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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유명한 음악가..(헨델,모짜르트,슈베르트,쇼팽,베토벤,비발디,차이코프스키,그리그 등)업적과 작품 요점만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9,120 작성일2008.08.11
헨델,모짜르트,슈베르트,쇼팽,베토벤,비발디,차이코프스키,그리그 등 업적과 작품 요점만 간단하게..이왕이면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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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베토벤

하이든 ·모차르트와 함께 빈고전파를 대표하는 독일의 작곡가로 고전파의 형식이나 양식을 개성적으로 다듬었고 낭만파로의 이행단계에 있다. 작풍은 동적인 힘이 특징이고 강고한 형식감()으로 일관되어 곡마다 독자적으로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후기에는 다이내믹한 힘은 부족하지만, 보다 깊은 마음의 세계가 표현되어 있다.

 

2.쇼팽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자유롭고 시대를 앞서나가는 독자적인 양식의 작품을 많이 남겼으며 특히, 약 200곡에 이르는 피아노곡으로 유명하다. 페달의 사용과 약박()을 약간 인접한 강박()에 접근시키는 연주법으로 후세의 피아노 연주법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3.모짜르트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모차르트가 남긴 작품은 성악·기악의 모든 영역에 걸쳐 다채롭다. 그의 공적은 빈고전파의 양식을 확립한 데 있고 전고전파의 여러 양식을 흡수, 개성적인 예술을 이룩했다.

 

5.파가니니

이탈리아의 바이올리니스트 ·작곡가. 음량은 그다지 풍부하지 않았지만 음색은 매우 아름다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형식적인 면보다 즉흥적인 화려함에 특색이 있다. 자기의 연주법을 비밀에 붙이고 제자도 단 한 사람 시보리뿐이었으며, 유파()를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주법은 현재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전해지지 못하고 있다

 

6.슈베르트

오스트리아의 초기 독일낭만파의 대표적 작곡가로 '가곡의 왕'으로 불린다. 주로 빈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부문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겼고 가곡을 독립된 주요한 음악의 한 부문으로 끌어올렸으며 다양한 가곡형식으로 독일가곡에 큰 영향을 주었다. 주요작품에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 《겨울나그네》 등이 있다

 

7.하이든

18세기 후반의 빈고전파를 대표하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린다. 100곡 이상의 교향곡, 70곡에 가까운 현악4중주곡 등으로 고전파 기악곡의 전형을 만들었으며 특히 제1악장에서 소나타형식을 완성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대표작에《천지창조》, 《사계()》등이 있다.

^^

2008.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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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출생. 할아버지 루트비히와 아버지 요한도 음악가였으며 악재(樂才)를 인정한 아버지는 아들의 천재적 소질을 과시하려고 4세 때부터 과중한 연습을 시켰으며, 7세 때에는 피아노 연주회까지 열었다.

베토벤은 몇몇 선생의 지도를 받았는데 1779년에 그를 가르친 크리스찬 고트로프 네페로부터는 음악뿐만 아니라 정신적 ·정서적인 영향까지 받았다. 1782년 궁정예배당 오르간 연주자로 출발, 2년 만에 정식 멤버로 임명되고 1787년에는 빈에 가서 흠모하던 모차르트를 만났으나, 어머니의 위독으로 곧 본으로 돌아와 이 해에 끝내 홀아비가 된 아버지를 대신하여 집안을 떠맡았다.

그러다가 1792년 바르트슈타인백작을 비롯한 친구들의 원조로 빈에 유학, 결국 그 곳이 그의 영주의 땅이 되었다. 빈에 자리 잡은 베토벤은 귀족들의 보호를 받았으며, 셴크 ·알브레히트베르거 ·하이든 ·살리에리 등에게 사사하여 음악가로서의 지식과 능력을 키워 나갔다.

1795년 피아노 연주자로서 데뷔하고 이 시기에 최고 작품으로 꼽히는 《피아노 3중주곡》을 발표하여 착실한 첫발을 내디뎠다. 1796년 프라하 ·드레스덴 ·베를린을 여행하고, 1800년에는 《제1교향곡》과 6곡의 현악4중주곡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귓병이 나서 점차 악화하였다. 절망한 그는 1802년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쓰고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포기, 작곡에만 전념했으며 두문불출로 외부와의 접촉을 피했다. 그런 생활 속에서 《제2교향곡》(1802), 오라토리오 《감람산상(橄欖山上)의 그리스도》(1803), 그리고 1804년에는 《제3교향곡(영웅교향곡)》을 작곡하여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개성적인 스타일을 확립하였다.

