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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헨델의 모든것을 알려주세요..
jjw5**** 조회수 27,047 작성일2005.05.17

헨델의 생사연도

헨델의업적

헨델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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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인테리어 66위, 욕실 28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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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답변참고하시고 문제해결에 도움되시기 바람니다....

헨델의 모든것???먼저 아래사이트를 누르시면 할렐루야 음악이 나옴니다.....

 http://blog.daum.net/kmn7069/1698075

 

음악을 들으면서 설명을 읽으면 도움이 많이 됨니다.....수고^^

아래내용은 전남중등 음악사랑회에서 퍼온 내용임니다.....

 

헨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1685-1759)

Georg Friedrich Handel

 

 

출생과 환경

 

1685년 독일 작센지방 할레에서 출생. 아버지는 궁정 의사였고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었다.

9세 때부터 오르간 연주자인 F.차하우에게 사사하여 작곡의 기초와 오르간을 공부하였다. 그 후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한때 할레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였으나 18세 때 함부르크의 오페라극장에 일자리를 얻어 이때부터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20세 때 오페라 《알미라:Almira》(1705)를 작곡하여 성공을 거두고 이듬해 오페라의 고향인 이탈리아로 가 로마에서 A.코렐리, A.스카를라티의 영향하에 실내악을 작곡하는 한편 피렌체·베네치아에서 오페라 작곡가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1710년 하노버궁정의 악장(樂長)으로 초빙되었으나 휴가를 얻어 방문한 런던에 매료되어 12년 이후는 런던을 중심으로 이탈리아오페라의 작곡가로 활약하게 되었다. 12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오페라 《충직한 양치기:Il pastor fido》 《테세오:Teseo》를 작곡, 상연하고 18∼20년에는 찬도스공작의 후원 아래 종교음악의 명작 《찬도스 앤섬:Chandos Anthoms》 11곡을 작곡하였다. 또 19년에는 주로 이탈리아오페라의 상연을 위해 ‘왕립 음악아카데미’를 설립하여 다른 두 이탈리아인 작곡가 G.B.보논치니, A.아리오스티와 함께 그 지배인이 되었다. 그 후 약 10년 동안 창작력의 전성기에 들어선 그는 오늘날까지도 상연되고 있는 이탈리아오페라의 명작 《라다미스토:Radamisto》 《오토네:Ottone》 《줄리어스 시저:Giulio Cesar》 《타메를라노:Tamerlano》 《로델린다:Rodelinda》 《아드메토:Admeto》 《톨로메오:Tolomeo》 등을 작곡하였다. 또 21년에는 초기의 명작 오라토리오 《에스테르:Esther》를 작곡하였으나 28년부터 그 후 약 10년간은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헨델의 운세가 점차 기울어 갔다. 중산계급을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던 영국의 시민계급이 궁정적·귀족적인 취미를 배경으로 한 이탈리아오페라에 대해 반발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28년 대사(臺辭)에다 민요선율을 곁들여 당시의 귀족사회를 통렬히 풍자한 J.C.페푸시 작곡의 《거지 오페라:The Begger’s Opera》가 상연되어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자 왕실 음악아카데미는 부득이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나 헨델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듬해에 아카데미를 재건, 헤이마게트극장을 근거로 한때 옛날의 인기를 되찾았으나 33년 경쟁상대인 보논치니의 이탈리아오페라와 《거지 오페라》의 협공을 받고 두 번째 극장을 폐쇄하게 되었으며, 34년 세 번째로 이탈리아오페라 이탈리아오페라의 기치를 들고 코벤트 가든 오페라극장 경영에 나섰으나 3년 후인 37년 마침내 건강악화와 경제파탄으로 오페라 작곡가 겸 극장 경영자로서의 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헨델은 32년경부터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예찬되고 있는 《메시아:Messiah》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그는 32년의 《에스테르》 개정판에 이어 35년 사순절(四旬節)에는 성가작품을 포함한 약 15편의 오라토리오를 헤이마케트극장에서 연속 연주하여 점차 오라토리오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또 36년에는 《메시아》에 버금가는 유명한 오라토리오 《알렉산더의 향연:Alexander’s Feast》을 작곡하고 38∼51년까지도 거의 모두를 오라토리오의 작곡에 경주하였다. 39년 구약성서에 입각한 위대한 서사시적인 드라마 《사울:Saul》과 《이집트의 이스라엘인:Israel in Egypt》을 발표하면서 다시 건강을 회복한 그는 왕성한 창작력으로 41년에는 고금의 명작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작곡하였다. 《메시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의 정수(精髓)를 순수하고도 감동 깊게 전해 주는 명작이다. 그러나 헨델의 수많은 오라토리오 중에서 주로 서정적 요소를 강조하며, 접속하는 칸타타형태를 취한 이 작품은 오히려 예외적인 작품에 속한다. 그의 오라토리오의 본질은 현실무대의 제약을 벗어난 가상적 무대에서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모체로 하는 보편적·윤리적인 관념을 전개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그는 종교적 감동을 주는 서정적 표현에 뛰어났고, 오페라작품 속에 축적한 선명한 이미지를 환기시켜 그것을 드라마틱하게 구사하는 능력이 탁월하였다. 이런 점에서 주목해야 할 작품이 앞서 언급한 《이집트의 이스라엘인》과 함께 46년의 작품 《마카베의 유다:Juda Macabaeus》 등이다. 《메시아》 이후에도 그는 《삼손:Samson》 《벨샤자르:Belshazzar》 등 뛰어난 오라토리오를 많이 작곡하였으며, 51년 오라토리오 《입다:Jephtha》를 작곡하던 중 시력을 잃었다. 그러나 실명한 후에도 오라토리오의 상연을 지휘하는 한편 조수의 도움으로 구작(舊作)의 개정에 힘썼다.

