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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백범일지 중심인물&사건 잘 아시는분.. (내공 많이 드림)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8,938 작성일2003.07.07
돌베개출판사에서 나온 백범일지에서

133p 방랑과 모색부터 291p 망명의 길 사이에

중심인물과 사건 좀 요약 해주세요

중심인물은 이름과 함께 설명을 꼭 해주세요.

그리고 중심사건은 그냥 순서대로 에피소드 이름을 써주시면 참 감사하겠습니다.

에피소드는 그냥 누가 들어도 그책을 본사람이라면 연상되는 명칭을 붙여주세요 ^^

너무 어렵죠;;; 그래도 제발 부탁드려요 ㅠ.ㅠ 제발...

뭐 사건보다 인물이 중요하니까 인물만이라도 해주신다면 계속 감사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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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kd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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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감의 원칙

1. 현대성: 원본이 영인되어 있고 직해본도 나와 있는 사정을 고려하여, 또 청년들이 많이 읽어 주길 원했던 백범의 뜻을 존중하여 현대성의 원칙을 견지하였다. 즉 본 책에서는 일반 독자들이 손쉽게 {백범일지}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국한문 혼용의 어렵고 난삽한 고문을 쉬운 현대문으로 교열하였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잘못된 교열을 수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물쩍 넘긴 용어 . 개념 . 경구 . 문장들을 일일이 적확한 뜻을 찾아 번역하였다.


2. 순수성: 그간 현대문으로 교열하는 과정에서 원문의 순수성이 많이 훼손된 경우가 허다하였다. 본 책에서는 원본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것, 즉 원문의 감동과 내용을 털끝만큼이라도 손상시켜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현대성의 원칙 이상으로 중요하게 고려하였다. 백범의 호흡이 긴 문체는 살리고, 글자 한자 한자를 원본과 철저하게 대조하였으며, 의역과 수정이 불가피한 경우 본문의 ( )나 각주의 "원문: " 형식으로 표기하였다. 또한 해방후 백범이 구술한 필사본을 최초로 발굴하여 이에 의거하였다.


3. 비평성: {백범일지}는 만리타국에서 백범이 독립운동의 와중에서 별다른 자료없이 기록한 수고(手稿)이다. 때문에 백범 특유의 훈훈한 감동에도 불구하고 날짜와 인명의 혼란, 문장의 중복과 선후가 뒤바뀐 것 등 사실관계의 착오가 없을 수 없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원본의 한계를 수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부 문서 . 회고록 등 여러 자료들을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내용을 보완하였다.


4. 현장성: {백범일지}의 기록 자체도 매우 생생하지만, 여러가지 시각 매체를 활용하면 {백범일지}의 현장성을 더욱 높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본문의 흐름과 밀접한 관련하에서 사진 . 문서 . 지도 등의 자료를 광범위하게 활용하였다.


5. 보완성: 이 책에서는 {백범일지}의 효용가치를 높이고 편리하게 사용하기 위해 몇가지를 추가하였다. 원자료의 추적을 통해 정리된 새로운 내용으로 [백범 년보]를 전면적으로 교정하였고, 원본에 누락되어 있는 [대가족명부]를 가능한 수준에서 복원하였으며, [인물색인]을 또한 전면적으로 정비하였다. 마지막으로 [백범일지의 판본에 대한 해제]와 교열하는 데 사용된 [참고문헌]을 첨부하였다.


■범 례

1. 이 책은 {백범일지} 원본은 물론, 2종류의 필사본, 여러가지 출간본 등 여러 저본을 일일이 검토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원자료와 회고록 등을 참고하였다.
2. 본문은 한글 전용으로 하고, 필요한 경우 한문은 ( )안에 병기하였다. 예) 백범(白凡)
3. 병기된 한문이 한글과 다른 경우 [ ]본문로 표기하였다. 예) 백범[金九]
4. 고사성어 등 간단한 원문이나 년대 표기도 본문 속에 ( )로 처리하였다.
5. 각주의 "원본:"은 원본의 구절이나 문장을 원문 그대로 밝힌 것이다.
6. 각주의 "원주:"는 원본에 백범이 ( ) 등로 주석한 것을 원문 그대로 밝힌 것이다.
7. 용어와 개념 해설, 상황 . 보충 설명, 특징적인 기술과 원문의 오류 등도 각주에서 설명하였다.


