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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안녕하세요 제가 교회를 다니면서 생각...
비공개 조회수 737 작성일2018.10.25
안녕하세요 제가 교회를 다니면서 생각했는데 마틴루터가 과거에 종교개혁을 하지않았습니까?
지금은 개신교가 그냥 종교로 인정받는데 그당시에는 사이비라고 여겨지지않았을까 생각해봤는데 종교가 워낙 건드리기 예민한 분야여서 부모님이나 목사님에게 여쭤보기 좀 무섭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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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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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루터가 했던 종교개혁 내용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성경의 번역입니다

당시 히브리어로 기록된 성경은 번역을 할 수 없게 해 기득권들과 종교지도자들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수 없던 시민들은 그들이 하는 말들이 다 성경의 가르침인 것으로 생각하고 결과적으로 면죄부판매 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카톨릭은 마틴루터를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그때 당시엔 사이비 보단 신성모독죄로 죽이려 했을 겁니다


2018.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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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바라기 입니다ㅎㅎ
식물신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카톨릭에서 파생되어 나옷곳도
기독교에 일부지만

그 어느곳에 파생되지
않고 순수 기독교도 있었습니다

그 기독교 모두가 합처진것이
오늘 날의 교회입니다

2018.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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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

루터가 종교개혁할 당시 많은 논란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답니다.

종교암흑시대 로마카톨릭에 의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해왔는데요. 5,00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학살당해 왔고,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지키고 회복하기 위해 종교개혁운동을 했다고 봅니다.

그 당시에도 종교개혁자들은 보편적이지 않은 소수들의 역활이였고 이단 취급뿐아니라 기득권에 큰 도전과 위협이였을 것입니다.

작년에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서 월간중앙은 루터 종교개혁 당시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네요.

조금이나마 시대 상황을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될듯합니다.

 


올해는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해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의 사제 겸 신학교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부패한 교회 권력을 비판하며 대학 교회 문 앞에 벽보를 내붙였다. 오늘날 ‘95개조 반박문’으로 잘 알려진 이 글은 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대해 낱낱이 지적한 것이었다. 종교개혁, 정확히 표현해 가톨릭교회의 개혁은 이렇게 시작됐다.

당시 로마교황은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이라고 할 정도로 거의 무한대의 권력을 누렸다. 누구도 멈출 수 없는 타락의 수레바퀴가 굴러갔고, 그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1513년 레오 10세가 교황으로 즉위한 이후부터 로마 가톨릭교회의 도덕적 부패와 물질주의의 만연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교황의 사치스러운 생활로 재정이 바닥나자 교황은 추기경 직과 사제 직을 팔고 급기야 일반 신자들에게까지 면죄부를 판매하기에 이르렀다. 1517년 레오 10세는 죽은 영혼에 대한 면죄권을 교황이 관장한다는 교서를 발행하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중수(重修)를 빌미로 면죄부를 남발했다. 면죄부는 신자들의 기부금을 받고 교황의 이름으로 발행하는 일종의 속죄 증명서다. 당시 면죄부를 팔러 다니던 도미니크수도회 소속 수도승들은 “헌금 상자에 던져 넣은 동전이 땡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이 연옥(가톨릭 교리에서 죽은 자들이 지옥에 가기 전 임시 머무른다는 장소)에서 벗어나 천국으로 간다”며 대중을 유혹했다.


면죄부 판매 논리를 조목조목 비판하며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고 강조한 루터의 주장은 가톨릭교회와 전면 대립했고, 종교개혁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95개조 반박문은 교황권의 본질과 신앙의 핵심에 대한 논점까지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터의 개혁은 중세 가톨릭교회와 교황이 좌지우지하던 신정일치(神政一致)를 깨뜨리고 개신교 시대를 열었다. 중세에 없던 개인, 자유, 국가, 민족,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등장시켜 ‘근대로의 길’을 연 일대 사건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오늘날까지 높이 평가받는 이유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강고했던 로마가톨릭의 아성에 균열이 생겼다. 루터교의 창립에 이어 장로교, 성공회, 감리교, 침례교 등 개신교 여러 교파가 속속 등장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러나 종교개혁 500년이 흐른 지금 교계의 모습은 어떠한가. 루터 시대에 그들이 벗어나고자 했던 교회의 모습과 점점 흡사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의 교회는 “루터가 로마가톨릭의 오류를 지적하고 신앙의 자유를 회복하며 믿음의 개혁을 추진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생명의 진리를 되찾는 진리의 개혁을 하지 못했다”고 밝힌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미완성이었고, 진리의 개혁을 해야 완전한 개혁이 이뤄진다는 설명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말하는 ‘진리의 개혁’이란 과연 무엇일까.


오늘날 세계에는 수많은 교회와 교파가 난립해 있다. 교회마다 성경 해석이 다르고 앞다퉈 자신들의 교회가 천국 복음을 전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성경의 ‘진리’는 하나인데, 각 교회가 진리라고 가르치는 내용은 서로 다르다는 얘기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교회를 떠났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전개됐는가. 하나님의 교회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2000년 전 전파하고 사도들이 지켰던 참 진리’의 파악이 선결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경의 기록으로 보면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사람으로 등장했는데,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는 인류가 지켜야 할 진리들을 실제 행함으로써 직접 본을 보이고 가르쳤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다”는 기록이 그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다.(요한복음 13:15)


예수는 복음 전파를 시작하기 전 물에 들어가 침례를 받았다.(마태복음 3:16) 세례는 물을 뿌리는 의식인 반면 침례는 물에 적시거나 담그는 예식이다. 죄의 몸을 물로 장례 지내고 새로 거듭난다는 의미다. 교단에 따라 세례라고도 부르나, 하나님의 교회는 성경 원어 의미대로 침례라 한다. 사도 베드로는 침례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설파했고, 침례를 구원의 표라고 했다.(사도행전 2장, 베드로전서 3장)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일요일 아닌 토요일에 예배





▎루터의 고향 독일 아이슬레벤 마크트광장에 세워진 루터 기념동상.
 

