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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음악가들의 인생사와 주요작품
비공개 조회수 3,910 작성일2009.05.27
헨델 비발디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하이든 의 인생사와 주요작품을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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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im****
물신
클래식음악 10위, 특수교육 8위, 성악, 오페라음악 26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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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델 비발디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하이든인생사와 주요작품을 알려주세요

 

 

바로크의 음악  

 

17세기 초에 르네상스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 혁신적인 젊은 음악가들이 일반 문화예술의 르네상스 정신에 자극되어 새로운 양식, 다시 말해서 화성적인 반주를 가진 단선율의 양식을 장조 하게 되었다. 이것이 모노디아(Monodia)즉 단 음악이다. 이 단음악이 정착 되었을때 르네상스음악이 완성된 것이지만 이 선율음악은 대위법적인 구속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서창적인 선율과 이를 뒷받침하는 단순한 화성적인 반주로 가장 직접적인 표현을 하게 된 것이다. 이는 독창가곡이나 오페라, 그리고 오라토리오로서 나타났는데, 이러한 양식에 의해 근대적인 음악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1) 안토니오 비발디 - Antonio Vivaldi 1678-1741

 

 

비발디는 1678년에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1741년 7월28일 오스트리아의 비인에 서 세상을 떠난 이탈리아 바로크 음악시대의 바이올린 주자인 동시에 작곡가이다.

 

비발디는 바하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준 위대한 음악가로 40여곡의 오페라와 100여곡의 <콘체르토-그롯소>라고 하는 복수의 독주악기와 합주부로 구성되는 <대협주곡>과 단일협주 곡, 그리고 실내악곡, 성악곡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들 작품들이 객관적으로 반드시 최상급은 아니라 할지라도 충실하고 형식적으로 잘 정돈되어 바로크음악의 대표적인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비발디는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사원의 바이올린 주자로 있던 부친으로부터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웠고 또한 죠반니-레그렌치에게 지도를 받았다. 그는 1703년에 성직에 들어 갔으나 몸이 약해 미사를 하는 것은 면제를 받았다. 1709년에 베네치아의 자선병원 부속 음악학교의 바이올린 교사가 되었고 1716년에는 음악장이 되었다. 이 학교에서 재직하였던 15 년 동안 수많은 협주곡과 성악곡을 작곡하였고, 후기에는 오페라 작곡과 함께 그 흥행에도 관여했다. 또한, 평생 500여개의 콘체르토와 45개에 달하는 오페라곡을 발표했다.

 

비발디를 비평하는 사람들은 그가 같은 콘체르토를 500번이나 되풀이하였다고 할 만큼 그 의 작품은 일률적이고 반복되는 공통성이 있다. 전체작품 중 거의 반 이상이 바이올린 곡이며 100곡이상이 바순, 첼로, 오보에, 플루트 등의 협연곡이다. 그의 음악적 특징은 강한 리듬과 넘치는 활력 그리고 거의 항상 사용되는 직선적인 주제 등이다. 바순 콘체르토로 어둡고 불길한 느낌을 주는 표제적인 협주곡 "밤"과 같이 줄거리가 있는 음악을 여러 곡 만들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인 "사계"가 1725년에 발표되었다. 봄의 새노래, 여름의 폭풍, 가을의 추수, 추운 겨울을 상징하는 이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악기의 음색을 새롭게 표현한 비발디의 음악은 많은 작곡가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주요작품> "사계" 1725

 

"올란도 핀토 파쪼" 1724

 

"귀스티노" 1724

 

"그리셀다" 1735

 

"충실한 목동" 1737

 

"바이올린 콘체르토"

 

"적장 홀로페르네스에게 승리하고 돌아오는 유다"

 

 

2)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 - Georg Friedrich, Handel 1685-1759

 

  독일 할레(Halle)에서 1685년에 출생한 헨델은 8세때에 이미 음악적 재질을 인정 받았으며, 1706년 함부르크가극장 관현악부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1705년 그의 처녀작 가극 <알 미라( Almira)>를 상영하는데 성공하였으며, 1706년에는 이탈리아를 방문하고 체류하면서 수 편의 가극을 상영하였다.