 

헨델은 오페라(46곡), 오라토리오(32곡) 등 주로 대규모의 극음악 작곡에 주력하였지만 기악방면에서도 상당히 많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유명한 관현악곡모음곡 《수상의 음악:Water Music》 《왕궁의 불꽃놀이음악:Royal Fireworks Music》 외에, 작품 6의 합주협주곡, 작품 4·7의 오르간협주곡, 작품 2·5의 트리오소나타, 작품 3의 오보에협주곡, 그리고 20년에 출판된 하프시코드용의 모음곡 등은 모두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다. 종교곡으로는 앞서 말한 11곡의 《찬도스 앤섬》 외에도 유명한 작품으로 유트레히트와 데팅겐의 전승(戰勝)을 축하한 《테 데움:Te Deum》 등이 있다. 26년에 영국에 귀화하였고 사후 최고의 영예인 웨스트민스터성당에 매장되었다.

 

작품의 특징

 

헨델의 음악은 직접적이고 양적이며 또한 인간적이다 . 구성적으로도 또한 화성상으로도 그리고 전조상으로도 헨델의 직인적인 면밀한 음처리의 묘사, 물샐 틈없는 충실감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내성의 깊이에는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상투작이며 촌스럽고 거친듯한 소박한 수법이 적잖이 눈에 뜨인다. 그러나 헨델의 이러한 결점은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단순 명쾌한 어법으로 노래하는 솔직한 표현과 극적인 박력 앞에는 가려질 수 밖에 없다.

1743년 메시아가 런던에서 초연되었을 때의 광경은 헨델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광경이였다. 할렐루야 코러스가 나오자 관람석에 앉아 있던 왕은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벌떡 일어나 버렸다. 이것을 본 다른 사람들도 모두 따라 일어섰다는 일화는 대단한 화제거리였다.

명쾌한 어법, 극적인 표현력, 성악적인 경향,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중들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그 외향적 기질 이러한 헨델의 음악세계는 그 자신만이 가진 경향이다. 그 장에서 신속히 청중을 이해시켜야만 하는 극장 음악가로서의 유일한 매력이요, 수단이었다.

 

Hallelujah Messiah 헨델 할렐루야

 

George Frideric Handel (1685∼1759)

 

헨델오라토리오 “메시아” 중에 나오는 이 할렐루야는 종교적 바탕으로 힘차고 장엄함이 특색이다. 1742년 런던 초연에 참석한 영국의 왕 조지2세가 ‘할렐루야 코러스’ 부분에서 감격한 나머지 기립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오늘날에도 그 부분에서는 전원이 기립하는 관습이 내려오고 있다.