예수는 직접 예배하는 본도 보였다. 누가복음 4장에 예수가 안식일을 지키는 장면이 나온다. 안식일은 일곱째 날로 창세 때부터 거룩함과 축복이 약속된 날이다.(창세기 2:1) 날짜는 오늘날 칠요일 제도상 토요일이다. 십자가 이후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안식일을 규례로 지킨 기록이 사도행전 13·16·17·18장에 있다. 오늘날 대다수 교회가 일요일에 예배하는데,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일요일이 아닌 토요일에 예배를 본 것이다.


당시 예배나 기도를 할 때 남자는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여자는 머리에 수건을 썼다.(고린도전서 11장) 오늘날 개신교회는 남자와 여자 모두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예배를 본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여자가 수건을 쓸 뿐 아니라 신부·추기경 등 남자도 머리에 모자를 쓴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새 언약의 유월절(누가복음 22장)을 비롯해 3차의 7개 절기를 신령과 진정으로 지켰다. 해당 절기들은 유월절·무교절·초실절(부활절)·칠칠절(오순절)·나팔절·속죄일·초막절이다. 각 절기마다 죄 사함·영생·부활·성령 등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돼 있다.


구약시대 여호와 하나님은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새 언약을 세우리라”(예레미야 31:31)는 예언을 했다. 그 예언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해 인류의 구원을 위해 새 언약을 세웠다. 하나님의 절기인 유월절 날에 떡과 포도주를 가리켜 “이 떡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약속한 것이다.(누가복음 22:15~20)

유월절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되므로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요한복음 6:53~54), ‘(유월절 포도주는)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마태복음 26:26~28)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십자가 사건 이후 그리스도를 영접한 바울도 새 언약 유월절을 전파하며 이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고린도전서 11:23~26)


하나님의 교회는 이처럼 그리스도가 직접 본을 보이고 사도들이 지킨 새 언약의 진리가 참 진리라고 말한다. “성경에는 그러한 새 언약을 지켰던 교회가 기록돼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베드로, 요한 등 열두 제자가 다녔고,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이 멘토로 삼는 바울도 다녔던 교회”라고 덧붙였다. 그 교회의 이름은 ‘하나님의 교회’였다. 고린도전서 1장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소속된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라고 나와 있다. 갈라디아서 1장에서는 바울이 과거 유대교에 있을 때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했다”고 고백한 기록이 있다. 이 교회는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 없이 따랐다. 십자가 사건 이후 세계 복음이 더욱 활발해지면서 이스라엘을 넘어 유럽과 아시아로 전파됐고, 사도들이 생존해 있던 A.D.106년께까지 지속됐다.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18953

2018.10.26.

  • 출처

    월간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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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솔직하게 목사님께 물어보세요 성경곽독교에대한 질문은 목사님께서도 기쁜마음으로 친절하게 대답해주실거예요 지식인에 물어보면 신천지분들이 답할확률이 높기때문에 궁금한건 목사님께 물어보세요

2018.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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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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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종교개혁 사건이 정말로 "종교개혁"이었는지 한 번 따져봐야 합니다.

종교개혁이란 사실상 종교개혁이 아니라 개신교(프로테스탄트)가 태동한 종교 분파(교회 분열) 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닐는지, 즉 종교개혁이란 이름은 르네상스 이후 근대 권력을 잡은 상공계층의 시민 권력들(이들은 개신교 신자로 전향한 경우가 많았습니다)이 실은 개신교 태동의 사건에 대해 그들 자신이 부여한 이름일 여지가 많다고 보여집니다. 이미 그 당시 중세 말부터 독일은 도시의 상공계층이 매우 발달되어 있었고 도시 자체도 -특히 북부 지방은 더욱- 어느 정도 자유롭게 자치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200년 간 지속되었던 중세 말의 십자군 전쟁의 실패는 이를 매우 가속화했던 점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정황에서 교회의 정치권력에서 자유롭고자 했던 제후들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루터의 소위 종교개혁은 진정한 의미로서 종교(교회)를 개혁시킨 것일까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나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처럼) 가톨릭 교회를 개혁시킨 것이 아니라 가톨릭 교회를 분열시켜 새로운 분파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종교개혁이라고 부르기에는 힘듭니다.

심지어 루터가 주장한 오직 믿음 사상은 선행을 무시하고 그저 믿기만 하면 자동으로 구원받아 천국에 가게 된다는 심각한 병폐를 낳기도 했습니다.

또한 루터가 가난한 민중의 편에 서지 않고 그 당시 권세를 누리던 독일 제후들의 비호를 받았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겠습니다. 그는 소위 가진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이 농민들을 학대하고 학살하는데 여지없이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개신교의 시조인 칼뱅이나 헨리 8세 등도 다 비슷비슷한 전력이 있고요.

분명히 말하지만, 적어도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소위 종교개혁자들은 존경받을 만큼의 위인은 절대 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에서는 여전히 지고한 추앙을 받고 있는 실정이며, 그럼으로써 그들 신학의 한계와 모순 그리고 그들의 잘못된 만행들에 대해서는 곧잘 묻혀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실상 16세기 소위 종교개혁은 명칭 그대로 종교개혁 운동이 아니라 당시 헤게모니를 둘러싼 권력 쟁탈전이었으며 그 와중에 하나였던 서방 교회가 분열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종교개혁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며, 종교분파 내지는 교회 분열 사건 정도에 더 가깝습니다.

2018.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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