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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성균관대학교에 관하여
익명 조회수 17,402 작성일2018.02.11
저는 이제 고1이 되는 학생입니다 제가 성균관대가 있다는것을 알고 관심이 가서 여러가지것들을 알고싶습니다
꼭 알고싶은것은 문슨과가있다던지 무슨부가있다 라는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도 이해가안되는 문과와 이과의 다른점을 알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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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g3377
바람신
대학 입시, 진학, C, C++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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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는 문과 이과 모두 열 손가락 안에는 가뿐히 드는 대단히 좋은 학교입니다.

문과는 어학이나 경상 등 고등학교에서의 국어 영어 사회 등의 심화 과정을 배운다 보시면 됩니다.
반면 이과는 자연 학문이나 공업,의학 등의 고등학교에서의 수학,과학에 해당합니다.

현재 문과 졸업자의 수요는 적은 반면 공급은 많아 그닥 전망이 좋진 않습니다만 이과는 학업의 수준이 문과보단 확실히 높습니다. 문과에서 이과로 교차하면서 둘 모두 공부하면서 느꼈습니다.

해당 학교에 어떤 학과가 설치되어 있는지는 학교 입학처 홈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성균관대는 문과 글로벌이 붙은 학과가 강세입니다.

2018.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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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성균관대는 본교가 이원화되어 아래처럼 캠퍼스별로 학과가 나뉘어져 있는게 특징입니다.

* 인문사회과학캠퍼스(문과/서울): 유학대학, 문과대학, 사회과학대학, 경제대학, 경영대학, 사범대학, 예술대학

* 자연과학캠퍼스(이과/수원): 공과대학, 의과대학, 약학대학, 자연과학대학, 정보통신대학, 소프트웨어대학, 생명공학대학, 스포츠과학대학, 성균융합원

성균관대 인문계 자연계 모두 국내 최상위권, 그리고 세계대학순위로는 국내종합사립대에서 TOP 반열에 오른 명문대학교로 재단은 삼성입니다.

`서카포` 아성깬 성균관대 `국내 톱3 -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7&no=613716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인 삼성을 목표로 취업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는 삼성과 관련한 각종 생생한 정보들(엘씨선배들 혹은 학교에서 제공하는 유익한 정보)을 비교적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것도 큰 혜택이자 매력적인 장점이기도 합니다.


삼성관련 기업체 및 연구소: 세계적인 글로벌1위기업 삼성전자, 삼성반도체, 삼성종합기술원, 삼성디스플레이, 삼성SDI, 삼성SDS, 삼성바이오에피스, 삼성바이오로직스, 삼성메디슨, 삼성전기, 삼성엔지니어링, 삼성중공업, 삼성물산, 삼성건설, 삼성증권, 삼성자산운용, 삼성화재, 삼성생명, 삼성카드, 삼성경제연구소, 삼성융합의과학원, 삼성생명과학연구소, 삼성병원 등등




2018.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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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안녕하세요^^ 올해 성대 입학하게 된 학생입니다

일단 성균관대 홈페이지에 가시면 경영대 소속 경영학과, 글로벌 경영 등의 모든 과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래도, 정리해드리면


유학대학: 유학,동양학과

문과대학 : 국어국문학과, 영어영문학과, 프랑스어문학과, 중어중문학과, 독어독문학과, 러시아어문학과, 한문학과, 사학과, 철학과, 문헌정보학과

법과대학 : 법학과

사회과학대학 : 글로벌리더학부, 행정학과, 정치외교학과, 신문방송학과, 사회학과, 사회복지학과, 심리학과, 소비자가족학과, 아동청소년학과

경제대학 : 경제학과, 통계학과, 글로벌경제학과

경영대학 : 경영학과, 글로벌경영학과

사범대학 : 교육학과, 한문교육과, 수학교육과, 컴퓨터교육과

예술대학 : 미술학과, 디자인학과, 무용학과, 영상학과, 연기예술과,  의상학과

자연과학대학 : 생명과학과, 수학과, 물리학과, 화학과

정보통신대학 : 전자전기공학부, 반도체시스템공학과

소프트웨어대학 : 컴퓨터공학과, 소프트웨어학과

공과대학 : 화학공학/고분자공학부, 신소재공학부, 기계공학부, 건설환경공학부, 시스템경영공학과, 건축학과

약학대학 : 약학과

생명공학대학 : 식품생명공학과, 바이오메카트로닉스학과, 유전공학과

스포츠과학대학 : 스포츠과학과

의과대학 : 의예과

성균융합원 : 글로벌바이오메디컬엔지니어링학과


각 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홈페이지에 가시면 다 나와있습니다^^



문과와 이과의 차이점은.. 흔히 말하면, 보통 학생들은 수학을 좋아하냐/안 좋아하냐 혹은 잘하냐/잘 하지 못하냐, 자신이 없냐 등으로 판단을 하죠

문과의 경우 조금 더 인문학적인 부분에 치중이 되어 있는 거예요. 탐구 과목 자체도 보면 윤리, 사문 등이 있고, 이과의 경우는 조금 더 수리적인 부분에 맞춰져 있다고 해야 할까요..

문과보다는 확실히 이과가 수학, 과학 등을 더 많이 배우죠

2018.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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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m****
지존
대학 입시, 진학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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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나온 답변들 중 문과, 이과 정리된 자료가 있군요. 그 자료를 참조하시면 되겠습니다.


추가로 덧 붙이면 문과출신은 고시등을 통하여 학자.교육자, 문필가.사상가, 유학자.신학자, 국가공무원, 정치인, 대기업입사, 판사.검사.변호사, 회계사,공기업입사등으로 진출할 수 있고, 이과출신은 이과 관련 학자.교육자, 의사.약사.변리사 및 각 기업체나 공기업의 연구직.기술직 사원, 과학자가 되기 쉽습니다.



@ 문의하신 성대는 국사에 나오는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을 승계하여 6백년 역사에 빛나는 한국 최고대학입니다.    


대학은 국사에서 가르치는 조선.대한제국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을 승계한 성균관대같은 Royal대로 가는게 좋습니다. 서강대도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교황윤허 Royal대입니다. 


국사와 세계사, 국민윤리.한문의 유교교육, 국내법과 국제법의 조화에 대하여! 이는 한국 교육에서 행해지는 국사와 세계사는 대통령령에 의해 발행된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와 연계시켜야 적절합니다.    




[1]. 국사는 국가기관이며 국책연구기관인 국사편찬위 자료를 중심으로 정부주도하에 대학교수, 고교교사등이 함께 공동 집필하는 국가적 교과서 성격입니다. 1946년 미군정 때 국사관을 설립하여 1949년 국사편찬위원회로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사는 한국 정부차원에서 집필하는 교과서는 아니기 때문에,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와 연계시 강행법 성격의 국사 교육[최고 대학으로서의 고구려 태학, 통일신라국학, 고려 국자감, 조선.대한제국 성균관(해방후 성균관대로 정통 승계되어 오늘에 이름)]에 나오는 성균관의 정통승계대학 성균관대는 강행법성격의 국가적 자격을 가졌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교과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교과서 제도는 국정도서, 검정도서, 인정도서의 세 가지 유형으로 운영된다. 따라서 국가에서 정한 법규 및 국가 교육과정 체제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정부 주도형이다.

교과서 제도는 2009년 1월에 ‘2009 개정 교육과정’이 고시되면서 인정도서 주류 정책으로 전환되었다.


교과서의 위와 같은 특징으로 본다면, 국사 교과서의 대학(성균관등) 및.향교.서원등에 대한 서술이 한국에서는 가장 권위있는 자격을 가졌다고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교육으로 본다면 한문이나 윤리의 삼강오륜.인의예지신, 충효교육을 가르치는 유교교육이 주류입니다. 


세계사는 출판사의 내용을 인정하는 방법에 해당된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국사처럼 정부 주도하에 대학교수.고등학교 교사들이 함께 집필하는 형식이 없어서 세계사의 법적 자격은 국사에 비해 모자란것도 사실입니다.   


따라서 필자는 국사교육의 성균관(대통령령에 의해 발행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해방후의 성균관대가 성균관의 정통 승계로 서술. 6백년 역사를 국내.외에서 인정받고 있음)의 정통을 승계한 성균관대가 조선.대한제국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정통을 승계하였다고 인정하여 성균관대를 한국 최고(最古, 最高)대학으로 규정하는 문필가.사상가입니다. 


그러면 교황윤허의 서강대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서강대가 교황윤허로 설립이 기획되어 있는점은 국제관습법상 교황청의 바티칸이 성균관대를 Royal대로 인정해주는 경향을 보인다고 판단하여, 국제관습법상  한국의 Royal대로 판단하여 세계와 한국에 알려왔습니다. 물론 태학.국자감.성균관(성균관대)처럼 오랫동안 한국인의 유교, 신분제도 형성, 사상.언어.문화등을 강행법으로 형성해오지는 않았지만, 교황청과 서강대가 성균관대를 교과서와 대통령령(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발행)에 의거해 한국 최고(最古, 最高) 대학 학벌로 인정해 주는 이상, 국제관습법상 교황윤허 서강대를 Royal대로 인정해주는 방침은 변하지 않습니다. 


교과서 교육 측면에서 본다면 고대부터 지금까지 한국 교육은 유교교육이 주류입니다. 교과서 관련, 한국 민족문화대백과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 다 음 -


우리나라의 교과서 변천은 다음과 같이 5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전통시대의 교과서’이다. 이는 넓게 보아 우리나라에서 교육 제도가 성립된 삼국시대 이후 갑오경장(1894) 이전까지의 전통사회에서 사용된 교과서와 그 변천 과정을 말한다. 이에는 유교사상 내지 유교적 도덕관을 갖추기 위한 교육 수단들로 대표된다.

둘째는 ‘개화기의 교과서’이다. 이는 우리나라에 서양식 교육이 처음으로 도입된 1880년대 초에서 1910년 국권 상실 전까지 각급학교에서 사용된 교과서를 말한다. 교과서가 제도적으로 실현을 보게 된 동인이 갑오경장이다. 당시의 교과서는 개화·계몽적 성격과 자주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교육 수단으로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일제의 간섭이 증대함에 따라 그 자주적 위상이 점차 약화되어 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셋째는 ‘일제강점기의 교과서’이다. 1910년에서 1945년 광복 전까지 사용된 일본 침략 세력에 의해 편찬·발행 및 검정된 교과서를 말한다. 이 시기의 교과서에는 일제의 식민화 교육 이념이 직접적으로 반영되었다.

넷째는 ‘광복·정부 수립 이후의 교과서’이다. 1945년 광복에서 1948년 정부 수립을 거쳐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교과서를 말한다. 이 역사 구간은 일제의 식민 교육을 청산하고,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에 의한 교육 주권이 실현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이후에는 우리의 실정에 부합한 교육 제도와 교육과정이 개정·보완을 거듭하는 가운데, 이에 따라 교과서의 편찬·발행 과정도 변천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2]. 대학.종교관련, 한국에서는 한국사.세계사의 정설(定說)을 대체할 이론이 없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세계사는 가장 보편적인 정설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교과서적 정설이 해당국가에 맞지 않으면, 국가주권이라는 개념을 적용하여, 해당국가만 별도의 이론을 교육시키는 방법도 가능하겠습니다.   



대학.종교관련, 확실하다고 인용할 수 있는 이론은 교과서(참고서포함), 백과사전, 전문사전, 오랜동안 애독되어온 전문 학술서등이 가장 신뢰대상인 것 같습니다.


이런 定說에 바탕하지 않거나 위배되는 새로운 이론은, 세계사나, 그나라 국사 및 정부입장과 대조하면서, 定說로는 채택하기 어려운, 새로운 논문.主義등으로 간주하는게 적절한 것 같습니다(학자가 아니면서 문필가.사상가 영역에서 활동하는 필자를 포함하여 누구의 이론이나 주장.主義든간에...).


대학관련, 대중언론이나, 사설 입시학원들의 자료, 시중의 광고용 홍보는 定說이나 학술이론으로 채택해 줄 수 없는 특정집단의 홍보자료로 간주하면 적절한 것 같습니다.  현대에 들어 대중언론과 광고의 범람으로, 오랜 권위를 인정받아온 교과서나, 정부 간행물, 역사서, 경전(유교나 가톨릭등)등의 권위가 훼손될수도 있겠는데, 대중언론과 대중문화는 한계가 있는 매체임은 분명하니까, 상업적으로 돈을 버는데 유리한 측면은 인정하면서도, 오랜 역사와 전통의 대학.학술.문화.종교등의 기득권은 보호되어야 하겠습니다.   


한국의 경우 국가기관이며 국책연구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해온 국사의 내용을 학교교육에 반영하고, 이전의 예비고사.학력고사나 현재의 수능에 적용하지 않을 수 없을것입니다. 고등고시, 공무원시험, 경찰시험등에서도, 국사편찬위의 발행내용에 크게 벗어나지 않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학설 그대로 반영하여 출제해 온 특성이 강하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국은 公敎育에서 오랫동안 다음과 같이 교육을 시켜왔습니다.


- 다 음 -


1. 한국사 성균관(해방후에 성균관대로 계승되어 600년 역사를 인정받고 있음),

2. 윤리나 한문(또는 국어의 고전)수업에서 가르치는 유교교육 삼강오륜(공자님과 맹자님의 가르침).

