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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우간다 내전
yep2**** 조회수 6,250 작성일2015.12.20

우간다 내전에 대해 좀 알려주세요

 

우간다 내전에 대해서 조사해야 하는데요

 

좀 알기 쉽게 정리된 것이 없더라고요

 

누가 봐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A4용지 반 정도 채워질 만큼만 알려 주세요

 

진짜 급하니까 빨리요 

 

욕설, 비난 등은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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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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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내 우간다 내전 위치

우간다 내전 지도

개요

1962년 독립이래, 우간다는 권력 투쟁과 이로써 발전된 내전으로 2014년 현재까지 분쟁 국가로 남아있다. 우간다는 독립 이후 약 20여 년 동안 법질서의 부재, 쿠데타의 연속으로 극심한 정정 불안정을 이어왔지만, 1986년 무세베니가 집권한 후로는 그의 강력한 국정운영과 이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로 통치체제의 안정성을 어느 정도 확보해왔다. 그러나 그의 집권이 장기화되고 특정 집단만이 편파적인 이익을 획득함에 따라, 우간다는 ‘신의저항군(Lord's Resistance Army)'라는 새로운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1) 우간다 독립 이후 권력 투쟁 (1966년~1986년)

우간다는 1894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어 1962년 독립할 때까지 영국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1961년 우간다는 영국의 자치령이 되어 1961년 3월 1일 첫 선거를 실시 후 키와누카(Kiwanuka)가 이끄는 민주당이 승리하여 첫 수상에 취임하였고, 영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1962년 10월 독립 이후 정부의 구성을 둘러싸고 '중앙정부제,' '느슨한 연방제,' '부족을 중심으로 한 지역 왕국' 등을 주장하는 그룹이 각각 대두되면서 의견이 대립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우간다 정국이 불안해지기 시작한 것은 1966년 밀턴 오보테(Apollo Milton Obote) 수상이 헌법의 효력을 중지시키고 정부의 권력을 통합하며 대통령과 부통령을 축출하면서부터이다. 오보테는 1967년 9월 헌법을 선포하고 공화제를 선언하였으며, 대통령의 권한을 일층 강화하는 한편, 부족 왕국들을 폐지시켰다.

그러나 1971년 1월 25일 오보테는 이디 아민(Idi Amin Dada Oumee)이 이끄는 군사쿠데타로 축출되었다. 아민은 자신이 대통령임을 선포하였고, 의회를 해산하고 자신이 절대권력을 쥘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하였다. 아민이 통치한 8년 동안 경제는 피폐되었으며, 사회는 분열되었고, 극심한 인권유린이 자행되었다. 특히 아민이 주로 탄압한 부족은 오보테와 그 추종자들의 출신부족이었으며, 군부에서도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아촐리(Acholi)족과 랑고(Lango)족 등이었다. 1978년 국제사법재판소는 아민의 집권 기간 동안 적어도 10만 명 이상의 우간다인들이 테러로 살해되었다고 추정하였다. 다른 일부 국제인권 관련 기관들은 30만 명 이상이 살해된 것으로 보고 있다.

아민의 탄압으로 인하여 많은 이들이 주변국 중 특히 탄자니아로 망명했고, 이들은 우간다민족해방전선(United National Liberation Front, UNLF)이라는 조직을 설립했다. 1978년 탄자니아군은 이러한 UNLF의 도움으로 탄자니아 영토로 침입한 아민의 우간다군과 리비아 지원군을 격퇴하였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1979년 4월 11일 탄자니아의 지원을 받은 UNLF는 수도 캄팔라(Kampala)를 비롯한 전 국토를 장악하였고, 아민은 8년간의 반인도적인 독재자의 생활을 마감하고 리비아로 피신했다(나중에는 이라크로 옮겼으나 결국 2003년 8월 16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지병으로 숨을 거두게 된다.)

