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내공 80>> 헨델의 일화와 가장 중요한 업적..
leaf**** 조회수 7,697 작성일2003.08.12
1. 헨델의 가장 중요한 업적. (좀 자세히 적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 헨델이 속한 악파에 대해 간단히 기술하고
헨델의 작품세계가 동시대및 다음 세대의 음악에 미친 영향을 알려주세요;;

3. 헨델의 주요 작품을 연주 형태별, 시기별로 좀 적어주세요;(자세한 설명은 안해주셔도 됩니다.)

4. 헨델과 관련된 일화좀 많이 알려주세요;


에, 저 찾고는 있는데 힘드네요;
부탁드립니다.
프로필 사진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2 개 답변
2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lk40****
고수
윈도우, 한국사, 포털사이트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1. 헨델의 가장 중요한 업적

< 헨델은 '음악의 어머니'

후대의 음악가들에게 무한한 터전을 마련해 줄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바로크 양식'을 완성.


2. 헨델이 속한 악파에 대해 간단히 기술하고
헨델의 작품세계가 동시대및 다음 세대의 음악에 미친 영향을 알려주세요

< 바로크음악은 유럽을 중심으로 16세기 말에서 18세기 중기에 이르는 약 150년간의 음악.
바로크라는 시대양식의 개념은 본래 미술사 분야에서 일어나, 그 후 음악사 분야로 이행되었다.

그 최초의 시도는 1920년의 C.작스의 논문 <바로크음악>이다. 이 무렵부터 음악사에도 적용되어 일반화하

였다. H.리만처럼 이 시대를 통주저음(通奏低音)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바로크음악은 20세기에 들어서

면서 재인식되었으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나라에서 지지자가 생겼다.

헨델은 자유롭고 방랑자적인 성격이 짙었다. 선대에 음악가가 없었던 그는 누군가에 의해,

무언가에 의해 의무를 강요당하는 일도 없었다. 헨델은 그 자유로운 몸으로 유럽 각 국을 돌아다니며

유명새를 타기에 분주했고, 그의 자유스러운 사고는 틀에서 벗어난 대중적이고 쾌활한 음악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 때 '표절의 상습범'이라는 오명도 듣고, 도박과 흥행 같은 즉흥적인 결과에 승부를 걸

기도 했던 헨델의 생활은 기복이 심했지만, 그런 삶마저도 <메시아> 같은 대작을 만들 수 있었던 자유이

자 에너지였다고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음악은 훌륭했고, 왕궁은 물론 대중의 인기까지

독차지했다. 한 때 그를 질투하여 음모를 꾸민 이들이 있었을 정도로 말이다. 헨델은 독일 태생의 영국

작곡가라 불리울 만큼 영국에서의 활동이 대단했다. 그는 46곡의 오페라와 오라토리오를 비롯하여 오케스

트라, 바이올린, 쳄발로, 오르간 분야에 이르기까지 체구만큼이나 스케일이 크고 호쾌한 작품을 남겼으

며, 특히 <메시아>는 그의 생존시 34회나 공연될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결국 영국의 국가적인 음악가

로 존경을 받은 그는 사후에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게 되었다.

3.헨델의 주요 작품을 연주 형태별, 시기별로 좀 적어주세요

< 1712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오페라 《충직한 양치기 Il pastor fido》《테세오 Teseo》를 작곡, 상연하

고 1718∼1720년에는 찬도스 공작의 후원 아래 종교음악의 명작 《찬도스 앤섬 Chandos Anthoms》 11곡

을 작곡하였다. 또 1719년에는 주로 이탈리아오페라의 상연을 위해 ‘왕립 음악아카데미’를 설립하여 다

른 두 이탈리아인 작곡가 G.B.보논치니, A.아리오스티와 함께 그 지배인이 되었다. 그 후 약 10년 동안

창작력의 전성기에 들어선 그는 오늘날까지도 상연되고 있는 이탈리아오페라의 명작 《라다미스토

Radamisto》《오토네 Ottone》《줄리어스 시저 Giulio Cesar》《타메를라노 Tamerlano》《로델린다

Rodelinda》《아드메토 Admeto》《톨로메오 Tolomeo》 등을 작곡하였다. 또 1721년에는 초기의 명작 오라

토리오 《에스테르 Esther》를 작곡하였으나 1728년부터 약 10년간은 이탈리아오페라 작곡가로서의 헨델

의 운세가 점차 기울어갔다. 중산계급을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던 영국의 시민계급이 궁정적 ·귀족적인

