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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아돌프 히틀러
02hy**** 조회수 7,992 작성일2013.01.10

 아돌프 히틀러의 인생과 어린시절,나의 투쟁의 이야기등을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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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4월 20일 생으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국경지대인 브라우나우에서

하급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히틀러의 어린 시절...나중에 희대의 개썅놈이 된다)

 

아버지는 알로이스 히틀러(1837년 6월 7일~1903년 1월 3일)로 세관원이었죠

 

어머니는 알로이스의 하녀였던 클라라 히틀러(1860년 8월 12일~1907년 12월 12일)로

나중에는 알로이스의 세번째 아내로 들어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요한 게오르그 히들러로 게오르그는 유대인 설이 있던 사람이라

 

히틀러는 유대인이었다

 

라는 떡밥을 제공한 인간이기도 하죠.

(게오르그 히들러는 나중에 히틀러로 이름을 바꾸면서 자연히 알로이스 히들러도 알로이스 히틀러가 됩니다.)

 

아돌프는(여기선 히틀러 집안이니 혼동을 막기위해 이름을 씁니다) 원래 꿈은 화가였으며 미술가 지망생이었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꽤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다녔으나

 

고등학교 시절부터(한국의 중학교수준) 학업의 흥미를 잃어버렸고

나중엔 퇴학당합니다.

 

아돌프의 아버지는 가끔 아돌프를 폭력와 폭언을 해댔지만, 아돌프는 오히려 울지 않고

아버지가 떄린 횟수를 셌을 만큼 아돌프는 이때부터도 우직한 아이었죠(뭐...좋은 뜻은 아니니...)

 

아돌프의 꿈은 화가였으나 아버지는 공무원이 되길 원하셧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매일 충돌이 일어났었죠

 

1903년 1월 가족끼리 나란히 식사를 하던 도중 알로이스는 식도염으로 사망을 하게 되고

 

나라에서 들어오는 연금으로 아돌프네 가정은 빠듯하게 살아갔죠

 

 

(비엔나 카를 성당, 아돌프 히틀러의 그림)

 

히틀러는 무작정 빈으로 올라가 국립아카데미에서 입시를 보게 되나

떨어집니다. 그 후 클라라(아돌프의 어머니)의 유방암 증세가 악화되었고

 

아돌프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1907년 숨을 거둡니다.

 

그리고 이때가 아돌프 히틀러가 처음으로 울었던 때라고 합니다.

(히틀러는 평생 운 적이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했고, 자신의 마음을 열었던 유일한 상대가 어머니라고 합니다. 그는 항상 어머니의 기일에는 방안에 어머니 초상화를 걸어두고 밖으로 나가지 않는 다고 합니다.)

 

그 후 히틀러는 또다시 빈으로 올라가 미술대학에 입시를 보게 되지만 또 떨어집니다.

 

그리고 무일푼 알거지 신세가 된 히틀러는 거리를 전전하면서 조그만 초상화를 팔면서 생활을 유지합니다.

 

그리고 거지들의 생활속에 반 유대주의가 점점 자라면서 그는 골수 나치빠 반 유대주의자가 됩니다.

 

후에 그는 국경을 몰래 넘어가 독일 뮌헨에 정착하고 그곳에서 어찌어찌 살다가

 

1914 7월 28일 세르비아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제1차세계대전에

독일군으로 자원 입대하여 가스테러를 받고 야전병원으로 실려가기 전까지

전쟁에서 자신의 맡은 바를 탁월하게 수행하였으며

그 결과 철십자 훈장도 수여받았습니다.

 

(보통 히틀러가 제복위에 걸친 철십자 훈장도 바로 이 훈장입니다.)

 

후에 1차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고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군은 10만명으로 육군이 축소됐으며 실업자가 된 독일군들은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서

독일 시내를 깽판치고 다니던, 말그대로 당시 독일상황은 레알 아비규환 산 지옥이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

 

1919년 동맹국, 연합국 각국의 대표가 프랑스 베르사유에 모여서

독일을 아주 그냥 밟아서 재기 불능 상태로 만들어버린 조약

 

1.알자스-로렌 지방을 프랑스로 양도할 것

2. 20년 안에 1,320억마르크를 갚을 것

3. 육군의 규모를 10만명으로 축소할 것

4. 전차, 전투기의 최신무기의 보유를 금지 할 것

5. 해군의 병력은 1만 5천, 경 순양함은 6척, 구축함은 12척, 낡은 전함은 6척으로 제한 할 것

등 입니다.