 

1710년에 귀국하여 하노버 선제후의 악사장으로 선임되었다가 1711 년 영국으로 건너가 가극<리날도(Rinaldo)>를 상연하여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로 런던 에 체류하면서 연금을 받았으며, 왕립 음악학교 교장이 되었으나, 실명 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작풍이 웅대하고 장엄하여 영궁의 귀족적 취미와 신흥산업 부르조아 취미에 적합하였다. 많은 작품을 지었는데 가극 40, 성극 80, 서악 70외에 기악곡-합창곡이 많다.

 

 

<주요작품> "알미라" 1705

 

"리날도" 1711

 

"메시아" 1742

 

"요한수난곡" 1724

 

"수상음악" 1717

 

"하프시코드모음곡" 등등...

 

 

3) 요한 세바스찬 바하 - Johann Sebastisn Bach 1585-1750

 

  바하는 1685년 3월 21일 독일중부 츄우린겐의 산악지대 아이제나하에서 태어나, 1750년 7 월 28일 역시 독일의 아리프찌히에서 65세로 세상을 떠난 바로크 음악 최후의, 그리고 최대의 작곡가이다.

 

"바하"라고 하면 마치 서양음악이 바하로부터 비롯된 것처럼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우리는 일상 바하가 입에 오르게 되고 그의 음악의 고고한 고전미에 감동하고, 또 음악사를 논할 때 으례이 맨 먼저 들먹이는 이름이 바하이다. 그만큼 역사에 남긴 바하의 업적과 비중이 크기 때문이며, 그의 음악이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줄 만큼 위대한 탓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실, 바하가 나오기 전 17세기 경에는 음악은 여러 가지 양식이 잡다하게 생겨 혼란을 빚을 정도로 분파작용을 거듭하고 있었다. 18세기 전반에 있어서, 바하를 이러한 여러갈래의 양식을 자 화해시켜서 독자적인 양식을 수립한 , 이를테면 바로크 음악을 집대성한 위대한 대가라고 하겠다. 바하는 주로 과거의 전통을 따르기는 했으나, 당시의 새로운 양식도 흡수하여 대위법적이면서도 새로운 양식을 도입한 독특한 음을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근대적인 의미 에 있어서의 여러 가지 음악 양식, 이를테면 교향곡이니, 협주곡이니, 현악4중주니 하는 이른바 고전주의 양식을 수립한 하이든이나 모짜르트와는 판이한 한계를 갖는 바하는 바로크음 악의 맨 마지막 정상을 이룬 대가이다.

 

 

바하는 음악적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대대로 이가족에서는 유명한 음악가가 많이 나왔다. 전 후 200년 동안에 약 50명의 음악가가 나왔다니 대단한 음악적인 가계라고 하겠다. 바하도 어렸을때부터 음악가인 부친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비롯한 음악교육을 받았는데, 10살때에는 불행이도 양친을 잃고 고향인 아이제나하를 떠나 올드루프에 있는 그의 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하의 손에 의해 양육되어 그 동안 오르가니스트인 형으로부터 크라비어와 오르간등을 배웠다. 바하는 15살이 되자, 류우네브르크에 있는 교회부속 학교에 들어가 고등 교육을 받으며 연구를 계속하였고 유명한 오르간 주자인 베므를 비롯한 당시의 대오르간 주자로 함부르크의 카라리이나 교회에 있는 디트리히-북스테푸데 등에게 지도를 받았다. 또한, 이웃 체레시를 자주 왕래하면서 프랑스식으로 편성된 궁정악단의 연주를 들어 프랑스음악에 대한 견식도 넓혔다.

