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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조선왕조실록10대사건
비공개 조회수 9,284 작성일2010.08.21

조선왕조실록을 읽고 10대사건을 써내려가야하는데

 

읽어도 어려워서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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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화도회군

 

1388년(우왕 14) 5월 요동정벌()에 나선 우군도통사(使) 이성계()가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서 군사를 회군한 사건.

 

우왕 즉위 뒤 고려의 외교는 친명()에서 친원()으로 바뀌어, 고려·명나라 관계가 악화되었다. 1388년 3월 명나라가 쌍성총관부() 관하지역을 영유하기 위해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자, 고려에서 최영()이 중심이 되어 명의 대()고려 전진기지인 요동정벌론이 제기되었다. 이에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使)로 삼아 평양에 나아가 독전하게 하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정벌군을 이끌고 출정하게 하였다.

처음부터 요동정벌론에 반대한 이성계는 정벌군이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이르자 진군을 멈추고,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상의하여 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②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③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 왜구가 침벌할 염려가 있으며, ④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⑤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며 요동정벌은 불가능하다고 상서()로써 회군을 청하였다.

그러나 평양에 있던 최영과 우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이성계는 5월 20일 회군을 결행하여 군대를 국내로 돌이켰다. 돌연한 사태 변화에 최영은 개경으로 돌아와 회군해오는 정벌군과 싸우려 하였으나, 얼마 뒤 최영은 이성계에게 붙잡혀 고봉현(:)으로 유배되었다가 죽음을 당하였고, 우왕도 강화도로 쫓겨났다. 이를 계기로 이성계는 정치적·군사적 권력을 한손에 잡아 조선창업의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2.제 2차 왕자의 난

 

1400년(정종 2) 왕위()를 탐하여 방간이 일으킨 변란().

 

방간 난 또는 박포()의 난이라고도 한다. 방간은 조선 태조의 제4남으로 왕위계승에 대하여 야심을 품고 있었으나, 인격 ·공훈() ·위세()가 아우인 방원()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왕위에 대한 야심을 버리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방원에 대한 시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제1차 왕자의 난에 큰 공을 세운 박포가 그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있었으므로, 자연 방간과 박포는 서로 뜻이 맞아, 둘이 공모하여 방원의 세력을 꺾으려고 반란을 일으켰다.

방간과 방원의 군사는 개경()에서 접전하였는데, 결국 방간의 군대는 패하여 방간이 유배()되었으며, 박포는 처형되었다. 이 난이 평정되자 정종()은 방원을 세제로 삼았고, 같은 해 11월에 드디어 방원에게 양위()하였다. 이틀 후, 방원은 수창궁에서 즉위하였다. 방원(태종)의 즉위는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겪으며 골육상잔의 비극 후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명분과 정통성에 하자가 있었다. 그러므로 방원은 즉위 후,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3.한글창제

 

조선 세종()이 1446년(세종 28) 9월에 제정·공포한 한국의 국자(),


국자의 뜻으로는 줄여서 '정음()'이라고도 하며, 속칭 '언문()'이라고도 하였다. 글자로서 훈민정음이 완성된 것은 1443년(세종 25)이며, 이것이 제정되자 그 창제 목적을 실천하기 위하여 금중()에 언문청()을 설치하고, 훈민정음의 해례()와 같은 원리를 연구하게 하고, 그 보급책의 일환으로 《용비어천가()》를 짓고 운서()를 번역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공포하였다.

이 국자 제정과 '해례' 편찬은 정인지()를 비롯하여 당시 집현전(殿) 학사인 최항(박팽년(신숙주(성삼문(강희안()·이개()·이선로() 등의 협조로 이루어졌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의 뜻이며(), '정음'은 '우리나라 말을 정()히, 반드시 옳게 쓰는 글'임을 뜻한다().

 

 

 

 

 

 

4.중종반정

 

-1506년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1506년(연산군 12) 이조참판()을 지낸 성희안()과 중추부지사() 박원종()은 재위 12년간 폭정으로 국가의 기틀을 흔들어 놓은 연산군을 몰아낸 사건이다.

연산군은 무오사화갑자사화를 일으키면서 많은 선비들을 희생시켰고, 자신의 행동을 비판하는 세력을 축출하였으며, 경연의 폐지와 대간들의 직언을 금지하게 하는 신언패()의 실시, 성균관의 연락() 장소화, 도성 밖 30리 내의 민가 철거, 언문 도서의 폐기, 사대부 부녀자의 농락,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인한 정치의 파탄 등 수많은 악행과 폭정을 거듭하였다. 이에 훈구세력을 중심으로 연산군의 폐위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다.       