 3. 세계사 교육:세계사는 서유럽과 교황청의 영향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고 판단됨. 그리고 학술적으로 중국의 황하문명이나 한나라 태학. 유교등도 기득권을 중요하게 인정해온 경향


   1). 황하문명, 유교, 중국 한나라 태학(그 이후의 국자감. 국자감은 청나라때 경사대학당이 되고 이후 북경대로 계승됨)

   2). 에게문명, 로마 가톨릭, 중세유럽의 대학인 볼로냐 대학, 파리대학등  


 구한말 國外에서 외국세력의 힘과, 한국내에서 유교와의 마찰에 놀란 대원군이 쇄국 정책을 펴고, 서양의 발전된 과학기술 수용까지 거부하면서 유교를 지킨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계화시대가 되었으므로, 근대 중국의 침체기 및 한국의 수난기에, 세계사의 주도세력으로 여러 학자들 이름이 거론되는 서유럽과 교황청의 전통과 자격을 감안하여, 유교나 한국에 필요한 가톨릭 예수회(서강대)임을 강하게 느껴, 宮 성균관대(국사교육에서 가르치는 유일무이의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한 최고대학으로 600년의 역사를 한국정부로부터 인정받고 있음)=御 서강대(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물게 교황윤허 대학 중 하나)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대중언론이나 사설 입시학원의 자료를 이용하여 매일 덤벼도 국사 성균관=성균관대(6백년 역사)가 정부의 학술적 정설(定說)이기 때문에, 성균관대의 최고(最古,最高)학벌은 바뀌지 않아왔고, 현재도 그렇습니다. 


한국의 정부체제.국가체제(국가기관.국책연구기관인 국사 편찬위의 국사 성균관 서술, 교육기구로는 성균관=성균관대)는 바뀌지 않아왔고, 현재도 그렇습니다. 국사 성균관=성균관대이며 6백년 역사의 성균관대.



6백년전부터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의 최고 교육기관이던 성균관(성균관의 정통성은 해방후 미군정부터 국사교육을 통하여 성균관.성균관대가 유지.계승시켜옴)같은 유서깊고 정통성있는 Royal대인 성균관대.



서울대는 경성제대 후신으로 을사조약이 무효고(따라서 국내법 우위의 전통 법이론으로 보면 한일병합도 무효), 일본이 항복하면서 받아들인 카이로선언.포츠담선언에 의해 한국에 주권이나 학벌이 없어왔습니다. 그 추종세력인 서울대.연세대.고려대도 당연히 그런 주권없고 학벌없는 일본 강점기 잔재 서울대의 추종세력.


한국의 현행헌법(1988년부터 시행)에 보장된 임시정부 법통때문에,이론상으로는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강행법측면에서 한국에 주권이나  학벌이 없습니다.    


한국의 역사적.교과서적.국가적 차원의 최고(最古,最高) 대학학벌은, 조선,대한제국과 마찬가지로, 해방후 미군정부터 현재까지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한 6백년 역사의 성균관대입니다.


한편 세계사를 저술한 것으로 판단되는[대부분 서유럽 학자들의 이름만 나옴. 이는 2차대전 이전 근대에 세계의 지배세력이던 서유럽의 역사가 그렇게 만든것 같음] 서유럽.교황청의 영향력은 지금도 세계사나 여러가지 교과서(참고서 포함).백과사전.학술서적등을 통하여 지금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서강대는 교황윤허로 대통령령에 의해 발행된 한국 민족문화대백과가 그렇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Royal대학은 성균관대(국사 성균관의 정통성 승계로 6백년 역사)와, 교황윤허의 서강대 뿐입니다. 다른 대학들은 비신분제 대학으로, Royal대에 대한 충성도를 보아, 개인적으로 조금씩 중용해 나가면 될것입니다.   




@일본항복후,포츠담선언문 8항에 의해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등의 한국내 주권이나 학벌은 없어왔음.

http://blog.daum.net/macmaca/2375


 대학은 Royal대인 성대나 서강대(교황윤허)가 좋습니다. 중요한건 해방이후 현재까지 성대가 한국 최고(最古,最高)대학 학벌이어 왔다는 것.

한국 최고(最古, 最高)대학 성균관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성균관대. http://blog.daum.net/macmaca/2325 



[3]. 특이한것은 구한말의 세계사 교육입니다. 


만국약사[]



유형문헌
시대근대
성격역사서
편저자학부 편집국
제작시기1896년
소장처규장각 도서

정의

1896년 학부 편집국에서 편찬, 간행한 세계사 개설서.

내용

2책. 고활자본(). 국한문혼용체. 학부 편집국장 이경직()의 발()이 수록되어 있으며, 당시 사람들에게 세계 여러 나라의 역사를 알리기 위하여 간행된 우리 나라 최초의 세계사이다.

내용은 총론에서 지구구형설, 땅과 바다의 분포 및 비율, 6대주의 주민과 인종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아시아의 앗시리아·바빌로니아·이스라엘·말레이시아·싱가포르·베트남·타이·인도·중국·일본·조선과 아프리카의 이집트, 유럽의 그리스·이탈리아·터키·스페인·포르투갈·프랑스·오스트리아·독일·러시아·덴마크·스위스·스웨덴·노르웨이·벨기에·폴란드·네덜란드·영국 및 북아메리카대륙의 미국·캐나다 등 여러 나라의 약사()를 기술하고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 출처: 만국약사[萬國略史]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서술된 교과서.

정의

교수와 학습에 필요로 하는 지식 내용을 교육과정에 따라 제시한 수단.

개설

교과서를 생성하는 근거는 교육과정이다. 교육과정이란 교육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교육 및 학습 내용을 편성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한 교과 계획을 말한다. 교과 계획은 특정한 교육 및 학습 내용을 학교 교육의 목적에 맞게 조직해 놓은 체계적인 묶음을 가리킨다. 즉, 초·중·고등학교에서 수업을 통해 학생들이 학습해야 할 지식과 기술 등을 학문 영역 또는 교육 활동 영역에 따라 조직해 놓은 기본 자료이다.

교과에는 그 시대와 사회가 지향하는 교육적 가치를 반영한 내용이 선정된다. 이것을 반영한 수단이 교과서이며, 이는 각 교과를 체계적이고 효과적으로 학습할 수 있도록 편찬·발행한 것이다. 따라서 교사에게는 학생을 지도하기 위한 교육 활동의 기본 매체가 되며, 학생에게는 학습할 내용을 담은 기초 자료가 된다.

따라서 교과서는 교육 목표를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으로 그 나라의 교육관이나 시대에 따라 내용이 다르게 된다. 전통적인 교육관에서는 문화유산을 전수하기 위한 자료적 의미에 중심을 두어 주로 학문·지식의 체계만을 반영하는 것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 생활과 사회 발전에 필요로 하는 실용적이고 민주적인 생활경험의 체계를 중시하는 경향으로 발전하여, 그 나라의 국민 교육에 중요한 구실을 담당하고 있다. 즉, 교과서를 통하여 국가관과 애국심을 배양하며, 건전하고 유능한 시민으로서의 자질과 도덕적 가치 및 윤리관을 배우게 된다. 그런 점에서, 교과서의 변천사는 교육의 역사인 동시에 그 나라 국민정신의 형성사와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연원 및 변천

우리나라의 교과서 유형은 교육부가 저작권을 가진 국정교과서, 교육부장관의 검정을 받은 검정교과서, 교육부장관의 인정을 받은 인정교과서가 있다. 이는 교과목별 적용에 따라 특정화되며 각각의 교과서와 교사용 지도서를 통칭하여 교과용 도서라고 부른다.

1977년 8월 22일 제정·공포된 ‘교과용 도서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제8660호)에 의하면, “교과용 도서란 교과서·지도서 및 인정도서를 말하며, 교과서란 학교에서 교육을 위하여 사용되는 학생용의 주된 교재를 말한다.”고 되어 있다. 1997년 2월 11일 개정·공포(대통령령 제15273호)된 동 규정에서는 주된 교재 외에 보완 교재인 ‘음반·영상저작물’로 확대하였다. 그러다가 2000년 6월 19일 개정·공포(대통령령 제16841호)된 동 규정에서 전자저작물이 포함되었고, 2002년 6월 25일 개정·공포(대통령령 제17634호)된 동 규정에 이르러 매체의 유형을 ‘서책·음반·영상 및 전자저작물’로 확대하여 현재에 이른다. 우리나라의 교과서 변천은 다음과 같이 5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전통시대의 교과서’이다. 이는 넓게 보아 우리나라에서 교육 제도가 성립된 삼국시대 이후 갑오경장(1894) 이전까지의 전통사회에서 사용된 교과서와 그 변천 과정을 말한다. 이에는 유교사상 내지 유교적 도덕관을 갖추기 위한 교육 수단들로 대표된다.

둘째는 ‘개화기의 교과서’이다. 이는 우리나라에 서양식 교육이 처음으로 도입된 1880년대 초에서 1910년 국권 상실 전까지 각급학교에서 사용된 교과서를 말한다. 교과서가 제도적으로 실현을 보게 된 동인이 갑오경장이다. 당시의 교과서는 개화·계몽적 성격과 자주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교육 수단으로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일제의 간섭이 증대함에 따라 그 자주적 위상이 점차 약화되어 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셋째는 ‘일제강점기의 교과서’이다. 1910년에서 1945년 광복 전까지 사용된 일본 침략 세력에 의해 편찬·발행 및 검정된 교과서를 말한다. 이 시기의 교과서에는 일제의 식민화 교육 이념이 직접적으로 반영되었다.

넷째는 ‘광복·정부 수립 이후의 교과서’이다. 1945년 광복에서 1948년 정부 수립을 거쳐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교과서를 말한다. 이 역사 구간은 일제의 식민 교육을 청산하고,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에 의한 교육 주권이 실현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이후에는 우리의 실정에 부합한 교육 제도와 교육과정이 개정·보완을 거듭하는 가운데, 이에 따라 교과서의 편찬·발행 과정도 변천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전통시대의 교과서

전통시대의 교과서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의 경우는 소수림왕() 2년(372) 6월에 설립된 태학()에서 그 첫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이 곳에서는 오경()과 삼사() 학습을 중요한 교육과정으로 삼았다. 오경이란 『시경()』·『서경()』·『역경()』·『예기()』·『춘추()』의 다섯 경전이며, 삼사는 『사기()』·『한서()』·『후한서()』의 세 경전을 말한다. 이들 오경과 삼사는 태학 교육과정에서 사용된 대표적인 교과목들이었다. 태학이 상류층의 자제를 모아 유학을 중심으로 교육하는 관학()인 데 비하여, 후기에 설치된 경당()은 일반 평민층의 자제를 대상으로 한 사학() 교육 기관이었다. 이곳에서는 경전과 궁술()을 가르쳤다.

백제의 경우는 ‘오경자사()’를 교육과정으로 채택했다고 전해진다. 오경에는 ‘자부()’와 ‘사부()’의 일부 서적을 포함하고 있어 교육 수준이 매우 높은 단계였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특히, 백제는 서기 285년에 박사 왕인()을 통하여 주요 교재류인 『천자문()』과 『논어()』를 일본에 전한 바 있다.

신라의 경우는 신문왕 2년(682) 6월에 설립된 국학()에서 『주역()』·『상서()』·『모시()』·『예기()』·『좌씨전()』·『문선()』·『논어()』·『효경()』 등의 서적이 교과서로 채택되었다. 이들 서적 내용은 788년부터 적용된 독서삼품과의 출제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산학()·의학·천문학·율학() 등 전문 교과의 교과목들도 행해졌는데, 이에 종속된 여러 서적들이 직접적인 교육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고려시대의 경우는 삼국시대의 교과서를 보다 확대·발전시키면서 여러 교육 기관이 존재했는데 국자감(), 향교, 동서학당과 오부학당, 12도, 서당 등이 그러한 사례들이다. 이 중 성종 11년(992)에 설립된 국자감에서는 국자학·태학·사문학() 등의 유학 교육과 율학·서학()·산학 등의 기술학 교육도 실시하여 분과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국자감은 뒷날 성균관으로 변경되는 등 여러 변화를 겪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교과목이 주어졌는데 그것이 곧 교재 자체이기도 하였다. 교과목은 공통, 선택, 수의 과목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 중 공통 과목(공통 교재)은 『논어』와 『효경』이었다. 선택 교과목의 경우는 『상서』·『공양서()』·『곡량전()』·『주역』·『모시』·『주례()』·『의례()』·『예기』·『좌씨전』 등이며, 수의 교과목은 『예서()』·『학어()』·『설문()』·『자림()』·『삼창()』·『이아()』 등이었다. 이와 같은 범위는 사학의 경우 다른 형식이었고, 유교와 불교의 국교 정책이 변화함에 따라서도 다르게 편성되었다.

조선시대의 경우는 서당·사학()·향교·서원·성균관의 교과목들에 따라 구분되며,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서목이 적용되었다.

초등 교육과정에 해당되는 서당에서는 『천자문』·『동몽선습』·『통감절요』·『소학』과 사서오경 및 『십팔사략()』·『사기』·『당송문()』·『당률()』 등이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이 중 『동몽선습』의 경우는 1543년 민제인()에 의해 저술된 도덕 및 역사를 겸한 교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책은 종래 중국에서 전래된 도서 대부분을 교재로 사용하고 있었음에 비하여, 우리 학자가 저술했다는 특기점이 있다.

중등 교육과정에 해당되는 사학·향교·서원에서는 서당과 연계하여 『소학』과 사서오경 및『근사록()』·『제사()』·『삼강행실록』 등이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최고 학부 과정인 성균관의 경우 사서오경을 비롯하여『효경』·『통감강목』·『송원절요()』·『역대병요()』 등이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의 서당·향교·성균관 등의 교재 종류를 상세화한다면, 전통교육의 내용과 변화를 알 수 있다. 조선후기의 실학자인 이상수()가 그의 저서『어당집(峿)』에서 제시한 교재의 종류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 단계는 문자 학습용 교재이다. 조선시대에 아동을 위한 최초의 교육은 한자 학습이었다. 그 대표적인 교과서는 양()나라 주흥사()가 지은 『천자문』이다. 일종의 ‘자모 학습’ 교재였던 셈이다. 『천자문』은 단순히 글자를 깨우치게 하는 의미 외에도, 유교의 정신세계와 접하게 하는 첫 매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천자문』 학습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 관심의 결과로 『유합()』·『훈몽자회()』·『신증유합()』·『아학편()』·『정몽유어()』·『별천자문()』·『통학경편()』·『천자동사()』 등 여러 기초 교재의 편찬으로 나타났다.