이디 아민이 축출된 이후 UNLF는 주축이 되어 과도정부를 구성하였고, 룰(Yusuf Kironde Lule)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동 정부는 내각제를 채택하고 준의회의 성격을 띤 국가자문위원회(National Consultative Committee, NCC)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1979년 대통령의 위상과 권력을 놓고 각 정파 간의 의견 충돌이 심화되자 NCC는 룰 대통령을 해임하고, 비나이사(Godfrey Binaisa)를 새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과도정부 내에서 대통령의 위상과 관련한 각 정파 간의 권력 투쟁이 지속됨에 따라 1980년 5월 비나이사도 축출되었다. 비나이사를 축출한 무완가(Paulo Muwanga)는 군사위원회(Military Commission) 위원장으로서 국가를 통치하다가, 5월 22일부터 1980년 12월 15일까지는 대통령 위원회(Presidential Commission)의 의장으로서 실질적인 국가수반의 역할을 수행했다.

1980년 12월에 치러진 선거에서 전직 대통령인 오보테(Obote)가 이끄는 우간다인민의회(Uganda People's Congress, UPC)가 승리하여 오보테가 대통령으로, 무완가가 군사위원회 위원장이 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한편 총선에서 패배한 오보테 정권의 적대 세력인 요웨리 무세비니(Yoweri Museveni)와 그가 이끈 우간다애국운동(Uganda Patriotic Movement, UPM)은 본거지를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Nairobi)로 옮기고, 오보테 타도를 목적으로 국민저항운동(National Resistance Movement, NRM)과 국민저항군(National Resistance Army, NRA)을 조직하여 게릴라전을 개시했다. 오보테는 반란을 기도한 반정부 NRA와의 대결자세를 강화하고 전국적인 토벌작전을 강행해 이들을 무력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도 캄팔라(Kampala) 북부의 루웨로 지역 등 주요 지역이 파괴되었고, 일반 주민들을 포함하여 약 20만 명이 사망하는 등 오보테 정권은 세계 최악의 인권탄압을 자행함으로써 대내외적인 비난을 받았다. 이로써 국민들의 분노와 저항을 산 한편으로 군 내부에서 아촐리족과 랑고족의 갈등이 심화됨에 따라, 오보테 정권은 1985년 7월 27일 아촐리족이 중심이 된 쿠데타에 의해 붕괴되었다. 쿠데타를 지휘한 오켈로(LoaraOkello) 준장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오보테는 잠비아로 피신하였다.

국방군사령관인 오켈로 장군은 국가수반으로 추대되어 반군 조직인 NRA와 협상을 개시했고, 인권신장, 종족 간 경쟁 종식, 자유공정 선거 추진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러나 오켈로 군사정권은 1985년 가을 나이로비에서 케냐의 모이(Moi) 대통령의 중재 하에서 정전 및 연립정부 구성 등에 관해 협상한 것을 NRA가 일방적으로 파기하자 대규모 살상과 파괴를 자행하였다. 양측은 1985년 말 정전에 합의하였으나, NRA측이 지속적으로 전투를 전개하여 1986년 1월에는 수도 캄팔라를 점령하는 등 전 국토를 장악하였으며, 오켈로 대통령은 이웃 수단으로 도망하였다.

2) 무세베니와 LRA 분쟁 (1986년~2013)

1986년, 새로이 정권을 잡은 NRA의 지도자 무세베니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무세베니는 취임 후 국민저항평의회(National Resistance Council, NRC)를 조직하고, NRA의 정치체인 국민저항운동(NRM)의 일당체제를 구축하였다. 무세베니와 여당인 NRM은 인권 상황의 대폭적인 개선, 언론 자유 등을 통한 민주화, IMF와 세계은행 등과의 협의를 거친 경제 개혁 등을 실시하였다. 또한 무세베니 대통령은 민주화를 위해 새로운 헌법을 도입하기로 하였고, 이에 따라 1995년 7월 자유선거를 통해 제헌의원들이 선출되어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여 10월 8일 정식 선포하였다.

무세베니와 NRM은 1996년 5월 우간다 역사상 최초로 실시된 대통령 및 의회의 직접선거에서 75%라는 압도적 득표로 대승하였다. 무세베니 대통령이 이끄는 국민저항운동(NRM) 정권은 취임 직후 정권의 기반을 강화하는데 주력하고, 부패 추방을 위해 검찰 및 사법제도의 개혁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또한 무세베니 대통령은 사회주의 게릴라의 과거를 접고 경제 부흥을 위한 자본주의 전도사로 변신하였다.