1805년 오페라 《피델리오》의 초연에 실패하고, 이듬해 이를 손질하여 재연하였지만 역시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 작품이 최종적인 형태로 무대에서 인정을 받은 것은 1814년의 일이다. 베토벤의 작품은 빈을 비롯하여 유럽 각지의 출판사가 앞을 다투어 간행하였다. 출판에서의 보수와 귀족들의 지원으로 모차르트와는 달리 안정된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후원자로서 특히 유명한 귀족은 루돌프대공(大公), 롭코비츠공작, 킨스키공작 등이었다. 1810년에는 괴테의 극시(劇詩)로 《에그몬트》를 작곡하였다. 그 후에 유명한 《영원한 연인》에 부치는 편지를 썼는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누구에 대한 것이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으며, 그러한 여성에의 동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영웅교향곡》이 작곡된 이후의 약 10년간은 창작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으며, 교향곡 ·서곡 ·협주곡 ·피아노소나타 ·바이올린소나타 ·기타 실내악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씌어진 것들이다. 특히 《제5교향곡(운명교향곡)》(1808) 《제6교향곡(전원교향곡)》(1808) 《피아노협주곡 제5번(황제)》(1809) 《바이올린협주곡》 (3곡, 1806), 피아노곡 《아파시오나토 소나타》(1805) 등이 유명하다.

1815년 이후의 12년간은 베토벤의 창작기 중에서 후기에 속한다. 이 무렵에는 정치와 사회 정세의 변화도 있었고, 친지(親知)도 적어졌으며, 또 귓병의 악화로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어 필담(筆談)을 통해서만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다.

그 자신의 연주회 횟수도 줄었고, 빈에서는 보다 가벼운 음악이 애호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일련의 창작활동은 1817년에 가장 저조했으나, 그 이후 다시 힘찬 작곡활동을 계속하여 뛰어난 대작들을 내놓았으며, 루돌프대공에게 바친 《장엄미사곡》(1823)과 합창을 포함한 《제9교향곡》(1824)이 그 정점을 이루었다.

장례는 29일에 거행되었는데, 2만을 넘는 시민들이 참가, 애도하였다고 한다. 베토벤은 하이든 ·모차르트와 더불어 빈고전파(古典派)를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확립한 고전파의 형식이나 양식은 베토벤에 의하여 더 개성적으로 다듬어졌으며, 또한 그의 손으로 낭만파에의 이행(移行)도 준비되었다.

본 시절에는 만하임악파의 영향 아래 습작적인 작품을 썼으나, 벌써 이때부터 개성적인 특징이 엿보였다. 1800년 전후에는 특히 하이든에게 받은 영향을 나타내면서도 개성적인 스타일의 작품들을 거쳐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하였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이를테면 정적(靜的)인 고전성(古典性)에 비하여 베토벤의 작품은 동적인 다이내믹한 힘을 특징으로 하는데 형식적으로는 강고한 형식감(形式感)으로 일관되어, 곡마다 독자적인 스타일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후기의 창작활동은 중기에 비하여 다이내믹한 힘은 부족하지만, 보다 깊은 마음의 세계가 표현되어 신비스러울 정도의 감동적인 스타일을 보이고 있다. 이 시기는 낭만파의 초기의 대표자들인 베버나 슈베르트의 활동과도 겹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베토벤의 작품들은 그후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후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지금도 그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또한 음악가이면서도 청각을 잃었지만, 이를 극복한 정신력은, 인간의 집념과 생활태도의 귀감으로서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

2008.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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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몰라서..일

Hallelujah Messiah 헨델 할렐루야

 

George Frideric Handel (1685∼1759)

 

헨델오라토리오 “메시아” 중에 나오는 이 할렐루야는 종교적 바탕으로 힘차고 장엄함이 특색이다. 1742년 런던 초연에 참석한 영국의 왕 조지2세가 ‘할렐루야 코러스’ 부분에서 감격한 나머지 기립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오늘날에도 그 부분에서는 전원이 기립하는 관습이 내려오고 있다.

