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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충청북도의 특산물
도깨비 조회수 7,998 작성일2011.04.16

충청북도의 특산물 , 유명한 위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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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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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의 특산물)

 

1. 괴산군- 괴산청결고추

 

 

2. 단양-단양마늘, 감자, 사과

 

  

 

3. 보은-황토대추, 황금곳간쌀

 

 

4. 영동-황산포도, 감

 

 

5. 옥천-옥천포도, 청산곶감

 

 

6. 음성-음성청결고추

 

 

7. 제천-제천황기, 제천사과

 

8. 진천-생거진천쌀, 진천관상어, 덕산꿀수박

 

8. 증평- 인삼, 장뜰쌀

 

 

9. 청원-청원생명쌀

 

 

10. 청주-청주직지쌀, 뻘국산고구마

 

 

11. 충주-충주사과

 


 

(충청북도의 유명한 위인)

 

1. 반기문 (1944.6.13~) 
  
1944년 충청북도 음성에서 태어나 1963년 충주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충주고 2학년 때 '외국학생의 미국 방문 프로그램(VISTA)'에 선발되어, 3학년 때 미국을 방문하였다. 이때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보고 외교관의 꿈을 더욱 키우게 되었고,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 진학하였다. 1970년 2월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5월 외무부에 들어갔다. 외무부에 재직중 하버드대학교 케네디스쿨에 유학하여 1985년 4월 행정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72년 주뉴델리 부영사를 시작으로 1976년 주인도대사관의 1등서기관, 1990년 외무부 미주국장, 1992년 외무부 장관 특별보좌관, 1996년 외무부 제1차관보와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 수석비서관, 2000년 외교통상부 차관, 2002년 외교부 본부대사, 2003년 대통령비서실 외교보좌관을 거쳐 2004년 제33대 외교통상부 장관이 되었다.

1993~1994년 제1차 북한 핵위기 때 주미국대사관 정무공사로 재직하면서 한국과 미국 사이의 대북정책을 조율하는 실무 총책 역할을 하였다. 또 1997년 북한 노동당 비서를 지낸 황장엽이 망명할 때 중국과 필리핀을 오가면서 밀사 역할을 하여 망명을 성사시키기도 하였다. 외교통상부 내에서 대표적인 미국통으로 알려져 있으며, 철두철미한 업무 처리로 정평이 나 있다.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재직중인 2006년 2월 유엔 사무총장직에 출마할 것을 공식 선언하였다. 같은 해 10월 9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단독 후보로 추대되었으며, 14일 유엔 총회에서 공식 제8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공식 임명되었다. 이로써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2007년 1월 1일부터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1975년 녹조근정훈장, 1986년 홍조근정훈장, 2001년 오스트리아 명예대훈장을 받았고, 2002년에는 한국과 브라질의 관계를 증진시킨 공로로 브라질 리오블랑코 대십자훈장을 받았다. 2006년에는 페루 태양 대십자훈장, 알제리 국가유공훈장, 청조근정훈장 등을 받았다.

 

2.임경업 (1594(선조 27) ∼ 1646(인조 24))

 

본관  평택
호  고송
별칭  자 영백, 시호 충민
활동분야  군사
출생지  충북 충주
 

본관 평택. 자 영백. 호 고송. 시호 충민. 충주 출생. 철저한 친명배청파 무장이다. 1618년(광해군 10) 무과에 급제, 1620년 소농보권관, 1622년 중추부첨지사를 거쳐 1624년(인조 2) 정충신 휘하에서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 1등이 되었다. 그 후 우림위장 ·방답진첨절제사 등을 지내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좌영장으로 강화에 갔으나 화의가 성립된 후였다. 1630년 평양중군으로 검산성과 용골성을 수축하는 한편 가도에 주둔한 명나라 도독 유흥치의 군사를 감시, 그 준동을 막았다.