 

 

하지만 이 개같은 조약은 오히려 히틀러에게 득이 됩니다.

 

독일군 수뇌부는 히틀러에게 이번에 새로생긴 듣보잡 당이 좀 흥미로우니 니가 가서 보고해라

라고 히틀러를 뭔 듣보잡 십샹쿠 같은 당에 보냅니다.

 

그 당이 바로 국가 노동자당(Deutsche Arbeiterpartei=DAP)

나중에 우리가 잘 아는 나치당입니다.

 

초대 당주는 안톤 드렉슬러로 양주장(....)

 

히틀러는 나치당과 자신의 레알 2000%싱크로율을 온 몸으로 느끼는 걸 감지하고

히틀러는 감시라는 명목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국가 노동자당 찌끄러기들이 선술집에서

왱알앵알거리는것에 졸라 뿅가서 오히려 지가 입당합니다.

 

히틀러는 그곳에서 연설능력을 인정받고 1923년 안톤 드렉슬러가 탈당함에 따라

제 2대 당주가 됩니다.(우왕 잉간승리!)

 

그리고 그는 국가 노동자당(Deutsche Arbeiterpartei)를 국가 사회주의 노동당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NSDAP)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나치당의 심볼마크 하켄크로이츠 Hakenkrouz)

 

 

흔히 사람들이 나치당이 앞글자 NA와 뒷글자 ZI를 합쳐서 나치(NAZI)가 됬다고 하는데

틀린겁니다 ㅇㅇ

사실 나치는 히틀러의 반대파가 히틀러를 얕잡아 부르기 위한 단어로

앞뒤 막힌 수구꼴통이란 뜻입니다.

(근데 히틀러는 수구꼴통 맞습니다)

 

 



(히틀러의 연설 연습장면)

 

그리고 히틀러는 탁월한 연설을 이용, 독일을 자신들의 땅으로 만들고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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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개뿔

 

그는 국가전복을 위해 뮌헨의 반동파들에게 무기 지원을 받고

왕당파와 보수파의 지원을 원했으나 왕당파와 보수파는 국가전복을 위한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1차세계대전 당시 참전한 독일의 영웅인 에리히 루덴도르프와 히틀러의 오른팔인 헤르만 괴링, 그리고 나치당의 2인자인 그레고어 슈트라서등이 참가하여 쿠데타를 꾸밉니다.

 

그는 1923년 11월 8일 SA돌격대를 무장시키고

(*SA돌격대 : 나치당이 만든 깡패집단)

뮌헨의 선술집에 폭동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비어 홀 폭동으로

 

 

당시 뮌헨 술집에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고위관료들이 모여서 술마시며 회의중이었고

그 사실을 안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 관료들을 잡아서

 자신들의 세상으로 만들자!!라는 생각이었는데.....

 

왠지 모르게 독일자체가 폭동에 대해 껄끄럽게 생각했고

독일 육군 총사령관 한스 폰 젝트 장군은 히틀러의 폭동을 쿠데타로 규명

 

오히려 경찰들이 깽판치는 SA돌격대들을 막아서고 총질 해대니 수명의 SA돌격대는 사망이오!

히틀러는 튀다가 지혼자 자빠져서 어깨 탈골이요!

 

나치당은 불법으로 낙인찍히고!!

 

결국 히틀러는 법정으로 넘겨졌고 사형감이었던 히틀러는 탁월한 연설로

5년형 선고

 

란츠베르크 감옥에 수감됩니다.

 

그곳에서 히틀러는 졸라 중2병 스러운 글들을 적었고

나중에 3제국의 2인자가 될 루돌프 헤스가 감수하여 나온것이 바로 

히틀러의 저서이자 베스트셀러 나의 투쟁(Main Kampf)입니다!

 

(히틀러는 감옥에 수감될 동안 자신의 방안에 승리의 상징인 월계관을

장식할 정도로 쿠데타를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히틀러는 모범수란 이유로 1년만 복역하고 나왔고

 

불법이 된 나치당을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히틀러는 자신의 친위부대인 SS친위대를 창설하고 연설의 천재 괴벨스를 이용하는 등

(*SS친위대 : 나중에 독일의 제4번째 군대가 되는 독일의 엘리트집단

근데 전쟁중 유태인 너무 학살하고 다니는 병크짓 저질렀다)

히틀러는 필사적이었다.

