는데 피란길에서 돌아 온 후에 가족들이 행적을 더듬어 시체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놀란 남지 주민들은 방위대가 지키는 남지철교를 통하여 무질서하게 피란길에 나섰다.

8월 11일 이전에는 남지철교의 경비가 삼엄하여 민간인의 통행은 상당히 통제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웃개나루를 건너서 다니기에도 심한 불편을 겪었다.

피란을 떠나는 날(8월 11일)은 오후 1-2시경이었는데, 남송교 쪽에서 인민군의 총격이 시작되어 총탄이 본동 동쪽 끝집으로 날아들었다. 이 총성에 놀란 남지 사람들이 짐도 미쳐 챙기지 못하고 황급히 나서야 했다. 키우던 소도 끌고 나오지 못하고 허겁지겁 양식과 이불, 여벌옷도 없이 그릇 몇 개에 솥만 가지고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람들은 철교 쪽으로 달려가 강을 건넜다. 이날 피란을 나선 사람들은 진작 강제 소개령으로 마구선 서쪽에서 동쪽으로 나와 있던 사람들이어서 맨몸으로 떠나야 했다. 만약 겨울철이었더라면 아사자나 동사자가 속출했겠지만 다행히 여름철이라 옷이나 이부자리가 부실하였어도 불편이 없는 계절이라 피란 살이 고초가 조금은 덜했다 할 것이다. 남지 사람들이 피란을 떠나기 시작한 시각은 오후 2시경이었으며 오후 4시경 마지막으로 면사무소 직원들이 철교를 건너 이룡을 지나 덕남 강가에서 10일간을 머물다가 김해 쪽으로 대산면 쪽으로 가야했다.

남지 사람들은 대부분 김해군 생림면과 장유면 등의 국민학교 운동장 등지에 마련된 피란민 수용소에서 생활하였는데 추석을 피란지에서 보내야 했다.

그런데 이날 늦게까지 남지 주민의 피란을 돕고 칠원쪽으로 철수하던 의용경찰대 청년들은 칠서면 대치리 고개에서 미군들과 만났다. 구구식 장총을 울러 맨 청년들을 수상하게 여긴 미군들의 검색에 걸렸다. 미군은 영어 회화 실력이 없어 당황해 하는 청년들을 인민군으로 오인하게 되었고 이 눈치를 알아 챈 경찰대는 달아나려 했다. 그러자 미군들이 총을 쏘았고 김진기(金鎭基 : 김정호의 아들) 박계목(朴啓穆)은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고 미군에 붙잡힌 김봉룡(金鳳龍) 박영태(박찬근의 三子)등은 박영태의 보자기 안에서 나온 수류탄과 일기장을 보고서 인민군으로 잘못 인식하고서 칠원까지 끌고가 칠원 산모퉁이에서 총살을 당하는 엄청난 비극이 일어났다. 이때 의용경찰대 대장이었던 오덕수를 비롯하여 공또찬(본동), 정태호(동포, 정대수 아들) 최수현(서동, 김정호의 처조카) 김상실(남포)등은 산비탈로 밭고랑 논도랑으로 허겁지겁 탈출하여 무사히 살아 날 수 있었다.

그러한 비극은 도처에 있었는데 본동에 살던 오정섭은 피란 보따리를 싸면서 혼망 중에 태극기를 보따리 싸는 보자기로 사용하였다하여 피란길 도중 경찰 검문에 걸려 총에 맞아 죽기도 하였다고 한다.

고곡지구 주민들의 일부는 성사고개를 넘어 남지쪽으로 피란하여 철교를 건너 무사히 피란길에 올랐으나 또 다른 일부는 두곡 엄나무징이고개를 넘어 장마 대봉리를 거쳐 도천면 논리 방향으로 빠진 사람들이 있었고 또 일찌감치 도천쪽으로 피란길을 떠난 학계, 성사지구 일부 주민들은 8월 11일 공산군이 어만리 앞산에 진출하는 와중에 피란민과 인민군이 뒤섞여 혼란이 일어났고 피란민속에 인민군이 뒤섞인 것을 안 미군기들은 피란민들에게 폭격과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한다. 이때 정자나무 아래나 밭고랑에 피신하였다가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이 일은 미군 조종사가 공산군이 피란민 대열에 섞여 들자 무차별 공격을 퍼부어 일어난 참사였다. 또 일부 주민은 여러 사정으로 미쳐 피란을 못하고 지체하는 바람에 공격전의 와중에 한 달여 갇혀서 십자포화와 무차별적인 폭격에 희생이 많았다고 한다.

남지리 부근의 전투는 8월 11일 피란민과 교대로 마산에서 달려온 미 27연대 2대대가 담당했다. 존 H 미켈리스 대령이 지휘하는 27연대는 "소방대"라는 별명이 붙은 부대였다. 이 부대는 12일 밤 남지리 일대 인민군을 격퇴하고 8월 13일에는 주력과 함께 도천을 지나 영산까지 진격하여 송진 영남수리제방까지 진출했던 인민군을 물리쳤다.

미 제25사단 27연대는 이후 남지리 부근에 주둔했으며 용산리 창날에서부터 도천면에 이르는 지역의 적과 싸웠다.


3) 난국의 타개책- 워커장군의 결단(1950. 8. 15)

8월 14일까지 격전을 벌렸으나 박진나루와 이이목나루를 건너 온 인민군을 격퇴할 수 없자 주한 미8군의 사령관인 워커(W. H. Walker)중장은 예비 병력으로 있던 해병대를 보내 "[낙동강 돌출지역]의 적을 격퇴하라"고 명령을 하는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당시의 전투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이 무렵 대구 정면을 비롯한 동해안 축선상의 적의 압력도 더욱 증대되어 부산교두보선은 점차 축소되어 가고 있었다. 모든 전황이 암담해져 가고만 있을 무렵인 8월 15일 제24사단에 도착한 워커장군은 격한 어조로 "해병 여단을 줄 테니 지체없이 적을 몰아내라"고 말했다. 마지막까지 보물처럼 아껴온 미8군 예비인 미해병 여단은 이때 이미 마산에서 밀양으로 이동 중에 있었다.

워커장군은 부산 교두보 방어전투를 지휘함에 있어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고 있다는 지형적인 특징 때문에 항상 미제24사단 정면의 영산-밀양축선을 염려해 왔다. 밀양은 부산-대구를 연결하는 도로와 철도 상에 있어 밀양이 상실되면 방어선은 두 쪽이나 전방어선은 무너질 위험에 있었던 것이다.

그의 탁월한 전술적 식견은 이곳에 그의 최후 예비대를 투입하는 용단을 내리게 했다. 이리하여 미제1해병여단은 8월 15일 제24사단에 배속되어 "낙동강 돌출지역의 적을 격퇴하라"는 명령을 수령하여 행동을 개시했다.

1950년 8월 15일, 암담한 부산 교두보 전황의 마지막 타개책으로 제8군의 주요 예비병력인 미제1해병여단을 <낙동강 돌출지역>에 투입하기로 결심한 워커장군(제8군사령관)의 전술적 용단에 따라 동 여단을 배속 받은 미제24사단 지휘부에서는 숨가쁜 분위기 속에서 어봉리능선과 클로버잎고지의 탈환 계획이 구상되고 있었다. 사단장 처치장군은 해병대를 좌로 하여 어봉리능선을, 제9연대를 우로 하여 클로버잎고지를 병진 공격하는 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해병여단 예하 제5해병 연대장 멀레이 대령은 제9연대의 공격에 앞서 해병대가 어봉리 능선을 먼저 탈취하겠다고 건의했다. 양개 목표를 연결하는 능선을 일련의 공격 축선으로 판단한 멀레이 대령은 이들 양개 목표의 축차적 탈취가 보다 용이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처치 장군은 양개 목표의 연관성을 고려하여 협조된 동시 공격이 보다 효과적이라고 판단했지만 결국 멀레이 대령안이 채택되었다.}

 

 4) 미 해병대의 소탕전(1950. 8. 16 - 8. 19)

8월 16일까지 전열을 정비한 미군은 8월 17일 07시 35분에 다시 고곡지구에 있는 인민군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이 전투는 연 2일간 계속되어 결국 인민군은 이 지대를 장악한지 12일만에 두곡 엄나무진고개를 넘어 물러나기 시작했고, 이튿날 완전히 후퇴하였던 것이다.

이 해병대의 소탕전을 전사에서는 [어봉리 전투]라 명명하였으나 이 어봉리 능선이 바로 우리 읍 아지리 동편 산등성이로 인민군은 아지 쪽의 고지인 109, 117, 143고지에 붙어 있었고, 미 해병대는 장마면 가림과 어봉, 성사리 대성마을 쪽에서 공격하였던 것이다.

당시 상세한 전투 상황을 {향토수호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8월 17일 07시 35분, 공격준비 사격이 개시되었다. 가용한 모든 화력이 어봉리의 좁은 능선 위에 집중되었으며 특히 18대의 코세어(Corsair)함재기의 공중강타는 장관을 이루었다.

후일 처치 장군은 당시의 상황을 "능선 전체가 불꽃에 싸여 공중으로 떠 올라가는 것 같았다"라고 회상했다(유엔군 전사) 공격 준비 사격이 끝나자 08시 정각 제5해병연대 예하 제2대대는 제5중대를 우로, 제6중대를 좌로 하여 어봉리 능선을 향해 1,000m 거리의 공격 개시선을 통과했다. 120며명의 4개 돌격소대는 돌격대형으로 산개하여 철벅거리는 수전 지대를 통과한 후 고구마 밭을 지나 비탈길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전투 경과로 보아 공격 개시와 동시에 적탄이 소낙비처럼 쏟아질 것으로 예상했으나 공격 개시후의 상황은 이러한 예상을 뒤엎고 조용하기만 했다. 그러나 8부 능선에 이르렀을 무렵 우측의 클로버잎고지와 어봉리 능선의 좌단부로부터 갑자기 적의 소총 및 기관총 사격이 일제히 가해져 왔다. 박격포탄도 비가 쏟아지듯 주변에서 작렬하기 시작했으며 돌격 대열 위에 집중되는 총탄은 마치 콩을 볶는 듯 했다. 우일선 돌격소대장 싱카(Shinka)소위는 이를 악물고 약간 움푹 파진 곳에 엎드려 사태를 관망하면서 주변을 살폈다.

이때 싱카소위는 폭우시 산사태로 생긴 협소한 도랑(고지 정상 쪽으로 뻗은)을 발견하고는 돌격대원들을 신속히 이 도랑 속으로 뛰어들게 했다.

이 무렵 몇 명의 소대원들이 쓰러졌지만 이 도랑을 이용한 포복 전진으로 싱카소위는 30여명중 20명을 이끌고 가까스로 산 정상에 도달하는데 성공했으며 적의 사격도 다소 기세가 꺾이는 듯 했다. 돌격대원들은 맨 먼저 조우한 괴뢰군의 한 참호에 사격을 가하면서 조심스럽게 접근했으나 참호가 텅 비어 있음을 알고 어리둥절하고 있을 무렵 갑자기 우측방에서 적의 기관총이 다시 불을 뿜었고 동시에 뒤쪽 참호에서 적병들이 뛰어나와 일제히 수류탄 공격을 가해왔다.

불과 몇 분 사이에 5명의 대원이 쓰러졌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 경우 많은 희생을 면치 못할 것으로 판단한 싱카소위는 엄폐된 도랑을 따라 부상자들을 판쵸우의에 싸서 끌면서 소대원을 이끌고 능선 중턱까지 철수해 내려 왔다.

싱카소위의 요청에 따라 코세어 함재기가 다시 날아와 목표 정상과 우측 방의 기관총 진지에 대해 여러 발의 폭탄을 투하한 후 공격은 다시 시작되었다.

폭격하는 동안 잠잠하던 적은 공격을 재개하자 다시 치열한 사격을 가해왔지만 싱카소위는 천신만고 끝에 최초 공격시 진출했던 정상에 이르렀다. 그러나 출발시 15명이었던 소대원은 9명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이 소수의 병력으로는 치열한 적의 측방 사격과 또 다른 참호로부터의 수류탄 공세에 견딜 수가 없어 소대는 다시 비탈길로 밀려 내려오고 말았지만 공격을 결코 포기하려 하지는 않았다. 15:00시경 대대는 공격을 일시중지하고 능선중도에서 급한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7시간의 전투 끝에 대대는 23명이 전사하고 119명이 부상함으로써 전주 참가인원(240명)의 60%를 이미 잃고 있었다.

전투력을 거의 상실한 제2대대는 제1대대와 교대되었다. 1차 공격의 실패는 우측방(클로버잎고지)으로부터의 적의 화력에 기인되었다는 분석에 따라 최초 처치장군이 구상한대로 양개 목표(어봉리 능선, 클로버잎고지)에 대한 협조된 동시 공격이 계획되었다.

"내가 고통스러울 때는 적도 고통스럽다."는 말과 같이 제2대대의 전력 상실로 해병연대가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어봉리 능선을 장악하고 있던 북괴군 제18연대의 상황 역시 점차 절망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루 사이에 600여명의 사상자를 낸 그들은 클로버잎고지의 제16연대로부터 1개 대대를 증원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탄약은 엄청난 속도로 줄어들었고, 의약품이라고는 거의 동이나 부상자들은 그대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미군기의 공중폭격에 대한 공포증이 걸려 있었고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미 해병대의 끈질긴 공격에 차츰 불안을 느끼기 시작하여 더 이상의 방어진지 지탱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반면 적은 노획한 미군들의 무전기(SCR-300)로 미해병대의 부대 교대는 물론 병력 이동계획까지도 파악하고 있었다.(이상 당시의 포로 진술에 의함)

16시 정각, 능선을 뒤흔드는 듯한 공중 폭격과 포병 사격에 뒤이어 양개 목표에 대한 협조된 공격이 시작되었다. 클로버잎고지에 배치된 적은 아군의 공격 준비사격(특히 공중포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듯, 그들의 저항은 예상외로 미약하여 제9연대 제2대대는 순조롭게 목표를 탈취했다.

그러나 어봉리 능선상의 적은 거센 저항으로 해병대의 정면 공격을 여전히 저지하고 있었다. 한편 클로버잎고지를 점령한 제9연대가 해병대의 어봉리 능선을 측방에서 지원하기 시작했다. 제9연대의 측방 지원하에 해병 제1대대 제1, 2중대는 몇 차례의 공격을 감행한 끝에 17시경 어봉리 능선 우반부(102, 109, 117고지)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동 능선 좌반부(143고지)로부터의 치열한 측방 사격으로 117고지를 점령한 제1중대는 곧 동쪽 사면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날 황혼 무렵, 어봉리능선과 클로버잎고지 사이로 접근해 오고있는 4대의 적 전차와 이를 후속하고 있는 북괴군 보병이 102고지에서 관측되었다. 이는 낙동강 돌출지역 전투에 투입된 최초의 적 전차였다.

해병 제1대대의 방어진지에서는 3.5인치 로켓포와 75미리 무반동총의 배치가 약간 조정된 후 조급하게 공격태세가 갖추어졌다. 긴급 요청에 따른 공중 대기 전투기가 북괴군 전차위로 날아가 기총소사를 가했으나 전차의 기동은 멎지 않았다. 102고지 위의 해병들은 먼지를 날리면서 직전으로 다가오고 있는 적 전차를 발을 동동 굴리면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국전에 투입된 후 최초로 적 전차와 대결한 해병대의 로켓포 사수들은 가슴이 고동치는 긴장감 속에서 숨을 죽인 채 적 전차의 접근을 기다리고 있었다.

적 전차가 70m 거리의 측방으로 다가왔을 무렵 비로소 발사된 제1탄은 무한 궤도에 명중했다. 적 전차는 멈칫하면서 포문을 열었다. 제2탄은 다시 동체에 명중했으나 전차는 정지한 채 미친 듯 포격을 계속했다. 그 순간 전투기로부터의 직격탄이 명중되자 전차는 화염에 휩싸였다. 후속 하던 3대의 전차도 무반동총과 로켓포 그리고 공중으로부터의 집중 사격으로 불과 몇 분 사이에 파괴됨으로서 후속하던 소대 규모의 북괴군 보병 대열에도 큰 혼란이 일어나더니 곧 패주하고 말았다.

한편 102고지와 109고지를 장악하고 있던 제2중대는 적의 야간 역습에 대비하여 방어진지를 강화하고 있었다. 제1중대는 얼마 전의 117고지 공격시 돈좌되었던 동쪽 능선상에서 그대로 급편 방어진지를 강화하고 밤을 새우기로 하였다. 이날 전투에서 해병대는 23명이 전사하고 182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날밤(8월 17일) 미군들은 예상되는 적의 집결지와 접근로에 대한 재원 기록 사격을 끝마치고 적의 역습에 대비하여 진지 전면에 촉발 조명탄을 계속 사용했다.

다음날(8월 18일) 02시 30분, 초록색 신호탄과 함께 예상했던 적의 역습이 시작되었다. 적의 공격방법은 조명탄 때문에 쉽게 관측할 수 있었다. 5∼6명으로 편성된 여러 개의 돌격조들이 지상에서 벌떡 일어나 수류탄을 던지자마자 치열한 사격을 가하면서 육박해 들어갔다.

피아를 분별하기 어려운 푸른 조명탄의 섬광 속에서 육박전이 전개되었으며 피아 공히 많은 인원이 쓰러졌다. 제1중대는 마침내 날이 밝은 후에 복수를 다짐하면서 109고지 동쪽 사면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109고지 제2중대에는 남쪽 안부를 공격해 오는 적과 45분간에 걸친 육박전 끝에 적을 격퇴했고 날이 밝아 오자 적의 공격은 멎었다. 그 날밤 피아의 손실은 극심했다. 185명의 제1중대는 90명으로 줄어들었고, 195명이었던 제2중대의 잔류 인원은 110명이었다. 정확한 적의 피해는 알 수 없었지만 방어진지 주변에서 183구의 북괴군 시체가 발견되었다.

동이 트자 해병 제1대대는 재편성 후 117고지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공격은 처음부터 발악적인 2개소의 적의 기관총 사격 때문에 난항을 거듭한 후 능선 중턱에서 공격은 또 다시 돈좌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전우들이 수없이 쓰러지기 시작했지만, 이번만은 한사코 목표를 탈취하고 말겠다고 다짐하면서 해병대원들은 나무 뿌리를 움켜잡은 채 한 발자국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다시 긴급 지원 요청을 받은 함재기들이 날아와 유색 연막으로 지시된 표적에 대하여 몇 개의 500파운드 폭탄을 투하했다.

능선 전체를 뒤흔드는 무서운 폭음과 함께 철편(鐵片)들이 공중 높이 떠올랐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해병대원들은 초연(硝煙)이 자욱한 117고지 정상으로 함성을 지르면서 돌격해 들어갔다. 기관총은 삼각대만 나뒹굴고 있었고 북괴군들의 팔 다리가 여기저기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미 해병대의 맛을 이제서야 알 거야!"

얼굴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흙투성이가 된 한 병사가 착검된 총대를 거꾸로 땅에 꽂고 침을 뱉으면서 외쳤다. 117고지를 점령한 이들의 거친 돌격기세는 거센 물결처럼 지체없이 174고지로 밀려들어갔다. 얼마 후, 어봉리 능선은 적이 이곳을 장악하기 시작한지 12일, 해병대가 공격을 개시한지 2일만에 완전히 아군 수중으로 들어 왔다.}

 

5) 남지지구 제일전투의 승리 (1950. 8. 18 - 8. 19)

8월 18일 인민군은 박진나루 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자 포병의 포격과 전술 공군의 폭격으로 처절한 소탕전이 전개되었다.

해병대와 미 24사단 보병은 서쪽으로 진격해 나갔고, 포병은 인민군이 달아나자 도하지점인 박진나루를 엄청난 화력으로 강타했다. 8월 18일 어둡기 전에 해병대 3대대는 311고지(구진산) 제34연대는 240고지(고운봉) 제19연대는 강 전면의 223고지(창아지 뒷산)를 탈환했다.

이튿날(8월 19일) 아침 해병대는 미 34연대 장병들과 함께 대곡과 반포를 완전히 탈환하였다. 저녁이 되었을 때 월상에 까지 인민군의 그림자는 찾을 수가 없었다. 남지지구 제1차 전투는 승리로 끝났다.

이 첫 번째 승리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어봉리 능선과 클로버잎고지 후면에서는 북괴군 패잔병들이 낙동강을 향해 서쪽으로 밀려가고 있었으며 북괴군 제4사단의 총퇴각은 누구의 눈에도 뚜렷했다. 다음날 해병대와 제34연대는 강변에서 합류했으나 강 차안에서는 적의 그림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적 제4사단의 도강 인원은 3,000명 미만이었고 강 차안에서 미군들은 1,200여구의 적 시체를 매장했다. 34문의 포와 수 백정의 자동화기 그리고 수천의 소총을 유기 함으로써 서울 사단의 호칭을 받았던 적 제4사단은 사실상 이 날짜로 소멸된 것이었다.

한편 8월 19일, 8군 예비로의 복귀 명령을 받고 강변 방어진지를 인계한 후 비탈길을 내려오는 해병대 병사들의 휘파람 소리는 다시 한번 그들의 자랑스러운 긍지를 느끼게 해 주었다.}



5. 남지지구 제2차전투

 사진설명 ( 박진 전승비 )

1) 두 번째 도하 기도 (1950. 8. 26)

8월 공세가 실패로 끝나고서 8월 26일 인민군은 월하리 박진나루에 부교(浮橋)를 설치하고 26대의 전차를 앞세워 공격을 시도하게 되어 다시 전투가 벌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남지지구 제2차 전투의 시발인데 이후 벌어지는 전투를 전사에서는 [9월 공세]라 하였다. 이때도 같은 시간에 두 곳에서 도하하려 했는데 곧 박진나루와 유어면 적포교 지점이었다.

이방면 현창리에 있는 적포교는 8월 16일 단절되어 있었다. 인민군이 2차 협공작전을 벌리면 이 다리로 침입할 것이 예상되자 폭격으로 교량을 끊어 놓고 있었다. 그러나 두 곳 모두 인민군은 실패했다.

이때는 미 24사단과 임무 교대한 미 2사단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장갑차부대의 반격으로 적은 패주하였다. 2사단의 사단장은 로렌 까이즈 소장으로 인민군도 최후의 힘을 모아 2차 공격을 벌리고자 준비하고 있었다. 즉 인민군은 제2, 4, 9, 10사단 등 4개 사단 2,900여명을 투입하려 하였다.

두 번째의 도하 기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인민군은 전열을 정비하여 [9월공세]라 불리는 최후의 공세를 8월 31일 밤에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의 공세로 우리 창녕군은 남부와 북부로 두 동강이 나면서 대부분의 군 지역이 인민군에 유린되었으며, 인민군이 영산(9. 1 - 9. 4)과 창녕읍(9. 2 - 9. 9)까지 진출했으므로 그때까지 피란을 나가지 않고 있었던 영산 도천 계성 창녕군 북부 지방의 주민들이 소개령에 의해 피란을 떠나게 되었다.

남지지서 경찰들이 주민이 다 피란을 가고 텅 비어 있었던 남지리 시가지를 이때까지(8. 11 - 8. 31) 지키다가 9월 1일 인민군의 대공세가 있자 퇴각하는 도중에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한다.

전 창녕군민에게 소개령이 내렸다. 그러나 최초로 습격 받은 남지읍 남지지서의 경찰관 2명(박순경 이 순경이라 하나 상세한 이름은 기억 못함)과 도천면의 피란민들은 미쳐 소개를 못하고 적에게 포위를 당하였다. 생포된 박 이 두 순경은 피란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송진나루 백사장에서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목숨이 경각 지경의 위기에 있던 차, 제2사단 장갑부대의 공격으로 인민군들이 퇴주 했다.

2) 박진나루 도하와 구월공세 (1950. 8. 31 - 9. 3)

[9월 위기]라 했던 인민군의 최후 최대의 공격은 8월 31일 밤 23시 30분에 시작되었다. 4개 사단이 미군의 전면 우리 읍 월상 월하 월평과 유어면 등 4개소에서 도하를 시작했던 것이다.

남지 지역의 도하지점은 월상 앞 박진나루, 월하 마을앞 강, 월평의 들붓나루 등 3개 지점이었는데, 박진나루를 도하한 인민군은 반포로 해서 구진산을 향해, 다른 두 곳의 지점을 도하한 부대는 월하 뒷산 209고지(호곡산)를 공격하였다.

또 이 시기에 남강과 합류지점인 용산리 기강나루(창날)로 인민군 제9사단이 기습 도하를 감행하였다. 당시 용산리 아곡 94고지(마분산 줄기)에는 미 9연대 A, C중대가 지키다가 이들과 접전했는데 결국 인민군을 격퇴시키지 못하고 퇴각하고 말았다. 그래서 남지시가지는 인민군의 수중에 또 한 번 들어가 버렸다.

남지철교는 미 25사단 35연대에서 지키고 있었는데 이때까지 폭파되지 않고 무사하였다.

9월 공세로 여러 곳으로 도하하자 결국 우리 창녕군의 대부분의 지역이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는 최대의 위기에 몰렸다. 그러자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대기 중이던 미 해병대가 또다시 남지지구에 투입되어 대접전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전투 경과를 [향토수호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8월 31일 23시 30분, 북괴군 4개 사단은 총공격을 개시하여 미 제2사단 전면 4개소에서 도하를 강행 폭 10km에 걸친 미군 진지를 순식간에 돌파했다.

결국 미군 진지는 남지 장마 영산의 남부와 계성 창녕 유어 대지 대합의 북부 2개 지구로 분단되고 8월 공세시의 초점이던 클로버잎고지와 어봉리 두 고지도 다시 적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9월 1일에는 남지 영산지구 군민들이 영산 구계리 방면을 통하여 밀양으로 소개되었다.

적의 3개 사단이 남지에 도하 진출하여 제2사단이 양분되자 워커장군은 9월 1일에 미해병대의 재투입을 결심하게 되었다. 장군은 이 해병대의 투입이 인천상륙의 전제인 만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9월 1일, 도하한 북괴군 제9사단은 영산까지 진격해 왔는데 당시 사단장 박효삼은 전공을 세우는 좋은 기회로 알고 공격을 해 왔다. 아군은 미 제9연대와 배속된 제2야전 공병대대였다.}

 

3) 미 해병대와 전술 공군의 활약 (1950. 9. 4 - 9. 6)

9월 1일 도하에 성공한 인민군은 영산까지 진출하게 되었는데 피아간 치열한 전투가 수일 간 벌어지게 되었다.

지금 영산면 호국공원이 조성된 남산 절벽 위에 미군이 긴급히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다가 이곳에 당도한 인민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는데 9월 3일, 미 제5해병연대 증원군의 도착으로 인민군은 밀려나기 시작했다.

밀린 인민군은 지난 8월 제1차 전투 때처럼 두곡과 아지선의 고지에 진을 치고 대항하였다. 이때 해병대의 공격은 빛났으며, 특히 전술 공군의 폭격은 천지를 뒤집는 맹폭이었다 한다.

이때의 전투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9월 4일 08시 정각에 해병 제5연대는 제2사단 제9연대와 함께 장마 남지지구에 대한 반격을 재개했다. 폭우가 내린 간밤에 116고지의 적은 이상하게도 조용하게 있었다. 날이 밝아오자 진격하는 해병대와 보병은 북괴군이 혼란과 공포 속에서 밤을 지내는 광경을 목격했다. 전날 남지 장마 일대의 상공을 덮은 전술공군의 대폭격과 포격의 전과를 본 것이다. 매장되지 않은 적 시체가 계성면 장마면의 들과 산, 1008번 지방도(영산-박진간 도로) 주변에 흩어져 있었고 버리고 간 장비 중에는 말짱한 2대의 T-34 전차도 있었다. 적 제9사단의 C.P였음이 분명한 천막도 어떤 골짜기에 그대로 서 있었다한다.

이날 저녁에 해병대는 장마면 어봉리와 동정리(클로버잎고지 능선)에 도착하여 5일 새벽을 기해 공격을 준비했다. 9월 5일, 해병대는 장마 마을 쪽에서 3일째반격을 계속하여 하이곡과 두곡리 뒷산(클로버잎고지 동쪽 고지)을 탈환했다. 이때 2대의 전차를 앞세운 적 300명의 맹렬한 역습이 있었으나 대국적으로 보아 적의 공격력은 현저히 둔화되어 있었다. 해병대는 3일간의 반격을 성공하여 9월 6일 00시 정각 제9연대에 진지를 넘겨주었다. 영산 전선을 이탈한 해병대는 인천으로 가기 위해 우선 부산으로 내려갔다. 남지, 영산, 장마에 걸친 두 번째의 위기는 사라진 것이다.}

 

4) 슈미트부대의 대곡고지 사수 (1950. 8. 31 - 9. 4)

9월 공세가 시작되었을 때, 대곡리 뒷산에는 박진나루를 지키려던 미 제2사단 9연대 D 및 H중화기중대와 박격포중대가 분산되어 150고지에 모여 있었다. 이들은 인민군의 급속한 진출로 이곳에서 고립되어 퇴로를 차단 당하고 말았지만 끝내 인민군의 공격을 견디어 냈던 것이다. 그리고는 혈로를 뚫어 남지철교 쪽으로 귀환하였다고 한다.

이 잔류 부대원들을 지휘한 장교가 H중대장 슈미트중위여서 뒤에 [슈미트부대]라 불리었다. 대곡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미군들이 황씨굴에 은신하며 싸웠는데 미쳐 피란을 못나갔던 사람들이 그들을 숨겨주면서 밥도 해주고 보호했다고 한다.

슈미트부대의 활약상을 보면 다음과 같다.

 {슈미트부대는 8월 하순, 제2사단이 낙동강 대안에 1개 중대 규모의 위력 수색을 지원하기 위하여 대곡리의 105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제9연대 제4중대 및 제8중대의 병력은 장교 5명을 포함하여 약 70명 정도였다. 이때 제8중대의 슈미트중위가 선임자로서 이 혼성부대를 지휘했는데 이들은 적 주력부대 제9사단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연대 본부에서는 이들이 통신이 두절된 후로 모두 전사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슈미트부대는 고립된 악조건 속에서도 대곡고지를 사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북괴군은 주도하 지점으로 박진나루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지켰던 고지는 바로 이곳이 내려다보이는 지점이었다. 적은 박진나루에 야간에만 철주교(鐵舟橋)와 수중교를 가설했고 이것을 이용해서 매일 밤 800 내지 1,000명을 남지로 도하시키고 있었다.

슈미트부대는 8월 31일부터 9월 4일 밤까지 싸웠다. 그러나 슈미트중위 이하 대부분이 전사하고 22명만이 생존하여 칠현 창아지 용산의 강을 따라 남으로 와 제25사단에 귀환했다. 이들은 낮에는 숨고 밤이면 걸어서 탈출한 것이다. 귀환한 이들로부터 박진나루의 수중교 위치를 확인한 미 공군은 5일밤 이 수중교를 폭파하였다. 남부의 남지 장마 영산 장마 계성 부근의 싸움은 9월 5일경 일단락 되었으나, 북부의 유어와 창녕에 주둔했던 미 제2사단 제23연대의 상황은 아주 불리했다.}

 

6. 수복과 복구

1) 구월의 전황 (1950. 9. 7 - 10. 4)

9월 7일 이후 창녕군의 남부의 전투는 인민군이 물러가 일단 소강상태였으나 군 북부지역은 여전히 혼돈 상태였다.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9월 2일 인민군이 창녕시가지 안에 들어오기도 했고, 9월 8일에서 9월 9일까지 전투가 계속되어 수천 명이 죽고 부상당하는 사태가 군 북부지역에서는 벌어지고 있었다. 9월 9일 이후 10월초까지 인민군은 낮에는 유엔군 비행기의 폭격을 피해 토굴이나 골짜기에 은신하다 밤만 되면 나타나 집을 뒤지고 공격하며 약탈하였다.

9월 이후 큰 전투가 없었으나 게릴라식 인민군의 저항은 절정에 달했다.

밀양으로 철수했던 경찰은 10월 초순경 전열을 가다듬어 우리 군으로 복귀하여 준동하는 인민군과 싸우게 되었다. 피아를 구분 못하는 어둠 속에서 육박전이 벌어지면 머리통을 만져보아 아군임을 확인하고서 싸웠다고 한다. 비행기의 폭격도 엄청나서 군내의 가옥이나 시설들이 폭파 소각되었고 산야에 시체와 부서진 탱크, 대포, 차 등 전투의 잔재들이 수없이 널브러져 흉한 모습으로 방치되어 있어 수복 후 시체들을 매장하기를 수 천구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때 전해 오기는 구진산 정상 구진산성 가운데 이 전투에서 전사한 인민군 4사단 포사령관 노장군이라 전해지는 시체를 묻은 커다란 새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이었고 급하게 후퇴를 하였기 때문에 장군의 시체를 북쪽으로 운반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 시체는 휴전 얼마 후에 북으로 미군 시체와 교환하여 갔다고 한다.


