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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실종>의 판곤(문성근)과 유사한 실제 살인범으로는 누가 있을까요?
kin_**** 조회수 130,818 작성일2009.03.05

지식iN과 함께하는 영화 <실종> 이벤트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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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종>의 판곤(문성근)과 유사한 실제 살인범으로는 누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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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질문에 좋은 답변을 해 주신 분들 중에서 추첨을 통해 감사의 선물을 드립니다.

지식iN 여러분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1. 이벤트 기간: 03월05일(목) ~ 03월 18일(수)

2. 당첨자 발표: 03월20일(금)

3. 경품: 영화<실종>전용 예매권150명 (1인 2매_총 300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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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s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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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동 이형호 유괴살해사건)

 

이형호 유괴살해사건은 1991년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에 살던 이형호(당시 9세) 군이 30대로 추정되는 남성에게 유괴되어 살해당한 사건이다.
1991년 1월 29일 오후 5시 20분경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놀이터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이형호 군은 사건 발생 44일 후인 그해 3월 13일에 잠실대교 부근 한강 고수부지 배수로(일명 '토끼굴')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손이 스카프와 나일론 끈으로 묶여 있었고, 사인은 코와 입이 테이프로 막혀 질식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부검 결과 위에서 나온 음식물이 유괴 당일 친구집에서 먹은 점심으로 판명되어 유괴 직후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범인은 협박전화에서 나온 목소리를 분석한 결과 서울 경기 출신의 30대 전후의 남자로 추정된다. 44일동안 60여차례의 전화통화와 10차례의 메모지로 피해자의 부모를 협박했는데, 그 수법이 매우 치밀하고 지능적이었다. 범인은 피해자 부모에게 카폰을 사용하도록 하고, 지정장소에 메모지를 남기고, 은행에서 피해자의 몸값을 받을 때는 CCTV가 없고 혼잡한 지점을 사용하였으며, 메모지나 통장개설신청서에도 전혀 지문을 남기지 않았다. 수사중 전화상의 목소리와 목소리가 거의 일치하는 유력한 용의자를 체포하였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그 해 2월 20일에 은행직원에게 목격된 이후로 연락이 끊겼다. 2006년 1월 29일자로 공소 시효가 만료되어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살인의 추억))

 

1986년부터 1991년까지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일대에서 10명의 여성이 차례로 살해되었으나 범인이 잡히지 않은 미해결 살인사건.
1986년 9월 19일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安寧里, 현 안녕동)에서 71세 노인의 하의가 벗겨지고, 목이 졸려 살해된 채 발견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986년 2차례, 1987년 3차례, 1988년 2차례, 1990년과 1991년에 각각 1차례씩 총 10회에 걸쳐 불특정 다수의 여성 10명이 차례로 강간 살해되었는데, 사건 모두 태안읍 반경 2㎞ 이내에서 일어났다.
사건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피해자가 모두 여성이다. ② 피해자가 젊은 층에 한정되지 않고 52세(7차)·69세(10차)·71세(1차) 등 다양하다. ③ 피해자의 음부가 크게 훼손되었다(4·6·7·9차). ④ 사건현장이나 피해자의 음부 안에서 정액 또는 머리카락·담배꽁초 등이 발견되었다. ⑤ 피해자의 대부분이 목이 조여 살해되었다. ⑥ 피해자의 국부에서 9개의 복숭아 조각이 나오고, 가슴이 19차례나 칼로 도려질 정도로 범행 수법이 잔인하고 대범하다.
한국에서 발생한 최초의 연쇄살인사건으로, 처음에는 일반적인 개별 살인사건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고, 수사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잇따라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연쇄살인사건은 전 국민적인 관심사가 되었고, 경찰도 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 경찰력을 집중하였다.
그러나 총 180만 명의 경찰이 동원되고, 3,000여 명의 용의자가 조사를 받았음에도 8차 사건을 제외하고는 어떤 사건의 범인도 잡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단독범의 소행인지, 다수의 범인에 의한 개별사건인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또 7·9·10차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었던 3명의 용의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불상사가 거듭되면서 '화성괴담'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유일하게 해결된 8차 사건의 경우,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음모와 범인의 음모가 일치한다는 것이 증거로 채택되어 무기징역이 선고되었으나, 다른 사건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8차 사건을 제외한 모든 사건들은 여전히 미해결 사건으로 남은 채 2004년 모든 사건은 살인 공소시효 15년이 끝났다. 2003년에는 봉준호 감독이 《살인의 추억》이라는 타이틀로 영화화하여 흥행에 성공하였다.