 

그리고 당시 독일 상황도 경제 대공황까지 겹쳐서 독일내 경제 사정은 닥트리오 수준이었다.

(*경제 대공황 : 1929년 10월 뉴욕에서 부터 시작된 세계적 경제 파탄으로

독일은 이때 살아날 것 같았던 경제상황이 완전히 깽판쳤다)

 

이 대공황으로 인해 나치당은 민족주의의 극을 달하던 독일인들에게 지지를 받게 되고

1928년 총선에선 2.6%에 불과하던 것이 1932년에는 36.7%로 급 부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수상으로 임명되고 1934년 8월 2일 독일의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노환으로

서거함에 따라 히틀러는 총리 겸 수상인 총통을 선포하고

(그래도 국민선거를 거쳤고 약 98%의 국민이 찬성했다.)

 

나라 이름도 독일3제국(3국가 라는 뜻도 된다. Reich는 영토라는 뜻으로도 읽을 수있음)으로 바꾸고

나치의 이름아래 독일3제국은 천년제국으로 굳건히 버틸것이며 수도도 게르만의 수도라는

게르마니아로 바꾸고...

(11년뒤 독일은 깽판 지대로 친다.)

 

이렇게 정치초보 히틀러를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올린 지지자들은 많았으나

그중 뽑으라면 SA돌격대의 총사령관 에른스트 룀일 것이다

 

그는 비어홀폭동에도 참가한 히틀러의 지지자였고 비어홀폭동 실패이후 남아메리카에 잠적했으나

히틀러가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복귀한 히틀러의 골수 지지자였습니다.

 

 그는 나치스정권 수립이후 SA가 베어마흐트(2차대전당시 독일군의 정식명칭)에 편입될 것을 바랬으나

히틀러와 장군들의 반발로 무산이 됬고 히틀러는 룀을 없애길 바랬습니다.

 

결국 히틀러는 룀을 숙청하기 위해 룀에게 쿠데타 의혹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정적을 숙청하기 위한

"긴 칼의 밤" 사건을 벌입니다(1934년 6월30일)

 

에른스트 룀과 SA돌격대원들은 바이에른 주의 바트비스제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는데

그 날(6월 30일) 오후 6시 30분 히틀러와 그의 경호원이 호텔로 들이닥쳐 룀과 SA지도자들을 끌어냈고

그들을 뮌헨의 슈테델하임 감옥에 가뒀습니다

 

사실 히틀러의 이 숙청작업은 히틀러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한건 아닙니다

애초에 SA돌격대는 나치당 제1의 준군사조직이었고 그들은 자신들이 독일의 군사조직 장악을 요구했고

일부는 사회주의 혁명을 주창했습니다

 

결국 긴 칼의 밤으로 인해 나치당 2인자인 그레고어 슈트라서, 바이마르 공화국 마지막 수상인 폰 슐라이허

그리고 에른스트 룀 이외의 SA돌격대원들이 숙청당했고 SA의 세력은 히틀러의 친위조직인 SS에게 넘어갑니다(그래도 2차대전 기간동안 SA의 수는 SS보다 많았고 베를린 공방전때 베를린 방어임무를 맡음)

 

그리고 히틀러는 군수산업을 키워서 약 6백만명의 실업자를 구제하고

감옥시설을 늘려 범죄자 증가를 막는 등 그나마 히틀러의 업적이라면 업적

(하지만 히틀러는 철저한 남성우월주의자로써 여성들을 일자리에서 몰아내는 대신 양육비를 지원했고

여성들의 일자리에 남성들이 들어서면서 뭔가 취업률100%같지 않은 100%가 달성됩니다)

 

그래도 실업자가 줄고 돈을 많이 버니까 자연스레 강대국대열에 다시 합류했고

그 결과로 1936년 올림픽이 베를린에 개최됩니다

 

 
 

 

(1936 베를린 올림픽 8월 1일~16일)

 

히틀러가 인종주의자라는건 초등학교 졸업하신 분들이라면 당연한 상식

 

하지만 히틀러는 나치독일은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 라는 인식을 세계에 심어주기 위해

올림픽 기간동안만은 유태인 및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을 없앱니다

 

인종차별한다는 나라를 방문했더니 오히려 환영해주니 많은 사람들은 "구라네 ㅋ"했을 정도

 

하지만 인종차별이 없어졌다고 해도 베를린 올림픽은 평가가 극렬하게 나뉘는 올림픽 축제였습니다

 

제 11회 올림픽(베를린 올림픽)이 세계적으로 대단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올림픽은 당시 시대가 경제 대공황이었고 또한 깨끗하고 정직해야 될 축제가 정치로 얼룩졌다는 점

(세상에 정치 안묻는 올림픽이 어딨냐!)