2) 남지철교의 폭격

1950년 8월 11일 남지면민들이 피란을 떠난이후 남지 시가지는 민간인이 없는 곳이 되어 있었다.
훗날 피란지에서 돌아오던 면민들은 제일 먼저 보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폭격으로 무너져 내린 남지철교였다.
계내리 쪽에서 보면 세 번째 교각에서 네 번째 사이의 상판 25m가 끊어져 강물 속으로 비스듬히 처박혀 있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폭격에 끊어져 나간 것이었다.
남지 쪽 상판은 붙어 있고 계내리 쪽은 완전히 절단되어 강물 속에 떨어져 있었다.


과연 철교는 어떻게 파괴되었을까?
남지철교는 강을 넘어 오려는 인민군과 격전 끝에 하는 수 없이 폭파시킨 것이 아니란 사실이 {창녕군지}의 다음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남지철교는 중요한 시설로 미 제25사단 35연대에서 8월 13일 이후 경비를 맡고 있었다.
8월 11일 남지면민들이 피란을 나간 다음 교량의 남쪽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던 것이다.

이곳에는 1개 소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즉 미 25사단 35연대 F중대 1소대(소대장 닉케리;Nickery 소위)로 남지철교를 미군들은 소대장의 이름을 따 {닉케리의 다리}라 불리우리만치 인상 깊었던 곳이었다.

8월 31일, 낙동강과 남강의 합류지점인 기강도선장(남지읍 용산리 아곡)의 94고지에 미 9연대 A, C중대가 적 9사단의 도하 기습을 받아 철수하였는데, 그 후로도 또 한번 남지 근처는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남지철교는 건재했다. 거기다 9월 8일∼9월 9일에는 심한 강우로 남강과 낙동강은 2피트 이상이나 증수하였다.
따라서 새롭게 적이 도하할 위험은 줄어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철교는 폭파되어 다리의 한가운데가 주저앉았다.

폭파시킬 이유가 없었다.

강물은 불어 북쪽에서 강으로 적이 도하할 위험도 없었다.(남쪽인 칠원 일대는 남강으로 도하한 적 7사단의 침입으로 9월 5일∼9월 7일 전투가 벌어져 적을 격퇴한 단계에 있었다) 철교의 경비는 튼튼했다.
또 북쪽의 전투도 승리하여 공산군이 쫓겨나고 있었다.
공산군은 밤마다 이곳을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철교의 북쪽 접근로에 지뢰를 매설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적은 약 500명이나 지뢰에 결려 죽었다.
하루아침에는 한 쌍의 개도 걸려 죽었다.
그런데 1950년 9월 8일 철교는 폭파되었다.
사태의 잘못 판단으로 미군 제트전투기(F-82)가 500파운드의 폭탄을 투하 폭격하여 중앙부 25m를 파괴했다.

이 철교는 1953년에 복구되었다.}

그런데 의문점은 기록에는 폭탄 투하로 폭격하여 다리를 끊었다고 하나 당시 철교의 파괴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폭격이 아니라 그 자리에 다이너마이트를 장치하고 강 건너에서 어떤 장치에 의해 폭파한 것이 아닌가 하고 있다.
다리가 칼로 자른 듯 떨어져 나갔을 뿐만 아니라 그 외의 상판의 콘크리트 포장부분이나 트러스트, 난간 등은 하나도 파손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포탄이 투하되었다면 다리의 다른 곳에도 파손되었을 것이 아닌가 하고 의문을 제기했다.


 

3) 패잔병 소탕과 수복

미 제2사단이 1950년 9월 16일 반격을 개시하자 인민군은 의령군 쪽으로 무질서하게 도강을 하며 철수하게 되었다.
퇴각하는 인민군을 향해 맹렬히 폭격을 감행하였다.
하루에 260개의 네이팜탄을 투하하여 무더기로 살상하였다.
견딜 수 없었던 인민군은 대량의 무기와 장비를 버리고 패주했다.
큰 승리였다.

9월 18일, 미군은 유어면 부곡리 등지에서 의령군으로 도강을 개시하게 되었는데 고곡지구의 시남리와 월하리 등지의 201고지를 중심으로 한 인민군의 저항은 아직도 심했다.
미 2사단 9연대와 23연대 등이 이곳의 적을 소탕하여 아군의 낙동강 도하를 가능하게 하였다.

9월 20일 아침에 23연대 3대대는 월평 들붓나루에서 공격단정(攻擊短艇)으로 도하했고, 23연대 1대대는 이날 오후에, 2대대도 그후 강을 건너 의령군 신반리 쪽으로 추격하면서 백병전을 벌리며 진격하여 의령군 신반을 수복하였다.

이때에야 우리 남지면 지역은 인민군의 위협이 없는 지역이 되었으며 패잔병의 소탕은 상당한 시일이 걸려 경찰이 10월 4일에야 치안을 맡으러 오게 되었다.

 

4) 피해상황과 복구

(1) 피난생활

8월 11일 오후에 피란을 떠났던 남지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남지철교를 넘어서 칠서면 쪽으로 갔는데 주류는 칠서면 이룡-덕촌을 거쳐 창원 대산을 지나 김해 쪽으로 도보로 피란을 했다.
또 일부는 칠원 쪽으로 빠져 며칠간 칠원에서 머물다가 중리에서 열차를 타고 김해 생림면까지 갔다.
고곡지구 주민들은 두곡고개-장마-도천-길곡에서 머물다가 밀양 김해쪽으로 갔다.
8월 11일 오후 덕촌나루까지 허겁지겁 피란을 갔던 남지 사람들은 덕촌나루 백사장과 들판에서 하룻밤을 지샜는데 밤에 교전 상황을 직접 눈으로 보기도 하였다고 한다.

피란민 수용소는 대체로 학교 교사나 운동장이었다.
먼저 도착한 주민들은 학교 교실에 짐을 풀었으나 그 외는 운동장에 지은 임시 수용시설에 수용되었는데 운동장에 지은 집은 긴 장목(長木)으로 [人]자 형으로 걸치고 그 위에 짚으로 이엉을 만들어 이은 길이 수 십미터짜리 긴 집이었다.
1개 동에 수 십 세대가 양편에 나뉘어 비좁게 수용되었다.
잠자리는 그렇게 해결되었으며 운동장 가에 솥이나 냄비를 걸고 취사했으며, 연료는 인근 야산에 가서 땔나무를 채취해 와야 했다.

식량은 가져 온 것은 극히 소량이었으므로 곧 떨어져 버렸고 그후 정부에서 주는 소량의 구호미에 의존하여야 했다.
그러나 구호양곡마저 제 날짜에 나오지 않았고 식구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으므로 인근 민가에 밥을 얻으러 나가는 일도 있었다.

남지 사람들뿐만 아니라 함안 의령 등지의 여러 곳에서 모여 든 피란민들이었으나 수용소 생활은 자치 능력을 발휘 운영되었다.
그러나 전염병이 돌아서 특히 아이들은 이질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많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다급한 전선 사정으로 징병을 위해 밤중에 수용소를 수색하여 청년들을 찾기도 하였는데 용감하게 애국심에 불타 자진 입대하는 청년들도 있었으나 징집을 피하기 위하여 산야에 은신하거나 피신하는 사례도 있었다 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전황을 소문으로만 들었지 라디오 방송을 청취하거나 신문을 구독하지 못하여 정보의 전달은 상당히 늦었다.
그래서 고향으로의 귀향령이 내렸음에도 그것을 모르고 10여일 이나 늦게 수용소를 떠나 남지로 돌아온 사람들이 많았다.

추석은 피란지 수용소에서 지냈는데 제대로 제수를 준비했을 리가 만무하였으니 조상을 섬기는데도 어려움이 많았던 것이다.

귀환령이 내리자 모두들 거지 생활 같은 피란지의 생활을 걷어치우고 짐을 꾸려 고향으로 돌아 왔다.
이때가 1950년 10월 23일 전후였다.
교통 사정이 안 좋아 대부분 도보로 김해에서 돌아 와야 했다.
피란과 아울러 눈물겨운 이야기가 전해 오기도 한다.
당시 면장은 정대수 면장이었는데 8월 11일 주민들이 피란을 나갈 때 가장 최후까지 남아서 주민들을 소개시키고 나서야 마지막으로 철교를 건넜다고 한다.
이때 면사무소에 게양되어 있던 태극기와 면장 직인을 품에 안고 떠났다고 한다.
가족들은 피란 생활 중 그 사실도 몰랐는데 피란지에서 돌아 와 옷을 벗는데 품에서 태극기가 나왔다고 한다.
면사무소 직원들의 월급은 귀환 후 한꺼번에 3개월치를 받았다고 한다.

 

(2) 복구와 전후생활(戰後生活)


남지철교를 걸어서 건너 피란을 했던 대부분의 남지 남부지역 사람들이 돌아 올 때는 밀양 길곡 도천쪽으로 온 사람들은 쉽게 귀향을 하였으나 마산 칠원쪽에서 온 사람들은 철교가 폭파되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건너 올 수가 없었다.
칠서면 진동으로 가서 웃개나루의 나룻배를 타고 건넜으며, 고곡지구 사람들은 영산 장마를 거쳐오면서 격전지의 불 타버린 전쟁 잔해들과 가옥들, 방치되어 있는 시체들을 보아야 했다.

피란지에서 돌아와 보니 마을마다 불에 탄 집들이 많았다.
가재 도구와 가축들의 피해 또한 엄청났다.
읍내 전체 피해에 대한 자료가 없지만 마을 전체가 불타버린 곳이 여러 곳이 있었다.
신전리와 격전이 치열했던 고곡 두곡 수개 시남 등지의 가옥은 마을 전체가 전소하고 성한 집은 하나도 없었다고 하며 남곡초등학교 건물도 전소하였다.
본동 동쪽 외딴집이 불타버리는 등 남지리에도 피해가 많았는데 다른 마을에 비하면 적은 편이었다.
군내 전체 사망자가 1,179명이었으며, 1,895호가 소실되었으며, 학교 교사도 전화(戰禍)를 당하기도 하였다.

전쟁이 계속되고 군의 작전을 위하여 1950년 겨울에 남지철교 동쪽 강변 은행나무 아래쪽에서 남지 욱개둑과 연결하는 부교를 설치하여 군용으로 잠시 이용되기도 하였으나 민간인은 남지철교의 파손으로 육상 교통이 두절되니 아연 웃개나루가 활기를 띄게 되었다.

웃개나루는 철교의 개설이후 칠서면 진동마을과 이룡 등지의 사람들이 이용하던 한적한 나루였으나 이제는 호황을 맞이하게 되어 이용객이 날이 갈수록 많아졌다.
강 양안에 넓게 도로가 개설되고 자동차를 2∼3대 수송할 수 있는 나룻배가 여러 척 들어와 마산에서 오는 차를 실어 강을 건네주었으므로 차들이 마음대로 대구나 창녕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여객버스는 양쪽 강변에 이르러 승객을 내리게 했며, 서로 강을 건넌 승객을 인계 받아 마산과 창녕으로 되돌아가는 운행 방식을 취했다.

남지철교는 1953년이 되어 복구되었고, 휴전이 이루어지자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은 점차 사라져 다시금 정겨운 농촌의 따사로운 생활로 되돌아 갈 수 있었다.

 

(3) 옛 격전지를 찾아온 미 병사 (美 兵士)

6 25때 우리 읍 아지리 창아지 마을에서 싸우다 팔을 잃은 [러스터(H. R. Luster)]란 미군 병사가 1980년대에 옛 격전지를 찾아와 오랫동안 머물다 간 일이 있다.
그는 6 25때 본대와 떨어져 낙오한 병사로 낙동강변 언덕에 있는 창아지 남호정에 숨어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는데 세월이 오래 흐르고 난 다음 옛날 자기 목숨을 구해 주었던 정자를 찾아오게 된 것이었다.
그는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면 찾아 와 재실에 모신 위패에 분향을 하였다고 한다.
또 한국 이름을 노성도라 짓고 미국 국기, 대검을 정자 문에 걸어 놓고 지냈다.
그는 남곡중학교 영어 강사로 봉사한 일도 있으며 군수도 만나고 문화원에도 다니면서 자기 목숨을 구해준 이 남호정을 문화재로 지정해 달라는 건의도 했다고 한다.

 

 

六. 남지읍 시대

1. 읍 승격과 발전

사진설명  ( 남지읍사무소 )

1) 읍 승격

우리 고장은 1960년대를 맞이하여 그 면모를 달리하여 괄목할 만한 성장과 발전을 하게 되었다.
바로 인구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취학 아동수가 계속 증가하여 학교마다 학생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 영향으로 교실 난을 겪게 되는 등 소도시로서의 규모와 기능을 갖추어야 할 시기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영농방법의 획기적인 개선과 노력으로 양곡이 증산되고 각종 소채류의 집산지로 부각되는 등 우리 고장은 살기 좋고 풍요로운 농촌이 이루어짐에 따라 인근 농촌의 중심 마을로 남지리가 매년 인구와 호수가 불어나고 주택의 건설이 활기를 띄게 되었다.

특히 우리 고장은 벼 보리의 다수확과 함께 수익성이 높은 채소 수박 농사와 농한기를 잘 이용하는 부업으로 가마니와 새끼 꼬기 등 고공품 생산이 성행하고 고부가 가치인 양잠이 발달하고 거기다 오이 고추 등 온실재배가 본격적으로 확대 재배됨에 따라 점차 살기 좋은 고장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당초 웃개는 나루터 마을 이외에 정지걸을 중심으로 한 욱개와 남마, 모래(백암) 등 자연 마을이 있는 남지리로 그 인구도 적어 현청이 있었던 창녕이나 영산에 비하여 발전이 더디었던 곳이었으나 6 25전쟁이후 교통의 요지로 부상함에 따라 급작스럽게 발전하기 시작하여 1951년 남지(웃개 남마)가 본동과 동포동 남포동이란 이름으로, 모래(백암)가 서동이란 이름으로 이장이 있는 마을로 된 이후, 1954년 상남동이 분동(分洞)되고, 1955년에는 서동에서 대신동이 분동되어 남지리는 6개 동의 소도읍이 되었으며, 1961년에서 1962년에는 인구가 2만 명이 넘는 읍의 모습을 갖추며 성장 발전하고 있었다.

이렇게 성장하자 읍 승격을 위한 지방 유지들의 노력과 면장을 위시한 행정기관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국회의원과 관계 요로에 읍의 승격을 강력하게 건의하였는데 이 같은 노력이 반영되어 정부로부터 긍정적인 호응을 얻게되어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7호로 면에서 읍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이때 읍의 인구는 21,593명이었다.

읍으로 승격되던 날 읍민 모두 단합을 과시하고 읍의 발전과 승격을 축하하는 축하 행사가 읍 전역에서 펼쳐졌으며 새로운 도시계획과 시가지 도로 확장, 상수도 시설, 상설시장의 개설, 우시장(牛市場)의 이전 등 여러 가지 읍 발전을 위한 청사진들이 제시되기에 이르렀다.

 

2) 도시계획의 추진

우리 읍의 소재지는 그 면적이 넓으나 도시 가로는 왜정 때 만들어진 그대로 조금도 발전이나 변모없이 여러 해를 보내야 했다.
마구선 국도는 시가지 가운데를 관통하여 흙먼지가 온 시가지에 펄펄 날리고 있음에도 포장이 되지 않은 비포장 상태로 방치되어 건물들이 초라하고 낙후된 모습이었다.
또 읍사무소로 가는 길은 노폭이 좁아 차량의 왕래에 크게 불편하였다.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고 소도시로 정비하기 위해서 먼저 읍의 장기적인 발전 계획과 함께 가로망을 현대적으로 바꾸고 도시 기능을 적절하게 분산 배치하는 도시계획을 수립하여 강력하게 추진하여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창녕군에서는 도시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는데 수립 기간도 상당히 오랜 시일이 걸려 읍이 승격한지 6년 후인 1969년에야 남지읍 도시계획이 건설부의 승인을 거쳐 확정 고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계획만 수립 고시되었을 뿐 구체적인 조치나 세부추진계획의 수립은 지연되어 착수되지 못했다.
막대한 예산이 수반되어야 하나 국고보조금이나 사업비의 예산 염출이 어려워 이 도시계획의 추진은 지지부진 추진되지 못하고 있었다.

1978년에야 구체적인 설계와 세부계획이 수립되고 기존 계획 중 현실에 부적합한 사항들을 수정하여 1978년 5월 1일, 도시계획 일부 변경 및 지적 승인 공고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도로 확장 공사를 위해 동포동 마구선 기로에서 용산리간의 남쪽편 도시계획선이 그어지자 확장 선에 물린 건물은 증 개축이 불가능해져 수년간 방치하여두어 도시미관상 크게 나빠졌으나 예산 미확보로 인하여 확장 공사는 착공도 하지 못하고 1970년대를 넘기게 되었다.

 

3) 홍수와 신남동 탄생

 

사진설명

  ( 수해지를 시찰하러 남지에 온 박정희대통령 )

  2-19 :( 해리콥터에서 내린 박대통령 )

   

   우리 읍은 강 마을이라 자주 큰 홍수를 겪게 되었으며 그 피해도 엄청났다.

1963년 6월에는 보리 수확이 시작되려던 망종 때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오랜 기간 장마로 변하여 수 십일간 비가 그치지 않아 베어서 쌓아놓은 보리에서 싹이 시퍼렇게 돋아나 보리 수확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말았다.
이때는 지금과 달리 예로부터 넘기 어렵다는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이라 보릿대가 젖어 타작을 할 수 없어 그대로 썩이고 말았으니 얼마나 굶주림과 허기에 고생이 많았던가 조금만 나이든 분이면 기억이 생생하리라.
여하튼 장마는 큰 홍수를 부르기 마련이었다.

1965년 7월 23일 전후, 큰 홍수가 있었다. 이때 월하리부터 반포, 칠현은 물론 고곡까지, 남강과 합해지는 용산리부터 학계리 마산리 남지리를 탁류가 휩쓸게 되었는데 그해 7월 24일에 남지리 시가지는 서동 대신리 일부만 남고 수년만에 처음으로 침수되어 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일주일 간 탁류에 잠겼던 가옥들이 성할 리가 없었는데 특히 본동과 남포동은 침수기간이 길어 많은 가옥이 전복 도괴되는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읍 전체 피해 가옥은 220채 였다.
이때 국내외에서 수재민에 대한 구호물자가 대량 답지되어 재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배급되는 등 따뜻한 온정과 구호의 손길이 펼쳐졌다.

 

 

 

 

 2-20 :( 지역 기관장 유지들과 인사하는 박 대통령 )

  2-21, 2-22 :( 수해피해를 보고받는 박대통령(피수대 끝에서, 지금의 남지대교 동편)

당시 박정희대통령이 우리 읍의 수해 피해상황을 살펴보기 위하여 헬리콥터를 타고 순시하러 왔다.
온 읍민들이 다 모여들어 환영을 했는데, 읍이 생긴 이후 우리 나라 최고위 귀빈을 맞는 것이라 대통령 환영 인파가 순시 연도에 수천 명이 도열 운집하였다.
대통령은 그때 남지공설 운동장으로 사용하던 남지리 758번지에 내려 승용차로 읍사무소 앞을 지나 동포동 마구선 국도를 경유하여 본동 끝의 제방에서 낙동강을 바라보며 수해 피해상황을 관계관들로부터 보고를 받고 수해민들에게 적극적인 복구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길가에 도열했던 읍민들은 처음으로 가까이 대통령의 얼굴을 바라 볼 수 있는 일생일대의 호기라 생각하고 한 걸음 더 다가가 박수를 하고 악수를 하기도 했다.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린 대통령도 웃으며 손을 흔들어 답례를 보냈다.

수해를 입어 무너져 내린 가옥이 남지리 일대에 60여 가구가 넘었는데 대통령이 내렸던 공설운동장 부지를 이들에게 제공하여 시멘트블록으로 벽을 쌓고 그때 최신의 지붕자재로 인기가 높았던 슬레이트를 인 똑같은 건평과 형태의 집을 수재민 의연금과 정부의 지원금으로 신축하게 되었다.
1965년 9월 20일에 착공하여 12월 23일 준공하였으며 수해지구에서 대부분 옮겨와 입주하였다.

이때 피해를 입은 가구 중 이곳에 건축을 하지 않은 이도 있어 이곳에 신축된 가옥은 54동으로 54가구가 이주 정착하게 되었다.
새마을의 총 동수는 65동이며 총공사비 11,869,450원이었다.

새 동네의 준공식은 화려했으며, 당일 전면 [사랑의 마을]이라 조각되고 새마을의 탄생 내력을 적은 [신남동수해복구기념비]의 제막도 있었고, 잔치가 벌어져 남지 소재지는 축하 분위기에 휩싸였다.
남지의 새마을이라 하여 동명을 신남동(新南洞)이라 명명되었다.

1969년에도 홍수가 있었는데 그해 9월 17일 마침 추석명절 직전이라 대목장을 보러 왔던 사람들 100여명이 탄 나룻배(3톤급)가 의령군 부림면을 향해 오후 3시경에 출발하여 마을로 돌아가려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남지철교 바로 위에서 수숫대에 엔진이 걸려 멈추어 서는 기관 고장이 일어나 순식간에 격류 속으로 떠밀렸다.
거센 물살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배가 떠내려가면서 철교 교각을 들이받고 침몰되자 배에 탔던 사람들이 뒤엉켜 강가로 헤어 나오지 못하고 80여명이 몰사하는 큰 사고가 있었다.
이때 창아지 마을 인근 주민들과 의령군 부림면 지정면 사람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4) 상수도 시설

1963년경 남지 일대 주민들은 대부분 식수로 우물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낙동강 강물이 지금과 달리 수질이 좋고 깨끗하였을 때는 남포동이나 본동의 강변 가까운 지대의 마을 사람들은 새벽에 강물을 길어다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점점 강물의 수질이 나빠지고 집집마다 우물을 파기 시작하자 자연이 강물의 사용은 줄어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포동이나 본동은 강과 가까워서 지하수가 아주 깊이 있어 심층 굴착을 하여야 하거나 물이 나와도 짜거나 수질이 불량하여 식수로 사용하기에 부적합하였으며 동포동 일부에서는 철분이 다량 함유되어 수질이 좋지 않았다.
또 여러 지역의 우물물의 수질이 해마다 그 질이 떨어지고 비위생적인 관리와 여러 가지 공해로 인하여 그냥 생수로 마시기에는 적합치 못하다는 여론이 일어나고 그런 인식이 점점 사람들에게 확산되었다.

남지리는 우물이 귀했다.
본동과 남포동의 경우 수 백호가 살지만 공동 우물은 싸전 시장어구의 우물과 지서 앞에 있는 공동 우물 두 개 뿐이었다.
동포동에는 마산 창녕 장마 삼거리길 곁에 공동 우물이 있었고, 서동에는 면사무소 뒤에 있었다.
새벽이면 물긷는 여인들의 행렬이 줄을 길게 잇고, 여름이면 물이 달려 강 주변 사람들은 아예 강물을 길어 식수로 사용하는 형편이었다.
이것은 남지리 일대 지질이 퇴적 사질토이어서 강물의 영향을 받아 지하수의 수심이 매우 깊어 개인적으로는 우물 하나 파기에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부담이 크기 때문에 개인 집 우물을 파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동포동, 서동 일부에서만 개인 집 우물이 있었으나 지표수에 불과해 점점 수질이 나빠지고 있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상수도의 개설이 요청되고 있었으나 정부의 지원은 큰 도시 위주로 추진되니 상수도 물 마시기가 어려웠다.

1972년 이래서는 안되겠다 하여 주민 자력으로 추진해보자는 열의가 높아져 지방 유지들의 단합으로 강물을 끌어오는 상수도 공사가 추진되게 되었다.
용산리에서 남지리에 이르는 연장 4km 구간에 PVC 송수관을 매설하고 각 가정에 희망을 받아 급수 공사를 시행하였다.
이 주민 자력 사업은 여러 해에 걸쳐 지방민 부담금과 보조금으로 여과지와 양수 시설 등을 완성하는 등 힘껏 추진하였으나 소규모이고 관리비가 많이 소요되어 원하는 가구에 물을 충분히 공급할 수 없었다.
1974년 민간 추진위로부터 이관을 받아 창녕군에서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는데 3,400만원을 투입하여 용산리 취수장에 500톤 규모의 양수기를 설치하고 배수지를 확장하는 등 공사를 하여 12,200명 급수구역내 인구 중 급수 인구를 3,620명으로 확대하고 1일 1인 급수 계획량을 80ℓ로 잡았다.
그러나 당초 공사 때 급수관을 PVC관을 사용 매설하였기 때문에 누수율이 아주 많아 제한 급수가 불가피하였다.
식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70년부터 발벗고 나서서 추진하여 왔던 지방유지 여러분의 공로도 또한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2차로 1980년대 초에 옥산마을 앞 강변에 취수장을 만들고 옥산 앞산에 정수장을 설치하였으나 용수량 부족과 제반시설 미비로 제한 급수를 하다 중단하였다.
그후 1986년에야 마산광역상수도의 수돗물을 공급받게 되었다.


2. 시설 영농과 새마을 운동

1) 시설 영농의 확산

우리 고장은 정통적인 농촌이었으나 보리와 나락만의 주식 위주의 영농 형태로는 가난을 탈피할 수 없다는 인식이 일찍이 높아졌다.
낙동강변의 모래밭과 퇴적물로 이루어진 기름진 들판을 가진 반포들과 용산 학계리, 남포 본동으로 이어지는 밭에서는 60년대 이후 서서히 소채원예가 자리 잡기 시작해 땅콩 유월태 콩 참깨 잡곡 위주에서 수박 참외 배추 무 고추 등 소채류 재배로 작목이나 영농형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산지(山地)를 개간하여 상전(桑田)도 조성되고 복숭아와 매실 자두 밤나무를 심는 과수원도 조성되었다.

고급 기술화하는 영농 기술이 처음 보급되기는 오이 노지재배(露地栽培) 기술을 학계리 농민 2명(강도영, 차진호)이 1954년에 중앙종묘사에 가서 배워 온 것이 시초라 한다.
이들은 그해 4월 초순에 오이를 파종하고 5월 중순에 정식 하였는데, 기름종이{油紙}를 바른 목제 창틀을 이용하여 이 고장 최초로 묘를 길러 촉성 오이, 도마도를 기르는 시설 영농의 길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1957년 봄에 한 농민(이상범:일명 학용, 용산리 거주)이 폭 180cm, 20평 크기의 터널재배를 옥산에서 시도하였다.
지금 보면 너무나 원시적이고 규모가 작은 온실이었으나 그때는 성공이 어려운 모험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이듬해, 지난해의 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6명(정성만 김성덕 차진호 권기성 이학용 외 1명)이 기름종이로 740평의 온실을 건립하게 되었다.
이때 축적된 기술을 크게 활용하여 온실 건립을 확대하는 한편 오이 재배도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현대적 시설 영농형태에 한발자국 다가들었으며, 그 해 가을에는 최초로 비닐 문짝을 붙인 온실을 짓고 화목 난로를 이용하여 가열하는 시설로 발전하게 되었다.

1959년에는 군용 난로에 경유를 사용하는 방법이 도입되어 거의 현대적인 형태의 촉성재배가 시작되었는데, 이 해 옥산마을의 권기성(1920년생)의 경우 3월 10일에 파종하였다하니 그 당시의 기술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른 시기의 파종이었다.
60평의 온실을 짓고 오이를 심었다.
58∼59년 2회 재배하였는데 당시 오이 한 가방을 따서 부산 청과조합에 가져가면 돌아 올 때는 돈을 한 가방 가득 가져 왔다고 한다.
그 수익금으로 생활비로 쓰고도 논 3,600평과 복숭아 과수원(成園) 1,800평을 매입할 수 있었다 한다.

1960년에는 학계리 주변에 약 20여명, 면적은 2,000여 평으로 늘어났으며, 1961년에는 35명에 3,500여 평으로 그 규모나 재배 호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촉성 고추, 억제 오이, 봄오이 등 한해에 여러 번 수확할 수 있는 재배 기술도 개발되었고, 풋고추 재배의 경우 그 수확량이 눈에 띄게 배가되었다.

1968년경에는 본 포장(本圃場)에 짚 쌀겨 퇴비 등 양열물(釀熱物)을 밟아 넣던 것을 넣지 않고 완전히 미답압(未踏壓) 방식으로 지금 현재와 유사한 형태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온실을 완전 가열 의존재배로 그 기술이 발전되었던 것이다.

1970년대에 들어와 목조 온실을 바꾸려는 창녕군의 방침에 따라 농특사업(農特事業)으로 추진되면서 철제 온실이 보급되었다.
목조 온실은 매년 관리 유지하는데 경비가 많이 들고 천장이 낮아 채광이나 보온에 문제가 많다고 중앙의 기술진이 지적함에 따라 천장이 높고 대규모인 철제 온실을 보급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철제 온실의 구조상 여러 문제점이 노출되고 우리 지역의 기후에 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가격 또한 비싸 농가에 부채만 떠 안기므로 많이 보급되지 못하고 말았다.

1973년에 연작 피해를 줄이려는 연구의 결과로 박 모종에 오이를 접붙이는 오이 접목 방법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오이 접목 재배는 연작으로 인한 병충해 피해를 크게 줄임에 따라 온실을 몇 해만에 다른 자리로 이동하던 것을 상당기간 연장할 수 있게 되었다.

 

2) 새마을운동의 전개

"잘 살아 보세" "하면 된다"는 잘 살아보자는 운동, 오 천년 묵은 때를 벗어나자는 운동, 새마을 운동이 가난이라는 묵은 때를 벗고 자조 자립 협동 정신으로 잘 살아보자는 박정희 대통령의 주창으로 전국 마을 마을마다 1970년대에 전개되었다.
1971년, 처음으로 새마을 가꾸기 사업이 우리 읍 38개 동리 마을마다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시멘트 335포씩을 정부에서 지원해 주면서 마을 안길 넓히기, 지붕개량, 변소개량, 마을회관이나 마을 공동 창고 짓기 등의 그 마을 아주 기초적이며 바탕이 되는 사업부터 마을 자력으로 추진하여 이루어 보라는 자력 갱생의 운동이었다.
첫해 읍 직원들이 마을마다 담당직원으로 지명되고 주도적인 자세로 동민을 설득 사업 추진을 맡게 되었으며, 사업 추진의 주체로 이장과 함께 마을개발위원회에서 새마을 운동을 주도할 새마을 지도자를 뽑아 사업의 주관과 세부 계획 수립, 추진 등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정부에서 시멘트와 철근 이외의 모든 것은 주민 스스로 조달하였는데 모래를 냇가에서 실어오고, 마을 안길을 넓히거나 농로 확장을 위해 무상으로 토지를 내어놓았다.
마을이 생기고 나서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들이 주민 자력으로 착착 이루어 졌다.
자력으로 폭이 좁은 농로와 마을 안길을 소달구지와 경운기, 차가 다닐 수 있도록 언덕을 손질하고 돌담을 뜯고서 라도 4m∼6m 정도 넓이로 확장하였으며, 다리가 없어 건너다니기에 불편했던 냇가에는 소교량을 설치하고 구불구불하였던 소하천도 석축을 쌓아 바르게 정비하였다.
또 공동이용시설들도 만들었는데 마을 회관을 비롯하여 마을 창고, 공동 우물, 공동 빨래터, 공동 퇴비장 등을 만들었으며, 회관에는 마을문고를 비치하고 책을 읽게 하였으며, 새마을 금고도 설치하도록 하여 저축도 유도하였다.

복지 환경 시설도 많이 설치하였는데 주로 하수구를 많이 만들었고, 마을 주변에 나무를 많이 심게 하였다.
특히 각 가정의 생활개선으로 위생적인 화장실 개수, 절미저축운동, 부엌 개량, 집안 청소에 이르기까지 읍 직원과 이장 새마을지도자(남 여) 개발위원 등이 혼연일체가 되어 수 천년 묵은 생활 관습들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1972년부터는 지붕개량 사업, 주택개량 사업이 추진되면서 자립마을 육성에 박차를 가하였다.

