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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안철수나 김연아같은사람들 인터뷰좀 찾아주세요
비공개 조회수 5,844 작성일2013.04.17

안철수나 김연아는 예를 든거고 이런사람들 면담한 기사 좀 찾아주세요

제가 계속 찾아보는데도 잘안나오네요

아니면 면담했을만한 사람들 말해주세요

내일까지 찾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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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2 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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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엉조림은 아람농산
절대신
연애, 결혼 1위, 사람과 그룹 5위, 창원시 1위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아래 내용을 참고해 보세요^^

조선일보에 나오는 [최보식이 만나 사람]을 보면

심층인터뷰여서 님이 바라는 자료가 될것 같습니다.

 

# 1

[최보식이 만난 사람] 당대표 도전 再修하는… '민주당 비주류' 김한길 의원

"야당 대표보다 여당 평당원이 행복할 것… 정치 떠났을 때 여의도 온 적 없어"

"작년 경선 땐 아내와 같이 다녀
도움됐지만 마음의 상처도 있어
아내에게 사람 몰리고 내게는…"

"정치를 조롱하는 분위기 편승
안철수는 '反정치'를 택해
당장엔 박수 받았지만 앞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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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길(60) 의원에게 "젊어서도 머리가 허옜고 지금도 허여니, 혼자만 나이를 안 먹는 것 같다"고 하자, "젊어서 미리 늙은 탓"이라고 답했다. 그의 얼굴은 꺼칠했다. 지난번 민주당 대표 경선에서 다 이겼다가 '친노(親盧) 세력의 모바일 투표'에 의해 패배한 그가 이번에 또다시 같은 코스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제1 야당 대표를 뽑는 데 세간에는 관심이 없다.

"북한에서 저러니 다 날아갔다고 봐야지. 안철수도 뉴스에 안 나오잖아. 국가적 상황이니 어쩌겠나."

―경쟁 후보들끼리 '반(反)김한길' 연대론이 나오는 이유가 뭔가?

"출마한 분들은 그런 게 없다고 하니까, 내 입으로 말하기가 그렇다."

―김 의원이 대표가 되면 민주당의 정체성이 흔들린다고 하는데.

"왼쪽에 치우친 입장에서는 내가 오른쪽에 있는 걸로 보이고, 오른쪽 사람들에게는 왼쪽에 서있는 걸로 보이겠지."

―한때 민주당이 '야권 연대'의 실리를 위해 종북 세력에 너무 가까이 갔다는 느낌이 있었다.

"종북 세력이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고. 다만 훨씬 더 신중해야 했다. 한·미 FTA나 제주 해군기지 문제에서도 그랬다. 민주당 당론은 'FTA 절대 반대'가 아니었는데, 당시 한명숙 대표가 시위 현장에 가면서 하루아침에 바뀐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지난 대선 때 이해찬 대표는 "북한 인권 문제 제기는 내정 간섭"이라고 했다.

"내정 불간섭 원칙은 맞는다. 하지만 인권은 어떤 경우에도 지켜야 할 보편적 가치다."

―민주당은 '북한인권법' 제정에는 반대해왔다.

"인권의 이름으로 남북 평화가 위협받는다면 어느 쪽이 우선돼야 하느냐 심사숙고할 필요는 있다."

―과거에 우리가 민주와 인권을 위해 투쟁했을 때 우리 사회의 평화를 깰 수가 있었다. 그때 인권을 주장하지 말아야 했나?

"새누리당의 북한인권법안에는 대북 전단을 살포하는 단체들을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단 살포는 북한 주민의 인권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북 전단은 폐쇄된 북한 체제의 주민들에게 바깥세상의 정보를 전해준다. 주민들의 의식을 바꾸게 하는 수단이다. 이것이 북한 인권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나?

"2004년 남북 장성급 회담에서 '군사분계선 지역에서 방송과 게시물, 전단 등을 통한 모든 선전 활동 중지'를 합의한 바 있다. 합의한 이상, 이를 지키는 것이 한반도 평화를 위하는 길이라고 본다."

―지난 대선에서 상당수 국민은 이쪽이 좋아서라기보다 저쪽에 맡겨놓으면 나라가 망하겠다는 불안감으로 투표했다.

"대선에서는 중원(中原)을 장악해야 이긴다. 우리 당은 중원을 내주면서 더 왼쪽으로 이동한 측면이 있었다. 대신 박근혜 후보 쪽에서 왼쪽으로 옮겨와서 중원을 차지했다. 그게 대선의 승패와 직결됐다."

―민주당이 이념적으로 어디에 있어야 한다고 보나?

"나는 그런 소모적 이념 논쟁에서 우리 당이 벗어나야 한다고 본다.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로 가는 게 옳다. 그 과정에서 당의 일체감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새누리당과의 차별성은?