■ 차 례

. 사진 자료
. 교열의 원칙
. 범례
. 백범의 출간사


<< 상 권 >>

인(仁) . 신(信) 두 아들에게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1) 판박힌 상놈의 내력
2) 난산의 개구장이
3) 울분과 가난의 배움길

2. 사회로의 첫 진출과 시련
1) 과거 낙방과 비관
2) 동학의 세계로
3) 패장의 길
4) 적장과의 동거
5) 스승 고능선

3. 질풍 노도의 청년기
1) 북행 견문과 청국 시찰
2) 김이언 의병에 참여
3) 인연없는 스승의 사위
4) 복수 의거, 치하포 사건
5) 첫번째 투옥
6) 역사적인 심문
7) 사형수의 옥중 생활
8) 탈옥: 조롱과 그물을 떨치고

4. 방랑과 모색
1) 서울로 도피
2) 삼남견문록
3) 출세간의 길
4) 장발의 걸시승
5) 동지를 찾아서
6) 부친상, 인연없는 약혼
7) 교육자의 길, 그리고 결혼
5. 식민의 시련
1) 을사늑약과 구국운동
2) 안악 양산학교와 하기 사범강습
3) 각군 순회 교육운동
4) 재령 지역 교육운동과 추억
5) 신민회와 안악사건
6) 세번째 투옥과 고문
7) 기약없는 15년형
8) 감옥안의 의병과 의사
9) 옥중 생활
10) 감옥에서 만난 기인
11) 다시 인천감옥으로

6. 망명의 길
1) 출옥, 고향으로
2) 동삼평 농감 생활
3) 상해 망명
4) 경무국장에서 국무령까지
5) 내 인생을 돌아 보며


<< 하 권 >>

하권을 쓰고나서

제1장. 상해 임시정부 시절
1) 상해에서 첫출발
2) 경무국장 시절의 추억
3) 사상갈등과 국민대표대회
4) 무정부상태의 국무령

제2장.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1) '일본영감'과의 만남
2) 일본천황 불행부중
3) 윤봉길과의 짧은 만남
4) 홍구공원의 쾌거

제3장. 피신과 유랑의 나날
1) 위기 일발의 상해 탈출
2) 광동인 장진구
3) 시골농부의 민족주의
4) 여사공과의 선상생활

제4장.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1) 장개석 면담과 낙양군관학교
2) 5당통일운동의 실패
3) 폭격 속의 남경 생활
4) 어머님에 대한 추억
5) 가슴에 밖힌 총탄

제5장.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1) 광동을 거쳐 중경으로
2) 7당통일회와 한국독립당
3) 광복군 창설
4) 대가족과 대륙에 묻힌 영혼

제6장. 해방 전후의 대륙
1) 중경에서 통일공작
2) 광복군 창설과정
3) OSS 국내침투훈련
4) 일본 조기항복
5) 중경생활의 회고
6) 해방 직후의 상해