성희안과 박원종 등은 연산군 폐위를 밀약하고 당시에 인망이 높던 이조판서 유순정(), 연산군의 총애를 받고 있던 군자감부정() 신윤무() 등의 호응을 얻어 왕이 장단() 석벽()에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 계획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유람이 중지되면서 거사에 차질을 빚을 뻔 했으나 호남지역에서 연산군 폐위의 거사 격문이 서울에 나돌게 되면서 당초 계획을 강행하였다. 그리하여 1506년 9월 1일, 박원종 ·성희안 ·신윤무를 비롯해서 전 수원부사(使) 장정(), 군기시첨정() 박영문(), 사복시첨정() 홍경주() 등이 무사를 훈련원에 규합하였다.  그들은 먼저 궁금세력()으로 권력을 쥐고 있던 임사홍() ·신수근()과 그 아우 신수영() 및 임사영()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인 다음 궁궐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하였다.

반정에 성공한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텅 빈 경복궁에 들어가서 성종의 계비이며 진성대군의 어머니인 대비 윤씨의 허락을 받아 연산군을 폐하여 강화도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인 9월 2일 진성대군을 맞아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르니 그가 조선왕조 제11대 왕인 중종이다. 이 정변을 중종반정이라고 한다.

중종반정의 결과 연산군의 학정은 끝났으나 반정 공신들에 의한 전횡이 이어지면서 근본적인 제도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5.임진왜란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친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



1597년 제2차 침략전쟁을 따로 정유재란이라고도 하며,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초[祿]의 역(), 중국에서는 만력()의 역()이라고 한다. 조선 조정에서는 남해안 지방에 왜구들이 자주 침략하자 군국기무()를 장악하는 비변사()라는 합좌기관()을 설치하여 이에 대비하였으나, 선조 때에 지배계급은 당파를 중심으로 분열하여 서로 반목질시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파쟁으로 중앙에서는 국방정책조차도 마련하지 않고 변해가는 동양의 국제정세를 명()나라와의 친선관계만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또 안일 속에서 고식적인 대책에만 만족해하던 지배층은 인접국가인 일본이나 대륙의 여진족의 정치적 변동이나 사항을 구체적으로 탐지하려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16세기 말에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使)도 당파적인 엇갈림에 치우쳐 상반된 내용을 보고하였다.

한편 이이()는 10만 양병설()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조선사회는 이미 오랜 평화 속에서 지배계층인 사대부의 편당()정치, 기강의 해이, 전세제()의 문란 등 여러 폐단으로 인심이 동요되었다. 조정에서는 각 도에 왜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성곽을 수축하고 군비를 정비하라는 명령을 내려도 몇 곳을 제외하고는 민폐를 야기시킨다는 원성만 높았으며 이에 동조한 일부 수령들도 전비()를 중지하라는 장계()를 올리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침공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은 1585년경부터였고 1587년에 그는 국내 통일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규슈[]정벌을 끝마치고 대마도주() 소 요시시게[調]에게 조선 침공의 뜻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조선 사정에 정통한 쓰시마도주는 이 계획이 무모한 것임을 알고 조선이 통신사를 파견할 것을 건의하였다.

따라서 쓰시마도주는 가신인 다치바나 야스히로[]를 일본국왕사(使)로 하여 1587년 조선으로 파견, 일본 국내사정의 변화를 설명하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 첫번째 일본 사신이 부산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의 영접에 대한 가부와 서계()의 서사()가 종래와 달리 오만하다 해서 문제가 되어 조정에서는 여러 논의가 있었다. 특히 공주교수() 조헌()은 만언소()를 올려 시폐()와 국방을 논하는 등 일본 정벌의 강경론을 주장하자 결국 조정에서는 수로미매()를 이유로 통신사의 파견을 거절하였다.