 

제9회 올림픽(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5월17일~8월12일)에서 최초로 성화가 도입됐지만

그것은 성화 불만 피우는 것이고 올림픽 개최국부터 불을 가져와 성화를 피우는 것은

베를린 올림픽이 최초였습니다

 

그리스 아테네부터 무려 3000km!가 달하는 거리를 직접 운반해서 성화 봉송 이벤트가 진행되었으며

최초로 텔레비젼 생중계가 시작된 올림픽이란 점에서 베를린 올림픽은 매우 점수가 높은 올림픽 축제였습니다.

 

또한 농구, 카누, 핸드볼이 이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정식종목으로 채택 되었으며 폴로(구기의 일종)는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없어졌답니다

 

하지만 정치적, 군사적인 느낌을 어필하게 위해 경기장에 하켄크로이츠를 개양했으며

시내 곳곳에도 하켄크로이츠로 도배를 했으며 히틀러 자신은 물론 관계자들 까지 군복을 입히고 로마식 경례(하일 히틀러)를 하도록 했습니다

 

철저히 히틀러의 계산으로 만들어진 베를린 올림픽은 아리아인의 우수성을 강조하긴 충분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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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적이고 기사다운 시합은 인간의 최고의 자질을 깨웁니다.

그것은 이해와 존중 안에서 전투원(선수)들을 분리시키지 않고, 오히려 단합시킵니다.

그것은 또한 평화의 정신 안에서 국가들을 결속시키는 것을 돕습니다.

그것이 올림픽 성화가 죽어서는 안되는 이유입니다."

 

(히틀러가 연설한 올림픽 개회사 이 글은 나치의 선전부 장관인 요제프 괴벨스가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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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회에는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있죠

당시 조국이 일본에 손아귀에 넘어간 마라톤 금메달 리스트

손기정 선수를 말이죠

 

그는 베를린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남승룡선수와 함께 출전했고 2시간 29분 19초 라는 신기록을 세우고

금메달을 땁니다

 

하지만 그는 친구에게 보낸 엽서에는 일제 치하라는 슬픔으로 인해 "슬프다"(엽서에는 슬푸다 라고 써져있음)라고 썻습니다 ㅠㅠ

 

 

(슬푸다!!?)

 

그리고 여담으로 손기정선수는 히틀러와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난 유일한 한국인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손기정은 금메달을 받을 때 히틀러와 만났으며 '160센티인 내 키에 비해 그의 손은 크고 억셌으며 체구는 우람했다. 그리고 독일을 이끌어가는 통치자답게 강인한 체취를 풍겼다' 라고 회고했습니다

 

어쨋든 올림픽은 끝났고 나치의 인종탄압은 리턴하게 됩니다

(어서와 인종차별은  익숙하지?)

 

 

그는 베를린 올림픽 직후 1938년 자신의 고향이란 이유와 독일민족이 산다는 이유로

1938년 3월 12일 독일군이 오스트리아 빈으로 진격하고 오스트리아 나치당과 오스트리아 내 독일인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병합을 찬성하는 내용의 투표를

독일군이 대놓고 경비하는 투표소에서 진행됩니다

 
 

 

(병합을 찬성합니까?)

(           아니오)

 

 

그리고 히틀러는 같은 논리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집어삼키기 위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영국 등 강대국의 밀실 야합인 뮌헨 회담을 통해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란트를 양도받고 더 이상의 영토욕심을 내지 않겠다고 회담에서 밝혔으나

히틀러는 결국 체코슬로바키아 전부를 집어삼킵니다

 

그러던 중 나치의 인종주의가 겉으로 표출되는 사건이 터지는데

그것은 바로 수정의 밤(Kristall nacht)입니다

 

수정의 밤은 1938년 11월 9일 나치 당원 및 SA, SS대원들이 독일 전역의 수 만개의 유태인 상점과

시나고그(유태인 사원)을 습격하여 방화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91명의 유태인들이 죽었으며 3만여명이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깨진 유리파편들이 달빛에 비추어진 모습이 수정과도 같다고 해서 붙여진게 수정의 밤 사건입니다

 

 

그 후 히틀러는 자신이 독일을 살릴 인물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고

자신이 죽기전에 모든 일을 끝내야 했고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킬 준비를 합니다.

