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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조영래 변호사
비공개 조회수 2,124 작성일2014.03.16

 학교에서 조령래 변호사를 조사해오라고햇는대 자새히 구채적으로 이해돼기 쉽게 써주시면 감사하겟습니다

급하니까 빨리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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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도
영웅
사회 58위, 사회, 사회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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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변호사 조영래. 1947년 3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나 1990년 12월 12일 폐암으로 43세 짧은 일기를 마감한 공익의 투사가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영민했지만 겸손했고, 냉정했지만 열정 넘치는 삶을 살았다. 

 

어릴 적 집안형편이 기울어 서울의 달동네를 전전했던 조영래는 가정교사로 일하며 고등학교를 마친다.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당당히 서울대를 전체 수석으로 입학한다. 
 
평생을 두고 자랑할 법한 이 일에 대해 조영래는 "별 의미 없는 것이기도 하고 조금도 자랑이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남들에게 쉽사리 이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다. 
 
그는 1964년 경기고등학교 3학년 때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차가운 비판적 사고를 일깨운 사건은 '3선 개헌'과 '전태일 분신사건'이었다. 그는 김근태, 손학규, 장기표 등과 어울리며 활발한 학생운동을 전개한다. 

 

그는 사법시험을 1971년 3월에 합격하지만 그해 12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에 연루, 구속돼 1년 6개월의 수감생활을 한다. 1973년 출소한 그는 1974년 긴급조치 4호 발동과 함께 민청학련사건 배후조종자로 수배돼 6년간의 도피생활을 한다. 
 
10.26 이후 복권된 조영래는 1980년 사법연수원에 복직해 1982년 9월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다. 그와 함께 사법연수원을 졸업한 사람들 중에는 문재인, 박원순 등이 있다. 
 
변호사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조영래는 이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을 주도적으로 나서 만들기도 한다. 

 

조영래는 항상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 편에 섰다. 그는 늘 자신의 안위를 찾기보다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손을 맞잡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1984년 대홍수 때 서울 망원동이 물에 잠긴 것을 두고 배수갑문 설계 잘못이라는 판결을 받아낸 '망원동 수해배상사건', 여성의 정년은 25세라는 1심 재판부의 판결에 분노한 나머지 굳이 마다하는 교통사고 피해자를 설득한 끝에 무료변론을 맡아 여성의 정년도 남성과 똑같이 55세라는 판결을 2심에서 받아낸 '이경숙씨 사건' 등. 
 
그리고 1986년 권인숙 성고문 사건. 서울대 의류학과에 재학 중이던 권인숙은 경기 부천의 한 공장에 위장취업을 했다 1986년 6월 '주민등록증 위조혐의'로 부천경찰서에 연행된다. 그리고 경사 문귀동으로부터 성고문을 당한다. 모두가 외면하는 이 사건에 조영래가 뛰어든다.

 

“권양-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온 국민이 그 이름은 모르는 채 그 성만으로 알고 있는 이 처녀는 누구인가.”(조영래, 1986년 11월21일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1심 변론 요지에서) 
 
검찰은 권인숙에게 공·사문서 위조 혐의로 징역 3년을 구형한다. 열흘 뒤 법원은 권인숙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한다. 
 
조영래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이 사건에 매달린다. 그리고 결국 가해자 문귀동은 1988년 7월 징역 5년형에 처해진다. 
 
조영래는 좋은 변호사의 자격으로 해박한 법지식에 더해진 '신뢰감'을 꼽았다. 그는 이 신뢰감이 사물을 내 편에 서서 보는 것이 아니라 남의 편에 서서 보는 버릇을 길러야 움틀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영래가 세상을 떠나자 조갑제, 남시욱 등 보수인사들도 안타까움을 숨기지 못했다. 그처럼 '겸손, 통찰력, 균형감각'을 지닌 인물이 흔치 않은 것도 한 이유였을 것이다. 시인 김지하는 '조영래 형 영전에'라는 조시를 받치기도 했다. 
 
당시 월간조선 부장이었던 조갑제는 '하얀 겨울에 떠난 우리들의 조변'이라는 추모의 글을 통해 "어디 가서든 그의 친구임을 자랑하고 싶도록 만들던 조영래 변호사"라며 "우리의 조영래는 억울한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이름'이 됐다. 그가 바로 '법을 배운 전태일'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동아일보 상무이사였던 남시욱은 "그에게 이름 지어진 '인권변호사'답게 인권과 사회정의를 침해하는 불의에 감연히 맞섰다"며 "이데올로기적 혼란기에 그는 장래를 투시하는 판단력을 지녔다"고 말했다. 

 

 

2014.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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