 

Messiah

 

모든 음악 가운데 가장 감격스러운 음악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메시아'는 헨델이 57세가 되던 해(1742년) 4월 12일 아일랜드의 더블린(Dublin)에서 초연되었다. 메시아란 말은 구세주라는 뜻이나 본래는 기름을 부은 자란 뜻인데, 그것이 다시 신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자 혹은 괴로운 자를 해방하는 자 등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물론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더블린 시민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던 그 공연에서 헨델 자신도 상당한 수익을 얻기는 했으나, 그 음악회가 애초부터 자선음악회였던 만큼 그 수익의 대부분은 자선사업의 기금으로 쓰였다.

 

'메시아'가 종교음악임에는 틀림없지만 헨델의 오라토리오가 거의 다 그렇듯이 '메시아'또한 교회를 위한 교회음악이라기 보다는 극장에서 상연할 목적으로 작곡된 연주회용 작품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기독교 신자거나 비신자거나를 막론하고 전세계 음악 애호가들로부터 가장 광범위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종교 음악이라는 한계를 아득히 벗어나 인류 공유의 위대한 음악적 유산으로 승화되고 있다. 좌절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허덕이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광명과 영광 그리고 열광을 되찾았던 것일까? 그것은 헨델 자신이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장 혹독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이 곡이 작곡된 탓이기도 할 것이다.

 

이탈리아풍의 오페라에 실증을 느끼고 새로운 음악양식을 갈구하던 영국의 청중들과 비평가들로부터 소외당하고, 한때는 온 영국을 지배했던 헨델도 이제는 음악회마다 실패를 거듭하던 끝에, 마침내 영어의 대사를 사용한 오라토리오를 몇곡 작곡했다. 그러나 그것도 그가 누렸던 왕년의 명성을 하루 아침에 그에게 되안겨 주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빚은 더욱 가중되었고 날이 갈수록 더욱 혹독한 좌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경제적 및 정신적인 불안으로 마침내 그는 갖가지 병을 얻어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건강상태가 어느 정도로 악화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이론이 분분하지만, 적어도 기거가 부자유스러운 정도였다는 것만은 확실했던 듯 하다. 이러한 역경속에서 그는 더블린의 자선 음악단체인 필하모니아협회(Philharmonic Society)로 부터 의뢰를 받고 '메시아'의 작곡에 착수했다. 헨델은 언제나 자선단체에 협력해 왔고, 가장 어려운 시기에 조차 그는 자선 사업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호주머니를 털어주는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그것을 작곡한 뒤 그 초연을 위해 아일랜드로 여행함으로써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는 '메시아'의 작곡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메시아의 대사는 거의가 구약성서에서 추린 것이지만 그것이 누구에 의한 것인지는 명확치 않고, 다만 그 대사를 헨델에게 전해준 사람이 제넨즈(Charles Jenens)라는 것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물론 제넨즈는 그것이 자신의 작품이라고 우겼고 지금도 일부에서는 그대로 믿고 있지만, 제넨즈의 말을 액면대로 받아 들이기에는 그 선택이나 배열이 너무나 잘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평이다.

 