 

1633년 청북방어사 겸 영변부사로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수축했으며, 공유덕 등 명나라의 반도(叛徒)를 토벌, 명나라로부터 총병 벼슬을 받았다. 1634년 의주부윤으로 청북방어사를 겸임할 때 포로를 석방했다는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1636년 무혐의로 복직되었다. 같은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백마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의 진로를 차단하고 원병을 청했으나 김자점의 방해로 결국 남한산성까지 포위되었다. 그 후 청나라가 명나라 군대를 치기 위해 병력을 요청하자 수군장으로 참전했으나 명나라와 내통, 피해를 줄이게 했다.

 

1640년 안주목사 때 청나라의 요청에 따라 주사상장으로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 다시 명군과 내통하여 청군에 대항하려다가 이 사실이 탐지되어 체포되었으나 금교역에서 탈출했다. 1643년 명나라에 망명, 명군의 총병이 되어 청나라를 공격하다가 포로가 되었다. 이 때 국내에서 좌의정 심기원의 모반에 연루설이 나돌아 1646년 인조의 요청으로 청나라에서 송환되어 친국을 받다가 김자점의 밀명을 받은 형리에게 장살되었다. 1697년(숙종 23) 복관, 충주 충렬사 등에 배향되었다.

 

3. 권태응 (1918. 4. 20~1951. 3. 28)  
 
활동분야  항일운동, 시인 
출생지  충주(忠州) 
주요수상  대통령표창 
주요작품  감자꽃(동시)  
 
충청북도 충주 출신으로 어려서 한학자인 조부에게서 한문을 배웠다. 1935년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고등학교) 재학 중 최인형, 염홍섭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단체에 가입하여 민족의식을 키우던 중 졸업 직전 친일 발언을 한 학생을 구타하여 종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에 재학하던 중 고교 동창인 염홍섭 등과 독서회를 조직하여 조국의 독립과 새로운 사회 건설에 대해 논의하였다. 1938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폐결핵으로 풀려났으나 대학에서는 퇴학 당하였다.

 

1941년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야학을 운영하고 창작활동에 전념하였다. 한국전쟁 때 약을 구하지 못해 병이 악화되어 별세하였다. 대표작은 동시 '감자꽃'이며 충청북도 충주시 칠금동 산1번지에 감자꽃 노래비가 있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4.백남규 (1884.8.22~1970.2.19)  
  
호  운암 
활동분야  독립운동 
출생지  충북 충주 
주요수상  건국훈장 독립장(1963)  
 
호 운암. 충청북도 충주 출생이다.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경상북도 순흥에서 의병을 일으켜 한때 그 부하가 800명에 달하였다. 이강년과 만나 그의 우선봉장이 되어 같은 해 7월 제천에서 일본군을 대파하고 도선봉장이 되었다. 문경에서 일본군과 교전, 대승하였으며 9월 영월 사리치에서 선유원 홍우석이 이끄는 수비대 100여 명과 교전하여 이를 크게 격파하였다.

 

도대장 이강년이 일본군에게 체포된 후에도 안동·내성·아산 등지에서 계속 항전하다가 1909년 12월 죽산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8년 간 복역하다 일제의 대사령으로 출감하였다. 1918년 상하이로 망명을 기도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15년의 옥고를 치렀으며, 8·15광복 후에는 우국노인회장·국민회 고문 등으로 활약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5.엄정섭 (1885~1960)
  
본관  영월 
별칭  김홍경, 김세진

국적  한국 
활동분야  항일운동 
출생지  충주  
 
구한말의 독립운동가로 본관은 영월이며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문숭리 출신이다.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김홍경, 김세진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운동 자금과 무기 조달을 위한 활동을 벌였다. 1916년 대구에서 박상진, 우재룡 등과 광복회를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1917년 칠곡에 사는 친일파 거부 장승원이 군자금 요청을 거부하자 그를 사살하는 모의에 가담하였다.