제7장. 조국에 돌아와서
1) 감격의 귀환
2) 제1차 지방순회
3) 삼남지방 순회
4) 서부지방 순회


.<나의 소원>

. 해제: 백범일지의 판본과 특성
. 백범 년보
. 참고 문헌
. 인물 색인(찾아보기)
. 책을 펴내면서

■ 책을 펴내면서

내가 {백범일지}를 처음 읽었던 것은 대학교 1학년 때(1977년) 문학동우회의 토론회에서였다. 그 자리에는 {백범일지}의 진솔한 감동을 강조하는 이들도 있었고, 백범의 투박성에 대한 모종의 거리감 같은 것을 토로하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시골 출신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감동하는 쪽에 속했던 기억이 있다. {백범일지}에는 파란곡절의 인생 역정을 기술한 문학적 측면과, 한 지도자의 족적에 대한 사료적 요소가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당시 우리의 감동은 주로 문학적 측면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곧바로 {백범일지}를 잊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1992년 나는 사료적 기록으로서 다시 {백범일지}를 접하게 되었다. 이 때 처음으로 {백범일지} 출간본이 참으로 다양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지만 어느 것을 기준으로 해야할 지, 판본의 권위를 가늠할 수 없는, 일종의 수상함에 의아해 하였다. 그러나 당시 나는 논문 집필 중이었고 더욱이 백범의 초기보다 만년과 통일운동에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혐의를 덮어 둘 수 밖에 없었다.
1993년, 나는 학위논문 집필중 마음속 한 구석에 지울 수 없는 의문으로 남아 있었던 백범의 행적을 정리하기 위해, 그의 이러저러한 활동과 내면세계를 추적하고 있었다. 그러다 서울대 규장각에서 백범의 치하포의거와 관련되는 일련의 한말(韓末) 기록들을 수집하게 되었다. 치하포의거와 그로 인한 투옥, 사형 선고, 탈옥과 방황 등의 행적은 {백범일지}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한 부분이기 때문에, 나는 한손에 규장각 자료를 들고 {백범일지}와 또다시 대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서로 어긋나는 내용이 적지 않았다. 당연히 {백범일지}를 조직검사해 볼 필요가 있다는, 학문적 전의(戰意)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후 {백범일지}는 나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백범일지}에 대한 대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먼저 다양한 출간본을 비교하는 한편 저본을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백범기념회관의 홍소연 간사는 나의 이러한 취지에 전적으로 동감을 표시하면서 두 종류의 필사본을 복사해주었다. 이리하여 1993년 말 나는 출간본과 필사본의 내용을 비교하고, 치하포의거 부분에 대해서는 원자료와 대비 작업을 끝낼 수 있었다.
다음 순서는 원본과 비교하는 것이었다. 나도 직간접으로 백범의 영식(令息)이신 김신 장군께 원본 공개를 권유한 적 있지만, 원본 공개는 아마도 다른 차원에서 결정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1994년 2월, 영인본이 출간되기 4개월 전에 김신 장군은 원본의 복사본 한 부를 나에게 기증해 주셨다.
원본까지 입수하였기 때문에 나는 1994년부터 구체적인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원본은 갱지에 빽빽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끝까지 읽기 힘들 뿐만 아니라, 곳곳에 초서가 구사되어 해독 또한 만만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원본을 완전히 해독하고 이를 모두 컴퓨터에 입력하는 것이었다. 홍소연 간사는 상당한 시간과 수고를 요구하는 입력 작업을 끈기있게 주도하였다. 나는 이것을 가지고 필사본 . 출간본 . 자료 등과 대비하면서 각주로 정리해나갔다.
지난한 이 과정은 {백범일지}의 많은 부분을 다시 알고 느끼게 해주었다. 1996년 초 나는 원본 . 필사본 . 출간본에 대한 비교 작업을 마무리하여 논문으로 발표한 바 있지만, 원 자료를 찾아 일일이 대비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1996년 후반 본격적으로 이 작업에 착수하는 한편, 출판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였다.
나는 원래 원본을 그대로 입력하고, 각주로 내용을 보완하여 출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작업과정 중에 두가지 중요한 변수가 생겨 이러한 형식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의 하나는 그간 {백범일지} 출판 정세가 적지 않게 변화하였다는 사실이다. 1994년 원본이 영인되었고, 이듬해 원본을 약간 윤문한 직해본이 출간되었다. 따라서 이제 필요한 것은 '원본 자체' 보다는 '원본에 충실한 교열본'이 었던 것이다.
보다 중요한 변수는 읽으면 읽을 수록 확인되는, {백범일지} 원본 자체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백범일지}는 만리타국에서 변변한 자료나 보조원 하나 없이,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일정한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집필한 것이다. 따라서 원본에는 차례도 미쳐 완비되어 있지 않으며, 서술 내용에서 시기가 모순되는 경우도 있고, 인명 . 지명 등에도 착오가 적지 않다. 즉 {백범일지}는 정연한 체계를 갖추지 못한 일종의 수고(手稿, Manuscipt)인 것이다. 아마도 이 책을 읽은 사람은 이러한 지적에 동의할 것이다.
수고를 조직검사하면서 읽어내는 것이 논리적 책읽기에는 좋은 훈련이 되지만, 그 결과의 처리에 대해 처음에는 매우 곤혹스러웠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러한 미비점들은 {백범일지}의 열악한 집필 환경과, 잔 것에 대해 어두운 선 굵은 백범의 모습을 보여주는, 탓할 수 없는 현실의 반영이라 생각된다. 오히려 이러한 것을 일일이 보완하는 것이야말로, 비록 사후이지만 백범의 집필 보조원이 된 듯한 의무감마저 주었다.
이러한 고민의 결과 뒤에 소개하는 다섯 가지 교감 원칙을 마련하였다. 그것은 요컨대 현대성과 순수성, 대중성과 전문성을 배합하는 것이었다. 본문에는 현대문으로 대중성에 유의하였고, 각주에는 단순한 용어 해설이나 인물 소개를 넘어서 전문가에게도 손색없는 원본 비평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취지와 교감 원칙이 얼마나 합당한 것이며, 또 어느 정도 관철되었는 지는 독자 여러분들이 판단할 문제이다. 나로서는 꼼꼼히 한번 정독해볼 것을 권유할 따름이다.