부유해서 별로 하는 일없이 문학에 골몰하다가 마침내 스스로를 문학의 천재이자 진정한 이해자라고 우쭐거리고 있었던 제넨즈라는 자는 세익스피어의 작품을 개작하는 등 어쭙지 않은 짓을 하기 일쑤였는데, 말하자면 사소한 금전으로 과대망상증을 사들여 착각속에서 만족을 얻고 있었던 딜레탄트였다. 동시대의 석학 존슨(Sanuel johnson)은 그에 대해, "그는 자신에 도취되어 마침내 머리가 돌아버린 천치여서, 그의 머리속에 가득찬 것은 허영심 이 외에 아무것도 없다.... 스스로를 성스러운 존재라 착각하고 있는 그는 거리에 나갈 때면 속된 사람들의 입김이 행여나 그의 옥체에 스며들지 않도록 향수를 뿌린 솜으로 코를 막고 다닌다는 미치광이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비꼬기도 했다. 어쨌든 '메시아'의 대사가 하이든의 '천지창조'와는 비길 수도 없을 만큼 훌륭하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헨델의 영감을 크게 자극했으리라는 점에는 아무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메시아'의 작곡은 1741년 8월 22일에 시작되어 24일만에 완성되었다. 이러한 대작이 고작 24일만에 작곡되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그저 경탄하는 대신에 그것을 작곡하는데 헨델이 얼마나 연중했었던가를 좀더 생생하게 생각해 보려고 한다면 우리는 더욱 새로운 감회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헨델은 24일 동안 거의 침식조차 잊은채 마치 열에 뜬 사람처럼 열광된 상태에서 이 곡을 작곡했다고 한다. 실의와 좌절이 거듭된 끝에 창조된 그 드높은 세계, 일찍이 어떤 음악도 성취하지 못했던 영광의 구현,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나 견줄만한 그 웅장한 스케일과 구도..곡 하나 하나를 완성할 때마다 환희의 눈물이 양 볼을 가득 적셔 흘렀고, 다시금 열에 떠서 다음 곡을 스케치했다는 그 때의 정황을 굳이 되살려 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가슴속으로부터 솟구쳐 오르는 감격과 열광을 느끼지 않고서는 이 곡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웅장한 스케일을 운운하는 것으로만 '메시아'를 이야기 할 수는 결코 없다. 전 3부로 구성된 '메시아'는 제1부가 '예언과 탄생', 제2부가 '수난과 속죄', 제3부가 '부활과 영생'으로 되어 있다.

 

제1부 '예언과 탄생'

 

전체적으로 밝고도 온화한 분위기에 싸여 있으면서도 그 저변에서 조용히 맴돌면서 솟구쳐 오르는 열띤 흥분과 열광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게 하는 극적인 요소로 가득 차 있다.

 

제2부 예수의 '수난과 속죄'

 

극적인 긴장감이 더욱 제고되어 가장 감동적인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전곡을 통해 합창곡이 제일 많이 등장하는 것도 제2부의 특징이다. 복음의 선포와 그 최후의 승리를 이야기한다. 할렐루야 코러스.(이 작품이 런던에서 초연되었을때는 영국의 왕도 입석했는데, 할렐루야가 나올 무렵에는 감격한 나머지 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제3부 '부활과 영원한 생명'

 

부활에 대한 신념이 부각되어 전체적으로 밝고도 빛으로 충만된 분위기를 엮어주고 있다. 굳은 신앙의 고백으로 시작하여 영생의 찬미로 끝닌다. '우리는 아느니 속죄자의 영생을...' 최후에 아멘의 코러스로 끝난다. 이러한 제3의 분위기는 비단 제3부에 국한되지 않고 마치 전곡이 제3부의 부활을 준비하는 양 작품 전체에 그러한 빛이 깔려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조가 지배적인 바흐의 작품과는 달리, '메시아'는 가장 비감적인 제21번의 알토 아리아에서조차 장조로 되어 있으며, 전반적으로 더욱 밝고 화려한 색채가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메시아'에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에서와 같이 우리들의 깊은 오열을 유발하는 요소가 적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제 14곡의 소프라노 레시티티브, 제8번의 알토 및 소프라노 아리아, 제20곡의 합창, 제36곡 및 제43곡의 소프라노 아리아 등, 그 명상적인 아라베스크, 그 천사의 숨결과도 같은 아름다운을 뉘라서 바흐의 작품에 견주에 손색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아득히 높은 험준한 산의 아친 이슬과도 같이 맑고 깨끗하게 울리는 그 영롱함을 우리는 어디서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가? '메시아'가 더블린에서 초연되었을 때는 청중들이 너무나 쇄도하여 부인들은 후프(스커트를 펑퍼짐하게 벌어지게 하는 버팀살-당시에는 부인들이 공식석상에 나들이 할 때는 그런 의상을 입는 것이 유행이었다)를 착용하지 말아야 하며, 신사들은 칼을 차지 말도록 광고를 내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공연이 끝나자 한 신문(Falkners' Journal)에서는 '장내를 메운 청중들에서 '메시아'가 안겨준 황홀감은 뭐라 표현할래야 표현할 길이 없다'고 최대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메시아'가 초연된 이래 그것이 음악 애호가들과 음악가들에 끼친 영향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하이든이 '천지창조'를 작곡했던 것도 '메시아'에서 느꼈던 감동에 자극되어서였고, 베토벤 또한 이 메시아의 작곡자를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존경했었다. 그가 임종이 가까워 병석에 누었을 때조차 헨델의 악보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음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미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을 때 그를 돌보던 의사 봐부르흐(Wawurch)가 봄이 오면 건강이 회복될 것이라고 말하자 그는 '만인 나를 소생하게 하는 의사가 있다면 그의 이름은 기적(Wonderful)일 것이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은 '메시아'의 제12곡에 나오는 구절(His name shall be called Wonderful)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며, 이것으로 보아도 베토벤이 '메시아'를 얼마나 속속들이 연구하고 있었던가를 짐작케 해 준다.