(하지만 2차대전을 일으킬려면 사실상 1944년에 일으켜야만 독일의 군사력이 안정되지만

히틀러는 자신이 죽기전에 유럽정복을 해야된다는 구실로 5년 압당겨서 폴란드를 침공합니다.)

 

그리고 그는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일명 전격전(Blitzkrieg)로 6주만에 점령하고

(뒤치기한 소련군 덕분이기도 하지만)

 

영, 불, 폴 군사방위 조약을 맺은 영국과 프랑스는 곧바로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하지만

1939년 9월 부터 1940년 5월까지 선전포고만 했지 사실상 서로간의 교전이 없었던

앉은뱅이 전쟁(Stizkrieg)라고 불립니다

 

이 앉은뱅이 전쟁의 결과는 결국 프랑스 침공으로 이어져 1940년 6월22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프랑스는 독일의 영토로 귀속됩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영국과의 화합을 원했으나 당시 영국의 수상인 처칠은 결사항쟁을 외쳤고

히틀러는 영국 본토 상륙작전인 바다사자 작전을 계획하고 독일이 제공권을 장악하기 위해

독일공군(Luftwaffe)과 영국공군(Royal air Force)과의 교전인 배틀 오브 브리튼(Battle of Britain 영국 항공전)을 개시하지만 영국의 기적적인 승리로 나치독일은 1,887대의 항공기를 잃었고 영국상륙작전을

무기한 보류(사실상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소련 침공작전을 대비하기 위해서도 바다사자작전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나치독일은 1941년 6월22일 동맹국이었던 소련을 공격하였고 장비의 운용법을 잘 알고있었던(그니까 만렙) 독일에 비해 실전경험이 없었고, 갑작스럽 기습으로 인해 소련은 일방적으로 밀릴 수 밖에 없었고

소련의 모스크바, 스탈린 그라드등 소련의 내부 깊숙히까지 점령했으나 나치의 코카서스 유전지대 확보를 위한 전투인 스탈린 그라드전투에서 대패하였고 결국 역사는 바뀌게 됩니다

 

추축국과 나치에 유리했던 전쟁은 연합군 측으로 바뀌었고 결국 나치는 밀리고...또 밀리고

 

서부전선에는 코쟁이들이 배타고 노르망디에 상륙까지 벌이고...

 

결국 1945년 4월29일 자신의 여자친구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하고

 다음날 베를린에 입성한 소련군이 오기 직전 지하벙커 안에서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Ps. 나치당의 심볼마크인 스바스티카(Swastika)=하켄크로이츠(Hakenkrouz)는

탄생에 대한 여러 설이 있는데

 

1. 북 유럽의 룬 문자다.

2. 게르만의 행운의 상징이다.

3. 볼셰비키를 견제하기 위해 히틀러가 제작했다.

4. 히틀러의 어린 시절 다니던 교회의 장식에서 따왔다.

 

라고 하는데...전 개인적으로 4번 설을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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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생애동안 반 유대주의 및 게르만 우월주의에 사로잡혔으며

약2천만의 타 인종을 학살했고

 

특히 아우슈비츠는 약6백만의 유대인 중 5백만을 학살한 홀로코스트의 산 역사 이기도 하죠

 

그의 친위부대인 SS친위대는 전쟁중에도 단지 다른인종 이란 이유로 민간인도 학살했다고 합니다.

 

ㅎㄷㄷ 히틀러 미친새끼

2013.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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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1.30 나치당 당수로서 독일 총리에 임명되다


1932년 히틀러는 대통령 결선 투표에서 36.8%의 득표율로 낙선했다. 아쉬운 패배였지만, 이듬해인 1933년 1월 30일 제 1당인 나치당의 당수로서 총리에 임명됐다. 이날을 가리켜 비극의 탄생이라고 해도 될까? 히틀러의 나치 독일 시대가 비로소 도래한 것이다.

쿠데타 실패 10년 만에 권력을 쟁취, 히틀러의 나치 독일 시대 시작

대통령 선거에서 히틀러를 누른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이미 86세의 고령이었다. 그는 젊고 강력한 독일의 지도자에게 총리라는 실질적인 권력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는 1923년 뮌헨에서 권력 쟁취를 위해 쿠데타를 획책하다가 투옥된 적이 있는데, 10년 만에 다른 방식으로 권력을 얻은 것이다. 총리가 된지 수년 만에 독일 국민은 히틀러에게 열광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분명한 목표를 정해두고 총리가 되었는데, 무너진 경제를 되살리고 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잃어버린 조국 땅을 되찾고, 유럽을 포함한 러시아까지 무력으로 합병하는 것 등이었다. 거기에다 어려서부터 체질화된 광적인 반유대주의는 유대인 말살정책으로 현실화되었다.