 

Messiah

 

모든 음악 가운데 가장 감격스러운 음악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메시아'는 헨델이 57세가 되던 해(1742년) 4월 12일 아일랜드의 더블린(Dublin)에서 초연되었다. 메시아란 말은 구세주라는 뜻이나 본래는 기름을 부은 자란 뜻인데, 그것이 다시 신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자 혹은 괴로운 자를 해방하는 자 등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물론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더블린 시민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던 그 공연에서 헨델 자신도 상당한 수익을 얻기는 했으나, 그 음악회가 애초부터 자선음악회였던 만큼 그 수익의 대부분은 자선사업의 기금으로 쓰였다.

 

'메시아'가 종교음악임에는 틀림없지만 헨델의 오라토리오가 거의 다 그렇듯이 '메시아'또한 교회를 위한 교회음악이라기 보다는 극장에서 상연할 목적으로 작곡된 연주회용 작품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기독교 신자거나 비신자거나를 막론하고 전세계 음악 애호가들로부터 가장 광범위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종교 음악이라는 한계를 아득히 벗어나 인류 공유의 위대한 음악적 유산으로 승화되고 있다. 좌절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허덕이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광명과 영광 그리고 열광을 되찾았던 것일까? 그것은 헨델 자신이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장 혹독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이 곡이 작곡된 탓이기도 할 것이다.

 

이탈리아풍의 오페라에 실증을 느끼고 새로운 음악양식을 갈구하던 영국의 청중들과 비평가들로부터 소외당하고, 한때는 온 영국을 지배했던 헨델도 이제는 음악회마다 실패를 거듭하던 끝에, 마침내 영어의 대사를 사용한 오라토리오를 몇곡 작곡했다. 그러나 그것도 그가 누렸던 왕년의 명성을 하루 아침에 그에게 되안겨 주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빚은 더욱 가중되었고 날이 갈수록 더욱 혹독한 좌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경제적 및 정신적인 불안으로 마침내 그는 갖가지 병을 얻어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건강상태가 어느 정도로 악화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이론이 분분하지만, 적어도 기거가 부자유스러운 정도였다는 것만은 확실했던 듯 하다. 이러한 역경속에서 그는 더블린의 자선 음악단체인 필하모니아협회(Philharmonic Society)로 부터 의뢰를 받고 '메시아'의 작곡에 착수했다. 헨델은 언제나 자선단체에 협력해 왔고, 가장 어려운 시기에 조차 그는 자선 사업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호주머니를 털어주는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그것을 작곡한 뒤 그 초연을 위해 아일랜드로 여행함으로써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는 '메시아'의 작곡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메시아의 대사는 거의가 구약성서에서 추린 것이지만 그것이 누구에 의한 것인지는 명확치 않고, 다만 그 대사를 헨델에게 전해준 사람이 제넨즈(Charles Jenens)라는 것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물론 제넨즈는 그것이 자신의 작품이라고 우겼고 지금도 일부에서는 그대로 믿고 있지만, 제넨즈의 말을 액면대로 받아 들이기에는 그 선택이나 배열이 너무나 잘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평이다.

 