 

 

그 후, 바하는 1703년 바이마르로 옮겨 궁정악단의 바이올린 주자로 근무하다가 이룬슈타트의 오르간 주자로 다시 옮겼고, 1707년에는 뮤르하우젠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그 이듬 해에 바이마르의 궁정예배당의 오르가니스트로의 명예로운 지위를 얻어, 여기서는 직접 자기가 오르간의 설계를 하는등, 오르간에 많은 개량을 가했다. 또한, 그의 오르간 작품의 태반은 이때에 작곡되었다.

 

 

그러나 바하는 교회음악에 대한 염원과 정열을 억누를 길이 없어 1723년 라이프찌히의 토마스 교회부속 학교 합창장겸 시의 음악 지휘자가 되었다. 바하는 눈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27년간 이 직에 충실히 근무하면서 맣은 작품을 썼다. 바하의 작품은 모든 분야에 걸쳐 있고, 그 수도 대단히 많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오랜 시간, 세상에서 잊혀졌다가 1829년에 멘델스존이 바하의 <마태수상곡>을 연주한 데서 일반에게 주목을 받게 되었고, 그 진가를 재 인식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대부분의 작품이 출판되지 않았다는 데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가 장 중요한 이유로는 그 작품의 성질이다. 작품의 태반이 종교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따라 서 통속적인 보편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 구조가 복잡하고 내객이 깊어 이해하기 어렵다는 데에 원인이 크다고 본다.

 

그의 작품이 다성부적이고 대위법적인 처리가 대부분인 것은 사실이며, 당시에도 "너무 기교적이고 자연성이 없다" 는 비판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풍부한 인간적 감정이나 정화된 고고한 기풍이 느껴지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주요작품> "마태수난곡" 1727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1734

 

"커피 칸타타" 1735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1번-6번" 1721

 

"토카타와 푸가 d단조"

 

"골드베르그 변주곡" 1742

 

 

 

  고전주의 음악

 

고전주의 음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18세기 사상은 다음과 같이 네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로 18세기는 범 세기적인 시대였다. 즉 한나라에서만 좋은 음악으로 인정되는데 그치지 않고, 많은 민족에게서 이해되는 음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낭만 시대와 더불어 이 시대가 `공통관습시대`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둘째로, 이 시대는 인본주의를 추구한 시대였다. 이러한 이상들은 `프리메이슨 운동`으로 구체화돠어 전유럽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으며, 모차르트도 여기의 열렬한 회원이었다. 셋째로는 중산층이 영향력 있는 위치로 발돋움하면서 예술과 학문의 대중화 과정을 보였다. 소수의 집단보다는 일반 대중을 의식하여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Ⅰ. 하이든

 

하이든의 삶은 8세가 되면서 극적으로 변했다. 하인부르크 방문중에 소년 하이든을 본 빈의 장크트슈테판 대성당의 음악감독 게오르크 로이터가 그를 오스트리아 수도 최고의 교회인 장크트슈테판 대성당의 성가대 단원으로 발탁한 것이었다. 그의 부모는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적어도 음악교육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또한 성가대 부속학교에 기숙하면 가족의 재정적인 부담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1740년 그는 기대감에 부풀어 빈으로 갔다. 9년간 장크트슈테판 대성당 부속학교에서 성가대원으로 있으면서 음악 실제에 관한 지식을 쌓았다. 그러나 음악이론(작곡법)에 대해서는 거의 교육받을 수 없었으며, 하인부르크에서의 생활 패턴이 그대로 재현되는 듯했다. 이곳에서 그는 성가대원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해야 했고, 식사 문제도 거의 개선된 것이 없었다. 점차 그의 목소리가 변성되어갔고, 목소리가 완전히 변하자 성가대측에서는 그를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다. 성가대감독은 그가 우연히 한 농담을 구실로 그를 성가대 학교에서 쫓아냈다. 3벌의 낡은 내의와 낡은 코트 1벌이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이었다. 당시 17세였던 하이든은 모든 것을 혼자서 새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처음 한동안은 동료 음악가의 다락방에 머물면서 춤곡·소야곡 등을 연주하거나 주일 예배에 오르간을 연주하면서, 또는 헐값으로 레슨을 해주는 등 기회 있을 때마다 음악에 관계된 일을 하면서 '비참한' 생활을 이어나갔다. 하이든은 이러한 일들과 병행해서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등의 작품이나 중요한 음악이론서들을 열심히 독학으로 연구했다. 그러던 하이든에게 또 한번 행운이 찾아왔다. 당대 성공적인 이탈리아 작곡가이자 성악 선생이던 니콜로 포르포라의 눈에 들게 된 것이었다. 포르포라는 그를 성악 레슨의 반주자로 채용했고 개인 비서 일을 시켰으며, 이에 대한 대가로 작품을 교정해주었다.

