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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인촌 김성수
비공개 조회수 17,584 작성일2010.09.19

친일파로만 알고있었던 인촌 김성수가 민족자본가였다는 말이 있던데

 

그 이유는 무엇이고 구체적인 행적을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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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머프할배학당
태양신
한국사 17위, 흉부외과 12위, 정부기관 8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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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 김성수(金性洙)는 1891년(고종 28) 10월 11일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났습니다. 청년시절에 송진우()와 백관수() 등과 교유하였으며 1914년 일본의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였습니다.

귀국 뒤에는 운영난에 빠진 중앙학교(현재 중앙고등학교)를 인수하여 1917년 교장에 취임하였습니다.

1919년 경성방직회사를 창설하여 경제자립과 민족자본 육성에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1920년에는 동아일보를 창간했습니다.

그리고 1932년 보성전문(지금의 고려대학교)을 인수하고 교장에 취임하였습니다.

그런데 1936년 8월 1일 독일의 베를린올림픽대회(제11회올림픽경기대회)에 일본팀의 일원으로 참가한 손기정이 마라톤에서 우승하자, 8월 9일자 동아일보는 이 장거()를 알려 한국 민족의 기개를 높이고자 그 기록영화를 소개하는 기사에서 손기정의 유니폼 앞가슴의 일장기 표지를 지워버려, 이 사진이 조선총독부에 적발됨으로써 엄청난 사건으로 발단되었습니다.

일제는 동아일보 사회부 현진건(운수 좋은 날 작가) 부장과 이길용, 장용서 기자, 사진부 신낙균 부장과 백운선, 서영호, 사진을 수정한 화가 이상범 등을 체포하여 40일간의 구류처분을 내리고, 사장 송진우, 편집부장 설의식, 체육기자 이길용 등에 대해서는 영원히 언론계에서의 활동을 금지하는 처분을 내렸습니다. 또한 동아일보에는 같은 해 8월 27일자로 창간 이래 4번째의 무기정간 처분을 하였다가 9개월 후에 복간()조치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니 김성수는 1938년에는 친일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과  이사 및 동() 연맹 산하 비상시생활개선위원회 위원을 지냈습니다. 이후에도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1940)와 총무위원(1943), 흥아보국단 결성 준비위원(1941) 등으로 활동하면서 학병제와 징병제를 찬양하는 글을 쓰거나 강연했습니다.

1945년 8.15광복 뒤에는 미군정청 수석고문관을 거쳐, 1946년에만 한국민주당 수석총무와 총재, 동아일보사 9대 사장,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 등을 지냈습니다. 1947년 신탁통치반대투쟁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고, 1949년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이 되어 1951년 2대 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이승만 독재에 반대하여 이듬해 5월 사임하였습니다. 같은 해 12월 민주국민당 고문이 되었으며 그 후 야당에서 활약하였습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습니다.

2010.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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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네이버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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