 

(개구리소년사건)

 

성서 초등학생 실종 사건은 1991년 대구에 살던 다섯 명의 초등학생이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며 집을 나선 뒤 실종된 사건을 말한다.[1] 사건 발생일 1991년 3월 26일은 5·16 군사 정변 이후 중단된 지방자치제가 30년만에 부활하여 기초의회 의원을 뽑는 시·군·구의회 의원 선거일이었다.
이 사건은 1990년대에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으며 경찰과 군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아이들을 찾았으나 2002년 11년 6개월 만에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되기까지 전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어린이들이 개구리를 잡으러 갔다고 잘못 알려져 흔히 개구리 소년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구 성서초등학교(당시 대구 성서국민학교)에 다니던 동네 선후배 다섯 명은 1991년 3월 26일에 대구 달서구 와룡산에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며 집을 나갔다. 아이들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으며, 부모들은 경찰서에 실종 사건을 신고했다.
김영규 (당시 11세) 김종식 (당시 9세) 박찬인 (당시 10세) 우철원 (당시 13세) 조호연 (당시 12세)
2002년 9월 26일 와룡산에서 도토리를 줍던 시민이 유골을 발견[4]하였고, 유골을 감정한 결과 소년들은 타살당한 것으로 판정되었다.
하지만 범인은 끝끝내 찾지 못하고 2006년 3월 25일자로 공소 시효가 만료되어 수사가 종결되었다.
이 사건은 오랫동안 전국민의 관심을 끌었으나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성한 소문을 불러일으켰다. 1992년 11월에는 돌아오라 개구리 소년이라는 영화를 제작하기도 할 정도였다.
1992년 8월에는 한센병 환자들이 병을 고치기 위해 아이를 유괴해서 죽였다는 뜬소문을 믿고 한센병 환자 정착촌을 강압적으로 수사하여 항의를 받았으며[5], 1996년 1월에는 김종식 군의 아버지가 아이들을 죽여 집에 묻었다는 주장이 있다면서[6] 김종식 군 아버지의 집 마당과 화장실을 임의로 발굴하는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아이들의 유골을 발굴할 때도 법의학자의 도움 없이 성급하게 작업을 진행하여 현장을 훼손[7]하는 등 실종과 관련된 중요한 정보를 놓쳤다는 비난도 받았었다.
이 사건은 화성연쇄살인사건, 이형호군 유괴 살해사건과 함께 경찰의 미흡한 수사 때문에 영구 미제가 된 대표적인 사건중 하나이다.

 

(유영철연쇄살인사건)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유영철이 연쇄적으로 21명을 살해한 사건.
언제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어디서  주로 서울 지역에서
누가  살인범 유영철이
무엇을  21명의 부유층 노인과 여성들을
어떻게  망치나 칼 등 각종 잔혹한 방법을 이용해 연쇄적으로 살인
왜  부유층에 대한 불만과 이혼한 뒤에 느낀 여성에 대한 혐오증 때문에
고등학교 2학년 때 절도사건으로 소년원에 수감된 이래, 총 14차례의 특수절도 및 성폭력 등의 혐의로 11년을 교도소에서 생활한 30대 중반의 남성 유영철이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총 21명을 살해한 엽기적인 연쇄살인사건이다.
유영철은 1991년에 결혼하였으나, 2002년 5월 무렵 부인이 이혼소송을 제기해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한 뒤부터 여성 혐오증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3년부터 1995년까지는 간질 증세로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고, 2003년 11월에는 전과자·이혼남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교제 중이던 여성으로부터 절교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1990년대 중반부터 막연한 복수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연쇄살인의 계기가 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첫 살인은 2003년 9월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新沙洞)의 단독주택에서 행해진 대학교 명예교수 부부 살인사건이다. 이후 2004년 7월까지 총 21명을 잇달아 살해하였는데, 공식적으로 확인된 숫자만 21명이다. 유영철 자신은 5명의 여성을 더 살해했다고 주장하였는데, 확인은 되지 않았다.
살해 대상은 주로 부유층 노인과 여성으로, 범행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범행 수법이 과감하면서도 치밀해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도구는 자신이 직접 만든 망치나 칼 등을 이용하였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일부러 불을 지르거나 시체를 토막 내 야산에 묻기도 하였다. 또 피해자의 신원을 알지 못하도록 살해한 여성의 지문을 흉기로 도려 내기도 하는 등 갖가지 잔혹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정부 수립 이후 최대의 연쇄살인사건으로, 유영철은 2004년 7월 18일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어 같은해 8월 13일 구속 기소되었는데, 죄목은 21명 살해, 공무원 자격 사칭, 강도 등의 혐의이다. 이후 2005년 6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막가파)