 

  인내와 노력으로 그의 실력은 나날이 늘었고, 마침내 그는 귀족 제자들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며, 이들에 의해 오스트리아의 귀족이자 음악 애호가인 카를 요제프 폰 퓌른베르크에 소개되었다. 하이든은 이 귀족의 저택에서 악기 연주자로서 주로 실내악을 연주했다. 이곳에서 쓴 초기 현악 4중주들을 시작으로 그는 일생 동안 80여 곡의 현악 4중주를 작곡하면서 이 음악형식을 발전시켰다. 1758년 하이든은 퓌른베르크의 추천을 통해 최초로 정규적인 자리를 얻었는데, 그것은 보헤미아의 백작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폰 모르친의 개인 악단을 위해 곡을 써주는 일과 개인 음악교사로서의 일이었다. 막시밀리안 폰 모르친은 대부분 보헤미아 서쪽 부근 루카베츠 지방의 전원 저택에서 살았는데, 이곳에서 하이든이 거느린 악단은 16명 정도의 연주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악단을 위해 하이든은 첫번째 교향곡을 썼는데, 이 작품은 아직 기존의 음악적 관습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신선하고 충격적인 선율의 면모를 통해 미래의 대가 하이든의 작품들을 예견했다.

 

 

  1) 하이든 - 교향곡

 

하이든의 교향곡의 특징

 

하이든의 교향곡은 대략 108곡으로 추정되나 하이든의 작품으로 가장하여 출판 한 사례가 많았고, 하이든이 자신의 작품에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명하지는 않다. 그의 대부분의 교향곡들은 에스테르하지 궁정에 있을 때 작곡되었다. 초기의 교향곡들은 대개 3악장으로 되어 있으나 새로운 고전양식과 바로크적인 옛 양식이 자주 혼합되어 표준적인 악장구조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1760년대 이후부터는 4악장 형식으로 정립되며, 1760년대 말 전고전주의, 갈랑양식등과 질풍노도 양식의 영향을 받아 보다 내면적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고별 교향곡> 등의 단조 조성의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한다. 80년대에 교향곡에서 때때로 마지막 악장에 론도 소나타 형식을 사용하며, 파리 교향곡 등 그의 성숙기를 대표하는 작품들을 작곡한다. 90년대 들어 고전 교향곡의 정수이자 하이든 교향곡의 최고의 작품이라고 평가 받는 󰡐런던 교향곡󰡑을 작곡한다. 12개의 교향곡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작품들은 전형적인 고전 소나타 형식으로 작곡되었지만 첫 악장에 프랑스 서곡에서 유래한 느린 도입부를 사용하고 있다. 하이든은 그의 교향곡에 민속 선율에서 주제를 선택하기도 했으며 악기 편성이 이전의 교향곡들보다 크고 다양해졌다.