그러나 무세베니는 집권 기간이 길어질수록, 초반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역행하는 권력욕을 보이며 이와는 상반된 방향으로 국가를 이끌어갔다. 2001년 3월 10일, 무세베니는 대통령 선거에서 69%의 지지를 얻어 재선에 성공하였다. 그런데 2005년 헌법 개정으로 3선()제한 조항을 삭제한 후 2006년 6월에도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2011년 2월에도 당선되어 2014년 2월 현재까지 약 20년 가까이 집권하고 있다.

또 무세비니와 NRA는 자신들의 적대세력인 우간다 북부지역 인종, 특히 아촐리족에 대한 잔인한 보복행위를 일삼았다. 이에 따라 아촐리족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무장세력들이 나타났는데, 대표적인 조직은 우간다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된 이른바 ‘신의저항군(Lord’s Resistance Army: LRA)’이다.1) 이 조직은 자신이 성령으로부터 영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라퀘나(Alice Lakwena)의 성령운동(Holy Spirit Movement, HSM), 즉 종교적 근본주의 운동을 모태로 하였다. HSM이 1988년 정부와의 교전에서 패배한 이후 라퀘나가 케냐로 도주하자, 조셉 코니(Joseph Kony)가 대신 이 단체의 권력을 잡은 데서 시작되었다.

코니 세력은 또 다른 무장세력인 우간다인민민주군(Uganda People's Democratic Army, UPDA)과 합세하여 게릴라전을 실시하였으며, 마을에 대한 기습공격을 통하여 납치행위를 자행하고 민간인을 살해하였다. 이에 1988년 무세베니 대통령은 평화협정을 추진하여 UPDA의 지도자의 협상에는 성공하였으나, 코니와 협상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또 아촐리족 1명을 내각의 일원으로 신임하여 코니와 대화하고자 하였으나 이 역시 소용없었다.

이에 따라 무세베니 정부는 1991년 ‘북부작전’이라는 군사작전을 통하여 코니 세력을 섬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는 실패하였고, 오히려 코니 세력을 강화시키는 역효과를 야기했다. LRA로 명칭을 변경하고 재조직을 한 것도 이때이다. 또한 이전까지는 종교적 근본주의를 추구하였던 반면, 무세베니를 타도하는 것과 우간다 북부지역에 독립국을 건설하는 것으로 조직의 목표가 바뀌었다. 한편 우간다 북부지역과 인접하고 있는 수단이 지속적으로 LRA에 대해 무기 및 위성장비 등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러한 문제가 점차 대두됨에 따라 수단과 우간다는 외교관계를 일시적으로(1995~1999년) 단절하기도 했다.

1996년 무세베니가 직접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됨에 따라, 폭력 양상은 훨씬 더 심화되었다. LRA는 우간다 정권을 위협할 만한 세력은 아니었지만, 수단에 거점을 두고 북부 국경지역에서 살인, 납치 등 심각한 대규모 인권 유린 행위를 야기해옴으로써 역내 불안을 가중시켰다. 특히 2002년 한 해 동안 반군 세력은 잦은 비인권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5월에는 LRA 반군 리더인 조셉 코니가 470여 명의 수단 민간인을 사살하고, 소녀와 여성들에게는 강간과 납치를 자행하였으며 마을에 불을 지르기도 하였다.