여러 가지 지원사업이 수년간에 걸쳐 새마을 사업으로 추진된 결과 우리 읍은 잘 사는 고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지읍 소재지 마구선 국도 변의 시가지도 소도시 가꾸기 사업의 추진으로 남지지서 앞에서 철교에 이르는 도로가 확장되고 길가의 불량주택들이 개축 개수되고 인도(人道) 개설과 가드레일이 가설되어 완전히 소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3. 현대화하는 우리 읍

1) 이농과 핵가족화의 심화

인구가 증가하고 발전됨에 따라 1963년에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70년대에 새마을 사업의 추진으로 우리 읍은 여러 가지로 그 모습도 달라지고 읍민의 의식도 잘살아 보아야겠다는 의식 변혁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영농 방법도 고수익 작물을 선택하여 재배하고 주택도 점점 현대식 구조로 개축하는 등 여러 면에서 현대적인 의식이 나타났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농업위주에서 상공업으로 바뀌어지면서 이농 현상이 두드러져 많은 인구가 도시로 이주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 읍의 인구도 1960년대 보다 점차 감소하게 되었던 것이다.

읍 승격 당시 인구가 2만 명을 넘어서 1964년도의 인구는 남자 11,025명 여자 10,877명 계 21,902명으로 인구 조사이후 최고 인구수였다. 그러나 점점 감소되어 1970년에는 겨우 2만 명이 넘어서는 20,357명이었고, 10년이 경과한 1980년에는 17,324명으로 10년 사이에 3,033명이 줄어 든 것이다. 그러나 세대수는 핵가족화 현상의 반영으로 줄어들지 않고 1971년 3,529가구이었던 것이 1980년에는 3,788가구로 오히려 259가구가 증가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다시 10년 후인 1990년의 인구 조사를 보면 더욱 이농 현상과 도시 집중으로 인한 이주 현상이 대폭 증대되어 1990년에는 남자 6,171명 여자 6,511명 계 12,682명으로 10년 전인 1980년보다는 4,642명이 감소하였고 가장 인구가 많았던 1964년에 비하면 무려 9,220명이나 줄어들었다. 즉 26년 사이에 인구가 1만 여명이 인근 도시나 타지로 전출한 것으로 나타나며 인구 증가율을 감안한다면 산업 구조 또한 농업에서 상공업이나 기타 2, 3차 산업으로 이동된 계층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날에는 한 집에 2대 3대가 모여 살아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들과 손자 등 4대가 흔히 한솥밥을 먹고살았다. 그러나 점차 현대화의 과정에서 가장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출산율의 저하와 함께 핵가족화 경향이 뚜렷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인구는 30년 전에 비하여 만 명이나 감소하였으면서도 세대수는 크게 증가하여 그 인구수가 비슷한 해였던 1945년(인구수 14,078명)에 2,561세대였던데 비해 1995년(인구수 13,115명)에는 그 배가 불어난 4,076세대이다. 세대당의 인구수도 전에는 5.7명이었으나 지금은 3.4명으로 감소되었다.

핵가족화에 따라 단출한 가족끼리 살아 생활비도 절감되고 부부만의 만족한 생활을 기대할 수 있게 된 반면 대가족 거주 전통이 사라지면서 효 사상이 퇴색하는 등 각종 사회적 문제점도 노출되고 있고 자녀 교육에도 개인적인 성향이 뚜렷이 나타나는 등 가정 교육에도 어려움이 많다.

인구 감소 현상은 교육계에도 영향을 미쳐 우리 읍 관내에 7개교의 초등학교가 학생수 감소로 인하여 성사국민학교가 폐교되었으며 반포국민학교와 월상국민학교가 각각 남지초등학교 분교로 격하되었다가 1999학년도에 폐교되었다. 중등교육에도 영향이 커 학급수와 학생수가 계속 감소하고 있다. 또 고곡지구에도 인구의 감소로 인하여 군 행정 당국의 구조조정에 휘말려 1998년 9월에 고곡출장소가 폐지되고 고곡지구민원연락실이 설치되는 등 변화를 겪었다.

또 세대수의 증가는 주택 부족 현상을 야기하는데 남지리에 그 동안 아파트가 건립되어 많은 세대가 입주하고 있으나 세입자도 또한 많아 앞으로 주택의 보급도 요망되고 있다.

 

2) 고속도로와 하천부지


 사진설명 ( 고속도로 남지 입구 )

현대에 들어 가장 두드러진 발전상의 하나는 고속도로가 우리 읍을 통과하게 되면서 음양으로 읍의 현대화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1977년 고속도로가 개통될 당시 우리 읍의 통과 구간 도로 연장은 1.9km로 진입로가 만들어 진 것이다. 또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가설되어 남지철교에 이은 제2의 교량이 되었을 때 읍민들은 자랑과 기쁨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이 낙동강대교는 함안군 칠서면에서 남지리 본동 입구와 연결되었는데 문제는 교각의 방향이 남지 쪽으로 비뚤어지게 설치되었다는 점이었다.

교각이 [V]자 형으로 보기에 아주 좋은 형태여서 한국에서 가장 보기 좋은 다리로 각광을 받기도 하였는데 교량의 길이는 680m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평소 남지 쪽에 아주 넓은 하천부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이 하천부지는 본동에서 도천면 송진리 앞까지 이어지면서 수박과 배추 무, 감자와 콩을 심어 큰 소득을 올리고 있었는데 이 들판이 해마다 홍수가 들자 점차 땅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원인은 수년간에 걸친 관찰 결과 고속도로 교각의 방향이 남지 쪽으로 치우쳐 강물이 교각을 지나면서 그 방향이 바뀌어 강의 북쪽 땅을 파내어 남쪽으로 덮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되어 남지쪽 수 만평의 하천부지가 해마다 강물 속으로 뜯어져 나가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다. 1985년 이후 이러한 문제점이 신문지상에 보도되면서 민원이 발생하였다.

이 문제점은 결국 1992년 경 4차선 고속도로가 착공되면서 기존 교량 옆에 철제빔으로 된 새 교량이 가설되고 또 낙동강대교의 V자형 교각을 철거하고 새로 교각과 다리를 건설하는 것으로 해결되어 1995년 말에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새로운 다리로 개선되었다.

4차선 고속도로 확장 시에 우리 읍과 연결되는 인터체인지 건설이 당초 계획에 빠져 있었는데 여러 지방 유지들과 읍장을 비롯한 기관 단체장들이 강력하게 상부 기관과 국회의원, 고속도로공사 등에 건의 탄원하는 노력 결과 진입로를 갖추도록 성사시켰다. 만약 우리 읍 관내에 진입로가 건설되지 않았다면 멀리 까지 돌아서 고속도로에 진입하는 불편을 겪을 뿐만 아니라 소외된 지역이 되어 읍의 발전에도 큰 영향이 미쳤을 것이다.


3) 영농 현대화와 농협의 발전

 사진설명  ( 남지농협 )

우리 읍은 오래 전부터 영농의 기술 도입이 타 지역보다 한 발 앞섰다고 앞에서 기술한바 있는데 1980년대에 들어서 더욱 영농의 현대화와 함께 또 하나 기억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농협(단위농업협동조합)의 꾸준한 발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82년 자료에 의하면 우리 읍의 시설소채재배 농가는 323호에 이르러 농민에 의한 농협의 역할이 높이 요청되고 있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우리 읍에 기존 농협지소가 있었으나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고 단지 정부의 방침에 따라 농민에게 농자금을 융자해 주는 소극적 대처만을 해 왔으므로 농민에 의한 농협의 탄생이 바람직하였다. 이런 여건을 가지고 남지단위농업협동조합이 출발하였고 그 전에 원예협동조합이 있었음에도 소규모임에 비추어 그와는 달리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1981년 1월 1일을 기하여 단위농협은 연합 조직으로부터 탈법인화 하여 독립성을 갖게 되었고 기존의 농협은 중앙회의 지부로 개편되는 등 변화가 왔다. 즉 이름뿐이었던 단위농협이 명실상부한 조합으로 다시 태어나고 지역성에 알맞은 사업을 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남지농협은 우리 읍이 오이 고추 등을 생산하지만 서울이나 부산등 대단위 중간 상인 또는 도시 청과조합에서 제 값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착안하여 작목반을 구성하고 공동 출하토록 하였다. 이어 남지지구 고등소채 공판장을 개설하게 되는데 조합원들의 큰 호응으로 재배 농가는 394호에 이르렀으며 1982년도에는 작목반은 10개 이동에 9개 고등소채 작목반이 있었다.

 사진설명  ( 고곡소재 남지농협 )

80년에서 81년도에 공판 실적을 보면 80년에 가을오이 1,072톤에 31억이었지만 81년도에는 봄풋고추, 봄오이, 가을오이 등 1,209톤에 10억 원이 넘어서기도 하였다. 당시 남지농협에서는 출하 조합원에 대하여 출하수수료 및 제 비용을 7천만 원 절감 효과가 있었으며, 공판장 취급으로 인하여 타지에 출하하지 않음으로 가격 농간을 억제하였으며 1억여원 이상의 이익 등이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영농 형태도 기계화가 가속도가 붙어 소를 이용 경운 하는 농가는 이제 거의 없고 대부분 경운기로 운반 경운 등을 하고 있으며 생산 농산물의 운반을 위해 소형 트럭을 갖춘 농가도 늘어나고 있다.

 

 

 

 

4) 5일장 (5日場)의 쇠퇴


욱개장은 조선 중기 때부터 장이 서기 시작하여 낙동강을 낀 나루터라는 이점과 나루터에서 출발하는 내륙지방으로의 통로라는 이점 때문에 점점 5일장이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흐름에 따라 기복이 생겨 최근 교통이 편리해지고 상권 형성이 도시 중심으로 편성됨에 따라 5일장은 전국적으로 쇠퇴하는 시기를 맞이하였다. 우리 읍에도 이러한 영향으로 점점 시장에 모이는 장꾼의 수효도 줄어들고 상인들의 도래도 적어져 지금은 예전과 달리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우시장은 과거 인근의 여러 시장 중에서 가장 규모도 컸고 소 돼지 닭 개 토끼 등 많은 가축이 출하되고 매매되었는데 최근 소 돼지 사육 농가가 급격히 감소하고 또 기업 축산 농가가 증가함에 따라 우시장이 크게 위축되어 소 돼지의 출하가 감소하였다. 1992년 하는 수 없이 남지 우시장을 철시하게 되었고 창녕 우시장에 통합하는 형편이 되어 지금 구 우시장 자리는 과수원으로 조성되고 말았다.

현재 남지시장은 2일, 7일에 장이 서는데 대지 면적은 4,901m2이며, 점포 수는 20개로 그 건축 면적은 353m2인데 도시로 공산물이나 수산물을 구입하러 나가는 추세가 많이 나타나고, 여러 가지 물건을 실은 자동차가 마을을 순회하며 판매하는 상인이 많아지고 또 상설시장은 아니지만 소채 반찬류 부식가게가 매일 문을 열고 있기 때문에 5일장은 호황을 누리던 예전 경기를 되찾기에는 힘겨운 실정이다.



4.읍 발전상 이모저모

1) 도시계획 추진

도시계획은 1973년 5월 1일 일부변경 지적 승인 공고가 있었으나 그 실제적인 추진은 미미하였다. 막대한 예산의 투입이 있어야 하는데 정부의 지원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큰 원인이기도 하였지만 막상 사업이 추진되자 개인의 이익을 앞세운 제몫을 많이 찾기 위한 지연 공세도 거세어 읍 행정당국에서도 사업 추진에 많은 고초가 뒤따랐다.

1988년경 동포동에서 대신동 네거리에 이르러는 남지 시가지 중심도로의 확장포장공사가 시작되었다. 도로의 남쪽편의 건물을 철거하고 확장하는 공사였는데 조금씩 진척되자 읍의 모습이 확실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 간선도로 확장공사는 대신동 네거리까지 확장되는 동안 서동 중간에서 가옥 철거 때문에 상당기간 중단되어 있었다가 1995년도에 재개되어 마무리되었다.

또한 이 도로의 연장선이 용산리까지의 포장 공사도 진행되어 먼저 인가가 있는 학계리 구간이 포장되었으며 그후 용산리 창날마을 앞까지 포장이 완료되었다.

남지리 서동과 마산리 홍포동 마을 사이의 낮은 논밭을 메워 돋우고 매립한 후 주거공간으로 구획하는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수 년 전에 발주되어 인근 농토 소유자와 홍포 마을 일부를 포함하는 주택단지 조성공사가 추진되고 있는데 준공단계에 있어 많은 아파트와 주택이 들어서고 있다. 이 사업은 1979년 11월 16일, 함안군의 칠서공단 설치계획이 지정, 구체화되면서 공단 배후도시로 우리 읍이 크게 발전될 것이라고 예상하고서 1980년대 후반기부터 도시계획상 상업지구인 이 일대의 논밭을 외지인들이 매입하는 부동산 투기바람이 불었으며 이어 9만여 평에 달하는 구획정리 사업이 정식 발주되어 1992년경 매립을 시작하여 1994년 편입 토지에 대한 보상금 지급 등 관계되는 과정이 마무리되고 있는 중이다.

 

2) 신남지교(新南旨橋) 개통과 도로 포장


 사진설명 ( 남지 우회도로 )

또 마구선 국도의 포장도 연차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남포동에서 동포동에 이르러는 시가지 통과 구간부터 포장하기 시작하여 1977년 구마고속도로가 개통될 때 동포동에서 고속도로 진입로까지, 그후 남포동 외곽에서 남지철교까지 각각 시차를 두고 포장되었다.

비포장 도로로 여전히 남아 있었던 고속도로 진입로에서 남송교까지의 도로 포장은 마구선 확포장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이 확장 포장공사는 1980년대 초에 완공되어 우리 읍의 통과 5호선 국도의 포장은 너무나 더디게 마무리되었던 것이다.

마구선의 확장 공사와 함께 추진된 것이 남지 시가지 우회도로 개설이었다. 국도가 남지 시가지를 통과하게 됨에 따라 먼지와 진동이 심하고 소음이 커서 주민 생활에 불편이 가중되고 또 가설한지 오래되는 남지철교가 노후화 되어 버스나 트럭 중기 등의 통과가 불가능하게 되어 새로운 교량의 건설이 요청되었던 것이다.

칠서면 진동 쪽의 작은 제왕담에서 본동 마을 끝으로 연결되면서 남지리 206번지 지점을 통과하는 남지대교는 1989년 가을에 착공되어 1994년에 완공 개통되어 칠서면 이룡리간의 교통도 편리해 졌다. 동시에 어느 해 홍수로 나룻배가 유실되고 난 다음부터 끊어져 불편했던 강 건너 마을과의 교통도 훨씬 원활해 졌다.

1996년 8월 시가지로 연결되는 진입도로 110m 개설 공사가 착공되어 12월에 완공되었으며 입구에서 홍포동 쪽으로 연결되는 우회도로 공사가 현재(1999년)진행중으로 남지대교 입구는 5거리가 될 것이다.

남지철교는 차량의 운행을 전면 중지시키고 있다가 1995년도에 교량 난간 교체 및 바닥 재포장, 도색 등 크게 수리하여 1996년도에 소형 차량만 운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우리 읍에는 지방도로가 여러 곳에 있다. 먼저 월하리 월상에서 영산으로 나가는 지방도가 있는데 1993년부터 확장 포장공사가 고곡리 두곡마을 입구에서부터 시작되어 칠현리까지 진행되었으며 나머지 구간은 99년 말까지 완공 개통될 것이다. 남지리 동포동에서 성사리를 거쳐 고곡리에 이르러는 지방도와 용산리에서 읍사무소에 이르는 길은 확장 포장공사가 추진되어 수년만에 완결되었다. 또 마을과 마을을 잇는 도로들도 대부분 포장되었으나 다만 칠현리에서 낙동강변을 따라 용산리에 이르는 도로는 칠현 - 영아지간 외에는 미포장 상태로 남아 있는데 1999년 말에 완전 포장될 것이다.


3) 해결된 상수도

용산리의 상수도 시설의 대체시설로 1979년 학계리 옥산마을 뒷산에다 정수장을 만들기 시작하여 1983년 경 완공하였다. 이 시설은 옥산 마을 앞 강변 모래사장에 집수정을 만들고 취수를 하였는데 용수량의 부족과 여러 여건이 미비하여 결국 제한 급수를 하였으나 오래 사용하지도 못하고 중단하였다.

그 즈음 강 건너 칠서면 계내리에 마산시에서 마산광역 상수도 시설을 완공하게 되자 그곳에서 정수 처리된 물을 공급받도록 하자는 계획의 추진으로 창녕군과 마산시 사이에 협의가 이루어지게 되어 10여 년간의 숙원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군비 교부금 1억 3천만원을 받아 시설하여 칠서정수장으로부터 인수(引水)하는 시설을 완료하게 되었다.

계내리 정수장에서 남지철교를 거치게 되는데 송수관을 철교 난간 아래 교각 부위에 매달아 남지 소재지 일원에 위생적인 수돗물을 공급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상수도 시설임에도 용량이 작은 용수관으로 인한 공급 부족으로 충분한 용수량을 확보하지 못해 추가 설치 가정에 다 급수를 못하는 애로가 있기도 하였다. 현재 급수 인구는 읍 전체 인구의 37.5%인 5,170명이며 1일 1인당 급수량은 226ℓ로 하루 급수량은 1,167m3에 이르고 있다.

 

4) 낙동강 연안 개발사업 추진

낙동강 연안 개발사업이 건설부의 계획대로 추진되기 시작하여 낙동강 상류로부터 제방 축조공사가 시작되었다. 남지리 시가지 일부인 본동과 남포동의 상당한 부분이 800m의 하폭(河幅) 확보 계획에 의거 하천부지로 편입되어 주민들이 퇴거하고 가옥은 철거 대상이 된다는 소식에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으며, 다른 지역에서도 농토의 하천부지 편입과 높은 제방의 필요성에 관한 찬반 여론이 있어 사업 추진이 지지부진했다. 그러나 월하리- 대곡리 일부분, 용산리-옥산리 일부분은 제방이 축조되었다.

1998년 8월, 홍수 범람 때 위험수위 10m를 넘은 10.5m에 이르러 반포들을 비롯한 여러 지역이 침수됨에 따라 안동댐을 비롯한 여러 댐이 있더라도 제방을 높이 쌓아야 할 필요성이 다시 제기되었다.



5. 남지읍의 미래상

 


사진설명

   ( 건물과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있는 구획정리지구 )

도시계획 면적은 9.9km2로 읍사무소에 이르는 중앙로의 확장과 포장 사업이 대체적으로 마무리되면서 도시계획에 따른 사업 추진이 점차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시가(市街) 모습이 크게 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읍민의 식수문제 역시 마산 광역 상수원에서 수돗물을 공급받게 되어 가장 위생적인 물을 사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도시와 다름없는 생활이 가능할 것이다.

특히 칠서공단의 조성이 거의 마무리됨으로써 기업체가 입주되면 한층 남지읍은 위성도시로 변모됨은 물론 앞으로 발전의 전망이 밝아지고 있다. 또한 고곡지역의 동맥인 월하리-박진에 건설되고 있는(현재 동정 99%) 박진교와 지방도 1008호선의 확 포장(포장공사 추진)공사가 완공되면 의령에서 고속도로로 연결되는 중요한 길목이 되므로 고곡지구의 발전 또한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1987년도에 건립된 6 25 전적비를 더욱 가꾸어 당시의 격적지 현장을 역사 교육장(유물전시장 등)으로 활용하도록 계획하고 있는데 지금도 수많은 국군 장병들이 견학 방문하고 있다.

남지농협도 타 지역보다 경영이 탁월하여 도내에서도 이름나 있는 농협으로 성장해오면서 본 고장의 특산물(비닐하우스 재배)의 판로 개척(공판장 등) 등으로 소득증대에 큰 역할을 함으로써 남지 발전에 기여하고있다.

그러나 지금은 국제화, 세계화로 가는 현시점에서 우리 남지읍민은 이를 만족할 수 없다. 남지읍의 개발과 발전을 위해 새로운 비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우선 칠서공단으로 인한 배후도시로의 개발 추진을 구상해야 하고, 그 동안 추진되어 온 남지구획정리사업 8만7천평이 99년 5월 말에 준공을 앞두고 있는바, 주변 환경에 걸 맞는 각종 생활시설 또는 주택이 건립되어야 한다.

이보다 체계적이고 기본을 갖춘 도시계획을 입안키 위해 본군에서는 3억의 용역비로 남지읍 전경을 항공 촬영토록 계획하고 있다.

또한 본 읍은 현재 기반시설이 원만하지 못하다. 22km의 낙동강을 끼고 있어 여름철마다 비가 오면 강 수위의 상승과 많은 강우시에는 물난리를 만나 가옥과 농경지가 피해를 입어 주민들이 시름을 갖게 된다. 무엇보다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업은 기존 하수구의 재정비이다. 강의 수위가 높아지면 강물이 하수구를 통하여 읍 시가지로 역류돼 온다. 이로 인한 피해가 더욱 커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98년 1월에 낙동강수계사업(강물 살리기 사업)으로 시행되고있는 남지하수(분뇨 연계처리)종말처리장 공사가 사업비 200억원을 투자하여 1일 오수(汚水) 5,200톤 처리될 것이며, 이에 수반되는 차집관로 5km가 명지에서 읍시가지 내를 경유하도록 매설하는데 2001년도에 준공될 예정이다. 그러면 그간 생활오수가 낙동강으로 마구 흘러 들어갔는데 그것을 전부 차단될 것이다.

이에 보조를 같이하여 사업비 30억원을 투자하여 많은 강우시 우수처리계획을 수립 내수(內水)로 인한 피해를 최소한 줄여보자는 대안이다.

그 다음은 낙동강 치수사업의 추진이다.

1999년 2월부터 착공되는 남지제 축조는 길이 1.6km, 사업비 170억원을 투자, 제방공사가 추진되고 있으나. 일부 잔여 구간 1.6km(본동리 남포리)는 주민 491세대(건물 783동)의 이주 대책 등 많은 예산(약 1천억원 정도)이 소요되므로 현재까지 뚜렷한 추진계획이 없어 지역민의 마음을 애태우고 있는 실정에 놓여 있으나, 다소 희망을 갖고 중앙요로 등에 계속 건의 호소하고 있다.

이러한 큰 현안사업이 이루어지면 우선 정비해야 할 것은 남지시장 문제다.

정기시장은 시대적 변천에 따라 변화가 많았으나 재래시장의 현대적 개발은 너무 미미하다. 인접해 있는 공설운동장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현재 추진되고 있는 제방 축조가 완료되면 하천으로 편입될 조성되는 고수부지를 2∼3만평 정도 확보하여 주변환경에 맞는 조경과 읍민의 생활체육장으로 가꾸도록 하고, 기존 운동장은 현대식 상설시장(또는 잔여 구간 1.6km 공사시 이주단지 조성 등)으로 활용토록 구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거리 질서에 관한 주차 질서의 확립이다.

도로마다 불법 주정차로 인하여 거리가 복잡하고 읍민의 불편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 문제 역시 기존 피수대 약 250m를 철거하여 공용주차장으로 사용한다면 거리 질서를 찾게 될 것으로 본다.

우리 읍 미래상 중 추가로 염원하고자 하는 사업은 칠현-남지(용산)간 개비리 지방도의 확 포장과 옛 거름강나루(용산-의령 지정면 간) 교량 설치 등으로 두 가지 사업이 이루어지면 사통팔달 교통 원활로 남지읍의 미래는 정말 밝아질 것이다.

이 모든 소망적 현안들이 창출되려면 우리는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어야 하고, 지역적 발전과 경쟁력이 뒤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 일만 삼천 읍민 모두가 꼭 읍 발전을 염원하는 사명감을 갖게 되어 새로운 2천년 남지읍의 밝은 미래를 꿈꾸어 본다.

남지면 시대

 

1. 면 명(面名)의 개칭

  사진설명 ( 웃개 )

   우리 고장이 오래 전부터 남곡면과 도사면으로 나뉘어져 있다가 1914년 4월 1일 합하여져
   남곡면으로 되어진지 22년 후인 1936년 4월 1일 면의 이름이 남지로 바뀌어 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남곡면 시대는 일제(日帝)가 우리 나라 침탈을 시작한 때부터 시작되어
   그 절정기에 끝나게 된 것이다.

   남지면 시대는 1936년에 시작되어 해방을 맞은 후 지속되면서 6 25동란 즉 한국전쟁을 겪게 되었으며,
   1963년 3월 1일 읍으로 승격되기까지 27년간으로 이때는 일제 침탈의 극치를 이룬 태평양 전쟁에 따른
   가난과 고통의 시대였으며, 해방, 6 25전쟁, 5 16혁명 등 격동의 시대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이 시대는 가치의 혼란과 사상적인 대립으로 인한 골육상잔의 뼈아픈 고통이 계속된 극도로 참기 어려운
   시대였으며 따라서 기존의 도덕과 질서가 무너지는 시대라 할 수 있어 우리 고장에도 많은 피해자가 생기고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또 새로운 문물이 밀려 들어와 우리 사회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시대이기도 하였다.

본 항에서는 광복전의 일과 광복후의 일을 구분하여 다루면서, 이 시대 사건중 가장 비극적인 동족 상잔, 민족 분단이란 쓰라린 참상이었던 한국전쟁은 우리 지역이 전장(戰場)이 되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많은 인명 재산상 피해가 났으므로 {五. 韓國戰爭과 鄕土}로 항을 달리하여 자세하게 다루고자 한다.
우리 면의 이름이 남곡(南谷)에서 남지(南旨)로 바뀐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우리 고장이 한일합방 이후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면세가 날로 커졌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에는 일본인들이 우리 지방에 많이 몰려와 살게 되었다.
그것은 아마 창녕이나 영산에는 현청이나 군청이 있어 기존 토착민들과 옛 관리나 양반 등 수구세력들이 많아 신흥세력인 일본인들이 발을 붙이기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을 기피하고 작은 강마을로서 인구도 얼마 안되고 그렇게 큰 토착 양반이나 관리 등 큰 세력이 없었던 남지가 그들이 정착하기에 용이하였다고 생각된다.

또 개간 여지가 많은 임자 없는 땅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인근 영남들이 늪지로 방치되고 있어 개간하기만 하면 옥답으로 대규모의 농장을 만들기에 적합한 지리적 여건이 감안된 듯하다.
또 낙동강변 일대가 밤밭, 솔밭이거나 버려진 황무지로 있었으므로 역시 개간하기에 적합하였으므로 일본인의 대거 정착이 가능하였으리라 판단된다.
그래서 그들은 이 고장을 그들의 정착지로 삼고 집중적으로 개간과 개발을 하였으니 영남들을 개간하여 영남수리조합을 만들었고, 칠원에서 칠북-길곡면 멸포나루-오호리-도천 논리-영산으로 이어질 마구선 국도개설 계획도 고쳐 칠원-칠서면 계내리-남지-도천 일리-영산으로 도로를 개설하였고 따라서 낙동강 위에 놓을 철교도 길곡면 오호리 멸포나루가 아니라 남지리에 설치 남지철교가 되었으니 남지는 바로 교통의 요지가 되게 되었다.
대구 통영간 2등 국도인 신작로와 남지철교의 개통, 영남 수리조합구역의 개간 완료 등으로 우리 고장은 바야흐로 벼와 보리 등 곡물의 주요 생산지로 또 교통의 요지로 급부상하게 되니 자연히 인구도 급격히 늘어 나게 되었으며 남지리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게 되었다.

또 다른 이유는 육상 운수의 발달과 함께 1919년 9월에 문을 연 남지우편소의 편지 전신 전화의 소통에 큰 지장을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신식 문물인 통신 수단은 식민지 통치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였는데 통신의 혼란은 일본인들에게 심각한 문제로 받아 들여 진 것이다.
본래 남곡이란 지명은 아지리를 지칭하였는데 조선조 말에 본남곡촌이 아지리로 개칭되면서 남곡이란 지명은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또 새로운 면 체제가 되면서 면사무소 소재지의 지명을 따르지 않고 남곡면으로 불리어 졌으나 면내에 남곡이란 동리는 없이 면 이름만 있고 보니 외지에서 편지를 보내거나 면사무소를 찾아오려면 혼란과 지연이 극심하였다고 한다.
특히 통신상 어려운 점이 많아 고장 발전에 큰 지장을 가져오니 면의 이름을 면사무소 소재지의 지명과 일치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면민 사이에 높아졌던 것이다.

이러한 형편에 이르러 당시 면에 조직되어 있던 면의회에서 면 이름을 개칭하자는 결의를 하고 면명 개칭을 상부 관청에 건의하게 되었다.
지방 유지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1936년(丙子) 4월 1일에 면의 이름을 남지면으로 개칭하게 되었던 것이다.
남지면으로 개칭된 그 해 큰 홍수가 있어 면민의 피해가 심했다고 한다.
병자년 물난리에 수많은 가재 도구와 인명을 잃었다 하니 해마다 겪는 수해는 여러 명목으로 수탈하던 일제의 착취와 함께 우리 면민을 더욱 곤경에 처하게 하였다.


2. 광복 전의 우리 고장

1) 일본인의 이주(移住)와 지고의 세월

한일합방 이후 우리 나라에 일본인이 밀물같이 밀려들어오면서 함께 갖가지 새로운 문물들을 들여와 자연히 상권과 부를 축척 하는 수단으로 쓰여졌는데 어떠한 것들은 우리를 수탈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일본인들은 주로 조선에 나오기만 하면 단번에 일확천금을 잡을 수가 있다는 허황한 꿈을 안고 왔고, 대다수가 권력과 엄포로 위협하며 면민을 괴롭히고 임자 없는 땅이 우리 나라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적도 작성을 위한 토지측량이란 핑계로 마구잡이 측량으로 높은 세금을 매기거나 갖가지 기이한 방법들을 동원하여 넓은 토지를 강제로 빼앗아 동양척식회사 등 거대한 농장을 만들었다.
남지면에 살았던 일인들은 창녕군내 일인의 중심세력으로 그 수도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 당시 우리 군내 인구가 17,195호에 90,714명이었을 때 이중 일인은 154호에 597명이었다.
자세하게 살펴보면 1930년 군내 일본인이 604명일 때 창녕면에 186명 남곡면에 203명이 거주했으며, 1935년에는 일인이 741명인데 그중 창녕면에는 228명 남곡면에는 283명이 거주한다고 조사되어 있음을 보아 남지는 일인의 거주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영남수리공사로 몰려들어 이 공사의 완공과 더불어 대규모의 논과 낙동강변을 개간해 얻은 밭을 소유한 농장 지주로 자리잡기 시작했는데 그들의 농장 이름들이나 대지주들을 살펴보면 대충 다음과 같았다.
조선신탁주식회사, 동양척식주식회사, 삼각흥업주식회사 등과 같은 회사 형태와 식량영단 같이 공출을 받아 도정하는 공장을 운영하는 형식도 갖추고 있었다.
일본인의 농장으로 대규모였던 것은 신호천기(神戶川崎)의 개성사(開成社) - 흔히 천기농장이라 불렸다.
신호관구(神戶關口)의 관구농장, 강산남견(岡山楠見)의 남견농장 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인 대지주로는 남지리 주변에는 해방되기 직전 면장을 지낸 롱천철지조(瀧川鐵之助)를 비롯하여 마산리에는 남견동삼랑, 신전리(상대포) 근방에는 천상황지랑, 성사리에는 천기아가, 천기무지조, 칠현리 등지에 천상황태량 등으로 많은 일인 지주들이 소작농을 거느리고 수탈했으며, 인근 도천면 송진리 일대에 송하육이, 영산면 봉산 봉암, 장마면 유리 일대의 영남수리조합 구역내 농장들은 천기아가, 천기무지조 일가가 중심 세력으로 행세를 하였다.
조선 사람들은 이들의 성을 붙여 천기 농장이니 송하 농장이니 부르기도 하였다.