 

1996년 10월 29일단란주점 여주인 김경숙(당시 43세)을 납치한 후 경기도 화성에 위치해있는 화염전 창고에 생매장한 혐의로 두목인 최정수(당시 21세)와 정진영, 박지원 등 막가파 일당 9명 전원이 검거되었다.
 
(지존파살인사건)

 

1993년 4월부터 1994년 9월까지 범죄집단인 지존파가 저지른 엽기적인 연쇄살인 사건.
현실사회에 대해 일찍부터 불만을 품어 온 김기환은 1993년 4월경 학교 후배 강동은, 교도소 동기 문상록 등과 함께 전라남도 함평군 대동면에서 대학입시 부정사건에 대해 의견을 나누다가 부유층에 대한 증오를 행동으로 나타내자는 데에 뜻을 같이하였다. 지존파라는 이름의 범죄집단을 조직하고 1,200여 명에 달하는 백화점 고객명단을 입수하여 범행대상으로 삼았다.
이해 7월 일당 6명은 충청남도 논산에서 최미자를 성폭행한 후 연습 삼아 살해 암매장하고, 8월 같은 조직원이던 송봉은을 역시 살해 암매장했다. 그들은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의 지하실 아지트에 창살감옥과 사체를 은닉하기 위한 사체 소각시설을 갖추었다.
이어서 1994년 9월 이종원-이모, 소윤오-박미자 부부를 납치 감금하였다가 가까스로 탈출한 이모 여인을 제외한 3명을 모두 살해하고 사체를 토막내어 소각하는 등 9월 15일까지 4차례에 걸쳐 엽기적인 연쇄 살인행각을 벌였다.
이 사건은 납치되었다가 탈출한 이모 여인의 제보로 9월 19일 범인들이 모두 체포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재판 결과 검거되기 이틀 전에 조직에 가담한 이경숙을 제외한 두목 김기환을 비롯하여 강동은, 김현양, 문상록, 강문섭, 백병옥 등 지존파 전원이 강도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항소심과 대법원의 최종판결에서도 1심의 형량이 확정되어 11월 2일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강호순살인사건)

 

강호순(1970년 ~ )은 대한민국 충청남도 서천군 출신으로 2009년 1월 24일 경기도 서남부에서 연쇄적으로 여성을 납치하여 살해한 것으로 지목된 용의자이다.
2009년 1월 27일에 2008년 12월 경기도 군포시에서 실종된 여자 대학생을 살해한 혐의로 검거되었다. 이후 추가 수사를 통해 2006년 12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경기도 서남부 일대에서 여성 7명이 연쇄적으로 실종된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처음에는 연쇄 살인을 부인하다 경찰이 증거를 제시하자, 범죄 사실을 자백하였다,
강호순이 살해했다고 밝힌 부녀자들은 노래방 도우미 3명, 회사원 1명, 주부 1명, 여대생 2명이었다. 추가로 2월 17일에는, 2006년 9월 강원도 정선군에서 정선군청에서 근무하던 공무원 윤 모(여성, 당시 23세)를 살해했다고 자백하였다.
강호순은 1970년 3월 충청남도 서천에서 태어났다.[1] 5남매 중 셋째다. 서천에서 초·중등학교를 다닌 뒤 1989년 충청남도 부여군 소재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사관으로 군에 입대했던 강호순은 군복무시 절도죄로 불명예 제대하기도 했다. [1]
강호순은 1992년부터 2005년 사이 네 번 결혼을 해서 아들 셋이 있다. 22살 때 결혼한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 16살과 14살 난 두 아들을 얻었고, 두 번째 부인이 낳은 막내(8살)가 있다. [1]
1998년 경 첫째 부인과 헤어진 강호순은 두 아들을 데리고 화성시 비봉면 양노2리로 이사왔다. 1년 뒤에는 둘째 부인과 재혼하였으며, 2년여를 더 살다가 둘째 부인이 임신할 무렵 다른 곳으로 이사를 떠났다. 그가 살던 곳은 첫 번째 살해 피해자가 암매장된 곳에서 2km가량 떨어진 곳이다.[2]
2005년에는 자신의 집에 화재가 나 네 번째 부인과 장모가 숨졌다. 당시 경찰은 3일간의 수사 끝에 단순화재로 결론냈다. 그러나 유가족의 재수사 의뢰로 6개월간 재수사를 하였지만, 특별히 새로운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수사를 종결하였다. 2009년의 수사본부는 이 사건 역시 강호순의 방화사건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원점에서 재수사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일부 언론들도 사건 당시 강호순의 행동에 의심점이 많음을 지적하고 있다.[3]
강호순 본인은 이 사건이 자신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한편, 네 번째 부인과 장모의 사망으로 연쇄 살인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밝혔으나[1] 2009년 2월 22일 검찰은 강호순이 보험금을 노리고 장모 집에 불을 질러 장모와 부인을 살해한 혐의를 추가로 확인했다고 밝혔으나 본인은 계속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사이코패스(Psychopathy))

