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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중랑구에 자랑스러운 인물(빨리)!!!!!!
파괴광선 조회수 2,837 작성일2010.05.02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2동에 사는 3학년 학생입니다 선생님이 숙제로 중랑구에 자랑스러운 인물을 써오라거 하셔서 숙제를 해야하는게 할게 없군요 .저 를 좀 도와주세요

내공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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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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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구의 자랑스런 인물)

 

1.오세창 ( 1864. 7. 15 ~ 1953. 4. 16 )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서울 출신이며, 천도교인이다. 23세의 약관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박문국 주사가 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언론기관인 한성순보의 기자가 되어 문필로써 명성을 떨쳤다.

 

1894년(고종 31)에 군국기무처의 낭청, 총재비서관이 되었다가 농상공부 참의, 우정국 통신국장을 역임했다. 1902년(광무6) 개화당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하였다가, 그 곳에서 손병희, 양한묵 등을 만나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1906년 귀국하여 만세보와 대한민보사를 창설하고, 그 사장으로 취임하여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2월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손병희, 최린, 권동진 등과 함께 조선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우선 동지를 포섭하기로 하였다. 이에 2월 10일경 최린과 최남선이 협의 하고,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초안하였으며 손병희, 최린, 권동진 등과 이를 검토하고 그 내용에 동의하였다.

 

2월 25일에는 손병희, 권동진과 함께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홍병기, 교도 김완규 등에게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알리고 천도교 월보과장 이종일을 동지로 끌어 들였다. 그는 2월 27일 그들과 함께 재동 김상규의 집에 모여,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보고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의 태화관에 손병희 등과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경시청총감부에 구금되었다가,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일본경찰의 감시를 피하여 독립운동자들과 극비리에 연락하였다. 광복 후에는 민주의원 의원을 겸하였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장과 전국애국단체총연합회 회장을 맡아보며 독립국가 건설에 공헌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2.지석영 ( 1855. 5. 15~1935. 2. 1 )

 
서울 사람으로 지익룡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1935년 8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의학자, 행정가, 어학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우두법의 보급에 결정적으로 공헌한 선각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우두법은 천연두를 예방하는 일종의 예방 접종법으로, 예전에는 두창, 마마, 손님이라고도 불리던 천연두는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갔을 뿐아니라 다행히 생명을 구하더라도 곰보가 되는 경우가 많은 무서운 질병이었다.

 

1876년(고종 13) 수신사 김기수의 통역관으로 일본에 파견된 스승 박영선이 오다키로부터 종두법을 배우고, 구가 가쓰아키가 지은 《종두귀감》 얻어 귀국하자 이를 전수받아 종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879년 천연두가 만연하여 많은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자, 그해 10월 부산에 내려가 일본 해군병원 제생의원에서 종두법을 배우고, 12월 하순 두묘와 종두침을 얻어 서울로 돌아오던 길에 처가가 있는 충주 덕산면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종두를 실시하였다. 이듬해 서울에서도 부산 제생의원에서 보내온 두묘로 종두를 실시하였다. 1880년 수신사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 위생국에서 두묘의 제조법과 저장법, 독우의 채장법 등을 배우고 두묘도 얻어 귀국했다. 일본 공사관 의관 마에다 기요노리로부터 서양의학을 배우면서 우두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난 뒤 일본인으로부터 의술을 습득한 죄로 체포령이 내려 일시 피해 있다가 정국이 수습된 후 불타버린 종두장을 다시 열어 종두를 보급하였다. 그 해 9월 전라도 어사 박영교의 요청에 따라 전주에서, 이듬해에는 충청도 어사 이용호의 요청에 따라 공주에서 각각 우두국을 설치하여 종두를 실시하고 그 방법을 각 군에서 뽑혀 올라온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1883년(고종 20)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지평 등을 역임하고 1885년 그 동안 축적한 경험을 토대로 우리나라 최초의 우두 관련 서적이자 서양 의학서인 《우두신설》을 저술했다. 1887년 장령으로 시폐를 논하다가 우두의 기술을 미끼로 일본과 결탁한 개화당과 도당을 이룬다는 이유로 전라도 신지도에 유배되었다.

 
그 곳에서 《중맥설》과《신학신설》을 저술했다. 1892년 풀려난 후 서울로 올라와 이듬해 우두보영당을 설치하고 접종을 실시했다. 1894년에는 갑오개혁으로 내무아문 내에 위생국이 설치되어 종두를 관장하게 되었다. 그 뒤 승지(承旨)를 거쳐 1896년(고종 33) 동래부사를 지냈다. 1899년 경성의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교육에 힘쓰는 한편, 종두 및 전염병 예방과 관련된 각종 관제, 규칙을 공포하도록 했다. 그는 한글에 조예가 깊던 강위의 영향으로 일찍이 국문에 관심을 가졌다. 국문학교의 설립에 크게 기여했다. 1895년《신정국문》 6개조를 상소,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를 설치하게 하여 1908년 국문연구소 위원이 되었다. 1909년에는 한글로 한자를 해석한 《자전석요》를 간행했다.