1925년에 착공하여 이듬해 수리시설이 완성된 영남수리조합의 면적은 1,032정보인데 이 몽리면적의 7할이 6명의 일인 농장의 수중에 있었으며 여섯 지주 가운데서 천기농장 소유가 전면적의 절반인 500정보이었다.
이 농장의 소작료는 8∼9할에 가까웠다.
이에 농장 소작인 200여 명이 1927년 12월 5일 천기 소작인 동맹을 조직하고 6할 이상 지불을 거절하며 쟁의를 일으켰다.
그때 영산 3 1운동의 주동자였던 24인 결사대 대원들은 일제 경찰에 구속되었다가 2∼3년의 징역을 살고 출옥한 후 천도교 포교 같은 종교운동, 문화 향상, 체육활동, 문맹퇴치, 야학 등 청년 계몽운동과 함께 농민운동으로 영산소작인회를 조직 한인 지주들과 소작인간의 쟁의 해결에 노력해오고 있었다.
이 영산소작인회가 관여를 하였는지 나타나지 않지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 시기에 이 지역 농민운동은 그 방향이 한인 지주에 대한 투쟁에서 일제 식민지 수탈제에 대한 투쟁의 양상으로 나아갔다고 한다.
1927년 12월의 소작인 쟁의는 결국 소작료를 8∼9할이던 것을 6할로 끌어내렸다.
{월간 독립기념관}에 우리 지역 농민운동과 관련된 부분이 수록되어 있는데 {경남 창녕군 영산 3 1운동}이란 연구 논문은 다음과 같이 당시의 우리 지역의 농민운동을 기술하고 있어 그 원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영산소작인회가 이에 따라 사회주의 계열의 농민운동이 분화되면서 투쟁의 중심도 영산에서 일인농업침투 거점지역인 낙동강변 남지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남지정진단은 조선농민총동맹의 산하 단체로 창녕군 남곡면(지금의 남지읍) 마산정에 본부를 두고 경남도 경찰서로부터 1934년 강제 해체됨으로써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위 기록을 보면 영산3 1운동의 영향으로 현실적 모순을 타개하기 위한 농민운동으로 나아가게 되었는데,
[ 이러한 자각은 1927년도의 천기농장과 같은 수리조합을 통한 대규모 일제 농업침투 수탈에 대항하여 일어난 소작인들의 단결에 밑거름이 되어 농장측을 굴복시켰으며, 이 지역의 일제 농업 수탈 중심지의 하나였던 남지를 중심으로 창녕농민조합연맹 결성 운동으로 나아감으로써 일제식민지 농업 수탈에 정면 도전하기에 이르렀다.]
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의 남지 농민운동이 학계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알게 한다.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외치며 창씨개명, 황국신민화가 극치를 치닫고 대동아전쟁을 일으킬 무렵인 1940년대에는 면장마저 조선인 면장(정정수)을 부면장으로 강등시키고 면장 자리에 일본인(瀧川鐵之助: 다께가와 데스노스께)이 앉아 보국대(징용)도 보내고 공출도 엄청나게 거두고, 집안의 놋그릇이란 놋그릇은 간장 종지까지 강제로 다 빼앗고, 학생들은 공부는 뒷전이고 관솔을 따러 산야를 헤매게 하는 등 전쟁 물자 수탈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 외 일인들은 관공서 관리, 상공업에 종사하거나 기술자들로 한밑천 잡아 본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인물들이라 우리 고장으로 보아서는 백해무익한 사람들이었다.
단지 남지에서 개업하고 있었던 일인 의사 한사람은 면민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하는데 하야(河野; 고오노)의사는 병마에 시달리는 농민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현대 의학에 기초한 서양의술을 베풀어 효험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현재 남지리 남포 621-4번지 남지의원 자리에 그 병원이 있었다.

 

2) 수해와 수리시설

해마다 우리 고장은 낙동강에 인접한 지역이므로 강물의 범람, 홍수로 물난리를 연례 행사처럼 겪어 왔다.
강변 주위에 사는 사람들은 해마다 홍수 걱정을 하고 농사는 큰비가 있고 없고 에 따라 흉년과 풍년이 좌우되는 실정이었다.
농사를 지어놓아도 하루아침에 황토 물이 휩쓸어 가버리곤 하니 수확할 때까지 하늘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야 했다.
따라서 수리안전시설이 절실하게 필요하였다.

 

(1) 영남수리제방 ( 靈 南 水 利 堤 防 )
 

남지 영산 장마면의 옥야 2,000여 정보를 보호하는 영남수리제방은 계성천을 따라 장마면 강리에서 시작하여 본 읍 성사리와 신전리를 거쳐 낙동강 연안 도천면 송진리에 도달하는 총 연장 5,400m의 제방이다. {취산군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水利組合事務所 在南谷面南旨里

靈南水利組合 在縣西二十里 總坪數 一千三十二町 工費 一百五十六萬一百五圓四十五錢 防水堤 長三十里 揚水機 在喜樂橋邊

唐浦水利組合 南谷面所屬

南谷面唐浦水利農場

우리 고장의 주변은 쓸모 없이 개간을 하지 못한 작은 늪과 저습지가 많았다.
메기가 하품만 해도 물이 든다는 비유처럼 논에 벼를 심어도 물이 드는 논이 많았다.
따라서 고생스레 품과 농비를 들여놓고도 수확을 한 톨도 못 거두니 수리안전답(水利安全沓)의 확보가 무엇보다도 절실하였다.
또 새우 붕어 미꾸라지나 잡아먹을 수 있는 늪이 논이 되기에는 막대한 경비가 투입되지 않고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영남들의 개간은 비록 왜인의 자금과 기술이 투입되었으나 수리안전시설을 하여 안전한 논농사를 짓게 되었다는 의미 또한 크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농민에게는 그 땅을 차지할 수 없었고 대부분이 일본인 소유가 되었으며 우리 농민은 소작인으로 전락되어 수탈 당하게 되었다.
 


   사진 ( 상대포 양수장 )

   이 영남수리시설(제방)은 을축년(1925년) 여름 대홍수를 겪는 해에 착공되어 이듬해 완공되었다.
   양 배수장이 상대포에 설치되었으며 영남수리를 보호하는 제방이 당시 새로운 기술의 도입과
   대규모의 토목공사로 기록될만한 것으로 장마면에서 계성천을 따라 남쪽 도천면 송진리 낙동강에 이르는
   둑을 막는 공사였다.
   궤도(軌道)로 흙을 운반하는 [뺑차]{坑車}라 불리는 화차{土運車}를 운행하여 흙을 실어 축조하였다.
   많은 토목 기술자와 돌 쌓는 기술자들과 인부들이 모여들어 이 일대는 한때 흥청거리기도 하였다.
   특히 만주인들이 많이 와서 일을 했는데 1925년 당시 인구수를 보면 외국인중 지나(만주)인이
   263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이 공사를 맡은 회사는 대림조(大林組: 오바야시구미)라는 회사였으며 영남수리조합을 구성하게 되어
   최초의 수리조합장은 일인 식월(植月平一; 우에쯔끼 히라잇찌)이었다.
   이때 후에 만석 지기 부자로 소문이 난 권인수가 일인들과 함께 일을 하였다.

   {경상남도지}에 축조 당시의 기록이 있는데 제방을 처음 설계할 때 1925년 8월의 최대 홍수량을 기준 하여
   제방의 높이와 폭을 결정하였다 한다.

1925년 7월 13일 홍수 때 남지 도선장에 유입된 최대 홍수량은 14,957m/sec였다고 한다.
을축년 대홍수는 7월 13일 전후와 8월, 두 차례 있었는데 이때의 홍수량을 기준으로 하여 제방 높이와 폭을 결정하였다 하는데 지금까지 큰 홍수가 여러 번 있었으나 영남수리제방이 무너지거나 물이 넘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사진설 ( 양수장내 기계시설 )

   양수장에는 개설 처음에 독일제 300마력짜리 배 엔진(양수기 포함) 4대를 설치 운행하였는데
   이 엔진은 중유를 사용하였으므로 기름이 많이 들어 그 후에(2차대전 때) 전기를 가설하고
   전동기 2대를 배 엔진 2대와 교체하여 4대를 교대로 운행했다고 한다.

   안달은 배 엔진을 가동시킬 수 있는 해군 기술자여서 상대포 양수장에 근무하게 된
   현역 해군 병조장(지금의 소위급)이었다.(제11장 이동사 상대포 마을 참조)

   영남수리 제방 축조와 함께 영남수리구역으로 가는 다리를 1925년 5월(대정 15년)에 2곳
   건설하였는데 상대포 양수장으로 가는 다리는 희락교(喜樂橋)라 하였고
   성사리 대성에서 학암쪽으로 건너가는 다리는 공영교(共榮橋)라 명명하였다.
   희락교나 공영교 모두 [같이 번영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자]는 구호이니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을
   교묘히 위장한 것이라 하겠다.
   또 상대포교가 있는 곳은 전에는 구현산 자락이 내리 뻗어있었고 계성천은 양수장 쪽으로 돌아 흘렀다고 한다.
   그런데 암반을 파내기 위하여 폭파하여 직강공사를 시행,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 상대포 맞은 편 제방 아래편에 중국인 인부들의 막사가 있어 공사를 했다 한다.

제방을 쌓은 후 작답(作畓)을 위해 구획정리 공사를 하였으며 지금과 같은 농로와 도수로가 바둑판 같이 짜여진 네모 반듯한 구획정리는 그후 수년간에 걸쳐 이루어 졌다고 한다. 1937년 하천 보강공사를 시공하고 수리구역내 경지구획 정리도 하였던 것이다.

이때 이 공사를 위하여 많은 기술자와 인부들이 우리 고장으로 유입되었는데 완공 후에도 눌러 살게되어 정착 인구가 크게 불어나기도 하였다고 한다.
신전리 상대포, 성사리 학암마을은 수리공사의 영향으로 크게 발전한 마을이기도 하다.
현재 영남수리조합 사무실은 대신동에 있었지만 최초 사무실 소재지는 남지리 동포동 534-10(흥국주유소앞 삼거리, 지금의 김 외과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후에 이 건물은 남지(3구)연맹 사무실로 사용되어 구장이 주재하며 남지리(백암(현재 서동 대신동 일대) 제외)의 마을일을 보았다.
1994년에 경지정리를 다시 시행하여 기존 600평 - 900평의 논배미를 3,000평 단위 큰 구역에 2차선 포장된 농로를 확보하는 등 새로운 형태의 영농을 할 수 있게 되었다.

 

(2) 남지 피수대 ( 避 水 臺 )

영남수리제방과 함께 새로 등장한 명물로는 남지리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제방인 피수대(避水臺)이다.
피수대는 글자 그대로 홍수 때 마을이 물에 잠기면 주민들이 물 피난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제방이었다.
남지리 시가지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본동 동쪽 굴강과 마구선 국도와 만나는 본동 입구(남지리 195)에서부터 서쪽으로 남포동과 상남동(남지리 773-2, 이곳에 활터가 있었음)까지 축조되어 있었던 제방이다.
일제시대인 1939년 5월 1일 착공하여 1940년에 완공된 특수 목적의 둑으로 홍수 때 인근 침수지역 남지리 마을 주민의 물 피난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낙동강 홍수 때면 남지리 일대는 시뻘건 황톳물에 전답은 물론 가옥이 잠기게 되는데 이때 물 피난을 마산정 도초산 기슭까지 가야 했다.
갑자기 물 피난을 하게 되니 배도 없고 급조한 뗏목으로 전 가족이 옮겨가자면 몸만 빠져나가지 가재도구는 침수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매년 홍수피해가 막심하였고 또 주민들이 물 피난으로 겪는 고생도 컸던 것이다.
 


 
  사진 ( 피수대 )

   공사 당시 투입된 공사비는 39,800원(당시 금액)으로 1,108m가 축조되었다고 한다.
   보통 남지둘이라 하는데 둘은 본동 끝에서 남포동까지 이어졌지만 남지리 531번지 인접인,
   마구선 국도를 지나게 되어있어 국도 위에는 제방을 쌓지 못하고 그 위를 가로지르는 육교를 가설하였다.
   이 육교는 목조로 교각과 상판은 굵은 목재를 사용했으며 상판 위에는 시멘트포장을 하지 않고
   모래와 자갈을 깐 형태였다.
   이것은 6 25동란이후 철거되었다.

   그후 보강 축조되었는데 동쪽은 본동 동편 입구에서 마구선 국도와 병행하여 안쪽은 도로, 바깥은
   제방으로 연장 축조되어서 남송교에 이르렀는데 연장은 950m이고,
   그후 다시 연장 축조하여 계성천을 따라 북상하며 동갯들을 보호하며 상대포 못미처 당포수리 제방과
   연결되었는데 길이는 2,000m이다.
   서쪽 끝자락은 남포동 활터에서 명지들 앞을 지나 옥산앞 까지 연장되고 거기서부터 용산리까지 제방겸
   도로로 3,500m가 축조되어 낙동강 홍수를 막아내게 되었다.
   이 제방의 총 연장은 당포수리 제방의 연결 지점에서 피수대를 지나 용산 앞까지 7.5km이다.

최근 홍수 피해가 없어지고 새로운 낙동강 제방 축조계획에 의하여 본동 쪽 피수대 일부를 헐어내고 남지대교가 시작되는 국도에서 시가지와 곧바로 연결하는 도로를 개설하게 되었다.

 

3) 남지철교와 신작로 ( 新 作 路 )
 

   사진 설명  ( 남지 철교 )

   우리 고장은 남쪽 마산에서 북쪽 대구를 거쳐 서울로 가는 큰길의 길목으로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내왕하고 있었다.
   짐과 사람을 실은 목선이 강물을 따라 오르내리고, 육로는 욱개나루를 건너 마산으로 대구로 다녔다.
   자동차가 이 땅에 다니기 시작하자 점점 육로를 이용하는 일이 잦아졌고, 오래지 않아 자동차 교통이
   일반화되면서 낙동강은 육상 교통의 큰 장애물로 치부되고 교량을 가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가 왔던 것이다.

   그래서 1930년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철교 가설공사가 시작되었다.
   철교 가설 지점은 욱개나루의 상류로 칠서면 계내리 홍포서원의 유허지가 있는 절벽에서
   남지리 욱개둑이라 불리는 들판과 연결되었다.
  
   이 철교 가설 공사 때 교각을 세우기 위하여 암반이 나올 때까지 파들어 갔으나 그곳까지 이르지 못하여
   교각의 기초가 특수한 방법으로 시공되었다고 하며, 철제의 트러스는 당시 용접 기술이 발달되지 못하여

빔을 연결할 때는 철제빔에 구멍을 뚫고 고정쇠를 넣어 연결시키는 방법으로 제작이 되었는데 현대에는 볼 수 없는 기술로서 파리의 그 유명한 에펠탑도 이러한 방법으로 설치되었다고 한다.
또 다리 전체가 흔들리는 유동적인 설계로 동절기와 하절기에 따른 철제의 신축과 교각의 힘을 보완토록 되어 있어 차가 지나가면 다리 전체가 흔들거려 특이한 느낌을 준다.
그 당시에는 가장 최신 기술로 시공되었으므로 남지철교는 압록강철교와 함께 우리 나라에서 유명한 다리로 인정받고 있다.

공사 때 많은 인부들이 돌을 지게에 져 나르고 땅을 파 나르는 땅떼기를 했는데 인근 마을 장정들이 다 동원되어 적은 삯을 받고 일했다 하며, 북쪽 철교와 연결되는 도로의 축조를 위하여 취토지로 동편의 밭 흙을 사용했는데 반강제적 매수였다고 한다.
강 건너 함안군 칠서면 계내리와 이어지도록 도로가 개설되었는데 이 길이 바로 우마차나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새로난 길] 신작로(新作路)인 것이었다.
이 신작로는 대구-통영 2등 국도로 폭이 6m∼8m 이었다.

착공한 이듬해 겨울 늦게 준공이 되어 개통식은 1933년 2월에 가지게 되었다.
개통식 당시 우리 고장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면서도 오복(五福)을 갖춘 노인을 앞장세우게 되었는데 수개리 이경운(벽진 이씨)이 의식이 풍족하고 증손까지 실패 없이 유자생녀(有子生女)하여 오복을 갖추었으므로 선임되어 갓을 썼는데 구슬갓끈을 늘어뜨리고서 군수와 군내 기관장 유지들과 함께 앞장서서 철교를 걸어서 건너갔다고 한다.
이때 사상 초유의 철교 다리를 구경하기 위하여 나온 사람들이 강 좌우에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며칠간 큰 잔치가 벌어졌다고 한다.

1920년 경 우리 고장에 처음 차가 등장하였으나 정기적 노선의 버스나 화물차가 다니기는 남지철교가 개통된 이후였다.
마산을 시발지로 하는 시외버스는 마산에 있었던 대야자동차부(大野自動車部)와 창녕에 있었던 창녕자동차회사(昌寧自動車會社) 등으로 남지를 통과하여 마산 - 창녕간을 운행했던 적도 있는데 경남자동차가 1932년 이후 정기적으로 운행되었다.
구포까지 낙동강을 오르내리던 큰 고배를 부리던 회사는 가와나미(川波)운송회사였으며 화물차 회사는 마루보시(丸星)운송회사도 있었다.

강 건너 계내리, 도로와 철교가 개설된 지점에는 홍포서원이 있었던 곳으로 이를 알리는 유허비가 있었는데 강제로 서편으로 옮겼으며, 동편에는 우리 고장의 선비 조간송 선생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있다.
산을 잘라 신작로를 냈는데 바위를 자르자 이곳 잘라진 바위틈에서 붉은 피가 몇 날 며칠을 흘러 내렸다는 소문이 그때 널리 유포되어 지금도 전설처럼 전해 온다.
철교 서쪽 절벽 위를 넓게 정지하여 공원을 조성하고 철교와 어울리게 벚꽃나무를 심고 철책과 간이의자 시설을 하였는데 이 근대적 풍경이 아름다워 남지 사람이라면 명절이나 봄 가을철 단풍놀이의 장소로 오랫동안 애용되어 왔으며, 남지둘(피수대)과 함께 청춘 남녀들의 산책길로 사랑을 받아 왔다.

철교의 길이는 340m이며 폭은 6m이고 철제 트러스의 높이는 6m이며, 계절의 변화에 따라 철제의 늘고 주는 것을 조절하는 이음 장치가 연결 부위마다 있어 눈길을 끈다. 허공 높이 있는 트러스의 상단 너비가 제법 넓어 간담이 큰 아이들이나 젊은이가 그 위에 올라가 뛰어 다니기도 하는데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서늘하게 하기도 한다.

 


  사진 ( 나룻배 전복으로 26명의 처녀들이 익사한 청송 )

    남지철교 상류쪽에 도흥나루가 있고 나루터 조금 위에 용화산 절벽이 웅장하게
    펼쳐져 있는 강변에  바위가 비스듬히 청석이 깔려 있는 청송이라 불리는 데가 있다.
    이곳에는 밤나무가 많아서 가을이  되면 밤을 따러 사람들이 많이 놀러 가는 곳이기도 하였다.
    1942년 이곳에서 남지 처녀 26명이 죽는  크나 큰 참사가 발생하였다.
    흔히 여름이면 강에 멱을 감다가 아이들이 익사하는 사고가 흔히 발생하였지만
    이러한 대형 사고는 우리 고장에서 처음 있었던 일이었다.

   이 도흥 나루터 일대는 용화산, 청송 일대로 통하여 경치가 좋아 가을이면 놀이꾼들이 많이 모여드는데
   1942년 가을, 추석 이튿날 인근 마을에 잘살며 내노라 하는 가문의 처녀들이 강 건너 청송으로 놀이를 갔다.
   밤을 따 삶아먹는 등 하루 종일 잘 놀고 오후 늦게 돌아가는 길에 사고가 난 것이었다.
   배가 낡아 평소 물이 새는 것에 솜뭉치를 막아 두었는데 작은 배에 사람이 많이 탔기 때문이
   배가 강 복판쯤에서 솜뭉치가 빠져버리고 뱃바닥에 물이 새 들어왔다.
   그러자 처녀들이 기겁을 하고 당황하여 배 한 쪽으로 쏠려 아우성을 쳤다.
   조금만 침착하였더라면 될 것을 처녀들이 우왕좌왕 하는 바람에 나룻배가 전복되면서 침몰해 버렸다.
   배에 탔던 처녀들이 물에 빠져 서로 붙들고 엉키니 26명이 한꺼번에 죽는 익사해 버리는
   대 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단지 한 명이 세퍼드 개꼬리를 잡고 살아났다고 한다.
그때 사고 소식을 들은 오덕수, 공또찬 등 남지 청년들이 달려가 구조에 나섰으나 아무도 살려내지 못했다고 한다.

 

 4) 달라지는 농사
 

이 시대의 농업은 새로운 영농기술과 품종의 개량 도입, 특히 다수확 되는 씨앗들이 보급되는 것으로 출발되어 재래식 영농에서 탈피하여 근대 영농의 시대가 열렸다.
특히 일인들이 우리 고장에 도입한 여러 가지 물건이나 작물을 우리 사람들은 "왜"라는 접두사를 붙여 불렀다.
왜인(倭人)이 들여 온 것이라 하는 뜻으로도 생각되지만, "왜"는 왜소하다 작다는 [倭]이기보다는 외래(外來) 외국(外國)의 [外]인데 이곳 사람들의 토박이 발음으로 [외]가 흔히 [왜]로 발음된 것으로 보인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왜콩과 왜밀이다.

송지들(松旨坪)이라 불리었던 낙동강변의 모래사장은 일부만 경작지로 활용하고 그 외는 쓸모 없이 버려져 있었다.
욱개둑(지금의 남포동 서편 남지철교 근처 들판)에서부터 용산리 앞까지, 또 창아지 마을 앞 칠현리 반포들, 월하리에 이르는 이 일대의 모래밭은 잡초나 소나무가 우거져 있었거나 마을 공동묘지이기도 하였다.
이 지대를 강제적으로 빼앗아 개간하고 심었던 것이 바로 왜콩과 왜밀이라 불리었던 땅콩(落花生)과 호밀(胡麥 ; 長麥이라 불리기도 했다)이었다.
소나무를 뽑고 땅을 갈기 위해 일인들은 우리 사람들에게 소나무를 뽑으면 그 나무를 그냥 공짜로 준다고 하자 땔나무가 궁했던 사람들이 다투어 나무를 베고 뿌리를 캐 갔다고 한다.
사람들이 다투어 소나무 뿌리까지 뽑아가기 위해 땅을 깊게 파게되니 자연히 개간이 되었던 것이다.
남지리 남포동일대에 있었던 남지공동묘지도 그렇게 개간되었으며 이곳에 있던 공동묘지는 학계리 덕동으로 옮겼다.
큰 힘들이지 않고 개간을 하게 된 일인들은 그 땅에 가을에는 왜밀을 심었고 봄에는 밀이랑 사이에 왜콩을 심었는데 여기에 얽힌 재미나는 이야기도 전한다.

처음 왜콩을 수확하여 놓고는 사람들에게 땅콩 까는 일을 시키면서,
"이것은 귀한 약재로 독이 있어서 만약 날로 먹기만 하면 죽어 버린다."고 엄포를 놓아 땅콩을 까는 도중 허실이 없도록 약은꾀를 썼다고 한다.
그러나 일인집 식모로 일했던 여자가 하루는 가만히 보니 주인 내외가 자기 몰래 땅콩을 볶아 저희들끼리 먹는 것을 보고서,
"아하! 저것도 먹는 것인데 왜놈들이 거짓말을 했구나!"
깨닫고서 자기도 몰래 조금 꺼내 볶아 먹어보니 죽지도 않았고 그렇게 맛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 후 땅콩이 어떻게 쓰이는지 알게 되고 수 년 후 너도나도 심게 되었다고 한다.

또 왜밀이라 불리는 호밀은 당시 간장이나 된장, 누룩을 만드는데 다량 소비되는 맥류로서 척박한 모래땅에서도 잘 자라고 봄철 가뭄에도 끄떡없이 자라서 수확할 수 있는 작물이었다.
모래밭에는 대체적으로 땅이 메말라 보리가 잘 자라지 않는데 호밀은 잘 자라고 키도 커서 호밀 짚은 초가 지붕을 잇는 이엉이나 울타리용으로 크게 각광을 받게 되었다.
또 특히 인기가 높은 것은 밀대로 만든 밀짚모자였다.
그때 값비싼 갓이나 중절모자가 있기도 했으나 햇빛을 가리며 일을 하는데는 신식 밀짚모자가 최상이었다.
밀대 큰 줄기를 잘라 모아 쪼갠 후 물에 축여 다듬은 후 머리를 땋듯 길게 땋아 모은 것을 기워서 밀짚모자를 만들었다.
이 일은 농가 부업으로 겨울 한 철 온 식구가 모여 앉아 밀짚을 땋아 팔면 귀한 용돈을 만질 수 있어 새로운 부업으로 각광 받았다.
또 새로운 문물로 들어 온 것이 곡식을 넣을 때는 섬 대신에 가마니였다.
손으로 새끼를 꼬던 것이 기계로 바뀌기도 하였고, 가마니틀이 보급되면서 농가 소득을 올리는 종목으로 가마니 짜기와 새끼 꼬기가 성행하게 되어 소 사료로만 쓰이던 볏짚이 가마니 짜는데 많이 사용되었다.

새끼는 오래 전부터 손으로 꼬아 사용해 왔으나 가마니는 전에는 없었다.
짚으로 엮어 만든 섬이나 둥우리가 곡식 담는 용구로 쓰였으나 엉성한 상태였으므로 낱알의 허실이 많았으며, 섬은 대체적으로 용량이 컸으므로 힘이 센 일꾼이 아니고서는 다루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결점을 보완한 가마니와 기계로 꼰 새끼는 질기고 여러 해 사용할 수 있어 농민들이 크게 환영하였고, 공출을 받을 때도 가마니를 썼으므로 농가의 필수품이 되었던 것이다.
그 외 개량품종들도 많이 보급되었는데 외래품이거나 신품종은 재래종과 구별되어 왜호박, 왜우엉, 왜상치 등 [왜]{外}짜가 붙어 구별되었다. 물론 여러 가지 농기구들도 개량 보급되자 왜낫, 왜쟁기 왜삽 등 "왜"짜가 든 새로운 기구들도 생겨났다.

 

5) 신설 기관들

새로운 문물들 중 빠트릴 수 없는 것들은 아무래도 우는 아이에게 "저게 순사가 온다"하면 울음을 뚝 그쳤다는 순사가 있는 순사주재소와 우표가 붙은 편지가 오고 가고 수 백리 밖의 목소리가 전선을 타고 와서 들려준다는 전화가 있는 우편소일 것이며, 개인 교습과 다름없는 서당식 수업이 아닌 신식 교육기관인 보통학교와 신작로 변에 있는 박래품을 파는 점방과 자장면과 우동, 밀가루로 만든 커다란 빵을 파는 중국인의 음식점이 아닐 수 없다.
또 담뱃불을 붙이려 들었다는 전기불도 빼놓을 수 없으며 종이로 말아 만든 [마꾸]라 불리는 권련식 담배도 귀한 신식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우리 고장에 맨 처음 순사 주재소가 들어선 때가 1911년 10월이다.
그전에는 남지순사주재소는 없었고 당시 영산군주재소에서 이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창녕군 관할이었던 남곡면도 따로 주재소가 없었고 1910년 7월 우리 군에 주재소가 처음으로 생길 때 창녕, 영산, 동산 등 3곳에 주재소가 생겼는데, 남곡면은 창녕주재소에서 도사면은 영산주재소에서 맡다가 1911년 도사면 남지리에 주재소를 분리 배치하고 도사 장가 마고 계성 등 4개 면을 관할하게 하였던 것이다.
1920년 6월 1일에는 구 남곡면의 일원이 남지주재소 관할로 들어오게 되었다.

주재소 위치나 건물 소재지는 맨 처음에는 남지리 본동 어물전 골목인 629-1번지에 있었다가 그 후 동포동 KTC가 있었던 모퉁이인 남지리 533-7로 옮겼다가 다시 남곡면사무소가 있었던 곳 맞은 편 북쪽으로 남지리 본동 지금 남지파출소 자리(남지리 616-7번지)로 올 때까지 두 번을 옮겼다.
건물은 1978년 옛 건물을 헐고 신축하였다.
주재소 설치와 함께 최신 소방마차가 딸린 의용소방대가 창설하게 되었는데 높다란 망대가 설치되고 그 망대에는 사이렌이 놓여져 통행금지시간 해제시간, 또는 정오(正午)를 알려주거나 불이 났을 때나 긴급 사태가 발생하였을 때 "왱- 왱-" 경보를 울려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군 했다.
청년들이 의용소방대에서 활동하였으며 초대 소방대장은 우에쓰게(植月)이었으며 부장은 정대수였다고 한다.
그 후 해방 후까지 이어져 정대수 서봉술 신성백 이태봉 등 여러 명이 의용소방대장을 지냈다.
대동아전쟁이 한창이던 때는 지금의 대신동 남지농협 공판장 입구에 방공감시소가 있어 적기의 내습을 알리는 공습경보 사이렌을 울리고 주민들로 하여금 공습피난 훈련이나 야간 등화관제 훈련을 시키기도 하였다.

남지우편소는 주재소의 서쪽 신작로 변으로 남지리 남포동 남지의원 터 모퉁이인 남지리 621-4에 1919년 9월 21일 개소되었다.
1906년 군내 유일의 창녕우편소가 개소된지 13년 후였는데 해방될 때까지 창녕군내에 겨우 4개의 우편국이 있었으니 상당히 일찍이 혜택과 편리를 본 듯하다.
최초의 우편소는 사설로 일본인 다게야먀(竹山)가 세우고 국장을 맡았다고 한다.
후에 우편소가 조금 서쪽인 남지리 남포 647-5(성모병원 터)로 옮겼는데 이때 우편국장은 오호자와(寶澤)란 일본인이었다고 한다.
1968년에 우체국이 대신동으로 이전 신축해감에 따라 그때의 건물은 헐리고 말았다.

남지금융조합도 바로 주재소 길 건너에 세워져 이 땅의 돈을 긁어모아 일본으로 가는 창구 역할을 맡아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1920년대에 남지 금융조합소가 있게된 이전 1912년에는 창녕금융조합이 예수금과 대부 업무 외에 총독부의 대행업무를 수행하는 등 농민을 위하기보다는 몇몇 지주나 부호들에게 혜택이 가는 일들이 많았다.
이 건물은 최근까지 존속되면서 농협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농협 구판장 등으로 사용되다가 헐리고 상가 아파트가 들어섰다.
또 남지금융합자회사도 본동쪽에 있었다고 한다.

전기의 가설은 1930년대였으며 변전소는 동리의 외각지대인 남지리 북쪽 현재 동포동(무지개아파트 길 건너편) 들 복판에 세워지고 전지회사 출장소 건물은 남포동 우편소 옆에 자리잡았다.
전기선은 특선과 일반선이 있어 특선은 공공 기관이나 왜인과 부자들에게 전기를 공급하는 선로였고, 일반 농민이나 면 소재지외곽이나 작은 마을들은 전기불의 혜택을 볼 수조차 없었다.
최초의 정미공장은 정대수가 시작한 동포동(현 흥국주유소 자리)정미소였으며 그후 박수문, 최원출 등의 정미소가 생겼는데 어느 해 큰 홍수 때 정대수가 규휼미를 정미소에서 내놓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 지금은 흔해 빠진 게 자동차이었지만 그때 그 시절은 자동차가 아니라 자전거가 아주 귀한 시절이었는데 최초의 자전거방은 본동 어물전 근처에 있었던 김영조 자전거방이었으며 그 후 동포동 김철주, 남포동 김조섭 자전거방 등이었다고 한다.
또 새로운 문물중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기독교 예배당의 등장인데 우리 군내 최초의 교회가 길곡면 오호리의 장로교회라면 1900년 같은 시기에 호주인 선교사 맹 목사와 전도사 김옥출이 선교하여 학계리 홍정 마을에 세워진 교회가 우리 읍의 최초 장로교회라 한다.
오호리가 마산-칠원-영산을 통하는 나루터 마을이었다면 홍정도 마산-함안-창녕으로 통하는 도흥나루가 있었던 마을이라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외국 종교의 첫 선교지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기록상 최초의 교회는 1926년에 세워진 남지장로교회이다.

 

6) 광복 전의 산업
 


   사진 ( 영남 수리조합 )

   영남수리, 당포수리 등 일인에 의해 개간된 수많은 농토가 일인 소유의 개인 농장으로
   들어가 버리고 그나마 남은 농토는 대지주들의 것이었으니 농민 대다수는 소작농으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비록 자영농가 일지라도 [대동아전쟁]이라는 세계2차대전의 수행을 위한 공출바람에
   쌀 한 톨 제대로 구경 못하고 사는 가난과 착취가 연속되는 생활이었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강 건너 함안군 칠서면 이룡리에 일본인이 1943년 농업속성전수학교를
   개교하고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인근 청년들에게 각종 시설채소의 재배법을 가르치고 직접 키워
   전국 주요 도시에 공급하기도하여 우리 고장의 영농 기술을 선도하기도 하였다 한다.
   또 일본인 거주자중 몇 명에 의해 오이 토마토 메론 같은 채소가 재배되었고 이것이 인근 지역민들에게
   확산 보급되게 이르렀다.
   이 영향으로 우리 고장이 수박 참외 오이 호박 무 배추 고추 등 채소재배에 상당한 기술을 축적할 수
   있었고 지금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온실재배에 크게 성과를 올리게 된 계기가 된 것이라 한다.

