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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조선 영조] 사도세자의 일생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89,330 작성일2007.10.02

안녕하세요 .

사도세자를 소재로 제가 뭐좀 할려그러는데요...

도무지 자세한 자료를 찾기가 어려워서 지식인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

제가 지금 찾고있는 사도세자에 대한 자료는요 .

사도세자의 어머니 , (아버지 영조 ) , 사도세자가 태어난 날 , 아버지 영조와의 갈등 , 혜경궁 홍씨와의 만남 , 노론과 소론 , 아들 정조가 태어난 날 ,

사도세자가 가지고 있었던 병이나 증세 ( <- 여기 부분 자세히 부탁드립니다. ) 사도세자를 모함하거나 거짓으로 고발했던 사람들 , 사도세자가 뒤주에 갖혀서 죽은 원인들 .

 

그리고 사도세자가 몰래 궁을 탈출해서 전국을 유람했다고 들었는데요 ,

여기서 같이 동행했던 사람들이 있다면 해주시구요 , 사도세자의 전국 유람 이야기 자세히 해주세요 .

 

그리고 나머지 질문들도 상세히 해주셨으면 좋겠구요 .

지식인에 떠돌아다니는 글들을 무조건 퍼와서 답변해주시 마시구요 . ^^

손수 정성스럽게 써주시면 좋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수고들 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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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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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24위, 한국사 70위, 사회학 14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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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비극의 기원은 숙종시기입니다.

남인과 서인이 대립하던 숙종시기에 궁내에서의 두 세력의 대립 기추는 남인을 대표하는 장희빈과, 서인을 대표하는 인현왕후의 갈등이었죠.

숙종은 자신의 두여자를 매개로 남인과 서인을 번갈이 기용하며 왕권을 강화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말년에는 장희빈을 죽이고, 남인을 몰락시킴으로써 서인의 기득을 용인하여 주고, 남인의 비호를 받고 있던 세자(장희빈의 아들 후에 경종)를 배척하면서 그 비극이 시작된 것이죠.

숙종은 세자를 폐하고 최숙빈의 아들 연잉군과, 박명빈의 아들 연령군 중 하나를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었지만, 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서인들에게 세자가 아닌 연잉군과 연령군을 맡긴다는 유조를 남기고 승하합니다.

서인들은 이를 세자가 아닌 연잉군에게 보위를 넘기고자 하는 대왕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새로 등극한 세자 즉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기에 이릅니다.

서인들은 이 경종을 두고 다시 두파로 갈라지게 되는데.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는 온건 소론과, 경종을 왕으로 인정조차 하지 않던 강경 노론이었습니다.

경종은 등극하자마자 노론의 압력에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였고, 이듬해 왕세제에게 대리청정을 주청하는 노론의 요구에 이마저도 들어주게 됩니다.

갓 등극한 왕에게 후계자를 양자를 들이거나 하는것이 아닌 이복 아우를 왕세자도 아닌 왕세제로 책봉하게 한것은 명백하게 현왕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선언이었으며, 이어지는 대리청정의 요구는 현 왕에게서 나오는 왕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경종 등극 2년까지 왕세제 연잉군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던 노론에 맞서 소론이 반격을 시작하게 되는데,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 주장이 왕권을 무시한 반역이라 규정하여 노론 4대신을 탄핵한 신임사화(1722)가 그것입니다.

이 사화로 노론과 연잉군은 큰 고비를 겪게 되고, 소론이 잠시 득세하게 되지만, 아우를 사랑하는 경종의 마음을 움직인 연잉군은 목숨을 보존하게 되고, 2년 뒤인 1724년 경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연잉군은 영조로서 등극하게 됩니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을 똑같이 기용하는 탕평을 실시하게 되는데, 그의 마음은 당연히 그와 생사를 같이 했던 노론과 함께 하였고, 소론은 언제나 그의 목숨을 위협했던 신임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인식되게 됩니다.

영조가 등극하고 25년 뒤, 장자인 효장세자가 사망한지 꼭 7년만에 외아들 사도세자가 태어납니다.

영조는 늦게 본 늦둥이 인데다, 외아들인 사도세자를 너무도 사랑하여, 어린 시절부터 그의 총명함을 왕자의 재능이라며 추켜 세웠고, 소론과 노론 역시 유일한 왕의 후계자를 아꼈습니다.

사도세자는 자라면서 정치의 한가운데에서 왕인 영조와 신하인 노론과 소론의 힘겨루기를 지켜보았고, 노론과 소론이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때마다 펼쳐지는 양위소동에서 영문도 모르고 석고대죄 할수 밖에 없었으니...

영조와 야당파가 주연하는 정치적쇼에서 상당히 비중있는 조연을 담당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이해할수 없는 사건의 반복은 세자로 하여금 근본적 원인을 파헤치게 만들었고, 그 의문은 소론과 노론에 대한 관계와 영조와 숙부인 경종의 관계를 알게 되면서 노론에 대한 반감으로 커져 가게 되었으며, 영조가 툭하면 양위소동을 벌이며 경종이 자신을 대단히 사랑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며, 자신의 아버지가 정말로 숙부(경종)를 독살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됩니다.

