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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다산정약용의 대하여...
ob**** 조회수 556 작성일2009.06.18

제가 초3인데요.

미술시간이 내일인데 미술시간에 다산정약용의 관련이있는 캐릭터그리기,병풍만들기를 한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저는 병풍을 만드려는데 선생님께서 준비해오라고 하셔서...

다산정약용의 관련있는 내용은 모두 다 써주세요!!!

배끼지 마시고요... 한줄이라도 괜찮아요.

그러니까 님들이 갖고있는 지식을 나눠주세요!!!

부탁드립니다.

(1줄도 내용이 좋으면 채택 가능해요^^)

채택추가 내공은 20입니다!!!

열심히 써주세요. 이상한 글들은 (예: 내공냠냠,니가 알아서해..-_-;;등등)←이런것은 않됨.

신고접수갑니다.철저히 지켜주세요. 많이 지식을 나눠주세요!!

그럼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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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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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은 실생활의 유익을 목표로 한 새로운 학풍인 실학을 집대성한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그런 다산의 명성에 걸맞게 그의 저서를 보면 정치, 경제, 역리, 지리, 문학, 철학, 의학, 교육, 군사, 자연과학 등 거의 모든 학문 전반에 대해 고루 공부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저서들은 그 깊고 오묘한 학문적 내용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도 여러 학자들의 연구 과제가 되고 있다.

 
정치
- 경세유표 (전 48권) - 1817년
국가 기구 전반에 개혁 원리를 밝혀놓은 책이다.조선의 현실에 맞춰 각종 행정 기구와 국가 경영 일반에 관한 모든 제도와 법규에 대해 개혁의 당위성과 기존 제도의 불합리점 등을 아주 논리적이며 실증적으로 설명했다. 1822년에 책이름이 방례초본에서 경세유표로 바뀌었으며 편집과정에서 44권 15책으로 줄어들었다.
 
- 목민심서 (전 48권) - 1818년
백성을 다스리는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힌 책이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책을 포함해 백성을 다스리는 것과 관련된 모든 책들의 자료를 뽑아 엮었다. 조선 후기 지방 관리들의 폭정과 폐해를 뿌리 뽑고 민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어졌다.
 
- 흠흠신서 (전 30권) - 1819년
형벌을 신중히 처리하라는 뜻의 흠흠신서는 수령의 중요한 임무에 하나인 재판을 다른 책이다. 재판은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사안임에도 재판의 책임자인 수령들이 법률과 재판하는 법에 어둡다보니 문제점이 많았다. 이에 형법 연구서이며 살인 사건의 실무 지침서격인 흠흠신서를 집필하였다.
 
 
지리
- 아방강역고 (전 10권) - 1811년
단군조선부터 시작해 우리나라 역대 국가들의 연대표와 지리를 고증해놓은 역사지리서이다.
 
- 대동수경 (전 4권2책) -1814년
외조부인 윤두서의 <조선지도>를 참조하여 강 주변의 지리를 자세히 고증하고 설명해놓은 지리서이다. 그러나 북한 지역의 수로만이 집필되어 있다.
 
 
의학
- 마과회통 (전 6권3책)
조선 후기에 이몽수의 <마진방>과 허준의 <병역신방> 등의 저술을 참고로 하여 엮은 마진(홍역) 치료에 관한 책이다. 다산이 직접 걸렸던 병이었을 뿐만 아니라 6명의 자식의 목숨을 빼앗긴 홍역에 대한 연구서로 당시 조선에 유행한 마진의 증세를 관찰하여 치료법을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교육
- 이담속찬 (전 1권1책)
명나라의 왕동궤가 지은 책인 <이담(耳談>에 수록된 170여 조의 속담에 한국 고유의 속담 241수를 합쳐 수록해 놓은 책이다.
 
- 제경
강진 유배 때에 <효경>과 <소학>을 바탕으로 새로 엮은 아동들이 가져야 할 예의범절을 담은 구절을 뽑아 만든 어린이용 윤리교과서이다.
 
 
- 아학편
다산은 <천자문> 그리고 <소학>과 같은 기존 한문교재들의 내용이 쉽게 배우기에는 지나치게 어렵고 조선의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음을 알고는 새로운 교재 편찬에 나섰다. 그래서 1804년에 천자문을 대신할 <아학편>을 짓게 된다.