"그쪽은 우리보다 가진 사람들의 편이라고 생각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서민들, 가난한 사람들의 지지를 많이 받았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정치를 한다면서도 그들의 표를 얻지 못했다. 우리가 우리의 기반을 잘 살려내지 못한 것이다. 이게 뼈아픈 대선 패배로 이어졌다."
―대선 패배 말이 나온 김에, 2007년 대선(이명박과 정동영)에서 패배한 뒤 김 의원은 정계 은퇴를 선언했지 않았나?

"정계 은퇴 선언은 아니었다. 당시 나라도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며, 총선 불출마 회견을 했다. 그때 기자가 '정치에 돌아올 계획이 있냐'고 물어 '지금은 그런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정계 은퇴'라고 보도했다. 점심을 싸 갖고 언론사마다 찾아다니면서 '아니다'라고 할 수가 없었다."

―정치를 안 하고 있으니 어떻던가?

"여의도로는 한 번도 안 왔다. 칩거했다는 말처럼, 가능한 한 사람을 안 만났다. 차도 없애버렸다. 택시를 타고 나가 시내에서 밥 먹은 적이 거의 없었다. 책을 보거나 자전거로 한강변을 돌아다녔다."

―정계 복귀를 늘 염두에 두면서?

"그런 준비를 따로 하진 않았다. 지난 총선 때 공천 신청을 안 했다. 당에서 전략 공천(서울 광진갑)을 한 것이다. 정치권의 한 선배가 '정권을 뺏기고 떠났으니 이제 정권을 찾아올 책임이 당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

―국회의원에 당선되자마자 당대표 선거(작년 6월)에 뛰어들었는데.

"그때 당에서 5대 본부를 구성해 문재인·이해찬·박지원·정세균·김한길을 본부장으로 임명했다. 첫 회의가 있는 날 아침에 '이해찬·박지원 연대'가 보도됐다. 나는 '계파 패권주의와 담합으로 가면 대선에서 이기기 어렵다'고 발언했다. 그때부터 내가 '비주류'의 좌장 격이 된 것이다."

―'김한길 계파'가 생긴 것은 아니고?

"그런 계파는 없다. 나 자신이 지금껏 어떤 계파에도 속한 적 없다. 나는 함경북도 출신이라 지역 기반이 없다. 이대부고를 나와 남학생 동창들의 학연(學緣)도 거의 없다. 공무원·법조인처럼 직업 모임도 없다. 또 민주당에서 정치하려면 운동권이나 수감 경력 등이 먹히는데, 나는 작가를 하다가 들어왔다. 희귀한 경우다."

―체질적으로 술도 못 마신다고 들었다.

"저녁 약속을 잘 안 한다. 그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관계로 버티는 것은 내가 사는 방식이 아니다."

―지난 당대표 경선에서는 이해찬 의원에게 패배했다. 대의원 현장 투표에선 이기고도 모바일 투표에서 뒤집혔다.

"16개 시도 순회 경선을 해 14곳을 이겼다. 이변의 연속이었다. 일반 당원 투표에서도 이겼는데, 결과가 패배로 나오자 정말 혼란스러웠다."

―모바일 투표에서 '친노 조직'이 동원될 것이라고 예측됐는데.

"그래도 이길 줄 알았다. 주위에서는 '말이 안 된다. 투·개표 과정을 다시 확인해보자'고 했다. 하룻밤 고민한 뒤 '그대로 수용하겠다'고 말했다. 대선을 앞두고 있는데 당내 분란을 일으킬 수 없었다."

―이번에도 재현될 수 있지 않을까?

"모바일 투표 비율을 줄였다. 그때는 당원 30%, 모바일 70%로 했다. 모바일을 한 표씩 계산만 했어도 내가 이겼다. 투표자 중 20~ 30대에게는 한 표 이상의 가중치를 주고,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반대로 했다. 전체적으로 0.5% 뒤집어졌다."

―그때 김 의원이 대표가 됐다면, 대선 결과가 달라졌다고 보나?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꽤 있다. '이해찬·문재인'이 담합했다는 말이 나온 마당에, 패배한 다른 후보 진영에서 적극적으로 돕긴 어려웠을 것이다."

―문재인 후보가 최선이었다고 보나?

"당시 민주당 후보 중에서 누가 최선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전히 안철수 후보를 껴안고 같이 가야 한다는 입장인가?

"안철수 개인보다 그에게 기대하고 손뼉 치는 유권자들이 우리에게 소중하다. 그분들은 민주당에 실망하고 안 교수에게로 간 것이다. 우리가 그 세력을 다시 껴안으면 안철수는 민주당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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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후보가 당선돼도 국회의원 300명 중 한 명의 초선 의원에 불과하다는 말도 있다.

"그렇게 단순하게 볼 수는 없다. 정치인 위상은 지지자들의 규모와 직결된다. 이를 무시하는 것은 정직하지 않다."

―그의 지지층이 현저히 줄어든 것 같지 않은가?