사도세자의 이런 반노론 성향은 노론은 물론이고 노론의 힘으로 왕위에 오를수 있었던 영조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고, 이후 세자의 모든 정치적 행보는 영조에게는 감시해야 마땅한 대상이 될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도세자가 사망한 것은 1762년으로 그의 나이 28세 무렵이었습니다. 왕세자로서, 후의 왕으로서의 기량과 도량이 이미 현왕인 영조를 뛰어 넘어 백성으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었으며, 노론을 견재하고 소론과 남인을 신임하던 사도세자의 죽음은 어쩌면 10년 전 그의 적자인 산(혜경궁 홍씨 소생의 차자, 후의 정조. 사도세자에게는 그 말고도 후궁 둘에게서 아들 셋을 더 봄)이 태어나면서 예견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애초에 후계자가 없는 왕은 그 기반이 취약할 뿐더러, 과거 신임사화때 목숨을 부지할수 있었던 이유도, 경종을 제외하고는 효종, 현종, 숙종의 삼종의 혈맥(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의 정당성과, 인조의 장자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후계를 이은 효종의 정통성에 기반함)을 이은 자손이 연잉군(영조) 밖에 없었떤 이유가 컸던 관계로..(당시 또다른 형제는 연령군은 후사 없이 사망)

영조에게 왕권의 뿌리이자 자신이 왕이 될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자신이 삼종의 혈맥을 잇는 유일한 왕손이라는 것 뿐이었습니다.

이제 자신의 아들이 사도세자 밖에 없는 상황에서 만약 세자가 적장손 산과 후궁에게서 아들을 보지 못했다면, 사도세자는 어쩌면 영조의 유일한 후계자로서 목숨을 부지 할수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영조에게 사도세자의 대안으로 어린 왕세손이 있었던 것은 오히려 아들 사도세자의 목숨을 재촉하게 되었고, 결국 사도세자는 그렇게 뒤주에 갖혀 너무 뛰어난 왕재이고, 노론을 신임하지 않았다는 묵시적 죄목으로 살해당하게 됩니다.

이후 노론은 다시 자신들이 죽인 아버지의 아들인 왕세손 산을 죽이려 들지만, 이번에는 영조가 왕세손을 보호하게 되고, 왕세손 산은 할어버지의 비호아래 무사히 조선조 22대 왕 정조로 등극할수 있게 됩니다.

정조 등극후 노론은 몸을 사릴수 밖에 없었지만, 정조 또한 아버지의 비극에서 원수는 기억하되 조급함은 금물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고, 그렇게 정조 재위 24년 동안 정조의 견제속에 활동을 할 수 없었던 노론은 정조의 아들 순조의 등극 이후(순조의 부인이 노론이었습니다. 이는 노론을 제대로 견제할수 있다는 정조의 자신감이 지나쳤던 결과로 그의 최대 실수 중 하나가 됩니다) 다시 기지개를 펴게 되니, 조선왕조의 비극 역시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듯 합니다.
(당시 득세한 노론중 하나가 바로 후일의 안동김씨 일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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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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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전주(), 이름은 이선(), 자는 윤관(), 호는 의재()이다. 조선 후기 영조의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영빈() 이씨()이며 부인은 영의정 홍봉한()의 딸 혜경궁() 홍씨()이다.

이복형인 효장세자[, 후에 진종()으로 추존됨]가 일찍 죽고 난 후 태어난지 1년만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0세에 혜경궁 홍씨와 결혼하였다. 어려서는 학문을 열심히 하여 자신이 지은 시문을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아주 총명하였다. 세자 시절에는 소론 계열의 학자들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10세 때는 경종 때 발생한 신임옥사() 사건을 노론들이 잘못 처결하였다고 비판하여 일찍부터 노론의 미움을 받을 빌미를 제공하였다. 
 
1749년(영조 25) 15세가 되던 해 영조의 명을 받고 서정()을 대리하게 되었을 때 세자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경우 이미 정권을 장악한 자신들의 입지가 위축될 것을 우려한 노론들은 정순왕후() 김씨와 함께 그의 잘못을 영조에게 과대포장하여 무고하는 등 세자의 지위에서 끌어 내리고자 하였다. 

아버지 영조를 무서워한 그는 궁궐 내에서 칼을 휘두르고, 함부로 궁녀를 죽이는가 하면,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평양을 갔다 오는 등 정신질환과 같은 비정상적인 행보를 계속하였다. 이후 1762년 김한구()와 그의 일파인 홍계희)·윤급() 등은 세자의 장인 영의정 홍봉한()이 크게 세력을 떨치자 그 일파를 몰아내고 세자를 폐위시키고자 윤급의 종 나경언()을 사주하여 세자의 비행동 10조목을 영조에 올리도록 하였다(나경언의 상변). 이 일로 인해 세자의 비행을 올린 나경언을 참형에 처하고, 영조는 세자를 불러 조목조목 다그치고 자결할 것을 명하였으며, 세자가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 속에 가두어 8일만에 굶어죽게 하였다. 
      