 

1910년 8월에 굴욕적인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측의 간곡한 간청을 뿌리치고 대한의원에서 물러났습니다. 1914년에는 의생 등록을 하고 소아과 진료를 하였으며 1915년부터는 전선의사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일제 강압기에 있었던 우리 민족의 건강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다가 별세하였다.

 

3.차중락 ( 1941~1968.11.10 )

 
요절가수 차중락은 잘생긴 얼굴, 미스터 코리아 2위로 선정될 만큼 건장한 몸매,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를 빼다박은 뛰어난 모창으로 60년대 말 젊은 여성들에게 가히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미8군에서는 '코리언 엘비스'라는 애칭으로 불렸을 만큼 외국과 한국의 정서를 적절하게 퓨전한 감정처리가 독특했던 저음의 바이브레이션 창법은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서울 신당동 토박이로 전문학교 마라톤선수 출신으로 토건업과 인쇄소를 경영했던 부친 차준달과 경기여고 단거리선수 출신인 모친 안소순의 8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난 차중락과 함께 11명의 형제자매는 부모의 기질을 이어받아 예체능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첫째는 역도선수, 둘째는 경복고 밴드반장과 연대 야구부 주장을 맡았던 재주꾼이었고 넷째인 중광은 성균관대 야구부 투수이자 그룹 다크 헤어즈의 보컬이었다.

 

다섯째 중용은 양정고의 마라톤선수이자 그룹 가이스&돌스에서 탬버린을 치며 노래하는 직업가수로 형제들 중 차중락과 외모와 목소리가 가장 흡사해 대역으로도 활동했을 정도였다.

 

낭만적이고 유순한 성품의 셋째 차중락은 경복고시절 음악보다는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영화감독을 꿈꾸며 진학한 한양대 연극영화과 신입생 시절에는 극장을 안방 드나들 듯했다.

 

영화마니아였던 그가 음악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동화백화점(지금 신세계백화점) 4층의 음악감상실에서 접하게 된 팝과 재즈에 심취하면서부터이다. 좋아했던 가수는 폴 앵카와 엘비스 프레슬리. 가끔 무대에 올라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부를 때는 반응도 좋았다.

 

동경에서 팝가수로 활약하다 돌아와 미8군 무대에서 이름을 날리던 작곡가 손목인의 큰 아들 후랭키 손은 차중락의 천재적인 엘비스 모창에 흠뻑 반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일본무대에 설 수 있다면 크게 성공할 것이라는 그의 권고로 차중락은 일본에서 노래아르바이트를 하며 영화감독 수업을 받아보겠다는 야심을 품고 1963년 학교까지 중퇴하고 밀항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아버지의 사업실패까지 겹쳐 방황했다.
63년 10월 사촌형인 차도균의 권유로 그룹 키보이스의 리드보컬로 합류하면서 새로운 인생의 전기를 맞았다. 고무장화를 신고 엘비스의 모창을 멋들어지게 하며 대중들에게 첫선을 보인 시민회관 공연은 큰 화젯거리였을 만큼 성공적이었다. 이때쯤 차중락은 수년간 사귀어오던 이대생 애인과 헤어지는 실연의 아픔을 겪었다. 신세기레코드 사장의 아들 강찬호 역시 실연의 아픔 속에 쓴 자작시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신세기.66년11월10일>을 엘비스의 히트곡 를 편곡해 동병상련의 차중락에게 선사했다.

 

당시는 반주음악 완성 후 가수가 노래를 불러 녹음을 완성하던 때. 그룹 키보이스는 반주음악의 템포와 필링을 함께 표현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드문 동시녹음을 시도했다. 대중들의 반응은 실로 폭발적이었다.

 

계절의 분위기와도 맞아 떨어져 엄청난 인기몰이를 한 차중락에게는 집요한 솔로 독립 유혹이 거셌다. 이때가 67년. 솔로 독립 후 차중락은 아침에 눈을 뜨면 차가운 콜라를 두병이나 마셔야 겨우 정신을 차릴 만큼 피로가 쌓이는 눈코뜰새없는 생활의 연속이였다.