히틀러는 글라이히샬퉁(Gleichschaltung), 즉 획일화 정책을 통하여 독일 국민을 광장에 모았다. 1차 세계대전 이후 패닉 상태를 헤매던 독일 경제는 호전되고 있었다. 600만 명의 실업자들은 거리를 헤매다가 대부분 군대와 직장으로 돌아갔다. 국가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아우토반이 건설되었고, 비틀 자동차가 생산되었다. 독일은 1차 세계대전 패전 결과 자국을 옥죄던 베르사유 조약을 능멸하면서 군비를 증강해나갔다. 그러나 이웃국가들은 항의하는 흉내만 냈다.


독일 총리로 권력을 잡을 당시의 히틀러(1933년)

히틀러는 독일 뿐 아니라 전 세계 불행의 원인을 유대인에서 찾았다. 유대인은 마르크스주의자와 볼셰비즘을 전개했으며, 교활한 자본주의 힘까지 더해 지구상의 민족들을 정복하고 파멸시키려고 한다고 철썩 같이 믿었다. 이 믿음이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총리에 취임한 날부터 질풍노도처럼 몰아쳐 2차 세계대전과 아우슈비츠까지 내달린 결과 오늘날까지도 히틀러는 상처로 남아 있다. 인생의 결정적인 한 시기에 우리의 운명은 급반전한다. 독일은 히틀러의 총리 취임으로 무시무시한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다. 히틀러는 젊은 시절부터 독일의 작곡가 바그너에게 열광했다. 바그너의 오페라 서곡을 나치당의 당원이었던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 연주로 들으면서 히틀러의 평전을 읽는 금요일 저녁은 매우 어두웠다.

불 같은 아버지와 애지중지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 낙제생

“모든 점에서 히틀러의 길은 모범적인 경우다. 어떻게 민주주의 제도들을 서서히 무력화시키고 항복하도록 강요할 수 있는지, 어떻게 국내에서나 국제무대에서 적들을 차례로 속여서 이길 수 있는지, 아무리 저항해도 소용이 없는 테러 체제를 선전과 폭력을 통해서 어떻게 건설하는지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어떤 폭력적인 지배자의 생애도 권력의 지점들을 거쳐서 마침내 진짜 파괴욕 속에서 퇴화하는 과정을 그처럼 완벽하게 보여주지는 못한다. 이런 과정은 히틀러의 상승과 몰락을 교과서적인 모범으로 만들고 있다.”

냉정하고 엄격했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1839~1903년)


요하임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의 한 대목이다.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 국경지대의 소도시 브라우나우에서 태어났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세관 고위공무원인 아버지와 그의 세 번째 부인인 클라라 히틀러가 어머니이다. 현모양처의 전형인 어머니는 몇 명의 자녀를 유아기에 잃은 뒤 얻은 히틀러를 애지중지 키웠다. 불 같은 성격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낙제생인 아들을 엄하고 무섭게 다루었고, 어머니는 그러한 아버지로부터 귀한 아들을 보호했다. 어린 시절 히틀러는 ‘목적’ 없는 아이였지만, 바그너의 세계를 꿈꾸었다.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관람하고 그의 영혼에 강력한 천둥번개가 쳤다. 이러한 장면은 니체를 떠올리게 한다. 니체 역시 젊은 시절 바그너에 열광했다. 하지만 훗날 바그너의 음악은 단순한 음악과 예술이 아니며 무대 효과를 통해 사람들을 최면상태에 빠뜨리고 세뇌한다는 비판적인 예언을 했다.

그의 예언이 가장 비극적으로 드러난 경우가 히틀러이다. 히틀러는 바그너의 음악을 통해 막연하게나마 정치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실업학교를 겨우 졸업한 히틀러는 화가가 되고 싶은 보헤미안으로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시도 쓰고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신은 그에게 화가의 운명을 주지 않았다. 여러 차례 미술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지고, 생계를 위해 그림엽서에 그림을 그려주었다. 순수화가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굴욕적인 삶을 살고 있던 몽환적인 청년인 히틀러에게 결정적인 인생의 전환점은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과 1차 세계 대전이었다.