"그렇다. 국민은 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갖고 있고, 조롱 대상으로 삼는다. 안 교수는 이런 분위기에 편승했다. 소위 '반(反)정치'를 택했다. 정치를 왜소화하고 폄하하면 당장에는 박수를 받는다. 하지만 그게 정치 행위일 수는 없다. 그는 잘 생각해봐야 한다."

―민주당에 대해서도 지지자들이 왜 실망했는지 알고 있나?

"국민이 정치에 갖고 있는 욕구를 다 수용하지 못했다."

―배타성과 편 가르기에도 염증이 났지 않을까?

"극복해야 할 대목이다."

―과거 '친노' 성향 정치인 중에는 특정 언론 인터뷰를 거부했다. 이는 보수·중도층 국민에게 자기 입장을 알리고 설득하고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걸 스스로 포기하는 결과를 낳았다.

"특정 언론에 대해 지나치게 배타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도 정치인으로서 올바른 자세는 아니다."

―김 의원은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여자의 남자' 등 베스트셀러를 쓰고 방송인으로도 활동할 때 '문화' 쪽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1996년 DJ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했다. 그전부터 정치에 꿈을 두고 있었나?

"어느 날 소설책이 잘 팔려나가던 때인데 아버지(김철 통일사회당 당수·1926~1994년)가 나를 불러 정치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

―본인의 의사는?

"보람 있는 일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했다. 젊은 날 내가 쓴 소설에서 주인공이 여자 친구에게 '정치는 우리 구성원들 저마다의 꿈과 자유를 저당받아 생긴 힘으로 뭔가를 해내서 더 큰 꿈과 자유로 돌려주는 것'이라고 했다."

―정치를 해오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때는?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를 만드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던 때다. 내 개인적으로는 야당의 대표보다 여당의 평당원이 행복하겠다. 야당이 할 수 있는 몫은 굉장히 제한적이다. 우리를 지지하는 국민에게 여당이 되지 못하면 실제로 돌려드릴 것이 거의 없다. 정권을 잡는 것은 권력을 누리기 위해서라기보다 지지자들에게 우리가 뭔가를 갚아줄 수 있기 위해서다."

―그렇게 만든 정부가 훌륭한 정부였구나 하는 생각이 있나?

"우리 사회에 긍정적 변화를 일으킨 면도 있지만, 더 잘 했어야 하는 아쉬움은 있다. 역대 어느 정부도 그럴 것이다."

―이번에 만약 김 의원이 당대표로 당선되면 민주당이 '조명'을 받을까?

"대선 패배 이후 민주당의 '계파 정치'를 극복하라는 주문이 많았는데, 조직도 계파도 없는 내가 당선되면 일단 신선한 변화가 아닐까."

―선거에서 부인(최명길) 덕을 많이 보나?

"이번에는 혼자 다닌다. 작년 당대표 경선 때는 전국을 같이 다녔다. 도움도 됐지만 마음의 상처도 있었다(웃음). 아내에게만 사람이 몰리고, 나는 주목하지 않았다."

―과거에는 인기가 비슷하지 않았나?

"정치 쪽에 온 뒤로 심하게 균형이 깨졌다."
 

# 2

[최보식이 만난 사람] '마린보이' 박태환

"저 자신이 TV에 나오면 무섭기도 하고… 공부를 많이 못해 난 바보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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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축구선수였다면 혼자서 하는 수영보다 부담을 나눌 수 있었을텐데"
노민상 감독과 '의리' 말하기엔…
런던올림픽 번복 판정 없었다면 돈 때문에 홈쇼핑 출연은 '오버'

"엊그제 난생처음으로 경기장에서 축구 시합을 봤어요. 신기하기도 하고. '내가 단체 경기를 했으면 어떠했을까' 생각을 했어요. 단체 경기는 자기 포지션에서 뛰잖아요. 그쪽 선수들의 오해가 없었으면 하는데. 축구나 농구를 하면 부담을 나눌 수 있겠다. 혼자서 하는 수영보다는 여유 있게 할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인터뷰를 끝내야겠다고 하던 참에, 박태환(24) 선수는 심중에 있는 말을 했다.

처음 그는 사무실로 들어선 내게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 뒷전에 서 있다가 인터뷰 룸으로 따라 들어왔다. 어깨는 쩍 벌어졌으나 얼굴이 고운 '소년 같은 청년'에게 이렇게 물었다.
―낯을 많이 가리나 보군요.

"대부분 기자회견으로 했고, 1대1로 따로 한 적이 별로 없어요. 자주 뵌 분들은 괜찮은데, 처음 보는 사람과 마주하면 힘들어요."

―천성적으로 그런 겁니까?

"원래는 장난을 좋아하고 활발했어요. 카메라 앞에 서면서 낯을 가리고 내성적으로 바뀌었어요.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 최연소 국가대표(중학교 3학년)로 선발되면서부터 그런 것 같아요."

―카메라를 의식하게 됐다는 말인데.

