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나이 50, 여자를 만나다

정은령 | 언론학 박사

“여자 나이 50부터 황금기야. 손자들 키워달라고 자식들이 매달리기 전까지가 누려볼 수 있는 마지막 자유시간이라니까….”

[공감]여자 나이 50, 여자를 만나다

직장 다니는 딸 대신 손자들 돌보느라 여념이 없는 이웃의 선배 아주머니가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그 좋다는 ‘여자 나이 50’을 넘기는 2016~2017년, 나는 젊은 날 이후 잊고 지냈던 나의 ‘여성성’에 대해 새삼 고민하게 됐다.

나를 ‘50세 고민녀’로 만든 데 불을 댕긴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고 해서, 여성으로서 티끌 한 점 뭘 더 누려본 기억이 없는 내가 추운 겨울 박 대통령의 파면을 위해 광화문광장에 촛불을 들고 앉아 있어야 하는 상황까지는 기꺼이 견딜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집회에서 사회자가 박 대통령을 두고 “잡×”이라고 성별을 지칭한 상소리를 하는 순간, 나는 졸지에 오물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얼어붙었다.

‘촛불 든 당신 말고 박 대통령’에 대고 하는 얘기라고 주장하겠지만, 나 역시 어디서든 “잡×”이라고 불릴 가능성이 있는 여성이다. 박 대통령은 규탄하지만, 그 규탄에 여성혐오가 동원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이 양가적 감정과 불쾌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지 곤혹스러웠다.

그날 집회에 다녀온 이후 내 생애 최초로 한 여성주의자 그룹에 가입했다. 페이스북에서 마주친 ‘박근혜 하야를 만드는 여성주의자 행동’(박하여행)이라는 상큼한 이름의 단체였다. ‘박근혜 퇴진을 위해 행동하면서, 또한 현재의 흐름 속에 무작위로 일어나는 성차별 발언과 행동도 모니터링하고 시정한다’는 활동 취지가 내 혼란감을 콕 집어 해명하는 것 같아서였다.

온라인으로 가입만 해 두었다가 한 번도 함께 행동을 못했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 참여한 것이, 미국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튿날 이에 반대해 열린 1월21일의 ‘세계여성공동행진 서울’이었다. 집회 장소는 지난해 5월 살인사건이 일어났던 강남역 10번 출구 앞. 좌우를 둘러보아도 2000여명의 참가자 중 50대인 내가 최고령일 듯싶었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는 어색함을 애써 누르며 대열을 따라 걷고 있는데, 앞쪽에서 날카로운 고함이 터져 나왔다.

대열 밖에서 행진자들의 사진을 찍는 젊은 남성을 본 진행요원이 몸싸움이라도 할 기세로 거칠게 항의하고 있는 것이었다. 항의 정도가 격렬해서 잠시 어안이 벙벙했는데, 이유는 행진이 끝난 뒤 같은 모임 회원인 한 젊은 여성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찍은 사진으로 인터넷에 얼굴이 돌면, 거기에 페미×이라고 온갖 욕설 댓글이 다 붙고, 나체랑 합성해서 막 조리돌림 하거든요.”

그러니까, 순한 목소리로 “여권이 인권이고 인권이 여권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던 그 젊은 여성들은 사진 하나라도 인터넷에 오르는 날에는 어떤 온라인 테러를 당할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그 자리에 나온 것이었다. 30년 전 화염병과 최루탄이 날아다니던 그 투쟁의 공간만을 기억하고 있었던 나는 그간 모르고 살아왔던 또 다른 전장이 오늘 젊은 여성들의 일상공간이라는 것을 그날 처음 절감하고 나의 무지가 부끄러웠다.

정치민주화라는 긴급한 과제 앞에서 여성운동은 배부른 타령이라고 뒷전으로 밀리던 30년 전의 세월로부터 뚝 떨어져 나와 오늘의 페미니스트들을 만나는 나는 선배 세대로서의 부채감을 지울 수 없다. 과연 그때로부터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는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공중화장실에서 무참히 살해당할 수 있고,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온라인 테러를 당하고, 정치적 주장을 위해 성차별이 용인되고, 국가가 여성의 낙태권리에 개입하며, 낳은 아이를 어떻게 사회가 함께 기를 것인지에 대한 대안은 마련하지 못한 채 아이 셋의 젊은 공무원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모는 이 환경의 문제가 중년 여성인 나와는 관계없는가.

직장의 선배 여성, 혹은 곧 시어머니나 친정엄마, 장모가 되어갈 중년 여성 세대가 젊은 페미니스트들이 당면한 문제를 함께 바라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성차별 체제의 일부가 되어 젊은이를 억압하는 노인들로 늙어가고 말 것이다. 여자 나이 50, 페미니즘에 대한 내 고민은 이제 시작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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