취미를 배경으로 한 이탈리아오페라에 대해 반발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728년 대사(臺辭)에

다 민요선율을 곁들여 당시의 귀족사회를 통렬히 풍자한 J.C.페푸시 작곡의 《거지 오페라 The Begger’

s Opera》가 상연되어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자 왕실 음악아카데미는 부득이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나 헨델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듬해에 아카데미를 재건, 헤이마게트극장을 근거로 한때 옛날의 인기

를 되찾았으나 1733년 경쟁상대인 보논치니의 이탈리아오페라와 《거지 오페라》의 협공을 받고 두 번째

극장을 폐쇄하게 되었으며, 1734년 세 번째로 이탈리아오페라의 기치를 들고 코벤트 가든 오페라극장 경

영에 나섰으나 3년 후인 1737년 마침내 건강악화와 경제파탄으로 오페라 작곡가 겸 극장 경영자로서의 활

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헨델은 1732년경부터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예찬되

고 있는 《메시아 Messiah》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그는 1732년의 《에스테르》 개정판에 이어 1735년 사

순절(四旬節)에는 성가작품을 포함한 약 15편의 오라토리오를 헤이마케트극장에서 연속 연주하여 점차 오

라토리오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또 1736년에는 《메시아》에 버금가는 유명한 오라토리오 《알렉

산더의 향연 Alexander’s Feast》을 작곡하고 1738∼1751년까지도 거의 모두를 오라토리오의 작곡에 경

주하였다.

1739년 구약성서에 입각한 위대한 서사시적인 드라마 《사울 Saul》과 《이집트의 이스라엘인 Israel in

Egypt》을 발표하면서 다시 건강을 회복한 그는 왕성한 창작력으로 1741년에는 고금의 명작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작곡하였다. 《메시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의 정수(精髓)를 순수하고

도 감동 깊게 전해 주는 명작이다. 그러나 헨델의 수많은 오라토리오 중에서 주로 서정적 요소를 강조하

며, 접속하는 칸타타형태를 취한 이 작품은 오히려 예외적인 작품에 속한다. 그의 오라토리오의 본질은

현실무대의 제약을 벗어난 가상적 무대에서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모체로 하는 보편적 ·윤리적인 관념을

전개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그는 종교적 감동을 주는 서정적 표현에 뛰어났고, 오페라작품 속에 축적한

선명한 이미지를 환기시켜 그것을 드라마틱하게 구사하는 능력이 탁월하였다. 이런 점에서 주목해야 할

작품이 앞서 언급한 《이집트의 이스라엘인》과 함께 1746년의 작품 《마카베의 유다 Juda Macabaeus》

등이다.

《메시아》 이후에도 그는 《삼손 Samson》《벨샤자르 Belshazzar》 등 뛰어난 오라토리오를 많이 작곡하

였으며, 1751년 오라토리오 《입다 Jephtha》를 작곡하던 중 시력을 잃었다. 그러나 실명한 후에도 오라

토리오의 상연을 지휘하는 한편 조수의 도움으로 구작(舊作)의 개정에 힘썼다. 헨델은 오페라(46곡), 오

라토리오(32곡) 등 주로 대규모의 극음악 작곡에 주력하였지만 기악방면에서도 상당히 많은 작품을 남겼

다. 특히 유명한 관현악곡모음곡 《수상의 음악 Water Music》《왕궁의 불꽃놀이 음악 Royal Fireworks

Music》 외에, 작품 6의 합주협주곡, 작품 4 ·7의 오르간협주곡, 작품 2 ·5의 트리오소나타, 작품 3의

오보에협주곡, 그리고 1720년에 출판된 하프시코드용의 모음곡 등은 모두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다. 종교

곡으로는 앞서 말한 11곡의 《찬도스 앤섬》 외에도 유명한 작품으로 위트레히트와 데팅겐의 전승(戰勝)

을 축하한 《테 데움 Te Deum》 등이 있다. 1726년에 영국에 귀화하였고 사후 최고의 영예인 웨스트민스

터대성당에 매장되었다.

4. 헨델과 관련된 일화좀 많이 알려주세요.

< 중년기에 접어든 헨델은, 일은 폭주하는게 오페라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잠시 심각한

우울병에 빠지게 된다.