"의식보다, 싫더라고요. 저는 사진 찍는 것은 좋아하지만, 저 자신이 TV에 나오는 건 무섭기도 하고 그렇더라고요. 이름이 알려져 생활하는 것도 불편해졌어요. 사람들이 쳐다보면 부담스러워요. 쉬는 날이면 친구들을 집으로 오라고 해요. 밖에서 만나면 칸막이나 방이 있는 음식점으로 가요. 저로 인해서 친구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게 싫거든요. 사실 친구라고 해봐야 정말 친한 친구는 한 명밖에 없어요."

―이렇게 낯을 가려서야 연애를 할 수 있겠어요?

"연애하는 거랑 다르죠. 모르겠어요. 연애를 한 지 오래돼서."

―연애를 했다는 뜻이네.

"저도 남자인데."

그는 아직도 시선을 잘 맞추지 못했다. 그런 그가 최근에 '런던올림픽 포상금 5000만원'을 둘러싼 수영연맹 측과의 불화, 홈쇼핑 출연 등으로 뉴스가 됐다.

―수영연맹 측에서 당초 박 선수에게 주기로 한 포상금을 다이빙 유망주의 해외 전지훈련에 쓰는 걸로 변경했을 때, '어른들이 너무 옹졸하구나' 하는 생각을 나도 했어요.

"호주에 6주간 전지훈련을 가 있을 때, 직접 들은 게 아니라 전해 들었죠. 의사소통 없이 그런 일이 벌어지니까. 논란이 됐던 것 같아요. 저와 관련돼 좋은 일로 얘기가 많아지면 하는데, 그렇지 않은 일로 많아지니까 좀 그랬었어요."

―그동안 포상금을 받으면 전부 기부했다고 들었어요.

"베이징올림픽 때는 포상금 2억원을 대표팀과 전담팀 코치들에게 나눠줬어요. 같이 고생했으니까요. 그 뒤에도 포상금은 제가 안 갖고 기부를 했죠."

―이번에 받았다 해도 그랬을까요?

"이번 포상금이 다이빙 꿈나무들에게 쓰인다고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문제가 시끄러워져 연맹 측에서 '아직 결정된 게 없다'고 해요. 하여튼 좋은 데 쓰였으면 좋겠어요."

―지난 호주 전지훈련은 자비로 했다면서요?

"작은 돈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돈 문제에 관해 잘 몰라요. 아버지가 하시니까요."

―해외 전지훈련으로 재정적 부담이 적지 않을 텐데, 국내 수영장에서는 그런 훈련 효과가 나지 않기 때문인가요?

"국내에 있으면 가만히 안 놔두니까요."

―때마침 월스트리트저널 아시아판에서 박 선수의 TV홈쇼핑 출연을 소개하고 "팬들이 수영 영웅의 처우에 단단히 화가 났다"고 보도했지요.

"그 업체가 쭉 후원을 해줬고, 거기서 만든 비타민제가 어린이들에게 도움이 되니까 했던 거죠. 첫 방송할 때 제 근황을 묻는 인터뷰 식으로 한 번 나갔던 거죠. 이를 재정적으로 어려워 그렇게 했다는 것은 정말 '오버'였어요. 속이 상하긴 했는데, 많은 분이 걱정을 해줘서 잘 견딜 수 있었어요."

―베이징올림픽(2008년) 전후로 20여 제품의 광고 모델을 했는데, '세상인심 야박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죠?

"기업이나 사회는 냉정하니까, 제가 좋은 성적을 내면 몸값과 이미지가 높아지죠. 런던올림픽 때는 많은 일이 있었는데, 저를 응원해줘서 고맙게 생각해요."

―자유형 400m 시합에서 실격 판정 뒤 번복된 것을 말하나요? 당시 수영연맹 측이 실격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 불화가 싹텄다고 들었는데.

"지나간 일에 대해 얘기하기가 뭐하지만, 우리 측 입장에서는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죠. 대한체육회나 수영연맹 측에서도 힘을 많이 썼겠지만…, 제가 의지할 수 있었던 분은 마이크 볼 코치(전담팀)와 덩컨 코치(수영대표팀)였어요. 영어로 된 이의신청서와 녹화 장면을 보여주며 어필했다고 들었어요. 그 때문에 결승전에서 뛸 수 있었지요."

―런던올림픽 때 은메달 두 개를 딴 것도 대단하고 기뻤어요.

"솔직히 얘기하면 저는 심리적으로 상처가 컸어요. 런던올림픽은 저 혼자서만 준비한 게 아니고, 그 짧은 기록을 위해 전담팀 선생님들과 2~3년간 노력했어요. 그게 제 실수도 아니고 타인(심판)에 의해서 무너져버렸으니. 판정이 번복돼 결승을 뛰고 나서도 감정이 안 좋았어요. 그로 인해 경기를 못 했다고 얘기하고 싶지 않지만, 어쨌든 400m 시합의 결과(은메달)에 대해 쉽게 받아들이긴 어려웠어요. 물론 제 컨디션이 좋았으면 이길 수 있었다고 함부로 얘기할 순 없어요. 그때 중국의 쑨양 선수가 워낙 잘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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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환 선수는“올림픽 포상금 문제는 전지훈련 때 직접 들은 게 아니라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 이명원 기자
―그 상태에서 200m 시합까지 은메달을 땄으니.