이처럼 코니는 LRA를 이끌며 지난 20년 동안 우간다 중앙정부를 상대로 북부 지역에서 게릴라 전쟁을 펼치다가, 2005년 아프리카 중부 지역으로 도망친 것으로 알려졌다. 10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고 어린아이들을 납치해 게릴라군으로 투입하거나 성매매에 넘긴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에 제소된 것이 도망친 이유였다. 그는 2006년부터 공개수배를 받고 있으나 2014년 현재까지도 체포되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 2012년에는 미국 비영리단체 인비저블 칠드런(Invisible Children)가 코니의 반인륜적 범죄를 전 세계에 알림으로써 그를 2012년 말까지 체포할 것을 촉구하는 ‘KONY 2012’이라는 30분짜리 동영상이 전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한편 2006년 대통령선거를 통해 정권 연장에 성공한 무세베니 대통령은 강력한 리더십 하에 부분적으로 정치적 안정을 이루기도 하였으나, LRA 반군 측과의 평화협상과 관련해서는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2008년 1월~2009년 1월 기간 동안 LRA가 1,000명 이상의 민간인들을 살해하였고, 이로써 DR콩고, 수단과의 국경지대에 걸쳐 13만여 명의 이주민이 발생하였다. 더욱이 LRA는 1987년 반정부 공격을 개시한 이래 2006년 말부터는 무장공격을 인접 국가들에까지 확대시켰다. 이에 2008년 말부터 우간다, DR콩고, 남수단 무장세력들이 ‘천둥번개작전’(Operation Lighting Thunder)을 전개하여 LRA 세력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LRA 측은 민간인들에 대한 공격 수위를 높였다.

그러나 2008년 이래, 지도자 코니의 부재는 LRA의 세를 점진적으로 약화시켰다. LRA 내 분파가 생겨난 가운데 코니가 이들과 원활한 연락을 지속할 수 없었고, 이에 따라 무장세력들이 점점 와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2012년 1월 이후 코니의 전투군의 약 15% 정도가 변절하였으며, 2013년 8월 기준, 잔존하고 있는 약 500명의 LRA 반군 중 절반만이 전투자원이라고 한다.2) 2014년 2월 보고에 따르면, 2013년 한 해 동안만 LRA가 우간다 전투원의 20%를 잃었으며, 잔존세력에 의한 폭력행위는 약탈행위 등에 그치고 있다. 그러나 코니가 은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중앙아프리카공화국(Central African Republic)에서의 LAR 세력은 약해지지 않고 있으며, 이들은 여전히 협상에 응하거나 항복하지 않고 있다.3) 2014년 10월 현재, 코니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고 있다.4) LRA의 세력은 현저히 줄어들어 약 250명만이 아프리카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5) 이 조직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아프리카연합군이 우간다에 파병되어 있으며, 미 국방부는 이들을 돕기 위해 2014년 3월 23일 공군 특수부대원을 포함한 150명의 병력을 우간다로 파견했다.

분석

[의미 및 영향]

우간다 내전의 근저에는 우간다 남부와 우간다 북부 간의 유서 깊은 갈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미 식민지배 때부터 시작되어 영국에 의해 조장된 남북 간의 분열은 아민 대통령과 오보테 대통령이 각각 반대세력에 자행한 폭력적 인권탄압으로 심화되었고, 뒤이어 남부인들로 주로 구성된 무세베니와 NRM의 승리에 의하여 고착화되었다.6) 이러한 과정 중 북부지역에 거주하는 종족 중에서도 소수민족에 속하는 아촐리 종족은 영국 식민통치에 의하여 전투원으로 훈련받았고, 우간다에서 최초로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오보테는 이들을 랑기족과 함께 군부의 핵심세력으로 활용하였다. 이 두 종족은 아민이 정권을 잡은 후 대량 학살되었으나, 오보테가 복권되면서 다시 군부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군부 내 두 종족 간의 의견차와 대립으로 아촐리족 오켈로 준장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후 오켈로 대통령은 다시 그의 적대세력인 무세베니가 이끄는 NRA에 패배하였다. 남부인으로 구성된 NRA는 아촐리족에 대한 보복 행위를 일삼았고, 이로 인해 북부 지역과 아촐리족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LRA가 부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간다 내전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폭력이 지속되는 것은 이를 통해 쟁취하고자 하는 목표, 이를테면 아촐리족의 보호나 독립 국가의 건설 때문이 아니라, 단지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재생산하는 과정을 어느 한쪽도 중단할 의지가 없었기 때문임을 깨닫게 된다. 사실 1986년부터 무려 28년 간 우간다 내전의 중심, 뿐만 아니라 역내 불안정의 주요 원인이 되어온 LRA는 뚜렷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LRA는 자신들이 북부 우간다의 아촐리 민족의 분노를 대변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고, 조직의 형성된 동기가 이와 완전히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역설적이게도 현재 LRA가 치루고 있는 전쟁의 대척점에는 현 우간다 정부뿐 아니라 아촐리족도 있다.7) 아촐리족은 LRA의 보호를 받기는커녕 LRA에 의하여 학살을 당하거나, 강제 징집되거나, 성폭력을 당해왔다. LRA는 이러한 희생을 LRA에 복종하지 않은 대가로 합리화했으며, 이를 자신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정부에 대한 분노와 실망감을 부채질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8)