도요토미의 첫번째 외교가 실패하자 다시 쓰시마도주의 알선으로 1588년 10월과 89년 6월, 두 차례에 걸쳐 조공과 함께 통신사의 파견을 간청하고 앞서 왜구의 앞잡이가 되어 노략질한 조선인을 잡아 보내왔다. 이에 조선 정부는 1590년 3월 황윤길()을 정사(使), 김성일()을 부사(使), 허성()을 종사관()으로 한 통신사 일행을 파견하였고 이들은 이듬해 정월 일본의 답서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일본의 답서에는 종래의 외교관례에 따르지 않는 무례한 구절과 정명가도()를 뜻하는 글이 있어 침략의 의도가 분명하였으나 1591년 3월 이들 사신이 복명하는 자리에서 정사 황윤길(서인)은 왜가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한 데 반해 부사 김성일(동인)은 왜가 침범할 동정이 없다는 상반된 보고로 당파적인 엇갈림과 함께 조정의 의견도 통일되지 못하였다. 동인세력은 서인들이 전쟁을 빌미로 정치적 위기를 넘기려한다고 의심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어 제3차 일본 사신 일행이 조선 통신사보다 한달 늦게 입경하여 일본이 가도입명()하리라는 통고에 조정은 놀라 그 해 5월에 일본의 서계 내용과 함께 왜정()을 명에 알리는 한편 일본의 침공에 대비하여 김수(晬) ·이광() ·윤선각() 등으로하여금 경상 ·전라 연안의 여러 성을 수축하게 하고 각 진영의 무기를 정비하게 하였다. 신립() ·이일()에게는 변비()를 순시하게 하는 등 요충지인 영남지방의 방비에 힘을 기울였으나 이미 시기가 늦었다.

이 동안 일본의 침략계획은 더욱 성숙하여 내전을 통해 연마한 병법·무예·축성술()·해운술 등을 정비하고 조총()의 대량생산도 진행되었다. 1592년 4월 13일 경상도 동래부 다대포 응봉봉수대()에서는 왜군의 700여 병선()이 쓰시마를 출항하여 부산포에 이르고 있다는 상황보고가 곧 경상·전라도의 각 감영()과 중앙에 전달되었다.

그러나 경상좌수영군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궤멸되었고 14일에는 왜군 선발대인 고니시 유키나가[西]의 약 1만 8000 병력이 부산성을 공격하여 십수시간의 혈전 끝에 부산성()을 사수하던 부산진첨사(使) 정발() 등의 전사로 성을 빼앗겼다. 이튿날 동래()에 진격한 왜군들과 맞선 동래부사(使) 송상현() 이하 군민()은 끝까지 항전하다 순국하였다.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왜군의 후속부대는 계속 상륙해 와서 4월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2군 2만 2000여 병력이 부산에,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제3군 1만 1000여 병력이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와 함께 구키 요시다카[] ·도도 다카토라[] 등의 9,000여 수군()이 편성되어 바다에서 이들을 응원하였다.

일본 국내의 잔류병력과 쓰시마 등지의 주둔군 등 일본 침략군의 총병력은 약 20만이었는데 이 중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제1군은 중로()로 동래-양산()-청도()-대구()-인동()-선산()-상주()-조령()-충주()-여주()-양근()-용진()나루-경성동로(), 제2군 좌로()는 동래-언양()-경주()-영천()-신녕()-군위()-용궁()-조령-충주-죽산()-용인()-한강, 제3군 우로()는 김해()-성주()-무계()-지례()-등산()-추풍령()-영동()-청주()-경기도의 3로로 나뉘어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4월 17일 경상좌수사 박홍()으로부터 왜군 침공의 급보가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신립을 도순변사(使), 이일을 순변사, 김여물(岉)을 종사관()으로 임명하여 왜군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김성일을 경상우도초유사(使), 김근(玏)을 좌도안집사(使)로 삼아 민심수습과 항전을 독려하도록 하였다.

북상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이일에게는 중로()인 조령 방면을, 유극량()과 변기() 등에게는 각기 죽령과 추풍령을 방비하게 하였고 도순변사 신립과 도체찰사(使) 유성룡()으로 하여금 이일을 응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일이 4월 24일 상주에서 가토에게 패하여 충주로 물러나자 왜군은 조령과 죽령 등지에서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충주까지 진격하였다.

이일의 뒤를 이은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서 방어작전을 폈으나 패하였다. 이일 등이 죽령·조령·추풍령 등의 요새를 방어하기 위해 출발한 후 조정은 적군의 수도 공격에 대비하여 우의정 이양원()을 수성대장()으로 삼아 도성의 성곽을 축성하게 하는 한편 전 북병사(使)였던 김명원()을 도원수()를 삼아 한강을 수비하게 하였다.

신립의 패전보고가 있자 4월 30일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개성을 향하여 피란길에 올랐다. 서울이 함락되자 선조는 다시 평양으로 달아났다. 파천에 대한 민심이 거제지자 파천을 주동한 사람은 영의정 이산해로 내몰고, 유성룡은 파천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는 거짓 죄목으로 귀양을 보냈다. 그리고 임해군()은 함경도로, 순화군()은 강원도로 보내어 근왕병()을 모집하였지만 백성들은 오히려 두 왕자를 붙잡아 왜군에게 인도하였다. 한편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여 수복을 꾀하고자 하였다. 왕이 달아나자 백성들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고 특히 하삼도()는 무정부적 혼란상태가 더했다. 왕이 피난해 있는 사이 민란이 일어나 공사노비의 문적이 있는 장례원()과 형조의 건물을 불태우고 경복궁·창덕궁  등 궁궐과 관청에 들어가 약탈을 하였다.