부유해서 별로 하는 일없이 문학에 골몰하다가 마침내 스스로를 문학의 천재이자 진정한 이해자라고 우쭐거리고 있었던 제넨즈라는 자는 세익스피어의 작품을 개작하는 등 어쭙지 않은 짓을 하기 일쑤였는데, 말하자면 사소한 금전으로 과대망상증을 사들여 착각속에서 만족을 얻고 있었던 딜레탄트였다. 동시대의 석학 존슨(Sanuel johnson)은 그에 대해, "그는 자신에 도취되어 마침내 머리가 돌아버린 천치여서, 그의 머리속에 가득찬 것은 허영심 이 외에 아무것도 없다.... 스스로를 성스러운 존재라 착각하고 있는 그는 거리에 나갈 때면 속된 사람들의 입김이 행여나 그의 옥체에 스며들지 않도록 향수를 뿌린 솜으로 코를 막고 다닌다는 미치광이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비꼬기도 했다. 어쨌든 '메시아'의 대사가 하이든의 '천지창조'와는 비길 수도 없을 만큼 훌륭하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헨델의 영감을 크게 자극했으리라는 점에는 아무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메시아'의 작곡은 1741년 8월 22일에 시작되어 24일만에 완성되었다. 이러한 대작이 고작 24일만에 작곡되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그저 경탄하는 대신에 그것을 작곡하는데 헨델이 얼마나 연중했었던가를 좀더 생생하게 생각해 보려고 한다면 우리는 더욱 새로운 감회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헨델은 24일 동안 거의 침식조차 잊은채 마치 열에 뜬 사람처럼 열광된 상태에서 이 곡을 작곡했다고 한다. 실의와 좌절이 거듭된 끝에 창조된 그 드높은 세계, 일찍이 어떤 음악도 성취하지 못했던 영광의 구현,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나 견줄만한 그 웅장한 스케일과 구도..곡 하나 하나를 완성할 때마다 환희의 눈물이 양 볼을 가득 적셔 흘렀고, 다시금 열에 떠서 다음 곡을 스케치했다는 그 때의 정황을 굳이 되살려 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가슴속으로부터 솟구쳐 오르는 감격과 열광을 느끼지 않고서는 이 곡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웅장한 스케일을 운운하는 것으로만 '메시아'를 이야기 할 수는 결코 없다. 전 3부로 구성된 '메시아'는 제1부가 '예언과 탄생', 제2부가 '수난과 속죄', 제3부가 '부활과 영생'으로 되어 있다.

 

제1부 '예언과 탄생'

 

전체적으로 밝고도 온화한 분위기에 싸여 있으면서도 그 저변에서 조용히 맴돌면서 솟구쳐 오르는 열띤 흥분과 열광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게 하는 극적인 요소로 가득 차 있다.

 

제2부 예수의 '수난과 속죄'

 

극적인 긴장감이 더욱 제고되어 가장 감동적인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전곡을 통해 합창곡이 제일 많이 등장하는 것도 제2부의 특징이다. 복음의 선포와 그 최후의 승리를 이야기한다. 할렐루야 코러스.(이 작품이 런던에서 초연되었을때는 영국의 왕도 입석했는데, 할렐루야가 나올 무렵에는 감격한 나머지 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제3부 '부활과 영원한 생명'

 

부활에 대한 신념이 부각되어 전체적으로 밝고도 빛으로 충만된 분위기를 엮어주고 있다. 굳은 신앙의 고백으로 시작하여 영생의 찬미로 끝닌다. '우리는 아느니 속죄자의 영생을...' 최후에 아멘의 코러스로 끝난다. 이러한 제3의 분위기는 비단 제3부에 국한되지 않고 마치 전곡이 제3부의 부활을 준비하는 양 작품 전체에 그러한 빛이 깔려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조가 지배적인 바흐의 작품과는 달리, '메시아'는 가장 비감적인 제21번의 알토 아리아에서조차 장조로 되어 있으며, 전반적으로 더욱 밝고 화려한 색채가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메시아'에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에서와 같이 우리들의 깊은 오열을 유발하는 요소가 적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제 14곡의 소프라노 레시티티브, 제8번의 알토 및 소프라노 아리아, 제20곡의 합창, 제36곡 및 제43곡의 소프라노 아리아 등, 그 명상적인 아라베스크, 그 천사의 숨결과도 같은 아름다운을 뉘라서 바흐의 작품에 견주에 손색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아득히 높은 험준한 산의 아친 이슬과도 같이 맑고 깨끗하게 울리는 그 영롱함을 우리는 어디서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가? '메시아'가 더블린에서 초연되었을 때는 청중들이 너무나 쇄도하여 부인들은 후프(스커트를 펑퍼짐하게 벌어지게 하는 버팀살-당시에는 부인들이 공식석상에 나들이 할 때는 그런 의상을 입는 것이 유행이었다)를 착용하지 말아야 하며, 신사들은 칼을 차지 말도록 광고를 내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공연이 끝나자 한 신문(Falkners' Journal)에서는 '장내를 메운 청중들에서 '메시아'가 안겨준 황홀감은 뭐라 표현할래야 표현할 길이 없다'고 최대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메시아'가 초연된 이래 그것이 음악 애호가들과 음악가들에 끼친 영향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하이든이 '천지창조'를 작곡했던 것도 '메시아'에서 느꼈던 감동에 자극되어서였고, 베토벤 또한 이 메시아의 작곡자를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존경했었다. 그가 임종이 가까워 병석에 누었을 때조차 헨델의 악보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음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미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을 때 그를 돌보던 의사 봐부르흐(Wawurch)가 봄이 오면 건강이 회복될 것이라고 말하자 그는 '만인 나를 소생하게 하는 의사가 있다면 그의 이름은 기적(Wonderful)일 것이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은 '메시아'의 제12곡에 나오는 구절(His name shall be called Wonderful)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며, 이것으로 보아도 베토벤이 '메시아'를 얼마나 속속들이 연구하고 있었던가를 짐작케 해 준다.