   모래밭에 땅콩과 호밀의 재배 확대로 이것들이 우리 고장의 특산물로 부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양잠도 장려되어 뽕나무밭 조성이 면행정 당국에서 강력하게 추진하여 홍포를 중심으로 밭과 야산, 심지어 밭 경계 언덕 울타리 등에까지 심겨지고 누에를 키우는 등 잠업이 성해졌다.
밭이 많았던 고곡지구와 성사 신전 등 우리 고장의 중부지역에는 목화를 대대적으로 심기도 하였다.
그 수확량이 굉장하게 많아 인근 면의 생산량까지 집하 처리하는 대규모 타면공장(打綿工場)인 남지면화공장이 남지리 남포동에 들어서기도 했다.
이 공장은 해방 후 까지 운영되었으나 그 후 면화의 생산량 감소와 함께 퇴조되어 수십 년간 공장이 그대로 방치되어 건물의 퇴락이 말할 수 없었으나 1989년 낡은 건물을 철거하고 상가와 아파트 건물 3동을 신축 개발되었다.
또 콩이 많이 생산되었으므로 남지리 동포동에 장유공장(醬油工場)이 있었는데 이 역시 해방후 문을 닫았다.
이 건물에는 남지고등학교가 1952년 개교 때 교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쌀의 생산량은 김해평야에 이어 경남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평야인 영남수리조합 구역이 있어 동포들과 마산수리 등의 개간이 계속돼 쌀 생산이 해마다 증산되었다.
따라서 벼를 도정하고 보관하는 대규모의 도정공장이 설립되었는데 남지리 동포동에 있었던 것은 천기(川崎) 식량영단(사장:일본인 川崎: 가와가미)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후에 남포동에도 설립되었는데 산업회사 또는 산업조합(사장 심흥섭)이라 불렸다.
지금 남포동의 도정공장은 존속되고 있으나 동포동의 공장은 해방 후 수년간 존속되었으나 끝내 문을 닫았다.
1948년 동쪽편 창고에 남지중학교가 들어선 후 점차 중학교 교사로 일부 활용되었으며 중년에는 남지고등학교 교사로 사용되었다.
최근 다 철거되고 주택과 상가가 들어섰다.

벼 품종의 개량과 함께 볏짚을 이용한 농가의 농한기 부업으로 급부상한 것이 가마니 짜기와 기계 새끼 꼬기 등 고공품 생산으로 가마니틀과 새끼틀이 대량 보급되어 우리 고장의 생산량이 경상남도 내에서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공업 부문으로는 학계와 시남 이이목에 옹기를 생산하는 옹기굴이 있었고, 홍정에 기와를 생산하는 기와공장이 있었으며 남지리 남포와 신전리에 놋그릇을 생산하는 공장이 있었다.


 3. 광복 후( 後 )의 우리 고장

1) 광복과 혼란

1945년 8월 어두운 역사는 끝났다.
해방이 된 것이다.
며칠간 우리 고장은 곳곳에 만세 소리가 들리고 감격과 흥분에 들뜬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면내를 휩쓸었다.
일본인들이 황급히 달아나려고 할 때 우리 고장 사람들은 옛날 그들에게 당했던 갖가지 수모를 잊고 너그럽게 아량을 베풀어 보복이나 폭행이 없도록 하여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고 한다.
권경수(權炅洙 : 1934년 취임)면장의 후임이었던 정정수(鄭丁守: 1940년 면장 취임 후에 일본인 면장 취임으로 부면장으로 됨)면장이 조난(遭難)당하는 불상사가 일어난 외에 우리 고장에는 큰 사건은 없이 해방 후의 혼란상은 적었다.
해방 당시 일본인 면장 농천(瀧川鐵之助)는 남지에 살았던 동족을 이끌고 진작 달아나 버렸으나 면사무소 [사령원부]에 의하면 [원에 의하여 사직]한 것처럼 그것도 뒤늦게 1945년 12월 31일에야 사후정리가 되어 있으니 이것을 보면 그때 지방 행정의 혼란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 고장 청년들의 자치적인 조직과 활동이 두드러졌는데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산하의 조직이 생겨 남지의 건준위원장은 최영수가, 치안대장은 김 모씨가 맡아 해방 직후의 혼란을 막고자 노력하였다 한다.
또 해방의 기쁨을 면민들에게 전하고 축하하기 위한 행사가 있었는데 김장학, 남재희, 남상익, 김해권 등 청년들이 미군과 한국인, 일인 경찰과 사무라이, 여러 나라 사람들로 분장을 한 가장 행렬을 꾸며 농악대와 함께 남지 시가지를 행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남지계몽청년회의 조직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박대근(본동 거주) 최장수를 비롯하여 많은 청년들이 참여하였다.
남지계몽청년회가 1946년도에 주로 활동한 분야는 남지읍 일원에 야간학교를 통해 한글을 가르치는 계몽운동과 교사를 양성하는 것을 6개월간 실시하였으며, 미군 진주를 환영하는 플랜카드를 영문으로 제작하여 거리에 게시하는 등 여러 가지 행사를 하였다.

 


  사진 <해방의 기쁨을 널리 알린 남지청년들의 가장행렬>

   또 청년들이 주도하여 치안을 자치적으로 유지하였는데 그것이 곧 오덕수, 공또찬, 심술섭 등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대한청년단의 활동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후에 6 25때는 경찰과 협조하는 남지의용경찰대가 되어 치안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한다.

   해방이 되어 일본인이 버리고 간 집들을 적산가옥이라 하여 사람들이 들어가 살게 되었고,
   수년 후 토지 개혁이 실시되면서 일인들의 토지는 경작하던 농민들에게 분배되기도 하였으나
   해방 후 이내 불어닥친 좌우익 이념대립 편가르기는 이곳을 혼란과 분란의 도가니로 몰아 넣기도
   하였으나 다른 지방에 비하여 그 기간이나 피해는 적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일본으로 건너가 살았거나 군대나 강제 징용 등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돌아오는 이들이 바로 귀환동포들이었다.
   귀환동포가 갑자기 많이 몰려드니 의식주 문제가 어렵게 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해주 오씨 선산 근처인 송지평(지금의 남지리 서동) 남지둘 북쪽에 임시 수용소를
   마련하여 집단적으로 거주하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칠칸 나래비집] 동리라는 말이 남아 있다.
   미군의 원조 물자가 상당하게 나와 이들에게 도움을 주었으나 어려움을 이겨내고 자립하게 되기에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2) 불붙는 교육열과 학교 신설

우리 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급속하게 성장 발달하게 된 원인이나 힘은 뜨거운 교육열 때문이었다고 한 것처럼 우리 고장에도 해방이 되자 제일 먼저 불붙은 것이 다름 아닌 향학열이었고, 부모들의 뜨거운 교육열이었다. 한글을 깨우치겠다는 운동이 자발적으로 마을마다 일어나 한글을 가르치는 야학당이 골골마다 생겼으며, 글을 배우겠다는 사람들이 남녀노유를 막론하고 학교나 야학을 찾았다.

우리 고장은 해방되기까지 지금의 남지초등학교인 남지공립보통학교가 1921년 개교하여 있었고, 지금의 남곡초등학교인 남곡간이학교가 1933년 4월에, 반포간이학교와 월상간이학교가 각각 1941년 7월에 개교하여 있었고, 일인을 위한 소학교로 지금의 동포초등학교 자리에 남지심상소학교가 학생 교육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학교나 고등학교는 없었기 때문에 이곳 학생들은 진학을 하자면 1926년에 개교한 영산면의 영산중학교나 외지 도시로 유학을 나가야만 했다.

해방이 되자 일인 자녀만을 위한 학교였던 남지심상소학교는 폐교되고 그 자리에 남지국민학교의 분교로, 잠시 후 동포국민학교가 1945년 9월에 개교되고 반포간이학교도 국민학교로 승격되니 우리 고장에는 국민학교가 남지, 동포, 남곡, 반포, 등 4개교로 늘어났다.

중학교의 개교도 2년 후에 이루어 졌는데 지방 유지들의 큰 호응과 출연으로 2학급 규모로 남지중등공민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아 당시 남지공회당(현재 남지읍사무소 자리)에서 1947년 4월에 개교, 첫 수업을 시작하였는데 초대 교장으로는 김해권(金海權)이 취임하였다. 그 후 식량영단의 건물(곡물 창고)로 이전하여 학급수를 늘이는 등 중학교는 이 지방의 중등교육기관으로 날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남지학원은 군내 사립교육재단으로서는 가장 처음 설립된 것으로 크게 평가되고 있다. 또 중등학교가 개교됨에 따라 남지읍 발전의 원동력이 된 많은 졸업생을 배출해 냈다.

이제는 학교법인 남지학원 산하에는 남지중학교 뿐만 아니라 남지여중, 남곡중, 남지고등학교 등 여러 학교를 개교하여 경남도내에서도 유수한 교육재단으로 성장하였다.

 

3) 처음 치른 국회의원 선거

1948년 5월 10일 실시한 제헌 국회의원 선거는 우리 고장 사람들에게는 생전 처음 가져보는 민주 시민으로서의 국민 주권 행사였으며 당당한 유권자의 한 표는 소중하고도 귀한 것이었다.

사상 초유의 국회의원 선거에 우리 군에서는 5명의 후보자가 입후보하였는데 그 중 19,430표를 득표한 구중회(具中會)후보가 당선되었다. 이때 우리 고장 출신 입후보자는 당시 32세였던 남지중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던 김해권으로 대한 독립촉성국민회의 공천을 받아 출마했는데 많은 면민들의 열렬한 성원과 운동이 있었으나 7,436표를 얻고 낙선하였다. 이때 전국적으로 선거를 방해하려는 세력의 공작이 치열하여 밤이면 횃불과 구호를 외치는 함성이 곳곳에서 들리기도 하여 국내에서는 여러 불상사가 발생하였으나 우리 고장은 별 탈없이 투표를 마쳤던 것이다.

두 번째의 국회의원(민의원) 선거는 6 25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바로 전인 1950년 5월 30일에 있었다.

이때도 이 고장의 출신 인사로는 김해권이 입후보하였다. 이번 선거는 전보다 더 조직적이고 유권자들의 관심도 높아 선거 운동 열기가 대단했다. 선거 연설은 찬조 연설과 출마자의 연설회 등으로 장날마다 막걸리 국수 파티 등 선심공세도 펼쳐져 후한 촌 인심을 유감없이 발휘되기도 하는 등 선거 유세와 함께 그 열풍이 대단했다. 확성기를 매단 자동차가 동리동리 마다 다니며 한 표를 달라고 외쳐 댔다. 자가용 승용차가 없거나 택시를 대절할 형편이 안 되는 후보자는 지게, 손수레에다 스피커를 매달고 다니며 가두 연설을 했다. 매일 성찬을 베풀거나 동성 동향 동년배 동창 일가 친척에 사돈 팔촌, 연줄이란 연줄은 다 찾아다니며 득표 활동을 벌렸다. 따라서 유권자의 귀한 한 표를 얻기 위하여 읍소를 하는 등 기묘한 방법도 다 동원되어 정견이나 경력, 정당보다는 학연 지연, 인정과 문중 문벌 등에 호소하였다. 하여간 민주화의 과정은 서툴었지만 그런 대로 착실히 진행된 셈이라 할 것이다.

군내 10명의 후보자가 나섰는데 유권자 56,194명, 투표자 54,271명으로 그 중 9,779표를 얻은 신용훈(辛容勳)후보가 당선되었고, 우리 면 출신 김해권후보는 1,293표 차인 8,486표를 얻어 아깝게도 차점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4) 지방자치제의 실시

1952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됨에 따라 면의회와 도의회 구성을 위하여 면의회의원 선거, 도의회의원 선거 등이 실시되었다. 이 선거는 국회의원 선거와는 또 다른 선거 열풍이 전국 어디서나 심심 산골 작은 마을까지 휘몰아쳐 인심을 갈라놓거나 선거 때문에 재산을 날리는 일도 속출하게 되었다. 우리 고장도 예외는 아니어서 선거 열기가 상당히 달아올라서 뜨거운 선거 운동이 전개되었다.

선거 결과 14명이 면의원 선거에서 당선, 면의회를 구성하게 되어 처음으로 지방 자치가 그 막을 열게 되었다.

곧이어 그 해 5월 10일에 도의회의원 선거가 시행되었는데 우리 고장은 창녕군 제3선거구였으며 용산리 출신 조찬규후보가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9,230표를 얻어 당선되었으며, 마산리 홍포 출신 권연수는 창녕군 북부지역인 제1선거구에서 출마하여 당선, 우리 고장에는 2명의 도의원을 배출되는 경사를 맞기도 하였다.

그 이후 1956년에는 면의회의원, 면장, 도의회의원 선거가 연달아 있었으며, 1960년 4 19혁명 후에도 지방자치단체 선거가 시행되었는데 이때는 면의회의원, 도의회의원 선거와 함께 면장 선거뿐만 아니라 도지사 선거, 국회의원 선거도 있어 혁명의 열기와 함께 선거 바람이 불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방자치제는 처음 시작된 제도였으므로 시행 착오도 있었지만 지역민의 자치적인 정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과 향토

1. 개황


사진설명  ( 이이목 나루 )

한국전쟁은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우리 고장에도 크나 큰 손실을 가져왔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勃發)된 전쟁이 1953년 7월 휴전으로 끝날 때까지 전 국토뿐만 아니라 우리 남지읍내에서도 많은 인명이 희생되고 엄청난 재산이 회진되었으며, 하루아침에 전 재산이 불에 타 사라지게 되었으며 고생이 극심했던 피난생활로 거지꼴이 안된 이가 없었으니 그 피해를 열거하려면 무한할 것이다.

우리 고장은 낙동강의 교두보(橋頭堡)로 또 반격의 기회를 포착, 승전으로 이끌게 했던 격전지여서 [낙동강 돌출부(突出部)]라 명명되어 전사(戰史)에 기록되었던 곳이다.

1950년 그해 여름은 대체적으로 큰비가 없어 낙동강에 큰 홍수가 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먼저 말해 두고 싶다. 만약 큰물이 들어 모든 농작물이 물 아래로 들어가 버렸다면 농사를 지어 놓고 피란(避亂)을 떠나야 하였던 면민들이 피란살이에서 돌아와 수확할 아무 건덕지도 없었을 것이니 더욱 큰 곤경에 빠졌을 것인데 천행으로 그 해에는 홍수다운 홍수가 없었다. 그래서 8월에 피란을 떠났던 면민들이 돌아와 보니 논의 벼는 알알이 여물어 있었고, 강가 모래밭에 심은 땅콩과 고구마도 홍수 피해를 입지 않아서 수확하여보니 다른 해보다 량이 더 많은 풍년이었다. 단지 배추 무 등 채소가 없어 반찬 걱정은 있었겠지만 뒤늦게 심은 것으로 김치를 담을 수는 있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의 경과나 종말에 대하여 전국적인 사실 부분보다는 우리 고장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 부분만을 기술하여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따라서 1950년 8월에서 9월, 2개월에 걸쳐 이 지역 일대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므로 이 시기를 중심으로 하여 남지읍 지역의 전투 상황을 {향토수호사}와 {창녕군지}의 기록을 참고하여 집중적으로 다루어 보고자 한다.

1950년 8월 공세와 9월의 전투 상황과 전후 생활상 등으로 구분 기술코자 한다.

 

2. 최후의 방어선 남지

 1) 낙동강 교두보

1950년 6월 25일 발발된 한국전쟁은 인민군의 공격으로 초장에는 밀리기만 했다. 시일이 갈수록 후퇴하는 국군과 뒤늦게 참전하였던 유엔군은 지연작전을 펴면서 퇴각하여 시간적 여유를 얻게 되면서도 낙동강까지 와서야 전열을 가다듬게 되었다.

1950년 7월 31일경에는 유엔군은 낙동강이라는 장애물을 사이에 두고 인민군과 포진하는 형세로 반격의 발판을 굳혔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창녕군은 부산의 서부 방어선으로서 미(美) 제24사단이 주둔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우리 고장은 치열한 전투가 3개월간 계속되는 전장(戰場)이 되었고 전략상으로 중요한 낙동강 교두보로 돌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창녕에는 의령과 합천 경찰서에서 철수했던 경찰 등과 함께 창녕경찰서에는 경찰대 2개 병력이 있었고, 대한청년단과 의용경찰 등 지방의 애국청년들로 구성 편성된 지방 자치 병력이 500여명 있었다. 이들의 주임무는 치안 유지와 경계근무였다.

미 24사단은 창녕에 와서 창녕읍에 사단 본부와 제19연대를 주둔시켰으며, 전방으로 나아가 유어면 현창리 적포교 일대와 낙동강 동쪽편 강안에 포진하였다. 이때 우리 고장 북부 고곡지구에는 24사단 34연대 제3대대가 강을 건너려는 인민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또 월하리에서 낙동강을 따라 용산리까지 강변지역에는 미 34연대 병력이 주둔하여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창녕을 넘보던 인민군은 제4사단으로 전쟁 개시 후 선봉에 서서 서울을 점령하고 남하한 사단으로 거창 합천을 거쳐 강 건너 의령지방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2) 주민 소개(疏開)

이때 북쪽 지방과 합천 의령등지의 피란민들이 창녕군 관내로 밀려들어 우왕좌왕 하였으며, 또 50년 8월 3일경 인민군의 공격이 임박해지자 당국에서는 낙동강 일대에서 민간인을 멀리 격리시키고자 위험지역을 떠나라는 소개령을 내리게 되었다. 즉 마구선 국도를 기준해서 그 서쪽편 주민들은 모두 동쪽으로 퇴거하도록 명령을 했던 것이다.

이 바람에 우리 고장 사람들도 집을 떠날 수밖에 없어 고곡지구는 영산 쪽으로, 성사 신전지구는 도천 쪽으로, 그 외의 남지 사람들은 마구선 동쪽인 본동 남포동으로 남부여대(男負女戴) 짐을 꾸려 산야로 친척집으로 옮겨야 했다.

인민군이 강을 도하하여 영산-밀양-부산으로 향하여 나가려면 먼저 남지지역에서 격전이 벌어질 것이 예견되었으므로 소개령은 불가피한 조치였으나 당국은 자세한 상황을 주민에게 홍보하지 않은 채 긴급 소개령만 내렸던 것이다. 그래서 민심도 흉흉해 지고 불안에 떨게 되었다. 긴박한 소개령은 일시적인 것일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변변한 준비 없이 맨몸에 식량이나 가사도구도 변변히 준비하지도 못하고 집을 떠났다가 며칠 후 인민군의 도하로 전쟁상황이 급박해지자 때 그냥 피란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피란생활 중 심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미군은 8월 2일 창녕군내에 부대 배치를 완료하고 또 군민에 대해서 강변으로부터 8km 이내 지역의 빠른 확보를 위하여 전단을 뿌리고 확성기로 방송을 하며 주민 소개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병자나 노인이 있는 가정에서는 피란을 떠나지 못하고 있기도 하였다. 그래서 명령지역안에서 퇴거를 하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 사살하겠다는 포고를 내리기도 하였다.

인민군의 공격이 곧 있을 것이라 예상되던 때, 의령군 쪽에서 10만 여명의 피란민들이 뒤늦게 밀려들자 아예 강을 건너오지 못하도록 미군은 그들 바로 앞에 포격을 가하는 등 위협해서 흩어지게 만들어 강을 건너오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적 게릴라들이 민간인 복장으로 위장을 하고서 주민들과 뒤섞여 침투해 올 것을 예상하여 피란민들을 막아 버린 것이다.

불안과 공포 속에서 가재 도구와 집을 내버려두고 간단한 취사 도구와 침구 그리고 이고 지고 운반할 수 있을 만큼의 식량만을 지니고 나선 사람들은 영산이나 송진 도천 등지에서 친척집이나 야산 들판에서 솥을 걸고 끝이 언제일지 모를 피란생활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 당시 창녕 영산 부근에 모인 피란민들이 30여만이나 되었는데 전투가 치열해지자 부산방면, 밀양과 김해지방으로 가도록 유도하기도 하였다. 차를 얻어 타고 가기에는 차량이 태부족이었으므로 대부분 도보로 먼길을 떠나야 했다.

인민군은 8월 15일까지 "부산 해방"이란 시한부 임무 수행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위해 이른바 "8월공세"를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3. 남지 지구 제 일차 전투

1) 이이목나루의 기습 도하 (1950. 8. 6)

(1) 기습 도하 공격

1950년 8월, 고곡리 남곡국민학교에는 미 제3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8월 6일 새벽 1시, 불시에 이들 미군은 인민군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4.2인치 박격포대가 습격을 받아 순식간에 분산되어 버렸다.

"박격포대와 대대본부가 병력 미상의 기습을 받고 분산되었다."

습격 사실을 제3대대장 진즈 페레즈 중령이 미 34연대장 찰즈 E. 뷰참포 대령에게 새벽 2시에 보고했는데 그때까지도 인민군이 낙동강을 건넜다는 도하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연대장은 습격 사실을 보고 받고는 일선 중대에 연락했으나 별 이상 없다는 보고를 받고서 적당한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이것을 보면 이이목나루의 도하는 칠흑 같은 한밤중에 일어났으므로 어느 중대에서도 적의 침투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군은 이이목 도하를 상당한 시간동안 몰랐던 것 같다.

L중대로부터 "중대 좌익에 적의 공격이 있어 일부가 밀렸다." 하는 보고가 들어오자, 연대장은 박진나루로 인민군이 도하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월하리 박진나루는 자동차를 건네줄 수 있는 큰 나루로 인민군이 가장 먼저 도하하리라 예상하고서 미군이 굳게 지키고 있었던 곳이었다. 연대장은 아침에 제1대대로 하여금 반격하게 했다. 그러나 인민군은 이이목나루를 도하한 다음 시남 수개 고곡 등 산야에 은신하고 있었으므로 고곡을 거쳐 대곡까지 진출하려는 미군에게 맹렬한 사격으로 공격을 가하였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미군은 많은 사상자만 내고 월하까지의 진출은 좌절되고 말았다.

 

(2) 도하 방법


 사진설명  ( 이이목 고개 )

당시 기록을 보면 인민군은 8월 6일 새벽 0시에 시남리 이이목나루{烏項津}로 도하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 인민군은 창녕을 향해 두 곳에서 낙동강 도하를 시도하였는데 이곳만 성공했던 것이다. 인민군 주력부대가 도하하리라 예상했던 유어면 쪽은 경계가 철저하여 유어면 부곡리 마수원 여눕나루로 도하를 시작하자마자 백사장의 지뢰밭에 걸려 100여명이 죽었으며 곧 미군에게 발견되고 말았다. 조명탄이 터지고 미군의 기관총 사격과 포격으로 도하는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이목의 도하는 미군에게 발각되지 않고 순조롭게 진행 성공하였던 것이다.

강을 건넌 방법은 근처에 배가 있었을 리 만무했으므로 뗏목을 만들어 강을 건너기도 했으나 대부분 옷과 신발을 벗어 무기와 함께 똘똘 말아 머리위로 높이 이고 어깨까지 차는 강물을 건넜던 것이다. 이때 인민군 제4사단 제 16연대 주력 800여명이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시남리 고개를 넘어 안쪽으로 들어 왔는데 미 34연대 1대대가 시남리 청단고지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몰랐던 것이다. 아마 미군은 이이목나루나 시남고개에 감시병을 배치하지 않았던 것 같으며, 지형지물을 이용도 못했고, 현지 지형에 관한 지식도 없었던 것 같다.

인민군은 강을 건넌 후 옷을 입고 소대 단위로 정적에 잠긴 수개리 쪽으로 남하하였다. 그들의 목표는 영산이었다. 공용 화기는 없이 개인 화기만 가지고 있어 미군이 지키고 있는 고지를 공격하지 않고 피하면서 3km나 골짜기를 내려와 남곡국민학교에 있던 박격포대를 공격했던 것이다.

 

(3) 첫 도하지점

처음 도하지점이 시남리 이이목이란 전사의 기록과는 달리 미처 피란을 못나가고 있었던 주민들의 증언을 들으면 이이목 뿐만 아니라 월하리 마을앞 모래사장으로도 많은 병력이 도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낙서면 전화리에서 월하리 조금 북쪽 모래사장 사이에는 그 당시 가물어서 강물이 줄어 그 강폭이 좁아져 있었으며 강물도 그리 깊지 않고 얕았다고 한다.

당시의 상황도를 보면 도하 지점이 두 곳으로 표시되어 있어 주민들의 증언이 사실임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또 주민들이 목격하였다는 인민군의 도하는 어쩌면 새벽 0시에 감행된 최초의 도하라기보다 그 후인 새벽의 도하를 본 것이 아닌가 한다.

(4) 도하 성공 이유

북쪽에서 흘러오던 낙동강이 이이목에서 서쪽으로 굽어 흐르며 우리 읍을 감싸 돌아 흐르는 지형을 당시 작전 군인들은 [낙동강 돌출지역]이라 하였고 전투 참가 장병들은 [낙동강 시절]이라 불렀다고 한다.

붉고 노란 신호탄이 심야에 공중으로 오르고 인민군 4사단 16연대 병력의 도하가 시작되고서 우리 고장 지역 일대의 전투는 40여 일 간(1950. 8. 6∼9. 15) 지속되어 마을이 불타고 가산은 풍비 박산 되면서 수많은 피란민과 함께 인명 피해가 엄청났던 포격과 폭격이 시작되었다.

미군의 경계가 철저했는데 왜 도하가 가능했는가?

첫째는 적의 주공(主攻) 지점을 잘못 예상했던 것이다.

인민군의 공격이 창녕의 정면과 연결되는 유어면 쪽일 것이라고 미 24사단(사단장 존 H. 처치준장)이 판단했던 것이다. 유어에는 도하할 만한 지점도 많았고, 지형도 보병 공격에 적합한 곳이었지만 방어하는 쪽에서는 도로가 적어 반격이나 증원이 어렵다는 약점이 있어 인민군이 이 약점을 노려 공격지점으로 선택할 것이라고 미군은 판단하고 있었다.

둘째로 공격 시기의 오판이었다.

인민군은 하루 빨리 공격하고 싶겠지만 도하 자재가 부족하므로 8월 10일 전후가 되어야 도하 준비가 완료되고 공격하리라는 예상이었다.

셋째로는 아군의 방어 진지가 미흡하였다. 8월 2일 배치를 마치고 개인호를 파는 등 방어진지를 구축하기는 하였지만 시남리 이이목나루에는 한 명의 척후병도 내 보내지 않는 등 지형 지세를 너무나 몰랐던 것 같다.

 

2) 낙동강 시절의 시작 (1950. 8. 6 - )

[낙동강 시절]이란 1950년 8월 6일부터 8월 19일까지 14일간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제1차 남지지구 전투의 또 다른 이름이다. 미군 병사들이 힘을 다해 남강과의 합류지점(용산리 기강나루)에서부터 상류 유어면 경계까지 이르는 넒은 반원형의 고리{環}를 형성하고 있는 낙동강 돌출지역에서 인민군을 격퇴할 때까지 14일간에 걸쳐 치열했던 격전기간을 [낙동강 시절]이라 불렀다고 한다.

따라서 8월 6일, 맨 첫 날의 전투 상황을 {향토수호사}의 기록을 그대로 전재(轉載)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전투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계속 계곡 통로를 따라 전진하던 적은 도하지점에서 약 3km 거리에 위치한 제3대대 지휘소와 4.2인치 박격포 진지를 유린했다. 적의 공격을 받자 대부분의 미군 병사들은 무질서하게 분산되었으며 박격포 진지 부근에 위치했던 제3대대장이 약 5km 철수하여 제1대대 지휘소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제1대대장은 적의 도하를 알게 되었다. 또한 사단이 적의 도하를 최초로 보고 받은 시간은 적이 도하를 개시한 2시간 후인 8월 6일 02:00시였다.

제34연대 우전방 정면의 강변(낙동강 돌출지역)에 배치된 3개 중대 중 제9, 11중대는 전혀 적의 공격을 받지 않았지만 제10중대만은 적 도하 얼마 후 적의 공격을 받아 약 3km 후방으로 철수했다. 제10중대의 철수로 적에게 노출된 제13야포대대 포대 역시 4문의 곡사포와 9대의 차량을 버려 둔 채 철수했다.

제3대대 방어 진지를 돌파 당했다는 보고를 받은 제34연대장(비오챔프 대령)은 제1대대장에게 역습을 명령했다. 제1대대는 바로 전날 187명의 보충병을 받아 아직 제대로 재편성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역습 명령을 받은 대대장은 우선 제3중대를 차량화 하여 인솔하고 전방으로 떠나면서 부(副)대대장에게 지체없이 잔여 대대 병력을 도보로 인솔하여 후속 하도록 지시했다. 대대장이 참모들과 함께 짚차로 텅 빈 제3대대 지휘소에 도착했을 때 적은 보이지 않았으나 대대장 일행이 주변의 지형을 분석하면서 후속하고 있는 중대의 투입 계획을 구상하고 있을 무렵 돌연 전방 어봉리 서편 고지로부터 적의 사격을 받았다. 때마침 트럭에서 하차 중에 있던 제3중대 병사들이 적의 사격을 받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대대장은 재3중대장 앨릿쥐 대위(며칠전 부임)에게 지체없이 전방 고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앨릿쥐 대위는 중대를 이끌고 치열한 사격이 가해져 오고 있는 전방고지를 향해 공격을 했다. 적의 사격이 너무나 치열하여 공격은 곧 돈좌(頓挫)되고 말았다. 대대장은 도로변의 배수구에 엎드려 전황을 관망하고 있었고 그의 곁에서는 화기 소대장이 60mm 박격포의 사격을 지휘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박격포탄이 떨어질 때까지 어봉리 능선 정상에 포탄을 퍼붓듯이 사격하고 있었다.

얼마 후 포탄의 소진으로 박격포의 지원 사격마저 멎자 제3중대의 공격은 벽에 부딪치는 듯했다. 양호한 관측과 사계를 이용한 엄폐된 진지로부터 적의 소화기 및 자동화기의 집중 사격으로 많은 부상자를 낸 제3중대의 공격 대열은 분산되기 시작했다.

한편 적의 사격이 주변에 지향되자 대대장 아이레스 중령은 배수구를 뛰쳐나와 논바닥을 가로지른 후 약간 떨어진 도로 남쪽의 외딴 방앗간으로 뛰어 들었다. 공격간 제3중대장은 두 차례나 부상을 입고도 부대 지휘를 계속했으나 세 번째의 부상으로 끝내 후송되고 말았다. 중대장 마저 후송되자 공격 대열은 분산되기 시작했고 이들 중 대부분의 병사들은 대대장이 피신한 방앗간으로 몰려들었다. 제1대대 지휘소에서 위급한 전황을 보고 받은 연대장은 제3대대 부대대장 지휘하에 도보 행군으로 막 도착한 제1, 2중대를 직접 지휘하여 신속히 전방으로 투입했다.

0.5인치 기관총 4대가 탑재된 2대의 대공화기 차량을 앞세우고 전진하던 제1, 2중대가 이날 오후 늦게 방앗간에 도착하여 수 십 미터 거리에 포진하고 있던 적을 격퇴함으로써 방앗간을 거점으로 적의 포위망 속에서 장시간 악전고투하고 있던 대대장 이하 제3중대 병사들이 구출되었다.

이들은 전우의 시체를 방앗간의 외부에 쌓아 올려 적탄을 막았으며 제1, 2중대에 의거 구출되었을 때 제3중대의 생존 병력은 35명에 불과했다. 제1중대와 제2중대를 동시에 병진 투입한 제1대대의 역습은 비교적 순조롭게 실시되어 그날(8월 6일) 20:00시경에는 적의 주력을 강 건너로 격퇴하고 제9중대(적 도하 후 무단 철수)와 제10중대가 원진지로 복귀하였다.}

 

3) 두곡(頭谷)지구의 전투(1950. 8. 7 - 8. 14)


 사진설명  ( 두곡 고지 )

(1) 클로버리프 고지의 전황

고곡리 두곡지구를 전사에서는 [클로버리프(clover leafer : 클로버잎) 고지]라 불렀는데 두곡리 일대 고지들의 총칭이다.

이 고지는 두곡 뒷산에서 수개리 접곡 미곡과 장마면 동정리 하이곡과 상이곡에 걸쳐 있는 산줄기로 산의 능선이 마치 클로버 잎같이 세 개의 봉우리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클로버 잎의 자루격인 아지리 동쪽의 산인 대봉리의 산줄기를 [어봉리 능선]이라 불렀는데 두곡마을 앞 엄나무진고개에서 성사리 대성마을까지 뻗은 4km에 걸친 능선으로 이 두곡 고지와 능선에서 여러 차례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일진일퇴를 거듭하게 된다.