 

그러나 '메시아'에 열광한 사람은 비단 베토벤이나 더블린의 시민들만은 아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서 영원토록 '메시아'를 사랑할 것이다

2005.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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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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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레에서 출생했다. 9세 때부터 오르간 연주자인 F.차하우에게 사사하여 작곡의 기초와 오르간을 공부하였다. 그후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한때 할레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였으나 18세 때 함부르크오페라극장에 일자리를 얻어 이때부터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20세 때 오페라 《알미라 Almira》(1705)를 작곡하여 성공을 거두고 이듬해 오페라의 고향인 이탈리아로 가 로마에서 A.코렐리, A.스카를라티의 영향하에 실내악을 작곡하는 한편 피렌체·베네치아에서 오페라 작곡가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1710년 하노버궁정의 악장()으로 초빙되었으나 휴가를 얻어 방문한 런던에 매료되어 1712년 이후는 런던을 중심으로 이탈리아오페라의 작곡가로 활약하게 되었다.

1712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오페라 《충직한 양치기 Il pastor fido》《테세오 Teseo》를 작곡, 상연하고 1718∼1720년에는 찬도스 공작의 후원 아래 종교음악의 명작 《찬도스 앤섬 Chandos Anthoms》 11곡을 작곡하였다. 또 1719년에는 주로 이탈리아오페라의 상연을 위해 ‘왕립 음악아카데미’를 설립하여 다른 두 이탈리아인 작곡가 G.B.보논치니, A.아리오스티와 함께 그 지배인이 되었다.

그후 약 10년 동안 창작력의 전성기에 들어선 그는 오늘날까지도 상연되고 있는 이탈리아오페라의 명작 《라다미스토 Radamisto》《오토네 Ottone》《줄리어스 시저 Giulio Cesar》《타메를라노 Tamerlano》《로델린다 Rodelinda》《아드메토 Admeto》《톨로메오 Tolomeo》 등을 작곡하였다. 또 1721년에는 초기의 명작 오라토리오에스테르 Esther》를 작곡하였으나 1728년부터 약 10년간은 이탈리아오페라 작곡가로서의 헨델의 운세가 점차 기울어갔다. 중산계급을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던 영국시민계급이 궁정적 ·귀족적인 취미를 배경으로 한 이탈리아오페라에 대해 반발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728년 대사()에다 민요선율을 곁들여 당시의 귀족사회를 통렬히 풍자한 J.C.페푸시 작곡의 《거지 오페라 The Begger’s Opera》가 상연되어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자 왕실 음악아카데미는 부득이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나 헨델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듬해에 아카데미를 재건, 헤이마게트극장을 근거로 한때 옛날의 인기를 되찾았으나 1733년 경쟁상대인 보논치니의 이탈리아오페라와 또다른 오페라 회사인 귀족오페라에 밀려 두 번째 극장을 폐쇄하게 되었다. 1734년 세 번째로 이탈리아오페라의 기치를 들고 코벤트 가든 오페라극장 경영에 나섰으나 3년 후인 1737년 마침내 건강악화와 경제파탄으로 오페라 작곡가 겸 극장 경영자로서의 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헨델은 1732년경부터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예찬되고 있는 《메시아 Messiah》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그는 1732년의 《에스테르》 개정판에 이어 1735년 사순절()에는 성가작품을 포함한 약 15편의 오라토리오를 헤이마케트극장에서 연속 연주하여 점차 오라토리오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또 1736년에는 《메시아》에 버금가는 유명한 오라토리오 《알렉산더의 향연 Alexander’s Feast》을 작곡하고 1738∼1751년까지도 거의 모두를 오라토리오의 작곡에 경주하였다.