 

동지였던 이종국의 밀고로 광복회 회원들이 체포되고 재판을 받을 때 그도 결석재판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후 김홍경, 김세진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광복 후에는 서울로 올라가 국권회복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1960년 5월에 세상을 떠났다.
 

6.정태희 (1898.1.8~1952.3.19) 
  
호  계운 
활동분야  독립운동, 종교 
출생지  충북 충주(忠州) 
주요수상  건국훈장 독립장(1963)  
 
호 계운. 충북 충주 출생이다. 서울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고 평양에서 대한국민총회를 조직하였다. 그 후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1921년 임시정부 재무부 참사·대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 간사, 1927년 의정원 약헌기초위원을 지냈다.

 

1928년 8월 재중국본부 한인청년동맹을 조직, 중앙집행위원회 축소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 9월 위원장이 되었다. 1929년 한국유일독립당 상무위원·상하이교민단 총무를 지냈으며,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항저우로 탈출하려다 상하이역에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34년 신의주에서 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으며, 1940년 출옥한 후 고향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7.손병희 (1861년 4월 8일 ~ 1922년 5월 19일)

 

호 의암. 초명 응구. 후명 규동. 충북 청주 출생. 1882년(고종 19) 22세 때 동학에 입교, 2년 후 교주 최시형을 만나 수제자로서 연성수도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통령으로서 북접의 농민군을 이끌고 남접의 전봉준과 논산에서 합세, 호남 ·호서를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원산 ·강계 등지로 피신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뒤를 이어 3년 동안 지하에서 교세 확장에 힘쓰다가 1901년 일본을 경유, 상하이로 망명하여 이상헌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세창 ·박영효 등을 만나 국내사정을 듣고 1903년에 귀국, 두 차례에 걸쳐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으로 데리고 건너가 유학시켰다.

 

1904년 권동진 ·오세창 등과 개혁운동을 목표로 진보회를 조직한 후 이용구를 파견하여 국내 조직에 착수, 경향 각지에 회원 16만 명을 확보하고 전회원에게 단발령을 내리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이용구가 배신하여 친일단체인 유신회와 합하여 일진회를 만들고 을사조약에 찬동하는 성명을 내자, 즉시 귀국하여 일진회와는 관계가 없음을 밝히고 이용구 등 친일분자 26명을 출교시켰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제3세 교주에 취임, 교세 확장운동을 벌이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를 창립하고 보성·동덕 등의 학교를 인수하여 교육 ·문화사업에 힘썼다. 1908년 교주 자리를 박인호에게 인계하고 우이동에 은거, 수도에 힘쓰다가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운동을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 치료중 별장 상춘원에서 사망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8.이강년 (1858~1908)

 

호는 운강, 자는 낙인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1880년 3월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으나 개화정책에 불만을 느끼고 낙향하게 되었다. 1907년에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즈음하여 윤기영 등과 함께 의병을 크게 일으킨 이강년은 제천으로 몰려든 여러 의진과 함께 제천 천남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으며 이후 호좌의진을 재건하여 대장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후기의병전의 특징이기도한 유격전의 양상을 띠었으며 갈평,사리재,영월,죽령 등 소백산 지대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 그의 활약은 험준한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이동하여 적의 약점을 공격하는 전투의병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강화되고 이강년의 의진이 약해짐에 따라 그해 7월2일 작성산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체포되어 10월 13일에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국가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9.천관우 (1925~1991)

 

제천시 청풍면 출신으로 동아, 조선, 한국 등 중요신문사에서 편집국장과 논설위원을 역임하였으며 사학자로서 한국사의 정립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80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제천시와 제원군이 분리될 당시「제천 시민헌장」을 지어 제천시민이 나아가야 할 바를 제시해 주었다. 언론계와 사학계의 중진으로 생애를 일관해온 천관우는「생애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이 떳떳한 삶의 비결」이라고 1980년 외솔상 수상 당시 그의 사생관을 밝힌 바 있다. 이런 기개는 실생활에도 연결되어 1971년 민주수호협의 공동대표 등 반독재 투쟁에 발벗고 나서「서서 죽을지언정 무릎끓고 살지 않겠다」고 스스럼 없이 말하기도 했다.