 

사이코패스(Psychopathy)는 정신병의 일종으로 반사회적 인격장애중의 하나이다. 원인은 뇌의 전두엽의 이상이 오는것 때문으로 알려져있으며 이 증상을 앓고있는 사람들을 사이코패스(Psychopath)라 부른다.
19세기 프랑스 정신과 의사 필리프 피넬이 사이코패스 증상에 대해 최초로 저술하였고, 1920년대 독일의 심리학자 슈나이더가 사이코패스의 개념을 설명했다. 캐나다의 심리학자 로버트 헤어는 사이코패스 판정도구(PCL-R)를 개발하고 '진단명 사이코패스'라는 책을 저술했다.
사이코 패스들은 일반적인 감정을 느끼는데 미숙하며 얼굴도 보통 사람과 같다.사이코패스들은 죄의식을 느끼는데에 익숙치 못하며 주로 거짓말에 능하고 충동적이며 책임감이 결여되어 있으며 폭력적인 성향이 강하며 뇌의 이상으로 약간의 언어장애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보통 사이코 패스를 '반사회적 인격장애' 라 부르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대표적으로 살인범 유영철과 정남규, 강호순, 보성 연쇄살인 어부 오종근 등이 있다. 그들은 PCL-R 검사에서 40점 만점에 28점 이상의 점수를 받았다.

 

출처:네이버 사전

2009.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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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연쇄살인범 강호순이죠.

2009.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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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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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코패스인 녀석들 모두...

 

최근에 대표자!! 강호순!!

 

끝없이 밝혀지는 진실...

 

죄책감도 없는 그들...

2009.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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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순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강호순(1970년 ~ )은 대한민국 충청남도 서천군 출신으로 2009년 1월 24일 경기도 서남부에서 연쇄적으로 여성을 납치하여 살해한 것으로 지목된 용의자이다.

2009년 1월 27일2008년 12월 경기도 군포시에서 실종된 여자 대학생을 살해한 혐의로 검거되었다. 이후 추가 수사를 통해 2006년 12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경기도 서남부 일대에서 여성 7명이 연쇄적으로 실종된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처음에는 연쇄 살인을 부인하다 경찰이 증거를 제시하자, 범죄 사실을 자백하였다,

강호순이 살해했다고 밝힌 부녀자들은 노래방 도우미 3명, 회사원 1명, 주부 1명, 여대생 2명이었다. 추가로 2월 17일에는, 2006년 9월 강원도 정선군에서 정선군청에서 근무하던 공무원 윤 모(여성, 당시 23세)를 살해했다고 자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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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강호순은 1970년 3월 충청남도 서천에서 태어났다.[1] 5남매 중 셋째다. 서천에서 초·중등학교를 다닌 뒤 1989년 충청남도 부여군 소재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사관으로 군에 입대했던 강호순은 군복무시 절도죄로 불명예 제대하기도 했다. [1]

강호순은 1992년부터 2005년 사이 네 번 결혼을 해서 아들 셋이 있다. 22살 때 결혼한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 16살과 14살 난 두 아들을 얻었고, 두 번째 부인이 낳은 막내(8살)가 있다. [1]