 

  평가와 의의

 

하이든의 교향곡에는 바로크, 전고전주의, 고전주의에 이르는 다양한 음악적 요소가 전부 들어 있다. 하이든은 초기부터 많은 실험적인 교향곡을 발표하다가 12개의 런던 교향곡에 이르러 고전주의의 완숙한 음악 형식을 실현한 교향곡을 탄생시켰다. 악기 편성도 크고 다양해졌을 뿐만 아니라 주제의 전개에서 호모포니와 대위법을 음악 재료에 따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음악은 색채감이 넘치고 장대해졌다. 교향곡에 나타난 하이든의 창작 기법과 실험 정신은 교향곡을 고전음악의 최고의 위치로 올려놓았고 하이든을 󰡒교향곡의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다. 하이든의 교향곡은 모차르트, 베토벤을 비롯한 후기의 교향곡 작곡가로 이어지는 독일 교향곡 전통의 초석이 되었다.

 

 

2) 하이든 - 실내악

 

  실내악의 의미

 

18세기 후반까지도 실내악이라는 음악 장르는 그 범위가 한정되지 않았다. 궁정에서 연주되었던 작은 합주와 독주곡들은 물론 교향곡이나 기타 관현악 작품들도 흔히 실내악이라 하였고 19세기에 와서는 각 파트를 한 악기가 연주하는 합주음악을 실내악이라고 하였다. 하이든은 이 두 가지 형태의 음악을 모두 작곡하였으며 주로 2˜9명이 연주하였다.

 

  하이든의 실내악 음악과 특징

 

  그의 실내악으로는 현을 위한 2, 3, 4, 5, 6 중주, 그리고 바이올린과 건반 악기를 위한 소나타, 피아노 3중주, 현과 목관 악기의 다양한 혼합으로 편성한 3, 4, 6, 8, 9 중주 음악들이 있다. 이는 실내악 음악의 효시적인 작품들이라 할 수 있으며, 그의 대표적 음악 형식은 바이올린 2개, 비올라 1개, 첼로 1개의 악기들로 구성된 현악 4중주이다. 하이든의 4중주는 전반적으로 어려운 곡으로 유명하며, Op. 9부터 4성부들이 폴리포니적으로 독립적으로 진행되고, 화성을 고려한 성부라는 특징을 가진다. 하이든의 초기 4중주는 디베르티멘토를 편곡한 형태와 유사하며 대부분이 2부분 형식이고, 5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이든의 실내악을 대표하는 음악은 러시아의 폴 공작을 위하여 작곡했기 때문에 <러시아 4중주>라고도 불리는 Op. 33의 4중주로 새로운 음악 기법으로 모티브 가공 작업이 사용되고 있다. 모티브 가공 작업이란 제시부의 제 1, 2주제의 소재를 가공하여 반복하여 사용하여 곡을 유기적이고 극적으로 진행시키게 된다. 또한 곡의 2악장은 스케르쪼, 3악장에 가곡이나 변주형식, 4악장에는 론도 형식으로 각 악장들이 균형을 이루며 통일된 작품을 형성하고 있다. 1793년에서 1803년 사이에 작곡한 하이든의 말기 현악 4중주는 확대된 화성구조, 조성의 급격한 변화, 재현부 안에서 발전부와 재현부를 혼합하는 기법이 사용되어 낭만주의의 기법과 원숙한 하이든의 양식을 느낄 수 있다.

 

 

2. 모차르트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1719-87)의 아들이다. 그와 그의 누나인 마리아 아나(1751-1829)는 음악적 재능이 아주 뛰어났다. 1762년 레오폴트는 그의 어린 아이들과 유럽 음악 여행을 시작하였다.

 

  모차르트는 첫번째 음악 여행(1762-69)에서 프랑스와 잉글랜드에 갔는데, 그곳에서 그는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를 만났고 거기서 그의 첫번째 교향곡을 썼다. 이탈리아 여행(1769-74)에서 그는 처음으로 요제프 하이든의 현악 4중주를 보았고 첫번째 이탈리안 오페라를 썼다. 1775-77년 그는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첫번째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했다. 그의 어머니가 1779에 죽자, 그는 궁정 오르간 연주자로서 잘츠부르크로 돌아왔고, 1781년 정가극 〈이도메네오 Idomeneo〉를 썼다.