교감 작업이 지니는 의의와, 그 번잡한 수고에 대해 여기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뜻을 같이 하는 여러분들의 헌신적인 도움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이 책은 제 모양대로 출간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해두고 싶다.
{백범일지}의 문학적 측면과 더불어 원문에 고문과 한자성어 등이 많이 구사되어 있어, 교감에는 국문학적 소양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창원대 국문학과의 김은영 . 강상순 선생은 본인들의 논문 작업을 일시 유보하면서 안목높은 도움을 주셨다. 교감작업에서 가장 기초적인 것은 역시 역사학적 지식이다. 성균관 대학 사학과 박사과정의 배경식 군은 임시정부 전공자답게 이 부분에 관한 폭넓은 지식으로, 내가 감당할 수 업는 부분을 적절하게 보완해 주었다. 백범기념회관의 홍소연 간사는 원본의 입력 작업 이외에도,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 수 많은 관련 자료를 우송해주었고, 특히 해방 이후 구술된 필사본도 구해주었다. 그외에도 그녀는 연보 정리, 사진 . 지도 . 그림 등의 자료 준비, 이 책의 교열 . 교정 등을 꼼꼼히 챙겨주었다. 이 분들의 도움은 의례적 인사로 간단히 가름할 수 없는, 뜻을 같이 나눈 동지적(同志的)인 것이었다.
{백범일지}가 포괄하는 다양한 내용 때문에 이 분들 이외에도 적지 않은 분들로부터 자문을 받았다.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원불교영산대학 사학과의 박맹수 교수님, 중국의 역사와 고전에 대해서는 창원대학 사학과의 전형권 교수님 . 정성일 박사님, 한말 정치사와 화폐에 대해서는 한국문화연구소의 이윤상 박사님 등이 아낌없이 자문에 응해주셨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자 한다.
돌베개 출판사의 한철희 사장은 1994년 초부터 높은 관심을 가지고 본인에게 새로운 {백범일지}의 출간을 적극 권유하였다. 또한 김혜영 선생 등 편집부 직원들은 이 책의 의의를 높이 평가하고, 마치 공동작업의 일원인 양 실무 이상의 열의를 보여주었다. 이 분들의 관심과 열의 또한 상업적인 이해관계로만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책에도 족보가 있다면, 이 책이 새로운 {백범일지} 가문 - 예컨대 새로운 축약본이나 청소년을 위한 {백범일지} 등-이 탄생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길 감히 기원해 본다. 교감 작업이 지니는 번잡과 수고로움에 비쳐 볼 때 물론 이 책에도 손이 미치지 못한 곳이나, 심지어 잘못된 것도 있을 수 있다. 다만 현재로서는 정성을 다했으며, 미흡한 점은 앞으로 보완하겠다는 것을 분명히 약속드린다.