"200m 시합에서도 100% 컨디션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은메달 두 개'가 아니라 '올림픽 메달 두 개'를 땄다고 여기니 마음이 편해졌어요. 이게 끝이 아니고 힘든 시간이 왔으니 나중에 더 기쁜 시간이 올 것이라고 믿었어요."

―그럼에도 '공항에서 세리머니를 위해 귀국을 같이 하자'는 말을 듣고도 조기 귀국을 했지요?

"시합 결과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니었어요. 저는 2~3년 동안 외국에 머물렀고 하루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었죠. 런던올림픽에 출전하기 두 달 전에 제 일정을 대한체육회에 전했어요. 짐을 다 싸놓았는데, 귀국 전날 '메달리스트는 행사를 위해 같이 들어가야 한다'는 거예요.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죠."

―연맹 측 어른들도 좀 이해해줘야 하지 않나요?

"이해라기보다, 이건 의사소통의 문제예요. 오해라는 것도 서로 말을 안 하니까 쌓이는 거죠."

―지금의 박 선수를 만든 사람 중에는 여덟 살 때부터 지도해온 노민상 감독이 있었지요. 그는 "내가 태환이를 키웠는데"하는 마음이 있더군요.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을 마치고 그와 헤어졌지요?

"바깥에 나가 시합해보니, 세계적인 기량을 갖추려면 대표팀에서 훈련하는 것보다 전담팀을 꾸려야겠다고 생각했죠."

―노민상 감독의 훈련방식이 힘들었던 것은 아니고?

"힘들었죠. 그분이어서 힘들었다기보다, 운동은 다 힘들죠. 어렸으니까 주는 밥을 그냥 먹은 거죠. 지금이라면 그런 스타일에 맞추기 어려울 것 같아요. 다 어리고 모르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그때 열심히 했으니까 오늘 이 자리에 있지 않았나 생각하죠."

―요즘 연락합니까?

"연락 안 한 지 오래됐어요."

―그 뒤로 호주의 마이클 볼 코치와 쭉 같이 한 것을 보면 서로 잘 맞는 모양이군요.

"이분에게는 내 얘기를 다 해도 괜찮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저에 대해 애정이 각별하다는 걸 느끼고 있으니까요. 그전의 국내 코치들에게는 그런 걸 못 느꼈어요. 신뢰가 없었으니까요."

―볼 코치는 어떻게 해줬길래?

"어떻다고 표현을 할 수가 없지만, 제게 먼저 손을 내밀어 줬어요. 제 마음을 열어줬어요. 고민이 있으면 항상 얘기를 할 수 있었고 이분은 들어줬어요. 이분은 저에 대한 파악을 가장 잘합니다. 가령 제가 몸이 안 좋을 때 그런 말을 꺼내기 전에 알 정도이니까요. "

―박 선수의 시합 중 가장 기억나는 장면은 2007년 세계선수권대회였던 것 같아요. 4위를 달리다가 마지막 50m에서 역전해 금메달(3분44초30)을 땄지요. 세계 무대에서 박 선수의 존재를 알린 시합이었지요.

"훈련 때처럼 레이스를 하다가 마지막에 스퍼트를 냈는데 잘 된 것 같아요."

―4위로 달렸지만 1등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건가요?

"저는 끝(결승점)을 보고 레이스를 하지 않아요. 구간 구간 제 페이스로 했죠. 나중에 1등을 했다는 걸 알고 제가 더 놀랐던 것 같아요."

―레이스를 하면서 앞에 어떤 선수가 있으면 이를 의식해 더 속도를 내지 않나요?

"자기의 구간 기록이 다 있으니까요. 내 페이스를 넘어가서는 안 되죠. 저는 초인적인 사람이 아니에요. 욕망에 넘쳐 오버 페이스를 하면 후반에 못 들어와요. 평소 훈련 때의 페이스대로 시합을 하죠."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3분41초86)을 딴 뒤로 한동안 슬럼프에 빠졌지요?

"다들 슬럼프라고 얘기하는데, 저는 슬럼프가 온 적이 없어요. 슬럼프는 자기가 해도 해도 어쩔 수 없는 무력한 상태를 말하죠. 저는 단지 그 시합에서 성적이 안 좋았을 뿐이었죠(2009년 로마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세 종목에서 예선탈락함)."

―그러면 성적이 안 좋았던 이유는?

"올림픽에서만큼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열심히 훈련하지 않아서 성적이 그렇게 나왔던 거죠."

―왜 훈련을 열심히 하지 않았죠?

"훈련을 열심히 안 했다기보다, '이 정도면 열심히 하는 것'이라는 망상에 빠진 것이었죠."

―그동안 박 선수에게 전담팀을 꾸려준 SK와의 계약이 작년에 끝났고, 지금은 자비(自費)로 전담팀을 꾸렸다고 들었어요.