 

당시 그의 라이벌은 신장염으로 사지를 넘나들면서도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배호로, 좋은 친구사이였던 차중락과 배호는 가요황금기를 이끌었던 쌍두마차였다. 그룹출신이었던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매력의 트로트와 팝 창법으로 여성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배호는 기혼여성들의 사랑을, 차중락은 젊은 여성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을 정도로 두 사람의 인기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였다. 솔로 독립 후 최대 히트곡은 TBC라디오 드라마 주제가였던 <사랑의 종말-신세기. 1967년>이다. 이곡은 TBC 방송가요 대상 남자 신인가수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주었던 명곡으로 꼽힌다. 그러나 차중락 개인이 가장 좋아했던 곡은 <마음은 울면서>와 <철없는 아내>이었다. 잘생긴 외모, 건장한 체구, 달콤한 노래, 낭만적이며 호탕하고 부드러웠던 성품의 차중락의 일거수일투족은 여성 팬들의 관심사였다. 극성 여성 팬들의 접근이 스캔들로 비추어지고 미8군 시절부터 그를 사랑했던 외국인 여성 알렌의 존재도 정신적인 부담을 안겨주었다.

 

27세의 건장했던 젊은 가수도 인기라는 족쇄에는 무기력했다. 건강을 돌볼 수 없을 만큼 바쁜 연예생활과 잦은 스캔들에 시달리던 차중락은 결국 서울 동일극장 무대위에서 고열로 쓰러진 후 1968년 10월 11일 자신의 대표곡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발표 1주년 날 27세의 젊은 나이에 뇌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짧은 가수생활동안 겨우 20여곡만을 남겼지만 가을과 낙엽의 계절을 대표하는 명곡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은 불멸의 생명력을 지닌 채 낙엽을 사랑하는 가을연인들을 위해 올해도 목청을 가다듬고 있다. 차중락의 묘소는 현재까지도 양지바른 곳에 잘 관리되고 있으며, 1969년 2월 11일 건립된 추도비에는 조병화 詩 「낙엽의 뜻」이 기념사업회 명의로 새겨져 있다.


4.백대진 ( 1892. 2. 5~1967. 5. 9 )


서울 사람이다. 1920년 8월 매일신문의 특파원으로 동삼성 심양에서 활동하던 중 미국 국회의원 시찰단과의 신문기자 회견을 한 기사가 배일적이였다는 이유로 일경에 의하여 신문사를 강제로 사직했다.

 

1922년 11월 월간지인 ≪신천지≫의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서 조선의 일본통치가 폭력에 의한 강압정치라고 규탄하면서 독립사상을 선전하여 고취시키는 항일운동을 하였다. 1922년 11월호에서 '일본위정자에게 여함'이란 제목하에 친일단체에 대한 소위 '참정권 문제'는 일고의 가치도 없음을 주장하였으며, '민족의식 발달'의 장에서는 4천년의 역사를 지닌 민족으로서 국내외에 자랑할 만한 민족이 일본의 통치를 받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역설하다가 1922년 11월 6일 일경에 피체되었으며 동 잡지의 판매가 금지되었다.

 

동년 1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신문지법 및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았으며 1923년 1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형이 확정됨으로 옥고를 치렀다.

 

1967년 유명을 달리했으며 망우리 묘지에서 1998년 10월 21일 대전국립묘지로 이장했다.

 

정부에서는 1986년 대통령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0.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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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중랑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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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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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선수 황선홍 선수 면목7동 중곡초등학교 출신 입니다.

201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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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중락 ( 1941~1968.11.10 )

 
요절가수 차중락은 잘생긴 얼굴, 미스터 코리아 2위로 선정될 만큼 건장한 몸매,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를 빼다박은 뛰어난 모창으로 60년대 말 젊은 여성들에게 가히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미8군에서는 '코리언 엘비스'라는 애칭으로 불렸을 만큼 외국과 한국의 정서를 적절하게 퓨전한 감정처리가 독특했던 저음의 바이브레이션 창법은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서울 신당동 토박이로 전문학교 마라톤선수 출신으로 토건업과 인쇄소를 경영했던 부친 차준달과 경기여고 단거리선수 출신인 모친 안소순의 8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난 차중락과 함께 11명의 형제자매는 부모의 기질을 이어받아 예체능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첫째는 역도선수, 둘째는 경복고 밴드반장과 연대 야구부 주장을 맡았던 재주꾼이었고 넷째인 중광은 성균관대 야구부 투수이자 그룹 다크 헤어즈의 보컬이었다.

 

다섯째 중용은 양정고의 마라톤선수이자 그룹 가이스&돌스에서 탬버린을 치며 노래하는 직업가수로 형제들 중 차중락과 외모와 목소리가 가장 흡사해 대역으로도 활동했을 정도였다.