둘째 단계는 훈석() 학습에 해당한다. 『사략()』과 『통감절요()』 그리고 사서와 오경 등이 대표적인 교재이다. 이 단계의 교재는 대체로 아동이 한자의 자의()를 이해하고 난 뒤, 본격적으로 경서를 학습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문리 터득의 수준을 높이기 위한 일종의 ‘문장 학습’ 과정이었던 셈이다.

이와 같은 교재는 모두 중국인에 의해 저술된 중국적인 생각을 반영한 서적들이었다. 이 때문에 우리의 교육적 요구나 정서에 맞지 않아 박지원과 정약용 등 실학자들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 밖에 국내에서 양반 자제, 혹은 향리의 아동들에 대한 직접적인 교육 경험 과정에서 간행된 교재들도 있었다. 이 도서들은 당시의 생활상과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고 있다는 면에서 특기점이 있다.

전통시대의 유자()들은 주자학적인 가치 체계에 따라 교재를 구성하여 사회적 지도 원리로 삼았고, 이를 통해 사회 통합을 실현하려 노력하였다. 그 특징적인 준거 기준 중 주요 사례는 『소학』에 제시된 명륜()·경신()·입교()·계고()·가언()·선행() 등의 강령들에서 파악된다. 여기서 명륜은 오륜을 밝힌 것이고, 경신은 몸을 공경히 하는 것, 입교는 교육하는 법을, 계고는 옛 성현의 사적을 살피는 일이다. 가언은 성현들의 좋은 교훈을 인용하고, 선행은 선인들의 귀감을 널리 인용하여 학습하도록 하는 내용들이다.

셋째 단계는 역사적 전례()와 고사()에 준거한 상고() 및 예속 학습이 중심을 이룬 교재들이다. 이는 유학적 가치관에 중심을 둔 교육적 인습이 교육 수단으로 전면화된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일반 서민을 위한 교재이기보다는 치자() 계급을 위한 관료 지향의 교육이 그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동기 부여는 실천면에서 윤리의 강조를 지향하는 데 중심 목표를 두고자 했다. 다시 말해서, 유교적 테두리 안에서 ‘유자()의 길’()을 찾는 것이 교재에 설정된 중심적인 교안()이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이이()는 『격몽요결()』에서 “먼저 『소학』·『대학』·『논어』·『맹자』·『중용』의 오서()를 읽고, 『시경』·『예경』·『서경』·『역경()』·『춘추』의 육경()을 읽어야 한다. 그렇게 한 뒤에 『근사록』·『가례()』·『심경()』·『이정전서()』·『주자대전』·『어류()』 등을 읽어야 하며, 이에 덧붙여 성리학설과 사서()를 읽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 같은 독서 대상들은 서당·향교·성균관 등 여러 교육 기관에서 중시한 교재들이었다.

개화기의 교과서

이 시기의 교과서는 우리나라에 근대 학교가 들어서기 시작한 1880년대 초에서 1910년 국권 상실 전까지 사용된 것을 말한다. 이는 1883년 원산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설립한 원산학사()의 경우에서 첫 사례를 살필 수 있다. 당시 원산학사에서 비치하고 사용한 교과서는 『기기도설()』 등 10종의 실용서들이었다. 이 중에서 세계 지리를 소개한 『영환지략()』과 국제법을 다룬 『만국공법』 등은 특기할 만한 교과서들이다. 그런데 순수한 우리 교재로는 안종수()의 『농정신편()』을 들 수 있다. 그 이외는 대체로 중국에서 저작되었거나 번안된 서래(西) 서적이 중심이었다.

개화기의 교육에 끼친 사회적 배경은 1894년에 단행된 갑오경장을 정점으로 하여 그 해 7월 2일 학무아문에서 공포한 ‘고시’가 중대 동인으로 작용하였다. 이에서 “영재 교육이 시급한 일”임을 천명하고, “소학교와 사범학교를 세워 널리 교육 기회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1895년 1월 7일에는 ‘홍범’ 14개조를 공포했는데, 이는 갑오경장 후 정치 제도의 근대화와 독립 국가로서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제정·선포한 국가 기본법이었다. 이 홍범에서도 국가의 교육 개혁 의지가 반영되었다.

같은 해 2월 2일에는 고종이 「교육입국조서」를 조칙()으로 발표하여 “국가의 부강은 국민 교육에 달려 있다.”고 밝혔다. 조서를 발표한 뒤, 정부에서는 교육을 통한 국가 중흥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교사 양성을 목적으로 한 「한성사범학교관제」(1895.4.16.)를 공포했으며, 「외국어학교관제」(1895.5.10.)와「소학교령」(1895.7.19.) 등 학교관제와 학교령을 잇따라 제정·공포하였다.

정규 학교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교과서를 편찬·발행한 것은 조선 정부가 1894년 7월 20일 예조를 폐지하고 팔아문관제를 공포했는데, 이 중 학무아문()을 설치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이에 따라 학무아문에 편집국을 두어 그 관장() 사무의 하나로 “국문철자, 각국문번역 및 교과서편집 등에 관한 일”을 규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학무아문은 1895년 3월 25일 학부로 개칭되었다.

당시 교과서 편찬·발행은 정부 주도로 이행되었다. 이것이 학부편집국 편찬으로 현실화되었는데, 그 첫 교과서가 1895년 8월에 신간된 『국민소학독본』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근대 교과용 도서 중 최초의 국정교과서인 동시에 첫 국어과 교과서라는 기록성이 있다. 이후 『소학독본』·『신정심상소학』·『조선약사』·『조선지지』·『근이산술()』 등 다양한 종류의 학부 신간 도서들이 계속 편찬·발행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근대 교과서는 정부가 편찬·발행을 주도하였고, 뒤따라 민간에 의한 검정도서 출판으로 이어졌다. 그러한 과정에서 1905년 일제의 통감부가 서울에 설치되면서 이른바 학정참여관()을 학부에 배치하여 교과서 편찬 업무를 통제해 나갔다. 이러한 변환은 친일 내각으로부터 전면적인 뒷받침을 받으며 추진되었다.

학부에서 편찬한 교과서의 발행 부수는 1909년의 경우 20만 2,936책이었다. 점차 정부 주도의 교과서 편찬·발행 업무가 식민지 교육의 주요 과업으로 추진됨에 따라, 항일 독립 투쟁 정신을 고취시켜 나가던 민간 학회와 교육회 등을 중심으로 한 교과서 편찬도 거듭 증가되었다. 이 때문에 일제는 한국인 대상의 모든 민족 교과서에 대하여 그 편찬·발매·반포 및 사용을 금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적극 추진하게 되었다.

학부는 1908년 8월 28일에 ‘교과용도서검정규정’을 공포하여, 민간 주도 교과서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가하였다. 즉, 검정 내용을 정치적 방면, 사회적 방면, 교육적 방면의 3대 심사 기준으로 나누어 탄압 정책을 견고화한 것이다. 이에 따라 1909년 5월까지 민간이 제출한 총 검정 출원 도서 117종 가운데 55종만 인가되었다. 특히, 1908년부터 1910년 5월까지 민족교육과 관련이 깊은 수신·국어·한문·역사· 지리 교과서는 77권 신청 중 인가된 것이 23종에 불과하였다.

1909년 2월 23일에는 통감부 당국에 의해 조작된 극심한 문화 악법인 출판법이 제정·공포되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5월 5일 교과서에 대한 첫 발금 조치를 취했는데, 『월남망국사()』()·『월남망국』()·『이십세기조선론()』()·『유년필독』()·『유년필독석의()』()·『중등교과동국사략()』()·『금수회의록(錄)』()·『우순소리()』() 등 8종이 치안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발매·반포 금지 처분을 받았다.

1909년 5월부터 1910년 11월까지 발매 금지 처분을 받은 교과서는 모두 64종에 이르렀다. 이 시기의 민족 교과서는 국권 상실과 함께 명맥이 끊어질 위험에 직면하고 있었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교육 정책에 대항한 교육 수단으로 존재하였다.

일제강점기의 교과서

이 시기의 교과서는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35년간에 걸쳐 편찬·보급한 각급학교의 교재를 범위로 한다. 1905년 11월, 일본은 대한제국을 압박하여 이른바 을사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1910년 10월, 일제는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초대 통감으로 들어앉혀 본격적인 침탈 공작을 전개하였다. 이 때 일제 식민 세력이 특별히 중요시한 것은 한국인에 대한 교육 정책이었는데 이른바 ‘황국신민’ 사상을 내걸어 세뇌와 핍박의 양면 정책을 펴나갔다. 그러한 식민 사상을 담아낸 수단이 교과서였고, 이로써 ‘조선적인 사상이나 태도’를 허물어 버리고자 하였다.

이 같은 책략은 한민족으로서의 자기 발전을 차단시켜 ‘숙명적인 영합’을 꾀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우선 ‘자기 부정’을 전제로 하여 그들에게 종속 또는 동화하도록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 때문에 식민 당국자들은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모든 교과용 도서에 “①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여 민족혼을 상실하게 하고, ② 조상의 무력함을 들춰냄으로써, 청소년들이 그 부조()를 경멸하는 감정을 일으키도록 하며, ③ 그 결과,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해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한다.”는 3단계의 ‘자기 부정’ 과정을 반영하였다.

이와 같이 일제는 교과서를 통해 순종과 자기 경멸, 그리고 일본주의에의 흠모를 조장하려 애썼다. 그러한 구체적인 대안이 ‘순종의 자세’를 불어넣는 작업이었다. 그 한 사례를 초등 교육과정 첫 단계인 1학년용 교과서 『조선어독본』(권1, 초판: 1930.3., 저작 겸 발행자: 조선총독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책 제1과의 주제가 「소」이고, 제2과는 「소나무와 버드나무」로 되어 있다. 그들에게 있어, ‘소’란 순종의 의미를 우선하는 비유적 대상일 뿐이다. 또, 소나무와 대칭으로 제시해 놓은 학습 대상이 ‘버드나무’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같은 학습 대상은 결국 한국인으로서의 가치 신념에 변신()적 위상을 수용하도록 적극 유도한 것으로 요약된다.

이 시기에 공급된 초·중등 교과서들은 초기에는 조선총독부관방인쇄국, 그리고 그 후신으로 설립(1923)된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에서 주로 찍어 냈다. 또 근택인쇄소(), 대해당인쇄소(), 조선단식인쇄사() 등에서도 총독부 편찬의 교과용 도서들을 인쇄하였다. 이와 함께 도쿄의 대일본도서주식회사, 돗판인쇄주식회사, 삼성당서점 등에서도 한국인 학생을 대상으로 한 교과서들이 출판되었다. 그러다가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설립 이후로 이 회사에서 조선총독부 저작·발행 교과서의 일원화 생산이 이루어졌다. 특히, 이 회사는 조선총독부의 각종 문서들과 교과서 공급을 뒷받침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는데, 한반도에서 최초로 사진제판(: 사진술을 이용한 인쇄 제판법) 및 오프셋 인쇄기(offset: 인쇄판에 바른 잉크가 판통을 거쳐 종이에 찍히게 하는 인쇄기)를 들여놓았을 정도로 대규모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일제 당국이 교과서 생산과 공급을 목적으로 서울에 거대 규모의 전용 회사를 들어앉힌 것은 식민 작업을 앞당기려 한 데 있었다. 물론, 만주나 중국 내륙으로 인쇄물을 운송하는 데도 입지 조건이 좋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가 서울역 부근인 만리동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교과서의 외적 체제 면에서 큰 특징은 선장본() 형식이 점차 소멸되었다는 점이다. 『습자』(서예)를 제외한 모든 교과서에 국판(5·7판)이 주된 판형으로 적용되었다. 이 책들은 책등[]에 철사매기를 한 다음 배접지(종이 또는 천)로 마무리하는 호부장(풀매기) 형식이 주종이었다. 조판 형식의 정연성을 꾀하여 200쪽 내외의 통제 기법이 반영된 것도 특기점이라 하겠다. 따라서 학교와 학년 수준에 걸맞은 활자 크기를 안배했으며, 삽화를 넣어 일본인상의 표상화 작업에 주력하였다. 색도 인쇄의 경우는 흑백이 주종이었으나, 1930년대 후반부터는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 컬러를 적용한 바도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에는 태평양 전쟁의 극심한 와중으로 휩쓸리면서 지질의 저하가 계속되는 등 전반적인 부실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교과용 도서에 소요되는 물자(용지 등)들도 군납에 우선을 두었기 때문이다.

내적인 체제 면에서도 한국어를 탄압하였는데, ‘조선어’를 수의과()(1938)로 결정하여 모든 교과서를 ‘일본적인 것’으로 일습화하였다. 그 중에도 수신과(도덕 교과목)와 공민 등 사회과(역사·지리 포함) 교과서들은 더욱 극심한 상태였다. 1943년 10월에는 조선총독부에 의한 ‘교육에 관한 전시 비상 조치령’에 따라 이른바 ‘결전 학년의 새 교과서’를 만들어 모든 중등학교에 공급한 일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교과서는 오늘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도록 이끈다. 교과서의 시련은 곧 그 나라와 그 민족의 시련이라는 오래된 인식을 다시금 짚어보게 한다.

광복·정부 수립 이후의 교과서

이 시기는 8·15 광복으로부터 미군정기를 거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이후의 교과서를 살펴볼 수 있다.