1739년 구약성서에 입각한 위대한 서사시적인 드라마 《사울 Saul》과 《이집트이스라엘인 Israel in Egypt》을 발표하면서 다시 건강을 회복한 그는 왕성한 창작력으로 1741년에는 고금의 명작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작곡하였다. 《메시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의 정수()를 순수하고도 감동 깊게 전해 주는 명작이다. 그러나 헨델의 수많은 오라토리오 중에서 주로 서정적 요소를 강조하며, 접속하는 칸타타형태를 취한 이 작품은 오히려 예외적인 작품에 속한다. 그의 오라토리오의 본질은 현실무대의 제약을 벗어난 가상적 무대에서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모체로 하는 보편적 ·윤리적인 관념을 전개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그는 종교적 감동을 주는 서정적 표현에 뛰어났고, 오페라작품 속에 축적한 선명한 이미지를 환기시켜 그것을 드라마틱하게 구사하는 능력이 탁월하였다. 이런 점에서 주목해야 할 작품이 앞서 언급한 《이집트의 이스라엘인》과 함께 1746년의 작품 《유다 마카비우스 Juda Macabaeus》 등이다.

《메시아》 이후에도 그는 《삼손 Samson》《벨샤자르 Belshazzar》 등 뛰어난 오라토리오를 많이 작곡하였으며, 1751년 오라토리오 《입다 Jephtha》를 작곡하던 중 시력을 잃었다. 그러나 실명한 후에도 오라토리오의 상연을 지휘하는 한편 조수의 도움으로 구작()의 개정에 힘썼다. 헨델은 오페라(46곡), 오라토리오(32곡) 등 주로 대규모의 극음악 작곡에 주력하였지만 기악방면에서도 상당히 많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유명한 관현악곡모음곡 《수상의 음악 Water Music》《왕궁의 불꽃놀이 음악 Royal Fireworks Music》 외에, 작품 6의 합주협주곡, 작품 4 ·7의 오르간협주곡, 작품 2 ·5의 트리오소나타, 작품 3의 오보에협주곡, 그리고 1720년에 출판된 하프시코드용의 모음곡 등은 모두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다. 종교곡으로는 앞서 말한 11곡의 《찬도스 앤섬》 외에도 유명한 작품으로 위트레히트와 데팅겐의 전승()을 축하한 《테 데움 Te Deum》 등이 있다. 1726년에 영국에 귀화하였고 사후 최고의 영예인 웨스트민스터대성당에 매장되었다.

 

아~~ 잘 보셨길

2008.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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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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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은 다소 격했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 질문이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도 Bach를 아이디로 이용할만큼 바흐의 인품을 존경하고 그의 음악을 즐겨듣고 있습니다. 저는 일단 '왜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라고 부르는가'보다는 누가 언제부터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렀는지부터 알고 싶더군요. 찾아보니 음악의 아버지도 종류가 많던데요. 화성 음악의 아버지, 교회 음악의 아버지, 근대 음악의 아버지, 바로크 음악의 아버지...^^; 하지만 아쉽게도 그 단서는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모차르트나 베토벤, 멘델스존 등 많은 후배 음악가들이 그를 칭송하는 유명한 말들을 남겼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모두 독일계 음악가들이다 보니 그것만을 놓고 '음악의 아버지'라고 얘기하는 것은 별로 객관적이지 않죠...^^;

 

더구나 헨델에게 '음악의 어머니'라는 명예스러운(?) 별명을 지어준 것도 음악적인 업적보다는 바흐와 여러모로 상반되는 작품의 분위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쩌면 헨델을 독일 음악가로 만들기 위한 독일 음악 추종자들의 눈물겨운 노력이라고 볼 수도 있죠. 1) 헨델이 독일보다는 영국에서 훨씬 더 오래 활동했고(1712년(27살?)에 영국에 건너간 뒤 1726년에는 아예 귀화해버림), 2) 주요작품들도 거의 영국에서 작곡된데다(그것도 모국어가 아닌 영어나 이탈리아어로) 3) 죽은 뒤 영국에 뼈를 묻었음에도 불구하고(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힘) 헨델을 독일 음악가로 보는 것은 참으로 억지스러운 일입니다. '음악의 어머니'라는 귀한 칭호에도 불구하고 헨델의 음악이 후배 음악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는 들어본 기억도 없고.. 작품을 들여다보면 이탈리아 음악의 짙은 향이 전해져오고.. 그렇다고 헨델을 포기하자니 워낙 인지도가 높고.. 하여 바흐와 부부의 연(?)을 맺어줌으로써 헨델마저 독일 음악의 영향권 아래 두려고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만일 헨델이 독일인이 아니었어도 '음악의 어머니'라고 불렀을까 한번쯤은 생각하게 되네요.

