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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한중록의 역사적사건좀 알려주세요~!!!
rock**** 조회수 3,111 작성일2005.01.04
역사적사건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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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사건(옥)이라 불리는 사건으로 정치적 목적이 강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집권층인 노론은 세자(장헌세자)가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면서 노론을 제외하고 다른 붕당을 등용시키자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당시 세자의 계비인 정순왕후 등을 통해 세자의 잘못을 영조에게 고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세자를 밀어내기 위한 모의를 합니다. 그것이 나경언의 상변으로 영조는 세자에게 자진하도록 명하지만 세자가 거부하자 직접 뒤주에 가두고 죽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론은 시파와 벽파로 분리되었고 후에 장헌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장헌세자 죽음에 깊숙히 관계한 노론 벽파를 배척하고 노론 시파와 남인을 주요 요직에 등용하여 정치를 펼쳤습니다.

PS..조선 후기로 가면서 붕당정치는 상대 붕당의 견제와 비판에서 변질되어 상대 붕당을 제거하고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한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같은 붕당 안에서도 온건파와 강경파가 세력을 나누는 게 비일비재하였습니다. 이런 붕당간의 다툼은 왕권의 약화를 초래하여 후에 세도정치로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 님께서 짧은 답변을 요구하셨는데 적다 보니 길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이 좀 중요한 사건이라서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조는 집권 후 정치, 사회적으로 많은 변화를 시도하였고 그러다 반대파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논란을 아직까지 일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2005.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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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

1795년(정조 19)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가 지은 회고록. 모두 4편으로 되어 있다. 제1편은 작자의 회갑해에 쓰여졌고, 나머지 세 편은 1801년(순조 1) ∼ 1805(순조 5) 사이에 쓰여졌다. 필사본 14종이 있으며, 국문본 · 한문본 · 국한문혼용본 등이 있다. 사본에 따라 ‘ 한듕록’·‘한듕만록’·‘읍혈록’ 등의 이칭이 있다. 4편의 종합본은 〈한듕록〉·〈한듕만록〉의 두 계통뿐이다.

제1편에서 혜경궁은 자신의 출생부터 어릴 때의 추억, 9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야기에서부터 이듬해 입궁하여 이후 50년간의 궁중생활을 회고하고 있다. 중도에 남편 사도세자의 비극에 대해서는 차마 말을 할 수 없다 하여 의식적으로 사건의 핵심을 회피한다. 그 대신 자신의 외로운 모습과 장례 후 시아버지 영조와 처음 만나는 극적인 장면의 이야기로 비약한다. 후반부에는 정적(政敵)들의 모함으로 아버지·삼촌·동생들이 화를 입게 된 전말이 기록되어 있다. 이 편은 화성행궁에서 열린 자신의 회갑연에서 만난 지친들의 이야기로 끝난다.

나머지 세 편은 순조 1년 5월 29일 동생 홍낙임( 洪樂任 )이 천주교 신자라는 죄목으로 사사(賜死)당한 뒤에 쓴 글이다.

제2편에서 혜경궁은 슬픔을 억누르고 시누이 화완옹주의 이야기를 서두로 정조가 초년에 어머니와 외가를 미워한 까닭은 이 옹주의 이간책 때문이라고 기록한다. 또 친정 멸문의 치명타가 된 홍인한사건(洪麟漢事件)의 배후에는 홍국영( 洪國榮 )의 개인적인 원한풀이가 보태졌다고 하면서 홍국영의 전횡과 세도를 폭로한다. 끝으로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가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나는 날을 꼭 생전에 볼 수 있도록 하늘에 축원하며 끝맺는다.

제3편은 제2편의 이듬해에 쓰여진 것으로 주제 역시 동일하다. 혜경궁은 하늘에 빌던 소극성에서 벗어나 13세의 어린 손자 순조에게 자신의 소원을 풀어달라고 애원한다. 정조가 어머니에게 얼마나 효성이 지극하였는지, 또 말년에는 외가에 대하여 많이 뉘우치고 갑자년에는 왕년에 외가에 내렸던 처분을 풀어주마고 언약하였다는 이야기를 기술하며 그 증거로 생전에 정조와 주고받은 대화를 인용하고 있다.