선생의 자(字)는 미용(美庸) 또는 용보(頌甫), 호(號)는 사암(俟菴), 당호(堂號)는 여유(與猶)이다. 부친 압해 정씨(押海 丁氏: 현재 나주 정씨로 불리 움) 재원(載遠)은 음직(蔭職)으로 진주목사(晋州牧使)까지 지냈고, 모친 숙인(淑人) 해남윤씨(海南尹氏)는 고산 윤선도의 후손인 공제 윤두서의 손녀로서 영조38년(1762) 6월 16일 열수(한강의 옛 이름)변의 마현마을(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선생을 낳으셨다. 15세(1776)에 풍산 홍씨에게 장가드니 무인출신으로 승지와 절도사를 지낸 홍화보(洪和輔)의 딸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자라면서 학문을 좋아하였다. 16세(정조1년, 1777)에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의 유저(遺著)를 처음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사돈이었던 이벽(李壁)과 매형이었던 이승훈(李承薰)을 통해 서양서적에 접하면서 새로운 과학지식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 실학(實學)과 서학(西學)의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한편, 선생은 관직에 나아가 나라와 백성을 잘살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과거시험 공부에 열중한 결과 22세(정조7년, 1783)에 소과(小科)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고 이어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그 유명한 ‘중용(中庸)에 관한 문답’으로 정조대왕(正祖大王)의 인정을 받았으며, 드디어 28세(정조13년, 1789)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예정된 대로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면서 청년관료로서 성장해 갔다. 문과에 합격한 그해에 한강의 배다리(舟橋)를 설치하였으며, 31세에는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수원 화성(華城)을 설계하였고, 33세에는 홍문관 수찬(修撰)에 이어 경기 암행어사(暗行御史)로, 36세에는 곡산부사(谷山府使)로, 38세에는 형조참의(參議)로 활약하면서 그 정치적 상황이 좋을 때나 나쁠 때를 가리지 않고 심혈을 기울여 백성을 위한 정치적 개혁을 추구해 나아갔다. 선생이 속한 남인(南人)은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선생을 영수로 하여 이가환·권철신· 권일신· 안정복 등이 중심이 된 개혁세력으로 정조의 개혁정치를 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봉건적 신분질서와 지주제를 옹호하는 성리학만을 신봉하던 보수집권세력인 노론(老論)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게 된다. 이때 노론은 성리학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용서하지 않았고 서학(西學)은 정적을 없애는 빌미로 이용하게 되었는데, 선생도 이로 인하여 고통을 겪게 된다. 정승으로 쓰일 큰 재목인 대도 불구하고 유배[29세(정조14년,1790)에 예문관 검열로 발탁되었을 때 노론이 반대하자 그 직을 사양하였는데 왕명을 어겼다하여 충청도 해미에 10일간 유배되었음]와 좌천[34세(정조19년,1795)에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밀입국사건의 여파로 정3품 통정대부에서 종6품인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음], 근신[36세(정조21년,1797) 되던 해 6월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젊은 날 서학을 받아들인 것을 반성하는 사직상소문을 올리고 물러나자 곡산부사로 외직에 보내졌음]을 거듭하면서 은인자중(隱忍自重)하면서 지내야 했으며, 끝내 형조참의를 사직하고 1800년 봄에 처자를 데리고 낙향하여 당호를 여유당이라 짓고 은둔하였다.

그해 여름에 정조가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었는데, 이후 노론(노론)은 11살의 어린 순조를 옹립하고 정순왕후의 섭정아래 1801년 신유박해라는 천주교 박해사건을 일으켜 모든 정적을 제거한 뒤 세도정치에 돌입하게 된다. 이때가 선생의 나이 40세로 셋째형 약종(若鍾)은 죽고, 우여곡절 끝에 둘째형 약전(若銓)은 흑산도로 그리고 선생은 강진으로 유배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47세(순조8년,1808) 봄에 선생은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다산(茶山)의 산 밑에 있는 윤단의 산정(다산초당)으로 이주하여 저술 작업에 몰두 하였다. 이곳에서 선생의 학문에 있어 두축을 이루고 있는 경학(經學)과 경세학(經世學)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필생의 역작인 경세유표(經世遺表)와 목민심서(牧民心書)도 이 시기에 초고가 이루어졌다. 황상(黃裳)·이강회(李綱會)를 비롯한 많은 제자들을 길렀으며 혜장(惠藏)· 초의(艸衣)와 같은 고승들과도 귀중한 인연을 맺었다.
57세(순조18년,1818) 가을에 해배되어 고향 마현으로 돌아왔다. 이후에도 저술을 계속하여 미완이었던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완성했고 경세유표(經世遺表)를 보완했으며 흠흠신서(欽欽新書)· 아언각비(雅言覺非)등을 저술했다.
75세(헌종2년,1836)의 회혼일(回婚日)인 2월22일 이곳 마현 자택의 정침(正寢)에서 서거하셨고 4월 1일 선생의 유언에 따라 집동산의 북쪽 언덕에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안장되었다.
사후 74년만인 1910년(융희4) 7월 18일 조정에서는 선생을 정2품(正二品) 정헌대부(正憲大夫) 규장각 제학(奎章閣 提學)으로 추중하고 문도공(文度公)의 시호를 내렸다.

2009.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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