 

어쩌면 바흐의 음악적인 업적 뿐만 아니라 작품에서 풍기는 분위기도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데 크게 일조했을 것 같네요. 얕은 감성에 호소하는 선율적인 음악이 아니라 엄격하고 종교적이기 때문에 쉽게 다가가기는 힘들지만 감춰진 내면을 들여다보면 누구보다도 지극한 인간미가 넘치는 음악.. 마치 엄한 아버지를 연상케 하는 음악이 바로 바흐의 음악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이 얘기에 앞서 거론해야 할 것이 우리나라의 독일 음악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입니다. 독일 음악이 절대음악과는 또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보니 클래식 음악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쉽게 접할 수도 없는 고급(?) 음악이 되었고, 성악보다는 기악에 훨씬 더 무게중심이 쏠려있는 기이한 환경이 만들어졌습니다. 아무래도 일본이 근대화 단계에 있어 독일(프로이센)을 많은 부분 답습했고 그것이 또 식민지 지배하에 있었던 우리나라에 영향을 준 것이겠죠. 최근 들어 그런 굴레를 벗어나려는 시도가 여기저기서 많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입니다. 그동안 독일 음악에 밀려 소외됐던 이탈리아나 프랑스, 스페인 등지의 다양한 음악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고, 특히 고음악과 원전연주 분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독일 음악을 키워낸 자양분이 어디로부터 흘러들어왔는지를 쉽게 알 수 있게 됐죠.

 

바흐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자료라면야 지천에 널려있으니까 저까지 나서서 바흐의 위대함을 얘기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을 것 같긴 합니다만 그래도 한마디 해야겠죠?...^^

 

그 시대에 어느정도 명성을 누렸는가가 예술가의 위대함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보다 당시 훨씬 큰 명성을 누렸고 베토벤, 슈베르트 같은 음악가들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그를 모차르트보다 위대한 음악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요. 비록 평균율을 바흐가 처음으로 만들어내지도 않았고, 생존시에 작곡가로서보다는 오르가니스트로서 훨씬 더 큰 명성을 얻었으며, 사후 100여년 간 잊혀진 음악가였다고 하더라도 그가 없었다면 서양음악사는 분명 지금과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을 것입니다. 가까이로는 그에게 어려서부터 음악을 배운 아들들이 슈타미츠로 대표되는 만하임 악파와 더불어 교향곡의 형식을 다지고 바로크 음악과 고전 음악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는 것을 봐도 그렇고.. 바흐가 완성한 대위법을 통해 다성음악과 화성에 대한 치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이처럼 다채로운 음악들이 탄생하기 힘들지 않았을까요? 아마 만들어졌다고 해도 더 늦었거나 더 허술하고 심심한 음악이 됐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바흐의 음악은 시대를 초월해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보고가 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째즈나 락에서조차도 바흐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마치 수학을 다루듯 치밀하고 복잡한 작곡기법을 통해 완성된 음악이 이처럼 다양하게 가지를 펼쳐나갈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엄격함 속에 한없는 자유로움이 내재된 그의 음악은 분명 앞으로도 다양한 형태로 우리의 귀와 마음을 기쁘게 해주리라 믿습니다. 아직도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로 칭송하는 데 대해 이견이 있나요?...^^

 

덧붙여 바흐가 다져놓은 음악적 토대와는 전혀 다른 곳에서 싹트고 꽃을 피운 다른 유럽국가들(특히 이탈리아)의 음악에 대해서도 최소한 동등한 수준의 평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p.s> 부족한 지식에 긴 글 쓰느라 무척 고생했습니다...^^; 여기저기 허점투성이겠지만 많은 음악가들이 바흐에 경도되어 끊임없이 연구하고 또 연주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유익한 질문이었습니다.

 

 

2008.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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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시대이다.