광복·정부 수립기의 교과서

1945년 8월 23일, 서울에 진주한 하지(HodgeJohn R.) 중장 지휘하의 미군은 9월 11일 ‘재 한국 미합중국 군사 정부(United State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로 군정 체제를 발족시켰다.

이에 따라 학무 행정이 시작되면서, 처음으로 손댄 것은 ‘교수요목’의 작성이었다. 미군정 당국이 교육에 관한 방침을 발표한 것은 1945년 9월 17일(일반명령 제4호, ‘신조선의 조선인을 위한 교육’)이었다. 교수요목의 마련이 이로부터 비롯된다. 각 도에 포고한 이 문건은 전국의 공립소학교를 9월 24일에, 중등학교는 10월 1일부터 개학할 것을 전하고, 그에 따른 ‘교훈 용어’와 ‘과정’에 대한 내용도 포함하고 있었다.

미군정청 학무국은 10월 21일 학무통첩 제352호로 ‘학교의 설명과 지시’를 공포하였다. 이 중 교과목 및 그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었는데 ‘일본어’를 ‘한국어’로, 역사 교과의 경우 일본사에서 한국사 중심으로 고치는 등 최소한의 수정안이 지시되어 있었다. 따라서 교과서 편찬은 시간이 필요하므로, 우선 “어떤 교과는 교과서 없이 그리고 다른 교과는 일본어로 된 교과서를 교사용으로 사용할 것”등에 관해서도 언급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군정 초기의 교수요목은 경우에 따라 일제강점기에 사용하던 것을 답습 또는 묵인하였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수신’이 ‘공민’으로, ‘일본어’가 한국어의 ‘국어’로, ‘도화’를 ‘도화 공작’으로, ‘직업’이 ‘실과’로 대체되는 등 명칭의 전환이 실현되었다.

8·15광복 직후의 교육 현안 중에서 교과서 편찬이 시급한 과제였다. 이 문제는 국어 소생과 민족교육의 부활을 의미하였다. 당시 가장 먼저 편찬·발행된 교과용 도서는 『한글 첫걸음』(1945.11.6.)이다. 뒤이어 『초등국어교본(상)』(1945.12.30.)이 나왔고, 해를 넘겨 중권(1946.4.15.) 및 하권(1946.5.5.)도 나왔으며, 또 『중등국어교본』상권·하권(1946.9.1.)과 중권(1947.1.10.)으로 이어졌다. 이 책들은 조선어학회(오늘의 한글학회)가 저작하고 군정청학무국에서 발행하였다. 진단학회에 의해 첫 국사 교과서인 『국사교본』(1946.5.26.)도 이룩되었다. 이 책들은 임시 교재로 나왔다. 이후 1948년 6월 현재로 초·중등 교과서는 임시 교재 15책을 포함하여 16종 54책으로 불어났다.

국어과 교과서들은 조선어학회에 의해 편찬 업무가 추진되었다. 이 일은 1942년 10월 이 학회가 최현배 등 회원 11명이 구속되는 등 일제로부터 수난을 당한 이후로 착수한 첫 과업이기도 하였다.

조선어학회가 우리말 교과서를 편찬하기로 결의한 것은 1945년 8월 25일 임시 총회에서였다. 이 회의에서 미군정청으로부터 교과서 편찬을 위촉받은 데 따른 사후 추진 과제를 협의한 결과, 국어교과서편찬위원회를 발족시켜 그 임무를 전담하도록 결의했던 것이다.

당시 조선어학회는 어떤 교재를 먼저 펴내야 할 것인지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과거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교과서가 일본어 중심이어서 정작 우리글에 대한 문맹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8·15광복 직후의 13세 이상 문맹률은 무려 78%에 이를 정도였다. 결국, 그와 같은 심각한 문맹 현상은 우선 한글을 깨우치게 해야 할 필요성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때문에 서둘러 편찬한 교과서가 『한글 첫걸음』이다. 이 책은 초판 보급이 1백만 부를 넘겼고, 이후 1년 만에 다시 1백만 부를 돌파하였다.이렇듯 광복 직후의 우리말 교과서의 편찬·발행은 매우 중요한 성과로 기록된다.

광복 직후 교과서의 구분은 학년·학기별로 된 것도 있지만, 상·중·하 형식으로 분책한 형식 또한 적지 않았다. 판형은 5·7판(국판)이 주종이었고, 4·6판도 함께 존재하였다. 용지의 경우는 마분지를 주로 사용했고, 미군정청 학무국 발행의 교과서 중 일부만 모조지(백상지) 또는 갱지를 썼다. 활자의 경우는자형이 상이한 활자체를 한 책에 사용하기도 했는데, 예컨대, 『초등국어』의 상권과 중권이 같은 서체로, 그 하권은 다른 서체로 된 것이 그 사례이다. 이는 일제강점기의 식민 세력들이 한글 활자를 녹여 없앴기 때문이다.

광복·정부 수립기는 우리의 헌법이 제정·공포(1948.7.17.)되고, 이에 의거하여 교육법(1949.12.31.)도 마련되었다. 그런 가운데 교과서 관련 각종 법령들, 즉 ‘국정교과용도서편찬규정’(1949.4.29.), ‘교과용도서검인정규정’(1950.4.29.), ‘국정교과용도서편찬심의회규정’(1950.6.2.) 등이 공포되었다.또한 안호상 문교부장관이 ‘교과서 사용에 관한 문교부 통첩’(1949.7.11.)을 발표한 바도 있다. 그러나 6·25 전쟁이 일어나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정부 수립 직후로 나온 교과서 중에서 『바둑이와 철수[국어·1-1]』(1948.10.)의 출현은 주목된다. 『한글 첫걸음』과 『초등국어교본』등이 ‘자모법(ㄱㄴ식) 교재’라면, 이 책은 ‘문장법(문장식) 교재’이며, 정부 수립 후 최초의 국어과 국정교과서이기도 하다.

또 다른 하나는 전시 교재의 발행이다. 즉, 전시 생활을 지도할 목적으로 1951년 3월 임시 수도 부산에서 문교부가 낸 것으로 초등학교용 『전시 생활』 3집 9책, 중등학교용 『전시 독본』 3집 3책으로 되어 있다. 전시 교재는 표지와 본문을 합하여 64쪽 체제였다. 용지난이 극심하여 전지 한 장을 접어서 4·6판 절수에 맞춰 인쇄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광복·정부 수립기 및 교수요목 적용기로 걸쳐 있는 시기(1945.9.∼1954.4.)의 교과서 편찬·발행에 대하여 개관하였다. 이 시기의 교과서에 반영된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말 교재의 공백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한글 첫걸음』과 『국사교본』 등 일련의 임시 교재들을 편찬하여 정식 교재가 발행되기 전까지 주교재로 사용하였다.

둘째, 교과서에서 가로짜기 체제를 굳혔고, 한글 전용화 편찬이 실현되었다.

셋째, 실업계 전문 교과서의 편찬이 막혀 있던 상태였다. 이 경우는 그 중요성이 거듭 촉구되었으며, 이로써 기술·경제 개발의 경각심을 일깨우게 한 중대동인으로 작용하였다.

한편, 전쟁을 겪은 뒤로 국가 주도형 교과서 편찬·발행 제도로 굳혀 갔고, 그러한 과정에서 여러 쟁점들을 파생시켰는데, 특히 반공 이데올로기가 큰 영향을 끼쳤다.

제1차 교육과정기의 교과서

제1차 교육과정기(1954.4.∼1963.2.)는 문교부령 제35호로 제정·공포된 초·중·고등학교 교육과정 적용을 내용으로 한다. 이 시기에는 ‘교과 중심 교육과정’을 표방하였다.

제1차 교육과정은 당초에 ‘교과과정’이란 명칭으로 공포되었다. 즉,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및 사범학교 교과과정 시간 배당 기준령’이 마련된 것이다. 이로써 초등학교 9개 교과, 중학교의 8개 필수 교과목에 3개 선택 교과목 및 특별 활동, 고등학교의 경우는 8개 필수 교과에 12개 선택 교과목으로 설정되었다. 따라서 종래의 ‘이과’를 ‘자연’으로, ‘셈본’을 ‘산수’로 변경하였으며, ‘가사’를 ‘실업 가정’으로 신설, 변경하였다.

제1차 교육과정기의 국정교과서 편찬은 새 교육과정에 따라 1955년부터 1958년 신학기까지 계속되었다. 1956년과 1957년에 『고등도덕』과 『중학도의』가 학년별로 3종씩 개발된 것도 특기해 둘 일이다. 1956학년도 현재 초등 국정교과서는 9개 교과에 65책이었으며, 그 전량이 대한문교서적주식회사(뒤에 국정교과서주식회사로 개칭)에서 번각 발행되었다.

중·고등학교 실업계 전문 교과서들은 대거 국정으로 전환되어 대한교과서주식회사에서 번각 발행되었다. 그런데 6·25 전쟁 이후의 사정으로 보아, 이 분야의 도서들은 170여 종 정도였으며, 이 중에서 120여 종이 소량 부수권이므로 출판을 계속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 1953학년도 1학기부터 위의 회사에서 『중학국어』와 『고등국어』를 발행하도록 조처된 바 있다. 작문, 말본(문법) 등 ‘국어’ 계열의 다양한 검정도서들도 나왔다. 이 분야의 검정도서는 중학교용 25종, 고등학교용 38종에 이르렀다.

한편, 제1차 교육과정기는 교과서의 이름을 개선한 사례가 나타났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 사회과 교과서인 『부지런한 생활』(1954)과 『착한 생활』(1956)이 그러하며, 국어과에서도『글짓는 생활』(1958) 등이 신편된 바 있다. 이 중에서 앞의 두 책은 『바른 생활』(1964)로 신편되었다. 또 전문 교과서들 중에는 『농작물두루풀이』(1954)·『수풀만들기』(1955)·『수력학과 수력 기계』(1954)·『이상적인 가정생활』(1956)·『새로운 문화의 창조』(1959) 등과 같은 책이름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수산생물학』(1954)·『수리학』(1955)·『분석화학』(1955)·『토목지질학』(1963)처럼 학문적 갈래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한 교과서들도 나왔다.

제1차 교육과정기는 교과서의 유형이 국정·검정·인정 체제로 정착된 시기이다. 특히, 인정도서의 경우는 법령에 의해 확고한 위상이 주어졌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다시 말해서, “국정교과서 또는 검정교과서가 없을 때에는 인정교과서를 이에 대신하여 쓴다.”(교육법시행령 제190조)라고 정해 놓았던 것이다.

당시의 교과서 행정은 1950년 4월 29일에 제정·공포된 ‘교과용도서검인정규정’(대통령령 제336호)에 따라 검인정 대상 도서를 일괄 제출, 일괄 검인정하는 제도였다. 검인정도서의 사용은 초등학교의 경우 기본 교재가 모두 국정으로 전환되어, 주교재에 대한 보완 성격을 가진 인정도서만 존속시키도록 하였다. 중·고등학교 교과용 도서의 검인정 정책은 우선 문교부에서 ‘검인정교과서사열기준’을 발표(1955.10.6.)하고, 여러 보완 절차를 거쳐 심사 결과를 확정(1956년 2월 15일 발표)하게 되었다.

당시의 검인정교과서 사열은 일선 교육자, 학자 등 350명이 동원되어 수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그 결과, 중학교의 검정도서는 161종 379책에 인정도서 57종 125책, 고등학교는 검정도서 186종 316책, 인정도서 30종 34책의 합격본을 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1차 교육과정기의 마지막해인 1958년에는 중·고등학교용 검정도서의 경우 527종 1,066책에 이르렀다. 이상을 토대로 교과용 도서 편찬과 관련된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교과용 도서의 전면 신편 및 검인정이 이행되었다.

둘째, 문교부는 1956년 10월에 ‘검인정교과서 형식 사열 기준’을 발표함으로써 저작, 편집, 출판, 사열 업무를 준거케 했다. 그 후, 1960년 11월에 ‘교과용 도서 체제 기준’을 발표하여 출판·편집상의 규준을 한 단계 더 구체화시켰다.

셋째, 교과서의 판형이 4·6판에서 5·7판(국판)으로 변형되는 변화를 가져왔다.

이 외에도 교과목 간의 체제나 용어 통일 등 문제점이 적지 않았는데,이는 6·25 전쟁을 겪으면서 어려워진 사회 환경이 교과서 출판의 배경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제2차 교육과정기의 교과서

제2차 교육과정기(1963.2.∼1973.2.)는 1963년 2월 15일에 개정·공포된 초등학교 교육과정(문교부령 제119호), 중학교 교육과정(문교부령 제120호), 고등학교 교육과정(문교부령 제121호), 실업계고등학교 교육과정(문교부령 제122호) 적용을 내용으로 한다. 이 교육과정기는 ‘생활 중심 교육과정’을 표방하였다.

제2차 교육과정기는 5·16 군사 정변의 영향으로 전반적인 질서가 이행되었다. ‘교련’ 신설, 반공 교육의 강화 등이 그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1968년 12월에 국민교육헌장 선포, 중학교 무시험 진학, 대학 입학 예비 고사제, 한글 전용 등이 실현되기도 하였다. 이 같은 변인들은 교과서 편찬·발행 및 검인정 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제1차 교육과정기가 교과 형성의 기반 구축기였다면, 제2차는 5·16 군사 정변에 따라 제3공화국의 성립(1963.12.17.)으로 이어지면서 여러 교육 개혁이 뒤따랐다. 그 정점에 있던 중대 변인이 「국민교육헌장」 선포였다.