 

낭만적이고 유순한 성품의 셋째 차중락은 경복고시절 음악보다는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영화감독을 꿈꾸며 진학한 한양대 연극영화과 신입생 시절에는 극장을 안방 드나들 듯했다.

 

영화마니아였던 그가 음악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동화백화점(지금 신세계백화점) 4층의 음악감상실에서 접하게 된 팝과 재즈에 심취하면서부터이다. 좋아했던 가수는 폴 앵카와 엘비스 프레슬리. 가끔 무대에 올라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부를 때는 반응도 좋았다.

 

동경에서 팝가수로 활약하다 돌아와 미8군 무대에서 이름을 날리던 작곡가 손목인의 큰 아들 후랭키 손은 차중락의 천재적인 엘비스 모창에 흠뻑 반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일본무대에 설 수 있다면 크게 성공할 것이라는 그의 권고로 차중락은 일본에서 노래아르바이트를 하며 영화감독 수업을 받아보겠다는 야심을 품고 1963년 학교까지 중퇴하고 밀항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아버지의 사업실패까지 겹쳐 방황했다.
63년 10월 사촌형인 차도균의 권유로 그룹 키보이스의 리드보컬로 합류하면서 새로운 인생의 전기를 맞았다. 고무장화를 신고 엘비스의 모창을 멋들어지게 하며 대중들에게 첫선을 보인 시민회관 공연은 큰 화젯거리였을 만큼 성공적이었다. 이때쯤 차중락은 수년간 사귀어오던 이대생 애인과 헤어지는 실연의 아픔을 겪었다. 신세기레코드 사장의 아들 강찬호 역시 실연의 아픔 속에 쓴 자작시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신세기.66년11월10일>을 엘비스의 히트곡 를 편곡해 동병상련의 차중락에게 선사했다.

 

당시는 반주음악 완성 후 가수가 노래를 불러 녹음을 완성하던 때. 그룹 키보이스는 반주음악의 템포와 필링을 함께 표현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드문 동시녹음을 시도했다. 대중들의 반응은 실로 폭발적이었다.

 

계절의 분위기와도 맞아 떨어져 엄청난 인기몰이를 한 차중락에게는 집요한 솔로 독립 유혹이 거셌다. 이때가 67년. 솔로 독립 후 차중락은 아침에 눈을 뜨면 차가운 콜라를 두병이나 마셔야 겨우 정신을 차릴 만큼 피로가 쌓이는 눈코뜰새없는 생활의 연속이였다.

 

당시 그의 라이벌은 신장염으로 사지를 넘나들면서도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배호로, 좋은 친구사이였던 차중락과 배호는 가요황금기를 이끌었던 쌍두마차였다. 그룹출신이었던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매력의 트로트와 팝 창법으로 여성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배호는 기혼여성들의 사랑을, 차중락은 젊은 여성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을 정도로 두 사람의 인기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였다. 솔로 독립 후 최대 히트곡은 TBC라디오 드라마 주제가였던 <사랑의 종말-신세기. 1967년>이다. 이곡은 TBC 방송가요 대상 남자 신인가수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주었던 명곡으로 꼽힌다. 그러나 차중락 개인이 가장 좋아했던 곡은 <마음은 울면서>와 <철없는 아내>이었다. 잘생긴 외모, 건장한 체구, 달콤한 노래, 낭만적이며 호탕하고 부드러웠던 성품의 차중락의 일거수일투족은 여성 팬들의 관심사였다. 극성 여성 팬들의 접근이 스캔들로 비추어지고 미8군 시절부터 그를 사랑했던 외국인 여성 알렌의 존재도 정신적인 부담을 안겨주었다.

 

27세의 건장했던 젊은 가수도 인기라는 족쇄에는 무기력했다. 건강을 돌볼 수 없을 만큼 바쁜 연예생활과 잦은 스캔들에 시달리던 차중락은 결국 서울 동일극장 무대위에서 고열로 쓰러진 후 1968년 10월 11일 자신의 대표곡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발표 1주년 날 27세의 젊은 나이에 뇌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짧은 가수생활동안 겨우 20여곡만을 남겼지만 가을과 낙엽의 계절을 대표하는 명곡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은 불멸의 생명력을 지닌 채 낙엽을 사랑하는 가을연인들을 위해 올해도 목청을 가다듬고 있다. 차중락의 묘소는 현재까지도 양지바른 곳에 잘 관리되고 있으며, 1969년 2월 11일 건립된 추도비에는 조병화 詩 「낙엽의 뜻」이 기념사업회 명의로 새겨져 있다.


2010.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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