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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정조 때 일어난 사건이나 당시의 생활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1,882 작성일2003.08.02
역사신문에 늘껀데요
그때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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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 이름은 산이고, 자는 형운이며, 호는 홍재이다. 영조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장헌세자(莊獻世子)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의 딸인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이다. 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었고, 1762년(영조 38) 2월에 좌참찬 김시묵의 딸인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를 비로 맞아들였다. 정조는 이 해 5월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고, 1764년(영조 40) 2월에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아닌, 영조의 죽은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의 종통을 이어야 했다.

▶ 1775년(영조 51) 12월에는 영조가 병이 깊어지면서 세손인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였는데, 좌의정 홍인한의 방해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홍국영 등의 도움으로 여러 차례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1776년 3월에 영조가 죽자, 마침내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정조는 즉위하면서 어머니 혜빈(惠嬪)을 혜경궁으로 높이는 한편, 생부인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로 높이면서 묘소를 수은묘(垂恩墓)에서 영우원(永祐園)(관련유적참조)으로 격상시키고 경모궁(慶慕宮)이라는 묘호를 내리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자신의 왕통에 관계된 것들을 정리한 정조는 이어서 홍인한·정후겸 등을 사사하고 그 무리 70여 명을 처벌하였다. 정조는 이 과정에서 그들의 죄상을 하나하나 밝힌 『명의록(明義錄)』을 짓기도 하였다.

▶ 한편 정조는 즉위와 동시에 본궁을 경희궁(관련유적참조)에서 창덕궁(관련유적참조)으로 옮기고 그 후원에 주합루(宙合樓)와 여러 서고 건물들을 지으면서 규장각을 마련하여 문치의 왕정을 펼 준비를 다졌다. 이후 정조는 영조의 탕평론을 이어받아 왕정체제를 강화하여 위민정책을 실현시키는데 노력하였다. 그는 재위 3년째에 모든 신분적 차별의 단서들을 철폐하여 누구든 억울한 일은 무엇이나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그것들을 자신이 능행(陵行)할 때에 접수하도록 하였는데, 『정조실록』과 『일성록』에 실린 상언·격쟁의 건수만도 5,000건이 넘을 정도였다.

▶ 정조는 1789년(정조 13)에 아버지 장헌세자의 능을 수원으로 옮기면서 능행의 범위를 한강 남쪽까지 확대하기도 하였다. 정조는 이 과정에서 화성(관련유적참조)을 새로 쌓으면서 수원도호부를 옮기고 본래의 자리에 현륭원을 만드는 한편, 이곳에 행궁과 장용영 외영을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정조는 배다리를 만들어 한강을 건너면서 모두 10여 차례에 걸쳐 현륭원으로 행차하기도 하였다. 이때 정조는 한강의 상인들에게 전라도 조세 운송권의 일부를 주면서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배를 각 창별로 분속시켜 배다리를 만들게 하였다고 한다.

▶ 그리고 정조는 1785년(정조 9)에는 역대 법전들을 모아 『대전통편』을 편찬하여 법치의 기반을 다지기도 하였다. 또한 1791년(정조 15)에는 신해통공(辛亥通共)이라는 조치를 내림으로써 시전상인들의 특권을 없애기도 하였다. 이는 도시로 모여든 이농인구가 중소상인으로 자리잡아가자, 상업활동에 균등한 기회를 부여하려는 목적으로 단행되었다고 한다.

▶ 정조는 재위 기간동안 규장각을 통해 방대한 양의 저술사업을 전개하였다. 역사서, 지리서, 축성에 관한 것, 왕조의 의례관계에 관한 것들 뿐만 아니라, 영조 때 편찬한 『동국문헌비고』를 증보하여 『증보동국문헌비고』를 편찬하였다. 이외에도 규장각 각신들로 하여금 중요 정사를 매일 기록하도록 함으로써 『일성록』을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1781년(정조 5)에는 강화도 외규장각을 설치하여 역대 왕실 의궤들의 원본을 안치하여 영구보전을 꾀하기도 하였다.

▶ 한편 1791년(정조 15)에는 윤지충·권상연 등이 제사를 거부하고 가묘의 신주를 불사른 사건이 발생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주장하는 소리가 높아졌지만, 정조는 정학을 신장하면 사학은 저절로 억제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윤지충·권상연 두 사람만 처형하면서 천주교 자체에 대한 탄압을 자제하기도 하였다.

▶ 정조는 영조와는 다른 측면에서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비통한 심정을 평생 지니고 살았다. 현재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의 하나인 수원 화성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역을 새로 조성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1799년(정조 23)에 아버지 장헌세자의 저술을 손수 편집하여 예제(睿製) 3책을 남긴 정조는 자신의 저술·강론 등을 규장각 각신에게 편집하도록 명하여 『홍재전서』 100권으로 정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6월 28일 재위 24년만에 49세로 일생을 마쳤다.

2003.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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