바로크 시대는 극음악이 탄생한 1600년경부터 바흐가 죽은 1750년경을 말한다.(17세기부터 18세기 전 반기에 바하나 헨델이 대위법적인 음악을 완성한 복음악의 전성기에 이르는 약 150년간)


바로크음악의 사회적 바탕 :

1. 절대주의의 귀족 제도 - 유럽 각국의 왕족들은 베르사유의 화려함을 그들의 모델로 삼았고 루이 14세의 "짐은 국가다."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예술과 문화는 군주를 숭배하는 방편의 하나가 되었으며, 귀족들은 궁정 합창단과 관현악, 오페라단 등의 연주를 통해 하느님과 고대의 영웅 이야기를 즐겼다.


2. 이성의 시대 -  정복자들보다 더 대담한 모험가들이 미지의 지식 세계를 향해갔고 케플러, 갈릴레오,  코페르니쿠스 등의 물리학 및 천문학상의 발견, 데카르트의 수학과 스피노자의 철학 등 유럽의 지적 역사에 있어서의 많은 이정표들이 세워졌다. 하베이(Harvey)는 혈액의 순환을 발견하였고 로크는 정신활동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의 기초를 닦았으며, 뉴턴은 만유인력 이론으로 우주가 지니고 있는 규칙과 질서의 근거를 밝혔다.


3. 열렬한 신앙의 시대 - 구교(로마 가톨릭)와 신교(프로테스탄트)가 유럽 전체를 지배하는 시대였다.

구교는 남부 유럽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고 신교는 북부 유럽과 영국을 중심으로 그 영역을 넓혀갔다. 구교와 신교의 대립은 맹렬한 것이어서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뛰어난 예술 작품들을 산출했다.


중산층은 그들 자신의 문화를 창출하였다. 그들은 가정과 교회, 콜레지움 무지쿰(Collegium musicum, 교육 및 연주를 위한 음악인 집단)을 중심으로 음악 활동을 했다.

 특히 희가극 속에 자신들의 삶에 관한 예리하고도 재치 넘치는 소견을 담았다. 미술가들은 과장된 소재를 버리고 중산층의 삶의 모습을 소재로 삼았고, 네덜란드 학파는 새로운 시민 예술을 확립하였다.

 자본가들의 주도 아래, 시민 문화는 궁정의 문화와 대등한 수준을 이루어갔으며, 미술 작품들은 넘치는 힘과 삶의 흥겨움을 담고 있었다.


 바로크는 서양의 사고와 관습의 혁명 속에 싹텄던 불굴의 의지와 강인함을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크고 힘차고 장엄하게 보여준 새로운 시대였다.


음악적 특징 :

바로크(Baroque)란 말은 "찌그러진 진주"라는 의미로서 이 시대의 음악은 안정감 대신 약동감을 특징으로 하여 웅장하고 거대하면서도 거기에 다채로운 장식이 함께 가해지는 것이다.


대체로 17세기 전반을 걸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발달한 단성음악 양식과 18세기 독일을 중심으로 한 대위법적 다성음악 양식이 발달한 시대이다.

 바로크 음악의 시작은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활동한 카메라타(Camerata)라는 문예인들의 새로운 음악 관념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대위법적 음악이 가사의 내용을 전달하는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여 가벼운 기악반주 위에서 가사가 명료하게 전달되는 새로운 음악 형태를 탄생시켰는데 이것이 단성음악(Monody)이다.


바로크 음악의 외적 특징은 규모의 대형화와 웅대함, 극적인 작품으로의 변화 등이다. 그래서 파이프 오르간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대규모의 합창이 강조되었으며, 오페라와 오라토리오, 칸타타 등의 극형태를 띤 음악 형식이 발달하였다.


바로크 음악은 원칙적으로 저음에 기초를 두어 그위에서 화성적인 성부를 배정해 가는 통주 저음기법을 기반으로 대조적인 협주양식, 즉 강주와 약주, 전 합주와 독주, 밝은 것과 어두운 것과 같은 대비적인 효과를 추구하고 심리적인 감동과 극성을 표현하기 위해 선율울 장식하고 화성에서 으뜸음을 중심으로 힘차고 색채감과 극감을 더해 준다.휴~힘들다

2008.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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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1****
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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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델'을처서 백과사전을 들어가면 거의다 나와있어요

2008.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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