「국민교육헌장」은 “모든 교과서 내용을 헌장 이념에 따라 개편한다.”는 문교 정책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1968년 7월 23일 문교부장관은 “국민학교 3학년 이상 중·고등학교의 사회과 교과서를 개편할 것”임을 밝혔다. 따라서 1970학년도부터 초등학교 4학년 이상 모든 교과용 도서의 앞표제지와 속표제지 사이에 국민교육헌장 게재로 확대되었다. 이 헌장은 정권을 미화하고 집단주의적 가치를 담고 있다는 등 비판도 파생시켰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10월 유신’(1972.10.17.)이 선포되었고, 1973년부터는 ‘국적 있는 교육’을 표방하였다. 이는 「국민교육헌장」이 전 교과 활동의 중심축이었음을 의미한다. ‘교련’이 강화되었으며, 1975년에는 『교련』을 정규 교과서로 신편, 그 공급이 시작되었다.

제2차 교육과정기의 국정교과서 개편 작업은 1963년부터 1967년까지 계속되었다. 모든 교과서에서 한자 제거 작업을 1969년에 마쳐 1970학년도용으로 공급하는 일도 뒤따랐다.

초등학교의 신편 교과서는 1963년에 1∼2학년용이 완료되어 1964년부터 사용되었다. 3∼4학년용은 1965년, 그리고 5∼6학년용은 1966년부터 사용되었다. 중·고등학교의 경우 『국어』·『사회』·『반공·도덕』·『실업』 교과 등이 국정으로, 그 나머지는 검정으로 발행되었다. 이 무렵 국정교과서 번각 발행사로는 국정교과서주식회사(초등학교용), 대한교과서주식회사, 고려서적주식회사, 동아서적주식회사(이상 중·고등학교용)의 4개사 체제였다.

1964년 현재 국정교과서주식회사의 교과서 발행량은 64종에 3623만 4000부였고, 고려서적주식회사는 18종에 762만부였다. 대한교과서주식회사는 115종에 136만 8439부를 각각 번각 발행하였다.

제2차 교육과정에 따른 중학교 검정교과서 공고는 1963년 2월15일에, 고등학교의 경우는 1966년 8월 31일에 각각 냈다. 그 결과, 중학교용은 연 82개사에서 324종 742책을 출원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종 합격 내역은, 1차(1965.6.6.)에 43개사에서 91종 203책이고, 2차(1966.6.2.)에는 14개사에서 87종 200책이었다. 고등학교의 경우는 1967년 9월 4일에 총 출원본 792종 986책 중에서 최종 합격본을 가렸다. 그 결과, 38과목 대상의 418종 498책이 확정되었다. 당시 검정 종수는 과거에 무제한이던 것을 1과목당 7종으로 제한하였고, 검정된 교과서가 적용된 것은 중학교 1966년, 고등학교의 경우는 1969년부터였다.

교과서 출판 형식에 나타난 특징은 외적 체제와 내적 체제로 살필 수 있다. 우선, 외적 체제에 나타난 특징 내지는 개선 실태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교과서 활자에 대한 개선 노력이 나타났다. 이 작업은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하여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긴 노정의 ‘납활자 개선’으로 이어졌다.

둘째, 교과서의 본문 용지인 갱지를 개선하였다. 제1차 교육과정기의 45g/㎡에서 제2차 교육과정기에는 두께를 55g/㎡으로 개선한 것이다.

셋째, 판형의 경우 종래의 4·6판 대신에 국판으로 거의 전면적인 대체를 보았다.

그리고 내적 체제의 경우에는 1960년 11월에 『편수 자료 3』으로 공지된 표기상의 통일과 1967년에 마련된 ‘집필상의 유의점’으로부터 전폭적인 영향을 받았는데, 이에 반영된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집필상의 유의점’에 준거하여 내용 조직의 통일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둘째, 한자 학습에 따른 내적 체제가 변화되었다. 즉, 1964년 6월에 초등학교 4학년 이상 『국어』에 600자, 중학교 1000자, 고등학교 1300자를 혼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1970학년도에 『국어 Ⅱ』이외에서 모든 한자를 삭제하는 것으로 변환되었다.

셋째, 학교 문법과 인명, 지명을 통일함으로써 내용 전달의 혼선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제3차 교육과정기의 교과서

제3차 교육과정기(1973.2.∼1981.12.)는 1973년 2월 14일에 개정·공포된 초등학교 교육과정(문교부령 제310호), 동년 8월 31일에 개정·공포된 중학교 교육과정, 1974년 12월 31일에 개정·공포된 고등학교 교육과정(문교부령 제350호) 적용을 내용으로 한다. 이 교육과정기는 ‘학문 중심 교육과정’을 표방하였다.

제3차 교육과정은 「국민교육헌장」의 이념 구현을 방향으로 삼고, 국민 자질의 함양, 인간 교육의 강화, 지식·기술 교육의 쇄신을 ‘기본 방침’으로 삼았다. 이 방침이 교과서 편찬·발행의 지향점이었다.

제3차 교육과정기의 교과서 편찬·발행 실태는 전기(1973.2.∼1977.8.)와 후기(1977.8.∼1981.12.)로 나누어 살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전기는 과거 오랫동안 적용해 온 ‘교과용 도서 저작·검인정령’에 따랐고, 후기의 경우는 ‘교과용 도서에 관한 규정’을 새로이 적용한 구간이기 때문이다.

전기의 교과서 개발(1973.2.∼1977.8.)

이 시기는 초등학교 교과서의 경우 1973년도에 1∼3학년용, 1974년도에는 5∼6학년용의 새 교과서를 편찬·공급하였다. ‘1교과 1책주의’를 실현한 것도 전기에서였다. 한편, 1970년대 후반은 ‘교과용 도서 저작·검인정령’을 폐지하고, 1977년 8월 22일 제정·공포된 ‘교과용 도서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제8660호)이라는 새 제도로 개선하게 된다.

제3차 교육과정기는 교과서 개발이 특이하게 운영된 점이 있다. 중·고등학교 검인정도서는 ‘단일화’라는 형태의 공동 집필에 의해 ‘단일본’으로 개편한 것이 그러한 사례였다. 중학교는 1965년과 1966년에, 고등학교는 1968년에 검인정된 책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 그에 해당된다. 단일본으로 『수학』·『과학』·『체육』·『사회』·『사회과부도』·『영어』·『한문』 등 8종 16책이었다. 실업계 전문 교과서는 1972년에 검정되었는데, 『농업』 23종 81책, 『공업』 25종 55책, 『상업』 20종 135책, 『수산』 7종 8책, 『가사』가 5종 6책이었다.

후기의 교과서 개발(1977.8.∼1981.12.)

종래의 국정 및 검정 제도가 개선되었다. 즉 국정을 1종도서로, 검정을 2종도서로 변경한 것을 말한다. 이로써 1종도서의 대상이 초등학교, 중학교, 실업계 고등학교의 교과서 및 지도서로 전량화되었다. 따라서 1종도서는 연구기관 또는 대학 등에 위탁하여 편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문교부는 1977년 10월에 1종도서 개발 업무를 여러 연구기관에 위탁하였다. 해당 대학의 경우는 ‘1종도서연구개발위원회’를 구성하고, 연구진·집필진·협의진 등을 꾸렸다. 당시 1종도서는 ‘연구 개발형’, 2종도서는 ‘자유 경쟁형’이라 불렀다.

2종도서의 경우, 문교부는 1977년 7월 9일 ‘1979학년도용 교과서 제도 개선 원칙’을 발표하고, 7월 29일에 2종도서 검정 실시 방침을 공고하였다. 2종도서는 중·고등학교용 『도덕』·『국어』·『국사』만 국정이었고, 나머지는 검정도서였다. 그러나 이 공고에서는 중학교용이 전면 1종으로 전환된 상태에서 고등학교용도 21종 24책만 2종도서로 편입되는 등 대폭 축소된 것으로 조정되었다. 거기에 실업계 도서들이 전면 1종도서로 전환된 상태였다.

검정 신청 자격은 1978년 3월 말 기준으로 최근 3년간 매년 5종 이상의 도서를 발행한 출판사로 규제하였고, 검정도서는 문법, 작문 등 21종 24책이 출원 대상으로 공고되었다. 그 결과, 출판사들은 332책을 출원하였지만, 합격은 교과서 108책과 교사용 지도서 89책이었다.

이 시기의 교과서 편찬·발행 정책과 관련하여두드러진 특징은 단일본 출판을 들 수 있다. 구 교과서의 저자와 출판사에게 기득권을 주어 교과서만 새 교육과정에 따라 개편한 변칙적인 제도였다는 데 문제가 있었지만, 다각적인 모색이 추진되기도 하였다.

첫째, 연구 개발형이 도입되어 전문가와 현장 교사의 의견이 교과서 편찬 과정에 반영되었다.

둘째, 교과서의 질적 수준이 향상되었다. 특히, 외적 체제 면에서 일부 실업계 및 예능계 교과서, 사회과부도 등의 판형이 4·6배판으로 확대되었다.

셋째, 새마을, 국민교육헌장, 10월 유신, 유신 과업, 한국 민주주의 등 시대적 용어와 반공 관련 용어들이 교과서에 편입된 사례가 많았다.

제4차 교육과정기의 교과서

제4차 교육과정기(1981.12.∼1987.6.)는 1981년 12월 31일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교육과정 고시(문교부고시 제442호)에 따른 적용을 내용으로 한다. 이때부터 ‘문교부령’이 ‘문교부고시’로 바뀌었다. 이 교육과정기는 ‘국민정신 강조’에 역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국민정신 교육의 체계화, 전인교육의 강화, 과학기술 교육의 심화, 교육 내용의 양과 수준 적정화(교과목 수 축소) 등 네 가지 기본 방향이 설정되었다.

이로 하여 국민정신과 관계가 깊은 『도덕』·『국민윤리』·『국사』·『사회과』 교과서부터 개편 작업이 착수되었다. 즉, 1981년에는 142책(유치원 28, 국민학교 81, 중학교 12, 고등학교 21)을, 1982년에는 155책을 개편하였다.

제4차 교육과정기의 교과서들에는 하나의 ‘풍습’이 보인다. 6쪽 이내로 화보 편집을 허용함에 따라 건설과 국방에 관한 자료들이 다수 실린 것이다. 특히, ‘자주 국방’과 관련된 내용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편집 체제는 당시의 일반화된 교과서 체제이기도 하였다.

제4차 교육과정기의 교과서 개발에 나타난 큰 특징은 1종도서의 범위를 축소하고 2종도서를 확대했다는 점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1종도서의 경우는 새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서 신·개편을 앞두고 ‘교과용도서에 관한 규정’이 개정·공포(1982.3.11.)되었다. 이에 따라 1종도서는 초등학교 교과서와 지도서, 중·고등학교의 국어, 도덕, 국민윤리, 국사로 국한시켰다.

다음으로 2종도서의 경우는 1982년 4월 1일, ‘2종 교과용도서 검정 실시 공고’에 따라 중학교는『체육』(1·2·3)·『음악』(1·2·3)·『미술』(1·2·3)·『사회과부도』·『서예』·『한문』(1·2·3) 등의 과목으로, 고등학교는 『현대문학』·『작문』·『고전문학』·『지리*』·『세계사』·『사회과부도』·『수학*』·『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체육』·『음악』·『미술』·『서예』·『한문*』·『영어*』·『독일어』·『프랑스어』·『중국어』·『일본어』·『산업기술』·『가정』 등의 과목(*표는 Ⅰ, Ⅱ로 분편됨)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이 중학교 2종도서는 6개 교과목, 고등학교의 경우는 23개 교과목이 검정 대상이었다. 문교부는 또한 출판사의 자격 기준을 종래 “최근 3년간 5종류 이상의 도서를 발행한 실적이 있는 출판사”에서 “매년 10종류 이상의 도서 발행”으로 개정, 강화시켰다. 합격본은 종당 5종으로 제한하였다.

검정 신청은 1983년 1월 31일에 마감되었다. 당시 연 93개 출판사에서 445종의 출원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 중학교 6과목 65책, 고등학교 23종 169책의 합격본을 냈다.

한편, ‘통합 교과의 교과서’ 탄생이 주목된다. 통합 교과란 전통적인 교과 울타리를 고려하지 않고, 각 교과 내용을 필요한 대로 재구성하여 학생의 흥미 중심, 문제 중심, 특정 체제 중심으로 구성한 교과를 말한다.

통합 교과와 그 교과서는 도덕·국어·사회를 『바른 생활』로, 산수·자연을 『슬기로운생활』(1학년만)로 체육·음악·미술을 『즐거운 생활』로 책 이름을 매겨 편찬하였다. 이 중 1학년에 입학한 1개월간은 전 교과를 통합하여 『우리들은 1학년』이라는 교과서로 탄생시켰다. 이 교과서는 1994학년도까지 발행되었으며, 1995학년도부터 1학년 교과목으로 9종이 개발되었다. 즉 『바른 생활』·『생활의 길잡이』·『슬기로운 생활』·『즐거운 생활』·『말하기·듣기』·『읽기』·『쓰기』·『수학』·『수학 익힘책』으로 굳어진 것을 말한다.

제4차 교육과정기의 교과서 체제는 변동 폭이 비교적 적었다. ‘집필상의 유의점’에 ‘방침’과 ‘지침’ 등의 권위주의적인 용어들이 다수 드러나 주목된다. 이러한 설정들은 통제의 강화 현상을 말해 준다. 따라서 교과서의 기준 쪽수 범위가 10%(제3차에는 5%)로 증가되었다. 이와 같은 기본에서 체제 개선이 이루어졌다. 그 주요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부분적으로 판형의 대형화가 실현되었다. 즉, 초등학교 1, 2학년 교과서와 음악, 미술, 서예, 사회과부도 등을 4·6배판으로 키운 것을 말한다. 또 1982년 사용본인 『바른 생활』·『슬기로운 생활』·『즐거운 생활』 등이 국판에서 4·6배판으로 변형되었다.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도 크라운판으로 변형을 보았다.