전황(戰況)은 극히 아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됐으며 당시의 전투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2) 엄나무진고개의 전투

{또한 사단의 가용한 전 포병(105mm 7문, 155mm 12문)은 도하 예상 지역에 포격을 계속함으로써 북괴군의 도하 기도를 완전히 근절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날밤 자정이 지나자 적은 다시 4개 지점에서 일제히 도하를 개시하여 다음날(8월 7일) 새벽에는 최초 도하시와는 달리 <낙동강 돌출지역>내의 요지인 어봉리 능선과 두곡리 서편에서 북으로 뻗은 클로버잎 고지(△165)를 신속히 장악하고 말았다.

고지의 모양이 클로버 잎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으며 남북으로 4km나 뻗은 양지고개는 적이 이를 장악할 경우 9km 동쪽의 영산지역은 물론 하남(영산 동남 20km )에 이르는 미제24사단의 주보급로를 깊숙이 감제 관측할 수 있는 중요지형으로써 <낙동강 돌출지역>전투의 승패를 좌우하는 전술적 요충지였다.

8월 7일 아침, 제1대대는 이토록 중요한 양지(兩地) 고개를 탈환하기 위하여 다시 역습을 시도했으나 우세한 적의 병력과 지형적인 불리 그리고 혹심한 더위와 식수 부족 등으로 피해만 증대되어 갈 뿐 아무런 작전의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제1대대의 공격이 난관에 봉착되자 처치장군은 창녕에서 재편성중에 있는 제19연대를 투입하여 양개 고지의 탈환을 다시 시도해 보았으나 점차 증강일로에 있는 적을 격퇴할 수는 없었으며 아군의 피해는 증대되어 갔다. 8월 8일 제34연대의 병력은 1,000명선으로 제19연대는 1,700명선으로 감소되었고 사단의 전투력은 40%로 평가되고 있었다.}

 

(3) 힐 특수임무부대의 공격

{미8군사령관 워커장군은 서부지역의 심각한 전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온전한 전투력을 갖춘 미제2사단 제9연대를 제24사단에 배속시켰다.

제24사단장 처치장군은 제9연대가 증원됨에 따라 [돌출지역]내에서 적과 교전중인 모든 전투 부대를 제9연대장 힐(Hill)대령에게 배속시켜 [힐]특수임무부대를 구성, 적이 장악하고 있는 고지(어봉리능선, 클로버잎고지)의 탈취를 재 시도했으나 일진일퇴의 치열한 격전만 되풀이 될 뿐 전세는 점차 우군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갔다.

이때 창녕, 의령, 합천경찰서 둥 치안국 소속 합동경찰대 2개대대와 대한 청년단 의용 경찰, 특공대 등 애국청년들로 편성된 지방 자치 병력 50여명이 작전을 도와 피난민 처리와 보급품 수송에 앞장섰다. 8월 10일 밤, 적은 그 동안 은밀리에 가설한 수중교(물 속에 모래주머니를 쌓아서 만든 다리)를 이용, 12문의 야포를 위시한 각종 중화기와 수대의 전차까지도 도강시켜 방어력을 증가시켰으며 남지교(좌 인접 미제25사단과 유일한 통로)마저도 적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4일간의 격전을 치른 힐대령의 제9연대는 이미 병력이 2/3로 줄어들었다. 심지어 제5중대 선임하사관 졸단(Jordan)상사는 8월 10일부터 7일간 중대장과 소대장의 잇따른 손실로 다섯 번이나 중대장직을 대행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전투 양상은 극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기대를 걸었던 [힐 특수임무부대]마저도 거듭된 공격의 실패로 전투력이 현저히 감소되어 갔으며 반면 적은 영산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 다른 지역의 전투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8월 13일에는 27연대의 주력도 질서 있게 북상하여 2대대와 합류, 도천면과 영산면 구출작전을 개시, 영산 동쪽과 도천면의 적 침투를 좌절시켰다.

미켈리스연대는 14일까지 이 공격에서 포(砲) 4문을 노획하는 등 전과를 올리면서 남지 주변의 적 소탕을 끝내고 다시 8군 예비대로 복귀했다.}



4. 피난과 후기 제 일차 전투

1) 피난과 혼란

낙동강 동편 8km 이내의 퇴거 명령으로 마구선 국도 동쪽으로 소개되어 있었던 남지 사람들은 전투가 본격적으로 우리 지역에서 시작되자 피란을 떠나야 했다. 당시의 상황과 혼란을 {창녕군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남지읍의 상황은, 8월 11일 영남수리제방의 남쪽 편을 타고 공산군이 상대포 쪽에서부터 계성천을 끼고 남송교(마구선 국도 송진-남지 사이의 경계점)로 내려 왔다. 이에 남지지서에서는 이들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정탐키 위해 순경과 의용 경찰이 뾼을 타고 갔다가 남송교에서 총격 당해 전사했다.

공산군이 목전에 왔음을 판단한 남지(당시 마구선 서쪽편의 주민은 동쪽으로 피난 와 있었다) 읍내 주민은 남지철교를 건너 허둥지둥 피난길에 나섰다. 송진은 길곡면 쪽으로, 도천면민들도 피난을 나섰으나 벌써 적에 싸여 있었다.

남지를 떠난 피난민들은 곧 바로 남쪽인 마산을 가지 못했다. 미군이 차량으로 출동했기 때문에 이에 방해되지 않도록 이룡-덕촌나루-손골-북면의 코스로 유도 김해군으로 피난시켰다.

당시 미25사단 27연대 2대대는 출동 명령을 받고 차량종대로 남지철교를 향했는데 일부 피난민은 칠원-마산 쪽으로 빠지고 있었으므로 칠원과 남지 사이의 길은 피난민이 충만하여 헤치며 전진해야 했다.

그러나 비극적인 일이 발생했다. 전사(戰史)에는 이 일을,

[8월중에 전선 후방지역에서 대치시킨 12만 피난민의 일부 피난민 속에는 소수의 적 게릴라가 섞여 침투하려고 했으나 도중에 적발 체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체포 또는 사살된 사람은 적 게릴라가 아니라 남지를 지키고 있었던 애국청년들인 의용 경찰이었다.

남지의 치안 경계와 철교 경비 등을 맡고 있었던 남지 의용경찰대는 이날 남송교에서 적의 공격을 받은 후 우왕좌왕하는 읍내 주민을 남지철교를 통해 안전하게 피난하도록 유도하고 마지막으로 남지에서 철수하여 칠원으로 향해 가던 중에 칠서면 대치에서 미군과 마주친 것이었다.

미군은 경찰도 아닌 청년들이 구구식 총을 메고 있는 것이 수상했으므로 검문했다. 그러나 영어 회화 실력이 없는지라 서로 말이 통할 수 없었으므로 결국 사세 불리한 것으로 판단한 의용 경찰들이 산으로 도망치자 사격을 가했다. 여기서 남지의 두 김씨 청년이 사살되고 나머지는 칠원으로 탈출했다.

12일밤 자정에 27연대 2대대는 낙동강을 건너 남지철교 북단에 교두보를 설치했다.}

 

2) 남지리 부근의 피난과 전투

위 {창녕군지}의 기록 중 남지방위대로 임무를 수행하고 철수하던 중 미군의 총격으로 희생된 청년은 남지리에 살던 청년들로 김진기, 박계목, 김봉용, 박영태 등 4명으로 한국전쟁 발발이후 유엔군으로 참전한 미군들이 언어 소통의 장애와 지리의 미이해 등과 함께 미군의 작전 이행의 강력한 처리 등과 겹쳐 도처에서 볼 수 있었던 민족적 비극의 하나이었다.

당시 남지읍사무소(면장 정대수)에서는 전쟁 발발로 인하여 행정을 전시체제로 전환하여 만약 유사시를 대비하여 호적부 등 중요한 서류는 읍사무소에서 남포동 당시 남지소방대 사무실(구연택 집: 뒤에 제대장병보도회 사무실로도 사용)로 옮겼다고 한다. 이 때가 바로 마구선 서편의 주민은 동편으로 옮기라는 소개령이 떨어진 후이었다. 남지 마을을 지키고자 경찰을 돕는 방위대가 창설되어 향토를 지키고 있었는데 당시 남지방위대 대장은 함안 사람인 이삼률(계급이 방위 대위)로 대원은 4, 50여명이었고 남포동 산업회사 근처에 부대가 있었다.

남지지서에서 인민군들이 송진 영남수리제방에 나타난 것을 알게 된 시각은 8월 11일 12시경이었다고 한다. 인민군의 사격이 개시된 후 경찰은 인민군임을 확인 상부와 연락하여 남지 사람들을 피란시키기로 결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8월 11일 오후, 인민군이 송진리 영남수리제방을 타고 남하하는 것을 목격한 남지지서의 경찰과 방위대(의용경찰대)는 망루에서 망원경으로 정찰하였으나 적인지 아군인지 판단이 되지 않아 미군이 운전하는 뾼에 의용경찰로 미군 통역을 맡고 있던 김귀우(金貴佑, 김정곤의 아들)등 2명이 타고 남송교까지 진출하였다가 인민군의 집중 사격하며 수류탄을 던져 차가 계성천으로 추락하고 미군과 김귀우는 행방불명되었는데 피란길에서 돌아 온 후에 가족들이 행적을 더듬어 시체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놀란 남지 주민들은 방위대가 지키는 남지철교를 통하여 무질서하게 피란길에 나섰다.

8월 11일 이전에는 남지철교의 경비가 삼엄하여 민간인의 통행은 상당히 통제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웃개나루를 건너서 다니기에도 심한 불편을 겪었다.

피란을 떠나는 날(8월 11일)은 오후 1-2시경이었는데, 남송교 쪽에서 인민군의 총격이 시작되어 총탄이 본동 동쪽 끝집으로 날아들었다. 이 총성에 놀란 남지 사람들이 짐도 미쳐 챙기지 못하고 황급히 나서야 했다. 키우던 소도 끌고 나오지 못하고 허겁지겁 양식과 이불, 여벌옷도 없이 그릇 몇 개에 솥만 가지고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람들은 철교 쪽으로 달려가 강을 건넜다. 이날 피란을 나선 사람들은 진작 강제 소개령으로 마구선 서쪽에서 동쪽으로 나와 있던 사람들이어서 맨몸으로 떠나야 했다. 만약 겨울철이었더라면 아사자나 동사자가 속출했겠지만 다행히 여름철이라 옷이나 이부자리가 부실하였어도 불편이 없는 계절이라 피란 살이 고초가 조금은 덜했다 할 것이다. 남지 사람들이 피란을 떠나기 시작한 시각은 오후 2시경이었으며 오후 4시경 마지막으로 면사무소 직원들이 철교를 건너 이룡을 지나 덕남 강가에서 10일간을 머물다가 김해 쪽으로 대산면 쪽으로 가야했다.

남지 사람들은 대부분 김해군 생림면과 장유면 등의 국민학교 운동장 등지에 마련된 피란민 수용소에서 생활하였는데 추석을 피란지에서 보내야 했다.

그런데 이날 늦게까지 남지 주민의 피란을 돕고 칠원쪽으로 철수하던 의용경찰대 청년들은 칠서면 대치리 고개에서 미군들과 만났다. 구구식 장총을 울러 맨 청년들을 수상하게 여긴 미군들의 검색에 걸렸다. 미군은 영어 회화 실력이 없어 당황해 하는 청년들을 인민군으로 오인하게 되었고 이 눈치를 알아 챈 경찰대는 달아나려 했다. 그러자 미군들이 총을 쏘았고 김진기(金鎭基 : 김정호의 아들) 박계목(朴啓穆)은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고 미군에 붙잡힌 김봉룡(金鳳龍) 박영태(박찬근의 三子)등은 박영태의 보자기 안에서 나온 수류탄과 일기장을 보고서 인민군으로 잘못 인식하고서 칠원까지 끌고가 칠원 산모퉁이에서 총살을 당하는 엄청난 비극이 일어났다. 이때 의용경찰대 대장이었던 오덕수를 비롯하여 공또찬(본동), 정태호(동포, 정대수 아들) 최수현(서동, 김정호의 처조카) 김상실(남포)등은 산비탈로 밭고랑 논도랑으로 허겁지겁 탈출하여 무사히 살아 날 수 있었다.

그러한 비극은 도처에 있었는데 본동에 살던 오정섭은 피란 보따리를 싸면서 혼망 중에 태극기를 보따리 싸는 보자기로 사용하였다하여 피란길 도중 경찰 검문에 걸려 총에 맞아 죽기도 하였다고 한다.

고곡지구 주민들의 일부는 성사고개를 넘어 남지쪽으로 피란하여 철교를 건너 무사히 피란길에 올랐으나 또 다른 일부는 두곡 엄나무징이고개를 넘어 장마 대봉리를 거쳐 도천면 논리 방향으로 빠진 사람들이 있었고 또 일찌감치 도천쪽으로 피란길을 떠난 학계, 성사지구 일부 주민들은 8월 11일 공산군이 어만리 앞산에 진출하는 와중에 피란민과 인민군이 뒤섞여 혼란이 일어났고 피란민속에 인민군이 뒤섞인 것을 안 미군기들은 피란민들에게 폭격과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한다. 이때 정자나무 아래나 밭고랑에 피신하였다가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이 일은 미군 조종사가 공산군이 피란민 대열에 섞여 들자 무차별 공격을 퍼부어 일어난 참사였다. 또 일부 주민은 여러 사정으로 미쳐 피란을 못하고 지체하는 바람에 공격전의 와중에 한 달여 갇혀서 십자포화와 무차별적인 폭격에 희생이 많았다고 한다.

남지리 부근의 전투는 8월 11일 피란민과 교대로 마산에서 달려온 미 27연대 2대대가 담당했다. 존 H 미켈리스 대령이 지휘하는 27연대는 "소방대"라는 별명이 붙은 부대였다. 이 부대는 12일 밤 남지리 일대 인민군을 격퇴하고 8월 13일에는 주력과 함께 도천을 지나 영산까지 진격하여 송진 영남수리제방까지 진출했던 인민군을 물리쳤다.

미 제25사단 27연대는 이후 남지리 부근에 주둔했으며 용산리 창날에서부터 도천면에 이르는 지역의 적과 싸웠다.


3) 난국의 타개책- 워커장군의 결단(1950. 8. 15)

8월 14일까지 격전을 벌렸으나 박진나루와 이이목나루를 건너 온 인민군을 격퇴할 수 없자 주한 미8군의 사령관인 워커(W. H. Walker)중장은 예비 병력으로 있던 해병대를 보내 "[낙동강 돌출지역]의 적을 격퇴하라"고 명령을 하는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당시의 전투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이 무렵 대구 정면을 비롯한 동해안 축선상의 적의 압력도 더욱 증대되어 부산교두보선은 점차 축소되어 가고 있었다. 모든 전황이 암담해져 가고만 있을 무렵인 8월 15일 제24사단에 도착한 워커장군은 격한 어조로 "해병 여단을 줄 테니 지체없이 적을 몰아내라"고 말했다. 마지막까지 보물처럼 아껴온 미8군 예비인 미해병 여단은 이때 이미 마산에서 밀양으로 이동 중에 있었다.

워커장군은 부산 교두보 방어전투를 지휘함에 있어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고 있다는 지형적인 특징 때문에 항상 미제24사단 정면의 영산-밀양축선을 염려해 왔다. 밀양은 부산-대구를 연결하는 도로와 철도 상에 있어 밀양이 상실되면 방어선은 두 쪽이나 전방어선은 무너질 위험에 있었던 것이다.

그의 탁월한 전술적 식견은 이곳에 그의 최후 예비대를 투입하는 용단을 내리게 했다. 이리하여 미제1해병여단은 8월 15일 제24사단에 배속되어 "낙동강 돌출지역의 적을 격퇴하라"는 명령을 수령하여 행동을 개시했다.

1950년 8월 15일, 암담한 부산 교두보 전황의 마지막 타개책으로 제8군의 주요 예비병력인 미제1해병여단을 <낙동강 돌출지역>에 투입하기로 결심한 워커장군(제8군사령관)의 전술적 용단에 따라 동 여단을 배속 받은 미제24사단 지휘부에서는 숨가쁜 분위기 속에서 어봉리능선과 클로버잎고지의 탈환 계획이 구상되고 있었다. 사단장 처치장군은 해병대를 좌로 하여 어봉리능선을, 제9연대를 우로 하여 클로버잎고지를 병진 공격하는 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해병여단 예하 제5해병 연대장 멀레이 대령은 제9연대의 공격에 앞서 해병대가 어봉리 능선을 먼저 탈취하겠다고 건의했다. 양개 목표를 연결하는 능선을 일련의 공격 축선으로 판단한 멀레이 대령은 이들 양개 목표의 축차적 탈취가 보다 용이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처치 장군은 양개 목표의 연관성을 고려하여 협조된 동시 공격이 보다 효과적이라고 판단했지만 결국 멀레이 대령안이 채택되었다.}

 

 4) 미 해병대의 소탕전(1950. 8. 16 - 8. 19)

8월 16일까지 전열을 정비한 미군은 8월 17일 07시 35분에 다시 고곡지구에 있는 인민군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이 전투는 연 2일간 계속되어 결국 인민군은 이 지대를 장악한지 12일만에 두곡 엄나무진고개를 넘어 물러나기 시작했고, 이튿날 완전히 후퇴하였던 것이다.

이 해병대의 소탕전을 전사에서는 [어봉리 전투]라 명명하였으나 이 어봉리 능선이 바로 우리 읍 아지리 동편 산등성이로 인민군은 아지 쪽의 고지인 109, 117, 143고지에 붙어 있었고, 미 해병대는 장마면 가림과 어봉, 성사리 대성마을 쪽에서 공격하였던 것이다.

당시 상세한 전투 상황을 {향토수호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8월 17일 07시 35분, 공격준비 사격이 개시되었다. 가용한 모든 화력이 어봉리의 좁은 능선 위에 집중되었으며 특히 18대의 코세어(Corsair)함재기의 공중강타는 장관을 이루었다.

후일 처치 장군은 당시의 상황을 "능선 전체가 불꽃에 싸여 공중으로 떠 올라가는 것 같았다"라고 회상했다(유엔군 전사) 공격 준비 사격이 끝나자 08시 정각 제5해병연대 예하 제2대대는 제5중대를 우로, 제6중대를 좌로 하여 어봉리 능선을 향해 1,000m 거리의 공격 개시선을 통과했다. 120며명의 4개 돌격소대는 돌격대형으로 산개하여 철벅거리는 수전 지대를 통과한 후 고구마 밭을 지나 비탈길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전투 경과로 보아 공격 개시와 동시에 적탄이 소낙비처럼 쏟아질 것으로 예상했으나 공격 개시후의 상황은 이러한 예상을 뒤엎고 조용하기만 했다. 그러나 8부 능선에 이르렀을 무렵 우측의 클로버잎고지와 어봉리 능선의 좌단부로부터 갑자기 적의 소총 및 기관총 사격이 일제히 가해져 왔다. 박격포탄도 비가 쏟아지듯 주변에서 작렬하기 시작했으며 돌격 대열 위에 집중되는 총탄은 마치 콩을 볶는 듯 했다. 우일선 돌격소대장 싱카(Shinka)소위는 이를 악물고 약간 움푹 파진 곳에 엎드려 사태를 관망하면서 주변을 살폈다.

이때 싱카소위는 폭우시 산사태로 생긴 협소한 도랑(고지 정상 쪽으로 뻗은)을 발견하고는 돌격대원들을 신속히 이 도랑 속으로 뛰어들게 했다.

이 무렵 몇 명의 소대원들이 쓰러졌지만 이 도랑을 이용한 포복 전진으로 싱카소위는 30여명중 20명을 이끌고 가까스로 산 정상에 도달하는데 성공했으며 적의 사격도 다소 기세가 꺾이는 듯 했다. 돌격대원들은 맨 먼저 조우한 괴뢰군의 한 참호에 사격을 가하면서 조심스럽게 접근했으나 참호가 텅 비어 있음을 알고 어리둥절하고 있을 무렵 갑자기 우측방에서 적의 기관총이 다시 불을 뿜었고 동시에 뒤쪽 참호에서 적병들이 뛰어나와 일제히 수류탄 공격을 가해왔다.

불과 몇 분 사이에 5명의 대원이 쓰러졌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 경우 많은 희생을 면치 못할 것으로 판단한 싱카소위는 엄폐된 도랑을 따라 부상자들을 판쵸우의에 싸서 끌면서 소대원을 이끌고 능선 중턱까지 철수해 내려 왔다.

싱카소위의 요청에 따라 코세어 함재기가 다시 날아와 목표 정상과 우측 방의 기관총 진지에 대해 여러 발의 폭탄을 투하한 후 공격은 다시 시작되었다.

폭격하는 동안 잠잠하던 적은 공격을 재개하자 다시 치열한 사격을 가해왔지만 싱카소위는 천신만고 끝에 최초 공격시 진출했던 정상에 이르렀다. 그러나 출발시 15명이었던 소대원은 9명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이 소수의 병력으로는 치열한 적의 측방 사격과 또 다른 참호로부터의 수류탄 공세에 견딜 수가 없어 소대는 다시 비탈길로 밀려 내려오고 말았지만 공격을 결코 포기하려 하지는 않았다. 15:00시경 대대는 공격을 일시중지하고 능선중도에서 급한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7시간의 전투 끝에 대대는 23명이 전사하고 119명이 부상함으로써 전주 참가인원(240명)의 60%를 이미 잃고 있었다.

전투력을 거의 상실한 제2대대는 제1대대와 교대되었다. 1차 공격의 실패는 우측방(클로버잎고지)으로부터의 적의 화력에 기인되었다는 분석에 따라 최초 처치장군이 구상한대로 양개 목표(어봉리 능선, 클로버잎고지)에 대한 협조된 동시 공격이 계획되었다.

"내가 고통스러울 때는 적도 고통스럽다."는 말과 같이 제2대대의 전력 상실로 해병연대가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어봉리 능선을 장악하고 있던 북괴군 제18연대의 상황 역시 점차 절망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루 사이에 600여명의 사상자를 낸 그들은 클로버잎고지의 제16연대로부터 1개 대대를 증원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탄약은 엄청난 속도로 줄어들었고, 의약품이라고는 거의 동이나 부상자들은 그대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미군기의 공중폭격에 대한 공포증이 걸려 있었고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미 해병대의 끈질긴 공격에 차츰 불안을 느끼기 시작하여 더 이상의 방어진지 지탱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반면 적은 노획한 미군들의 무전기(SCR-300)로 미해병대의 부대 교대는 물론 병력 이동계획까지도 파악하고 있었다.(이상 당시의 포로 진술에 의함)

16시 정각, 능선을 뒤흔드는 듯한 공중 폭격과 포병 사격에 뒤이어 양개 목표에 대한 협조된 공격이 시작되었다. 클로버잎고지에 배치된 적은 아군의 공격 준비사격(특히 공중포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듯, 그들의 저항은 예상외로 미약하여 제9연대 제2대대는 순조롭게 목표를 탈취했다.

그러나 어봉리 능선상의 적은 거센 저항으로 해병대의 정면 공격을 여전히 저지하고 있었다. 한편 클로버잎고지를 점령한 제9연대가 해병대의 어봉리 능선을 측방에서 지원하기 시작했다. 제9연대의 측방 지원하에 해병 제1대대 제1, 2중대는 몇 차례의 공격을 감행한 끝에 17시경 어봉리 능선 우반부(102, 109, 117고지)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동 능선 좌반부(143고지)로부터의 치열한 측방 사격으로 117고지를 점령한 제1중대는 곧 동쪽 사면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날 황혼 무렵, 어봉리능선과 클로버잎고지 사이로 접근해 오고있는 4대의 적 전차와 이를 후속하고 있는 북괴군 보병이 102고지에서 관측되었다. 이는 낙동강 돌출지역 전투에 투입된 최초의 적 전차였다.

해병 제1대대의 방어진지에서는 3.5인치 로켓포와 75미리 무반동총의 배치가 약간 조정된 후 조급하게 공격태세가 갖추어졌다. 긴급 요청에 따른 공중 대기 전투기가 북괴군 전차위로 날아가 기총소사를 가했으나 전차의 기동은 멎지 않았다. 102고지 위의 해병들은 먼지를 날리면서 직전으로 다가오고 있는 적 전차를 발을 동동 굴리면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국전에 투입된 후 최초로 적 전차와 대결한 해병대의 로켓포 사수들은 가슴이 고동치는 긴장감 속에서 숨을 죽인 채 적 전차의 접근을 기다리고 있었다.

적 전차가 70m 거리의 측방으로 다가왔을 무렵 비로소 발사된 제1탄은 무한 궤도에 명중했다. 적 전차는 멈칫하면서 포문을 열었다. 제2탄은 다시 동체에 명중했으나 전차는 정지한 채 미친 듯 포격을 계속했다. 그 순간 전투기로부터의 직격탄이 명중되자 전차는 화염에 휩싸였다. 후속 하던 3대의 전차도 무반동총과 로켓포 그리고 공중으로부터의 집중 사격으로 불과 몇 분 사이에 파괴됨으로서 후속하던 소대 규모의 북괴군 보병 대열에도 큰 혼란이 일어나더니 곧 패주하고 말았다.

한편 102고지와 109고지를 장악하고 있던 제2중대는 적의 야간 역습에 대비하여 방어진지를 강화하고 있었다. 제1중대는 얼마 전의 117고지 공격시 돈좌되었던 동쪽 능선상에서 그대로 급편 방어진지를 강화하고 밤을 새우기로 하였다. 이날 전투에서 해병대는 23명이 전사하고 182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날밤(8월 17일) 미군들은 예상되는 적의 집결지와 접근로에 대한 재원 기록 사격을 끝마치고 적의 역습에 대비하여 진지 전면에 촉발 조명탄을 계속 사용했다.

다음날(8월 18일) 02시 30분, 초록색 신호탄과 함께 예상했던 적의 역습이 시작되었다. 적의 공격방법은 조명탄 때문에 쉽게 관측할 수 있었다. 5∼6명으로 편성된 여러 개의 돌격조들이 지상에서 벌떡 일어나 수류탄을 던지자마자 치열한 사격을 가하면서 육박해 들어갔다.

피아를 분별하기 어려운 푸른 조명탄의 섬광 속에서 육박전이 전개되었으며 피아 공히 많은 인원이 쓰러졌다. 제1중대는 마침내 날이 밝은 후에 복수를 다짐하면서 109고지 동쪽 사면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109고지 제2중대에는 남쪽 안부를 공격해 오는 적과 45분간에 걸친 육박전 끝에 적을 격퇴했고 날이 밝아 오자 적의 공격은 멎었다. 그 날밤 피아의 손실은 극심했다. 185명의 제1중대는 90명으로 줄어들었고, 195명이었던 제2중대의 잔류 인원은 110명이었다. 정확한 적의 피해는 알 수 없었지만 방어진지 주변에서 183구의 북괴군 시체가 발견되었다.

동이 트자 해병 제1대대는 재편성 후 117고지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공격은 처음부터 발악적인 2개소의 적의 기관총 사격 때문에 난항을 거듭한 후 능선 중턱에서 공격은 또 다시 돈좌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전우들이 수없이 쓰러지기 시작했지만, 이번만은 한사코 목표를 탈취하고 말겠다고 다짐하면서 해병대원들은 나무 뿌리를 움켜잡은 채 한 발자국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다시 긴급 지원 요청을 받은 함재기들이 날아와 유색 연막으로 지시된 표적에 대하여 몇 개의 500파운드 폭탄을 투하했다.

능선 전체를 뒤흔드는 무서운 폭음과 함께 철편(鐵片)들이 공중 높이 떠올랐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해병대원들은 초연(硝煙)이 자욱한 117고지 정상으로 함성을 지르면서 돌격해 들어갔다. 기관총은 삼각대만 나뒹굴고 있었고 북괴군들의 팔 다리가 여기저기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미 해병대의 맛을 이제서야 알 거야!"

얼굴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흙투성이가 된 한 병사가 착검된 총대를 거꾸로 땅에 꽂고 침을 뱉으면서 외쳤다. 117고지를 점령한 이들의 거친 돌격기세는 거센 물결처럼 지체없이 174고지로 밀려들어갔다. 얼마 후, 어봉리 능선은 적이 이곳을 장악하기 시작한지 12일, 해병대가 공격을 개시한지 2일만에 완전히 아군 수중으로 들어 왔다.}

 

5) 남지지구 제일전투의 승리 (1950. 8. 18 - 8. 19)

8월 18일 인민군은 박진나루 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자 포병의 포격과 전술 공군의 폭격으로 처절한 소탕전이 전개되었다.

해병대와 미 24사단 보병은 서쪽으로 진격해 나갔고, 포병은 인민군이 달아나자 도하지점인 박진나루를 엄청난 화력으로 강타했다. 8월 18일 어둡기 전에 해병대 3대대는 311고지(구진산) 제34연대는 240고지(고운봉) 제19연대는 강 전면의 223고지(창아지 뒷산)를 탈환했다.

이튿날(8월 19일) 아침 해병대는 미 34연대 장병들과 함께 대곡과 반포를 완전히 탈환하였다. 저녁이 되었을 때 월상에 까지 인민군의 그림자는 찾을 수가 없었다. 남지지구 제1차 전투는 승리로 끝났다.

이 첫 번째 승리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어봉리 능선과 클로버잎고지 후면에서는 북괴군 패잔병들이 낙동강을 향해 서쪽으로 밀려가고 있었으며 북괴군 제4사단의 총퇴각은 누구의 눈에도 뚜렷했다. 다음날 해병대와 제34연대는 강변에서 합류했으나 강 차안에서는 적의 그림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적 제4사단의 도강 인원은 3,000명 미만이었고 강 차안에서 미군들은 1,200여구의 적 시체를 매장했다. 34문의 포와 수 백정의 자동화기 그리고 수천의 소총을 유기 함으로써 서울 사단의 호칭을 받았던 적 제4사단은 사실상 이 날짜로 소멸된 것이었다.

한편 8월 19일, 8군 예비로의 복귀 명령을 받고 강변 방어진지를 인계한 후 비탈길을 내려오는 해병대 병사들의 휘파람 소리는 다시 한번 그들의 자랑스러운 긍지를 느끼게 해 주었다.}



5. 남지지구 제2차전투

 사진설명 ( 박진 전승비 )

1) 두 번째 도하 기도 (1950. 8. 26)

8월 공세가 실패로 끝나고서 8월 26일 인민군은 월하리 박진나루에 부교(浮橋)를 설치하고 26대의 전차를 앞세워 공격을 시도하게 되어 다시 전투가 벌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남지지구 제2차 전투의 시발인데 이후 벌어지는 전투를 전사에서는 [9월 공세]라 하였다. 이때도 같은 시간에 두 곳에서 도하하려 했는데 곧 박진나루와 유어면 적포교 지점이었다.

이방면 현창리에 있는 적포교는 8월 16일 단절되어 있었다. 인민군이 2차 협공작전을 벌리면 이 다리로 침입할 것이 예상되자 폭격으로 교량을 끊어 놓고 있었다. 그러나 두 곳 모두 인민군은 실패했다.

이때는 미 24사단과 임무 교대한 미 2사단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장갑차부대의 반격으로 적은 패주하였다. 2사단의 사단장은 로렌 까이즈 소장으로 인민군도 최후의 힘을 모아 2차 공격을 벌리고자 준비하고 있었다. 즉 인민군은 제2, 4, 9, 10사단 등 4개 사단 2,900여명을 투입하려 하였다.

두 번째의 도하 기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인민군은 전열을 정비하여 [9월공세]라 불리는 최후의 공세를 8월 31일 밤에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의 공세로 우리 창녕군은 남부와 북부로 두 동강이 나면서 대부분의 군 지역이 인민군에 유린되었으며, 인민군이 영산(9. 1 - 9. 4)과 창녕읍(9. 2 - 9. 9)까지 진출했으므로 그때까지 피란을 나가지 않고 있었던 영산 도천 계성 창녕군 북부 지방의 주민들이 소개령에 의해 피란을 떠나게 되었다.

남지지서 경찰들이 주민이 다 피란을 가고 텅 비어 있었던 남지리 시가지를 이때까지(8. 11 - 8. 31) 지키다가 9월 1일 인민군의 대공세가 있자 퇴각하는 도중에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한다.

전 창녕군민에게 소개령이 내렸다. 그러나 최초로 습격 받은 남지읍 남지지서의 경찰관 2명(박순경 이 순경이라 하나 상세한 이름은 기억 못함)과 도천면의 피란민들은 미쳐 소개를 못하고 적에게 포위를 당하였다. 생포된 박 이 두 순경은 피란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송진나루 백사장에서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목숨이 경각 지경의 위기에 있던 차, 제2사단 장갑부대의 공격으로 인민군들이 퇴주 했다.