상륙 20일만에 서울은 왜군에게 점령되었으며 서울에 입성한 왜군은 대오를 정비하여 고니시의 부대는 평안도, 가토의 부대는 함경도, 구로다의 부대는 황해도로 진로를 정하는 한편 서울을 지키는 부대를 두고 경상·강원·전라도 방면으로 진출하여 후방지역을 담당하였다. 강원도·황해도 방면으로 모병하러 간 두 왕자도 왜병의 포로가 되고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왜군에 의해 개성·평양은 부산 상륙 이후 60일도 못 되어 함락, 거의 무방비상태인 전국토는 함경도까지 진출한 왜군에게 짓밟히게 되었다.

서울이 함락되고 함경도 지역까지 왜군의 침략을 당하고 있을 때 해상의 싸움은 전라도 해안으로 진출하는 왜병을 막아내고 있었다. 조선 수군의 편제와 전술은 고려 이래로 왜구 방어 위주였으므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따라서 각도에는 수영()이 있어 이를 수군의 근간으로 하였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으로 침입한 왜선단()에 경상좌수영과 우수영은 해상에서 제대로 싸움조차 하지 못한 채 대패하였다.

전라좌수영의 수군절도사로 있던 이순신은 경상우수영으로부터 왜군의 침입보고를 받자 출동하여, 옥포()의 첫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당포()·당항포()·한산도()·부산 등지에서 계속 전과를 거두었다. 특히 한산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진주성()싸움·행주산성()싸움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으로 꼽는다.


[임진왜란 해전도]

이순신의 활약으로 해상권을 장악한 조선군으로 인해, 전라도 해안으로 진출하려던 왜군의 작전은 분쇄되었다. 해상에서의 승리와 함께 육지에서는 부산진·동래의 수성전()과 김해성()의 저항, 경상우방어사(使) 조경() 휘하의 돌격대장 정기룡()의 추풍령전투, 밀양 작원()에서의 밀양부사 박진()의 선전, 유도대장() 이양원()의 해유령() 승전 등 치열한 접전이 있었다.

한편 혼란과 민심의 이산 속에서도 근왕()을 부르짖는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였다. 영남에서는 유림 곽재우()·김면(정인홍() 등이, 호남지방에서는 고경명(김천일(), 호서에서는 조헌() 등이, 함경도에서는 정문부()가 거병하였다. 또한 조선 사대부들에게 천대만 받았던 승려들이 봉기하여 가세하였다.

조헌은 충청도 옥천()에서 일어나 청주의 왜병을 축출하고 금산()의 왜병을 공격하다 전사하였고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에서 거병하여 의령·창령 등지에서 적을 물리치고 진주에서 김시민()과 함께 적병을 격퇴하였다. 고경명은 전라도 장흥()에서 거병하여 금산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으며 김천일은 수원에서 거병하여 제2차 진주싸움에 참가하였다.

정문부는 함경도에서 활약하여 경성()·길주() 등을 회복하고 관동지방의 적을 축출하였다. 이 외에도 대소의 허다한 의병이 봉기했으며 휴정()·유정() 같은 승려들이 승병을 거느리고 싸움에 참가하기도 하여 이러한 의병의 활동은 왜군의 군사행동에 심한 타격을 주었다.

왕이 파천하는 도중 사신을 명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자 명에서는 조선 땅에서 왜군을 격퇴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파병을 결정하여, 선봉장으로 낙상지()와 사대수() 등이 먼저 건너오고 이어서 송응창(이여송()이 4만 5000의 동정군()을 이끌고 조선의 김응서() 등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 이를 탈환하였다.

계속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던 명군은 벽제관()에서 왜군과 일대 접전이 벌어져 개성으로 퇴각하고 왜군은 서울에 집결하여 함경도에서 철수하는 가토의 군대와 연합,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행주산성에는 전 전라도순찰사 권율()이 이치()싸움에서 승리한 후 명의 원군과 호응하여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웅거하였으나 벽제관싸움에서 명군이 패퇴하자 고립되었다. 권율은 조방장() 조경, 승장() 처영()과 함께 약 2,300의 정병으로 행주산성에서 배수진()을 치고 몇 차례의 격전 끝에 왜군을 물리치자 왜군은 다시 서울 이북에 출병하지 않고 서울 철수를 서두르게 되었다.