 

그러나 '메시아'에 열광한 사람은 비단 베토벤이나 더블린의 시민들만은 아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서 영원토록 '메시아'를 사랑할 것이다

2008.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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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 길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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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베토벤

하이든 ·모차르트와 함께 빈고전파를 대표하는 독일의 작곡가로 고전파의 형식이나 양식을 개성적으로 다듬었고 낭만파로의 이행단계에 있다. 작풍은 동적인 힘이 특징이고 강고한 형식감()으로 일관되어 곡마다 독자적으로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후기에는 다이내믹한 힘은 부족하지만, 보다 깊은 마음의 세계가 표현되어 있다.

 

2.쇼팽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자유롭고 시대를 앞서나가는 독자적인 양식의 작품을 많이 남겼으며 특히, 약 200곡에 이르는 피아노곡으로 유명하다. 페달의 사용과 약박()을 약간 인접한 강박()에 접근시키는 연주법으로 후세의 피아노 연주법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3.모짜르트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모차르트가 남긴 작품은 성악·기악의 모든 영역에 걸쳐 다채롭다. 그의 공적은 빈고전파의 양식을 확립한 데 있고 전고전파의 여러 양식을 흡수, 개성적인 예술을 이룩했다.

 

5.파가니니

이탈리아의 바이올리니스트 ·작곡가. 음량은 그다지 풍부하지 않았지만 음색은 매우 아름다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형식적인 면보다 즉흥적인 화려함에 특색이 있다. 자기의 연주법을 비밀에 붙이고 제자도 단 한 사람 시보리뿐이었으며, 유파()를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주법은 현재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전해지지 못하고 있다

 

6.슈베르트

오스트리아의 초기 독일낭만파의 대표적 작곡가로 '가곡의 왕'으로 불린다. 주로 빈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부문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겼고 가곡을 독립된 주요한 음악의 한 부문으로 끌어올렸으며 다양한 가곡형식으로 독일가곡에 큰 영향을 주었다. 주요작품에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 《겨울나그네》 등이 있다

 

7.하이든

18세기 후반의 빈고전파를 대표하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린다. 100곡 이상의 교향곡, 70곡에 가까운 현악4중주곡 등으로 고전파 기악곡의 전형을 만들었으며 특히 제1악장에서 소나타형식을 완성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대표작에《천지창조》, 《사계()》등이 있다.

8. 바흐

(독일, 1685년출생 - 1750년사망) = 음악의아버지라고 불림 

대표작 -트리오소나타, 칸타타, 브라덴브루크협주곡

9.헨델

(독일, 1685년출생 -1759년사망) = 음악의어머니라고 불림.

 

 10.스메타나

(체코, 1824년출생 -1884년사망)

대표작 - 자유의노래, 국민의용군행진곡, 현악4중주, 몰다우

 

11.차이코프스키

(러시아,1840년출생 -1893년사망 )

대표작 -백조의호수, 호두까기인형, 3대발레음악

대표작 -사라반드, '메시아中 할렐루야' , 울게하소서.

 

12.생상스

(프랑스,1835년출생 -1921년사망)

대표작 -삼손과데릴라, 동물의사육제,

2008.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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