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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정약용의 일화 F4용지 한쪽정도 업적 분야별로 평가와 배울점 알켜주세요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6,852 작성일2005.06.01

정약용의 일화 F4용지 한쪽정도

정약용의 업적 분야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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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정약용 선생(1762-1836)

출생지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에 있는 마현 마을은 일명 정다산 마을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곳이다. 이곳에 정다산 마을이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조산 말 실학자인 다신 정약용 선생이 이곳 마현 마을에서 태어난 때문이다.팔당댐에서 양수리 방향으로 손바닥을 편 듯 떠있는 마치 섬 같은 강변마을인 이곳은 밤나무 숲과 넓은 운동장이 있는가 하면 무
엇보다 강변을 따라 걷는 자갈길의 운치가 뛰어나다.

유배지 :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강진만이 한눈에 굽어 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다산초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 다산초당은 조산 말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정약용 선생이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정약용 선생은 강진에 유배되어 18년간귀양생활을 했는데, 강진읍 동문 밖에서 8년간 머물다 이곳 만덕리 귣동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이곳에서 후진을 가르치
고 저술에 전념하였다. 500여권에 달하는 정약용 선생의 저서가 이곳에서 완성되었다. 당시 다산이 기거했던 집은 오랜 세월에 낡고 쓰러져 1958년 5칸 도리 단층 기와집으로 중건 한 후 선생이 우거하셨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숙처인 서암을 복원하였다.다산이 남긴 유적으로는 초당 앞 마당에 솔방울을 지펴 차를 끓여 마셨던 다조,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맑은 물이 솟아나는 약천, 초당으로 이주 후 바닷가의 돌을 모아 만들었다는 연지석가산, 해배를 앞두고 발자취를 남기는 뜻에서 새긴 정석바위가 있다.이 네가지를 다산 4경이라 부른다.

약력 :

1762년 1세 : 6월 16일 사시에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재,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아버지 나주 정씨 재원, 어머니 해남 윤씨-고산 윤선도의 후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남. 초자는 귀농,관명은 약용,자는 미용.송포, 호는 삼미.다산.사암.자하도인.태수.문암일인 등 당호는 여유당, 천주교명은 요안.이해에 사도세자의 변으로 아버지
진주공이 시골로 돌아가기를 결심하였는데,그때 마침 아들이 태어나니 귀농이라 지음
1765년 4세 :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함
1770년 9세 : 11월 9일 어머니 윤씨를 사별함
1776년 15세 : 2월 22일 부승지 홍화보의 딸 풍산 홍씨와 결혼함. 아버지가 다시 복직되어 서울로 이사함
1783년 22세 : 2월 세자 책봉을 경축하기 위한 증광감시의 경의 초시에 합격, 4월 회시에 생원으로 합격함. 선정전에 들어 최초로 성군 정조와 만남. 회현벙에 이사하여 재산루에 거처함.9월 장남 학연 태어남
1789년 28세 : 5월에 부사정,6월에 가주서에 제수됨, 겨울에 주교를 설치하는 공사에 규제를 만들어 공을 이룸
1790년 29세 : 2월에 예문관 검열이 됨. 3월 8일에 서산군 해미현에 정배되어, 13일에 배소에 이르고 19일에 귀양이 풀림. 9월에 정언 잡과감대에 나아갔고, 이어서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어 무과감대에 나아감
1791년 30세 : 5월에 사간원 정언, 10월에 사헌부 지평에 제수됨. 겨울에 <시경의> 8백여 조를 바쳐 임금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음
1792년 31세 : 3월에 홍문관록에 뽑혔으며, 이어 홍문관 수찬이 됨. 4월 9일 진주 임소에서 아버지 진주공의 상을 당함. 겨울에 명을 받들어 <수원성제>를 지어 올림.
1794년 33세 : 3년상을 마침. 7월 성균관 직강, 10월에 홍문관 교리, 수찬을 거쳐 10월 29일 경기 암행어사의 명을 받들고 11월 15일 복명함. 12월 홍문관 부교리에 제수됨
1795년 34세 : 1월에 동부승지 , 2월에 병조참의, 3월에 우부승지를 제수 받음. 주문모 사건에 둘째형 약전의 연좌로 7월 26일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외보됨. 이때 성호유고 정리함. 12월에 용양위 부사직 으로 옮겨짐
1796년 35세 : 10월에 규영부 교서가 되고, 12월에 병조참지,다시 우부승지, 좌부승지에 올랐다가 부호군으로 옮겨짐
1797년 36세 : 윤 6월에 황해도 곡산 도호부사로 나가서 치적을 올림. 겨울에 마과회통 12권이 완성됨
1799년 38세 : 2월 황주 영위사로 임명하는 교지를 받고,4월에 내직으로 옮겨져 병조참지,5월에 동부승지,부호군.서울에 돌아와 형조참의를 제수 받음. 6월에 반대파의 무고에 대해 <자명소>를 올리고 사직하려 함
1781년 40세 : 2월 9일, 정원의 논계로 옥에 갇힘. 3월에 경상도 장기에 유배됨. 이때 둘째형 약전은 신지도에 유배,셋째형 약종은 옥사함.10월 황사영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전라도 강진현으로 귀양감
1804년 43세 : 봄에 2천자로 된 <아학편훈의>가 이룩됨
1811년 50세 : 봄에 <<아방강역고>>10권을 저술함
1818년 57세 : 봄에 <<목민심서>>48권이 완성됨. 8월에 귀양이 풀려서 다산을 떠나, 9월 14일에 마재 고향집에 돌아옴
1819년 58세 : 여름에 <<흠흠신서>>30권을, 겨울에는 <<아언각비>>3권을 저술함.
1836년 75세 : 2월 22일 진시초에 마재 자택 정침에서 조용히 서거함. 4월 1일 여유당 뒷동산, 곧 지금의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의 자좌지원에 안장됨
1883년 : <<여유당전서>>가 전사되어 내각에 수장됨
1910년 : 7월 18일 정2품 정헌대부 규장각제학을 증직하고 시호를 문도공이라 함