한편 정부는 지속적으로 군사적 해결 방안을 택해왔고, 이러한 전쟁상태를 전략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자신의 세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한 측면이 있다. 즉, LRA의 존속에 따른 위기상황의 지속은 정부의 정치·경제·사회적 개혁을 뒤로 미룰 수 있게 하는 변명거리가 되어준 것이다. 또한 LRA와의 내전 상태는 우간다의 국방비 증가에 대한 합리적 명분이 되어주었으며, 무세베니가 자신의 지지기반을 중심으로 군부 요직을 구성하여 1986년부터 이들의 충성경쟁을 받아올 수 있었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만일 공동의 적이 없었다면, 무세베니 세력 내부에서도 종족, 지역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LRA의 확고한 섬멸은커녕 국가적 갈등 구조를 해결하지 못하는 무세베니가 권력에 대한 직접적 도전 없이 30년간의 강력한 독재 정치를 구가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마지막으로 우간다 내전은 우간다와 수단 간의 국가적 대립도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수단은 LRA에게 활동 근거지와 무기, 의약품, 식량 등을 제공함으로써 내전의 시작보다는 내전의 지속에 기여한 측면이 크다. 이는 우간다 정부가 남수단 독립 전에 수단인민해방운동(SPLM)을 도운 것에 대한 보복의 차원으로서, 폭력이 폭력을 재생산하는 우간다 내전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준다.

[추후 전망]

우간다의 전망은 전적으로 무세베니 정권의 정치적 결단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제사회의 밀도 있는 압박 덕분에 조셉 코니가 몸을 피해 나타나지 않고 있고, LRA는 거의 와해되었다. 물론 조셉 코니를 축출하여 그를 둘러싼 LRA를 완전히 섬멸해야 하는 숙제가 남아있긴 하지만, 이제 우간다 정부는 전쟁으로 인한 북부 지역의 인도적 위기를 회복하는 동시에 그간 미루었던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친 갈등 구조 해결에 주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무세베니 대통령 역시 보다 냉정한 도덕적 평가를 받을 필요가 있다. 조셉 코니라는 더 악한 존재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무세베니의 독재정치와 인권 유린이 국제 사회의 비난을 덜 받은 측면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무세베니가 1당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국제사회의 저명인사들은 그를 아프리카를 이끌 새로운 지도자로 평가하기도 했다.9) 그러나 한 국가의 지도자가 선거를 통해서 30년 가까이 그 자리를 합법적으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넌센스나 다름없다.

그러나 우간다 정부가, 특히 무세베니 스스로가 30여년 지속되어온 최고 권력을 내려놓고 우간다의 정치적 발전을 감행할지에 대해서는 대단히 회의적이다. 무세베니가 2016년에 또 한 번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는 설, 무세베니가 그의 아들에게 권력을 승계한다는 설 등이 무성하다.10) 더욱이 최근에는 언론의 자유에 대한 탄압이 증가하고, 동성애자, 여성 등 소수자나 약자에 대한 인권 침해 행위가 무세베니 개인의 자의적 판단을 따르고 있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다.

더욱이 2014년 2월 초, 우간다는 영국의 털로우(TULLOW), 프랑스의 토탈(TOTAL), 중국해양석유총공사(CNOOC) 등 국제 석유회사와 석유 생산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하면서 그간 협상으로 인해 늦어졌던 석유생산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석유 생산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입과 이에 따른 특권층의 지대 추구 활동은 무세베니 정권을 존속시키기 위해 필요한 효과적인 정치적 수단이 될 것이며, 우간다의 정치·경제·사회적 발전을 더디게 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간다 내전 (KIDA 세계분쟁 데이터 베이스, 한국국방연구원)

201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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