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나 공공기관에게 복권 만한 효자가 없다. 세금을 올리지 않고도 복권 발행을 통해 필요재원을 손쉽게 확보할 수 있어서다. 사행성이 있긴 해도 복권 구매자가 지불하는 돈은 소액이라 그 정도가 가벼운 것도 장점이다.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은 그래서 복권을 “강제력을 수반하지 않고 공공재원을 조성할 수 있는 희생 없는 조세”라고 했다.

이런 연유에서인지 복권의 역사는 꽤 길다.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로마 복구자금을 마련하고자 연회를 열어 노예 집 배 등 당첨금을 내걸고 복권을 팔았다. 16세기 들어 유럽 각국은 재정 확보를 위해 잇따라 복권을 발행했다. 1530년 이탈리아에서 번호 추첨 방식의 ‘로토(Lotto)’ 복권이 나온 데 이어 9년 뒤 프랑스도 복권을 판매했다. 그로부터 30년 후 영국에서도 복권이 등장했다. 122명의 여성과 염문을 뿌려 감옥에 갇혔다가 탈출한 카사노바는 복권을 재기의 발판으로 삼기도 했다. 1757년 재정 위기에 빠진 프랑스 루이 15세에게 복권 발행을 제안해 60만 프랑의 순익을 안겨준 공로로 외무특사가 된 것이다.

무작위적인 부의 분배효과를 지닌 것 또한 복권의 매력이다. 하지만 당첨 확률이 매우 낮은 데다, 담배처럼 복권을 주로 구입하는 건 중·하위 계층이라는 점에서 부정적인 측면이 더 크다. ‘빈자의 세금’이라 불리는 이유다. 프랑스의 경제학자 알베르 자카르는 “복권 놀이는 세금을 거둬들이기 위한 겉치레이며, 있지도 않은 희망을 매기는 세금”이라고 꼬집었다. 복지에 등한한 정권이 복권을 ‘희망고문’ 용도로 이용한다면 현실에 대한 불만과 비판을 마비시키는 아편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미국에 ‘1조8000억 원짜리 희망고문’이 출현했다. 숫자 맞히기 복권 ‘메가 밀리언스’의 당첨자가 지난 7월 24일 이후 24차례 연속 나오지 않으면서 당첨금이 사상 최고액인 16억 달러(1조8120억 원)로 불어난 것이다. 이 바람에 추첨일인 23일 전에 복권을 사려는 구매자가 쇄도하면서 피크타임인 점심시간에는 1초에 200장씩 팔렸다고 한다. 그러나 당첨 확률은 3억260만 분의 1로, 사실상 낙타가 바늘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외국인들의 관심도 커지자 ‘수수료를 받고 복권 구매를 대행해주겠다’는 온라인 업체까지 나타났다. 금을 찾아 무작정 길을 떠났던 미국 서부 개척시대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현대판 ‘엘도라도 신드롬’이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