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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변신'의 작가인 프란츠 카프카에 대해서 알려 주세요.
buzd**** 조회수 6,963 작성일2010.09.26

작가프란츠 카프카에 대해서 알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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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 1883. 7. 3 ~ 1924. 6. 3. 독일의 작가. 환상적인 작품세계를 보이며, 사후 출판된 소설 가운데 특히 〈심판 Der Prozess〉(1925)·〈성 Das Schloss〉(1926) 등은 20세기 인간의 불안과 소외를 그린 작품이다.

  중산층 유대인 가정에서 상인이었던 헤르만 카프카와 율리에 뢰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두 형이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맏아들이 된 카프카는 죽을 때까지 맏이로서의 역할을 의식하며 살았다. 가족 가운데 그와 제일 가까웠던 사람은 세 여동생 중 막내인 오틀라였다. 카프카는 영적이고 이지적이며 경건하고 유대의 율법을 열심히 배우고, 기벽(奇癖)이 있는 괴짜들이며, 감성적인 기질에다 육체적·정신적으로 섬세함을 지닌 어머니쪽 혈통과 강한 일체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특별히 어머니와 가까웠던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헌신하는 단순한 여인으로, 위압적이고 화를 잘 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고된 사업을 거들면서, 또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들이 아무 이익도 없고 건강을 해칠지도 모르는 글쓰기에 몰두하는 것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카프카는 부모의 몰이해 속에 '몽상적인 내면 생활'을 기록해갔다.

  아버지의 형상은 카프카의 존재뿐만 아니라 작품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던졌으며, 사실 그의 작품세계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 유형으로 등장하고 있다. 물질적인 성공과 사회적인 출세 외에는 숭배할 것이 없는, 이 거칠고 실질적이며 오만한 상점주인이자 가부장인 아버지는 카프카의 상상 속에서 거인족의 일원으로, 무시무시하고 감탄스럽기는 하지만 혐오스러운 폭군으로 등장한다. 1919년에 쓴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Brief an den Vater〉는 자서전에 대한 매우 중요한 시도였는데, 실제 주소로 부친 편지는 결코 아니었다. 여기서 카프카는 그의 내면에 자신이 무능하다는 생각을 주입시켜준 위압적인 아버지 덕분에, 아버지에게 묶인 끈을 잘라버리고 스스로 결혼하여 자신 또한 한 아버지가 되는 평범한 삶에 실패하여 문학으로 도피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아버지가 자신의 삶의 의지를 꺾어버렸다고 느꼈으며, 이런 아버지와의 갈등을 직접 반영한 작품이 〈판결 Das Urteil〉(1916)이다. 사람을 현혹할 정도로 맑고 간결한 산문으로 씌어진 카프카의 소설들은 압도적인 힘과의 절망적인 투쟁을 그리고 있는데, 미지의 힘은 〈심판〉에서처럼 희생자를 짓궂게 괴롭히며 심문하기도 하고 〈성〉에서처럼 그것을 인정받기 위해 추구하고 갈망하지만 허사로 만든다. 그렇지만 카프카의 불안과 절망의 뿌리는 그가 성인이 되어 더욱 가까이 지내고자 했던 아버지와 가족과의 관계에 있지 않았다. 그의 절망의 원천은 그가 아끼던 친구들, 사랑한 여인들, 싫어한 직업, 살아간 사회 등이 모든 인간존재와 그가 진정한 불멸의 존재라고 생각한 신과 진정한 친교를 맺지 못한 채 궁극적으로 고립되어 있다는 의식에 있었다.

  아버지는 자칭 동화된 유대인이었지만 유대인 공동체의 예배와 의례를 마지못해 지킬 뿐이었으므로 카프카는 언어면에서나 문화면에서나 독일인이었다. 소심하고 죄의식을 지닌 온순한 소년이었던 그는 초등학교에서도 학구적인 엘리트를 양성하는 규율이 엄격한 고등학교인 알트슈테터 슈타츠 김나지움에서도 모범생이었다. 교사들은 그를 높이 평가하고 좋아했다. 그렇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이 권위주의적인 제도와 기계적인 암기식 학습, 고전어들을 강조하면서 인문과학을 비인간화시키는 교과과정에 대한 반란이 일고 있었다. 카프카가 기성사회에 대해 명백한 적대감을 표명한 것은 청년이 되어 자신을 사회주의자·무신론자라고 선언했을 때였다. 성인이 되자 줄곧 한정적이긴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공감을 표시했고, 제1차 세계대전 전에는 체크 무정부주의자 회합에 참석했으며 말년에는 사회주의화된 시오니즘에 뚜렷한 관심과 공감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본질적으로는 수동적이었고 정치적으로는 방관적인 자세를 고수했다. 유대인이기에 프라하의 독일인 사회에서 고립되어 있었고, 현대 지식인이기에 유대의 유산으로부터도 소외되어 있었다. 체크의 정치적·문화적 열망에 공감했지만 독일 문화에 동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공감은 억눌린 채 드러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사회적 고립과 근거 상실로 카프카는 일생 동안 개인적으로 불행하게 지냈다. 그렇지만 그는 프라하에 있는 일부 독일계 유대 지식인·문학자 들과 친해지게 되었다. 1902년 막스 브로트를 만나게 되었다. 바로 이 이류 문학예술가가 카프카의 친구들 중 가장 가깝고 그를 염려해주는 친구가 되었다. 결국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의 글을 장려하고 구제하고 해석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영향력 있는 전기작가로 부상했다.

  이 두 사람이 알게 된 것은 카프카가 프라하대학교에서 별 관심 없이 법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1906년 박사학위를 받고 1907년 한 보험회사에 상근하기 시작했는데, 이 일반보험회사의 긴 근무시간과 엄격한 요구사항들 때문에 카프카는 글쓰기에 몰두할 수 없었다. 1908년 프라하의 보헤미아 왕국 노동자 상해보험회사라는 준(準)국가기관에서 일자리를 찾았고, 폐병으로 중간에 병가를 얻어야 했던 1917년까지 그곳에 머물다가 마침내 죽기 2년 전인 1922년 연금을 받으며 은퇴했다. 이 직장에서 그는 일에 열성적으로 매달렸으며 사장도 그의 능력을 인정해주었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그를 좋아했다. 사실 카프카는 간명하고 지적이며 유머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낮에는 일상적인 회사 일을 해야 했고 그때문에 주로 밤에만 글을 쓸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는 고된 이중생활을 극도로 괴로운 고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에게는 보다 내밀한 내면의 사적 관계들이 노이로제를 일으킬 만큼 혼란스러웠다. 그의 열등감과 모순된 성격에서 비롯된 갈등의 성향은 성적 관계에서도 표출되었다. 그의 금욕적 태도는 펠리체 바우어와의 관계를 고통스럽게 방해했는데 그녀와 2번이나 약혼했다가 결국 1917년 헤어지게 되었다. 나중의 밀레나 예젠스카 폴라크에 대한 사랑도 역시 장애에 부딪혔다. 건강이 나빠진데다 회사 일이 그를 기진맥진하게 했다. 1917년 폐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그때부터 자주 요양원 신세를 져야 했다.

  1923년 카프카는 아버지의 가부장적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글쓰기에 전념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갔다. 여기서 사회주의자인 젊은 유대 여성 도라 디만트와의 우정으로 삶의 용기를 얻었지만 1924년 겨울에 결정적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베를린 체류는 짧은 기간으로 끝났다. 도라 디만트와 함께 프라하에 잠시 머물렀다가 빈 근처의 한 요양원에서 죽었다.

2010.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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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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