임진강을 끼고 조선·명의 연합군과 왜군이 대치하고 있을 때, 일본측 고니시의 강화회담 제의로 이덕형()과 일본의 야나가와 초신[調]·겐소[] 사이에 강화회담이 시작되어 강화는 교섭단계에 들어갔다. 그 즈음 왜군은 앞서 김시민에게 패퇴한 진주성을 재차 공격해왔는데 김천일·황진(최경회() 등이 역전했으나 함락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진주싸움은 행주싸움에 못지않은 격전이었고 특히 제1차 진주성싸움은 임진왜란 3대첩에 든다. 조선측의 강화반대에도 불구하고 명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회담은 진척되어 심유경() 등이 일본에 파견되었고 우리측에서도 황진을 통신사로 보내게 되었다. 강화회담이 계속되는 동안 전쟁은 소강상태로 들어갔고 명은 왜군의 재공격이 없을 것이라 판단하여 주력부대를 철수시켰다.

그러나 5년간 계속된 명·일간의 강화회의는 1596년 9월 일본 오사카성[] 회담에서 결렬되었다. 회담이 결렬된 이유는 명에서는 도요토미를 일본의 왕으로 삼고 그 입공()을 허락한다는 봉공안()으로써 국면을 해결지으려 했으나 도요토미는 ① 명의 황녀로써 일본의 후비()로 삼게 할 것, ② 조선의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③ 감합인(:貿)을 복구할 것, ④ 조선의 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 등을 요구하였다.

심유경은 이 요구를 명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여 명은 봉공안에 의해 1596년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칙서와 금인()을 보냈는데, 화의는 결렬되고 이듬해 왜군은 재차 침입하게 되었다. 이 때에는 조선도 왜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경상도의 금오()·공산(화왕산성()을 비롯하여 각도의 산성을 수축하는 등 군비를 갖추었고 양호()를 경리, 마귀()를 제독()으로 한 명의 원군 5만 5000도 즉시 출동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경상도를 중심으로 맴도는 데 그쳤다.

1596년 12월에 고니시군이 부산에 상륙하고 이듬해 1월에는 가토군이 다대포()에 상륙하여 양산()을 함락하고 서생포(西)에 진을 쳤다. 정유재란 때의 왜군 총병력은 14만 1500으로, 수군도 강화되었다. 왜군은 임진년 당시와는 달리 경상·충청·전라도의 완전 점령을 전략으로 하여 전주를 점령한 후 북진할 계획을 세워, 7월 말부터 좌군은 남해()·사천()·고성()·하동() 방면에서, 우군은 광양()·순천()·김해()·창원() 방면에서, 가토는 밀양()·초계()·거창() 등을 거쳐 각기 전주로 향하였다. 왜군은 황석산성()의 싸움에서 고전 끝에 승리를 거두었으나 고령()에서 상주목사 정기룡()군에 패한 데 이어 직산() 싸움에서도 패하여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고 남하하여 순천·울산 등지의 연해안에 진주하게 되었다.

해전에서는 1597년 1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왜군의 본거지를 공격하지 않고 소극적이라는 죄명으로 하옥되고 원균()이 그 후임이 되었으나 7월의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아 원균과 전라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의 수군이 전멸하였다. 이에 다시 이순신이 수군통제사에 임명되어 남은 12척의 병선으로 전선을 수습하고 전열을 재정비하여 명량()대첩에서 적함 133척을 맞아 격전 끝에 대승을 거두고 다시 제해권을 회복하였다.  

8월 도요토미가 죽자 이를 계기로 왜군은 총퇴각하였다. 왜군의 가토가 울산의 도산성()에서 퇴각하고 순천의 고니시도 퇴각하려 했으나 이순신의 수군이 이를 차단하자 왜의 수군 300여 척이 이를 후원하려 노량()에 이르러 최후의 해전이 벌어졌다. 이순신은 명의 수사제독() 진린()과 합세하여 왜선 200여 척을 격파하여 임진왜란 최후의 이 해전에서 승리하고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로써 전후 7년간에 걸쳤던 왜란은 조선·명·일본 3국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특히 싸움터였던 조선은 국토가 황폐화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으며 정치·경제·문화·사회·사상 등 각 방면에 걸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따라서 위정자들의 급선무는 전란으로 인한 문물의 파괴, 재력의 탕진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정치·군사적인 면에 있어서는 비변사()의 강화와 훈련도감을 비롯한 군사기구의 개편이 시작되었다.