2) 박진나루 도하와 구월공세 (1950. 8. 31 - 9. 3)

[9월 위기]라 했던 인민군의 최후 최대의 공격은 8월 31일 밤 23시 30분에 시작되었다. 4개 사단이 미군의 전면 우리 읍 월상 월하 월평과 유어면 등 4개소에서 도하를 시작했던 것이다.

남지 지역의 도하지점은 월상 앞 박진나루, 월하 마을앞 강, 월평의 들붓나루 등 3개 지점이었는데, 박진나루를 도하한 인민군은 반포로 해서 구진산을 향해, 다른 두 곳의 지점을 도하한 부대는 월하 뒷산 209고지(호곡산)를 공격하였다.

또 이 시기에 남강과 합류지점인 용산리 기강나루(창날)로 인민군 제9사단이 기습 도하를 감행하였다. 당시 용산리 아곡 94고지(마분산 줄기)에는 미 9연대 A, C중대가 지키다가 이들과 접전했는데 결국 인민군을 격퇴시키지 못하고 퇴각하고 말았다. 그래서 남지시가지는 인민군의 수중에 또 한 번 들어가 버렸다.

남지철교는 미 25사단 35연대에서 지키고 있었는데 이때까지 폭파되지 않고 무사하였다.

9월 공세로 여러 곳으로 도하하자 결국 우리 창녕군의 대부분의 지역이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는 최대의 위기에 몰렸다. 그러자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대기 중이던 미 해병대가 또다시 남지지구에 투입되어 대접전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전투 경과를 [향토수호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8월 31일 23시 30분, 북괴군 4개 사단은 총공격을 개시하여 미 제2사단 전면 4개소에서 도하를 강행 폭 10km에 걸친 미군 진지를 순식간에 돌파했다.

결국 미군 진지는 남지 장마 영산의 남부와 계성 창녕 유어 대지 대합의 북부 2개 지구로 분단되고 8월 공세시의 초점이던 클로버잎고지와 어봉리 두 고지도 다시 적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9월 1일에는 남지 영산지구 군민들이 영산 구계리 방면을 통하여 밀양으로 소개되었다.

적의 3개 사단이 남지에 도하 진출하여 제2사단이 양분되자 워커장군은 9월 1일에 미해병대의 재투입을 결심하게 되었다. 장군은 이 해병대의 투입이 인천상륙의 전제인 만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9월 1일, 도하한 북괴군 제9사단은 영산까지 진격해 왔는데 당시 사단장 박효삼은 전공을 세우는 좋은 기회로 알고 공격을 해 왔다. 아군은 미 제9연대와 배속된 제2야전 공병대대였다.}

 

3) 미 해병대와 전술 공군의 활약 (1950. 9. 4 - 9. 6)

9월 1일 도하에 성공한 인민군은 영산까지 진출하게 되었는데 피아간 치열한 전투가 수일 간 벌어지게 되었다.

지금 영산면 호국공원이 조성된 남산 절벽 위에 미군이 긴급히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다가 이곳에 당도한 인민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는데 9월 3일, 미 제5해병연대 증원군의 도착으로 인민군은 밀려나기 시작했다.

밀린 인민군은 지난 8월 제1차 전투 때처럼 두곡과 아지선의 고지에 진을 치고 대항하였다. 이때 해병대의 공격은 빛났으며, 특히 전술 공군의 폭격은 천지를 뒤집는 맹폭이었다 한다.

이때의 전투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9월 4일 08시 정각에 해병 제5연대는 제2사단 제9연대와 함께 장마 남지지구에 대한 반격을 재개했다. 폭우가 내린 간밤에 116고지의 적은 이상하게도 조용하게 있었다. 날이 밝아오자 진격하는 해병대와 보병은 북괴군이 혼란과 공포 속에서 밤을 지내는 광경을 목격했다. 전날 남지 장마 일대의 상공을 덮은 전술공군의 대폭격과 포격의 전과를 본 것이다. 매장되지 않은 적 시체가 계성면 장마면의 들과 산, 1008번 지방도(영산-박진간 도로) 주변에 흩어져 있었고 버리고 간 장비 중에는 말짱한 2대의 T-34 전차도 있었다. 적 제9사단의 C.P였음이 분명한 천막도 어떤 골짜기에 그대로 서 있었다한다.

이날 저녁에 해병대는 장마면 어봉리와 동정리(클로버잎고지 능선)에 도착하여 5일 새벽을 기해 공격을 준비했다. 9월 5일, 해병대는 장마 마을 쪽에서 3일째반격을 계속하여 하이곡과 두곡리 뒷산(클로버잎고지 동쪽 고지)을 탈환했다. 이때 2대의 전차를 앞세운 적 300명의 맹렬한 역습이 있었으나 대국적으로 보아 적의 공격력은 현저히 둔화되어 있었다. 해병대는 3일간의 반격을 성공하여 9월 6일 00시 정각 제9연대에 진지를 넘겨주었다. 영산 전선을 이탈한 해병대는 인천으로 가기 위해 우선 부산으로 내려갔다. 남지, 영산, 장마에 걸친 두 번째의 위기는 사라진 것이다.}

 

4) 슈미트부대의 대곡고지 사수 (1950. 8. 31 - 9. 4)

9월 공세가 시작되었을 때, 대곡리 뒷산에는 박진나루를 지키려던 미 제2사단 9연대 D 및 H중화기중대와 박격포중대가 분산되어 150고지에 모여 있었다. 이들은 인민군의 급속한 진출로 이곳에서 고립되어 퇴로를 차단 당하고 말았지만 끝내 인민군의 공격을 견디어 냈던 것이다. 그리고는 혈로를 뚫어 남지철교 쪽으로 귀환하였다고 한다.

이 잔류 부대원들을 지휘한 장교가 H중대장 슈미트중위여서 뒤에 [슈미트부대]라 불리었다. 대곡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미군들이 황씨굴에 은신하며 싸웠는데 미쳐 피란을 못나갔던 사람들이 그들을 숨겨주면서 밥도 해주고 보호했다고 한다.

슈미트부대의 활약상을 보면 다음과 같다.

 {슈미트부대는 8월 하순, 제2사단이 낙동강 대안에 1개 중대 규모의 위력 수색을 지원하기 위하여 대곡리의 105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제9연대 제4중대 및 제8중대의 병력은 장교 5명을 포함하여 약 70명 정도였다. 이때 제8중대의 슈미트중위가 선임자로서 이 혼성부대를 지휘했는데 이들은 적 주력부대 제9사단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연대 본부에서는 이들이 통신이 두절된 후로 모두 전사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슈미트부대는 고립된 악조건 속에서도 대곡고지를 사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북괴군은 주도하 지점으로 박진나루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지켰던 고지는 바로 이곳이 내려다보이는 지점이었다. 적은 박진나루에 야간에만 철주교(鐵舟橋)와 수중교를 가설했고 이것을 이용해서 매일 밤 800 내지 1,000명을 남지로 도하시키고 있었다.

슈미트부대는 8월 31일부터 9월 4일 밤까지 싸웠다. 그러나 슈미트중위 이하 대부분이 전사하고 22명만이 생존하여 칠현 창아지 용산의 강을 따라 남으로 와 제25사단에 귀환했다. 이들은 낮에는 숨고 밤이면 걸어서 탈출한 것이다. 귀환한 이들로부터 박진나루의 수중교 위치를 확인한 미 공군은 5일밤 이 수중교를 폭파하였다. 남부의 남지 장마 영산 장마 계성 부근의 싸움은 9월 5일경 일단락 되었으나, 북부의 유어와 창녕에 주둔했던 미 제2사단 제23연대의 상황은 아주 불리했다.}

 

6. 수복과 복구

1) 구월의 전황 (1950. 9. 7 - 10. 4)

9월 7일 이후 창녕군의 남부의 전투는 인민군이 물러가 일단 소강상태였으나 군 북부지역은 여전히 혼돈 상태였다.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9월 2일 인민군이 창녕시가지 안에 들어오기도 했고, 9월 8일에서 9월 9일까지 전투가 계속되어 수천 명이 죽고 부상당하는 사태가 군 북부지역에서는 벌어지고 있었다. 9월 9일 이후 10월초까지 인민군은 낮에는 유엔군 비행기의 폭격을 피해 토굴이나 골짜기에 은신하다 밤만 되면 나타나 집을 뒤지고 공격하며 약탈하였다.

9월 이후 큰 전투가 없었으나 게릴라식 인민군의 저항은 절정에 달했다.

밀양으로 철수했던 경찰은 10월 초순경 전열을 가다듬어 우리 군으로 복귀하여 준동하는 인민군과 싸우게 되었다. 피아를 구분 못하는 어둠 속에서 육박전이 벌어지면 머리통을 만져보아 아군임을 확인하고서 싸웠다고 한다. 비행기의 폭격도 엄청나서 군내의 가옥이나 시설들이 폭파 소각되었고 산야에 시체와 부서진 탱크, 대포, 차 등 전투의 잔재들이 수없이 널브러져 흉한 모습으로 방치되어 있어 수복 후 시체들을 매장하기를 수 천구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때 전해 오기는 구진산 정상 구진산성 가운데 이 전투에서 전사한 인민군 4사단 포사령관 노장군이라 전해지는 시체를 묻은 커다란 새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이었고 급하게 후퇴를 하였기 때문에 장군의 시체를 북쪽으로 운반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 시체는 휴전 얼마 후에 북으로 미군 시체와 교환하여 갔다고 한다.


2) 남지철교의 폭격

1950년 8월 11일 남지면민들이 피란을 떠난이후 남지 시가지는 민간인이 없는 곳이 되어 있었다.
훗날 피란지에서 돌아오던 면민들은 제일 먼저 보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폭격으로 무너져 내린 남지철교였다.
계내리 쪽에서 보면 세 번째 교각에서 네 번째 사이의 상판 25m가 끊어져 강물 속으로 비스듬히 처박혀 있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폭격에 끊어져 나간 것이었다.
남지 쪽 상판은 붙어 있고 계내리 쪽은 완전히 절단되어 강물 속에 떨어져 있었다.


과연 철교는 어떻게 파괴되었을까?
남지철교는 강을 넘어 오려는 인민군과 격전 끝에 하는 수 없이 폭파시킨 것이 아니란 사실이 {창녕군지}의 다음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남지철교는 중요한 시설로 미 제25사단 35연대에서 8월 13일 이후 경비를 맡고 있었다.
8월 11일 남지면민들이 피란을 나간 다음 교량의 남쪽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던 것이다.

이곳에는 1개 소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즉 미 25사단 35연대 F중대 1소대(소대장 닉케리;Nickery 소위)로 남지철교를 미군들은 소대장의 이름을 따 {닉케리의 다리}라 불리우리만치 인상 깊었던 곳이었다.

8월 31일, 낙동강과 남강의 합류지점인 기강도선장(남지읍 용산리 아곡)의 94고지에 미 9연대 A, C중대가 적 9사단의 도하 기습을 받아 철수하였는데, 그 후로도 또 한번 남지 근처는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남지철교는 건재했다. 거기다 9월 8일∼9월 9일에는 심한 강우로 남강과 낙동강은 2피트 이상이나 증수하였다.
따라서 새롭게 적이 도하할 위험은 줄어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철교는 폭파되어 다리의 한가운데가 주저앉았다.

폭파시킬 이유가 없었다.

강물은 불어 북쪽에서 강으로 적이 도하할 위험도 없었다.(남쪽인 칠원 일대는 남강으로 도하한 적 7사단의 침입으로 9월 5일∼9월 7일 전투가 벌어져 적을 격퇴한 단계에 있었다) 철교의 경비는 튼튼했다.
또 북쪽의 전투도 승리하여 공산군이 쫓겨나고 있었다.
공산군은 밤마다 이곳을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철교의 북쪽 접근로에 지뢰를 매설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적은 약 500명이나 지뢰에 결려 죽었다.
하루아침에는 한 쌍의 개도 걸려 죽었다.
그런데 1950년 9월 8일 철교는 폭파되었다.
사태의 잘못 판단으로 미군 제트전투기(F-82)가 500파운드의 폭탄을 투하 폭격하여 중앙부 25m를 파괴했다.

이 철교는 1953년에 복구되었다.}

그런데 의문점은 기록에는 폭탄 투하로 폭격하여 다리를 끊었다고 하나 당시 철교의 파괴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폭격이 아니라 그 자리에 다이너마이트를 장치하고 강 건너에서 어떤 장치에 의해 폭파한 것이 아닌가 하고 있다.
다리가 칼로 자른 듯 떨어져 나갔을 뿐만 아니라 그 외의 상판의 콘크리트 포장부분이나 트러스트, 난간 등은 하나도 파손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포탄이 투하되었다면 다리의 다른 곳에도 파손되었을 것이 아닌가 하고 의문을 제기했다.


 

3) 패잔병 소탕과 수복

미 제2사단이 1950년 9월 16일 반격을 개시하자 인민군은 의령군 쪽으로 무질서하게 도강을 하며 철수하게 되었다.
퇴각하는 인민군을 향해 맹렬히 폭격을 감행하였다.
하루에 260개의 네이팜탄을 투하하여 무더기로 살상하였다.
견딜 수 없었던 인민군은 대량의 무기와 장비를 버리고 패주했다.
큰 승리였다.

9월 18일, 미군은 유어면 부곡리 등지에서 의령군으로 도강을 개시하게 되었는데 고곡지구의 시남리와 월하리 등지의 201고지를 중심으로 한 인민군의 저항은 아직도 심했다.
미 2사단 9연대와 23연대 등이 이곳의 적을 소탕하여 아군의 낙동강 도하를 가능하게 하였다.

9월 20일 아침에 23연대 3대대는 월평 들붓나루에서 공격단정(攻擊短艇)으로 도하했고, 23연대 1대대는 이날 오후에, 2대대도 그후 강을 건너 의령군 신반리 쪽으로 추격하면서 백병전을 벌리며 진격하여 의령군 신반을 수복하였다.

이때에야 우리 남지면 지역은 인민군의 위협이 없는 지역이 되었으며 패잔병의 소탕은 상당한 시일이 걸려 경찰이 10월 4일에야 치안을 맡으러 오게 되었다.

 

4) 피해상황과 복구

(1) 피난생활

8월 11일 오후에 피란을 떠났던 남지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남지철교를 넘어서 칠서면 쪽으로 갔는데 주류는 칠서면 이룡-덕촌을 거쳐 창원 대산을 지나 김해 쪽으로 도보로 피란을 했다.
또 일부는 칠원 쪽으로 빠져 며칠간 칠원에서 머물다가 중리에서 열차를 타고 김해 생림면까지 갔다.
고곡지구 주민들은 두곡고개-장마-도천-길곡에서 머물다가 밀양 김해쪽으로 갔다.
8월 11일 오후 덕촌나루까지 허겁지겁 피란을 갔던 남지 사람들은 덕촌나루 백사장과 들판에서 하룻밤을 지샜는데 밤에 교전 상황을 직접 눈으로 보기도 하였다고 한다.

피란민 수용소는 대체로 학교 교사나 운동장이었다.
먼저 도착한 주민들은 학교 교실에 짐을 풀었으나 그 외는 운동장에 지은 임시 수용시설에 수용되었는데 운동장에 지은 집은 긴 장목(長木)으로 [人]자 형으로 걸치고 그 위에 짚으로 이엉을 만들어 이은 길이 수 십미터짜리 긴 집이었다.
1개 동에 수 십 세대가 양편에 나뉘어 비좁게 수용되었다.
잠자리는 그렇게 해결되었으며 운동장 가에 솥이나 냄비를 걸고 취사했으며, 연료는 인근 야산에 가서 땔나무를 채취해 와야 했다.

식량은 가져 온 것은 극히 소량이었으므로 곧 떨어져 버렸고 그후 정부에서 주는 소량의 구호미에 의존하여야 했다.
그러나 구호양곡마저 제 날짜에 나오지 않았고 식구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으므로 인근 민가에 밥을 얻으러 나가는 일도 있었다.

남지 사람들뿐만 아니라 함안 의령 등지의 여러 곳에서 모여 든 피란민들이었으나 수용소 생활은 자치 능력을 발휘 운영되었다.
그러나 전염병이 돌아서 특히 아이들은 이질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많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다급한 전선 사정으로 징병을 위해 밤중에 수용소를 수색하여 청년들을 찾기도 하였는데 용감하게 애국심에 불타 자진 입대하는 청년들도 있었으나 징집을 피하기 위하여 산야에 은신하거나 피신하는 사례도 있었다 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전황을 소문으로만 들었지 라디오 방송을 청취하거나 신문을 구독하지 못하여 정보의 전달은 상당히 늦었다.
그래서 고향으로의 귀향령이 내렸음에도 그것을 모르고 10여일 이나 늦게 수용소를 떠나 남지로 돌아온 사람들이 많았다.

추석은 피란지 수용소에서 지냈는데 제대로 제수를 준비했을 리가 만무하였으니 조상을 섬기는데도 어려움이 많았던 것이다.

귀환령이 내리자 모두들 거지 생활 같은 피란지의 생활을 걷어치우고 짐을 꾸려 고향으로 돌아 왔다.
이때가 1950년 10월 23일 전후였다.
교통 사정이 안 좋아 대부분 도보로 김해에서 돌아 와야 했다.
피란과 아울러 눈물겨운 이야기가 전해 오기도 한다.
당시 면장은 정대수 면장이었는데 8월 11일 주민들이 피란을 나갈 때 가장 최후까지 남아서 주민들을 소개시키고 나서야 마지막으로 철교를 건넜다고 한다.
이때 면사무소에 게양되어 있던 태극기와 면장 직인을 품에 안고 떠났다고 한다.
가족들은 피란 생활 중 그 사실도 몰랐는데 피란지에서 돌아 와 옷을 벗는데 품에서 태극기가 나왔다고 한다.
면사무소 직원들의 월급은 귀환 후 한꺼번에 3개월치를 받았다고 한다.

 

(2) 복구와 전후생활(戰後生活)


남지철교를 걸어서 건너 피란을 했던 대부분의 남지 남부지역 사람들이 돌아 올 때는 밀양 길곡 도천쪽으로 온 사람들은 쉽게 귀향을 하였으나 마산 칠원쪽에서 온 사람들은 철교가 폭파되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건너 올 수가 없었다.
칠서면 진동으로 가서 웃개나루의 나룻배를 타고 건넜으며, 고곡지구 사람들은 영산 장마를 거쳐오면서 격전지의 불 타버린 전쟁 잔해들과 가옥들, 방치되어 있는 시체들을 보아야 했다.

피란지에서 돌아와 보니 마을마다 불에 탄 집들이 많았다.
가재 도구와 가축들의 피해 또한 엄청났다.
읍내 전체 피해에 대한 자료가 없지만 마을 전체가 불타버린 곳이 여러 곳이 있었다.
신전리와 격전이 치열했던 고곡 두곡 수개 시남 등지의 가옥은 마을 전체가 전소하고 성한 집은 하나도 없었다고 하며 남곡초등학교 건물도 전소하였다.
본동 동쪽 외딴집이 불타버리는 등 남지리에도 피해가 많았는데 다른 마을에 비하면 적은 편이었다.
군내 전체 사망자가 1,179명이었으며, 1,895호가 소실되었으며, 학교 교사도 전화(戰禍)를 당하기도 하였다.

전쟁이 계속되고 군의 작전을 위하여 1950년 겨울에 남지철교 동쪽 강변 은행나무 아래쪽에서 남지 욱개둑과 연결하는 부교를 설치하여 군용으로 잠시 이용되기도 하였으나 민간인은 남지철교의 파손으로 육상 교통이 두절되니 아연 웃개나루가 활기를 띄게 되었다.

웃개나루는 철교의 개설이후 칠서면 진동마을과 이룡 등지의 사람들이 이용하던 한적한 나루였으나 이제는 호황을 맞이하게 되어 이용객이 날이 갈수록 많아졌다.
강 양안에 넓게 도로가 개설되고 자동차를 2∼3대 수송할 수 있는 나룻배가 여러 척 들어와 마산에서 오는 차를 실어 강을 건네주었으므로 차들이 마음대로 대구나 창녕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여객버스는 양쪽 강변에 이르러 승객을 내리게 했며, 서로 강을 건넌 승객을 인계 받아 마산과 창녕으로 되돌아가는 운행 방식을 취했다.

남지철교는 1953년이 되어 복구되었고, 휴전이 이루어지자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은 점차 사라져 다시금 정겨운 농촌의 따사로운 생활로 되돌아 갈 수 있었다.

 

(3) 옛 격전지를 찾아온 미 병사 (美 兵士)

6 25때 우리 읍 아지리 창아지 마을에서 싸우다 팔을 잃은 [러스터(H. R. Luster)]란 미군 병사가 1980년대에 옛 격전지를 찾아와 오랫동안 머물다 간 일이 있다.
그는 6 25때 본대와 떨어져 낙오한 병사로 낙동강변 언덕에 있는 창아지 남호정에 숨어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는데 세월이 오래 흐르고 난 다음 옛날 자기 목숨을 구해 주었던 정자를 찾아오게 된 것이었다.
그는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면 찾아 와 재실에 모신 위패에 분향을 하였다고 한다.
또 한국 이름을 노성도라 짓고 미국 국기, 대검을 정자 문에 걸어 놓고 지냈다.
그는 남곡중학교 영어 강사로 봉사한 일도 있으며 군수도 만나고 문화원에도 다니면서 자기 목숨을 구해준 이 남호정을 문화재로 지정해 달라는 건의도 했다고 한다.

 

 

六. 남지읍 시대

1. 읍 승격과 발전

사진설명  ( 남지읍사무소 )

1) 읍 승격

우리 고장은 1960년대를 맞이하여 그 면모를 달리하여 괄목할 만한 성장과 발전을 하게 되었다.
바로 인구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취학 아동수가 계속 증가하여 학교마다 학생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 영향으로 교실 난을 겪게 되는 등 소도시로서의 규모와 기능을 갖추어야 할 시기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영농방법의 획기적인 개선과 노력으로 양곡이 증산되고 각종 소채류의 집산지로 부각되는 등 우리 고장은 살기 좋고 풍요로운 농촌이 이루어짐에 따라 인근 농촌의 중심 마을로 남지리가 매년 인구와 호수가 불어나고 주택의 건설이 활기를 띄게 되었다.

특히 우리 고장은 벼 보리의 다수확과 함께 수익성이 높은 채소 수박 농사와 농한기를 잘 이용하는 부업으로 가마니와 새끼 꼬기 등 고공품 생산이 성행하고 고부가 가치인 양잠이 발달하고 거기다 오이 고추 등 온실재배가 본격적으로 확대 재배됨에 따라 점차 살기 좋은 고장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당초 웃개는 나루터 마을 이외에 정지걸을 중심으로 한 욱개와 남마, 모래(백암) 등 자연 마을이 있는 남지리로 그 인구도 적어 현청이 있었던 창녕이나 영산에 비하여 발전이 더디었던 곳이었으나 6 25전쟁이후 교통의 요지로 부상함에 따라 급작스럽게 발전하기 시작하여 1951년 남지(웃개 남마)가 본동과 동포동 남포동이란 이름으로, 모래(백암)가 서동이란 이름으로 이장이 있는 마을로 된 이후, 1954년 상남동이 분동(分洞)되고, 1955년에는 서동에서 대신동이 분동되어 남지리는 6개 동의 소도읍이 되었으며, 1961년에서 1962년에는 인구가 2만 명이 넘는 읍의 모습을 갖추며 성장 발전하고 있었다.

이렇게 성장하자 읍 승격을 위한 지방 유지들의 노력과 면장을 위시한 행정기관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국회의원과 관계 요로에 읍의 승격을 강력하게 건의하였는데 이 같은 노력이 반영되어 정부로부터 긍정적인 호응을 얻게되어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7호로 면에서 읍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이때 읍의 인구는 21,593명이었다.

읍으로 승격되던 날 읍민 모두 단합을 과시하고 읍의 발전과 승격을 축하하는 축하 행사가 읍 전역에서 펼쳐졌으며 새로운 도시계획과 시가지 도로 확장, 상수도 시설, 상설시장의 개설, 우시장(牛市場)의 이전 등 여러 가지 읍 발전을 위한 청사진들이 제시되기에 이르렀다.

 

2) 도시계획의 추진

우리 읍의 소재지는 그 면적이 넓으나 도시 가로는 왜정 때 만들어진 그대로 조금도 발전이나 변모없이 여러 해를 보내야 했다.
마구선 국도는 시가지 가운데를 관통하여 흙먼지가 온 시가지에 펄펄 날리고 있음에도 포장이 되지 않은 비포장 상태로 방치되어 건물들이 초라하고 낙후된 모습이었다.
또 읍사무소로 가는 길은 노폭이 좁아 차량의 왕래에 크게 불편하였다.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고 소도시로 정비하기 위해서 먼저 읍의 장기적인 발전 계획과 함께 가로망을 현대적으로 바꾸고 도시 기능을 적절하게 분산 배치하는 도시계획을 수립하여 강력하게 추진하여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창녕군에서는 도시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는데 수립 기간도 상당히 오랜 시일이 걸려 읍이 승격한지 6년 후인 1969년에야 남지읍 도시계획이 건설부의 승인을 거쳐 확정 고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계획만 수립 고시되었을 뿐 구체적인 조치나 세부추진계획의 수립은 지연되어 착수되지 못했다.
막대한 예산이 수반되어야 하나 국고보조금이나 사업비의 예산 염출이 어려워 이 도시계획의 추진은 지지부진 추진되지 못하고 있었다.

1978년에야 구체적인 설계와 세부계획이 수립되고 기존 계획 중 현실에 부적합한 사항들을 수정하여 1978년 5월 1일, 도시계획 일부 변경 및 지적 승인 공고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도로 확장 공사를 위해 동포동 마구선 기로에서 용산리간의 남쪽편 도시계획선이 그어지자 확장 선에 물린 건물은 증 개축이 불가능해져 수년간 방치하여두어 도시미관상 크게 나빠졌으나 예산 미확보로 인하여 확장 공사는 착공도 하지 못하고 1970년대를 넘기게 되었다.

 

3) 홍수와 신남동 탄생

 

사진설명

  ( 수해지를 시찰하러 남지에 온 박정희대통령 )

  2-19 :( 해리콥터에서 내린 박대통령 )

   

   우리 읍은 강 마을이라 자주 큰 홍수를 겪게 되었으며 그 피해도 엄청났다.

1963년 6월에는 보리 수확이 시작되려던 망종 때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오랜 기간 장마로 변하여 수 십일간 비가 그치지 않아 베어서 쌓아놓은 보리에서 싹이 시퍼렇게 돋아나 보리 수확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말았다.
이때는 지금과 달리 예로부터 넘기 어렵다는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이라 보릿대가 젖어 타작을 할 수 없어 그대로 썩이고 말았으니 얼마나 굶주림과 허기에 고생이 많았던가 조금만 나이든 분이면 기억이 생생하리라.
여하튼 장마는 큰 홍수를 부르기 마련이었다.

1965년 7월 23일 전후, 큰 홍수가 있었다. 이때 월하리부터 반포, 칠현은 물론 고곡까지, 남강과 합해지는 용산리부터 학계리 마산리 남지리를 탁류가 휩쓸게 되었는데 그해 7월 24일에 남지리 시가지는 서동 대신리 일부만 남고 수년만에 처음으로 침수되어 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일주일 간 탁류에 잠겼던 가옥들이 성할 리가 없었는데 특히 본동과 남포동은 침수기간이 길어 많은 가옥이 전복 도괴되는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읍 전체 피해 가옥은 220채 였다.
이때 국내외에서 수재민에 대한 구호물자가 대량 답지되어 재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배급되는 등 따뜻한 온정과 구호의 손길이 펼쳐졌다.

 

 

 

 

 2-20 :( 지역 기관장 유지들과 인사하는 박 대통령 )

  2-21, 2-22 :( 수해피해를 보고받는 박대통령(피수대 끝에서, 지금의 남지대교 동편)

당시 박정희대통령이 우리 읍의 수해 피해상황을 살펴보기 위하여 헬리콥터를 타고 순시하러 왔다.
온 읍민들이 다 모여들어 환영을 했는데, 읍이 생긴 이후 우리 나라 최고위 귀빈을 맞는 것이라 대통령 환영 인파가 순시 연도에 수천 명이 도열 운집하였다.
대통령은 그때 남지공설 운동장으로 사용하던 남지리 758번지에 내려 승용차로 읍사무소 앞을 지나 동포동 마구선 국도를 경유하여 본동 끝의 제방에서 낙동강을 바라보며 수해 피해상황을 관계관들로부터 보고를 받고 수해민들에게 적극적인 복구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길가에 도열했던 읍민들은 처음으로 가까이 대통령의 얼굴을 바라 볼 수 있는 일생일대의 호기라 생각하고 한 걸음 더 다가가 박수를 하고 악수를 하기도 했다.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린 대통령도 웃으며 손을 흔들어 답례를 보냈다.

수해를 입어 무너져 내린 가옥이 남지리 일대에 60여 가구가 넘었는데 대통령이 내렸던 공설운동장 부지를 이들에게 제공하여 시멘트블록으로 벽을 쌓고 그때 최신의 지붕자재로 인기가 높았던 슬레이트를 인 똑같은 건평과 형태의 집을 수재민 의연금과 정부의 지원금으로 신축하게 되었다.
1965년 9월 20일에 착공하여 12월 23일 준공하였으며 수해지구에서 대부분 옮겨와 입주하였다.

이때 피해를 입은 가구 중 이곳에 건축을 하지 않은 이도 있어 이곳에 신축된 가옥은 54동으로 54가구가 이주 정착하게 되었다.
새마을의 총 동수는 65동이며 총공사비 11,869,450원이었다.

새 동네의 준공식은 화려했으며, 당일 전면 [사랑의 마을]이라 조각되고 새마을의 탄생 내력을 적은 [신남동수해복구기념비]의 제막도 있었고, 잔치가 벌어져 남지 소재지는 축하 분위기에 휩싸였다.
남지의 새마을이라 하여 동명을 신남동(新南洞)이라 명명되었다.

1969년에도 홍수가 있었는데 그해 9월 17일 마침 추석명절 직전이라 대목장을 보러 왔던 사람들 100여명이 탄 나룻배(3톤급)가 의령군 부림면을 향해 오후 3시경에 출발하여 마을로 돌아가려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남지철교 바로 위에서 수숫대에 엔진이 걸려 멈추어 서는 기관 고장이 일어나 순식간에 격류 속으로 떠밀렸다.
거센 물살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배가 떠내려가면서 철교 교각을 들이받고 침몰되자 배에 탔던 사람들이 뒤엉켜 강가로 헤어 나오지 못하고 80여명이 몰사하는 큰 사고가 있었다.
이때 창아지 마을 인근 주민들과 의령군 부림면 지정면 사람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4) 상수도 시설

1963년경 남지 일대 주민들은 대부분 식수로 우물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낙동강 강물이 지금과 달리 수질이 좋고 깨끗하였을 때는 남포동이나 본동의 강변 가까운 지대의 마을 사람들은 새벽에 강물을 길어다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점점 강물의 수질이 나빠지고 집집마다 우물을 파기 시작하자 자연이 강물의 사용은 줄어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포동이나 본동은 강과 가까워서 지하수가 아주 깊이 있어 심층 굴착을 하여야 하거나 물이 나와도 짜거나 수질이 불량하여 식수로 사용하기에 부적합하였으며 동포동 일부에서는 철분이 다량 함유되어 수질이 좋지 않았다.
또 여러 지역의 우물물의 수질이 해마다 그 질이 떨어지고 비위생적인 관리와 여러 가지 공해로 인하여 그냥 생수로 마시기에는 적합치 못하다는 여론이 일어나고 그런 인식이 점점 사람들에게 확산되었다.

남지리는 우물이 귀했다.
본동과 남포동의 경우 수 백호가 살지만 공동 우물은 싸전 시장어구의 우물과 지서 앞에 있는 공동 우물 두 개 뿐이었다.
동포동에는 마산 창녕 장마 삼거리길 곁에 공동 우물이 있었고, 서동에는 면사무소 뒤에 있었다.
새벽이면 물긷는 여인들의 행렬이 줄을 길게 잇고, 여름이면 물이 달려 강 주변 사람들은 아예 강물을 길어 식수로 사용하는 형편이었다.
이것은 남지리 일대 지질이 퇴적 사질토이어서 강물의 영향을 받아 지하수의 수심이 매우 깊어 개인적으로는 우물 하나 파기에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부담이 크기 때문에 개인 집 우물을 파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동포동, 서동 일부에서만 개인 집 우물이 있었으나 지표수에 불과해 점점 수질이 나빠지고 있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상수도의 개설이 요청되고 있었으나 정부의 지원은 큰 도시 위주로 추진되니 상수도 물 마시기가 어려웠다.