둘째, 교과서의 본문 용지를 갱지(55∼59g/㎡)에서 미색 중질지(70g/㎡)로 바꿨다. 표지의 경우는 후도(엠보싱 260g/㎡)를 끌어올려 미려성과 지탱력을 높였다.

셋째, 제본 방식이 무선철()로 교체되었다. 1970년대 초반부터 도입된 이 방식은 제4차 교육과정기에 전면화되면서 ‘호부장’ 체제의 소멸을 가져왔다.

이 외에도 1982년 9월 한국교육개발원에서 「교과서 개발의 원리」 및 「중학교 교과서 개선의 방향」이라는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편집 디자인’에 관한 전향적인 의견이 제시되어 교과서 디자인에 관한 인식의 전환을 마련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

제5차 교육과정기의 교과서

제5차 교육과정기(1987.6.∼1992.6.)는 1987년 3월 31일 중학교 교육과정(문교부고시 제87-7호), 동년 6월 30일 초등학교 교육과정(문교부고시 제87-9호), 1988년 3월 31일 고등학교 교육과정(문교부고시 제88-7호) 적용을 내용으로 한다.

이 시기에는 고도 경제 성장이 지속되었고, 88서울올림픽 개최와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 등으로 국가 위상이 급격히 향상되던 때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교육계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정보화 추진에 큰 관심을 보여 교과서 신·개편 문제가 중요한 현안으로 부상되었다. 원론적인 측면에서 교육 내용은 대체로 변함이 없었지만, 급변하는 정보화 사회에서 학문적·사회적인 정황이 급진전되어 왔다는 사실을 중시하여최신 정보의 반영과 1교과 다교과서제의 실현 등은 주목되는 성과로 평가된다. 특히, ‘1교과 다교과서’ 체제는 우리나라의 교육과정사에서 처음으로 도입한 제도였다. 이 체제는 하나의 공통된 교과군을 대표적 단위 교과로 보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국어(말하기·듣기, 읽기, 쓰기)와 산수(산수, 산수 익힘책)처럼 교과서가 복수로 갈래를 이룬 형식을 말한다. 이 중에서 국어 교과서를 『말하기·듣기』·『읽기』·『쓰기』로 한 것은 ‘유창한 국어사용 능력을 갖춘 한국인다운 한국인’을 기르고자 한 데 목적이 있었다.

제5차 교육과정기의 교과서에 반영된 출판 형식은 별다른 특징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교과서에서의 편집 디자인에 관한 중요성이 한국2종교과서협회에서 주최한 ‘교과서 개선을 위한 세미나’(1992.5.1∼2.)를 통해서 재론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교과서에 반영된 출판 형식에서는 다음과 같은 큰 특징이나타난다.

첫째, 초등학교의 경우 『생활의 길잡이』 등 보완 교재 개발로 교과서의 범위를 증폭시켰다. 이 교과서들은 사실상 주교재로 전환되었다.

둘째, 전통적으로 국정도서(1종도서)였던 『농업』·『공업』·『상업』 등 일련의 실업계 보통 교과의 교과서들이 검정도서(2종도서)로 전환됨으로써 발행 범위가 재조정되었다.

셋째, 검정도서의 교과목당 합격 종수가 중학교는 5종, 고등학교의 경우는 8종으로 확대되었다.

넷째, 『정보산업』교과서를 개발하여 이 분야의 전문 역량을 기르도록 하였다. 이는 제5차 교육과정기에서 추구한 핵심 과제의 하나였다. 아울러, 실업계 전문 교과 중에서 전자 공학 분야의 교과서들(30종)을 개발했는데, 이러한 현상은 주목되는 성과라 하겠다.

다섯째, 인정도서 개발이 눈에 띄는 현상을 보였다.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사용한 『

철학』·『논리학』·『교육학』·『심리학』·『생활경제』·『종교』 등의 교과서와 방송통신고등학교와 국악고등학교의 교과서 등이 그와 같은 사례이다.

여섯째, 1980년대 후반부터 컴퓨터 지원 시스템(CAP)에 의한 입력·교정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같은 전환은 편집자가 조판과 편집 디자인을 겸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제6차 교육과정기의 교과서

제6차 교육과정기(1992.6.∼1997.12.)는 1992년 6월 30일 중학교 교육과정(교육부고시 제1992-11호), 동년 9월 30일 초등학교 교육과정(교육부고시 제1992-16호), 동년 10월 30일 고등학교 교육과정(교육부고시 제1992-19호) 적용을 내용으로 한다.

교육과정은 종전의 사례에서 보면 교육부가 고시한 국가 수준의 내용을 각 학교에 통보하는 체제였다. 그러나 제6차에서는 교육부가 고시한 교육과정 기준을 근거로 시·도 교육청에서 편성·운영 지침을 작성하여 각 학교에 제시, 지도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즉, 중앙 집권형 교육과정을 지방 분권형으로 전환하여 시·도와 학교의 자율 재량권을 확대한 것을 말한다.

또한, 학교급별 ‘교육과정 내용의 적정화’도 지향되어 중학교의 경우 제5차 교육과정기에 독립 교과였던 『국사』와 『사회』(지리·세계사·공민)를 『사회』(지리·국사·세계사·공민)로 통합했고, 고등학교에서도 『국사』를 『사회』과의 하위 교과목으로 편입시켰다. 국사교육 정책은 역대 교육과정에서 다른 관점을 보여 왔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제6차 교육과정에 의한 교과서 개발 과정은 몇 가지 점에서 새로운 모색이 이루어졌다.

첫째, 최초로 초등학교 3∼6학년용 『영어』교과서가 검정도서로 개발·보급되었다.

둘째, 특수학교용 교과용 도서에 대한 국가 차원에서의 편찬·발행이 실현되었다.

셋째, ‘자율 학습이 가능한 교과서’를 모형본으로 개발함으로써 개론식 또는 축약식의 교과서를 지양하고자 하였다. 이는 학습 부교재의 난립상을 견제한다는 목적도 있었다. 이와 함께 『환경』·『컴퓨터』·『진로·직업』 그리고 외국어 교과 중 『러시아어』 개발도 실현되었다. 이상의 내용을 좀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초등학교용 『영어』 및 테이프 교재 개발

초등학교 3∼6학년을 대상으로 한 『영어』가 1997학년도(3학년용)부터 사용되었다. 그 배경은 영어 교육의 조기 실현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수용, ‘국민학교 영어과 교육과정’을 부분 고시(교육부고시 제1995-7호, 1995.11.1.)한 것에서 비롯된다. 이로써 『영어』는 2종도서로 2000학년도에 6학년용까지 완간되었다. 이 교과서는 독본과 지도서 그리고 녹음테이프(교과서에 따른), 비디오테이프(지도서에 따른), 이렇게 4종을 1세트로 묶은 형식이었다. 이렇듯 1997년은 ‘종이’ 이외의 수단이 보완 교재로 보급된 원년이다. 즉, 같은 해 2학기부터 『국어 지도 자료』 및 『음악 지도 자료』도 테이프 교재로 냈던 것이다.

② 특수학교 교과용 도서 개발

특수학교용 교과용 도서는 시각 및 청각 장애 학생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학습 특성에 알맞도록 편찬·발행한 일련의 교육 수단을 가리킨다. 이 분야의 도서는 제5차 말(1992) 현재로 총 43책 정도였다. 이러한 실태를 개선하려 노력한 결과, 1997년 말 현재 교과서는 327책, 지도서는 89책으로 늘어났다.

③ ‘자율 학습이 가능한 교과서’ 개발

1996년 ‘자율 학습이 가능한 교과서’가 이룩된 것은 중요한 성과로 기록된다. ‘자율 학습’이란 학습자가 스스로 학습의 필요를 느끼고 문제를 발견하며 계획을 세워 실행하는 과정을 말한다.

모형 교과서로 개발된 『국어(상)』가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92년 11월이었다. 그 후 이 책은 수정·보완을 거쳐 1996학년도용 독본으로 이룩되었다. 상·하 2책이고 2001학년도까지 사용되었으며, 이후 꾸준한 개선 과정을 거쳤다. 한편, 이 모형은 1996학년도 8월 말에 합격된 일부 2종 도서들에도 적용되었으며, 다른 교과 영역으로도 확대되어 나갔다.

제6차 교육과정기의 교과서는 광복 이후로 최대 발행량을 기록하였다. 예컨대, 1997년 유·초·중·고등학교용 1종도서의 경우 1,585책에 1억 1009만부(특수학교용 478책 12만부 포함)였고, 2종도서는 1,359책에 4054만 7000부로 집계되었다. 그리하여 1종·2종 도서 총량이2,944책 1억 5063만 7000부로 나타났다. 제6차 교육과정기의 교과서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들 수 있다.

첫째, 초등학교 3∼6학년용 『영어』를 개발하는 등 초유의 형식이 선보였다. 이는 초등학교용 최초의 검정 도서이기도 하다.

둘째, 『국민윤리』를 『윤리』로 변경하였다. 이로써 『윤리와 사상』·『전통윤리』·『시민윤리』등 3개 분야로 분화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셋째, 중학교용 『환경』과 고등학교용 『환경과학』·『환경보호』·『환경기술』 등이 발행되었다. 이 또한 의미 있는 진전이라 하겠다.

넷째, 검정 심사에 중학교용은 8종 이내로, 고등학교용은 절대 평가 방식이 도입되었다. 이로써 고등학교용의 경우 합격 종수가 최대 18종에 이르기도 하였다.

다섯째, 『영어』와 『한문』 등의 어휘 검색 및 선정 작업에 전산 방식이 도입되었다. 컴퓨터의 연산 기능을 교과서 편찬 및 심사 업무에 처음으로 적용한 것이다.

제7차 교육과정기의 교과서

제7차 교육과정기(1997.12.∼2007.2.)는 1997년 12월 30일 초·중·고등학교 교육과정 이 개정·고시(교육부고시 제1997-15호)에 따른 적용을 내용으로 한다. 이 교육과정은 2000년부터 2004년까지 연차적으로 적용되었다. 21세기의 세계화·정보화 시대에 대비하여 ‘자율과 창의에 바탕을 둔 학생 중심 교육과정’으로 편성되었다.

제7차는 국민 공통 기본 교육과정으로 설계되었는데, 이에는 교과, 재량 활동, 특별 활동이 큰 범위이다. 교과는 『국어』·『도덕』·『사회』·『수학』·『과학』·『실과』(『기술』·『가정』)·『체육』·『음악』·『미술』·『외국어』(『영어』) 등 10개 범위이다. 다만, 초등학교 1∼2학년 교과는 『국어』·『수학』·『바른 생활』·『슬기로운 생활』·『즐거운 생활』·『우리들은 1학년』으로 되어 있다.

시간(단위) 배당 기준은 초등학교 1학년에서 고등학교 1학년 과정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연계 단위로 보아 10학년 체제로 묶은 범위이다. 제7차 교육과정은 회차() 형식으로 운영된 마지막이면서 ‘국민 공통 기본 교육과정’을 처음 적용한 구간으로 존재하였다. 이 시기의 교과서의 발행 실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국정교과서

국정도서로는 초등학교용 전 교과서와 중·고등학교용 『국어』·『도덕』·『국사』 교과서와 고등학교용 일부 전문 교과 및 특수학교용 교과서들이다. 제7차 교육과정기의 사실상 마감해인 2007년에 사용된 유·초·중·고등학교용 국정교과서 발행 현황을 보면 979책에 1억 1074만 8000부(특수학교용 269책 116천 부 포함)였다. 이는 제6차에 비하여 크게 줄어든 실정이다(앞의 제6차기 통계 참조). 그렇게 된 데는 다종권의 전문 교과들에서 통폐합이 이루어졌고, 국정도서의 검정화가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국정도서의 발행에 일대 전환을 본 것은 2002년부터이다. 대통령직속기구로 설치(1998. 4.18.)된 규제개혁위원회의 결정에 의해 실현된 일련의 개혁을 말한다. 이에 따라 국정교과서 발행권 부여를 위한 사업 시행 공고(교육인적자원부 공고 제2001-32호)로 이어졌다. 이로써 중·고등학교용 『국어』·『도덕』·『윤리』·『국사』 등 국책 교과의 교과서들이 다원화 발행으로 전환되었다.

검정교과서

교과서의 검정은 제6차 교육과정기까지 교육부 주관으로 검정위원회를 구성하여 실시했으나, 제7차에 들어와서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과 교육인적자원부가 함께 실시하는 체제로 변경되었다.

제7차 교육과정기의 검정도서는 2007년 현재 중학교 708책, 고등학교 893책 총 1,601책으로 나타났다. 이는 1997년의 책수보다 242책이나 늘어난 실적이다. 그렇게 된 데는 국정도서의 검정화 전환이 거듭되었고, 신설 교과목들 또한 점증되었기 때문이다.

인정교과서

제7차 교육과정기에 사용된 인정교과서는 다음과 같이 나뉜다. 1. 학과 신설 및 교과목 개설로 교과용 도서가 없는 경우, 2. 중·고등학교 교양 선택 교재(『종교』·『교육학』·『철학』·『논리학』·『심리학』·『생활경제』·『생태와 환경』 등), 3. 일반 교과서 또는 지도서의 사용이 곤란한 경우, 4. 검정도서는 있으나 보완 교재가 필요한 경우 등이다. 제7차에서는 ‘인정도서심의회 심의 없는 인정도서’라는 제도를 도입한 바 있다. 이 교육과정기 내에서 개발된 인정도서는 1,468책에 이른다. 또한 교과서 출판 형식에 나타난 특징은 여러 면에서 큰 개선이 있었다. 만화와 풍부한 삽화의 제시, 그리고 신문, 인터넷, CD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한 유기적인 학습을 유도하는 등 창의적 편집이 반영된 것이 그러한 사례이다.