1997년 봉림산 자락,
초여름의 신록 아래에서
도 진 순

2003.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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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백범일지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면 백범일지는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인 백범 김구가 직접 쓴 자서전으로 상·하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기의 상편은 1929년 김구가 53세 되던 해에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1년 정도 독립운동을 회고하며 김인, 김신 두 아들에게 쓴 편지형식으로, <우리집과 내 어릴 적>, <기구한 젊은 때>, <방랑의 길>, <민족에 내놓은 몸> 등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다. 하편은 김구가 주도한 1932년 한인애국단의 두 차례에 걸친 항일거사, 곧 이봉창의사의 1·8 천황저격의거와 윤봉길의사의 4·29 상해의거로 표류하다가 중경으로 옮겨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집필한 것으로서 칠순을 앞둔 망명가의 회고록이다. 이에는 <3·1운동의 상해>, <기적 장강 만리풍> 등의 제목 아래 민족해방을 맞게 되기까지 투쟁 을 기록하고 있다. 상·하편 뒤에 붙은 <나의 소원>은 <민족국가>, <정치이념>,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등 세 편의 글로 된 완전독립의 통일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김구의 민족이념과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은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인상깊게 남았던 부분을 위주로 설명하여 줄거리를 대신하고 그 부분에 대한 나의 느낌을 적으려고 한다. 먼저 백범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 뒤에는 항상 배움이 있었다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어렸을 때는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매관매직의 타락한 과거에 실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현실을 원망함을 떠나서 다시 배움의 길로 접어들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고능선 선생의 지도가 있기에 가능했다. 김구는 고선생을 처음 만나서 이런 말을 했다. 과거에 낙심하고 관상에 낙심하고 동학에 실패한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리를 가지게 되었었는데 나 같은 것도 고 선생과 같으신 큰 학자의 지도로 한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있을까 하는 의심의 말을 하였다. 그랬더니 고선생은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쉬운 일이 아닌데 하물며 남의 일을 어찌 알랴, 그러므로 내가 그대의 장래를 판단할 힘은 없으나 내가 한 가지 그대에게 확실히 말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성현을 목표로 하고 성현의 자취를 밟으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힘써 가노라면 성현의 지경에 달하는 자도 있고 못 미치는 자도 있거니와, 이왕 그대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될 뜻을 가졌으니 몇 번 길을 잘못 들더라도 본심만 변치 말고 고치고 또 고치고 나아가고 또 나아가면 목적지에 달할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괴로워하지 말고 행하기만 힘쓰라."고 말했다. 이렇게 하여 김구 선생은나중에 독립운동가로서 국가를 위해 일할 바탕을 마련할 배움의 기회를 갖는다. 또한 이렇듯 자신의 배움에도 힘썼지만, 후에 민중의 계몽을 위해 학교도 설립하고 교원을 양성했다. 이는 김구선생이 나라의 독립이 힘이나 무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고 무엇보다 교육을 중요시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안악으로 가던 중 국모의 원수를 갚겠다고 일본 군사 간첩인 토전양량을 칼로 죽여 버린 사건은 김구선생이 배움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의기를 보여 준 것이다. 이를 통해 김구선생이 배움으로나 행동으로나 독립운동가로서 자질을 갖추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다른 경우가 많다. 나도 그러한 경우가 많다. 머리 속으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용기가 부족하다거나 의지부족으로 실천하지 못한다. 용기있는 삶, 실천하는 삶을 살기는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생활 속의 작은 일부터 배움을 실천하고 그 실천을 위해 따르는 용기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어서 대한 독립권이 없어지고 일본의 속국이 된 시기에 다시 나라를 일으켜 세워보자고 안창호와 김구선생 등이 주축이 되어 신민회가 결성된다. 활동을 미처 시작하기도 전에 많은 지사들이 잡혀 들어가고 김구선생도 잡혀 들어간다. 감옥에서 김구선생은 이름을 김구(金龜)에서 김구(金九)로 고치고 당호 연하(蓮下)를 버리고 백범(白凡)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이름자를 고친 것은 왜놈의 국적에서 이탈하는 뜻이요, '백범'이라 함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내 원을 표하는 것이니 우리 동포의 애국심과 지식의 정도를 그만큼이라도 높이지 아니하고는 완전한 독립국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여기에서만 보더라도 김구선생의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과 애국심을 직접 느낄 수 있었다. 이름에서부터 자신의 뜻을 세우고 작은 일부터 큰 일에 이르기까지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일을 진척시켜나갔다. 나의 생각으로는 다른 사람보다 남다른 면이 있어서 김구 선생이 지금까지 훌륭한 분으로 기억되는 줄 알았다. 물론 표면적으로 보면 남달라 보일 수 있을 지 모르나, 내가 보기에는 자주독립이라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 잡혀 있고 그것을 실천해 나간 것이라고 본다. 나도 배움의 길에 있지만 아직까지 내가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 그리고 사회의 모습에 대한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배움을 통해서 잘못된 부분을 고쳐 나갈지라도 먼저 사회, 자신에 대한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실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본관 : 안동
호 : 백범(白凡)
본명 : 창수(昌洙)
별칭 : 아명 창암(昌岩). 법명 원종(圓宗). 초호 연하(蓮下)
활동분야 : 독립운동
출생지 : 황해도 해주
주요수상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주요저서 : 《백범일지(白凡逸志)》
본관 안동. 호 백범(白凡). 아명 창암(昌岩). 본명 창수(昌洙). 개명하여 구(龜,九). 법명 원종(圓宗). 초호 연하(蓮下). 황해도 해주 출생. 15세 때 한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893년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가 되고 이듬해 팔봉도소접주(八峯都所接主)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였다. 이듬해 귀국,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복역 중 18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승려가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還俗),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新民會)에 참가하고,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감형으로 1911년 출옥하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농촌을 계몽하였다. 3·1운동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警務局長)·내무총장·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면서, 1928년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이로부터 항일무력활동을 시작,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2년 일본왕 사쿠라다몬[櫻田門] 저격사건,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 일본왕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33년 난징[南京]에서 장제스[蔣介石]를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對)일본전투방책을 협의하고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였으며,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하였고,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 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을 임명하고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다.
1945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하는 한편, 광복군 낙하산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실시하다가 8·15광복으로 귀국하였는데, 임시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므로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모스크바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 부의장, 민주의원 부의장, 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李承晩)·김규식(金奎植)과 함께 이끌면서 극우파로 활약하였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였다. 그 후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정부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의 거두로 있다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범일지(白凡逸志)》가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정보 잘 활용하시길^^~

2008.01.11.

  • 출처

    흠냐~없어열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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