"이런 부분은 아버지가 아세요."

―아버지는 다른 일은 안 하시고?

"과거에는 개인 사업을 하다가, 지금은 제 뒷바라지를 하시죠."

―김연아 어머니와 비슷하군요.

"그쪽은 잘 몰라요."

―김연아 선수와 가깝지 않은가요? 세상 사람들은 둘을 연결지어 보는데.

"김연아 선수와 연관된 부분을 모르겠어요."

―시합 때 각별하게 응원을 하던데?

"다른 선수들한테도 다 그래요. 김연아 선수는 제가 아는 사람 중 한 명이지, 따로 특별하게 아는 것은 아니에요."

―현역 수영선수로서 한계는 언제 올 것 같아요?

"28살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을 얼마나 관리를 잘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봐요. 제가 언제까지 할지는 모르겠어요. 지금은 아시안게임까지만 계획을 세워놓고 있어요."

―성적과 기량은 향상되고 있나요?

"유지하고 있어요. 저는 경쟁 선수들을 염두에 두지 않아요. 저 자신의 기록만 생각해요."

―훈련을 안 할 때는?

"쉬는 날에는 집 안에서 먹고 자는 걸 좋아해요. 제가 먹는 걸 좋아해, 어렸을 때는 요리사를 하고 싶었죠."

―연예인들과 만난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사실 잘 못 만나요. 누구랑 친하게 지낸다고 하면 '훈련은 안 하고 뭐 한다'는 식으로 댓글이 달려요. 과거에는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훈련은 안 하고 논다고 하지만, 사실 저는 놀고 싶어도 놀 시간이 없어요."

―박 선수는 당초 생각한 것보다 말을 잘하는군요.

"말을 되게 못해요. 저는 바보라."

―왜 바보라고?

"일반 학생들처럼 공부를 많이 못 했기 때문에…. 저는 공부를 못해요."

―그런데 선수 생활이 끝나면 대학교수가 되고 싶다고 했지요?

"교생 실습 때 제 얘기로 학생들이 목표와 희망이 생기는 걸 보고 흥미를 느꼈어요. 교수가 되면 많은 소통을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공부를 안 해봤으니까, 습관이 안 돼 더 힘든 것 같아요. 하지만 나름대로는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는 시계를 쳐다봤다. 학교(단국대 석사과정)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인터뷰로 시간이 없어 점심을 거른 채 출발한다고 했을 때, 자식을 굶긴 아비의 심정이 됐다.
 

# 3

[최보식이 만난 사람] '공동경비구역 JSA'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할리우드 영화 '스토커' 찍은 박찬욱 감독

"내 영화가 피 냄새 나는 極端까지 가길 원해… 현실에선 늘 타협하며 살아"

"난 공포 영화를 잘 못 본다
하지만 내가 만드는 건 안 무섭다
어떻게 가짜로 하는지 아니까"

"관객들에게 자극을 주고 싶다
영화가 끝나도 잊히지 않는
깊은 상처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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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오후 늦은 시각, '스토커' 상영관에는 나를 포함해 관객 다섯 명만 있었다. 박찬욱(50)감독의 할리우드 데뷔작으로 기대를 모았음에도 말이다.

마지막 장면이 냉정한 반전(反轉)으로 끝나자, 옆에 앉은 중년 여성 두 명이 "에이" 하며 일어났다.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은 데 대한 실망의 표시였다.

―당신은 냉정한가?

"이는 내게 부족한 면이다. 냉정할 때 냉정해야 하는데…. 남들은 내게 철저하게 만든다고 하지만, 나는 너무 많이 타협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조근조근 말하고 있었다.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작은 체구였다. 이번 작품도 '복수는 나의 것' '올드 보이' '친절한 금자씨'처럼 광기와 긴장감이 넘치는 스릴러였다.

―조화로운 결말을 원한 관객들의 기분을 배반했다. 해피엔딩에 거부감이 있나?

"내 성격이 냉정한 것과는 다른 문제다.등장인물이 그런 거지."

―당신은 어느 자리에서 "질질 짜는 것은 질색"이라고 했는데.

"감상적인 것, 센티멘털한 것은 피하려고 한다."

―감상(感傷)을 하급(下級)의 감정으로 보기 때문인가?

"사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잘 울고 질질 짠다. 내가 그런 감정에 너무 잘 넘어간다. 이 때문에 경계하는 것이다. 나는 냉정하지 않다. 오히려 소극적이고 내성적이었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직업이 성격을 조금 바꿨다. 지금도 나는 공포영화 같은 걸 잘 못 본다."

―그러면서 본인은 섬뜩한 스릴러를 만드나?

"만드는 것은 전혀 안 무섭다. 어떻게 가짜로 하는지를 다 아니까."

―당신은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은가?