이렇듯 교과서 개발은 이전보다 훨씬 개선된 모습을 보였다. 예를 들면, 수학과에서 『이산수학』(2002학년도부터 사용)의 신편이라든지, 윤리과의 계열성도 눈에 띈다. 즉, 『시민윤리』·『윤리와 사상』·『전통윤리』(2002학년도부터 사용)로 정립을 보았다. 그런가 하면, ‘와(과)’의 대등 접속 조사로 양항을 이은 명칭의 교과서들도 다수 출현하여 흥미를 끌게 하였다. 국정도서로 개발된 『생활과 기술』·『현대과학과 기술』·『숲과 인간』(이상 2003학년도부터 사용) 등이 그러한 사례들이다.

검정도서 사례로는 『정보사회와 컴퓨터』·『인간사회와 환경』·『음악과 생활』(이상 2002학년도부터 사용) 등을 들 수 있다. 또 가사 실업계로 『피부 관리』·『디스플레이』·『헤어 미용』(2003학년도부터 사용) 등도 생활의 편의를 다룬 교재들이어서 주목된다.

외적 체제의 개선 면에서도 지질 향상과 인쇄·장정의 고급화, 판형의 전면 4·6배판화, 전면적인 컬러화가 실현되었다. 편집자 실명제(2000)의 도입도 진일보한 발상이라 하겠다.

2007 개정 교육과정기의 교과서

2007 개정 교육과정기(2007.2.∼2009.12.)는 2007년 2월 28일 교육인적자원부 고시(제2007-79호)에 따른 교육과정 적용을 내용으로 한다. 이 시기에서 크게 달라진 정책이 교과서의 인정화 확대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4차에 걸쳐 ‘교과용 도서의 구분 고시’가 이어졌다.

1차 고시는제2007-81호(2007.6.22.)로 초등학교에서 『실과』·『체육』·『음악』·『미술』(5∼6학년)·『영어(3∼6학년)』 교과서의 검정 전환과 중·고등학교용 『국어』『도덕』·『사회』(『역사』) 교과용 도서를 검정 전환하였다. 2차 고시는 제2007-82호(2007.8.7.)로 검정도서인 중등학교 지도서를 인정도서로 변환 고시하고, 국정도서 중 일부를 검·인정으로 전환하였다.

3차 고시는 제2008-147호(2007.8.28.)로 중등학교용 『국어』·『도덕』·『사회』·『역사』의 지도서는 ‘심의 있는 인정도서’로, 그 외 지도서는 ‘심의 없는 인정도서’로 전환하였다. 4차 고시는 제2009-4호(2009.1.21.)로 전문 교과 중 과학계열, 예술계열, 국제계열, 외국어계열(필수과목은 제외) 모두가 인정도서로 전환되었다.

이와 같이 2007 개정 교육과정기는 기존 국정도서의 검정화 확대, 인정도서권의 확대를 지향한 것으로 요약된다. 또 교과서의 상시 검정제 도입, 검정 기준 및 판정 원칙 개선을 추구한 것도 중요한 성과라 하겠다. 이로써 과거 오랫동안 이어온 교과용 도서의 발행 구분을 개선하고자 한 획기적 전환점을 그었다.

10. 2009 개정 교육과정기의 교과서

2009 개정 교육과정은 2009년 12월 23일에 고시(제2009-41호)되었다. 이 교육과정은 단위 학교의 교육과정 편성과 운영에 따른 자율성 확대와 창의적 교육을 강조하였다. 이와 함께 인정도서의 확대와 관련하여 새로운 전환이 이루어졌는데, 그 정점이 ‘2010년 교과서 선진화 방안’(2010.1.12.) 발표였다. 이는 “미래 사회에로의 변화를 선도해 나갈 창의적 인재 육성을 목적”으로 현행 교과서 시스템을 인정도서 중심으로 변환한 정책이었다. 이에 대한 검토는 교과서 제도에 대한 전향적인 파악에서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교과서를 편찬하는 주체가 누구인가에 따라 국정과 검·인정으로 나뉘는데, 세계적인 추세로 보아 인정제가 대세임을 중시한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정부의 규제 완화와 시·도의 자율성이 적극 반영되는 인정도서 정책으로 확대하게 되었다. 이는 교과서 편찬 과정에서 자율성과 창의성을 높이자는 데 목표를 둔 것이다.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초·중·고등학교의 교과용 도서는 모두 589종에 달한다. 이 중 국정도서는 53종(초등학교용 37종, 동 교사용 지도서 16종), 검정도서는 42종(초등학교용 9종, 중학교용 6종, 고등학교용 18종, 초등학교용 지도서 9종), 인정도서는 494종(중학교용 20종, 고등학교용 450종, 중학교용 지도서 24종)으로 되어 있다. 이로 보아 인정도서의 경우 전체 교과용 도서(589종) 중 84%(494종)를 점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인정도서가 교과서 정책의 주류로 들어선 것이다.

인정도서는 민간 출판사나 외부 공공 기관에서 개발하여 시·도 교육감에게 출원, 선정 및 사용의 수순을 밟는 형식이다. 이렇게 하여 선정된 교과서들은 중학교 2013년, 고등학교 2014년에 각각 학교 현장에서 적용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현황

우리나라의 교과서 제도는 국정도서, 검정도서, 인정도서의 세 가지 유형으로 운영된다. 따라서 국가에서 정한 법규 및 국가 교육과정 체제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정부 주도형이다.

교과서 제도는 2009년 1월에 ‘2009 개정 교육과정’이 고시되면서 인정도서 주류 정책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획기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최근 5년간(2010∼2014)의 초·중·고등학교용 교과용 도서 발행 실태를 보면 다음과 같다.

· 2010년: 국정도서 952책 97,547부(이하 ‘부’: 천부)

검정도서 1,969책 52,443부

· 2011년: 국정도서 1,062책 93,330부

검정도서 2,558책 78,126부

· 2012년: 국정도서 1,023책 79,707부

검정도서 1,895책 70,003부

인정도서 1,608책 3,304부

· 2013년: 국정도서 726책 70,758부

검정도서 1,580책 46,227부

인정도서 1,433책 11,985부

· 2014년: 국정도서 781책 61,495부

검정도서 1,459책 37,529부

인정도서 1,845책 19,377부

이제 인정도서가 주류 교과서로 자리매김 되면서 지역 교육청과 학교 그리고 교사의 자율권이 넓어졌다. 그런데 간과해서는 안 되는 문제는 너무 다급하게 달려왔다는 지적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교과서 백년대계를 위한 전략에 다시금 신중한 점검이 요청된다.

2000년대에 들어와 교과서의 출판 형식은 급진적인 변환을 보였다. 즉, CD-ROM 체제를 적용한 것이 그러한 사례이다. 이 모형은 2001년에 초등학교 3∼4학년, 2002년에 5∼6학년용으로 『초등영어 CD-ROM』이 실현되었다.

2011학년도부터는 기존의 서책형 교과서와 함께 CD 형태로 e-교과서를 일부 도입(초·중·고 전 학년 『국어』·『영어』·『수학』)한 바 있다. 이로써 서책형 교과서는 학교에서, e-교과서는 가정에서 학습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러나 e-교과서는 접근성 및 활용성에 문제(사용 기피, 무관심 등)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디지털 교과서 2006년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 용역으로 추진된 초등학교용 『수학』이 첫 모형으로 실현되었다. 이후 디지털 교과서의 기능 및 활용 방안을 설정하는 작업(1단계: 2007∼2009)에 착수하였다. 이를 위해 원형(prototype)을 고안하여 상용화 기반을 조성(2단계: 2010∼2012)한 다음, 전문가 및 학교 현장의 평가를 통해 활용성이 높다고 예측되는 교과목을 선정, 상용화(3단계: 2013∼)한다는 계획이었다.

원형 개발 추진 교과목은 기개발된 『수학』과 『체육』(실외 수업용)을 제외한 『국어』·『도덕』·『영어』·『사회』·『과학』·『음악』·『미술』·『실과』였다. 당시 이 교과목들은 기존의 종이 교과서를 디지털화한 것으로 페이지나 내용 변경이 없는 고정형으로 구현되었다. 이후 이 모형은 꾸준히 기술적인 보완을 거쳐 일부 연구학교에서 실험하고 있다. 중·고등학교의 경우도 제한적으로 디지털 교과서 적용을 실험 중이다.

향후로 디지털 교과서가 학교 현장에 주된 학습 매체로 도입된다면 기존의 교과서와 양립하게 될 것이다. 서책형 교과서는 원론을 제공하고, 디지털 교과서는 학습 정보의 변화를 적시에 반영하는 역할로 상호 보완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의의와 평가

교과서는 한 나라의 국민이 추구하는 이념과 이상을 제시한 교수·학습 수단이다. 그런 교과서로 말하면 교육과정에 구현된 보편한 지식 내용과 경험의 체계를 쉽게 편집해서 학습자가 기본 자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마련된 길잡이이다. 이 때문에 교과서를 가리켜 표준적 학습 매체인 동시에 제도적 교육 수단이라 일컫기도 한다. 교과서의 자유 발행, 자유 선택 관점에서는 다양한 학습 도구 중에서 하나의 참고 자료라 보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교과서 역사는 유구하다. 이미 4세기부터 교육 기관이 존재하였고, 거기에서 다양한 교재들이 사용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지식 내용만을 전하는 역할로부터 지양하여 언행의 신실함과 나아가 참된 인격을 배양케 하는 장전()으로 존재하였다.

교육 수단으로서의 우리나라 교과서사는 장구한 전통 시대를 거쳐 서구 문물이 유입되기 시작한 개화기로 이어졌고, 그런 끝에 식민 매체로 수난을 당하는 등 질곡도 겪었다. 그러다가 광복을 맞이하면서 주권 교육 수단으로 부활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 같은 역사적 과정에서 분명한 것은 교과서야말로 시대의 거울로 역할해 왔다는 보편적인 징험()이다. 여기에서 그 나라와 그 민족, 그 시대의 선도 수단 또한 교과서임을 재확인하게 된다.


.출처: 교과서[敎科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5]. 종합적 필자 의견


필자는 한국의 학교교육에 의거, 한국사,세계사, 한문.국민윤리(삼강오륜이나 인의예지신, 충효등 유교교육 위주)및, 국내법.국제법등을 종합하여 한국과 세계의 대학 및 종교들을 판단해왔음. 따라서 한국사는 성균관(해방후 성균관대로 정통승계), 세계사는 한나라 태학.국자감(원.명.청의 국자감은 이후 경사대학당, 베이징대로 승계됨), 중세유럽에 형성된 서유럽의 볼로냐.파리대학을 교과서.학술서적의 기득권 대학으로 인정해주면 학술적으로 무리가 없다고 판단함(그러나 강행법 성격의 주권은 국가주권 개념을 가진 나라에는 없음).


종교로는 황하문명을 이어받은 중국 한나라시대 세계종교로 성립된 유교(한나라시절 이미 중국.한국.베트남.몽고등에 걸쳐 세계종교화 된 이후, 중국 화교들이 진출한 아시아의 다른나라 일부지역 및 대만.싱가포르가 유교권 국가나 지역들임)가 세계종교화 되었던 적이 있어서 지금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음. 


그리고 원래는 에게문명에서 비롯된 헬레니즘문화를 가진 로마제국이었는데, 로마제국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세계종교화 된 교황중심 서유럽의 로마가톨릭(특히 대항해시대 이후 서유럽국가들이 아메리카,오세아니아등 신대륙등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로마가톨릭의 교세가 확산되어왔음)이었음. 중국.러시아.한국(한국의 경우 한국을 어버이나라로 섬기던 오랜 문명후발국 일본에 의해 일본 강점기를 겪음).일본.태국등을 제외한  아프리카와 아시아 국가들을 식민지화하는 서유럽의 지배시기를 거치면서 로마가톨릭은 더욱 더 큰 세계종교로 발돋움하였음.  


. 세계사와 한국의 대학들에 대한 의견은 다음과 같습니다. 


- 다 음 -


. 정사(正史)인 세계사의 볼로냐.파리대학에 대한 강력한 배척이나 삭제 및 이론(異論)은 없어왔음. 한편 세계사는 한국에 강행법적인 주권은 없음. 지역적으로 한국사의 경우, 성균관에 대(大)자를 더붙인 성균관대가 법으로 이의없이 최종 확정되는데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어왔음. 물론 국사에 나오는 성균관의 정통승계대학이 해방후의 성균관대였던건 분명한 사실이며, 향교관련 법률등에 의거 성균관대가 성균관.향교와 같이 보호되는 과정도 있어서, 한국에 주권없고 학벌없는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추종세력들과 대중언론의 거센 도전에도 불구하고 해방이후 성균관대가 조선.성균관의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정통승계대학인것은 관습적.사회적으로는 맞으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발간이후에 형성된 성균관대의 자격(대통령령에 의해 조선.대한제국 성균관의 정통 승계)처럼 강력한 보호는 받지 못해왔었음. 그러함에도 2차대전 당시 일본이 항복하면서 받아들인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등에 의거 일본 강점기 잔재인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의 한국내 주권이나 학벌은 없어왔기에 대중언론에서 서울대.연세대(일본 강점기 연희전문 후신 연세대).고려대(보성전문을 인수하여 친일파 김성수가 고려대로 변경)의 카르텔은,한국영토에 주권없고 학벌없는 일본강점기 잔재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침략.반란 형태의 도전자들에 불과해왔음.    


한국 대통령령에 의해 발행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성균관의 정통 승계대학이 해방후의 성균관대로 법적으로 최종 확정되는것은, 그리

순탄하지 않아왔음. 볼로냐.파리대학처럼 원래 이름 그대로 유지하여 오는 대학의 경우에는 큰 문제가 없었음. 그러나, 승전국이나 한국 임시정부처럼 일본.독일.이태리등의 추축국에 선전포고한 강력한 국가주권개념을 가진 나라들의 경우에는, 추축국과 동조세력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세계사는 해당국에서 강행법성격의 주권을 형성할 수는 없으며, 단지 학술적 개념 정도에 해당됨.  