마지막 제4편에서는 사도세자가 당한 참변의 진상을 폭로한다. ‘ 을축 4월 일 ’ 이라는 간기가 있는데, 을축년은 순조 5년 정순왕후 ( 貞純王后 )가 돌아간 해이다. “ 임술년에 초잡아 두었으나 미처 뵈지 못하였더니 조상의 어떤 일을 자손이 모르는 것이 망극한 일 ” 이라는 서문이 있다.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비극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왕조의 나인이라 위세가 등등하였던 동궁나인(東宮內人)들과 세자 생모인 영빈(暎嬪)과의 불화로 영조의 발길이 동궁에서 멀어졌다. 때마침 영조가 병적으로 사랑하였던 화평옹주의 죽음으로 인하여 영조는 비탄으로 실의에 빠져 세자에게 더욱 무관심해졌다. 세자는 그 사이 공부에 태만하고 무예놀이를 즐겼다.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代理)를 시켰으나 성격차로 인하여 점점 더 세자를 미워하게 되었다. 세자는 부왕이 무서워 공포증과 강박증에 걸려, 마침내는 살인을 저지르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1762년(영조 38) 5월 나경언(羅景彦)의 고변과 영빈의 종용으로 왕은 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9일 만에 목숨이 끊어지게 하였다. 혜경궁은 영조가 세자를 처분한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고, 뒤주의 착상은 영조 자신이 한 것이지 홍봉한( 洪鳳漢 )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임오화변 이후 종래의 노소당파가 그 찬반을 놓고 시파 ( 時派 )와 벽파 ( 僻派 )로 갈라져서 세자에 동정하는 시파들이 홍봉한을 공격하며 뒤주의 착상을 그가 제공하였다고 모함하였기 때문이다. 작자는 양쪽 의론이 다 당치 않다고 반박하면서 “ 이 말하는 놈은 영조께 충절인가 세자께 충절인가. ” 라며 분노한다.

제1편은 혜경궁의 회갑해(정조 19)에 친정 조카에게 내린 순수한 회고록이다. 나머지 세 편은 순조에게 보일 목적으로 친정의 억울한 죄명을 자세히 파헤친 일종의 해명서이다. 그 골자가 되는 세 사건은 영조 46년(1770)에서 정조 2년(1778) 사이에 왕비(貞純王后)의 친정 경주 김씨와 전 세자빈의 친정 풍산 홍씨의 정권다툼으로 작자의 아버지와 아들이 화를 당한 일을 말한다. 즉, 한유(韓鍮)의 상소로 아버지 홍봉한이 실각하고, 삼촌 홍인한과 동생 홍낙임이 사사되는 원인이 된 정조초, 이른바 정유역변의 연루되어 있다는 혐의를 해명한 것이다. 그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사도세자 사건과 관련된 홍봉한 배후설이다.

홍봉한은 당시 좌의정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도의적인 책임을 넘어 뒤주를 바쳤다는 혐의까지 받았다. 제4편에서 작자가 차마 말하고 싶지 않은 궁중비사(宮中 煉 史)의 내막을 폭로한 것은 아버지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공주의 후예로 명문가인 친정이 자기 때문에 망하였다는 죄책감으로 71세 노령에도 무서운 집념으로 써낸 것이다.

〈한중록〉은 역사적 인물의 글이라는 점에서, 더욱이 그가 비빈(妃嬪)이라는 사실에서, 정계야화로서 역사의 보조자료가 된다. 임오화변의 이유 및 홍봉한일가에 대한 사관을 재검토하는 데 도움을 주는 실기문학이다. 또한, 이 작품은 여류문학, 특히 궁중문학이라는 점에서 궁중용어, 궁중풍속 등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다.

〈 한중록 〉 은 소설로 볼 수 있을 만큼 문장이 사실적이고 박진감이 있으며, 치렁치렁한 문체는 옛 귀인 ( 貴人 )들의 전아한 품위를 풍기고 경어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작자를 비롯하여 등장인물 가운데에서 전통사회의 규범적 여인상의 전형을 볼 수 있다는 점 등으로 이 작품은 우리 고전문학의 백미라 일컬어진다.