1737년 헨델은 자기 스스로가 건강을 해치고 판단력이 둔화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특히 오른쪽 팔은 마비

가 와서 쓰지 못하게 되었다.

일을 쉬고 온천에 가서 휴양을 하자 어깨의 마비는 풀리고 류머티스도 좋아졌다. 1743년 다시 그 증상이

재발하자 호레스 메올풀 의사의 치료를 받았는데 증상은 고열과 두통이 오고 언어장애, 그리고 경증마비

때문에 작곡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 후 회복되기 시작하여 후유증도 별로 남지 않았으나 모르는 사이에 실명은 서서히 진행되었다.

헨델은 백내장 때문에 1743년에 이미 시력장애가 뚜렷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오르간 연주를 계속했다.

특히 오라토리오 <삼손>의 연주회에서 테너 가수 죤 바이트가 "기막히는 어둠! 해도 달도 없고 달빛을

암흑이 싸 버린다"라고 노래할 때, 청중들은 빛을 잃은 작곡가의 모습에 마음이 동요돼 눈물을 흘렸다는

데 이 이야기로 인간미 넘치는 대중이 헨델의 실명을 얼마만큼 가슴 아파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연주가에게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그러나 헨델이 오르간 연주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랫동안의 연주 생활을 통해 익숙해진 손놀림 덕분

이었다.

백내장이란 수정체가 혼탁해져서 빛이 수정체에 의해 굴절되지 못하기 때문에 망막에 상이 나타나지 않

아 결국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는 병이다.

아주 심해지게 되면 빛과 어두움조차도 구별할 수 없게 되는데 사실은 흔한 병이며 건강한 사람에게

나타나기도 하는 눈병이다.

헨델은 대식가, 애주가, 애연가였으며 특히 거구에 비만한 체구였기 때문에 혈관에 아테롬성 동맥경화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렇게 되면 고혈압은 수반하게 되어 몸은 점점 쇠약하게 되는 것이었다.

1750년 8월에 헨델은 몇 명의 고향 친구를 방문하기 위해 유럽대륙을 향해 여행길에 올랐다.

그러나 도중에 네덜란드의 하구 근처에 도달했을 때 마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했다.

겨우 죽음은 면했지만 중상이어서 결국 고향인 할레는 방문하지 못했다.

헨델이 독일로 출발하기 4주 전에 바흐는 이미 세상을 떠나 만날 수가 없었다.

바하의 사망 이후 헨델은 자기 스스로가 느낄 정도로 몸이 쇠약해 1750년 6월 1일에는 '사람의 생명이 고

르지 않은 점을 생각하며'라는 그의 최초의 유서를 썼다.

그리고는 연주활동도 별로 하지 않고 집에만 머물게 되었는데 바흐의 죽음으로 인한 소위 노인성 우울병

의 상태로 생각된다.

1751년 2월에 <예프다>의 작곡에 매달렸을 때 좌측 눈의 시력이 급격히 저하되어 작곡을 중단했으며

6월에는 온천에서 요양하고 안과의사를 방문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시력장애의 원인은 전술한 바와 같이 노인성 백내장 때문이었다. 안과의사의 진단은 진단 받은 때는 이

미 절망적이라 했다.

그러나 헨델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예프다>의 작곡을 재촉해 8월에 완성하였다.

1752년 11월 3일 헨델은 브륜힐드 의사의 집도로 눈 수술을 하여 일시적으로 시력이 좋아지는 듯 했으나

결국 시력은 회복되지 않았다.

바흐의 눈 수술을 했다는 죤 티라 안과의사는 자기가 헨델의 눈 수술을 해 성공했다고 자랑하고 있었으

나 티라가 수술하였다는 근거가 없다. 아마도 환자를 끌기 위한 거짓말이었는지도 모른다.

1759년 4월 6일 코벤트 가든에서 <메시아>의 연주가 끝나자 헨델은 쓰러져 사람들에 의해

집으로 옮겨졌다.

4월 11일에는 정신을 차려서 유서에 궁핍한 음악가와 그 가족에세 천파운드를 기부한다는 것을 추가했다

2003.08.12.

  • 채택

    질문자가 채택한 답변입니다.

  • 출처

    백과사전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3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삭제된 답변
작성자가 직접 삭제한 답변입니다.
2003.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