 

  1781년 그는 대주교와의 갈등으로 쫓겨났다. 모차르트는 그의 친구들과 함께 베버가로 옮기고, 비엔나에서 그의 독립적인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는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하였고, 〈The Abduction from the Seraglio〉(1782)와 많은 그의 위대한 피아노 협주곡을 썼다. 1780년대 후반 〈피가로의 결혼 Le Nozze di Figaro〉·〈돈 조반니 Don Giovanni〉·〈코지 판 투테 Cosi fan tutte〉등의 작품으로 그는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다. 모차르트는 35살에 병으로 죽었는데, 이처럼 짧은 생애 동안 위대한 업적을 남긴 작곡가는 없다.

 

 

  1) 모차르트 - 오페라

 

  모차르트는 40여곡의 오페라를 작곡했으며 오페라 세리아, 오페라 부파, 징슈필로 나눌수 있다. 이 세가지 부류를 모차르트가 모두 작곡했던 것은 그가 이탈리아 오페라와 독일 오페라 모두에 뛰어난 능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페라 세리아

 

오페라 세리아는 레치타티보와 아리아의 구분이 잘되는 특징이 있다. 모차르트는 <이도메네오>를 통해 극적인 합창, 아리아와 중창, 발레, 오케스트라가 적절하게 조합된 오페라를 보여주지만, 오페라 부파에서 더 큰 업적을 남긴다.

 

  오페라 부파

 

오페라 부파는 서민의 일상 생활을 표현하는 이탈리아 희극 오페라로 아리아가 빠르고, 2중창과 합창으로도 줄거리를 전달하는 등 레치타티브와 아리아의 구별이 약하다. 󰡐피가로의 결혼󰡑, 󰡐돈 지오반니󰡑, 󰡐여자란 다 그런 것󰡑등이 유명하다. 모차르트는 오페라 부파를 예술적 수준의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고 고전시대의 가장 인기 있는 레퍼토리로 자리잡게 했다. 또한 단순한 희극적 오락성을 넘어서서 인간의 내면까지 표현하고 있다.

 

  징슈필

 

징슈필은 독일의 희극 오페라로 분류되나 모차르트의 징슈필은 희극 오페라의 단순함이나 경박함을 넘어서서 내면적인 예술성을 창조하고 있다. 그의 중요한 징슈필 작품 󰡐마적󰡑에는 17세기의 모든 오페라들이 갖고 있는 음악적 요소들이 공존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풍부한 선율적 아리아, 독일적인 레치타티보, 효과적인 중창, 심오한 합창들과 민요풍의 가곡, 바로크적인 코랄 프렐류드 기법, 색채감이 있는 관현악 편성 등으로 오페라가 구성되어 있다. 또한 초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줄거리로 대중적인 희극을 구성하였고, 희극적인 극의 진행속에서도 엄숙한 내면성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극 속의 선이 악일 이기는 이야기 구조를 통해 그가 󰡐자유, 평등, 박애󰡑를 중심 이념으로 하는 프리메이슨 운동에 참여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2) 모차르트 - 협주곡

 