"어머니를 땅에 묻은 이후 한 번도 운 적이 없다"

“(어머니의 죽음 소식을 듣고) 침상에 몸을 던지고 뜨겁게 달아오른 머리를 이불과 베개에 묻었다. 어머니를 땅에 묻은 그날 이후로 나는 한 번도 운 적이 없다. 이런 일을 일으킨 원흉에 대한 증오가 자라났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서 나의 운명을 점점 분명히 자각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자각은 유대인이 독일에 치명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에서 바그너의 장엄한 악극처럼 독일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몽환적으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전쟁에서의 패배로 국토의 일부를 내놓고, 막대한 전쟁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은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히틀러는 이러한 현실을 직시했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화가로서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은 것과 비슷했다. 그는 한 시절, 자신은 순수 화가이며, 아카데미 화가, 혹은 문필가라고 자칭하고 다녔다. 그는 이루고자 하는 세상과 이룬 세상을 구분하지 못했다. 히틀러의 꿈이 화가나 예술가로 지속되었다면 에드거 앨런 포 같은 비극적인 개인의 운명에서 그쳤을 것이다. 그는 탁월한 대중 선동의 연설가이면서 냉철한 정치인이었다. 그 재능은 게르만 신화를 바탕으로 바그너가 추구한 ‘이루고자 한 세상’에 접목되었다. 그러자 한 개인이 인류를 얼마나 황당한 지경까지 몰고 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가 되었다.

"유대인이 언론 자본을 장악하고 세계를 정복하려 한다"는 음모론

당시 유럽에서 떠돌고 있던 반유대주의는 오스트리아 빈의 정치선동가 카를 뤼거(Karl Lueger)에 의해 잘 드러난다. 그는 ‘대중에 대한 영향력이 유대인의 손에 있고 언론계의 상당 부분도 그들이 장악하고 있으며 자본, 특히 거대자본의 대부분이 유대인의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나라에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테러를 행하고 있다’고 연설했다. 히틀러는 뤼거의 대중선동에 공감했다. 그리고 소시민들이 전후 빈곤과 사회주의에 대해 불안해 하는 원인을 유대인들에게서 찾았다. 그는 병적인 상상력으로 유대인들이 세계를 정복하려 한다는 음모론에 집착하고 이 세상에서 유대인을 인종 청소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탁월한 대중연설가로서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다양한 얼굴 표정(1944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히틀러는 독일에 대한 열망으로 독일 군에 입대했으며, 무공을 올려 1급 철십자장을 받고 제대했다. 그는 탁월한 대중연설가로 변신하면서, 조금씩 자신의 추종자를 만들어나갔다. 연설은 대부분 유대인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유대인과 그들을 돕는 자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연설은 전후 비참한 독일의 속죄양을 찾고 있던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뮌헨의 주요한 투사이자 선동가가 되어 작은 규모의 정치집단인 독일노동자당에 입당한다. 히틀러는 독일노동자당의 당기를 디자인했으며, 당명도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NSDAP, 일명 나치스)로 바꾸었다. 이 시절부터 히틀러는 술도 담배도 여자도 멀리하고 연설을 통해 자신의 분노와 꿈을 해소하고 실현시키고자 했다. 히틀러의 나치당은 광적인 반 유대주의자이면서 정치 깡패인 율리우스 슈트라이허(Julius Streicher)의 노동협회와 통합하면서 2만 명이 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독일을 광란의 도가니로

1923년 11월 9일 히틀러는 쿠데타를 꾀했다. 무력으로 정부를 전복하고자 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고 방법을 바꾸었다. 일 년의 감금생활 동안 깊은 사색과 독서를 통해 자기가 걸어야 할 길을 잘 닦아놓았다. 그것은 대중 선동을 통한 집단 애국주의의 발현이었다. 그는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바탕으로 치욕적인 베르사유 조약을 넘어서 국토 확장과 경제 번영을 독일 국민에게 약속한다.