1972년 이래서는 안되겠다 하여 주민 자력으로 추진해보자는 열의가 높아져 지방 유지들의 단합으로 강물을 끌어오는 상수도 공사가 추진되게 되었다.
용산리에서 남지리에 이르는 연장 4km 구간에 PVC 송수관을 매설하고 각 가정에 희망을 받아 급수 공사를 시행하였다.
이 주민 자력 사업은 여러 해에 걸쳐 지방민 부담금과 보조금으로 여과지와 양수 시설 등을 완성하는 등 힘껏 추진하였으나 소규모이고 관리비가 많이 소요되어 원하는 가구에 물을 충분히 공급할 수 없었다.
1974년 민간 추진위로부터 이관을 받아 창녕군에서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는데 3,400만원을 투입하여 용산리 취수장에 500톤 규모의 양수기를 설치하고 배수지를 확장하는 등 공사를 하여 12,200명 급수구역내 인구 중 급수 인구를 3,620명으로 확대하고 1일 1인 급수 계획량을 80ℓ로 잡았다.
그러나 당초 공사 때 급수관을 PVC관을 사용 매설하였기 때문에 누수율이 아주 많아 제한 급수가 불가피하였다.
식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70년부터 발벗고 나서서 추진하여 왔던 지방유지 여러분의 공로도 또한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2차로 1980년대 초에 옥산마을 앞 강변에 취수장을 만들고 옥산 앞산에 정수장을 설치하였으나 용수량 부족과 제반시설 미비로 제한 급수를 하다 중단하였다.
그후 1986년에야 마산광역상수도의 수돗물을 공급받게 되었다.


2. 시설 영농과 새마을 운동

1) 시설 영농의 확산

우리 고장은 정통적인 농촌이었으나 보리와 나락만의 주식 위주의 영농 형태로는 가난을 탈피할 수 없다는 인식이 일찍이 높아졌다.
낙동강변의 모래밭과 퇴적물로 이루어진 기름진 들판을 가진 반포들과 용산 학계리, 남포 본동으로 이어지는 밭에서는 60년대 이후 서서히 소채원예가 자리 잡기 시작해 땅콩 유월태 콩 참깨 잡곡 위주에서 수박 참외 배추 무 고추 등 소채류 재배로 작목이나 영농형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산지(山地)를 개간하여 상전(桑田)도 조성되고 복숭아와 매실 자두 밤나무를 심는 과수원도 조성되었다.

고급 기술화하는 영농 기술이 처음 보급되기는 오이 노지재배(露地栽培) 기술을 학계리 농민 2명(강도영, 차진호)이 1954년에 중앙종묘사에 가서 배워 온 것이 시초라 한다.
이들은 그해 4월 초순에 오이를 파종하고 5월 중순에 정식 하였는데, 기름종이{油紙}를 바른 목제 창틀을 이용하여 이 고장 최초로 묘를 길러 촉성 오이, 도마도를 기르는 시설 영농의 길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1957년 봄에 한 농민(이상범:일명 학용, 용산리 거주)이 폭 180cm, 20평 크기의 터널재배를 옥산에서 시도하였다.
지금 보면 너무나 원시적이고 규모가 작은 온실이었으나 그때는 성공이 어려운 모험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이듬해, 지난해의 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6명(정성만 김성덕 차진호 권기성 이학용 외 1명)이 기름종이로 740평의 온실을 건립하게 되었다.
이때 축적된 기술을 크게 활용하여 온실 건립을 확대하는 한편 오이 재배도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현대적 시설 영농형태에 한발자국 다가들었으며, 그 해 가을에는 최초로 비닐 문짝을 붙인 온실을 짓고 화목 난로를 이용하여 가열하는 시설로 발전하게 되었다.

1959년에는 군용 난로에 경유를 사용하는 방법이 도입되어 거의 현대적인 형태의 촉성재배가 시작되었는데, 이 해 옥산마을의 권기성(1920년생)의 경우 3월 10일에 파종하였다하니 그 당시의 기술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른 시기의 파종이었다.
60평의 온실을 짓고 오이를 심었다.
58∼59년 2회 재배하였는데 당시 오이 한 가방을 따서 부산 청과조합에 가져가면 돌아 올 때는 돈을 한 가방 가득 가져 왔다고 한다.
그 수익금으로 생활비로 쓰고도 논 3,600평과 복숭아 과수원(成園) 1,800평을 매입할 수 있었다 한다.

1960년에는 학계리 주변에 약 20여명, 면적은 2,000여 평으로 늘어났으며, 1961년에는 35명에 3,500여 평으로 그 규모나 재배 호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촉성 고추, 억제 오이, 봄오이 등 한해에 여러 번 수확할 수 있는 재배 기술도 개발되었고, 풋고추 재배의 경우 그 수확량이 눈에 띄게 배가되었다.

1968년경에는 본 포장(本圃場)에 짚 쌀겨 퇴비 등 양열물(釀熱物)을 밟아 넣던 것을 넣지 않고 완전히 미답압(未踏壓) 방식으로 지금 현재와 유사한 형태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온실을 완전 가열 의존재배로 그 기술이 발전되었던 것이다.

1970년대에 들어와 목조 온실을 바꾸려는 창녕군의 방침에 따라 농특사업(農特事業)으로 추진되면서 철제 온실이 보급되었다.
목조 온실은 매년 관리 유지하는데 경비가 많이 들고 천장이 낮아 채광이나 보온에 문제가 많다고 중앙의 기술진이 지적함에 따라 천장이 높고 대규모인 철제 온실을 보급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철제 온실의 구조상 여러 문제점이 노출되고 우리 지역의 기후에 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가격 또한 비싸 농가에 부채만 떠 안기므로 많이 보급되지 못하고 말았다.

1973년에 연작 피해를 줄이려는 연구의 결과로 박 모종에 오이를 접붙이는 오이 접목 방법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오이 접목 재배는 연작으로 인한 병충해 피해를 크게 줄임에 따라 온실을 몇 해만에 다른 자리로 이동하던 것을 상당기간 연장할 수 있게 되었다.

 

2) 새마을운동의 전개

"잘 살아 보세" "하면 된다"는 잘 살아보자는 운동, 오 천년 묵은 때를 벗어나자는 운동, 새마을 운동이 가난이라는 묵은 때를 벗고 자조 자립 협동 정신으로 잘 살아보자는 박정희 대통령의 주창으로 전국 마을 마을마다 1970년대에 전개되었다.
1971년, 처음으로 새마을 가꾸기 사업이 우리 읍 38개 동리 마을마다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시멘트 335포씩을 정부에서 지원해 주면서 마을 안길 넓히기, 지붕개량, 변소개량, 마을회관이나 마을 공동 창고 짓기 등의 그 마을 아주 기초적이며 바탕이 되는 사업부터 마을 자력으로 추진하여 이루어 보라는 자력 갱생의 운동이었다.
첫해 읍 직원들이 마을마다 담당직원으로 지명되고 주도적인 자세로 동민을 설득 사업 추진을 맡게 되었으며, 사업 추진의 주체로 이장과 함께 마을개발위원회에서 새마을 운동을 주도할 새마을 지도자를 뽑아 사업의 주관과 세부 계획 수립, 추진 등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정부에서 시멘트와 철근 이외의 모든 것은 주민 스스로 조달하였는데 모래를 냇가에서 실어오고, 마을 안길을 넓히거나 농로 확장을 위해 무상으로 토지를 내어놓았다.
마을이 생기고 나서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들이 주민 자력으로 착착 이루어 졌다.
자력으로 폭이 좁은 농로와 마을 안길을 소달구지와 경운기, 차가 다닐 수 있도록 언덕을 손질하고 돌담을 뜯고서 라도 4m∼6m 정도 넓이로 확장하였으며, 다리가 없어 건너다니기에 불편했던 냇가에는 소교량을 설치하고 구불구불하였던 소하천도 석축을 쌓아 바르게 정비하였다.
또 공동이용시설들도 만들었는데 마을 회관을 비롯하여 마을 창고, 공동 우물, 공동 빨래터, 공동 퇴비장 등을 만들었으며, 회관에는 마을문고를 비치하고 책을 읽게 하였으며, 새마을 금고도 설치하도록 하여 저축도 유도하였다.

복지 환경 시설도 많이 설치하였는데 주로 하수구를 많이 만들었고, 마을 주변에 나무를 많이 심게 하였다.
특히 각 가정의 생활개선으로 위생적인 화장실 개수, 절미저축운동, 부엌 개량, 집안 청소에 이르기까지 읍 직원과 이장 새마을지도자(남 여) 개발위원 등이 혼연일체가 되어 수 천년 묵은 생활 관습들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1972년부터는 지붕개량 사업, 주택개량 사업이 추진되면서 자립마을 육성에 박차를 가하였다.

여러 가지 지원사업이 수년간에 걸쳐 새마을 사업으로 추진된 결과 우리 읍은 잘 사는 고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지읍 소재지 마구선 국도 변의 시가지도 소도시 가꾸기 사업의 추진으로 남지지서 앞에서 철교에 이르는 도로가 확장되고 길가의 불량주택들이 개축 개수되고 인도(人道) 개설과 가드레일이 가설되어 완전히 소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3. 현대화하는 우리 읍

1) 이농과 핵가족화의 심화

인구가 증가하고 발전됨에 따라 1963년에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70년대에 새마을 사업의 추진으로 우리 읍은 여러 가지로 그 모습도 달라지고 읍민의 의식도 잘살아 보아야겠다는 의식 변혁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영농 방법도 고수익 작물을 선택하여 재배하고 주택도 점점 현대식 구조로 개축하는 등 여러 면에서 현대적인 의식이 나타났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농업위주에서 상공업으로 바뀌어지면서 이농 현상이 두드러져 많은 인구가 도시로 이주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 읍의 인구도 1960년대 보다 점차 감소하게 되었던 것이다.

읍 승격 당시 인구가 2만 명을 넘어서 1964년도의 인구는 남자 11,025명 여자 10,877명 계 21,902명으로 인구 조사이후 최고 인구수였다. 그러나 점점 감소되어 1970년에는 겨우 2만 명이 넘어서는 20,357명이었고, 10년이 경과한 1980년에는 17,324명으로 10년 사이에 3,033명이 줄어 든 것이다. 그러나 세대수는 핵가족화 현상의 반영으로 줄어들지 않고 1971년 3,529가구이었던 것이 1980년에는 3,788가구로 오히려 259가구가 증가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다시 10년 후인 1990년의 인구 조사를 보면 더욱 이농 현상과 도시 집중으로 인한 이주 현상이 대폭 증대되어 1990년에는 남자 6,171명 여자 6,511명 계 12,682명으로 10년 전인 1980년보다는 4,642명이 감소하였고 가장 인구가 많았던 1964년에 비하면 무려 9,220명이나 줄어들었다. 즉 26년 사이에 인구가 1만 여명이 인근 도시나 타지로 전출한 것으로 나타나며 인구 증가율을 감안한다면 산업 구조 또한 농업에서 상공업이나 기타 2, 3차 산업으로 이동된 계층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날에는 한 집에 2대 3대가 모여 살아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들과 손자 등 4대가 흔히 한솥밥을 먹고살았다. 그러나 점차 현대화의 과정에서 가장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출산율의 저하와 함께 핵가족화 경향이 뚜렷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인구는 30년 전에 비하여 만 명이나 감소하였으면서도 세대수는 크게 증가하여 그 인구수가 비슷한 해였던 1945년(인구수 14,078명)에 2,561세대였던데 비해 1995년(인구수 13,115명)에는 그 배가 불어난 4,076세대이다. 세대당의 인구수도 전에는 5.7명이었으나 지금은 3.4명으로 감소되었다.

핵가족화에 따라 단출한 가족끼리 살아 생활비도 절감되고 부부만의 만족한 생활을 기대할 수 있게 된 반면 대가족 거주 전통이 사라지면서 효 사상이 퇴색하는 등 각종 사회적 문제점도 노출되고 있고 자녀 교육에도 개인적인 성향이 뚜렷이 나타나는 등 가정 교육에도 어려움이 많다.

인구 감소 현상은 교육계에도 영향을 미쳐 우리 읍 관내에 7개교의 초등학교가 학생수 감소로 인하여 성사국민학교가 폐교되었으며 반포국민학교와 월상국민학교가 각각 남지초등학교 분교로 격하되었다가 1999학년도에 폐교되었다. 중등교육에도 영향이 커 학급수와 학생수가 계속 감소하고 있다. 또 고곡지구에도 인구의 감소로 인하여 군 행정 당국의 구조조정에 휘말려 1998년 9월에 고곡출장소가 폐지되고 고곡지구민원연락실이 설치되는 등 변화를 겪었다.

또 세대수의 증가는 주택 부족 현상을 야기하는데 남지리에 그 동안 아파트가 건립되어 많은 세대가 입주하고 있으나 세입자도 또한 많아 앞으로 주택의 보급도 요망되고 있다.

 

2) 고속도로와 하천부지


 사진설명 ( 고속도로 남지 입구 )

현대에 들어 가장 두드러진 발전상의 하나는 고속도로가 우리 읍을 통과하게 되면서 음양으로 읍의 현대화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1977년 고속도로가 개통될 당시 우리 읍의 통과 구간 도로 연장은 1.9km로 진입로가 만들어 진 것이다. 또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가설되어 남지철교에 이은 제2의 교량이 되었을 때 읍민들은 자랑과 기쁨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이 낙동강대교는 함안군 칠서면에서 남지리 본동 입구와 연결되었는데 문제는 교각의 방향이 남지 쪽으로 비뚤어지게 설치되었다는 점이었다.

교각이 [V]자 형으로 보기에 아주 좋은 형태여서 한국에서 가장 보기 좋은 다리로 각광을 받기도 하였는데 교량의 길이는 680m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평소 남지 쪽에 아주 넓은 하천부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이 하천부지는 본동에서 도천면 송진리 앞까지 이어지면서 수박과 배추 무, 감자와 콩을 심어 큰 소득을 올리고 있었는데 이 들판이 해마다 홍수가 들자 점차 땅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원인은 수년간에 걸친 관찰 결과 고속도로 교각의 방향이 남지 쪽으로 치우쳐 강물이 교각을 지나면서 그 방향이 바뀌어 강의 북쪽 땅을 파내어 남쪽으로 덮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되어 남지쪽 수 만평의 하천부지가 해마다 강물 속으로 뜯어져 나가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다. 1985년 이후 이러한 문제점이 신문지상에 보도되면서 민원이 발생하였다.

이 문제점은 결국 1992년 경 4차선 고속도로가 착공되면서 기존 교량 옆에 철제빔으로 된 새 교량이 가설되고 또 낙동강대교의 V자형 교각을 철거하고 새로 교각과 다리를 건설하는 것으로 해결되어 1995년 말에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새로운 다리로 개선되었다.

4차선 고속도로 확장 시에 우리 읍과 연결되는 인터체인지 건설이 당초 계획에 빠져 있었는데 여러 지방 유지들과 읍장을 비롯한 기관 단체장들이 강력하게 상부 기관과 국회의원, 고속도로공사 등에 건의 탄원하는 노력 결과 진입로를 갖추도록 성사시켰다. 만약 우리 읍 관내에 진입로가 건설되지 않았다면 멀리 까지 돌아서 고속도로에 진입하는 불편을 겪을 뿐만 아니라 소외된 지역이 되어 읍의 발전에도 큰 영향이 미쳤을 것이다.


3) 영농 현대화와 농협의 발전

 사진설명  ( 남지농협 )

우리 읍은 오래 전부터 영농의 기술 도입이 타 지역보다 한 발 앞섰다고 앞에서 기술한바 있는데 1980년대에 들어서 더욱 영농의 현대화와 함께 또 하나 기억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농협(단위농업협동조합)의 꾸준한 발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82년 자료에 의하면 우리 읍의 시설소채재배 농가는 323호에 이르러 농민에 의한 농협의 역할이 높이 요청되고 있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우리 읍에 기존 농협지소가 있었으나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고 단지 정부의 방침에 따라 농민에게 농자금을 융자해 주는 소극적 대처만을 해 왔으므로 농민에 의한 농협의 탄생이 바람직하였다. 이런 여건을 가지고 남지단위농업협동조합이 출발하였고 그 전에 원예협동조합이 있었음에도 소규모임에 비추어 그와는 달리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1981년 1월 1일을 기하여 단위농협은 연합 조직으로부터 탈법인화 하여 독립성을 갖게 되었고 기존의 농협은 중앙회의 지부로 개편되는 등 변화가 왔다. 즉 이름뿐이었던 단위농협이 명실상부한 조합으로 다시 태어나고 지역성에 알맞은 사업을 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남지농협은 우리 읍이 오이 고추 등을 생산하지만 서울이나 부산등 대단위 중간 상인 또는 도시 청과조합에서 제 값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착안하여 작목반을 구성하고 공동 출하토록 하였다. 이어 남지지구 고등소채 공판장을 개설하게 되는데 조합원들의 큰 호응으로 재배 농가는 394호에 이르렀으며 1982년도에는 작목반은 10개 이동에 9개 고등소채 작목반이 있었다.

 사진설명  ( 고곡소재 남지농협 )

80년에서 81년도에 공판 실적을 보면 80년에 가을오이 1,072톤에 31억이었지만 81년도에는 봄풋고추, 봄오이, 가을오이 등 1,209톤에 10억 원이 넘어서기도 하였다. 당시 남지농협에서는 출하 조합원에 대하여 출하수수료 및 제 비용을 7천만 원 절감 효과가 있었으며, 공판장 취급으로 인하여 타지에 출하하지 않음으로 가격 농간을 억제하였으며 1억여원 이상의 이익 등이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영농 형태도 기계화가 가속도가 붙어 소를 이용 경운 하는 농가는 이제 거의 없고 대부분 경운기로 운반 경운 등을 하고 있으며 생산 농산물의 운반을 위해 소형 트럭을 갖춘 농가도 늘어나고 있다.

 

 

 

 

4) 5일장 (5日場)의 쇠퇴


욱개장은 조선 중기 때부터 장이 서기 시작하여 낙동강을 낀 나루터라는 이점과 나루터에서 출발하는 내륙지방으로의 통로라는 이점 때문에 점점 5일장이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흐름에 따라 기복이 생겨 최근 교통이 편리해지고 상권 형성이 도시 중심으로 편성됨에 따라 5일장은 전국적으로 쇠퇴하는 시기를 맞이하였다. 우리 읍에도 이러한 영향으로 점점 시장에 모이는 장꾼의 수효도 줄어들고 상인들의 도래도 적어져 지금은 예전과 달리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우시장은 과거 인근의 여러 시장 중에서 가장 규모도 컸고 소 돼지 닭 개 토끼 등 많은 가축이 출하되고 매매되었는데 최근 소 돼지 사육 농가가 급격히 감소하고 또 기업 축산 농가가 증가함에 따라 우시장이 크게 위축되어 소 돼지의 출하가 감소하였다. 1992년 하는 수 없이 남지 우시장을 철시하게 되었고 창녕 우시장에 통합하는 형편이 되어 지금 구 우시장 자리는 과수원으로 조성되고 말았다.

현재 남지시장은 2일, 7일에 장이 서는데 대지 면적은 4,901m2이며, 점포 수는 20개로 그 건축 면적은 353m2인데 도시로 공산물이나 수산물을 구입하러 나가는 추세가 많이 나타나고, 여러 가지 물건을 실은 자동차가 마을을 순회하며 판매하는 상인이 많아지고 또 상설시장은 아니지만 소채 반찬류 부식가게가 매일 문을 열고 있기 때문에 5일장은 호황을 누리던 예전 경기를 되찾기에는 힘겨운 실정이다.



4.읍 발전상 이모저모

1) 도시계획 추진

도시계획은 1973년 5월 1일 일부변경 지적 승인 공고가 있었으나 그 실제적인 추진은 미미하였다. 막대한 예산의 투입이 있어야 하는데 정부의 지원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큰 원인이기도 하였지만 막상 사업이 추진되자 개인의 이익을 앞세운 제몫을 많이 찾기 위한 지연 공세도 거세어 읍 행정당국에서도 사업 추진에 많은 고초가 뒤따랐다.

1988년경 동포동에서 대신동 네거리에 이르러는 남지 시가지 중심도로의 확장포장공사가 시작되었다. 도로의 남쪽편의 건물을 철거하고 확장하는 공사였는데 조금씩 진척되자 읍의 모습이 확실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 간선도로 확장공사는 대신동 네거리까지 확장되는 동안 서동 중간에서 가옥 철거 때문에 상당기간 중단되어 있었다가 1995년도에 재개되어 마무리되었다.

또한 이 도로의 연장선이 용산리까지의 포장 공사도 진행되어 먼저 인가가 있는 학계리 구간이 포장되었으며 그후 용산리 창날마을 앞까지 포장이 완료되었다.

남지리 서동과 마산리 홍포동 마을 사이의 낮은 논밭을 메워 돋우고 매립한 후 주거공간으로 구획하는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수 년 전에 발주되어 인근 농토 소유자와 홍포 마을 일부를 포함하는 주택단지 조성공사가 추진되고 있는데 준공단계에 있어 많은 아파트와 주택이 들어서고 있다. 이 사업은 1979년 11월 16일, 함안군의 칠서공단 설치계획이 지정, 구체화되면서 공단 배후도시로 우리 읍이 크게 발전될 것이라고 예상하고서 1980년대 후반기부터 도시계획상 상업지구인 이 일대의 논밭을 외지인들이 매입하는 부동산 투기바람이 불었으며 이어 9만여 평에 달하는 구획정리 사업이 정식 발주되어 1992년경 매립을 시작하여 1994년 편입 토지에 대한 보상금 지급 등 관계되는 과정이 마무리되고 있는 중이다.

 

2) 신남지교(新南旨橋) 개통과 도로 포장


 사진설명 ( 남지 우회도로 )

또 마구선 국도의 포장도 연차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남포동에서 동포동에 이르러는 시가지 통과 구간부터 포장하기 시작하여 1977년 구마고속도로가 개통될 때 동포동에서 고속도로 진입로까지, 그후 남포동 외곽에서 남지철교까지 각각 시차를 두고 포장되었다.

비포장 도로로 여전히 남아 있었던 고속도로 진입로에서 남송교까지의 도로 포장은 마구선 확포장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이 확장 포장공사는 1980년대 초에 완공되어 우리 읍의 통과 5호선 국도의 포장은 너무나 더디게 마무리되었던 것이다.

마구선의 확장 공사와 함께 추진된 것이 남지 시가지 우회도로 개설이었다. 국도가 남지 시가지를 통과하게 됨에 따라 먼지와 진동이 심하고 소음이 커서 주민 생활에 불편이 가중되고 또 가설한지 오래되는 남지철교가 노후화 되어 버스나 트럭 중기 등의 통과가 불가능하게 되어 새로운 교량의 건설이 요청되었던 것이다.

칠서면 진동 쪽의 작은 제왕담에서 본동 마을 끝으로 연결되면서 남지리 206번지 지점을 통과하는 남지대교는 1989년 가을에 착공되어 1994년에 완공 개통되어 칠서면 이룡리간의 교통도 편리해 졌다. 동시에 어느 해 홍수로 나룻배가 유실되고 난 다음부터 끊어져 불편했던 강 건너 마을과의 교통도 훨씬 원활해 졌다.

1996년 8월 시가지로 연결되는 진입도로 110m 개설 공사가 착공되어 12월에 완공되었으며 입구에서 홍포동 쪽으로 연결되는 우회도로 공사가 현재(1999년)진행중으로 남지대교 입구는 5거리가 될 것이다.

남지철교는 차량의 운행을 전면 중지시키고 있다가 1995년도에 교량 난간 교체 및 바닥 재포장, 도색 등 크게 수리하여 1996년도에 소형 차량만 운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우리 읍에는 지방도로가 여러 곳에 있다. 먼저 월하리 월상에서 영산으로 나가는 지방도가 있는데 1993년부터 확장 포장공사가 고곡리 두곡마을 입구에서부터 시작되어 칠현리까지 진행되었으며 나머지 구간은 99년 말까지 완공 개통될 것이다. 남지리 동포동에서 성사리를 거쳐 고곡리에 이르러는 지방도와 용산리에서 읍사무소에 이르는 길은 확장 포장공사가 추진되어 수년만에 완결되었다. 또 마을과 마을을 잇는 도로들도 대부분 포장되었으나 다만 칠현리에서 낙동강변을 따라 용산리에 이르는 도로는 칠현 - 영아지간 외에는 미포장 상태로 남아 있는데 1999년 말에 완전 포장될 것이다.


3) 해결된 상수도

용산리의 상수도 시설의 대체시설로 1979년 학계리 옥산마을 뒷산에다 정수장을 만들기 시작하여 1983년 경 완공하였다. 이 시설은 옥산 마을 앞 강변 모래사장에 집수정을 만들고 취수를 하였는데 용수량의 부족과 여러 여건이 미비하여 결국 제한 급수를 하였으나 오래 사용하지도 못하고 중단하였다.

그 즈음 강 건너 칠서면 계내리에 마산시에서 마산광역 상수도 시설을 완공하게 되자 그곳에서 정수 처리된 물을 공급받도록 하자는 계획의 추진으로 창녕군과 마산시 사이에 협의가 이루어지게 되어 10여 년간의 숙원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군비 교부금 1억 3천만원을 받아 시설하여 칠서정수장으로부터 인수(引水)하는 시설을 완료하게 되었다.

계내리 정수장에서 남지철교를 거치게 되는데 송수관을 철교 난간 아래 교각 부위에 매달아 남지 소재지 일원에 위생적인 수돗물을 공급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상수도 시설임에도 용량이 작은 용수관으로 인한 공급 부족으로 충분한 용수량을 확보하지 못해 추가 설치 가정에 다 급수를 못하는 애로가 있기도 하였다. 현재 급수 인구는 읍 전체 인구의 37.5%인 5,170명이며 1일 1인당 급수량은 226ℓ로 하루 급수량은 1,167m3에 이르고 있다.

 

4) 낙동강 연안 개발사업 추진

낙동강 연안 개발사업이 건설부의 계획대로 추진되기 시작하여 낙동강 상류로부터 제방 축조공사가 시작되었다. 남지리 시가지 일부인 본동과 남포동의 상당한 부분이 800m의 하폭(河幅) 확보 계획에 의거 하천부지로 편입되어 주민들이 퇴거하고 가옥은 철거 대상이 된다는 소식에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으며, 다른 지역에서도 농토의 하천부지 편입과 높은 제방의 필요성에 관한 찬반 여론이 있어 사업 추진이 지지부진했다. 그러나 월하리- 대곡리 일부분, 용산리-옥산리 일부분은 제방이 축조되었다.

1998년 8월, 홍수 범람 때 위험수위 10m를 넘은 10.5m에 이르러 반포들을 비롯한 여러 지역이 침수됨에 따라 안동댐을 비롯한 여러 댐이 있더라도 제방을 높이 쌓아야 할 필요성이 다시 제기되었다.



5. 남지읍의 미래상

 


사진설명

   ( 건물과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있는 구획정리지구 )

도시계획 면적은 9.9km2로 읍사무소에 이르는 중앙로의 확장과 포장 사업이 대체적으로 마무리되면서 도시계획에 따른 사업 추진이 점차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시가(市街) 모습이 크게 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읍민의 식수문제 역시 마산 광역 상수원에서 수돗물을 공급받게 되어 가장 위생적인 물을 사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도시와 다름없는 생활이 가능할 것이다.

특히 칠서공단의 조성이 거의 마무리됨으로써 기업체가 입주되면 한층 남지읍은 위성도시로 변모됨은 물론 앞으로 발전의 전망이 밝아지고 있다. 또한 고곡지역의 동맥인 월하리-박진에 건설되고 있는(현재 동정 99%) 박진교와 지방도 1008호선의 확 포장(포장공사 추진)공사가 완공되면 의령에서 고속도로로 연결되는 중요한 길목이 되므로 고곡지구의 발전 또한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1987년도에 건립된 6 25 전적비를 더욱 가꾸어 당시의 격적지 현장을 역사 교육장(유물전시장 등)으로 활용하도록 계획하고 있는데 지금도 수많은 국군 장병들이 견학 방문하고 있다.

남지농협도 타 지역보다 경영이 탁월하여 도내에서도 이름나 있는 농협으로 성장해오면서 본 고장의 특산물(비닐하우스 재배)의 판로 개척(공판장 등) 등으로 소득증대에 큰 역할을 함으로써 남지 발전에 기여하고있다.

그러나 지금은 국제화, 세계화로 가는 현시점에서 우리 남지읍민은 이를 만족할 수 없다. 남지읍의 개발과 발전을 위해 새로운 비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우선 칠서공단으로 인한 배후도시로의 개발 추진을 구상해야 하고, 그 동안 추진되어 온 남지구획정리사업 8만7천평이 99년 5월 말에 준공을 앞두고 있는바, 주변 환경에 걸 맞는 각종 생활시설 또는 주택이 건립되어야 한다.

이보다 체계적이고 기본을 갖춘 도시계획을 입안키 위해 본군에서는 3억의 용역비로 남지읍 전경을 항공 촬영토록 계획하고 있다.

또한 본 읍은 현재 기반시설이 원만하지 못하다. 22km의 낙동강을 끼고 있어 여름철마다 비가 오면 강 수위의 상승과 많은 강우시에는 물난리를 만나 가옥과 농경지가 피해를 입어 주민들이 시름을 갖게 된다. 무엇보다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업은 기존 하수구의 재정비이다. 강의 수위가 높아지면 강물이 하수구를 통하여 읍 시가지로 역류돼 온다. 이로 인한 피해가 더욱 커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98년 1월에 낙동강수계사업(강물 살리기 사업)으로 시행되고있는 남지하수(분뇨 연계처리)종말처리장 공사가 사업비 200억원을 투자하여 1일 오수(汚水) 5,200톤 처리될 것이며, 이에 수반되는 차집관로 5km가 명지에서 읍시가지 내를 경유하도록 매설하는데 2001년도에 준공될 예정이다. 그러면 그간 생활오수가 낙동강으로 마구 흘러 들어갔는데 그것을 전부 차단될 것이다.

이에 보조를 같이하여 사업비 30억원을 투자하여 많은 강우시 우수처리계획을 수립 내수(內水)로 인한 피해를 최소한 줄여보자는 대안이다.

그 다음은 낙동강 치수사업의 추진이다.

1999년 2월부터 착공되는 남지제 축조는 길이 1.6km, 사업비 170억원을 투자, 제방공사가 추진되고 있으나. 일부 잔여 구간 1.6km(본동리 남포리)는 주민 491세대(건물 783동)의 이주 대책 등 많은 예산(약 1천억원 정도)이 소요되므로 현재까지 뚜렷한 추진계획이 없어 지역민의 마음을 애태우고 있는 실정에 놓여 있으나, 다소 희망을 갖고 중앙요로 등에 계속 건의 호소하고 있다.

이러한 큰 현안사업이 이루어지면 우선 정비해야 할 것은 남지시장 문제다.

정기시장은 시대적 변천에 따라 변화가 많았으나 재래시장의 현대적 개발은 너무 미미하다. 인접해 있는 공설운동장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현재 추진되고 있는 제방 축조가 완료되면 하천으로 편입될 조성되는 고수부지를 2∼3만평 정도 확보하여 주변환경에 맞는 조경과 읍민의 생활체육장으로 가꾸도록 하고, 기존 운동장은 현대식 상설시장(또는 잔여 구간 1.6km 공사시 이주단지 조성 등)으로 활용토록 구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거리 질서에 관한 주차 질서의 확립이다.

도로마다 불법 주정차로 인하여 거리가 복잡하고 읍민의 불편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 문제 역시 기존 피수대 약 250m를 철거하여 공용주차장으로 사용한다면 거리 질서를 찾게 될 것으로 본다.

우리 읍 미래상 중 추가로 염원하고자 하는 사업은 칠현-남지(용산)간 개비리 지방도의 확 포장과 옛 거름강나루(용산-의령 지정면 간) 교량 설치 등으로 두 가지 사업이 이루어지면 사통팔달 교통 원활로 남지읍의 미래는 정말 밝아질 것이다.

이 모든 소망적 현안들이 창출되려면 우리는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어야 하고, 지역적 발전과 경쟁력이 뒤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 일만 삼천 읍민 모두가 꼭 읍 발전을 염원하는 사명감을 갖게 되어 새로운 2천년 남지읍의 밝은 미래를 꿈꾸어 본다.

2008.01.27.

  • 출처

    죄송합니다. 토양을 설명했음 내머리에서 나옴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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