또한 난중에는 각종 무기가 제작되어 이장손()은 비격진천뢰()를, 변이중()은 화차()를 각기 발명하였고 왜의 조총과 명군이 사용한 서양식 대포인 불랑기포()도 모조하여 사용하였다. 전화로 인한 농촌의 황폐, 은결()의 증가, 국가질서의 문란 등으로 대동법()의 실시, 면세전() 확대의 방지, 균역법()의 시행, 기민()을 위한 환곡()·모곡()의 회수책 등이 제도화되었다.

한편 혼란한 사회와 민심의 흉흉함을 틈타 이몽학()의 난 등 사방에서 일어나는 민란과 함께 시행된 속오군()제도, 공명첩()의 발행 등은 조선의 신분제도 붕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문화적 손실로는 왜병의 방화로 불국사·경복궁 등의 건물과 사고()에 보관 중이던 역대 왕조의 실록·서적 등이 소실되고 많은 문화재를 약탈당하였다. 한편 전쟁으로 인한 질병의 만연으로 질병퇴치를 위한 의학서인 《동의보감()》이 편찬되었고 사상적인 측면으로는 의병·승병을 통한 애국심의 발로와 자아반성과 함께 명의 내원()에 대한 사대사상이 고조되는 반면에 왜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사상이 더욱 강해졌다.

전란 중에 대두하기 시작한 여진의 청()나라에 의해 명나라가 망하고 일본에서도 도요토미 대신 도쿠가와[]의 막부()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침략의 결과로 조선으로부터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술을 처음으로 도입하게 되었고 포로로 잡아간 도자기 기술자에 의해 획기적으로 요업()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약탈하여 간 많은 서적은 성리학() 등 그들의 학문에 크게 기여하였다.

 

 

 

 

 

 

6.삼전도의 굴욕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반대하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특히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서인은 '군주가 배은망덕해서는 나라가 바로 설 수 없다.' 며 광해군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을 추대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인조반정이라고 하는데, 인조반정은 광해군이 왕으로 있었을 때의 세력판도를 뒤집는 계기가 된다. 인조를 왕으로 세운 서인 세력은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들 서인세력은 임진왜란 당시의 의리와 명분을 생각하여 여진족(후금)을 배척하는 외교정책인 배금정책을 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보고만 있지는 않을 후금(이하 청)은 두 차례에 걸쳐서 조선을 침략하게 된다. 두 차례의 침략 중 첫번째는 정묘호란인데, 이 정묘호란이 유명하지 않은 이유는 피해의 정도가 미미했기 때문이다. 이 때는 단지 청이 후금과 조선의 관계회복과 명과의 단절을 원하고 돌아갔다. 하지만 그렇게 말을 했음에도 조선이 말을 듣지 않고 명과의 교류를 계속하자, 두 번째 침략을 해오는데, 이 때 조선이 청과의 약속을 듣지 않은 이유를 보자면 바로 청의 군사에 대한 잘 못된 생각으로 인해 빚어진 것이랄까?

 이 두번째 침략, 즉 병자호란이라 불리우는 이 사건은 청나라의 10만대군이 2주도 채 안되서 한양에 다다르자 왕족들이 있는 강화도로 가지 못한 인조와 그의 신하들은 서둘러 남한 산성으로 피신하였다. 이 때 포위된 45일 동안 많은 사람들이 추위에 떨며 적과 싸웠지만, 이들을 물리치기엔 군대가 턱없이 부족했다. 군량이 다 떨어지면 돌아갈 줄 알았던 청은 강화도에 있는 왕족들을 인질로 삼아 1637년 1월 30일 차가운 북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조선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그 날 조선의 왕 인조는 청의 황제를 위에 두고 '세 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 의식을 치렀다. 하지만 청의 황제는 마음에 들지 않아했고, 아침일찍 시작했던 의식은 저녁이 되가서야 끝이 났다고 한다. 이 때 인조의 이마는 짓이겨 깨져있던 상태였고, 그의 하얀 옷은 그의 피로인해 빨갛게 염색이 되어있었다고 한다. 훗날 이 자리에 비석을 세워 이 일을 기록해두었는데, 이 글을 썻던 당시 한성 판윤 오준은 오른손을 돌로 찍어서 병신을 만들어 두 번 다시 글씨를 쓰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이 사건은 당시 조선왕조의 치욕이었고, 나라의 치욕이었다.

 

 

 

 

 

7.사도세자사건

 

조선 제21대 영조의 둘째 아들로 영조의 노여움을 사 뒤주 속에서 죽었다. 아들 정조가 장헌()으로 상시()하고, 1899년에 다시 장조()로 추존()되었다.