  모차르트는 협주곡 분야에서도 고전주의를 대표하고 있다. 특히 그의 25개의 피아노 협주곡은 고전 협주곡 형식의 확립에 기여했고, 음악적으로도 뛰어난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외에 7개의 바이올린 협주곡, 플룻 협주곡, 오보에 협주곡, 클라리렛 협주곡, 바순 협주곡등 목관악기를 위한 다양한 협주곡이 있다. 피아노 협주곡 중 󰡐대관식 협주곡󰡑과 베토벤이 1, 2악장에 카덴차를 붙인 <D.단조(K.466)>이 특히 유명하다. 고전 협주곡의 형식은 1780년대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1악장은 정통적인 고전 협주곡의 양식과 그의 독창적 창작 기법이 융합되어 있고, 2악장은 발전부가 없는 소나타 형식으로 안단테나 라르게토의 서정적인 아리아를 딸림조나 관계단조로 연주하는데 독주자의 기량이 뚜렷이 나타난다. 3악장은 독주와 투티의 경쟁과 균형이 지속되고, 관현악과 독주의 음악적 색채감이 뛰어나다.

 

 

3. 베토벤

 

  작곡가의 생애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아버지가 모두 음악가였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를 제2의 모차르트로 만들기 위해 엄한 교육을 시켰다. 그는 모차르트 처럼 신동은 아니었으나 음악적인 천분을 마침내 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는 17세 때에 그 당시 음악의 중심지였던 빈으로 갔다. 그의 본격적인 음악 교육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1792년, 22세 때에 그가 빈에 나타났을 때는 작곡가라기보다는 먼저 피아니스트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너무나 많은 역경과 고난이 겹쳐 들었다. 생활은 곤란했고 사랑은 실패했으며 음악가로서는 치명적인 귓병을 앓고 있었다. 하지만 그같은 고통 속에서도 비할 바 없는 위대한 예술이 나타났다. 1815년 이후의 작품은 그의 모든 창작 중의 일대 전환인데 웅대한 구상과 자유로운 형식, 진지한 표현 등은 거성이 아니고는 감히 도달할 수 없는 경지라고 하겠다. 그의 작품은 낭만적인 영향도 받았지만 감정에 치우치지 않았고 냉정했으며 안정된 형식미를 갖추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따라서 생명의 체험을 합리적인 형식을 통해 표현하였다. 그의 작품은 보통 3기 (期)로 나누는데,

 

제1기(1786-1803) 초기의 작품으로서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영향을 받은 때다. 교향곡 제1,2번이 이 시기의 작품이다.

 

제2기(1804-1816)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독창적인 시기이다. 교향곡 제3번에서 제8번까지의 작품이다.

 

제3기(1817-1827) 초인간적인 최고의 예술인데 영감의 창작기이다. 청각을 거의 잃어버린 무렵의 작품으로는 교향곡 제9번 등이 있는데 음악사상 최고에 속한다. 베토벤이야말로 많은 유산을 우리 인류에게 남겼다고 하겠다.

 

 

 

1) 베토벤 - 교향곡

 

  베토벤의 9개의 교향곡은 음악사에 영원히 빛나는 기념비적인 작품들이다. 베토벤은 이 교향곡들을 위하여 그의 모든 음악 양식과 작곡 기법을 동원하고 있다. 교향곡에 나타난 조성, 주제, 형식의 전개는 고전주의 기법의 완성을 보여주었고, 한편으로는 낭만주의를 지향하는 진보적 기법의 실례를 보여준다. 교향곡 1,2번은 초기 빈 시절에 작곡된 곡들로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영향을 받았다. 교향곡 3번 <영웅>은 나폴레옹과 관련된 일화로도 유명하지만 앞선 시대의 어떤 교향곡에서도 볼 수 없었던 길이와 규모를 갖고 있을 뿐아니라 음악도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 혁명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3번 교향곡은 이외에도 첫 번째 주제 선율에서 계속 파생, 전개되어 코다를 향해가듯이 논리적으로 수미일관 진행하는 주제 발전 작업이 나타나며 이는 5번 교향곡과 연계된다. 또한 󰡐영웅󰡑이라는 표제로 낭만주의시대의 표제 교향곡의 모델이 된다. 이 곡은 특히 4악장이 󰡐프로메테우스의 발레󰡑에서 도입된 것으로 전체적으로 영웅적 인내심과 의지력을 표현하는 자기 therapy 적인 성격이 강하다. 교향곡 5번 <운명>은 모티브 작업으로 전곡을 이루어 나가는 󰡐리듬적 모티브󰡑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소위 󰡐운명의 동기󰡑로 불리는 처음에 제시된 동기가 곡 전체를 지배하는 작품으로 동기의 선율적, 리듬적 요소들이 모든 악장에서 순환되고 있다. c단조로 시작하여 마지막 악장에서 C장조로 끝맺는 것은 청각 장애의 시련을 어둠에서 빛으로, 고통에서 환희로 극복한 베토벤의 강인한 의지를 표현한 조성 진행으로 풀이된다.

