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 52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 판결

이범준 기자

정치탄압 의한 ‘사법 살인’ 고백

사법부 판결 말미에 “잘못 바로잡는다”뿐 사과·유감 발언은 없어

<b>축하받는 장녀</b> 52년 만에 간첩 혐의 무죄를 선고받은 죽산 조봉암의 장녀 호정씨(왼쪽에서 두번째)가 20일 대법원을 나서며 조봉암 선생 기념사업회 관계자들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축하받는 장녀 52년 만에 간첩 혐의 무죄를 선고받은 죽산 조봉암의 장녀 호정씨(왼쪽에서 두번째)가 20일 대법원을 나서며 조봉암 선생 기념사업회 관계자들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대법원이 20일 죽산 조봉암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것은 52년 전 사형 선고와 집행이 정치 탄압을 위한 ‘사법 살인’이었음을 고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군 당국의 불법 수사와 입증되지 않은 공소사실에 근거해 사형을 선고한 대법원의 과오를 바로잡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당시 죽산에게 유죄가 내려진 혐의는 크게 세 가지였다.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진보당을 구성해 중앙위원장에 취임하고(국가보안법 위반) △육군첩보부대(HID) 공작요원을 통해 북한에서 금품을 받고 남한정보를 제공했으며(형법상 간첩죄) △당국 허가 없이 권총과 실탄을 소지했다(군정법령 위반)는 것이다.

1958년 진보당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죽산 조봉암.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58년 진보당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죽산 조봉암. | 경향신문 자료사진

대법원은 이 중 무기소지 혐의에 대해서만 유죄를 인정해 형을 선고 유예했을 뿐 사형으로 이어진 국가보안법 위반과 간첩 등 두 가지 주요 혐의는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진보당을 국가변란 목적의 단체로 볼 수 없고, 조봉암의 간첩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군부대의 영장 없는 체포와 불법감금을 통해 얻어진 증인 진술뿐이라는 게 무죄판결의 근거다.

대법원은 진보당의 통일 정책인 평화통일이 북한의 위장평화통일론과 같다고 볼 증거가 없다는 점도 분명히 밝혔다.

이번 판결은 이용훈 대법원장 취임 이후 계속돼온 사법부의 과거사 청산 작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 대법원장은 2005년 취임 때 과거사 진상규명 의지를 밝힌 데 이어 2008년 사법 60주년 기념식에서 “권위주의 체제에서 사법부가 헌법상 책무를 충실히 완수하지 못해 실망과 고통을 드린 데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며 사과한 바 있다. 이후 인혁당·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등 60∼80년대 긴급조치와 반공법, 계엄법 위반 등의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은 이들이 잇달아 재심을 청구, 무죄 판결을 받았다. 지난해 12월에는 유신체제 유지수단으로 기능했던 긴급조치 1호에 대해 위헌을 선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날 대법원의 재심 선고가 기대에 미흡했다는 지적도 있다.

조봉암 사건은 1959년 2월 대법원이 항소심 사실관계를 파기하고 직접 판단한 경우다. 지방법원이나 고등법원 같은 하급 법원이 아닌 대법원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이 때문에 선고를 앞두고 일부에서는 대법원이 사건에 대해 직접적으로 사과 발언을 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인사청문회에서 “재심사건이 대법원에 올라와 대법원에서 그 사건을 통해 우리 사법의 과거에 대해 한마디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재심사건은 대부분 하급심에서 끝난다. 그래서 과거 문제에 대해 언급을 할 수 없어 섭섭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날 대법원은 특별한 사과나 유감을 표명하지 않았다. 조봉암의 무기 불법소지에 대해 선고 유예를 결정하면서 “피고인에 대한 공소사실 대부분이 무죄로 밝혀졌으므로 이제 뒤늦게나마 재심 판결로서 그 잘못을 바로잡고, 형의 선고를 유예한다”고 밝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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