1998년 경 첫째 부인과 헤어진 강호순은 두 아들을 데리고 화성시 비봉면 양노2리로 이사왔다. 1년 뒤에는 둘째 부인과 재혼하였으며, 2년여를 더 살다가 둘째 부인이 임신할 무렵 다른 곳으로 이사를 떠났다. 그가 살던 곳은 첫 번째 살해 피해자가 암매장된 곳에서 2km가량 떨어진 곳이다.[2]

2005년에는 자신의 집에 화재가 나 네 번째 부인과 장모가 숨졌다. 당시 경찰은 3일간의 수사 끝에 단순화재로 결론냈다. 그러나 유가족의 재수사 의뢰로 6개월간 재수사를 하였지만, 특별히 새로운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수사를 종결하였다. 2009년의 수사본부는 이 사건 역시 강호순의 방화사건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원점에서 재수사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일부 언론들도 사건 당시 강호순의 행동에 의심점이 많음을 지적하고 있다.[3]

강호순 본인은 이 사건이 자신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한편, 네 번째 부인과 장모의 사망으로 연쇄 살인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밝혔으나[1] 2009년 2월 22일 검찰은 강호순이 보험금을 노리고 장모 집에 불을 질러 장모와 부인을 살해한 혐의를 추가로 확인했다고 밝혔으나 본인은 계속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4]

 

유영철

유영철(柳永哲, 1970년 4월 18일 ~)은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20명을 연쇄 살인한 범죄자이다.

서울에서 노동일을 하는 부모 사이에 3남1녀 중 삼남으로 태어난 유영철은 중학교 1학년인 14살때 아버지가 지병인 정신분열성 간질환으로 사망하자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서울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공업고등학교 2학년을 다니던 중 절도사건으로 소년원에 수감되어 학업을 중단하고 떠돌이 생활을 했다. 유씨는 21살 때인 1991년 마사지 안마사인 황모씨와 결혼, 11살된 아들까지 두었으나 이후 14차례 특수절도 및 성폭력 등으로 형사입건 되는 등 11년을 교도소에서 보내 사회와 철저히 격리되었다. 2000년 3월 특수절도 등으로 전주교도소에 수감 중 2002년 5월께 부인이 이혼소송을 제기하여 일방적으로 이혼당했으며 이후 말을 하지 않고 대인기피 현상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2003년 9월 11일 전주교도소를 출소한 유영철은 13일 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명예교수 이은옥(72세)과 부인 이덕(67세)을 살해했으며, 그해 10월에는 9일에 종로구 구기동에서 강은순(82세) 등 일가족 3명을, 16일에 강남구 삼성동에서 유준희(60세)를 살해했다. 2003년 11월 18일 화요일에는 종로구 혜화동에서 김종석(87세) 등 2명을 살해했고, 2004년 4월에 노점상 안재선(44세)을 살해하고 시신을 월미도에 버렸다. 이에 앞서 2004년 3월부터 그해 7월까지는 마포구 노고산동의 한 오피스텔에서 한숙자, 고선희, 우주연, 김미영, 임미연(27세) 등 2004년 한 해 동안 여성 11명을 살해하여 서울 각지에서 주로 부유층 노인 또는 출장마사지사 여성 등 총 21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았다.

한편 유영철은 2004년 7월 18일 체포되었는데 현장검증에서 26명을 살해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8월 13일 구속 기소 되어 이문동 살인사건을 제외한 20명 살인범죄의 유죄가 인정되어 12월 13일 사형 선고를 받고, 2005년 6월 9일 대법원은 유영철에 대한 사형을 확정하였다. 이후에 이문동 살인 사건의 진범이 다른 연쇄살인범인 정남규라는 사실이 밝혀 졌다. 유영철에 대한 사형은 아직까지도 집행되지 않고 있으며, 현재 대한민국은 가장 최근인 1997년 12월 30일김영삼 전 대통령의 임기 중 23명의 사형을 집행한 이후로도 10년간 사형이 집행되지 않아 2007년 12월 30일 실질적 사형 폐지 국가로 간주되고 있다.[1]

2009.03.05.

  •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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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kqp****
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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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철, 강호순.......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돋는다는..... ㅠㅠ

2009.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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