≪ 참고문헌 ≫ 한듕록(金東旭 · 李秉岐, 民衆書館, 1961), 朝鮮朝女流文學의 연구(金用淑, 淑明女子大學校出版部, 1978), 閑中錄연구(金用淑, 한국연구원, 1983), 煉 藏 한듕록(金用淑, 淑明女子大學校出版部, 1981). (자료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요점정리>>

연대 : 조선 순조 5년(1805년) 작자 71세 때, 정조 19년(1796)
작자 :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 1735 ~ 1815)
갈래 : 한글 수필, 궁정 수필
형식 : 수기형식의 자전적 회고 수필록
표현 : 우아하고 품위 있는 표현
문체 : 궁중의 비극적 사건을 극적이고, 서사적으로 그린 내간체 문장의 전형
주제 : 남편이 뒤주 속에 갇히는 사도세자의 참변을 중심으로 한 파란만장한 인생 회고
의의
1. 계축일기, 인현왕후전과 함께 3대 궁정 수필의 하나이다.
2. 궁중 귀인의 고상하고도 우아한 표현, 절실하고 간곡한 묘사, 품위있는 궁중 문학의 백미이다.
3. 한글로 된 산문 문학으로서 국문학 사상으로서 국문학 사상 귀중한 가치를 가진다.
출전 : 필사본 한중만록
참고 : 한문본도 전해지는데 읍혈록(泣血錄)이라 함

구성

1 작품 1(61세 작) : 회갑때 친정 조카 홍수영의 요청으로 친정을 중심으로 기록해 준 것.
2 작품 2(67세 작) : 친정 몰락에 대한 자탄의 독백체로 기록한 것.
3 작품 3(68세 작) : 순조에게 바치느라고 쓴 것.
4 작품 4(71세 작) : 며느리 가순궁의 요청으로 순조에게 보이려고 쓴 것.

특징

1 사실적인 입장에서 친정과 궁중에 대해 쓴글로, 과장이나 가식이 없는 수필체의 글이다.
2 자신의 기구한 운명으로 말미암아 사실 그대로가 소설처럼 극적이고 입체적이어서 역사소설과 같은
흥미를 일으키는 글이다.
3 인생 무상의 관조를 자아내게 되어 인생의 파노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글이다.

줄거리

'한중록'은 모두 네 편으로 되어 있다.

제1편은 혜경궁 홍씨의 어린 시절과 세자빈이 된 이후 50년 간 궁궐에서 지낸 이야기를 하는데, 사도 세자의 비극은 말하지 않고 넘어간다.
제2편과 제3편은 친정쪽의 누명이 억울함을 말하는 내용이다.
제4편에서 비로소 사도 세자 참변의 진상이 기록되었다. 영조는 그가 사랑하던 화평 옹주의 죽음으로 세자에 무관심해지고, 그 사이 세자는 공부에 태만하고 무예 놀이를 즐기는가 하면, 서정(庶政)을 대리하게 하였으나 성격 차이로 부자 사이는 점점 더 벌어지게 된다. 마침내 세자는 부왕이 무서워 공포증과 강박증에 걸려 살인을 저지르고 방탕한 생활을 한다. 여기에 영조 38년(1762) 5월, 나경언(羅景彦)의 고변과 영빈의 종용으로 왕은 세자를 뒤주에 유폐시켜 9일 만에 절명하게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또한 영조가 세자를 처분한 것은 만부득이한 일이었고, 뒤주의 착상은 영조 자신이 한 것이지 친정 아버지인 홍봉한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한다. 여기 실은 것은 사도 세자가 뒤주에 들어 절명하는 처분이 내리는 과정과, 그 이후 자신의 처지를 기록한 부분이다. 이 글을 쓴 혜경궁 홍씨의 당시 나이는 71세였다.




도움 되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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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짧게줄여서 말하자면

조선시대 영조때일어난 일이며 사도세자를 뒷간에 가두어 죽인일을

말하는거입니다.. 너무 불쌍하죠..

2005.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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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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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도덕, 한국사, 다이어트, 운동기구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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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21대 왕이었던걸로 기억하는데요

영조가 자신의 아들이었던 사도세자를

신하들의 모함에 의해서 뒤주(쌀통같은것)에 가두어서 굶겨죽인 사건을

사도세자의 부인이었던 혜경궁홍씨가 한중록이라는 소설로 쓴거죠

2005.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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