"전달한다기보다는 '함께 생각해보자'고 제안을 하는 것이다. 가령 '복수는 나의 것'(2002년)은 우리 사회의 계급 문제를 다뤘다. 주인공 송강호는 서울 강남에 사는 돈 많은 부자다. 그의 딸이 유괴돼 죽었다. 사실 그는 공고(工高)를 나와 맨손으로 기업을 키웠던 사람이다. 이 때문에 '하필 내 아이를 유괴했느냐, 왜 내가 너의 적이냐'고 묻는 것이다. 이번 영화 '스토커'에는 폭력적 성향, 악마성이 우리 유전자에 각인된 것이냐 아니냐,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사춘기 시절에 아름다움에 끌리는 것처럼 악(惡)에 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아, 영화에 그런 의도가 있었는지 나는 보고도 몰랐다. 아마 다른 관객들도 잔혹과 섬뜩함, 긴장감만 느꼈을 것이다.

"서스펜스도 영화를 즐기는 요소로 중요하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소름끼치는 감각이 이성적인 질문을 자극하길 원한다. 왜 저 인물은 저렇게 충격적일까. 저 인물이 느끼는 고통은 어떤 것일까 하고 말이다. 그래서 모든 영화적인 장치를 동원해 관객들이 보고 듣는 것만이 아닌 만지는 것 같은 느낌, 어떤 장면에서는 꽃 냄새나 피비린내가 나는 것처럼 만들고 싶다. 감각이 자극돼야 이성을 느낀다. 극단까지 가보는 영화를 나는 좋아한다."

―일상에서도 갈 데까지 가보는 상황을 추구하는가?

"정반대다. 현실에서는 대충 살고 웬만한 선에서 타협한다. 그게 불만이어서 영화에서는 극단적으로 찍는지 모른다. 영화 속 인물들과 내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상상에서 만들어낸 것뿐이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고, 감독의 내면이 영화에 투영되지 않는가?

"누군가가 내 무의식을 분석하면 다른 무엇이 드러날지 모르나…."

―본인의 영화가 '킬링 타임'용으로 받아들여지는 데는 억울한 마음이 있겠구나.

"자극을 깊이 주고 싶다. 영화가 끝나도 금방 돌아서 잊히지 않게 깊은 상처를 내주고 싶다."

―민노당 당원으로 알려져 있는데, 지금도 당원인가?

"민노당에서 진보신당으로 바뀌었고 이제 진보신당도 없어지지 않았나."

―민노당의 노선이 옳다고 보나?

"아, 정치 얘기를 해야 하나?"

―영화 작품을 위해 의식적으로도 체제와 맞서는 입장에 자신을 놓는 것이 필요해서인가?

"바로 그거다. 사회 전체의 균형이라는 점도 생각해야 하니까."

―할리우드의 감독 제의는 어떻게 이뤄졌나?

"2004년 '올드 보이'가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상을 받은 뒤로 제의가 들어왔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작품이 별로 없었다. 2009년 '박쥐'를 출품한 베를린 영화제에서 미국 영화 제작사 '폭스 서치라이트' 간부들과 만났다. 이들이 내 영화 취향을 물었다. 재작년에 '스토커' 각본이 왔다."

―할리우드에서는 엄격하게 각본 그대로 찍어야 한다고 들었다.

"대사(臺詞)는 각본대로 해야 한다. 하지만 표정이나 동작은 각본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지 않아, 배우들과 상의한다. 어쨌든 장면을 찍은 뒤 '오케이냐 아니냐'는 감독이 결정하는 것이다."

―언어와 감정적 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나?

"걱정을 많이 했다. 촬영감독과 통역을 데려갔다. 통역을 쓰면 촬영 스케줄대로 못 끝낼 것 같았다. 촬영 전에 배우들을 불러 독회를 하면서 장면 장면마다 내가 왜 이렇게 각본을 썼는지를 알려줬다. 배우들에게 다른 해석이 있는지 들어봤다. 춤추며 키스하는 장면은 촬영 장소에 가서 동선(動線)을 보면서 구상했다. 논쟁할 것은 다 하고 나니, 현장에서는 거의 말이 필요 없었다."

―며칠 만에 찍었나?

"하루 촬영 분량이 정해져 있었다. 일주일에 닷새, 40회를 찍었다. 정확하게 두 달이다. 영화사에서는 촬영 횟수를 지켜달라고 강조했다. 예산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당초 촬영 횟수가 38회였는데, 2회를 초과했다."

―이번에 출연한 니콜 키드먼의 몸값은 엄청날 텐데.

"배우들은 이 영화에 교통비쯤 받는다는 마음으로 출연했다. '폭스 서치라이트'사는 2000만달러를 넘지 않는 예술적이고 독특한 영화를 만드는 걸로 유명하다. 배우들은 자신의 경력을 위해 출연하는 것이다. 니콜 키드먼은 대작(大作)을 찍을 때면 촬영 현장에 운동 기구와 샤워 시설, 침대가 딸린 트레일러를 제공받는다. 이번에는 조그만 화장실과 소파 하나만 있는 트레일러를 썼다."