 

교향곡 6번 <전원>은 보통의 4악장의 구성과는 다르게 5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악장에 표제가 붙어 있으며 표제 교향곡의 시초로 평가받는다. <전원>은 단순히 전원의 풍경을 묘사하려는 것은 아니고 영감에 의한 깊은 감정을 표현하려는 것으로 3, 5번 교향곡과는 다른 시도였다. 교향곡 3~8은 베토벤의 중기적인 작품에 속하며 2악장과 3악장의 길이가 길어져 전체적으로 대등한 위치로 성격이 분명해진 특징이 있다. 교향곡 9번 󰡒합창 교향곡󰡓은 쉴러의 󰡐송가󰡑를 읽고 감동을 받아 작곡을 결심한후 6년만에 완성한 그의 마지막 교향곡으로 그의 모든 작품을 대표할 만큼의 불후의 명작이다. 3악장에서 쉬지 않고 연결되는 4악장은 인류애적 형제애를 노래한 합창이 도입된 악장으로 교향곡과 합창을 조화시킨 효시적인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2) 베토벤 - 피아노 소나타

 

  베토벤이 남긴 32개의 피아노 소나타는 베토벤의 모든 음악 양식이나 기법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피아노 음악사에 나타난 양식의 변천까지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베토벤의 피아노 음악에 대한 창작 열정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나타났고 피아노 소나타에서 발견되는 특징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음악의 특징을 모두 포함한다. 베토벤은 1802년까지 20곡의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하였는데, 다양한 형식과 구조로 되어 있다. 10곡은 4악장, 2곡은 2악장, 나머지는 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고전주의적인 우아한 메뉴에트 악장은 생동감이 넘치는 스케르초를 사용하였다.

 

8번 비창 - 초기 피아노 소나타를 대표하는 곡으로 󰡐거의 환상곡처럼󰡑이라는 지시사항을 붙였는데, 즉흥곡 요소를 소나타에 옮기려한 것으로 추정된다.

 

14번 월광 - 첫 두개의 악장에서 멈춤이 없고 1악장은 상당히 이완되어 있다가 마지막에 무게를 두는 형식으로 󰡐형식의 수정 또는 이탈󰡑이라는 낭만주의 음악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17번 템페스트 - 동명의 소설의 어둡고 장중한 분위기를 그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23번 열정 - 21번 발트슈타인 소나타와 함께 중반부 작품을 대표하며 모든 피아노 음역을 사용함으로써 음역을 넓혔다. 또한 주관적 표현이 많으며, 전개부와 코다가 길어진 특징이 있다.

 

26번 고별 - 그의 친구이자 후견인이었던 루돌프 대공에게 한정한 것으로 󰡐이별󰡑, 󰡐부재󰡑, 󰡐재회󰡑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베토벤의 말기 피아노 소나타의 창작 시기인 1817 ~ 1822년 사이에는 마지막 5개의 피아노 소나타가 작곡되었다. 변주곡 형식이 많으며, 푸가와 대조 기법이 빈번하게 사용 되었으며 주제의 독창적인 전개, 대담한 화성, 원격전조, 악장간의 주제 또는 동기의 유기적 관계등의 특징이 있다.

 

 

2009.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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