 

10.김규철 (1881~1929) : 의병 · 독립운동가

 

- 호 : 비장

- 별 칭 : 별명 규철

- 활동분야 : 독립운동

- 출 생 지 : 충북 단양

- 주요수상 : 건국포장(1977)

 

1881년 1월 5일 단양군 영춘면 보발리에서 출생하였는데, 호는 비장, 본관은 청풍으로 궁내부주사를 지냈다.

 

1907년 군대 해산 후 이명상 박여성과 더불어 금수산과 단양을 근거로 의병을 일으켜 중군장으로 활약하여 크게 전공을 올렸다. 그는 호와 같이 "날아다니는 장수(비장)"라는 칭호가 붙었다.

 

1908년 9월 죽령 지역에서 4백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왜군 2천명과 4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기어이 격파시켰고 이 지역에서 5차나 격전을 벌였으며 철원싸움에서도 대승하였다. 동년 10월 6번째의 단양전투에서 왜적에게 체포되었으나 대구감옥에서 탈옥, 그 후 청풍에서 다시 체포되어 호송도중 탈출하였다. 1908년 世凱에게 원병을 요구하는 고종의 친서를 가지고 가려다 인천에서 발각되어 체포당하여 6개월 간의 형을 받고 獄苦를 겪었다. 1922년 3월 군자금을 비밀리에 모금하여 상해 임시정부로 가던 중 인천항에서 다시 체포되어 2년간 구류되었다가 서울에서 재판을 받고 함흥형무소에서 5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오랜 형무소 생활에서 얻은 병으로 회복하지 못하고 비통한 일생을 마쳤다.

 

1968년 3월 1일 대한민국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다.

 

11.김상태(1864 ~ 1911)

 

- 호 : 백우(白愚)

- 본 명 : 상호(尙鎬)

- 별 칭 : 자 경륙(景六)

- 활동분야 : 독립운동

- 출 생 지 : 충북 단양(丹陽)

- 본 관 : 삼척(三陟)

- 주요수상 : 건국훈장 독립장(1963)


의병장으로 자는 경륙, 호는 백우로 충북 단양 출신이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이강년이 문경에서 일으키자 그와 형제의 의를 맺고 중장군이 되어 여러번 전공을 세웠다.

 

1907년 이강년 등과 함께 다시 제천 · 단양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순흥 · 봉화 · 풍기 · 영춘 · 영월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이강년이 체포됨으로써 군사지휘권을 인계받아 소백산맥을 근거로 하여 일본군경과 교전한 것이 무려 50여 회에 달하였고, 1909년 3월 단양의 경찰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경찰 2명을 사살하였다. 경찰이 그의 체포에 현상금을 걸자, 1911년 5월 우중수의 밀고로 순흥에서 잡혀, 대구경찰서로 압송되어 신문 끝에 3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의분을 참지 못하고 단식 13일 만에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1963년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 유해는 유언에 의하여 제천 두학리에 안장하였다.

 

12.서상렬(? ~ 1896) : 조선 후기의 의병장

 

- 호 : 경암(敬庵)

- 별 칭 : 자 경은(敬殷)

- 활동분야 : 독립운동

- 출 생 지 : 충북 단양(丹陽)

- 본 관 : 달성(達城)

- 주요수상 : 건국훈장 독립장(1963), 을미의병

 

본관 달성. 자 경은. 호 경암. 충북 단양 출생.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지냈다.

 

조정에서 외국인 묄렌도르프를 기용하자 이를 개탄하고 낙향, 조선 후기의 거유 유중교에게서 학문을 닦았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때 의병장 이춘영의 휘하에 들어가 단양 등지에서 활약했다. 1896년 예천에서 회맹소를 조직, 유인석 부대가 서진할 때 낭천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011.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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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충청북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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