 

본관은 전주(), 이름은 이선(愃), 자는 윤관(), 호는 의재()이다. 조선 후기 영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영빈() 이씨()이며, 부인은 영의정 홍봉한()의 딸 혜경궁() 홍씨()이다.

이복형인 효장세자[, 후에 진종()으로 추존됨]가 일찍 죽고 난 후 태어난지 1년만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0세에 혜경궁 홍씨와 혼인하였다. 어려서는 학문을 열심히 하여 자신이 지은 시문을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아주 총명하였다. 세자 시절에는 소론 계열의 학자들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10세 때 신임사화()에 대하여 노론들이 잘못 처결하였다고 비판함으로써 일찍부터 노론의 미움을 받을 빌미를 제공하였다. 
 
1749년(영조 25) 15세가 되던 해 영조의 명을 받고 서정()을 대리하게 되었을 때 세자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경우 이미 정권을 장악한 자신들의 입지가 위축될 것을 우려한 노론들은 정순왕후() 김씨와 함께 그의 잘못을 영조에게 과대포장하여 무고하는 등 세자의 지위에서 끌어내리고자 하였다. 

아버지 영조를 무서워한 그는 궁궐 내에서 칼을 휘두르고, 함부로 궁녀를 죽이는가 하면,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평양을 갔다 오는 등 정신질환과 같은 비정상적인 행보를 계속하였다. 이후 1762년 김한구()와 그의 일파인 홍계희()·윤급() 등은 세자의 장인 영의정 홍봉한()이 크게 세력을 떨치자 그 일파를 몰아내고 세자를 폐위시키고자 윤급의 종 나경언()을 사주하여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영조에 올리도록 하였다(나경언의 상변). 이 일로 인해 세자의 비행을 올린 나경언을 참형에 처하고, 영조는 세자를 불러 조목조목 다그치고 자결할 것을 명하였으며, 세자가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 속에 가두어 8일만에 굶어죽게 하였다. 

이후 영조는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고 그에게 사도()의 시호를 내렸으며, 1777년(정조 1) 그의 아들인 정조가 왕위에 올라 장헌()으로 추존하고, 묘(;사당)를 경모궁(), 묘()를 영우원()이라 하였다. 정조는 동대문구 배봉산에 있던 묘를 수원으로 옮겨 영우원을 현륭원()이라 고쳤고, 자주 능행을 하면서 백성들에게 효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1899년(광무 3)에는 장조()로 추존되었으며, 현륭원을 융릉()이라 고쳤다. 
 
 
 
 
 
 
8.강화도 조약
 
1876년(고종 13) 조선과 일본간에 체결된 수호조약.
 

한 ·일수호조약()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한다. 이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조선과 일본 사이에 종래의 전통적이고 봉건적인 통문관계()가 파괴되고, 국제법적인 토대 위에서 외교관계가 성립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의 강압 아래서 맺어진 최초의 불평등조약이라는 데 특징이 있다.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에 맞서 개화론자들은 부국강병을 위해서 개화사상을 도입하고 문호를 개방하여 대외통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즈음 조선 조정 내에서의 권력투쟁으로 대원군이 하야하게 되자 이러한 국내의 정황을 탐문한 일본은 1875년 통교교섭을 위해 조선에 사신을 파견해왔으나 교섭은 성립되지 않았다. 이에 일본 정부는 측량을 빙자하여 군함 운요호[]를 조선 근해에 파견하여 부산에서 영흥만()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의 해로측량과 아울러 함포()시위를 벌였다. 또한 운요호를 강화도 앞바다에 재차 출동시켜 초지진()의 수비병들이 발포하는 사태를 유발하게 하였다. 1876년 정한론()이 대두되던 일본 정부에서는 전권대신() 일행을 조선에 파견하여 운요호의 포격에 대하여 힐문함과 아울러 개항을 강요하였다. 2월에는 일본 사신 일행이 군함 2척, 운송선() 3척에 약 4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강화도 갑곶()에 상륙하여 협상을 강요해왔다. 이에 조선 정부는 국제관계의 대세에 따라 수호통상의 관계를 맺기로 결정하고 신헌()을 강화도에 파견하여 일본 사신 구로다 기요타카[]와 협상하게 한 결과, 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의 무력시위 아래 체결된 조약은 모두 12개조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에는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세력을 조선에 침투시키려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제1조에서 조선은 자주국으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되어 있으나, 이의 목적은 조선에서 청()나라의 종주권을 배격함으로써 청나라의 간섭없이 조선에 대한 침략을 자행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데 있다. 제2조에서 조약이 체결된 후 조선 정부는 20개월 이내에 부산과 그 밖의 2개 항구를 개항할 것을 규정하고, 2개 항구의 선정은 일본의 임의에 맡길 것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동해안에는 원산이, 서해안에는 인천이 각각 선정되었으나, 다만 인천항으로부터의 미곡 수출만은 금지되었다.