저서 :

목민심서, 경세유표, 마과회통,다산문답, 아방강역고, 흠흠신서, 아학편의 등 다수 저술

관련 인물 :

정조 - 영조대왕의 손자이며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탕평책을 쓰려고 무던 애를 썼지만 허사가 되고 만다. 정약용을 크게 키우려고 하였으나 노론 벽파의 시기에 제대로 정약용에게 뜻을 다하지 못함.
이승훈 - 정약용의 자형이며, 천주교 신자이었으며, 2번 배교를 하였다.
체제공 - 남인 시파의 거두로 정약용의 바람막이,등대의 역할을 해 줌
홍국영 - 이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 정약용 선생은 정조에게 편애 받지않는 적절한 군신의 사랑을 받음
서경보 - 암행어사 시절 비리를 보고 장계한 것에 대한 보복을 계속하여 정약용 선생을 유배를 가게 함, 유배 해지를 계속 방해 함
목만중,홍낙안,이기경 - 끝까지 정약용 선생을 궁지로 몰아넣음

사상 :

실학에 바탕을 둔 실용주의 경험주의 철학의 밑바탕으로 함
국가는 백성이 올바르게 서야 나라가 제대로 선다는 생각을 가지고
목민관 시절 이것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위한 올바른 통치를 함
서학도 공부하였으며 모든 부분에 책을 거의 다 보고 깨우치려고 함

목민관 시절의 몇 가지 치적

1. 곡산 부사 : 이 계심의 난을 평정하고,곡산 관아를 지어 주고 조세 제도를 바로 잡음
2. 경기 암행어사 : 연천과 삭령에서 고을 수령들을 벌하고 죄 없이 갇힌 양민들을 사하였고 연천과 삭령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장계로 꾸며 보고함. 수원에서 관찰사를 하고 있는 서용보의 모든 비리 사실들을 적어서 보고 함 - 훗날 정약용 선생의 정치 생명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원인이 됨
3. 충청도 금정찰방 : 자연스러운 것처럼 이루어 지던 부조리와 악습을 모두 척결했으며, 나라에서 금한 천주학을 사람들을 설득하여 서교를 멀리하게 하였으며, 충청남도의 전교를 담당하던 이존창을 검거하는데 도움을 줌

기타:

1.식솔인 천 만호를 위해 솜 타는 기계를 제작, 후에 큰 부자가 되어 정약용 선생 가족과 친지,지우 들에게 도움을 많이 줌
2. 효성이 지극한 정조를 위해 복상 중에 수원 화성을 만들때 썼던 기중기를 만듦
3. 베트남의 통치자였던 호치민이 일생 동안 목민심서를 지침삼아 정치를 하였다 함


2005.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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