―할리우드에서는 감독의 권한이 매우 제한적이라고 들었다.

"촬영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니까 '감독은 각본 그대로 영화를 찍고 나면 끝이고 편집실에도 못 들어간다. 박찬욱 감독이 복도에서 서성거리더라'는 소문이 돌았다. 과장된 얘기다. 촬영 후 편집을 하는 10주 동안에는 감독 외에는 못 들어온다. 완성되기 전에 시사회를 가진다. 그 자리에서 전체 흐름이 지루한지, 어느 장면이 어떠한지에 대한 관객 설문조사를 한다. 이를 놓고 영화사 측과 감독 사이에 논쟁과 설득이 이뤄진다."

―이번 작품 '스토커'는 지금까지 당신의 영화 중에서 절제와 영상미학이 가장 뛰어난 것 같았다.

"나는 늘 아름다움을 추구해왔다. 다만 작품마다 아름다움의 성격이 다르다. 이 영화는 상류층 18세 소녀가 주인공(미아 바시코브스카)이다. 주인공과 동갑인 내 딸이 봐도 좋아할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사춘기 소녀가 좋아하는 우아한 아름다움을 살리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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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인터뷰를 위해 '올드 보이'를 다시 봤다. 당신은 과거 작품을 다시 보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칸 영화제에서 보고는 못 본 것 같다. 나는 과거 작품을 안 본다. 내가 만든 영화를 다시 볼 시간이 있으면 더 좋은 영화를 보겠다."

―같이 작업한 배우 중에서 누가 최고인가?

"'올드 보이'의 최민식과 '박쥐'의 송강호다. 이들은 연기 기술자를 넘어서 인간에 대한 이해 통찰력이 있다. 촬영 중에 내가 생각 못 하는 부분을 짚어낸다."

―배우는 타고난다고 보나?

"나 같으면 죽어도 안 된다. 기교와 지식은 알아도 연기를 전혀 못 하니까."

―감독도 타고나는가?

"감독이야 공부하고 훈련하면 될 수 있다."

―고등학교 때 영화감독 꿈을 꾸었다고?

"꿈으로 구체화되진 않았고, 그땐 나와는 거리가 너무 먼 세계였다."

그는 서강대 철학과 재학 중 사진부 서클에 들어가면서 현실적으로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

―대학 졸업 후 영화판으로 찾아간 것은 '생업' 관점에서는 불확실한 진로였지 않은가?

"교수님을 통해 영화 제작사 연출부의 어떤 분을 소개받고 찾아갔다. 요즘 젊은이들보다 철이 없고 현실감각이 없었다. 어떻게 되겠지, 굶어 죽기야 하겠나 했다."

―영화판은 당초 본인이 생각했던 것과 어떻게 달랐나?

"영화감독이 하는 고유의 일을 보고 배워야 하는데, 관찰할 시간이 없었다. 무엇을 가져오라고 하면 뛰어가서 가져와야 하고, 어느 곳에 차가 못 들어오게 통제하라고 하면 영화 촬영 현장과는 떨어져 있는 것이다. 감독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영화 한 편을 끝낸들 무슨 공부가 되겠나 싶었다. 그러나 또다시 영화 한 편을 더 찍으면 연출부 안에서 좀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가고 점점 감독 곁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는 처음 영화를 두 편 찍었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 뒤 몇 년간 영화 평론가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찍은 '공동경비구역 JSA'(2000년)가 출세작이 됐다.

―남의 영화를 비평하면서 자신의 결점을 찾아냈나?

"남의 영화를 꼼꼼히 분석하고 비평을 하는 것이니까, 내 작품에 도움이 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배웠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내 영화를 만들려면 다른 영화를 흉내 내면 안 된다. 오히려 잊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나는 저런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는 배움도 있지 않은가?

"좋은 작품을 보면 '나도 저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욕이 생기지만, 그렇지 않은 작품을 보면 '나도 저렇지 않은가' 하며 의기소침해졌다. 정말 안 좋을 것 같은 냄새가 나는 영화는 안 본다. 한때는 '영화광' 출신 감독으로 분류됐지만. 요즘에는 내가 영화를 얼마나 안 보는지 사람들이 알면 놀랄 것이다. 이제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좋아졌다."

―당신의 영화는 긴장감과 흥미는 있다. 하지만 감동과 울림이 없는 것 같다. 본인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가?

"나는 감동적인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해왔다. 못 느꼈다면 어쩔 수 없다. 그렇다면 내 능력의 한계이겠지만."

―감동을 추구해왔다고?

"그게 목표다."
출처: 조선일보

2013.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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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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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사진
j11c****
영웅
스케이트 29위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김연아 선수

 

이번 세계선수권 끝나고 인터뷰입니다.

http://sports.media.daum.net/general/news/moresports/breaking/view.html?newsid=20130317150409963

 

그리고 이건 CNN 토크 아시아 출연 영상입니다.

http://blog.daum.net/happyhouse0/59

2013.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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