한국의 경우, 국내법과 국제관습법상 받아들여 지지 않던 을사조약(강제.불법의 을사조약이 무효라, 국내법상 한일병합도 무효. 국제법으로도 그렇다고 할 수 있음)이후, 일본에 나라를 강점당한 한국의 성균관이 경학원 및 명륜전문학교등으로 강등되는 고난의 과정이 있었음.

또한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을 받아들여  항복한 일본의 주권이 한국영토에 없는게 상위법인 포츠담선언 8항의 내용인데[포츠담 선언 8항. 8) 카이로선언의 조항은 이행될 것이며 또 일본국의 주권은 本州, 北海道, 九州, 四國 及 我等이 決定할 諸 小島에 국한됨],

하위법인 미군정령으로 경성제대가 서울대가 되고, 다시 서울대를 국립대로 하면서, 대중언론등에서 주권없고 학벌없는 패전국 잔재 일본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등(그리고 서울대의 추종세력들)이 다양하게 국사 성균관의 정통승계대학인 성균관대에 도전해 왔지만, 조선.대한제국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을 승계한 성균관대의 자격은 국사교육에 나오는 성균관의 자격에 연계된 특성이 있어서, 대중언론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해방이후 지금까지 한국 최고대학은 성균관대였음.      

상위법이 포츠담선언이고, 하위법이 미군정령이라 미군정령에 의해 서울대가 되고 국립대가 된 서울대는, 상위법인 포츠담선언 8항의 내용대로, 항복당시의 기준대로, 적용되어 한국영토에 주권이 없고 학벌이 없어야 옳음[일본국의 주권은  本州, 北海道, 九州, 四國 及 我等이 決定할 諸 小島에 국한됨].

따라서 을사조약 무효나 한일병합무효(을사조약이 무효라)의 대한제국 국내법기준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 선전포고(한일병합 무효. 불평등조약인 을사조약의 무효등 선언)와 더불어, 일본이 항복하면서 받아들인 포츠담선언에 의해, 일본강점기 당시에 형성된 경성제대등은 기존에 한국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그 정통승계대학이 해방후의 성균관대)의 최고대학자격을 훼손하지 않아야 됨.  

  

해방후 미군정령으로 공자묘 경학원을 성균관으로 환원시키기로 한 이후, 한국 유림[유림(儒林)은 그 당시 한국에서 가장 전통신분이 높던 계층.조선 대한제국은 황제.왕부터 기본적으로는 유생(儒生)임]들이 전국 유림대회에서 성균관의 정통승계 차원에서 성균관대를 설립키로 하여, 향교관련 법률등으로 성균관(제사를 전담하는 기구로 됨)과 성균관대(대학교육 전담)의 특성을 구분하여 온게 있었음.

성균관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여 성균관의 최고대학 자격을 승계해왔다면, 큰 무리가 없었을텐데, 성균관에 대자를 더 붙여 약간 복잡하게

되어온 과정도 있었음.

미군정 법령이 공자묘 경학원에서 성균관으로 환원한 성균관의 대학자격에서는, 해방당시 전국 유림대회 결의대로, 성균관대를 미군정에 대학으로 등록하고 성균관은 제사만 전담하여 온 관례를, 제사전담기구인 성균관이 깨뜨리지 않아왔음(그래서 미군정이 환원시킨 성균관의 자격은, 대학교육에서는 성균관대, 제사는 성균관으로 분리해온 관례를 따라왔다고 할 수 있음). 

그러다가 대통령령에 의해 발행된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에서 성균관의 정통승계 대학이 성균관대이고, 6백년 역사를 법으로 인정받으며, 국내외에서 다시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것.   

. 필자 주 1). 한국사나 세계사의 정사(正史)는 옳기때문, 그대로 기득권을 인정해주면 적당함. 세계사의 경우 강행법적 주권은 한국 영토에 없으며, 단지 학술적 의견정도에 해당됨.   

[6]. 필자는 한국의 국내법(대통령령에 의해 발간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의해 서술된 성균관대(국사교육에 나오는 성균관의 정통 승계. 국내외에서 6백년 역사 인정)와 서강대(교황제도의 오랜 자격과 전통. 서강대는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물게 교황윤허 대학중 하나)의 자격을 한국사나 세계사의 학설(교황제도의 오랜 자격과 전통)과 연관시켜 Royal.Imperial대로 알려왔습니다.   


1]. 1991년에 전권이 출간되었다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규정하는 성균관대. 두산백과에서 규정하는 성균관대. 그리고 서강대(교황윤허에서 시작됨). 


1. 미군정기 이후의 한국정부에서 조치한 내용(대통령령에 의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발간)으로, 정부입장을 알려드립니다.


가. 정부출연 연구기관 자료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에 대한 학술적 서술내용.

1). 정부출연 연구기관인 한국학 중앙연구원과,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대한 설명.

a. 한국학 중앙연구원(韓國學 中央硏究院).

한국문화 및 한국학 제분야에 관한 연구와 교육을 수행하는 정부출연 연구기관.이는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의 설명자료임.

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韓國民族文化 大百科辭典).

........
발간된 경위를 보면, 1979년 9월 25일 대통령령 제 9628호로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편찬사업 추진위원회 규정>을 공포하였고, 동 규정에 근거하여 1980년 3월 18일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편찬사업 담당부서를 두었으며, 1980년 4월 10일 제 1차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편찬사업 추진위원회의 개최를 시작으로, 1991년까지 12년의 기간동안 3백여명의 편집진과 3천 8백여명의 집필자가 참여하였다.  


...1988년부터 시안본을 검토 수정하여 1991년에 전권이 출간되었고, 1995년에는 보유편이 28권으로 나왔으며, 일부 개정증보를 거쳐 2001년에 CD-ROM 개정증보판이 발간되었다. 2005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은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2008년부터 2017년까지 10개년에 걸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인터넷에 온라인 서비스되고 있다...



2.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이칭별칭

성균관대, 성대

  • 유형

단체

  • 시대

현대

  • 성격

대학교, 사립종합대학교

  • 설립일시

1398년

  • 설립자

김창숙(金昌淑)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천천동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


개설

성균관대학교의 연원은 1398년(태조 7) 국립고등교육기관으로 설립된 성균관에서 시작된다. 성균관은 조선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으로서 국가에 필요한 유능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전통적인 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연원 및 변천

갑오경장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1895년 성균관에 설치된 3년제 경학과()가 성균관대학교의 근대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시작이다. 성균관은 제향 기능을, 경학과는 교육 기능을 담당하여 유학 경전을 위주로 교육이 이루어졌으나 역사학·지리학·수학 등 근대적인 교과목도 부과되었다.

그 밖에 교육의 목적, 교육과정의 운영, 입·퇴학 절차, 각종 시험 및 학생의 특전, 학기제 채택 등 전통적 교육기관에서 근대학교로의 제도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국권상실 뒤 일제에 의하여 경학원()으로 개편되어,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주로 문묘()의 제향을 담당하는 기관으로서의 기능만 수행하게 되었다.

1930년 경학원에 로 교명을 회복하였다.

1946년 유림대회()가 개최되어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 설립을 위한 성균관대학기성회가 조직되고 독지가 이석구()가 재단법인 학린사()의 토지를 희사하였다. 이에 김창숙()의 주도로 종전의 명륜전문학교의 재단을 병합한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이 발족하면서 같은 해 9월 정규 단과대학인 성균관대학이 인가되었다. 문학부와 정경학부를 설치하고, 초대 학장에 김창숙이 취임하였다.

1953년 2월 종합대학인 성균관대학교로 승격되어 문리과대학·법정대학·약학대학의 3개 단과대학과 1개 대학원의 편제를 갖추었고, 같은 해 6월 각 도의 향교재단()에서 재산을 기부함에 따라 재단법인을 성균관으로 확대해 개편하였다.

1958년 야간대학을 설치하였으며, 1963년 재단법인을 학교법인 성균관대학으로 개편하였다. 1965년 삼성문화재단이 대학의 운영권을 인수하였다가 1979년 1월 다시 봉명재단()이 학교의 운영을 맡게 되었고, 경기도 수원시 천천동에 자연과학캠퍼스을 신축하였다.

1981년 8월 자연과학캠퍼스에 이과대학·공과대학·농과대학·약학대학 등을 설치하였고, 같은 해 11월 교육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83년 11월 경영행정대학원을 경영대학원과 행정대학원으로 분리하고, 1987년 11월 유학대학원, 1990년 2월 산업과학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97년 3월 의과대학, 9월 의학연구소, 10월 디자인대학원, 12월 경영대학원을 신설하였으며, 1998년 1월 건학 600주년 공식기 게양 및 현판 제막식 행사를 거행하고, 도봉선수촌 신관을 준공하였다. 같은 해 4월 북한 고려성균관과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하고, 6월 교수업적 평가제를 도입하였으며. 8월 도서관 100만 장서 확보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9월에는 건학 6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으며, 기념행사로 세계총장학술회의, 조선시대 성균관 재현행사, 동양학 학술회의, 연극공연, KBS 열린음악회 등을 개최하고, 『성균관대학교 600년사』를 발간하였다. 1999년 3월 자연과학캠퍼스에 의과대학 건물을 준공하고, 5월 법학도서관을 개관하였다....

                  

.출처:성균관대학교[SUNGKYUNKWAN University, 成均館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 출판사들이 편찬하는 백과사전류에 나타난 성균관대학교에 대한 학술적 서술내용들.

1). 두산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成均館大學校


  • 사립

  • 특성

    종합대학

  • 개교일

    1398년

  •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로 25-2(인문사회과학캠퍼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서부로 2066(자연과학캠퍼스)

  • 교목

    은행나무

  • 면적(㎡)

    627,025

  • 홈페이지

    www.skku.ac.kr


성균관은 고려 때부터 있었지만 조선 개국 후 1398년(조선 태조 7)에 현 명륜동 캠퍼스에 설립된 국립 최고학부 성균관의 전통을 계승하여,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1895년 칙령으로 3년제 경학과(經學科)를 설치한 것이 그 시초이다. 경학과는 유학 경전을 위주로 교육하되 역사·지리·수학 등 근대적인 교과목을 부과하여 근대 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국권피탈 후 일제의 탄압으로 교육기능을 박탈당하고 경학원(經學院)으로 축소되었다. 1930년 민족의 교육열 고조로 일제는 부득이 명륜학원을 설립하였고, 1939년 명륜전문학교로 승격시켰다. 

8.15광복이 되자 1946년 재단법인(현재는 학교법인)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정규 단과대학으로 발족하였으며, 초대학장으로 김창숙(金昌淑)이 취임하였다. 교훈은 인·의·예·지이다.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고, 1979년 수원에 자연과학캠퍼스를 신축하였다. 1996년 11월에 삼성재단이 성균관대학교 재단을 인수하고 운영해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하 생략.... 



그리고 교육학사전이나, 종교학사전, 학습사전도 성균관대가 성균관에서 이어진 대학이라고 학술적의견을 가지고 있고, 성균관대와 제사기구인 성균관도 그렇게 일치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서강대는 교황윤허 대학으로 그 Royal대 역사가 인정되고 있습니다.


....

1960년 2월 재단법인 한국예수회에서 서강대학으로 설립인가를 받아 같은 해 4월 개교하였다. 1948년 한국 가톨릭교회의 발의와 교황 비오(Pio) 12세의 윤허로 대학 설립이 기획되었고, 예수회 게페르트(Theodor Geppert) 신부의 주도로 1956년 재단법인 한국예수회가 발족되면서 대학의 설립에 이르게 되었다.

초대 학장에 킬로렌(K. E. Killoren) 신부가 취임하였으며, 영어영문학과·사학과·철학과·수학과·물리학과·경제학과를 두었다. 1963년 독어독문학과·생물학과·경영학과를 신설하였다. 1964년 국어국문학과·화학과를 설치하고 제1회 졸업생 62명을 배출하였으며, 같은 해 4월 「사립학교법」에 따라 재단법인 한국예수회가 학교법인 서강대학으로 개편되었다.


.출처:서강대학교[Sogang University, 西江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한국내 Royal대학들인 성균관대나 서강대에 대한 국사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세계사도 참조)등, 정부자료를 위주로, 자료인용을 하면서 강제.불법의 일본 강점기 잔재세력들이 준동하는 상황에 대처하고 한국의 전통주권이나 세계사의 학문적 정설(定說)을 중심으로 교육.연구자료로 활용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 첨부자료.


1. 自然人에 대한 공평한 능력우대와 달리 法人體로볼때, 일본 강점기 잔재 경성제대.관립전문학교 후신 서울대등은  한국영토에 주권없고 축출해야 할 강점기 잔재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http://blog.daum.net/macmaca/732


2. 한국 최고(最古, 最高)대학 성균관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성균관대.     

http://blog.daum.net/macmaca/2325     

 


 

3. 성균관대,개교 6백주년 맞아 개최한 학술회의. 볼로냐대(이탈리아), 파리 1대(프랑스), 옥스포드대(영국), 하이델베르크대(독일),야기엘로니안대(폴란드) 총장등 참석. 

   

http://blog.daum.net/macmaca/1467




4. 일본항복후,포츠담선언문 8항에 의해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기타 동국대,전남대.경북대.부산대.서울시립대)의 한국내 주권이나 학벌은 없어왔음. 한편 국제관습법상 세계사의 정설(定說)은 그대로 존중해 주어야 함.


http://blog.daum.net/macmaca/2375  



5. 종교인구 조사를 어떻게 해도, 응답자가 자기종교를 어떻게 표기해도 한국인은 모두 유교도임.

http://blog.daum.net/macmaca/348


 


2018.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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