또한 제4조와 제5조에서는 개항장 내에 조계()를 설정하여 그곳에서의 일본 상인의 자유로운 무역과 가옥의 조영() 등 거주의 편의를 제공할 것을 규정하였다. 제7조에서는 일본이 조선의 연해(沿) ·도서() ·암초() 등을 자유로이 측량하고 해도()를 작성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제8조와 제10조에는 개항장에서의 일본인 범죄자들에 대해 현지에 파견된 일본영사가 재판한다는 치외법권의 조항이 명시되었다. 이 조약에 규정되어 있는 바와 같이 일본은 개항장을 통해서 일본인을 조선에 침투시키고, 여기에 조차지()를 확보하여 일본세력의 전초지로 삼고자 하였다. 아울러 치외법권을 설정하여 일본인 상인들의 불법적이고 방자스런 행동에 대해서 조선의 사법권()이 미칠 수 없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불평등한 조약으로 하여 조선은 서양 여러 나라와 통상을 시작하게 되고,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서양의 신문명을 수입하는 반면에 열강의 침략을 받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9.동학농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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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 운동(東學農民運動)은 1894년 동학 지도자들과 농민들에 일어난 민중의 무장 봉기를 가리키며, 크게 1894년 음력 3월의 고부 봉기(제 1차)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제 2차)로 나뉜다. 동학농민전쟁(東學農民戰爭),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으로도 불리며, 갑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갑오농민운동(甲午農民運動),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이라고도 한다.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0.경술국치

 

개항 초기 조선을 둘러싼 청나라와 각축전을 벌이던 일제는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하였다. 이에 일제는 조선에서 우월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아울러 일제는 러일전쟁과 동시에 1904년 2월 대한제국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러한 군사력에 기초해서 대한제국 정부를 위협하여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일제에게 군사적 목적을 포함한 모든 편의를 제공하였으며, 많은 토지와 인력도 징발당하였다.

일제는 같은해 8월에는 제1차 한일협약(한일협정서)을 강제로 체결하여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고문을 재무와 외무에 두어 재정권과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또 일제는 대한제국 식민화를 앞두고 열강의 외교적 승인을 얻는 공작에 전력을 기울여, 미국과는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밀약[-Taft]’을, 영국과는 8월에 제2차 영일동맹을 맺었다. 또한 일제는 9월 러시아포츠머스조약을 맺어 러시아를 대한제국 안에서 배제하였다.

대한제국 식민지화의 국제적 승인까지 얻은 상황에서 일제는 1905년 11월 고종을 협박하고 매국관리들을 매수하여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을 늑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국권을 강탈당한 채 형식적인 국명만을 가진 나라로 전락하였다.

고종은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대한제국의 주권수호를 호소하기 위해 1907년 6월 헤이그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이어 7월 24일에는 정미칠조약을 체결하여 내정권도 합법적으로 장악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같은 달 27일에는 언론탄압을 목적으로 광무보안법을 잇달아 공포하여 항일활동 억압을 한층 강화하였다. 더욱이 일제는 8월 1일부터 한달 동안 식민지정책의 최대 장애요인이었던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한 뒤 ‘남한대토벌작전’을 통하여 항일운동을 강력하게 진압하였다.

그뒤 일제는 1910년 5월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3대 통감으로 임명하여 대한제국 식민지화를 단행하도록 하였다. 데라우치는 헌병경찰제를 강화하고 일반경찰제를 정비하였는데, 일제는 이미 1907년 10월부터 한일 경찰을 일원화하여 전국의 경찰 직무를 장악한 상태였다. 여기에 1910년 6월 각서를 교환하여 종래의 사법·경찰권 이외에 일반경찰권까지 탈취하였고, 8월 16일 비밀리에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합병조약안을 제시하고 수락할 것을 독촉하였으며, 같은 달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이에 합병조약이 조인되었다.

조약을 체결한 뒤에도 일제는 우리 민족의 저항을 두려워하여 당분간 발표를 유보하였다. 조약체결을 숨긴 채 정치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또 원로대신들을 연금한 뒤인 8월 29일에야 순종으로 하여금 양국()의 조칙을 내리도록 하였다. 8개조로 된 이 조약은 제1조에서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겨준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로써 519년을 이어온 조선은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우리민족은 일제의 식민 통치를 받게 되었다.

2010.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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