히틀러의 최측근인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우리가 권력을 쥐게 되면 결코 그것을 놓지 않을 것이며… 사람들은 시체가 된 후에만 우리를 그 자리에서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한 이 글은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결과를 미리 써놓은 듯 하다. 정권을 장악한 히틀러는 각종 긴급조치와 법률개정을 통해 독일을 광란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그를 견제하는 세력들은 총살당하거나 비참하게 일선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방문했을 당시 베니토 무솔리니와 함께(1934년)

1923년 히틀러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던 루덴도르프 장군은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이 광적인 사내는 우리나라를 나락에 빠트리고 국민들에게 무한한 비극을 몰고 올 것’ 이라는 편지를 썼다. 하지만, 가속도가 붙은 눈 덩어리처럼 점점 크게 굴러 떨어지는 히틀러를 견제할 세력은 존재할 수 없었다. 유대인에 대한 정책도 날이 갈수록 가혹해지다가 1935년 9월 5일에 통과된 ‘뉘른베르크 법’에 의해 독일 내 유대인들을 독일인들과 격리시켰다. 즉 유대인들에게 정치적 사안에 대한 모든 투표권을 박탈하고, 관직에서 배제시켰으며 심지어 유대인과 아리아인의 결혼과 성관계마저 금지시켰다. 독일에 있던 많은 유대인들은 떠나기 시작했다.

"독가스로 유대인 1만 5천명 정도만 죽일 수 있다면···"

1937년 가을부터 히틀러는 자신의 정치적 공세를 군사적 공세로 바꾸었다.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를 향한 총구는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독일에서도 학생과 지식인 정치인들이 광적인 독재자 히틀러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독일의 양심을 보여주었던 백장미단의 활동, 쾨르델르가 주동이 되었던 1944년의 히틀러 정권 전복 기도와 군 내부에서 일어난 히틀러 암살 기도 등이다. 전쟁 영웅이었던 롬멜 장군은 히틀러 암살 실패 사건으로 히틀러로부터 자살을 강요 받아 죽었으나 히틀러는 오히려 최대한 호화로운 국장을 치름으로써 왼손으로 오른손에 묻은 피를 닦는 정치적인 역량을 보여주었다.

독일 베를린 올림픽 개막식장에서의 히틀러(1936년)


이어서 히틀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참극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그는 자서전 [나의 투쟁]에 이렇게 쓴다. ‘독가스로 그 타락한 히브리 민족을 1만 2천명 내지 1만 5천명 정도만 죽일 수 있다면, 전선에서 수백만 명이 희생된다고 해도 헛된 일은 아니다.’ 아우슈비츠는 유대인들의 무덤이었지만, 그것은 너무나 참혹하였기에 결국 히틀러의 거대한 무덤이었다.

그가 전쟁을 도발하면서 세웠던 목표는 거의 다 실패로 돌아갔다. 폐허가 된 독일. 세계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대신 전 영토와 경제적 기반, 국력, 독립, 도덕성마저도 잃어버렸다. 단 하나만이 성공적이었다. 대서양에서 볼가 강 사이의 유대인들을 거의 완전하게 말살한 일이었다. 그는 자살하는 순간까지도 독일 패전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렸다. 후손들에게 인종법을 ‘철저하게’ 준수하라고 당부했다. 1945년 4월 30일 나치와 히틀러는 죽었다. 하지만 죽은 자의 영혼은 산 자의 몸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이 날은 독일인과 전 세계인이 ‘타 문화에 대한 소통’을 거부한 댓가로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얻게 됐는지 다시금 깨닫게 된 날이다.

 

오스트리아의 하급 세관원의 아들로 태어난 히틀러는 13세와 18세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었다. 다민족국가였던 오스트리아는 정책적으로 독일계 민족을 소외시켜 그들의 언어조차 지켜 나가기가 어려웠다. 이에 독일인들의 통일적 민족국가에의 염원이 어릴 때부터 타올랐고 이러한 민족에의 광적인 집념이 싹트기 시작한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에 지원병으로 입대하였다. 독일이 패전한 후 1919년에는 9월 독일노동자당(나치스)에 가입하였다. 1920년에 당의 선동가로서 정치활동에 전념하는 한편 당내(黨內)의 독재자가 된 그는 1923년 뮌헨에서 봉기(히틀러의 봉기)를 획책했으나 실패하고 란츠베르크 형무소에 투옥되었는데 이때 《나의 투쟁 Mein Kampf》을 출판하였다.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는 수상으로 임명되고 일당독재(一黨獨裁)체제를 확립하였다. 1944년 일부 장군들과 정치가들이 반란을 꾀했으나 히틀러 암살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1945년 4월 30일 그는 베를린이 함락되기 직전에 자살하였다.

2013.01.11.

  • 출처

    네이버 캐스트 or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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