이후 영조는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고 그에게 사도의 시호를 내렸으며, 1777년(정조 1) 그의 아들인 정조가 왕위에 올라 장헌()으로 추존하고, 묘(:사당)를 경모궁, 묘()를 영우원이라 하였다. 정조는 동대문구 배봉산에 있던 묘를 수원으로 옮겨 영우원을 현륭원()이라 고쳤고, 자주 능행을 하면서 백성들에게 효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광무() 3년(1899)에는 장조()로 추존되었으며, 현륭원을 융릉()이라 고쳤다.(이게 이제 부터 이산에 나오는 거죠.)

 

세손 산蒜  영조 28년 9월 22일에 사도세자와 혜빈 홍씨의 아들로 태어 났다고 합니다 

원래 사도세자와 혜빈홍씨의 아들은 한명 더 있었다 영조는 그 아들의 이름을 직접 `정이`라고 지어주었다

정이는 100일 이 지나자 마자 왕세손으로 봉했다 잘 자라던 세손 정이가 갑자기 3살 이 되던해에

갑자기 아파 죽은 것이고요

그 슬픔에 사도세자는 혜빈홍씨의 방 에가서 위로를 해주었다 잠이안와 혜빈홍씨의 무릎에 누워 잠이 들자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 꿈을 적어 드리겠습니다

 

`사도세자가 방 안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문이 스르륵 열렸다.그러더니

방안으로  큰 용한마리가 들어왔다. 사도세자는 무서움에 뒤로 물러갔다

그러나 용의 사랑스러운 눈빛을 보자 무서움은 금방 사라지고 자신도 모르게

용의 곁으로 다가 갔다 가까이 다가가서 용을 살펴보니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었다 용은 사도세자에게 여의주를 떨어뜨려준 뒤 하늘로 올라갔다

사도세자는 여의주를떨어뜨리지 않을려고 팔을 꼭 껴안았다`

 

이게 정조가 태어나기전 태몽이죠

그리고는 그 꿈을 그림으로 그려 방안에 걸어놯다 그것을 보고 상궁이

태몽이라고 한것이다

 

2008.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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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조

역사와 지리 > 역사 > 한국사 > 조선시대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선(李煊),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이다. 조선 후기 영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영빈(映嬪) ...

출처 : 두산백과사전 EnCyber

.

2008.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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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kd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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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분이 정리를 참 잘하셨네요.

제가 한때 사도세자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책도 많이 읽었습니다.

사도세자후에 장조로 추존되셨죠

영조에게 사도세자는 아주 귀한 자식이였습니다. 늦둥이였죠 .

그래서 기대가 남달랐다고 합니다. 영조에게는 지대한 컴플렉스가 있었는데

바로 어머니가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 였죠. 그래서 등위 내내 그것이 스트레스였고 컴플렉스 였다고 하죠.

우선은 숙종때 부터 올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조 의 아버지 숙종에게는 당시 세자 경종이 있었고 연잉군(영조) 등등 자식분들이 계셨죠.

야사에보면 숙종이 경종을 좋아하지않았다고 합니다. 어머니때문이죠 그래서 그런지 경종은 즉위 당시부터 병을 달고 살았습니다.

경종과 연잉군 은 사이가 좋았는데, 경종이 병상으로 누워있자 연잉군이 음식을 들고 가서 먹은 그다음날 돌아가셨다는 야사의 한부분이 있습니다.

영조의 컴플렉스 두번째죠.

영조는 출생의 비천함과 경종 독살설에 연루 되어있구요.

자신의 이러한 컴플렉스를 사도세자가 해결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컷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사도세자는 글을 읽기보다는 사냥을 좋아하셨다고합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기대가 엇갈리기시작한거죠.

가장 결정적인 것은 사도세자가 큰아버지이신 경종의 죽음에대해서 그리고 자신을 유난히 예뻐했던 큰아버지에 대한 관심이 컷다고하죠.

사도세자가 경종의 능에 가는것에서 두사람의 불화는 붉어졌습니다.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 혜경궁홍씨 어머니인 영빈이씨 모두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이있습니다.

후에 정조가 등극하고 외할아버지인 홍봉한을 유배를 보내죠.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책을 자세히 얘기해논 책을 보면 잔인하다 싶을 정도죠

뒤주에 흙을 바르고 구멍을 막고 지푸라기로 그위를 덮고 궁에서 가장 햇볕에 잘드는 곳에 두었다고하죠

정말 힘드셨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사도세자의 희생이 있었기에 천재군주 정조가 있었던 거겠죠^^?

2008.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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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